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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 古典(고전)의 吟味(음미) 栗谷先生(율곡선생)의 생애와 학문

청남

 

 

古典(고전)吟味(음미)

 

栗谷先生(율곡선생)의 생애와 학문

 

 

栗谷先生(율곡선생)에 대한 傳記(전기)學問(학문)그리고 後世에 남긴 귀감이 될수있는 名言(명언)을 알아본다.

 

1. 李栗谷先生家系一生

 

栗谷先生(율곡선생)朝鮮朝 11中宗 31년 병신년 서기 15361226일에 그의 외가인 강원도 강능 북평촌에서 出生하였으니 李退溪先生(이퇴계선생)보다는 35년의 後生(후생)이 되는 것이다.

李氏()는 귀고리 이()叔獻(숙헌), 兒名(아명)見龍(현룡), 雅號(아호)栗谷(율곡), 石潭(석담), 愚齋(우재)로 불렀다.

貫鄕(관향)德水人(덕수인)으로 始祖(시조) 敦守(돈수)高麗朝(고려조)中郞將(중랑장)이요 대대로 관계에 진출하여 그이름을 떨친명문 집안이었다.

栗谷(율곡)의 조부는 左參贊(좌참찬)을 지냈으며 아버지 元秀(원수)司憲府(사헌부) 監察(감찰)로 그 후에는 左贊成(좌찬성)을 지냈고 外祖父(외조부)已卯名賢(기묘명현)申命和(신명화)요 어머니는 바로 당대의 여류명인 師任堂(사임당) 申氏(신씨)였다.

이와같이 本家外家名門의 후예인 栗谷은 어릴때부터 聰明賢碩(총명현석)하여 3-4세가 되였을때 벌써 말과 문자를 배우기 시작했다한다.

여섯살에 어머니를 따라 외가인 강능에서 본가인 서울로 돌아와 어머니의 깊은 배려 밑에서 많은 감화를 받은 것이다.

어머니 師任堂(사임당)經書(경서)와 시문에 통달하였고 부덕이 이미 世上에 널리 알려진 婦人이었다.

율곡은 7-8에 시문에서 이름이 있었고 13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여 더욱 학문에 정진하였다.

율곡이 조상대대의 고향인 京畿道坡州(경기도파주)를 찾아 생활하게된 것은 여덟 살때 였는데 어느날 저녁 마을 뒷산 花石亭(화석정) 정자에 올라가 지은 시는 우리 문학사에 남을 만한 걸작이라고 한다.

율곡선생께서 여덟살에 지었다는 시를 소개한다.

林亭秋已晩(임정추이만)하니

騷客意無窮(소객의무궁)이라

遠水連天碧(원수연천벽)하고

霜楓向日紅(상풍향일홍)하니

山吐孤輪月(산토고륜월)이요

江含萬里風(강함만리풍)이라.

塞鴻何處去(새홍하처거)

聲斷暮雲中(성단모운중)이로다.

해설

숲속외로운 亭子에 가을은 이미 늦어가는데

詩人의 회포 다할길 없어라.

멀리 보이는 저 강물은 하늘에 닿은듯이 푸르고

서리맞은 단풍은 햇볕받아 붉었구나

산은 외로운 둥근달 토해내고

강은 萬里에 바람을 먹음었구나

저 변방의기러기는 어디로가는가

애잔한 울음소리 저녁 구름속으로 끊어져 버리네.

 

엄격한 정형시의 격식을 아주 성실하게 지키면서 자연 정경과 마음속의 감정을 그림으로 그린듯이 나타내고 있는것을 알 수있다.

특히 구절의 대구는 절묘하기 이를데가 없다.

여덟 살 소년의 작품으로는 믿기 어려운 시라고 할수있다.

천재소년인 율곡이 어릴때 자란 주위환경과 천부의 자질을 가졌음을 찾아볼수 있다.

강릉에서 태여난 율곡의 태몽을 들어보면 동해바닷가를 거닐려니 파아란 물속에서 선녀 한분이 사내아이를 안고 나오는데 선녀는 그 사내 아이를 사임당의 품속에 안겨주는 것이었다.

이꿈을 꾸고서 사임당이 태기가 있었고 이어서 율곡을 낳았다고한다.

아기를 낳는 날 새벽에도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한다.

검은 용이 동해바다로부터 날라오더니 침실로 왔어 서리었고 이윽고 아기를 낳았으니 이가 곧 율곡이시다.

고로 아명을 현룡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율곡이 태여난 강능 외가를 烏竹軒(오죽헌)이라하고 율곡이 태여난 방을 夢龍室(몽룡실)-용꿈을 꾼방이라는 뜻-이라하는데 지금도 잘 보존되여있다.

선생은 경서만이 아니라 佛書도 탐독하여 因果應報(인과응보)佛說(불설)에서 色卽是空(색즉시공)”의 설에 이르기까지 많은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선생 16세되던 1552년 지극히 訓導(훈도)해주던 어머님인 申師任堂(신사임당)4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 율곡의 슬픔은 말 할수 없이 컸으며 이로부터 삼년동안 집에서 떠나지 않고 어머님의 상을 지켰던 것이다.

어머니의 상을 마친 율곡은 인생의 허무함과 대체로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디에서와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극도의 회의에 빠져들어서 선생 19세때 금강산으로 입산수도의 길을 떠났다.

산중의 승려와 교류하며 불경을 음미하고 선의 체험도 해보았으며 이때의 불경연구가 후일의 율곡학문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부인 못할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불과 일년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속세에 나와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고 정진했으며 23세 되던해 영남 예안으로 퇴계선생을 찾아 예방하고 도를 물은 후로는 더욱 깊이 느껴 주야로 경서에 매진하였다고한다.

이때 퇴계선생께서 율곡의 재질과 학문에 대하여 그의 문인인 趙月川에게 보면 서한에서

栗谷 그 사람이 명협 자못 記覽(기람)함이 많아 吾學(오학)에 뜻이 있으니 後生可畏(가외)하다고 말씀하셨다.

과연 율곡은 程朱(정주)學問으로 삼고 별로 가르침을 받는 스승도 없이 獨學으로 眞理實踐하고 聖人自期하면서 道學의 길로 깊이 스며들어갔다.

 

先生 23되던 겨울 別試及第하고 많은 試驗官을 놀라게 했으며 有名天道策(천도책)”에 대한 論文國內外에서 有名했던 것이다.

29文科壯元하여 호조좌랑을 初仕(초사)官界進出헤서, 해마다 昇進하여 內外重職을 역임했다.

外職으로 淸州牧使 黃海道 관찰사를 지냈고 內職으로는 校理(교리) ,承旨(승지), 부제학. 大司諫(대사간), 大提學(대제학), 호조, 병조,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外交界로는 書壯官으로 나라 서울에서 奉任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율곡의 생애는 學問과 진리의 世界에 있었으므로 매양 관직의 사퇴를 애걸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宣祖 234되던해 校理官職에서 製進(제진)東湖問答(동호문답)”宣祖 739右副承旨(우부승지)때에 올린 萬言封事(만언봉사)” 그다음해 弘文官 부제학으로 제진한 聖學輯要(성학집요)先生 47때에 우찬성으로 있으면서 봉교 製進(제진)人心道心說(인심도심설)과 같은 해에 兵書判書로서 제진한 時務六條啓(시무육조계) 그외에 호조판서 때의 經濟司設置(경제사설치)의 건의문이라던지 경연 석상에서의 養兵十萬論(양병십만론)主張은 모두가 그의 철학과 時務를 위한 有名著書言論이었다.

 

당논의 격화와 국사의 혼란에 크게 실망한 율곡은 이이상 더 官界에 있을 하등의 必要가 없다고여겨 서울에서 멀리떨어진 石泉(석천) 또는 石譚(석담)에서 宣祖 10년 그의나이가 42세되던 해 거처를 신축하고 형제와 자질을 여기에 모아 놓고 평소에 하고 싶었던교육을 시작한것이다.

율곡-은을 찾아오는 學生들을 위하여 隱屛精舍(은병정사)를 창건하고 學規擊蒙要訣(격몽요결)등을 지어 후학을 교훈했으며 鄕村社會를 위해 有志와 더불어 鄕約과 장학제도를 마련하여 실시하기도 했다.

이것이 이른바 海州鄕約이다.

이보다 앞서 淸州牧使로 있을때도 西原鄕約을 만들어 실시하기도 했다.

특히 海州鄕約은 그 規模細密하여 後日의 다른 鄕約의 전감이 되었던 것이다.

이같은 鄕里生活을 한지불과 一年餘에 다시 宣祖大王의 부름을 받아서 부득이 입궐했으나 進退가 무척 잦았던 것이다.

율곡이 晩年에 와서 다시 再任하게된 兵曹判書 在職時을 얻어 몹시 元氣가 없고 死境에 있을때 王命으로 東北 地方순무의 길을 떠나는 徐益(서익)”의 방문을 받고서 國防策略指示하기 위하여 執筆(집필)한 것이 저 有名六條方略(육조방략)”이다.

이것이 병환의 악화를 가져왔다.

오늘의 인사동 우거에서 世上을 떠났으니 향년이 49宣祖大王 17年 西紀 1584年 正月 16이었으며 謚號文成公이시다.

율곡의 서거가 알려지자 學界政界는 물론이요 宣祖大王도 율곡의 부음을 듣고 發聲痛哭(발성통곡) 했다고하니 朝野에서 그에대한 德望이 어느정도였는지를 가히 짐작할수가 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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