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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 古典(고전)의 吟味(음미) 禹易東(우역동)선생의 생애와 학문

청남

 

 

古典(고전)吟味(음미)

 

禹易東(우역동)선생의 생애와 학문

 

 

고려조 말기에 대학자로 이름이 높게 알려지고 있는 우역동선생에 대하여서 그 생애와 인품, 그리고 학문과 사상을 알아본다.

 

1. 禹易東(우역동)선생님 생애와 인품

 

선생의 ()는 클탁자 이며 天章(천장)또는 倬夫(탁부)이며 丹岩(단암) 또는 白雲堂(백운당)이라 하고 세칭 易東先生(역동선생)이라고 부른다.

고려 원종 31262년 단산군 칠성봉아래 신원리 현재 충북 단양군 직성면 현곡리에서 출생한 역동선생은 본관이 丹陽(단양)”이며 시조 우현의 칠대손이고 南省典書(남성전서), 門下侍中(문하시중)으로 추증된 天珪(천규)의 아들로 태여났다.

士官(사관)이 계속 이어진 名門先正(명문선정)의 후예로, 선생의 나이 17세인 충열왕 4년 서기 1278년에 鄕貢進士(향공진사)가 되었으며 곧 발탁이되어 弘文館修撰(홍문관수찬)에 임명되었다.

그뒤 1290년 충열왕 16년에 鄭可臣(정가신)이 주관한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선생의 나이 29세이였다.

이듬해 寧海司錄(영해사록)으로 임명되었고 그후 진주목사를 비롯하여 구군의 지방관을 역임하 셨다.

 

역동선생께서 지방관으로 계실때 유학정도의 실천을 위한 치적이 참 많이 있다.

이를 살펴보면 性理學(성리학)에 정통했던 역동선생이 영해사록에 임명 되었을때이다.

그곳에는 八鈴(팔령)이라고 부르는 요괴한 神詞(신사)가 있어 백성들이 귀신에 유혹되어 제사를 대단히 번거럽게 지내고 있었다.

고로 백성들사이에는 피해가 많았고 원성이 높았다.

이에 선생께서는 백성들이 여기에 벗어나지 못하고는 평안히 지낼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선생께서는 유생들과 함께 사졸들을 보내어서 신사를 파괴하여 바다에 던져버리고 백성들을 음사의 미혹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니 민심이 안정되고 온 고을이 평안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진주목사를 비롯하여 아홉 고을의 관장으로 있으면서 각 고을마다 백성을 미혹하는 淫詞(음사)를 파괴하여 유학의 정도를 실천하는 일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것은 麗末(여말)에 일기시작한 斥佛運動(척불운동)의 시초가 되었고 崇儒(숭유)의 기반을 닦은 시도였음을 알수있었다.

그뒤 벼슬이 거듭 올라서 時政(시정)을 논하고 백관을 監察彈劾(감찰탄핵)하며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는 감찰규정종오품에 임명되었다.

 

선생 나이 47세인 13088월에 충선왕이 즉위 하고 부왕인 충열왕의 후궁이었던 淑昌院妃(숙창원비)犯奸(범간)하는 폐륜을 저지르자 당시 감찰규정이 었던 역동선생은 이튼날 도끼를 들고 임금 앞에 나아가, 자신의 말이 잘못 되었을 때는 목을 쳐도 좋다는 持釜上疎(지부상소)를 올렸다.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군왕의 비행을 직간한 역동선생의 충의와 기개에 근신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고, 이에 군왕은 부끄러운 빛을 감추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史斷(사단)에서 이르기를

선생이 抗疎(항소)하여 감히 말하고 스스로 반드시 죽을 각오로 조금도 몸을 돌보지 않았으니 임금도 얼굴 빛이 변하고 좌우의 신하들도 두려워 떨었는바, 천년 뒤에도 그 사람을 상상하여 볼수있고 그의 孤忠(고충)俊節(준절)은 우뚝하여 범인이 미치지 못할 바이다라고 논하였던 것이다.

이어서 벼슬을 포기하고 향리인 단양으로 돌아가 학문에 전염하였으나 그 뒤 進賢館(진현관) 直提學(직제학)에 임명 되었으며 또한 성균관 祭酒從三品(제주종삼품)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역동선생께서는 官學(관학)의 확립을 논하였으며 성균관 유생들에게 程朱의 성리학을 講明(강명)하여 고려말기에 새로운 학풍으로서의 신유학 진흥에 매우 힘 썼음을 알 수있다.

 

2. 역동선생의 학문과 사상

 

선생의 사상은 앞에서 논한 바와 같이 첫째는 義理論(의리론)을 들수 있다.

유학의 근본정신인 의리를 관직생활을 통하여 몸소 실천한 분이다.

요괴인 淫詞(음사)를 철폐한 일과 忠諫(충간)의 의리로써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는 일들은 고려사를 비롯하여 東國撮要(동국촬요) 海東名臣錄(해동명신록) 興地勝覽(흥지승람) 麗朝名臣錄(여조명신록)등에서 역역히 찾아볼수가 있다.

한편 후학들이 그를 추모하는 詩篇(시편)에서도, 특히 충의를 높이 찬양하고 있음을 볼수가있다.

金佔畢齋(김점필재) 선생은 안동 예안 땅을 지나며 역동선생의 충간을 생각하며 易東書院記(역동서원기)에서 시를 남겼으니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麗運涵儲五百年 不圓衰叔有이라.

彤庭持斧眞唐介 白屋窮經似鄭玄이라

鄕里幾人懷舊德 子孫今日稅荒田이라

嗟余晩負希顔志하여 獨拂儒紳一悵然이라.

 

해설

고려의 운수 오백년간 저축하여 생각 잖게 쇠한 끝에 이런 현인이 나셨네

王廷(왕정)에서 도끼드니 진정한 唐介(당개)라 할만하고

草室(초실)에서 經書窮究(경서궁구) 鄭玄(정현)과 같았다.

鄕里(향리)에서 幾人(기인)이나서 그 舊德(구덕)을 회상하나?

자손들은 오늘날에 荒田(황전)으로 ()바치고

슬프도다 나는 늦게 顔子(안자)의 뜻 품고서

나홀로 儒紳(유신)을 떨치고 한번 悵然(창연)하노라.

 

라고하며 역동선생이 忠宣王(충선왕)을 충간한 기개를 중국 나라때 殿中御使(전중어사)宰相(재상) 文彦博(문언박)諫官(간관)吳奎(오규)를 탄핵했던 唐介(당개)와 같이 생각했고 또한 東方儒宗(동방유종)으로 추앙받고 많은 제자들을 배출시킨 역동선생을 중국후한때 당화를 피하여 벼슬을 버리고 문을 닫고 학업을 닦아 많은 저서와 천수백명의 문도를 거느렸던 鄭玄(정현)과 같이 생각하며 찬양한 시를 지은것을 볼수있다.

이와같은 역동선생의 의리론은 그의 관직생활을 통해 몸소 실천에 옮겨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뿐만 아니라 학문적 계통과 함께 그의 중요한 사상의 일면이었음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다음은 선생의 誠敬論(성경론)이다.

역동선생의 학문적 계통은 程朱性理學(정주성리학)講解(강해)한데서 부터 시작 출발 했음을 알수 있다.

뿐만아니라 저서를 통하여 나타나는 誠敬論(성경론)으로 함축 될수도 있다.

그의 성리학의 요지를 선한 初學啓蒙編,(學啓蒙編,) 徒酬編(도수편)

易論(역론), 易說(역설), 家禮要精篇(가예요정편)등이 있었다고 하나 아깝게도 화재로 인하여 현재 전해오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선생의 수제자였던 영해에 雲月齋申賢( 운월재신현)선생의 후손집에 전해 내려오는 元耕谷(원경곡)이 찬한 華海師全(화해사전)에서 易東(역동)申賢(신현)과의 誠敬問答(성경문답)이 수록되여 있어 이를 통하여 단편적이나마 역동의 학문과 사상에 대하여 살펴 볼수가 있는것이다.

 

易東先生雲月齋(운월재) 申賢先生(신현선생)盛敬問答(성경문답)의 강론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 본다.

선생과 제자사이에 학문강논으로써 주로 에 대한 이론을 광범위하게 四書三經(사서삼경)을 통하여 相論(상론)하였음을 엿볼수가 있으니 과연 선생의 학문의 경지가 어떠한지를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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