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지(活地)·살지(薩地)이야기(안동)
활지는 새터 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새터에서 등재를 지나 동남쪽으로 가다가 동다리 마을을 조금 못 미쳐 있다.
상활지(上活地)와 하활지(下活地)가 있는데 상활지는 하활지에서 북쪽으로 1km남짓 더 들어가면 있으며, 하활지는 길거리에 있다 해서 거리활지라고도 부른다. 현재 상하(上下) 활지를 합해 약 10호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영가지에 따르면 '속명은 살지(薩地)라고 하며 현(縣)의 40리에 있다고 하였다.
삼한(三韓) 대에 왜적이 쳐들어오니 사람들이 많이 여기로 피난하여 면하였다. 그러므로 이 이름이 있다고 하였다.
마을 북쪽 2리쯤에는 왜적과 싸워 이긴 곳이 있으며 아직까지 왜적의 무덤이 여러 겹 쌓여있다'고 기록하였다.
또 구전되는 말에 따르면 이 마을은 매우 아늑해서 삼한(三韓) 때 왜란을 피하여 난민들이 이곳에 와서 살았다하며, 고려 恭愍王(공민왕) 때는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온 난민들의 정착지로 난을 피하여 살터라는 의미로 '활지' 또는 '살지'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회방(回方)잇골 회뱅이 이야기
사래실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는 사람이 살았으나 지금은 살지 않는다. 마을에 절이 있었는데 빈대가 성해 망하였다고 하며, 또 묘자리와 관련된 풍수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 김씨(金氏) 문중에서 풍수가 정해 준 묘터를 파자 반석이 나와서 하관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어났다.
이때 사위의 극력 반대로 다른 곳을 파기로 결정하고 반석을 괭이로 내리치니 반석 이 깨어지면서 학(鶴) 두 마리가 나와 한 마리는 눈을 다쳐 잡히고, 나머지 한 마리는 날아가다 가 회방(回方:다시 돌아옴)하여 이웃 마을인 동천리(東川里)의 원학(遠鶴)에 앉았다고 한다. 그로 인하여 마을 이름을 회방잇골 또는 회뱅이골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그때 눈을 다쳐 잡힌 학은 관(棺)과 함께 묻어 버렸는데 그 후에 이 가문에서는 눈이 애꾸인 진사(進士) 한 분이 나왔 다고 한다. 그 묘터는 고지박을 닮았다고 해서 지금도 고지혈로 부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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