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典(고전)의 吟味(음미)
貞夫人(정부인) 安東張氏(안동장씨) (4)
앞장까지는 정부인안동장씨의 글씨와 학문의 세계를 살펴보았지만 계속하여 두편의 시를 감상하고 또 장부인의 저술인 料理書(요리서)와 장부인의 만년을 더듬어 보도록 하겠다.
1. 張夫人의 晩年(만년) 詩 감상
만년이되어 孫子에게 주는 두편의 詩 中에 그 한 篇을 소개
하면
新歲作戒文(신세작계문)하니
汝志非今人(여지비금인)이라
童子已向學(동자기향학)하여
可成儒者眞(가성유자진)이러라.
새해에 경계하는 글을 지었다고하니
너의 뜻은 지금의 사람과는 다르구나.
어린아이 같았던 네가 학문을 지양하고 있다니 벌써 옳고 바른 선비가 되려고 하는구나.
이 詩에서 孫子에게 건전하게 살아가라는 격려와 바르게 커야한다는 훈계등 높은 인간정신이 풍겨나온 詩이기도하다.
또 張夫人이 73세가 되던 해에 자손과 더불어 기쁨을 노래했으니 이를 소개하면은
人生七十古來稀(인생칠십고래희)데
七十加三稀又稀(칠십가삼희우희)라
稀又稀中多男子(희우희중다남자)라
稀又稀中稀又稀(희우희중희우희)로다.
인생에 70을 사는것은 옛부터 드문 일이라 했는데
70나이에 세살을 더했으니 드문가운데 더 드문일이라 드문가운데 아들이 많으니 더욱 드문일
드문가운데 드문일이 또 겹쳐 드문 경사가 나에게 있 구나.
이詩의 이역을 한다면은 張夫人이 향년 83세로 타개하셨다고하니 10년전인 73세때 지은것으로 오래 살게된 기쁨과 아들 손자가 많은 자신의 기쁨을 詩로 담은 것이라고 하겠다.
2. 張夫人의 料理書(요리서)
張夫人이 지었다는 料理冊의 이름은 표지에 閨壼是議方(규곤시의방)이라써 있고 내용 첫머리에는 飮食知味方(음식지미방)이라 제목하고 글은 古文(고문)이고 궁체의 붓글씨이다.
이책이 발견되게된 내력을 말하면 1950년대 영양군 석보면 원리동에 있는 書庫(서고) 정리중에 나온것으로 전 경북대학교 金思燁(김사엽) 교수가 발견하여 경북대론문집에 자료로 실린것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다.
그후로 요리학을 전공하는 黃慧性(황혜성) 교수가 현대말로 옮기어 국내에 출판되었던것은 1980년이었다.
또 이책은 일본에서도 제일 동포 요리연구가 鄭大燮(정대섭)씨에 의해서 東洋文庫版(동양문고판) 1982.12.15 “朝鮮의 料理書”란 이름으로 조선조의 다른 2편의 요리책과 함께 편집되어 출판되었다고하며 이책은 동하세아에서도 이런 종류의 저술로서 부녀자가 이루게 된 것으로는 최초인것이라고한다.
여기에 대해서 한양대학의 이성우 교수가 “朝鮮時代조리서의 분석적연구”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1982년에 발표한바도 있다.
책의 내용을 말하면 軟鷄(연계)찜, 熊掌(곰발바닥), 野猪肉(야저육), 家猪肉(가저육), 개장, 개장고지느람이, 개장국느람이, 개장찜, 누른개삶는법, 개장곳는법, 석유탕(石榴湯), 수어만도, 수증계(水蒸鷄)등을 열거 할수있으며 그중에서 중요한것은 시집간 며느리가 시집 어른께 음식짓는 마음가짐을 가르친 것이다.
시집을 가게되면 그 사흘째되는날 주방에 들어가게 될것이다.
그러면 먼져 손을 씻고 국을 지어야 한다.
아직 시어머니의 식성을 익혀 알지 못하나 어린 시누이를 먼저 맛보게 하야야한다고 하셨다.
3. 張夫人의 만년과 葛庵(갈암)이 지은 張夫人行實記(장부인행실 기)
張夫人께서는 七賢子(칠현자)의 부덕을 지닌 어머니로서 세상에 알려진바 있으나 70을 넘기고 80세를 바라보는 말년에는 그렇게 어질고 높은 행실이 착한 학자로 알려진 徽逸(휘일)과 막내아들 雲逸(운일)과 두딸은 불행히도 어머니보다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자식을 먼져 저승으로 보내는 슬픔이 많았겠으나 남편과 남은 다른 자식을 위하여 의였한 높은 자애심과 인내로써 살아온 張夫人이야말로 만세의 귀감이 될것이다.
한편 남편이신 석계 이시명선생은 그에 앞서 3년전인 숙종 37년1674년 향년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셋째 아들 갈암선생의 공이 進宴(진연)의 벼슬에 오르니 나라에서도 그 은혜로 부인에게 쌀,콩,비단,무명등 식물을 내려주셨다.
상감께서는 嘉善大夫吏曹判書(가선대부이조판서)의 벼슬을 셋째 아들 갈암에게 내리니 夫人께서도 貞夫人의 賜號(사호)가 나라에서 내려졌다.
그러나 천명을 어이할수 없는지라 경신년 영조 16년 1740년 7월 7 일 갑오일에 石保(석보) 마을의 조그마한 집에서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버리고 張夫人은 눈을 감았다.
슬하에 七賢子(칠현자)를 두었으며 夫人은 하늘이주신 남다른 성품으로 거기에 더하기를 학문에 힘썼으며 착한일을 즐기고 의를 좋아하여 어려서 부터 의협심이 강하였다.
또 세상에 드문 예술적인 재질이있어 길이 후세에 남길 예술작품을 남기었으며 기기에다 料理하는 책까지 저술한 女人이라 이나라에 張夫人을 두고 그누구가 또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평범했으며 남에게 자신을 나타내고저 하지않앗다. 이나라의 훌륭한 여류시인 누구의 작품에 비겨도 손색 없는 높은 이상과 문학적감각이 풍기는 시를 남기면서 雅號(아호)나 別號(별호)도 없는 각박한 貞夫人張氏(정부인장씨)로써 그는 영원토록 우리 한국의 위대한 여인으로서 다시 우리들에게 알려지게 되는것이다.
張夫人의 셋째아들 갈암선생께서는 어머니 “張夫人行實記”를 찬하여 후손과 후대사람들에게 귀감이되고자 한것이라니 張夫人의 일대기를 엮은것이라 할것이다.
위에서 말한 張夫人이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한결같이 지켜왔음을 알도록 하는것도 오늘의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는 밑거름이 되리라 믿기때문입니다.
張夫人이 시집살이하던 경상북도의 산골 영양군 석보면 원리에 서있는 遺跡碑文(유적비문)의 내용을 일부 알아본다.
夫人께서는 학식과 덕행이 범인과는 비할바가 아닌 절인의 경지에 있으면서도 여성이기 때문에 숨기고 자제하시며 오직 희생적으로 三從之道(삼종지도)를 따라 至誠(지성)으로써 군자를 섬겨 부군의 학도를 도우셨으니 효제가 出天(출천)하셨고 공경함으로써 시부모를 받들었으며 慈愛(자애)와 규계로써 자녀를 양육하여 바른길로 계도하셨으니 현모요 위대한 교육자이셨으며 人愛(인애)로 비복을 다스리며 주휼로써 이웃사람을 돌보셨으니 훌륭한 인격자이셨다.
실로 부인의 덕행은 만세인류의 사표가 될것이다.
이토록 숭고하신 부인의 淑德懿行(숙덕의행)이 일찍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던것도 兒女子(아녀자)의 表彰(표창)이 분수가아니라는 당신의 겸양때문이었으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4. 結論(결론)
우리고장이 배출한 훌륭한 貞夫人(정부인) 安東張氏(안동장씨)에 대하여서 오래도록 살펴보았다.
夫人의 天才的인 두뇌와 지혜는 말할것도 없으며 가정생활은 물론 사회교화와 나라 사랑하는 애국심도 남달리 많았으니 위대한 여성 이름도 없는 장씨 그는 옛날 우리 한국의 어진 어머니의 표상이고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아내와 며느리의 귀감이 될것이며 선망의 대상이 아닐수가 없다.
만고에 빛을 던져준 효녀요. 현모량처로 우리 겨레의 여성운동가
로서 길이 그이름이 남을 이나라 애국자 장부인을 길이 추모하고 그 정신깊이 간직하여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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