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李(금구이씨)
본관(本貫): 금구(金溝)
시조(始祖): 이주(李澍)
유래(由來):
금구 이씨(金溝李氏)의 시조(始祖) 이주(李澍)는 고려조(高麗朝)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을 지냈으며 봉산(鳳山 : 금구 고호) 군(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금구(金溝)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공수(李公遂)
주(澍)의 아들 공수(公遂)가 시중랑(侍中郞)을 거쳐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이온(李溫)
주의 손자 온(溫)이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를 지냈다.
이을재(李乙材)
조선조(朝鮮朝)에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을재(乙材)가 이름났다.
이수공(李粹恭)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역임했다.
이회지(李會智)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이철견(李鐵堅)
부사(府使)를 거쳐 찬성사(贊成事)에 이름.
이세방(李世芳)
판윤(判尹)을 역임하였다.
이옥견(李玉堅)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이철민(李哲民)
직장(直長)을 역임하였다.
李屬奉(이속봉)의 지극한 효행.
임금님을 감복시킨 사냥꾼
속봉이의 아버지는 강원도 양양 사람으로서 호랑이 사냥으로 전국에 이름을 떨친 분이다. 그는 일월산 다래바윗골에 호랑이가 많다는 소문을 듣고 이 곳 동면리에 이사를 왔다. 일월산은 태백산맥 중에 있는 명산으로서 지금은 그 정상에 군사 기지가 있지만, 그 옛날에는 기암괴석과 동굴과 울창한 원시림으로 덮여져 산에 들어가면 금방 길을 잃어버릴 정도로 험준하여 호랑이와 비롯한 각종 산짐승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었다.
속봉이의 아버지는 이 산에서 사냥을 시작한 지 2 년도 못 되어 별세하시 고 말았다. 이때부터 어린 속봉이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한 집안 살림을 꾸려가야만 했다. 그는 아버지를 닮아서 체격이 장대하고 사냥을 잘 하였을 뿐만 아니라 효성이 지극하여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생각하며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어머니 또한 자식을 지극히 사랑하고 훌륭하게 키우기에 온갖 정성을 쏟았으니, 비록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집안이지만 항상 정결하고 화기에 가득찼다. 이와 같이 아들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애정과 어머니를 모시는 아들의 효성이 너무나 지극하여 사방 50 리 안에서는 어디서든지 모 자간에 서로 부르면 곧 대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속봉이가 16 세가 되던 해에 그의 어머니는 우연히 눈병을 앓게 되어 원근을 불문하고 좋다는 약은 모두 구하여 드리고 간호를 했으나 애쓴 보람도 없이 앞을 못 보는 봉사가 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속봉이는 눈먼 어머니의 손발이 되어 수십 년간 모친의 대소변을 받아 내었지만 귀찮아하거나 싫어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고, 항상 방안을 깨끗이 청소하였다. 사냥을 나가서도 항상 어머니 걱정을 하였고 어머니 또한아들의 안전과 무사함을 빌었으며, 멀리서도 서로의 이런 뜻을 전하곤 하였다.
이와 같이 어머니를 편안하게 모시기 위하여 온갖 정성을 다할 때에 속봉 이의 효행에 대한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국 각지로 퍼져서 본도 관 찰사는 물론 나라 임금님께서도 이 사실을 아시게 되었다. 그 당시 임금인 숙종 대왕은 어사 박 문수를 보내어 이를 확인하게 하였다.
그는 임금님의 특명을 받고 속봉이의 집을 찾아가서 지나가는 나그네처럼 꾸며 하룻밤을 유숙하고 갈 것을 청했다.
그 때 마침 참기름을 짜던 며느리는 일손을 멈추고 시어머니께 말씀을 드 려 쾌히 승낙 받았다. 따라서 어사 박 문수는 이 가족들의 일거일동을 세밀 히 살필 수 있게 되었다. 손님이 오셨다는 며느리의 말에 시어머니는 밖을 나오시더니 금방 짜 놓은 참기름이 가득 든 질그릇을 요강으로 잘못 아시고 퇴비장에 쏟으려고 하시는 순간 며느리가 재빨리 받아들고 함빡 웃음을 지 으며 지극히 공손한 말로
.“아이쿠, 어머님도 제가 쏟지요. 그 무거운 것을 어떻게 쏟으려고 하셔요.”
이와 같이 며느리는 불쾌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도리어 시어머니를 위로 하니 이 얼마나 지혜롭고 효성이 지극한 언행인가.
보통 사람들 같으면 ‘아 이구 어머니 그것은 요강이 아니고 참기름 단지예요.’라고 했을 것이다. 어 사 박 문수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속봉이의 처 또한 찾아보기 힘든 효부구나’ 하면서 마음속으로 크게 감복하였다. 그 때를 같이 하여 속 봉이의 어머니는 사립문 쪽에 서서
“속봉아, 속봉아, 손님이 오셨다. 빨리 오너라. ”
하시면서 부르는 것이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속봉이는 돌아오지 않 았다. 어사 박 문수는 불쾌한 생각이 들어서
“어머니가 불러도 돌아오지 않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하고 물어 보았다.
“지금 속봉이는 사냥을 멀리 갔기 때문에 돌아오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입 니다. 손님께서는 지겨워하시지 마시고 기다려 주셔요.”
하시면서 퍽 미안해 하셨다.
속봉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어사는 먼 여행 끝에 피로하여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그 때 홀연히 안방에서 자지러질 듯한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감짝 놀란 박 문수는 문을 박차고 나와 안방 쪽을 바라보니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갓난아기의 목에는 날카로운 칼이 꽂혀 있었다. 그것은 앞을 봇 보는 속봉이의 어머니가 시렁 위의 무엇을 찾다가 주렁주렁 달린 칼(속봉이의 사냥 도구)을 떨어뜨린 것이 잘못되어서 아기의 목에 꽂힌 것이다.
어사는 급히 달려가 칼을 뽑았으나, 애석하게도 아기는 숨지고 말았다.
이 장면을 목격한 며느리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비통한 슬픔을 참기 어려웠으나 시어머니께서 눈치 챌까 염려되어 조용히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속 봉이는 산토끼를 주렁주렁 어깨에 매달고 사립문을 들어설 때 며느리는 잠깐 남편을 불러서 무슨 말인가를 귓속말로 전하니, 깜짝 놀란 속 봉이는 아내의 손을 잡고 무거운 입을 열었다.
“여보, 고맙소, 정말 장하오. 우리야 또 자식을 낳으면 되지 않소. 만약
이 사실을 어머님이 아시면 얼마나 놀라시겠소.”
하면서 아내를 따뜻이 위로하고 어머님 걱정을 하는 것이었다. 그 날 밤 어 사는 넌지시
“저녁 때 어린 아기의 비명 소리가 들려 왔는데 무슨 일이 없었느냐?”
하고 물었다. 속봉이는 태연하게
“예, 아기가 조금 불편한 모양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동이 트자 급히 상경한 어사는 이 사실을 날낱이 임금님께 아뢰었다. 이를 전해들은 숙종 대왕은 크게 감복하시고 효자 절충장군(孝子折衝將軍)이라는 벼슬과 많은 상금을 내리셨다.
그 후 조선조 영조 21년에 조정에서는 재산면 현동리에 효자각을 세우고 그의 지극한 효행을 기리도록 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효자 이 속봉이의 갸륵한 이야기는 이 고장 사람들에게 전설처럼 널리 전해오고 있다.
출전〈봉화군 봉성초등학교 우 교사〉
〈 참고 문헌 〉 孝行烈誌, 奉化郡誌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금구 이씨(金溝李氏)는 남한에 총 179가구, 83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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