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기 永王起兵時(영왕기병시) 및 晩年(만년) 李白(이백)
天寶(천보) 14년 11월 安祿山(안록산)이 范陽(범양)에서 반란을 일으켜 12월에는 洛陽(낙양)을 함락하고 다음해 6월에 長安(장안)을 점령했다. 玄宗(현종)은 蜀(촉)으로 난을 피하고, 7월에 肅宗(숙종)이 靈武(영무)에서 즉위해서 연호를 至德(지덕)이라 바꾸었다.
당시 李白(이백)은 揚子江(양자강) 유역에 있었으므로 직접 전란을 당하지 않았지만, 그해 가을 玄宗(현종)의 제16 皇子(황자) 永王(영왕)이 군사를 일으켜 舟師(주사)를 이끌고 大江(대강)을 내려오자 李白(이백)은 그의 幕僚(막료)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인 至德(지덕) 2년 2월, 永王(영왕)의 군대가 싸움에 패했으므로 李白(이백)은 잡혀 尋陽(심양)의 投獄(투옥)되었다. 그리고 그 죄로 夜郞(야랑)으로 유배되게 되었다.
그래서 다음 해인 乾元(건원) 元年(원년) 尋陽(심양)에서 大江(대강)을 거슬러 올라, 다음해 봄 三峽(삼협)을 지나 巫山(무산)까지 갔을 때, 사면을 받아 풀려났다. 그리하여 돌아오는 도중 천천히 놀며 尋陽(심양)으로 돌아갔다.
그 뒤 2년간 金陵(금능) 宣城(선성)등을 왕래하다가 최후에 族叔(족숙)인 當塗令(당도령) 李陽冰(이양빙)에게 몸을 의탁했으나 寶應(보응) 원년 11월 병으로 그곳에서 졸했다. 그가 永王(영왕) 군대에 들어갔다가 夜郞(야랑)에 유배되어 大江(대강)을 상하한 때의 시는 事跡(사적)을 참작해서 그 시기를 추정 할 수 있으나 歸還後(귀환후) 졸 할 때까지 2년간의 추정은 매우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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