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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 古典(고전)의 吟味(음미) 西厓(서애) 柳成龍(류성룡)선생의 생애와 학문

청남

 

 

古典(고전)吟味(음미)

 

西厓(서애) 柳成龍(류성룡)선생의 생애와 학문

 

조선중기의 문신인 그는 임진왜란 당시 民政(민정) 軍政(군정)의 최고관직을 지내면서 전시 조선을 이끌었고, 임진왜란으로 인해 위기에 빠진 조선왕조를 재정비·강화하기 위하여 時務策(시무책)을 제기한 인물이다.

유명한 하회마을이 고향인 국난당시의 명신인 그에 관해 알아본다.

 

그는 1542朝鮮朝(조선조) 中宗(중종) 37101丁丑(정축) 辰時(진시)義城縣(의성현) 沙村里(사촌리)에서 탄생하였다.

선생의 선대는 安東府(안동부) 豊山縣(풍산현) 사람이다.

6대조 典書公(전서공)이 처음으로 풍산현 서쪽 河隈村(하외촌)에 터를 잡았고, 의성은 선생의 외조부인 松隱處士(송은처사) 金公(김공 휘는 光粹)의 고향이 였다.

선생의 모가 선생을 임신 했을 때,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부인께서는 훌륭한 아들을 낳게 될 것이요.했다고하는 전설이 있다.

과연 꿈대로 아기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총명 충직하여 6살때 이미 大學(대학)을 배웠다고 한다.

22살때 陶山(도산)에 가서 退溪(퇴계)선생을 뵈옵고 그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이때 퇴계선생은 그를 한번 보고 기이하게 여겨 제자들에게 이 사람은 하늘이 낳은 사람이다.라고 크게 칭찬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공부를 하면서 선생의 유년시대는 시작 되었다.

 

1. 西厓(서애) 선생의 略歷(약력)

 

선생의 ( )成龍(성룡)이요 ()而見(이현), ()西厓(서애), 諡號(시호)文忠公(문충공), 본관은 豊山(풍산)이다.

선생은 4살때 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다고 한다. 앞에서 말한대로 6세에 大學(대학)을 배웠으며 8살에 孟子(맹자)를 읽었고, 13살때에 東學(동학)에서 中庸(중용)大學(대학)講讀(강독)하였다.

 

16세에 鄕試(향시)에 합격했다.

17세에 종실 廣平大君(광평대군)의 후예인 현감 李坰(이경)공의 딸과 결혼을 했다.

20세에 春秋(춘추)를 읽었다.

23세에 生員(생원) 시험에 장원급재하였고, 進士(진사)3등하였다.

24세에 太學(태학)에 들어가 선비의 학문과 정치의 기틀을 닦았음.

25세에 드디어 과거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았다.

承文院(승문원) 權知副正字(권지부정자)에 보직을 받았다.

그리고 이어서 藝文館(예문관) 檢閱(검열) 春秋館(춘추 ) 記事官(기사관)을 제수받았다 28살에 成均館 典籍 올라 工曹佐郞(공조좌랑)에 제수 되었다.

그해 10聖節使書狀官(성절사서상관)으로 명나라 수도 燕京(연경)에 가서 국위를 선양하였으며 이듬해 3월에 귀 , 弘文館(홍문관) 副修撰(부수찬)에 제수되어 임금님의 총애를 받았다.

이어 司諫院(사간원) 正言(정언)에 제수되었고 吏曹(이조) 佐郞(좌랑) 弘文館(홍문관) 修撰(수찬)이 되었다가 다시 曹佐郞(이조좌랑)이 되었다.

32세되던 15737월에 아버지 觀察公(관찰공)의 상을 당하여 여 러차래 임금의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시묘를 하였 .

36세에 弘文館(홍문관) 應敎(응교)에 제수되어 다시 조정으로 들어 갔다.

38세에 弘文館(홍문관) 直提學(직제학)에 제수 되고 그 뒤 通政大 (통정대부) 承政院(승정원) 同副承旨(동부승지) 知製敎 (지제교)經筵參贊官(경연참찬관) 春秋館修撰官(춘추관 수찬관)에 제수되었다.

39세에 弘文館(홍문관)副提學()부제학)에 제수되엇으나 乞養(걸양) 하니 특명으로 상주목사를 제수받았다.

40세에 다시 弘文館(홍문관)副提學(부제학)에 제수되어 또 조정으 로 들어갔다.

41세에 司諫院(사간원) 大司諫(대사간)에 제수 되었다가 다시 都承 (도승지)로 승진, 그후 嘉善大夫(가선대부) 司憲府(사헌 ) 大司憲(대사헌)으로 승진 했다.

42세에 함경도 觀察使(관찰사), 大司成(대사성)에 제수 어되었으나 사양하고 임지에 나가지 않앗다.

다시 경상도 觀察使(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거듭 사양했 는데도 임금의 윤허가 내리지 않아서 부임을 했다.

47세에 병조판서에 제수되어 임금의 부름을 받고 조정에 다시 돌 아가 藝文館(예문관) 提學(제학)을 겸하였다.

48세에 司憲府(사헌부) 대사헌에, 兵曹判書(병조판서)로 제수외 었다.

그해 7월에 부인 李氏(이씨)가 돌아갔다. 貞敬夫人(정경부 ) 이씨 를 군위에 장사지내고 선생께서는 다시 승진되어 大匡報國崇綠大夫(대광보국숭녹대부) 議政府(의정부) 右議 (우의정)에 제수 되었다.

50세에 특명으로 吏曹判書(이조판서)를 겸하라는 명을 받고 굳이 사양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이어사 右議政(우의정)에 승진 되었으며 7월에 특명으로 홍문관 大提學(대제학)을 겸하게 되었다.

51세되던(宣祖 20) 1587壬辰年(임진년)에 왜난이 일어났다.

그는 都體察使(도체찰사)에 제수 되어 난을 평정하기에 온 힘을 다하였으니, 이로부터 긴 7년 전쟁의 참상이 시작 되 었다.

어려운 국난 중에서도 그는 꾿꾿하게 왕명을 받들어 구국 의 일념 으로 항쟁하였고, 관군이 참패를 당하자 우국충 절에서 민중을 봉기시켜 분연히 의병을 일으켰을 뿐만아 니라 산속에서 수도하는 승려들까지 동원해서 僧兵(승병) 을 조직 구국대열에 나아가게 했으니 실로 우리 민족의 총궐기라고 할수 있다.

이러한 전쟁 중에 영의정에 제수되자 사양 하였는데, 윤허되지 않아 그 직책을 맡았다. 그런데 모함에 의거 벼슬에서 파직되는 변을 당했다.

그러나 그해 12월에 평안도 都體察使(도체찰사)에 배수되어 ()나라 提督(제독) 李如松(이여송)4만 대군을 거느리고 安州(안주)에 이르니 선생이 영접하여 병란의 일을 의논했다.

宣祖(선조) 26년 이후부터 임진왜란이 끝날때까지 영의정 겸 三南(삼남) 都體察使(도체찰사)로서 국가의 운명을 한몸에 지고, 충직하고 민첩한 정치수완을 발휘하여 전쟁을 슬리로 종식시켰다.

政敵(정적)北人(북인)의 공격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豊山(풍산) 河回(하회)로 돌아가 약 10년간의 전원생활에서 학문을 더욱더 높이 쌓았다.

하늘이 낸 사람,우리 민족의 태양과 같이 찬연히 빛난 대학자, 대 정치가, 대전략가이신 西厓(서애)선생은 1607宣祖(선조) 4056, 66세를 일기로 파란 많은 일생을 마치셨다.

 

2. 선생의 田園生活(전원생활)臨終時(임종시) 남긴 글.

 

西厓(서애)선생의 문집에 의해서 고찰해 보면, 宣祖(선조) 2859세때에, 파직된다고 하는 職牒(직첩)王命(왕명)을 받고 한수를 썼는데 그 글 속에서도 임금에 대한 충성심이 가득차 있음을 였볼 수가 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竹牕寒雪夜蕭蕭(죽창한설야소소)

千里楓宸夢裏遙(천리풍신몽리요)

白首從霑新雨路(백수종점신우로)

豈宜重誤聖明朝(기의중오성명조)

해석

대나무 바라지문에 찬눈 쓸쓸히 내리는 밤

천리 먼길에 궁궐 꿈속에서도 멀어라

벼슬없는 백수에 비록 새 임금님의 은혜는 입었지만

성스럽고 밝은 조정을 거듭 그르치랴.

임금님을 생각하는 애절한 심정과 사모하는 마음을 담고 있는 시구라 하겠다.

그리고 임종 때의 기록을 보면, 그 전날 밤에는 남의 부축을 기다리지 않고 홀로 일어나 앉아서

오늘은 정신이 환하여 병이 없던 때와 같다.라고 하시며 洪範九疇(홍범구주, 서경 주서)을 끝가지 외우셨다고 한다.

이날 辰時(진시) 초에 사람을 시켜 內醫(내의)를 맞아 오게 하였다.

內醫(내의)는 약을 다리느라 밖에 있었는데, 사람을 시켜 빨이 방에 드러 오게한 다음 그의 손을 잡고 마씀하시기를 멀리 까지 와서 병을 돌봐주시니 천은이 망극할 뿐이며, 그대의 수고 또한 많았다. 몇일이나 걸려야 서울로 올라 갈수 있겠는가?하시며 곧 명하여 () 중간에다가 자리를 깔고 거기로 옮겨 달라고 하셨다.

모시는 사람들이 움직이기 힘들고 병약한 선생을 염려하여 만류하였으나 궂이 듣지 아니하고 끝내 자리 가운데 앚은채로 북쪽을 향해 정좌하고 엄숙하게 서거하셨다.

선생이 일찌기 말씀하시기를 내가 평생에 세가지 한이 있는데, 君親(군친)의 은혜를 보답하지 못한 것이 한 가지 한이고, 爵位(작위)가 외람된데도 일찍이 물어나지 못한것이 둘째 한이며, 망령되어 도를 배울 뜻이 있으면서도 이루지 못한 것이 셋째 한이로다.라고 하셨다.

 

 

 

3. 西崖(서애) 선생의 저서

 

선생은 말년에(1604) 扈聖功臣(호성공신) 2등이 되고 다시 豊原府院君(풍원부원군)에 봉해졌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낙향하여 전원 생활을 하시며 학문을 닦고 후학을 길어내는 일에 힘을 쓰셨다.

저서는 비록 많지 않지만 宰相(재상)으로서의 업적과 전해진 著述(저술)()나라의 范仲淹(범중엄), 史馬光(사마광)같은 분들과 앞뒤를 겨룰 만하였으니, 그의 문장속에는 태산 같은 기상이 엉키고 서리어 빛나는 구술같으며, 위대한 업적은 국가를 보필하는 근간이 되었으며, 화려한 문장은 국가의 문화를 크게 발전 시켰다.

대강의 저서를 열거하면, 西厓集(서애집), 懲毖錄(징비록), 愼終錄(신종록), 永慕錄(영모록), 觀化錄(관화록), 雲巖雜記(운암잡기)등이 전해지고 이 외에 詩文(시문)이 적지 안았으나 임진란 때 兵火(병화)로 블타 머렸다고한다.

 

4. 壬辰倭亂(임진왜란)의 생생한 기록인 懲毖錄(징비록)

 

懲毖錄(징비록)를 저술하게 된 동기와 이 책의 개요를 알아보면,懲毖錄(징비록)西厓(서애)선생께서 壬亂(임란) 丁酉倭亂(정유왜란)의 사실을 사건 중심으로 정리하여 저슬한 귀중한 문헌이라 하겠다.

선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정부의 요직에 있었고, 왜란 중에는 좌의정에서 영의정으로 또 都体察使(도체찰사)의 중책을 모두 맡아서 정치적 군사적 경재적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그때의 모든 일들은 말년의 전원생활을 하면서, 7년간의 왜적 침해로 인한 국난극복의 처참한 사실을 회고하고 지난일을 징계하면서 뒷날의 근심거리를 삼가한다.라는 듯에서 저술한 책이 懲毖錄(징비록)이다.

 

懲毖(징비)의 출처를 보면 詩經(시경) 周頌(주송) 小毖篇(소비편)予其懲(여기징)이라 而毖後患(이비후환)라는 문장에서 그 의의를 찾아 볼수 있다.

 

懲毖錄(징비록)은 상하 2권과 錄後雜記(녹후잡기)로 마련된 2권과, 이것을 포함한 16권의 책으로되어 있는데, 懲毖錄(징비록)에는 모두 두가지 종류가 있다.

이것은 懲毖錄(징비록) 2권과 芹曝集(근포집) 3, 辰巳錄(진사록) 9, 軍門騰錄(군문등록) 2, 錄後雜記 2권 을 합한 것인데, 이것은 軍事機務(군사기무)에 관한 箚子(차자), 啓辭(계사), 狀啓(장계) 文移(문이)등을 모아서 정리한 16권의 책으로 곧 일반적으로 말하는 懲毖錄(징비록)이라 할수 있다.

 

箚子(차자), 啓辭(계사), 狀啓(장계) 文移(문이)라는 용어는 군사 용어로서 이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箚子(차자)는 간단한 서기의 상소문을 말한다.

啓辭(계사)는 죄를 논할 때 임금님에게 올리는 글을 말한다.

狀啓(장계)는 책임을 맡고 있는 관리가 임금의 명을 받들고 지방에 나가 민정을 살핀 결과를 글로 써서 올리는 ()를 말한다.

文移(문이)란 상급관청에서 하급관청에 이첩하는 지시문을 말한다.

 

懲毖錄(징비록)의 내용에 대한 가치로 말하면, 懲毖錄(징비록)壬辰(임진丁酉倭亂(정유왜란)의 생생한 사료이며 그때당시의 문물과 제도를 연구할수 있는 귀중한 문헌이다.

뿐만 아니고 후륭한 전쟁문학이라고 할수 있는 귀중한 고전이다.

 

懲毖錄(징비록)를 읽으므로서 나라가 힘이 없고 국방이 미약하면 외적의 침략을 당할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고, 또한 거족적으로 단결하면 아무리 사나운 적이라도 물리 칠수 있다는 신념을 체득 할수 있다.

懲毖錄(징비록)을 읽으므로서 지나간 일들을 반성하고 뒷일을 삼가 조심하며 국토와 민족을 수호하고 평화롭고 행복한 나라를 이룩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우리들이 해야 할 마땅한 도리임을 알게 된다.

 

壬辰倭亂(임진왜란丁酉倭亂(정유왜란)에 관한 사료는 宣祖實錄(선조실록) 龍蛇日記(용사일기)를 비롯하여 그 당사국인 일본에도 이에 관한 기록들이 있으나 저술은 없다.

그러나 懲毖錄(징비록)은 저자가 나라의 중요한 직책에 있으면서 모든 일을 본인이 직접처리하였으므로 그 사실이 그야말로 실재의 생생한 기록이라 하겠다.

懲毖錄(징비록)에 실려 있는 70여가지의 사실 내용은 內治(내치外政(외정)政治(정치) 經濟(경제) 軍事(군사) 社會(사회) 文化(문화)의 여러가지면에 언급된 것이므로 당시의 내외문물제도를 광범위하게 연구 할수 있는 귀중한 문헌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 책은 저자의 高邁(고매)한 인품과 탁월한 식견과 능숙한 필치로 유창하게 저술한 문장이므로 읽는 사람으로하여금 함께 감동하고 분발할수 있게한 값진 고전이라 할수 있다.

 

5. 懲毖錄(징비록)軍門騰錄(군문등록) 속의 한 문장 소개

 

懲毖錄(징비록) 가운데는 긂주린 백성들의 실상을 적은 대목이 있다.

軍糧(군량)의 나머지 곡식을 내 주며 긂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고자 임금님께 청했더니 이를 윤허하였다.

이때 왜적은 서울을 점거한지 이미 2년이나 되었으므로 병화로 인한 피해때문에 천리강산이 폐허처럼 쓸쓸하였다.

백성들은 농사를 지을수 없어서 거의 다 굶어 죽는 형편이다.

도성 안에 살아 남은 백성들은 내가 東坡(동파)에 와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서로 서로 붇들고 이끌고 이고 지고 찾아 오는데 그 수를 해아릴수가 없었다.

 

査總兵(사총병)은 마산으로 가는 길에 어린아이가 죽은 어머니에게로 기어가서 가슴을 해치고 그 젖을 빨고 있는 것을 보고 너무 가엾어서 대려다가 군중에서 길었다.

그는 나에게 말하기를 왜적은 아직 물어가지 않고 백성들은 이처럼 처참한 형편이니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고 이어 탄식하기를 하늘도 근심하고 땅도 슬퍼할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눈믈이 흘어내렸다.

 

이 얼마나 실감이 나는 표현이며 문학적인 표현인가.

懲毖錄(징비록)은 우리나라 국보로 지정된 귀중한 고전이다.

우리는 이 귀중한 고전을 읽어서 지나간 과거를 거울삼아 자신을 반성하며 앞길을 바로 잡아야 할것은 물론이고,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 선조들이 겪은 많은 국난극복사의 사실을 살펴 그 원인과 經過(경과)와 결과를 잘 분석하고 당시의 사실을 현실에 결부시켜 부강하고 행복한 나라를 건설하도록 온갖 정성을 다 바쳐야 하겠다.

그리하여 선인들의 거룩한 넋을 이어 받는데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軍門謄錄(군문등록)은 선생께서 都体察使(도체찰사)로 계실때 이루어진 모든 啓草(계초)文移(문이) 곧 군사에 관한 문서, 문건을 廳吏(청리) 方秀(방수)로 하여금 원본에서 베끼게하고 이름을 軍門謄錄(군문등록)이라 붙쳤으니 이 책에 빠지고 수록되지 않는 것이 전체의 3분의 2는 된다고 한다.

 

軍門謄錄(군문등록) 가운데 한 구절을 소개한다.

丙申 115, 宣祖(선조) 29(서기 1596115) 임진왜난이 일어난지 5년이 되는 해이다.

相考(상고) 할 일에 대해서........

[殷栗(은율豊川(풍천) 都會(도회)에서 만든 鳥銃(조총)倭槍(왜창)을 제때에 완성해서 급한 때에 스도록 준비하라.

都會(도회) 관청의 物力(물력)이 일시에 완성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도내 각 고을에 맡겨서 제때 완성 시키도록 하라. 만일 진심것 만들지 않고 오직 책임만 면하면된다하여 급하게 만들어낸다면 마침내 아무 쓸모 없는 것이되고 말것이라, 실로 조그만한 일이 아니니 알아서 하라.

倭槍은 지금보내는 견본에 의하여 만들고 營中(영중)에서 먼저 만들어서 모든 고을에 나누어 보내도록하되 한결같이 이 제도에 의해서 실시 토록하라.

鳥銃(조총)은 십분검사하고 신칙해서 오로지 정밀하게 만들도록 힘써서 미진한 근심이 없도록하라.

황해도 관찰사에게 알리노라.]

위의 軍門謄錄(군문등록)을 살펴보면 우리나라도 鳥銃(조총)倭槍(왜창)을 제작하였음을 알수가 있으며 그때 당시의 군사관계를 소상하게 알수 있다.

선생님의 고결한 덕성과 인품과 타고난 재질에 대해서는 자타가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나, 임금께서 내리신 諡號(시호)에 이를 증명할수 있다.

文忠公(문충공)이라 하면 道德博聞曰文(도덕박문왈문)이요 危身奉上曰忠(위신봉상왈충)이라 하는 뜻에서 따온 말인데, 道學(도학)과 덕망이 넓고 높으며 자신의 위험을 무릅스고 임금에게 봉사하는 충성심을 찬양해서 말한 글이다.

실로 문무를 겸한 어른임에 틀림이 없다.

뿐만 아니라 앞에서 말한 선생의 임종시의 글을 살펴보면 더욱 잘 알수 있다.

참으로 고결한 선비이시며, 노성하고 경륜이 있는 이 노정치가의 말씀을 우리들은 영원토록 귀감으로 삼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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