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李(개성이씨)
본관(本貫): 개성(開城)
시조(始祖): 이차감(李次瑊)
유래(由來):
개성 이씨(開城李氏)의 시조(始祖) 이차감(李次瑊)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녹사(錄事)·영동정(令同正) 등을 역임하고, 개성부윤(開城府尹)을 지냈으며 누대(累代)에 걸쳐 개성(開城)에 정착 세거(定著世居)하여 왔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이차감(李次瑊)을 시조로, 개성(開城)을 본관으로 계대하고 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덕시(李德時)
덕시(德時)가 고려에서 벼슬이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이르렀고,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어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이선(李宣)
또한 세종(世宗) 때 과거에 오른 선(宣)은 덕시의 손자로 판서(判書)를 역임했다.
이광세(李匡世)
광세(匡世)는 세종 때 통훈 대부(通訓大夫)로 현령(縣令)을 지냈다.
이명기(李命基)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개성(開城). 호는 화산관(華山館). 화원으로 사과를 지낸 종수(宗秀)의 아들이며, 김응환 ( 金應煥 )의 사위로, 후사가 없어 동생 명규(命奎)의 아들 인식(寅植)을 양자로 삼았다. 화원이었으며 찰방을 지냈다.
특히, 초상을 잘 그려 1791년(정조 15)에 정조어진원유관본(正祖御眞遠遊冠本) 도사(圖寫)의 주관화사(主管 怜 師)로 활약하였고, 1796년에는 김홍도 ( 金弘道 )와 〈 서직수초상 徐直修肖像 〉 을 합작하였다. 산수화는 화중인물과 바위의 모습, 필법 등에서 김홍도의 화풍을 짙게 반영하고 있어 독자적인 개성은 뚜렷하지 못한 편이다.
석양의 뱃놀이를 소재로 삼은 〈 장범선유도 張帆船遊圖 〉 에서는 김홍도의 영향을 따르면서도 괴석(怪石)에 명암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양감을 표현하는 등 서양화법을 단편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이밖에 나비를 잘 그렸다고 하나 전하는 작품은 없다.
유작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 서직수초상 〉 · 〈 관폭도 觀瀑圖 〉 · 〈 산수인물도 〉 등과 호암미술관 소장의 〈 송하독서도 松下讀書圖 〉 등이 있다.
이환후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출전 <한미족대성보>.
항렬(行列)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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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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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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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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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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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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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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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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魯(노),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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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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植(식),東(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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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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鉉(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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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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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경),基(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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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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炯(형),忠(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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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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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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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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鎬(호),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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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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圭(규),坤(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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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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炳(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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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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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홍),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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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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鐘(종),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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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개성 이씨(開城李氏)는 남한에 총 1,530가구, 7,21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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