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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 古典(고전)의 吟味(음미) 孔子思想(공자사상)의 巡禮(순례)

청남

 

 

古典(고전)吟味(음미)

 

孔子思想(공자사상)巡禮(순례)

 

孔子思想(공자사상)巡禮(순례)의 한 측면으로 大敎育家(대교육가)로서의 孔子에 대한 내용을 살펴본다.

大聖孔子(대성공자)님은 모든 면에서 특출하시고 인간을 위기로부터 구원해주신 위대한 구원자이시며 우리 인류의 마음에 支柱(지주)이시다.

교육과 학문, 정치와 경제, 윤리와 도덕 등 모든 분야에서 팔방미인격으로 그의 사상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으니 실로 우리 인간이 존재하는 금세기에는 두번다시 찾아볼 수 없는 인물 곧 성인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와 같이 성인의 제반사항을 전부 열거할 수가 없어 우선 오늘은 대교육자로서의 공자의 교육사상을 고찰해보도록 한다.

孔子는 정치가로서는 결코 성공하지 못했지만 교육가로서는 성공을 한 셈이다. 그것은 삼천 여명이나 되는 많은 제자들이 그의 주위에 운집해 있었을 뿐 아니라 그의 가르침이 2,50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살아지지 않고 살아서 우리들의 혈맥 속에 숨쉬고 있다는 사실로서도 입증되고 남음이 있다.

孔子님의 교육목표는 인격배양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 인격배양을 위하여 도덕교육,심성교육을 가장 중요시하였으니 이 도덕교육을 달성하기 하여 ()」「()」 「()」 「()의 네 가지를 가르쳤다.

여기서 ()이란 당시의 古典(고전)을 말하며 ()()의 실천을 말하고 ()은 마음의 忠實(충실)을 말하고 ()이란 남을 속이지 않은 信義(신의)를 말한다.

이 네 가지 교과요목이 모두가 도덕교육에 해당하였으므로 孔子의 교육을 한마디로 말해서 道德(도덕) 일색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결국 ()은 이른 면에서 궁구하게 하고 」 「」 「은 실천면에서 躬行(궁행)하도록 이른 바 知行合一(지행합일) 知行並進(지행병진)의 교육이론을 전개하였으니 후자인 실천궁행의 면을 더욱더 중요시하였다.

이러한 孔子의 사상은 論語學而篇(논어학이편)에서 行有餘力(행유여력) 이어든 則以學文(칙이학문)이니라.라고 한 말씀과 같이 젊은이들이 집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서는 어른을 존경하고 모든 일을 삼가 조심하여 언행에는 신의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모든 사람들을 차별없이 널리 사랑하며 특히 어진 사람을 가까이 사귀어야 한다.

이러한 일을 다하고 난 연후에 남는 힘이 있으면 학문을 연구하도록 하라는 글귀를 보더라도 孔子님이 얼마나 도덕적인 實踐躬行(실천궁행)을 중요시하였는지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孔子님께서 도덕교육을 실시함에 있어서 어떻게 하였는지 실례를 들어서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본다.

孔子님이 도덕교육을 실시함에 있어 몇 가지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感化爲主(감화위주)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자기자신이 행동으로 시범해 보임으로서 제자들이 감화를 받아 스스로 깨닫게 하였다.

그러므로 아무리 성격이 거친 사람이라도 일단 孔子의 문 하생이 되면 스승의 인격에 감화되어 선생과 같이 同化 (동화)되기 마련이 .

이것은 곧 朋友講習(붕우강습)의 장을 마련하여 德博而 (덕박이화)가 되도록 이끌어나간 것이다. 孔子十哲( 자십철)의 한 사람 子路(자로)의 경우가 좋은 예라 하겠 .

그는 성질이 당초 사납고 난폭하였으나 선생의 감화로 단 정한 선 비가 되었던 것이다. 그가 ()나라 大夫( ) 孔悝(공리)家臣(가신)으로 있을 때 政變(정변)이 일 어났다. 그는 그 피비린내나는 王位(왕위) 다툼의 와중에 서 목숨을 잃고 말았는데 창에찔려 목이 반쯤 끊겨 숨지 면서도 갓끈이 끊어지자 君子는 죽을지라도 갓을 벗을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 갓끈을 똑바로 매고 죽었다 한다. 그리하여 그는 군자의 ()를 다했다는 滿足感(만족감) 을 갖고 눈을 감았으니 그의 나이 62세였다.

둘째: 여러 제자들의 개성을 존중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제자들의 재능 성격 취미 지적정도에 따라서 이애 대응한 적절한 교육을 실시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같은 내용의 질문을 받고서도 상대방의 성격이 나 재능을 참작하여 각기 다르게 대답한 점을 들수가 있 는것이니 이른바 개성을 살려서 개인의 능력을 발휘케하 고 이를 啓發重視(계발중시)敎育을 실시하였다.

셋째: 相互對話(상호대화)를 통한 문답식교육에 치중하였다.

제자들로 하여금 직접 질문을 던지게 하고 직접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문제를 깨닫게 하는 방법으로 교육시켰으니 論語(논어)에서 나는 스스로 알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은 가르쳐 주지도 않고, 解明( )하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은 깨우쳐 주지 않는다. 그리 고 한 모서리를 들어주어 세모서리를 알지못하는 사람은 되풀이하여 가르쳐주지 않는다.라 고 하셨으니 곧 공자님 께서는 가르쳐주기에 앞서 상대방의 열의를 촉구하고 되 도록 스스로 깨닫게끔 유도하고 啓發(계발)해 주었던 것이 .

어떻게 할까? 하고 애써서 케묻지 않는 사람은 나도 어떻게 봐줄 도리가 없다.라고 말씀하신것도 이를 지적한 것이다.

孔子님은 弟子들에게 교과내용을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노력으로 자신이 터득하 도록 하였던 것이다.

넷째: 全人敎育을 실시하였다.

인간을 어느 한편만 편벽되게 교육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 든 기능을 골고루 그리고 조화있게 발전시키도록 교육하 였다. 孔子님이 말씀하시기를 君子(군자)不器(불기) .라고 하셨다.

君子(군자)는 한가지 그릇처럼 되어서는 아니된다는 말로 결코 팔방미인격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 .

六藝(육예)를 갖춘 身通弟子(신통제자) 七十二賢(칠십이현) 이라는 말에서와 같이 문예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의 여섯가지를 말하고 이 여섯가지를 교육시킨다는 뜻은 곧 전인교육을 실시한 다는 것이라고 할수 있는것이다. 다시말하여 인간은 풍부 한 교양과 인격을 길러 원만한 사회생활을 영위할수가 있 어야 한다. 이러한 완전한 인격자로 육성시켜나가는 데 는 필요불가결한것이 전인교육이라 할수있고 오늘날에 와 서도 많은 학자들이 이를 주창하고 있다. 그리고 전인교육 을 실시하기 위해서 교육현장에서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대학진학을 위한 획일적인 점수 취득위주의 교육, 단순히 지식만을 주입시키기 위한 교육, 과학문명의 발 때문인지 인간본성을 경시하고,물질을 중시하는 물질만능 의 교육풍토등은 시대적인 요청이라고 하겠으나 이로 인 하여 기형적인 인간이 속출하였을뿐 만 아니라, 파행적인 교육의 결과로 사회에 속출한 폐단이 20세기의 크나큰 고 민꺼리로 등장하게된 것이다.

다섯째: 實用敎育(실용교육)을 실시하였다.

孔子의 교육목표가 ()을 쌓고 인격을 길러 나라를 바 로 잡을수 있는 일꾼을 기르는데 있었던 만큼 어디까지나 현실에 눈을 돌려 슬기롭게 적응할수 있는 기능을 기르도 록 하였다. 이는 곧 현실참여의 선비를 길러 내려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따라서 탁상공론을 배격하고 지식을 위한 지식이 아니라 행동을 위한 산지식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와같은 것을 실천에 옮기는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孔子님은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예를 들면

子曰 文莫吾猶人也(문막오유인야)躬行君子(궁행군자) 則吾未之有得(즉오미지유득)호다라고 論語에서 말했 .

이 말의 뜻은 학문이라면 남만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만 군자의 도를 실천하는 것은 아직도 쉽게 할수가 없구 !라는 뜻으로 實用敎育(실용교육)의 한 면을 찾아볼수 가 있는것이다. 고로 孔子 는 현실을 외면 내지 도피하는 이른바 隱者(은자)들의 태도를 개탄 하며 언제나 정치일 선에 나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전란에 휩쓸려 들어간 여 러나라들을 순방하였으며 또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 던 것이다.

 

以上과 같이 孔子님이 실시한 교육방법의 특징을 살펴보았지만 2,500여년이 지난 오늘날의 교육방법도 거의 그때 것 과 큰 차가 없고 그때것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가 얼마나 위대한 교육자 였던가를 능히 알 수 있다.

우리들은 훌륭하신 孔子의 교육방법과 이론을 본받아서 이 지구에 낙원을 건설하여야할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孔子님의 교육관을 익히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앞에서는 교육자로서의 孔子를 생각해 봤는데, 이어서 대정치가로서의 공자의 대한 한 면을 살펴본다.

 

大學(대학) 經一章(경일장)에서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고지욕명명덕어천하자)先治其國(선치기국)하고 欲治其國者(욕치기국자)先齊其家(선제기가)하고 欲齊其家者(욕제기가자)先修其身(선수기신)하고 欲修其身者(욕수기신자)先正其心(선정기심)하고 欲正其心者(욕정기심자)先誠其意(선성기의)하고 欲誠其意者(욕성기의자)先致其知(선치기지)致知(치지)在格物(재격물)이니라고한 글이 있다.

이 글의 內容을 살펴보면은 옛날 堯舜禹(요순우) 三代政治(삼대정치)의 때 밝은 ()을 천하에 밝히려고 했던 사람은 먼저 자신의 나라를 잘 다스렸고 자신의 나라를 잘 다스리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집안을 가지런히 하였으며 자신의 집안을 가지런히 하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몸을 닦았다. 먼저 자신의 몸을 닦으려는 사람은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였고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하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뜻을 성실하게 하였다. 자신의 뜻을 성실하게 하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지혜를 넓혔고 자신의 지혜를 넓히고 덕에 이르게 하는 길은 사물의 이치를 究明(구명)하는 데에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결국 천하를 다스리려고 하면 우선 자기자신의 修身(수신)부터 해야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세계 많은 성인 가운데서 孔子만큼 政治에 관심이 많으신 분은 없었을 것이다. 기골이 장대한 풍모하며 유창한 언변부터가 정치가의 기질을 타고 났지만 그는 이 지구상에 分爭이 없는 낙원을 건설하기 위해 정치를 하였고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인격을 수양하고 이 인격을 수양하기 위해서 학문을 연구했던 것이다.

곧 그에 있어서는 학문과 수도와 정치는 삼위일체를 이루어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이것은 인간의 척도는 인간以人治人 이라는 그의 근본사고방식에서 비롯된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이에 공자의 정치사상을 편의상 넷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가 있으니 첫째 德治主義(덕치주의),둘째 禮治主義(예치주의), 셋째, 正名主義(정명주의), 넷째 民生主義(민생주의)라 할 수 있으나 그 근본 정치사상은 어디까지나 ()을 바탕으로한 德治(덕치)에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정치사상을 하나하나 알아보고 또 孔子님이 어떻게 직접정치에 관여하였는지 한 예를 들어서 생각해본다.

 

첫째: 德治主義(덕치주의)에 대하여 알아본다.

孔子는 나라를 다스리는데 () 근본으로 삼았다. 이를 가리켜 德治主義(덕치주의)라고 하며 法治主義(법치주의) 에 대립되는 뜻이기도 하다.

곧 나라를 다스리는데는 ()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 라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2차적인 수단으로 德治(덕치) 保存(보존)하는 하나의 道具(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이다.

孔子德治(덕치)法治(법치)의 차이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라를 法律(법률)로 이끌고 刑罰(형벌)로 다스리면 백성 들은 벌을 받는 일만을 면하려고 할 것이니 잘못을 저지 르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게 된다.

이와는 달리 ()으로 백성을 인도하고 ()로써 다스 리면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스스로 착한데 이르게 될 것이 .라고 論語(논어) 爲政篇(위정편)에서 설명하고 있다.

子曰道之以政(자왈도지이정)하고 齊之以刑(제지이형)이면 民免而無恥(민면이무치)니라 道之以德(도지이덕)하고 齊之 以禮(제지이예)有恥且格(유치차격)이니라.

孔子께서는 국민 한사람 한사람의 양심이 마비되지 않고 칼날같이 살아서 자기의 잘못을 스스로 크게 뉘우쳐 반성 할 줄 아는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보다 이 앞서야 한 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전제정치나 독재정치도 孔子政治理念 (정치이념)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또 그는 정치의 기본이 념을 다음과 같이 내세우고 있다. 道德(도덕)으로 정치의 근본을 삼으면 온 백성들의 마음이 그 위정자에게 돌아간 .

이것은 마치 모든 별들이 일정한 자리에 있는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論語 (논어) 爲政篇(위정편)에서 나오는 文章(문장)에 다음과 같 이 나타나 있다.

子曰(제왈) 爲政以德譬如北辰居其所어든 而衆星 共之니라.고하였다.

이은 정치의 大道(대도)를 밝힌 말이라 하겠다.

뿐만 아니라 윗사람이 백성을 대할 때 언행을 삼가하고 거동을 정중하게 하면 백성들은 자연이 존경할 것이며, 사람이 자기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여 극진히 받들고 아랫 사람을 사랑하면 백성들은 충성을 다할 것이고, 어진 사람 을 등용하여 백성을 잘 인도하면 자연히 좋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덕치주의는 위정자 곧 윗사람부터 먼저 솔선수 범 할 것을 강조하고있다.

 

둘째: 禮治主義(예치주의)에 대하여 알아본다.

禮樂(예악)() ()()으로 백성을 다스 린다는 뜻이다.

이는 德治(덕치)가 한결 구체화 된 것으로 禮樂(예악) 백성들의 마음을 선도하고 질서를 바로잡는데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孔子가 수제자에 말한 글에서 가 아니면 보지 말고 가 아니면 듣지 말고 가 아니면 말하지도 말고 아니면 행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하였으니 의 주요성을 강조한 글이라고 하겠다.

子曰(자왈) 非禮勿視(비예물시),非禮勿聽(비예물청), 禮勿言(비예물언) 非禮勿動(비예물동).이라 하였다.

라고 하면 질서요 또 天秩(천질)과 같은 것이다.

사사로운 욕심을 버리고 천리의 표현인 예를 지킨다는 뜻 으로, 어질다고 하는 의 내면적 원리라면 의 외적인 원리라고 하겠다. 아무리 훌륭한 德治(덕치) 를 하더라도 이것을 꽃피우는 길은 禮治(예치)가 아니고 는 될 수가 없는 것이다.

論語(논어) 衛靈公篇(위령공편)에서 말씀하시기를 위정자 의 지혜가 그 지위에 알맞을지라도 仁德(인덕)으로 그 지위를 지킬 수 없다면 비록 그 자리를 얻었다 하더라도 마침내 잃을 것이다. 지혜가 그 자리에 알맞고 仁德( )으로 그 자리를 지킬지라도 위엄 있는 모습으로 백성들 에게 임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그를 존경하지 않을 것이 .

또한 로써 움직이지 않으면 모든 것은 아직 완전하다고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나라의 위정자가 로써 백성을 다스리지 않고, 백성들이 를 잘 지키지 않는다면 다른 어떤 조건들이 구비되어도 결코 성공된 정치의 좋은 결과를 거둘 수가 없다는 것이 .

 

셋째: 正名主義에 대하여 알아본다.

正名(정명)이란 名分(명분)을 바로 잡는다는 뜻으로, 이것 은 특히 ()나라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下克上 (하극상)의 풍조가 심하여 이른바 亂臣(난신) 賊者(적자) 속출하는 당시의 문란한 사회질서를 바로 잡는데 좋은 무 기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孔子에 기반을 禮治(예치)로써 정치적 실효를 거두고 禮治(예치) (진작)시켜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正名主義(정명주의) 天子(천자),諸侯(제후),大夫(대부),庶人(서인)들이 각각 자기 신분을 지켜 책임을 완수하고 남의 지위나 권한을 침해하지 말 것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그는 군신 부자가 자기의 명분을 지키지 않는데서 사회의 질서가 문란해 진다고 말하고, 임금부터 임금답게 行動 할 것을 주장하였다.

孔子는 또 正名(정명)()에 대하여 이렇게 밝혔다.

德治(덕치)에서 禮治(예치)로 나아가는 것이 극히 자연스 런 경로라면 禮治(예치)에서 正名主義(정명주의)에 이르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했다.

 

넷째: 民生主義(민생주의)에 대하여 알아본다.

이것은 孔子의 정치론에서 간과 할 수 없는 하나의 주장 이다.

孔子는 정치에서 民生苦(민생고)의 해결이 급선무임을 각 별히 주장하였고, 民權(민권)이 전혀 인정되지 않던 당시 에 이와 같이 서민을 위한 정치를 주장하였다는 것은 주 목할만한 일이다.

이와 같은 정치사상은 論語(논어) 堯曰篇(요왈편)에 잘 나 타나 있으니 이를 살펴보면 나라를 다스릴 때 먼저 日用 (일용)에 사용하는 度量衡(도량형)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백성들은 물건을 사고 팔며 주거나 받을 때 서로 신뢰하게 된다.

다음은 禮樂(예악)法制(법제)를 세밀히 정리하여 사회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문란해진 官職(관직) 을 바로잡고 組織(조직)을 확립해야한다. 라고 하였고 이 것을 중앙에 있는 天子(천자)가 잘 할 수 있으면 방방곡 곡에서 정치가 훌륭하게 이루어진다라고 하였다.

다음은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켜주고 끊어진 가문을 잇 게 하고 세상에 숨어있는 어진 사람을 등용하고 仁德( )으로 정치를 한다면 천하의 백성은 진심으로 우러러보 고 복종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장 소중한 것은 백성의 식생활을 보장해주어 상례와 조상의 제사를 걱정없이 행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이와 같이 孔子님께서는 경제문제 곧 민생고의 선결을 특 히 주요시하고 있다. 백성들 생활이 안정되어 있으면 나라 가 망할 우려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이 곧 孔子 民本主義(민본주의), 人本主義思想(인본주의사상)과 결부되 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孔子의 정치사상을 간추려 네 가지로 말씀하였으나 사실 德治(덕치)속에 모두가 속한 것이라 하겠다.

德治(덕치)-善政(선정)-仁政(인정)-明政(명정)이 이루어진 다면 나머지는 자동으로 따라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德治(덕치)야말로 정치의 大道(대도)라고 밝힌 것은 다운 위대한 말이다.

2,500餘年이 지난 지금에 왔어도 그의 사상은 찬연히 빛나 고 있으니 공자사상연구에 박차를 가해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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