安祿山(안록산)의 反亂(반란)과 杜甫(두보)
杜甫(두보)가 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자경부봉선현영회오백자)의 시를 지은 것이 天寶(천보) 14년(755) 11월 초였으며 같은 해 11월 9일 安祿山(안록산)은 范陽(범양)에서 군사를 일으켜 20만의 대군으로 남하하였다.
安祿山(안록산)은 원래 胡人(호인)이며 외모는 순해 보이나 내면은 간사해서, 천자나 貴妃(귀비)에게 아부를 잘 해서 그들의 환심을 사게 되어 결국 平群王(평군왕)으로 책봉되었는데 그 세력은 동북지방에서 대단하였다.
楊國忠(양국충)과는 사이가 나빠, 楊國忠(양국충)이 늘 安祿山(안록산)은 反意(반의)가 있다는 것을 말했으나 천자는 듣지 아니했다.
安祿山(안록산)은 중앙에서 오는 使者(사자)에게 늘 뇌물을 주어서, 항상 좋게만 보고하게 했는데, 세력이 강해지자 차차 교만해저서 천자가 소환해도 가지 않았다. 그러자 천자도 조금은 의심을 하게 되었는데, 그런 기미를 안 安祿山(안록산)은 간신 楊國忠(양국충)을 치라는 밀서를 천자로부터 몰래 받았다는 미명아래 군사를 일으켜 모반의 깃발을 들었다.
20만의 대군이라 칭하는 安祿山(안록산)의 반란군은 파죽지세로 남하여 河北(하북) 일대 전부를 큰 저항 없이 손에 넣었다.
그리고 黃河(황하) 北岸(북안)에 들어가서 12월에는 黃河(황하)를 건너 陳留(진류)와 鄭州(정주)를 함락시키고 13일에는 洛陽(낙양)을 함락 시켰다.
天寶(천보)15년 정월, 안록산은 洛陽(낙양)에서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며 國號(국호)를 大燕(대연)이라 하였다.
조정에서는 사방에 의병을 소집해서 안록산 토벌 작전을 폈으나 모두 반군에게 격파 당하고 말았다.
이때 杜甫(두보)는 가족을 찾아 먼저 奉先縣(봉선현)으로 갔다가 다시 장안에 가 있었는 듯 하지만, 潼關(동관)이 위험해 졌을 때, 長安(장안)도 불안해서, 5월에 다시 奉先(봉선)으로 가서 가족을 대리고 奉先(봉선) 북쪽에 있는 白水(백수)로 갔다. 백수에는 叔父(숙부)가 있었는데 6월 9일, 潼關(동관)이 함락되자 이어서 白水(백수)도 또한 위험해져서 두보는 다시 가족을 대리고 북쪽으로 피난길을 떠나야 했다.
계속 내리는 빗속을 玄宗(현종) 일행이 蜀(촉)으로 피난 가고 있을 때, 두보도 역시 빗길 속을 白水(백수)에서 鄜州(부주)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산길을 오르고 계곡을 내려가는 그 여행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연일 내리는 비로 길을 미끄럽고 아이들은 굶서 울고 돈은 없어서 밤에는 나무 밑에서 자야 했고, 나무 열매로 배를 채웠다. 그런 힘든 여행을 하는 도중에 同家窪(동가와)라는 곳에서 친구인 孫宰(손재)의 집에 들려 큰 신세를 지게 되었다.
다음 해 다시 그곳을 지날 때 彭衛行(팽위행)이라는 시를 읊었는데 지금 읽어도 매우 감명 깊은 감명을 안겨 준다.
鄜州(부주)에 도착한 杜甫(두보)는 가족을 그곳에 안착시키고, 자신은 다시 皇太子(황태자)가 靈武(영무)에서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 영무로 가려 길을 떠났다. 그러나 그 일대는 벌써 적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으므로 杜甫(두보)는 도중에서 적에게 잡혀 長安(장안)으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별로 신통한 관직도 갖지 못했던 杜甫(두보) 이었으므로 그저 장안에 억류만 당했을 뿐 별로 중요시 당하지도 않았다. 두보는 長安(장안) 胡塵(호진) 속에 몸을 움츠리고 大雲寺(대운사)의 승려 贊公(찬공)과 친구인 蘇端(소단) 등의 도움으로 망국의 한을 품고 슬픈 나날을 보내고 있어으며 늘 가족의 안부를 염려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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