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白(이백: 701~762)
중국 당(唐)나라 시인.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 농서군 성기현(成紀縣;지금의 甘肅省 秦安縣 부근) 출신.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라고 일컬어진다.
두보를 시성(詩聖), 왕유(王維)를 시불(詩佛), 이백은 시선(詩仙)이라고 한다. 이 밖에 적선인(謫仙人) 또는 벼슬이름을 따서 이한림(李翰林)이라고도 한다. 25세 때 촉(蜀)나라를 떠나 陽子江(양자강)을 따라 평생 유랑생활을 했다. 李白(이백)은 어려서부터 詩文(시문)에 천재성을 발휘하는 한편 검술을 좋아했다. 젊었을 때 道敎(도교)에 심취하여 仙界(선계)에 대한 동경심을 가졌으며 산 속에서 지내기도 했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幻像性(환상성)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며, 산은 그의 시 세계의 주요 무대의 하나였다. 蜀(촉) 나라에서 나온 뒤 洞庭湖(동정호) 주변에서 吳(오), 越(월) 나라(지금의 南京․杭州 일대) 등을 周遊(주유)했고 安陸(안육:지금의 湖北省)에서 원(元)나라 재상 허어사의 손녀딸과 혼인하여 10년간의 세월을 보냈으나, 그 사이에도 가정에 정착하지 못하고 맹호연(孟浩然)․원단구(元丹丘) 등의 시인․도사와 전국을 여행했다. 그 뒤 任城(임성:지금의 산동성) 과 南陵(남릉:지금의 安徽省)에 집을 장만했다. 任城(임성)에서는 공소부(孔巢父) 등과 조래산(租徠山)에 은거하면서 竹溪(죽계)의 六逸(육일)이라고 하였다. 아내 허씨(許氏)가 죽은 뒤 유씨(劉氏)․송씨(宋氏)와 혼인했으며, 딸 平陽(평양)과 아들 백금(伯禽)을 두었다. 李白(이백)은 과거를 보지 않았으나, 玄宗(현종)의 부름을 받아 장안(長安)에 가서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었다. 이 1~2년 동안이 그의 생애 가운데 유일한 영광의 시절이었다. 杜甫(두보)가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서 「이백일두(李白一斗) 시백편(詩百篇), 장안의 저자거리 술집에서 잠이 든다. 천자가 불러도 배에 타지 아니하고 스스로 칭하기를 신(臣)이 이 주중(酒中)의 선(仙)」이라고 한 것은 그 무렵 李白(이백)의 모습을 전해 준 것이다. 그러나 李白(이백)의 불기(不羈)의 성격이 현종 측근들의 참언(讒言)을 자초하게 되었고 마침내 궁중에서 떠나게 되었다. 장안을 떠난 이백은 洛陽(낙양)에서 11살 아래의 杜甫(두보)와 만나 친교를 맺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짧았지만 우정은 평생 유지되었다. 755년 安祿山(안록산)의 난 때 현종은 四川(사천)으로 도망하고 肅宗(숙종)이 즉위했다. 55살의 이백은 이때 廬山(여산)에서 숙종의 동생 永王(영왕)의 부름을 받고 그의 반란에 가담했다. 永王(영왕)이 숙종의 토벌을 받자 李白(이백)은 체포당하여 한때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뒤에 감형되었다. 夜郞(야랑:지금의 貴州省)으로 유배되어 陽子江(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 三峽(삼협)까지 왔을 때 사면되었다. 말년에는 강남을 周遊(주유)했으며, 당도현(當塗縣;지금의 安徽省) 현령 이양빙 곁에서 병으로 죽었다. 이백의 시는 두보의 시가 조탁(彫琢)이 극에 이르는 데 대하여, 흘러나오는 말이 그대로 시가 되는 시풍이며 杜甫(두보)의 五言律詩(오언율시)에 반하여 樂府(악부)와 七言絶句(칠언절구)에 능했다. 예를 들어 兩人對酌山花開(양인대작산화개) 一杯一杯復一杯(일배일배복일배) 등은 규범에 관계없이 자유스러운 발상과 리듬을 구사한 좋은 보기다. 또 성당(盛唐)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李白(이백)은 인간․시대․자기에 대한 큰 기개, 자부심을 시로 노래했다. 가령 고풍(古風) 가운데의 한 구절인 「大雅(대아) 오래 생기지 아니하고 내가 쇠하면 마침내는 누가 말할 것이다」, 「장진주(將進酒) 가운데 한 구절인, 하늘이 나에개 재능을 준 것은 반드시 유용하게 쓰라고 그랬을 것이다」 등이 있다. 그러나 그 기개와 자부심의 시대는 開元(개원)에서 천보(天寶)로 이행되어감에 따라 전제 독재 밑에서 심해지는 부패한 현실로 인해서 깨졌다. 그는 將進酒(장진주)에서 「인생에서 뜻을 얻으려면 반드시 기쁜 마음으로 힘을 다하여야 하느니」라고 했듯이 산다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결하였으며, 동시에 그가 말하는 「만고지수(萬古之愁)」, 즉 살기 위해 생기는 걱정을 항상 마음에 지니고 살았다. 또한 즐겨 술․달․산을 노래했고, 旅情(여정), 이별, 閨情(규정)을 노래했으며, 수심을 격조 높게, 때로는 殘虐(잔학)하게 펼쳐 보였다.
이러한 이백의 생애를 좀더 자세하게 그리고 그의 詩作(시작)이라는 관점에서 구분하면 다음과 같이 5기로 나눌 수 있다.
第一期(제일기)
李白(이백)의 자는 太白(태백)이다. 蜀(촉)의 錦州(금주) 彰明縣(창명현) 靑蓮(청련) 사람이다. 당의 則天武后(칙천무후)의 長安(장안) 원년에 출생, 肅宗(숙종)의 寶應(보응) 원년 62세로 卒(졸)하였다. 선조는 隴西(농서) 成紀(성기) 사람이며, 수말에 죄를 지어 西域(서역)으로 추방되었으나 唐(당) 中宗(중종) 神龍(신룡) 초에 이르러 다시 蜀(촉)에 돌아 왔다. 그의 부친은 부유한 상인인 듯, 文學(문학)에도 다소 관심이 있어서 李白(이백)이 어릴 때, 부친은 그에게 한의 司馬相如(사마상여)의 「子虛賦(자허부)」를 암송시켰다고 한다. 부친은 그를 蜀(촉) 출신의 賦聖(부성)이 되기를 원했던 것 같다. 그는 10세 경부터 百家(백가)의 書(서)를 읽고 15세 경부터 賦(부)를 짓고 검술을 배워 遊俠(유협)을 즐겼다. 그리고 20세 때 禮部尙書(예부상서)인 蘇挺(소정)이 좌천되어 益州(익주) 大都督府(대도독부) 長史(장사)가 되어 蜀(촉) 成都(성도)에 부임하는 도중, 詩文(시문)을 갖고 면회를 신청했다. 그는 당시 유명한 문인 이였으며 李白(이백)의 시를 보고 그의 천재적 소질을 크게 칭찬했다. 그 무렵 李白(이백)은 東嚴子(동엄자)라고 하는 隱者(은자)와 岷山(민산)에 살면서, 기이한 새를 많이 기르고 속세 밖에서 명상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가끔 成都(성도)에 나가 놀기도 하고, 蛾眉山(아미산)에 오르기도 하고, 蜀(촉)의 명승지를 유람하며 지냈다.
第二期(제이기)
開元(개원)13년, 25세 때 大江(대강)을 내려와 三峽(삼협)을 지나 지금의 湖北(호북), 湖南(호남), 江蘇(강소), 浙江省(절강성) 지방에서 놀았다. 이때 그는 친구인 吳指南(오지남)이라는 자와 함께 갔는데, 그가 동정호 부근에서 병사했으므로 호숫가에 假葬(가장)해 두고, 그는 金陵(금릉)에 가서 볼일을 보고, 돌아 올 때 鄂城(악성) 동쪽에 장사지냈다. 그리고 이때 금능과 楊洲(양주)에 놀며 일년도 못되어 금 30만 여를 썼다하니 그 호탕함은 과연 놀랄만하다. 그리고 司馬相如(사마상여)의 子虛賦(자허부) 속에, 楚(초)의 雲夢澤(운몽택)일을 자랑한 것에 마음이 끌려 그 지방에 놀며, 그 북쪽에 있는 安陸(안육)에 가서, 그곳의 名家(명가), 高宗朝(고종조)의 재상이었던 許圉師(허어사)의 손녀와 결혼해서 정착하고 약 10년간 그곳을 중심으로 각처를 유람하였다. 아마도 그때, 그는 漢水(한수) 연안 襄陽(양양)에 놀며 그곳에 숨어사는 선배 시인 孟浩然(맹호연)과 만났을 듯 「맹호연에게 보냄」이라는 시가 있으며, 또한 「양양곡」 등 그 지방과 관계 있는 시가 많이 남아 있다.
開元(개원)23년, 35세 경 安陸(안륙)을 떠나 북쪽 山西(산서) 太原(태원)에서 놀았다. 거기서 한 병사인 郭子儀(곽자의)가 큰 과실을 범해서 징벌을 받으려하는 것을 보고, 대장에게 잘 말해서 죄를 면하게 해주었다. 이 사실이 뒤에 李白(이백)이 永王(영왕)의 반란에 연루되어 죄를 받게 되었을 때, 郭子儀(곽자의)의 힘으로 사형을 면하게 되었다.
얼마 뒤 太原(태원)을 떠나 山東(산동)으로 가서 任城(임성)부근을 구경하며 지냈다. 또 그곳 동북에 있는 徂來山(조래산) 竹溪(죽계)에 은거하면서 孔巢父(공소부), 韓準(한준), 張叔明(장숙명), 陶沔(도목)등과 사귀며, 술과 詩歌(시가)를 즐기며 살았는데 사람들은 그들을 「竹溪六逸(죽계육일)」이라 불렀다. 그사이 가족들은 남방에 남겨둔 채 라고 한다. 그르다가 다시 남하해서 江蘇省(강소성), 安徽省(안휘성) 浙江省(절강성) 등의 땅을 두루 다니며 유람하다가 天寶(천보) 원년, 42세 때 浙江省(절강성) 會稽(회계)에 가서 도사 吳筠(오균)과 함께 剡中(섬중)에 있었다. 그러자 吳筠(오균)은 玄宗皇帝(현종황제)의 부름을 받고 수도 長安(장안)으로 올라갔는데 거기서 황제에게 李白(이백)을 추천했으므로 그도 함께 소집되었다. 당시 李白(이백)은 집을 南陵(남능)으로 옮겨 놓았음으로, 일단 집에 들려 가족과 해어져서 홀로 상경하게 되었다.
第三期(제삼기)
李白(이백)은 장안에 다다르자 老子(노자)의 祠堂(사당)이 있는 紫微宮(자미궁)에서 太子賓客(태자빈객)인 賀知章(하지장)과 만났다. 그 사람도 시인이며 飮中八仙(음중팔선)이라 일컬어지는 사람이므로, 李白(이백)과 술을 나누며 이야기하다가 그를 격찬해서, 「天上(천상)의 謫仙人(적선인)」이라 평했다. 그리고 그를 玄宗(현종)에게 추천했으므로, 李白(이백)은 宮中(궁중) 金鑾殿(금란전)에서 皇帝(황제)를 뵈옵고 국정을 묻는 말의 答蕃書(답번서)를 쓰게 되었는데 그 것이 황제 뜻에 맞아 翰林供奉(한림공봉)으로 임명되었다. 그것은 한림원에 있으며 詔勅(조칙) 기타의 문서를 기초하는 직책이다. 단 李白(이백)의 경우는 정직원이 아니고 이 관직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文名(문명)은 날로 높아져, 궁중에 출입하면서 매우 우대를 받았다. 그리하여 황제는 그에게 명해서 「궁중행락오언율시」 10수를 짓게 했다. 현존하는 「궁중행락시」 8수가 그것이라고 한다. 또 그때 궁중에 모란이 만개했으므로 玄宗(현종)은 楊貴妃(양귀비)와 함께 沈香亭(심향정)에서 꽃을 감상하면서 궁중악단에게 신곡을 연주시키려고, 李白(이백)에게 그 가사를 짓게 했다. 이것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청평조사」 3장이다. 李白(이백)의 이무럽의 생활은, 杜甫(두보)가 「음주팔선」 속에 이를 읊었으며 「이백은 술 한 말에 시 백편, 장안 酒家(주가)에서 잠을 잔다. 천자에게 불려 와도 배에 오르지 않고,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酒中(주중)의 신선」이라 하며, 또 任華(임화)의 「이백에게 보냄」이라는 시에 말하기를 「新詩(신시)는 전해져 궁인 입에 있고, 佳句(가구)는 明主(명주)의 마음을 떠나지 않네.......은혜를 받아 소환되기 여러 번, 부름에서 돌아오면 아직도 반은 취해있네」라고.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궁중에서 황제의 총애를 받게되자 그의 명성을 시기하는 자가 나타나, 중상모략으로 참언을 했다. 그 가운데 가장 심한 자가 바로 玄宗(현종) 近侍心腹(근시심복)인 宦官(환관) 高力士(고력사) 였다. 한 때 황제의 연회에서 이백이 취중에 고력사에게 신발을 벗기게 했는데, 그는 그것을 심히 마음에 두고 큰 굴욕으로 생각해서 한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李白(이백)이 지은 「淸平調詞(청평조사)」 가운데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읊은 시의 가사를 曲解(곡해)해서 楊貴妃(양귀비)에게 李白(이백)을 모함했으므로, 그 말을 그대로 믿은 楊貴妃(양귀비)가 李白(이백)을 미워하기 시작했고 玄宗(현종)에게도 李白(이백)을 욕하게 되었다. 그밖에 權臣(권신)들과 동료들도 李白(이백)의 재능과 명성을 시기하고 비방하는 자가 많아져, 드디어 이백을 궁중에서 추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李白(이백)이 궁중에 출입한지 3년만에 長安(장안)을 떠나게 되었다. 이상이 제3기이다.
第四期(제사기)
李白(이백)은 天寶(천보)3년 長安(장안)을 떠나 天寶(천보)14년 55세 때, 安祿山(안록산)의 난이 일어날 때까지 10년간, 다시 각처를 유랑하면서 살았다. 그는 먼저 東都(동도) 洛陽(낙양)에 가서, 비로소 杜甫(두보)와 알게 되었다. 이때 杜甫(두보)는 33세이며, 山東(산동) 유람 길에서 돌아와 잠시 洛陽(낙양)에 定住(정주)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두 사람을 서로 동행해서 梁園(양원)에서 지냈으나, 거기서도 시인 高適(고적)과 알게 되어, 세 사람이 이 지방의 명승지를 방문하면서 詩酒(시주)의 흥을 마음껏 즐겼다. 다음 해 高適(고적)은 南遊(남유)해서 양자강 연안지방으로 향했다. 李白(이백)과 杜甫(두보)는 함께 山東(산동) 齋州(재주)에 이르렀다. 거기서 北海群(북해군) 太守(태수)의 도움을 받은 듯하며, 두 사람 모두 太守(태수)가 베푸는 주연에 나가 시를 지은 듯하다. 그리고 거기서 두 사람은 서로 해어져 다시는 만나지 못한 듯 하다. 그는 長安(장안)을 떠난 뒤 약 10년간 梁園(양원)을 중심으로 각지를 유랑한 일들을 술회하고 있다. 이 사이 북으로는 지금의 河北(하북), 山西(산서), 狹西(협서)에 놀며, 집도 또한 山東(산동) 쪽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러나 언제 安徽(안휘) 南陵(남능)에서 山東(산동)으로 옮겼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山東(산동)에 있는 주소는 그의 시에 의하면 「沙邱城下(사구성하)」라는 말에서 沙邱(사구) 가까운 곳에 집이 있었는 듯 한데 그곳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역시 魯群(노군) 즉 袞州(곤주)에 속하는 곳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그때 그는 명문가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 산동의 아이들과 별도로 그를 梁園(양원)에 두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양원에 있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天寶(천보) 5년경 아이들을 산동에 두고 처를 양원에 둔 채 남방으로 유람하러 나갔다. 적어도 3년간은 남방을 돌아다닌 듯하다. 그는 廣陵(광능) 金陵(금능) 부근에 묵으면서 浙江省(절강성)의 會稽(회계), 天台(천태), 永嘉(영가) 등 산수가 좋은 명승을 찾으며, 집에 돌아가는 것을 잊은 듯하다. 그 뒤 북상해서 山東(산동)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지만 梁園(양원)을 중심으로 山東(산동)을 왕래한 것으로 믿어진다. 이와 같이 長安(장안)을 떠난 지 약 10년, 즉 天寶(천보) 12년, 53세 전후에는 梁園(양원)에서 曹州(조주)에 갔다가, 다시 돌아서 남하하여 宣城(선성)에 이르렀다. 그 다음 해 天寶(천보)13년 봄에는 揚州(양주)에 있으면서, 그를 숭배하는 청년시인 魏萬(위만)과 만나게 되었다. 이 청년은 이백의 이름을 사모해서 開封(개봉), 山東(산동)을 찾아다녔으나 남하해서 드디어 揚州(양주)에서 李白(이백)과 만난 것이다. 李白(이백)은 매우 기뻐하며 그를 대리고 다니며, 그가 반드시 대성하리라는 것을 믿고, 그에게 詩文(시문)의 원고를 주고 編纂(편찬)할 것을 당부하고 서로 해어진 다음 또 宣城(선성) 등지에 머물렀다. 이 위만은 뒤에 魏顥(위호)라고 개명하고 上元(상원) 연간에 진사에 급제해서, 李白(이백)을 위해 李翰林集(이한림집)을 편성해서 이에 序(서)했다. 그 다음 해 즉 天寶(천보)14년 11월 安祿山(안록산)이 반기를 휘날리며, 12월에는 洛陽(낙양)이 함락되었다. 이때 李白(이백)은 宣城(선성)에 있었는듯하다. 이상이 제4기이다.
第五期(제오기)
다음 해 天寶(천보)15년 李白(이백)은 宣城(선성)에서 溧陽(율양)으로 가서 거기서 草書(초서)의 명인 張旭(장욱)을 만나 술을 나누며 猛虎行(맹호행)을 지어 북방의 戰況(전황)을 읊었다. 다음 해 6월, 玄宗(현종)은 兵亂(병란)을 피해 蜀(촉)에 가는 도중 漢中群(한중군)에 이르러 제16皇子(황자) 永王璘(영왕인)에게 詔勅(조칙)을 내려 山南路(산남로), 嶺南(영남), 黔中(검중), 江南西路(강남서로) 四道(사도)의 절도채방사 및 江陵大都督(강릉대도독)으로 임명하고 동남 일대를 방위하려 했다. 그래서 永王(영왕)은 7월에 襄陽(양양)에 이르러, 9월에는 江陵(강릉)에 가서 將兵(장병) 수만 명을 모집해서, 舟師(주사)를 지휘하고 大江(대강)을 내려와, 金陵(금능)을 공격하려 했다. 7월에는 肅宗(숙종)이 靈武(영무)에서 즉위해서 至德(지덕)이라 改元(개원) 했다. 肅宗(숙종)은 永王(영왕)이 자기의 帝位(제위)를 뺏지나 않을까 하는 의심을 품고, 軍(군)을 떠나 蜀(촉)에 있는 玄宗(현종) 밑으로 가라는 명을 내렸으나 永王(영왕)은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군사를 동원해서 그를 공격했다.
이보다 먼저 李白(이백)은 溧陽(율양)을 떠나 剡中(염중)으로 갔다가, 廬山(여산)에 들어갔는데, 잠시 뒤 永王(영왕)의 군대가 강을 따라 내려와 潯陽(심양)에 이르러 李白(이백)의 명성을 알고 幕僚(막료)로 초빙했다. 李白(이백)은 사양할 길이 없어 드디어 응했다. 그런데 다음 해 2월 永王(영왕)의 군대는 丹陽(단양)에서 패하고 뒤에 왕은 잡혀 죽었다. 李白(이백)은 도망을 처서 彭澤(팽택)에 갔으나 곧 잡혀서 潯陽(심양)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래서 사형이 결정되었으나 이때, 武勳(무훈)이 혁혁하였던 郭子儀(곽자의)가 옛날 太原(태원)에서 李白(이백)에게 입은 은혜를 잊지 않고, 자기의 官爵(관작)으로서 李白(이백)의 죄를 사해주기를 청했으므로, 사형은 면제되고 夜郞(야랑)으로 유배되게 되었다. 夜郞(야랑)은 지금의 貴州縣(귀주현) 부근이며 거기에 가기 위해서는 大江(대강)을 거슬러 四川(사천)의 동쪽을 통과해서, 烏江(오강)에 들어가야 된다. 그래서 다음 해인 乾元(건원) 원년, 58세 때, 潯陽(심양)을 출발해서 강을 거슬러 올라, 동정호를 통과 三峽(삼협)을 지나서 四川(사천) 입구인 巫山(무산) 까지 갔을 때 대사면을 받아 용서받게 되었다. 그것은 乾元(건원) 2년 봄이었다. 거기서 돌아와 巴陵(파능) 江夏(강하) 등의 땅을 유랑하면서 다음 해 上元(상원) 원년 潯陽(심양)으로 돌아갔다. 그 뒤 2년간, 金陵(금능), 宣城(선성), 歷陽(역양)등을 왕래하였으며, 從叔(종숙) 李陽冰(이양빙)이 當塗(당도) 縣令(현령)을 하고 있는 것을 의지해서 병든 몸을 의탁했다. 혹은 그 곳에 산수가 아름다워 化城寺(화성사)에 있었다고도 한다. 드디어 寶應(보응) 원년 11월 병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62세. 당도현 采石(채석) 龍山(용산) 동쪽에 그를 장사지냈다. 그리하여 李陽冰(이양빙)은 李白(이백)의 유언을 받아 그의 시문을 모아 草堂集(초당집) 10권을 편성하였다. 이상이 제5기이다.
李白(이백)의 사후 50년이 지난 元和(원화)연간에 그의 친구 范倫(범륜)의 아들 范傳正(범전정)이 관찰사가 되어, 李白(이백)의 자손을 찾아보니, 孫女(손녀) 두 명이 농민의 처가 되어 있는 것을 알고 불러서 물으니, 이백의 외아들 伯禽(백금)의 딸이며, 아버지 백금은 貞元(정원) 8년 이미 죽었으며 형이 하나 있었으나 12년 전에 어디론가 가버려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리하여 李白(이백)의 묘가 묵고 있을 때, 李白(이백)이 생전에 사랑했던 齋(재)나라의 시인 謝朓(사조)가 그 묘를 관리하여 謝家靑山(사가청산) 남쪽으로 옮겨서 스스로 翰林學士李公墓碑(한림학사이공묘비)라는 碑文(비문)을 썼다. 范傳正(범전정)은 다시 李白(이백)의 遺稿(유고)을 거듭 수집해서 문집 20권을 편찬했다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第一期(제일기) 蜀中生活時代(촉중생활시대)
李白(이백)은 1세에서 25세까지 故鄕(고향)인 蜀(촉)에서 생활 했다. 25세 이후 蜀(촉)을 떠나 他鄕(타향)에 발을 디딘 이후,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았다. 오직 만년에 夜郞(야랑)으로 유배되었을 때 蜀(촉)의 동쪽 변두리에 잠시 발을 들어놓았을 뿐이다. 그르므로 蜀(촉)에서 읊은 詩(시)는 대부분 이 시기에 작품이라고 생각되며, 남겨진 작품의 수도 매우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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