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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 古典(고전)의 吟味(음미) 金鶴峯(김학봉)선생의 생애와 학문

청남

 

 

古典(고전)吟味(음미)

 

           金鶴峯(김학봉)선생의 생애와 학문

 

 

안동이 배출한 名賢(명현) 鶴峯(학봉)선생에 대하여 선생의 문집이나 鶴峯선생 연구에 관한 문헌을 통하여서 알아본다.

 

1. 鶴峯(학봉)선생의 家系(가계)와 출생

 

선생의 ()誠一(정성성자.하나일자), ()士純(사순) ()鶴峯(학봉)이며 諡號(시호)文忠公(문충공), 本貫(본관)義城(의성)이시다.

中宗(중종)33연 서기1538126亥時(해시)安東郡(안동군) 臨河面(임하면) 川前(내앞)에서 출생하셨다.

선생의 칠대조는 工曹典書(공조전서)를 지냈으며 고조부 休溪公(휴계공)께서는 成三問( 성삼문) 河緯地(하위지)등과 同榜(동방)으로 大小科(대소과)에 올라 集賢殿(집현전)에서 문명이 높았다.

증조부님께서는 成均進士(성균진사)臨河縣(임하현)에 살던 吳氏(오씨)에 장가들어 비로소 이 내앞(川前)에 살게 되었다고 한다.

선생의 윗대는 靑溪公(청계공)으로, 中宗(중종) 20生員試(생원시)에 올라 太學(태학)에 들어가서 河西(하서) 金麟厚(김인후)선생과 같은 방에서 깊이 親交(친교)하였으니 당대의 두 名士(명사)文名(문명)으로 稱道(칭도)하였다.

靑溪公(청계공)은 다섯 아들을 낳았고, 모두가 大小科(대소과)에 올랐는데 선생은 넷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驪興閔氏(여흥민씨)左議政(좌의정)을 지낸 閔漁隱(민어은)五世孫女(오세손녀)이시다.

 

선생께서는 그 시기의 탁월한 학자이시며, 지극한 愛民(애민) 愛國者(애국자)이 셨고 임진왜란 당시 국토의 대부분이 왜적의 말발굽에 짓밟힐 때 御馬(어마)가 북방 변경으로 피난해 國命(국명)조차 받을 수 없는 상태에서도 嶺南右道(영남우도)의 백성을 격려하시어 동란초기의 빛나는 전승을 가져오게 하신 분이다.

 

2. 鶴峯(학봉) 선생의 略歷(약력)

 

선생님께서는 6세때에 孝經(효경)을 배웠다고 하며 9세때 어머님을 여의고 10세때에 아버지 靑溪公(청계공)께서 學堂(학당)에 보냈다.

선생은 유년시절에 지혜가 출중하고 뛰어난 두뇌는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지금도 안동지방에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16세때 文科(문과)에 올라 洪原縣監(홍원현감)이 되었고 18세에 安東權氏(안동권씨) 部將(부장) 德鳳公(덕봉공)의 외동딸에게 장가드신 뒤 順興(순흥) 紹修書院(소수서원)에 유학하여 글을 읽었으며, 그후 더욱 학문에 뜻을 두고 陶山(도산)으로가 退溪(퇴계)선생문하에서 글을 배우니, 함께 배우는 선비가운데 鶴峯(학봉)을 앞서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退溪(퇴계)先生께서는 鶴峯(학봉)을 칭찬하여 말씀하시기를 金士純(김사순)은 행실이 높고 학문이 정밀하니 나는 아직 그에 비길만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라고 극찬을 하였다 한다. 金士純(김사순),行高而學精(행고이학정),吾目中未見(오목중미견) ,其比(기비)

27세에 仲兄(중형) 雲巖公(운암공)과 아우 南嶽公(남악공)과 함께 同榜(동방)으로 司馬試(사마시)에 합격하는 영광을 갖어셨다.

이어서 3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史局(사국)에서 退溪先生史傳(퇴계선생사전)退溪先生言行錄(퇴계선생언행록)을 저술하고 최초로 端宗複位(단종복위)死六臣複爵(사육신복작)을 청하는 ()을 올렸다.

魯陵復位(노능복위)()하기가 선생께서 처음이셨고 뒤에도 이것이 의논의 기초가 되어 端宗(단종)이 복위되고 사육신이 複爵(복작)된 것이다.

正言(정언),修選(수찬), 刑兵吏曹(형병이조)佐郞(좌랑)을 역임하면서 直斥(직척)諫言(간언)을 주저하지 않으셨다.

40세에 중국의 大明會典(대명회전)朝鮮朝(조선조)宗系(종계)가 잘못 기록된 것을 고치기 위하여 書將官(서장관)으로 ()나라에 파견 국가와 왕실의 체통을 바로잡았다.

42세에 함경도 巡撫御使(순무어사), 46세에 黃海道(황해도) 巡撫御使(순무어사) 그해에 羅州牧使(나주목사)에 제수 되셨다.

大谷書院(대곡서원)을 창립하여 東邦五賢(동방오현)享祀(향사)하고 학풍을 진작시켰다.

53세때 선생은 일본 通信士(통신사)로 가셨다가 이듬해 2월에 귀국하였다. 그 헤 3월에 成均館(성균관) 大司成(대사성)에 이어 弘文館(홍문관) 副提學(부제학)이 되었다.

55세에 慶尙右兵使(경상우병사)가 되어 임지로 가던 중 倭敵(왜적)의 전초와 마주쳐서 이를 섬멸 적의 銳鋒(예봉)을 꺾고 왜군의 머리를 베어 장계와 함께 올렸다.

곧 이어 拿令(장령)이 내렸다는 전갈을 받자 선생은 왕명을 앉아 기다릴 수가 없다고 하며 급히 상경하셨다. 槐山(괴산)에서 宣傳官(선전관)라 마주치니 다시 招諭使(초유사)에 명하는 교지가 내려져 있었다.

이로부터 선생의 거룩한 구국항전이 시작되었다.

특히 7에 제1차 진주성의 勝捷(승첩), 10월의 진주성의 大捷(대첩)등의 혁혁한 勝利(승리)속에 불행히도 병을 얻어 선조26(1593) 429, 의병과 관군을 지휘하던 진주공관에서 殉國(순국)하시니 향년 56세로 숭고한 최후를 마치셨다.

 

3. 鶴峯(학봉)선생의 성품과 人間性(인간성)

 

선생님은 한마디로 말하여 대쪽같은 성품과 곧은 절개를 끝까지 고수하셨던 분이다.

한번은 宣祖(선조)임금이 經筵(경연)에서 卿等(경등)은 나를 옛날 제왕에 비교하면 어떤 임금에 견주겠는가?하니 모두 堯舜(요순) 같으신 성군이십니다, 라고 하셨다.

그런데 鶴峯(학봉)께서는 전하는 堯舜(요순)도 될 수 있고 桀紂(걸주)같은 폭군도 되실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은 얼굴을 붉히고는 堯舜(요순)桀紂(걸주)가 이와 같이 같은 ()인가?하므로 은 대답하기를 생각을 깊이 하면 賢人(현인)이되고 생각이 그르면 미친 사람이 된다(剋念作聖,罔念作狂)고 하였으니 전하께서는 天資(천자)高明(고명)하여 堯舜(요순)되기 어렵지 않으나 다만 스스로 어질게만 여기고 ()하는 말씀을 반대하니 ()하는 일을 반대하는 것이 桀紂(걸주)가 망한 까닭이 아닙니까?라고 한즉 임금은 낯 빛이 변해지면서 자세를 고치었고 經筵(경연)이 모두 벌벌 떨었다고 한다.

先生42세때인 선조 126월에 司憲府掌令(사헌부장령)이 되었는데 河源君(하원군)宗親(종친)이 있어 임금의 사랑만 믿고 범법을 자행하므로 그 종을 잡아 묶어놓고 엄하게 국문하니 그 말을 듣는 이가 모두 위태롭게 여겼으나 ()은 동요의 빛이 없었다.

임금이 싫어하는 顔色(안색)도 관계치 않고 直諫(직간)으로 탄핵하니 사람들은 殿上虎(전상호)대궐안의 호랑이라는 別號(별호)가 붙었다고 한다.

 

4. 임진왜란 중 진주성 大捷(대첩)에서 장열한 殉國(순국).

 

忠武公(충무공) 李舜臣(이순신) 장군이 閑山島(한산도)를 중심 하여 西海(서해)를 막고 鶴峯(학봉)선생이 진주성을 근거하여 육상을 지켰기에 호남과 호서의 함락을 면케하여 국가는 이 두 도를 믿어 일어날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란 발발부터 불리한 전국에 鶴峯(학봉)義兵指揮(의병지휘)가 대세를 만회하고 민족과 국가의 보위에 결정적인 몫을 다했다는 것이다.

임진년 105일부터 6일간에 걸친 진주성의 대승리는, 우리측의 기록으로 약 1,000명에서 3,000여명의 병력으로 적 병력 3만여명의 대군을 물리쳤다고 적었으며, 일본측은 이만병력으로서 경상감사 김사순(鶴峯)銳兵(예병) 2,000명으로 지키고있는 진주성을 공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甲午年(갑오년) 강화 때에 왜측은 진주성 싸움에 장수급으로 죽은 자가 3백명이고 군졸로 죽은 자가 삼만 명이나 된다고 했다.

실로 이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의 육상전 가운데서는 가장 치열했었고 또한 통쾌한 大勝戰場(대승전장) 인 것이다.

이와 같은 우국충절의 정신은 大笑軒(대소헌) 趙宗道(조종도)松巖(송암) 李魯(이노)와 더불어 눈물을 닦으면서 지은 三壯士詩(삼장사시) 속에서 진주성 死守(사수)의 굳은 신념을 찾아 볼 수가 있다.

참고로 이 시를 소개하면은 다음과 같다.

矗石樓中三壯士 一杯笑指長江水

長江之水流淊淊 波不渴兮魂不死 .

해석.

촉석루 다락에서 三壯士(삼장사) 마주앉아, 한잔 술로 웃으며 장강수를 가리킨다.

장강물은 넘쳐 흘러관데 물결이 마를 손가 넋인들 죽을 손가!

이 시를 읊으면서 진주성을 필수 하리라 다짐했던 것이다.

 

5 鶴峯(학봉)선생의 道學精神(도학정신)

 

鄭寒岡(정한강)선생이 ()鶴峯(학봉)선생의 墓榜石(묘방석)의 글에 충성은 社稷(사직)保全(보전)케 했으니 이름은 祖國歷史(조국역사)에 길이 실리리라. 일찍이 退溪(퇴계)先生()에 올라 心學(심학)要道(요도)를 들었고 德行(덕행)勳業(훈업)은 모두 넉넉히 千百代(천백대)에 빛나리라고 한 것으로 보아 大學者(대학자)로서 理論(이론)德行에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여 儒林(유림)에 전했건만 아쉬움은 임란중의 순국으로 학문상의 著作(저작)을 많이 남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전란 중에 쓴 글들이 있으나 망실이 많고 그중 남겨진 것 몇 편을 수집해서 鶴峯集(학봉집)으로 전할뿐이다.

 

선생의 문장이나 年譜(연보)에서 보면 그 ()文章이나 처세에서 吟風弄月(음풍농월)한 면을 찾기가 어렵다.

선생은 子姪(자질)에게나 門人(문인)들에게 바르게 곧게 살기만을 강조했던 것이다. 일찍이 이르기를 내 평생 한마디 말을 얻었으니,나의 허물을 나무라는 이 사람이 나의 스승이요 나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자는 나의 ()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寬弘(관홍)두자를 크게 써서 벽에 붙혀놓고 늘 보며 반성하여 좌우명으로 삼았다 한다.

 

6. 結論(결론)

 

선생은 대쪽같은 성품을 가지신 분이기도 하지만 백성을 내 자식과 같이 사랑하는 마음이 무척 강하셨던 분이셨다.

이는 鶴峯集(학봉집)에 있는 北征日記(북정일기)에 잘 나타나고 있으며 退溪先生門下(퇴계선생문하)에서 性理學的修養(성리학적수양)을 쌓아서 이를 人格化(인격화) 하시고 그 논리와 가치를 실현하는데 온힘을 기울였으므로 자연히 愛民(애민) 愛國的思想(애국적사상)과 특히 민주주의적 의식으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이러하셨기에 倭敵(왜적)과 싸움에서도 義兵抗爭(의병항쟁)을 기반으로 하는 民族的統一抗爭體制(민족적통일항쟁체제)를 구축하고 진전시켜 나아가기에 온힘을 바쳤던 것이다.

선생이 떠나신지 450여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건대 전란의 와중에서도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충성심과 희생정신은 모든 사람의 영원한 귀감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꿋꿋하고 의연하며 강직한 성품은 모든 사람들이 본받을 학자로서의 先公後私(선공후사)에 선비精神의 발휘라 할 수 있다.

숭고한 애국혼으로 나라를 사수하다가 순국하신 문무 겸전의 鶴峯(학봉)선생에 정신이야말로 고장의 자랑이요 민족정기로 길이 繼承해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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