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徐(부여서씨)
본관(本貫): 부여(扶餘)
시조(始祖): 서융(徐隆)
유래(由來):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마지막왕, 재위기간:641- 660)의 셋째 아들 서융(隆)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부여서씨세보(扶餘徐氏世譜)」에 의하면 660년(백제 의자왕20, 신라 무열왕 7) 백제가 나당 (羅唐) 연합군의 침공을 맞아 계백(階白)의 황산벌 혈전을 마지막으로 멸망되자 의자왕은 태자 (太子) 등 2,000여 명과 함께 당(唐)나라 무장(武將) 소정방(蘇定方)에게 압송되어 그 곳에서 죽으니, 당제(唐帝)는 의자왕에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품계를 내리고 의자왕의 아들 융 (隆)에게는 서씨(徐氏)의 성(姓)을 하사(下賜)하였으며 웅진도독(熊津都督)에 임명하여 본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부여 서씨의 문호(門戶)가 열리게 되었으나 그 후의 세계(世系)가 실전 (失傳)되어 융의 원손(遠孫)으로 고려조(高麗朝)에서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태원군(太原君)에 봉해진 존(存)을 일세조(一世祖)로 받들고 부여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서익(徐益)
1542(중종 37)∼1587(선조 2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부여(扶餘). 자는 군수(君受). 호는 만죽(萬竹) 또는 만죽헌(萬竹軒). 아버지는 진사 진남(震男)이며, 어머니는 광주이씨(廣州李氏)로 직제학 약해(若海)의 딸이다.
1554년(명종 9) 13세 때 향시 ( 鄕試 )에 장원하고, 1564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병조·이조좌랑, 교리, 사인 ( 舍人 )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서천군수·안동부사·의주목사 등을 지냈다. 문장과 도덕, 그리고 기절(氣節)이 뛰어나 이이(李珥)· 정철 ( 鄭澈 )로부터 지우(志友)로 인정받았다.
의주목사로 있을 때에는 정여립 ( 鄭汝立 )으로부터 탄핵을 받은 이이와 정철을 변호하는 소를 올렸다가 파직되기도 하였다. 의주에서는 이이의 영향을 받아 육조방략(六條方略)으로써 북방을 선무(宣撫)하였으며, 돌아와서는 12책(策)을 올리기도 하였다.
충청남도 은진 ( 恩津 )의 갈산서원(葛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만죽헌집 萬竹軒集≫ 1권과 시조 2수가 있다.
서용갑(徐龍甲)
익의 아들 6형제 중 장남 용갑(龍甲)이 선조(宣祖) 때 영양 현감(英陽縣監)과 덕천 군수(德川郡守)을 지내고 광해군(光海君) 때 사색당파(四色黨派)의 하나인 대북파(大北派)가 일으킨 계축 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네째 아우인 양갑(羊甲)과 함께 화(禍)를 입었고 뒤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서필원(徐必遠)
1614(광해군 6) ∼ 1671(현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부여(扶餘). 자는 재이(載邇), 호는 육곡(六谷). 운검총제 익(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용갑(龍甲)이고, 아버지는 운기(雲驥)이다. 어머니는 이택민(李澤民)의 딸이다.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김집 ( 金集 )과 정홍명 ( 鄭弘溟 )에게 수학하였다. 1643년(인조 21) 관직에 올라 창릉참봉 · 사옹원봉사가 되었으며, 1648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관을 거쳐 예문관검열과 설서 ( 說書 )를 역임하고 1654년(효종 5)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그 뒤 사간원헌납 · 이조좌랑 · 평안도어사를 거쳤다.
1656년 수찬을 비롯, 사헌부지평 · 홍문관교리 · 이조정랑 등을 지내다 충청도관찰사가 되어서는 서원의 폐단을 보고하고 그 개혁을 청하였다. 1658년 대사간과 승지를 거쳐 전남도감사가 되었을 때, 대동법 ( 大同法 ) 시행에 찬동하여 전남도대동사목(全南道大同事目)을 반포하였다. 또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기 위해 왕대비의 삭선(朔膳)을 감할 것을 청했다가 추고되었다.
1659년 진휼을 위해 속미(贖米)를 받고 중죄인을 석방했다가 파직당하였다. 현종 초년 병조참의 · 승지 · 대사성 · 예조참의 · 이조참의 등을 거쳐, 1663년(현종 4) 대사간 · 승지 · 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목면 재배를 권장하고 구휼 사업에 힘쓰기도 하였다. 특히 육진혁막제조(六鎭革 壟 諸條)를 올려 그 지방의 폐단을 개혁하는 데 앞장섰다.
1665년에 강화유수가 되었고 그 뒤 형조참판, 1669년 형조판서를 거쳐 1671년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그 해 죽었다. 민생을 구휼하고 지방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한 실질적인 사업을 많이 하였다. 왕에게 직언을 잘하기로 이름이 나서 그 시대 이상진 ( 李尙眞 ) 등과 함께 오직(五直)이라 불렸다. 저서로 ≪ 육곡유고 ≫ 가 있다. 시호는 정헌(貞憲)이다.
서경조(徐敬祖)
필원의 아들로 목사(牧使)를 역임했다.
서정훈(徐正勳)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했다.
서계훈(徐啓勳)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를 역임했다.
서운휘(徐雲輝)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하였다.
서규달(徐逵達)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역임하였다.
서진문(徐鎭文)
현감(縣監)을 역임.
서무덕(徐武德)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세
|
항렬자
|
세
|
항렬자
|
세
|
항렬자
|
26
|
鎭(진)
|
32
|
承(승)
|
38
|
晳(석)
|
27
|
祿(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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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
植(식)
|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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裕(유)
|
28
|
榮(영)
|
34
|
炯(형)
|
40
|
世(세)
|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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勳(훈)
|
35
|
培(배)
|
41
|
鏞(용)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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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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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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鉉(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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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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潤(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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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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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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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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昶(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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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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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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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부여서씨(扶餘徐氏)는 남한(南韓)에 총 3,032가구, 13,0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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