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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 古典(고전)의 吟味(음미) 조상이 남긴 충언 (4)

청남

 

 

古典(고전)吟味(음미)

 

조상이 남긴 충언 (4)

 

 

계속하여 우리 조상의 명현들이 남긴 명언들을 듣고 생활에 표본으로 삼아 귀감이 되도록 한다.

 

1. 爲政者(위정자)善政篇(선정편)

 

소개하고자 하는 문장은 고려사에 수록된것으로 고려말 충신인 鄭圃隱 先生의 말씀을 살펴보면

 

爲天下國家者必先定大計大計末定이면 則人心疑貳 人心之疑百事之禍也니라.

해설

세상에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반드시 큰 계책을 정하여 야 한다. 큰 계책을 정하지 못하면 백성들의 마음이 의심 하게 되는데 백성들의 마음이 의심됨은 온갖일의 화근이 된다.

다시 이역하면 나라의 정책이 자리잡혀야 민심이 안정되고 온갖 일이 잘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정포은 선생은 공민왕때 장원급제로 벼슬에 오른 사람으로 昌王大提學 문하찬성을 지내고 공양왕때 이방원이 이끄는 무리들에게 선죽교에서 피살된사람으로 文忠公(문충공)諡號(시호)를 받았다.

 

鄭圃隱 先生이라면 不事二君의 충성심을 생각하게 하고 특히 충절의 정신이 담긴 시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시조를 소개하면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白骨塵土되어 넋이라도 있고없고

임향한 一片丹心이야 가실줄이이시랴.

이와같은 충성심이 흠뻑담긴 시조이다.

이것을 일명 정포은의 丹心歌(단심가)라고도 부릅니다.

이 시조를 한문형태로 기술하여 보면

 

此身死了死了一百番 更死了하여 白骨爲塵土되어 魂魄有也 라도 向主一片丹心이야 寧有改理也欽은져.

우리나라 시조 초창기 작이라 이두문이 혼잡되어 있음을 감지할수가있으며 결국 이방원이 지어서 보낸 시조의 답으로 보낸 글이라고 한다.

이방원은 후일 태종임금이 되었는데, 임금님으로서의 何如歌를 잠깐소개하면은

如此亦何如 如彼亦何리가

城隍堂後垣頹坭亦何如잇꼬

我輩若此爲하여 不死亦何如리라.

해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萬壽山 드렁청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와같이 얽히어 百年(간들)어떠하리.

이 시조의 뜻은 정포은의 마음을 떠보기 위한 글이라고 할수있다.

결국 고려가 어떻게 할수없이 망하게 되니 우리도 함께 뜻을 맞추워 조선왕조를 도와서 일해 보자는 뜻이 담긴 글이라할수있다.

그러나 정포은선생은 이에 동조하지 않고 죽엄으로써 그 절개를 지녔으며 여말 다사다난하던 때에 정승의 자리에 오른 선생께서는 아무리 큰일이라도 큰 유혹이라도 조용히 사리에 맞게 처결하였다.

돌아가신후 1517년 중종때 태학생의 상서에 의하여 문묘에 배향하고 또 묘에 비석을 세웠는데 고려때 벼슬만을쓰고 시호는 적지 않아 그가 두 왕조를 섬기지 않은 뜻을 분명하게 하였다 고한다.

선생의 학덕을 높이 받들고 계승하기 위하여 전국 13개의 서원에제향되었고 묘아래에 있는 永墓齋(영묘재), 영천의 臨皐書院(임고서원)등 몇 곳의 서원에서는 그의 초상을 봉안하고 있다.

 

다음은 麗末三隱(여말삼은)이라면 방금 말한 圃隱先生(포은선생)吉冶隱(길야은), 牧隱( 목은) 李穡先生(이색선생)의 말씀을 소개코자 한다.

當國家無事之時公鄕之言輕於鴻毛하고 及國家有事之 匹夫之言重於太山이니라.

해설

나라가 無事할때는 公卿(공경)들의 말도 기러기 털 보다 가볍게 생각하고 나라에 큰 일이 있을때는 필부의 말도 큰 산보다고 무겁게 여겨야 한다.

다시 이역을 하면 나라안이 평화로울때는 고관대작의 말이라도 대수롭지 않으나 나라가 큰일을 만났을때는 한 보잘것없는 백성의 말도 중요시 하여야 한다는 뜻이기도 한다.

이 문장은 고려사에 나오는 문구이지만 선생께서는 여말의 대학자로 자는 영숙이며 시호는 文正公이시다.

14세에 성균시에 급제하고 3년간 원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문과에 급제하여 공민왕때 성균대사성이되어 성리학을 일으키고 한산군에 피봉되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일어나자 후학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치는데 힘썼다고 한다.

위의 문장은 원나라 유학중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고향으로 돌아와서 상복을 입고 이어 상중이지만 공민왕에게 선정을 베풀도록 올린 글의 머리말이기도 한다.

그는 이때에 한방울 물과 한점의 티끌 같은 작은것도 크고 깊은 자료가 되고, 나무 하고 소 치는 아이들의 말이라도 성인들의 취하는바 되기도 하오니 만약 전하께서 신의 微誠(미성)을 굽어 채택하여 주시면 宗廟社稷(종묘사직)을 위하여 매우 多幸스러운 일이겠습니다.하고 서두에서 국정에 대한 토지제도, 조세, 국방, 교육, 인재등용 등에 관하여 진언하였다고 한다.

 

2. 柳西厓(유서애)先生名言(명언)

 

朝鮮朝宣祖때의 명 재상으로 활약하신 柳西厓 先生에 대한 말씀을 한 구절 소개한다.

養廉恥하여 以淸濁俗하고 明刑政하여 以保民生하고 倡學 하여 以振士風이니라.

해설

염치를 아는 마음을 길러 흐린 풍속을 깨끗하게 하고 형 정을 밝게 하여 백성의 삶을 보전하게 하고 학술을 창조 하여 선비의 기풍을 떨치게 해야한다.

이 말은 염치심을 기르고 형벌 정사를 밝게하고, 학술을 창도하여 흐린 풍속을 깨끗하게하고, 백성의 삶을 보전하게하고, 선비의 기풍을 떨치게 해야한다는 것으로 柳西厓(유서애) 선생이 부제학으로 있을때 선조대왕에게 열가지 정사에 관하여 진술하였는데, 이 말은 그때 제언한 세가지 일이다.

이 세가지 이외의 내용을 살펴보면, 성실한 덕을 닦아서 하늘의 뜻에 보답하고, 내외를 엄격히하여 대궐의 기틀을 정숙하게하고, 다스리는 체통을 심하게 하여 기강을 세우도록 하고, 공론을 중히 하여 조정기강을 정연하게 하고, 명분과 실제를 잘 조사하여 인재를 등용하도록 하고, 공명정대한 길을 넓혀 잘못된 점을 맞도록 할것이라는 내용이다.

 

또 다른 한 어른의 말씀을 소개드리면

四方之本在朝廷이요 朝廷之本在人主一心이니라.

해설

이 글은 朝鮮朝 中宗文臣으로 는 중허 冲齋(충재) 權撥선생의 말로 그가 경상감사로 임명 되었을때 中宗이 당부한 말로 영남지방은 요즘 흉년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굶주리고 사 방으로 흐터져서 헤맨다 하니 경은 진심으로 백성들을 안 정시키라.

고 하였다.

이에 충재선생께서 대답한 말씀으로써

사방의 근본은 조정에 달려있고 조정의 근본은 임금의 한 마음에 달려있다.

라고한 글로써 평화로운 세상은 조정이 근본이되고 조정의 근본은 임금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權冲齋先生(권충재선생)은 도량이 뛰어낙 學問人格을 닦는데 힘써 自警篇近思錄같은 책은 늘 품속에 넣고 있었다.

그는 평소에는 몸에 온화한 기운이 넘쳤으나 이해관계나 사변에 이르러서는 의리에 결부시켜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祖上(조상)이 남긴 충언 (5)

 

명현들의 명언을 들어보는 마지막 장이 되겠다.

우리 선조들이 나라를 수호하는일에 관하여 어떤 말을 남겼는가를 알아보고 이 정신을 본받아서, 더좋은 나라로 민족의 문화를 잘 발전시켜 나가야 할것이다.

 

1. 護國精神(호국정신)名言(명언)

 

호국을 위한 名言을 소개한다.

平生爲國之心正今日이라 縱彼不救我라도 我敢不以死 報國家乎?

해설

평생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오늘같은 어려움을 이겨내는 데 달려있다. 비록 저들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더라도 내 감히 죽음으로서 나라의 은혜를 보답하지 않으랴?

결국 이말은 국난극복을 위해서는 어떤 어려움을 겪더라도 신명을 바치는것이 국민된 올바른 도리라는 뜻이다.

이 문장은 國朝人物考(국조인물고)에 실려있는 글로써, 朝鮮朝 宣祖때 장군으로 자는 신경, 시호는 忠顯公(충현공)으로 武科及第하고 벼슬을하여 선봉장 중군장 등을지낸 安弘國(안홍국)이라고하는 분의 글이다.

안홍국은 충용이 장한 인품을 갖추어 임진왜란때는 선전관으로 선조를 호종하며 용만까지 갔고, 어명을 받들어 영흥에 있는 임해군에게 임금의 뜻을 전하고 삼령지방의 각진지를 순문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이때 통제사 이순신 장군은 그를 신임하여 장군대신 중책을 맡기기도 하고 선봉장으로 왜적을 무찌르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丁西再亂(정서재란)때 그는 정병 30척을 거느리고 적의 소굴을 소탕하러 가서 크게 무찔었으나 적은 군사로 반격하여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 중과부적으로 전세가 위급하게되자 후퇴하게 하자는 사람이 많았으나

안된다 적이 눈앞에 있는데 물러서면 언제 승리하랴? 너희들은 한 마음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하였다.

그리고 이어 장병들에게 전비를 가다듬게 하였다.

는 역전고투하여 적을 무찔러 크게 승리하고 적을 추격하다가 유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하였다.

 

구한국말의 애국의사로 이등박문을 만주하루빈 역에서 저격한 安重根(안중근) 義士의 명언을 알아 본다.

大丈夫處世兮畜志當期러니 時造英雄兮英雄造時 北風其冷兮我血則熱이라 慷慨一去兮鼠賊必投 同胞兄弟兮毋忘功業하라 萬歲萬歲兮大韓獨立萬 萬歲.

해설

사나이 대장부로 세상에 태여나서 적을 무찌르려 의지를 쌓았더니 이제야 뜻한데로 좋은때를 만났구나.

때가 영웅을 만드는가? 영웅이 때를 만나는가? 북쪽바람 차기도 하나 내피는 뜨겁구나. 쌓였던 워한을 한번 털어 놓으면 어김없이 꼭 도적을 잡으리라. 우리 동포형제자매 들아, 이공업을 잊지말라 만세만세만세 대한독립만만세

이말은 안중근 선생이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이 하루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읊은 정기의 노래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적을 꼭 죽이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선생께서는 이등박문이 만주 하얼빈에 당도할 때 그는 단신으로 그 삼엄한 경비를 뚫고 들어가서 일곱발의 권총을 쏘아 적의 괴수를 죽이고 만만세를 외친 다음 여순감옥에 끌려가서 끝까지 대한독립국 남아의 정당한 거사를 주창하고 의로운 일생을 마쳤다.

안중근 의사께서 사형이 확정되고 형집행의 나날을 보내면서 옥중에서 글을 쓰셨다고 하니 어떤 명언을 남겼는지 알아 본다.

見危授命하고 見利思義하라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이니 .

庚戌 三月 於旅順 獄中 大韓國人 安中根書

해설

국가의 존망의 위기를 보면은 천명을 받은것 같이 생각하고 이익을 보면은 먼져 정의를 생각하라는 뜻이고 또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아니하면은 입속에 까시가 생길것이다.

이글은 한일합방이 되던 경술년 삼월 여순 감옥 속에서 대한민국사람 안중근의사가 쓰다,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문구는 어느곳에서나 쉽게 찾아볼수있으며 우리 국민들은 이 안중근 의사가 남긴 명언에서 애국심과 정의를 가슴 깊이 간직하고 각자가 맡은일에 충실하여야 하겠다.

 

국내외에서 민족정기를 들어내고 또 목숨을 초개같이 버려서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투쟁한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수가 없었다.

안중근의사에 이어서 李儁烈士(이준열사)名言도 알아 본다.

 

韓國人之魂獨立自主之魂이요 同族愛護之魂이요 大義名 分之魂이요 一致團結之魂이요 建設開拓之魂이요 世界平和 之魂이요 投身成仁之魂也니라.

해설

한국사람의 혼은 독립자주의 혼이요, 동족애호의 혼이요, 크게 의로운 명분의 혼이요, 일치딘결의 혼이요, 건설개척의 혼이요, 세계평화의 혼이요, 내몸을 불살라 죽으면서도 정도를 이루는 혼이다.

 

이 말은 우리 민족의 혼을 곧 애국혼이니 이 정신을 어느 누국도 뺏거나 말살시키지 못할것이며 이 정신을 세계만방에 알리려는 뜻이기도하다.

이준선생은 구한국말의 순국렬사로 호는 일성, 한일협약의 체결로 국권이 침해되자 평리원 검사로 大韓自治會(대한자치회), 萬國靑年會(만국청년회), 國民敎育會(국민교육회)등을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일의키고 또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高宗皇帝의 밀사로 화란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일본과의 협약이 무효임을 주창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결했다.

이로써 세계 사람들은 일본의 만행에 대하여 부당함을 외치는 대한제국의 국민정신을 알게 되었고, 우리의 울분을 세계에 나타내게된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2. 分守에 넘치지 않는 삶

 

新羅名僧(명승)으로 화엄종을 創始하고 文武王나라에 유학하여 佛敎융성에 힘써온 義相組師(의상조사)의 말씀을 한 句節소개하겠다.

雖在草野茅室이라도 行正道則福業하고 荀爲不然 이면 雖勞作城이라도 亦無所益이니라

해설

이 글은 三國史記에 실려있는 글이다.

비록 시골의 초가집에서 살더라도 올바른 일을 행하면 복 된일이 오래가고 진실로 그렇지 않으면 비록수고롭게 을 쌓드라도 또한 이로울것이 없을것이다.

이 말의 뜻은 올바른 정사를 행하면 어떤곳에서 살아도 복을 누릴수가 있지만은 그렇지 않으면 성을 짓고 살아도 이로움이 없다는 뜻으로 선정은 궁성을 짓고 호화롭게 사는 것보다 백성을 평안히 살게하자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이 즉위한지 21년되는해 정월초하룻날 온종일 암흑처럼 어두웠고 5월부터 6월까지는 하늘의 변괴가 잇달았다.

그래서 임금께서는 서울을 새로 건설하려 생각하고 그 의도를 의상조사에게 말하자 그는 윗글과같이 진언하고 그일을 못하게 한것이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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