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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고령박씨(朴)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朴(고령박씨)

 

 

본관(本貫): 고령(高靈)

시조(始祖): 박언성(朴彦成)

유래(由來):

 

고령 박씨(高靈朴氏)는 신라왕족(新羅王族)의 후예(後裔)로 박혁거세(朴赫居世)의 29세손인 경명왕(景明王: 제 54대 왕)의 둘째 아들 고양대군(高陽大君) 박언성(朴彦成)을 시조(始祖)로 하고, 후대로 내려와  어사공(御史公) 섬(暹), 부창정공(副倉正公) 환(還), 주부공(主簿公) 연(連)을 각각  기일세(起一世)하여 관향(貫鄕)을 고령(高靈)으로 삼았다.

 

가문의 중요 인물

 

박은(朴誾)

1479(성종 10) ∼ 1504(연산군 10). 조선 중기의 학자 · 시인. 자는 중열(仲說), 호는 읍취헌( 分 翠軒). 경상북도 고령 출신. 아버지는 한성부판관 담손(聃孫)이며, 어머니는 제용감직장(濟用監直長) 이이(李苡)의 딸이다.

박은은 어려서부터 범상하지 않았으며, 정신과 골격이 맑고 눈썹과 눈이 그림처럼 아름다워 속세에 사는 사람 같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4세에 독서할 줄 알았으며, 8세에 대의를 알았다. 15세에 이르러서는 문장에 능통하였으며, 당시 대제학이었던 신용개 ( 申用漑 )가 이를 기특하게 여겨 사위로 삼았다.

박은은 1495년 17세로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같은 해 사가독서자(賜暇讀書者) 선발에 뽑혔다. 그 뒤에 곧 승문원권지(承文院權知)를 받고 홍문관에 선택되어 정자가 되고, 수찬에 있으면서 경연관을 지냈다.

1498년 20세의 약관으로 유자광 ( 柳子光 )의 간사함과 성준 ( 成俊 )이 유자광에게 아첨함을 탄하는 소를 올려 오히려 그들의 모함을 받았다. 평소 직언을 꺼린 연산군은 ‘ 사사부실(詐似不實) ’ 이라는 죄목으로 파직시켰다. 박은은 1501년 23세에 파직되어 옥에 갇힘으로써 생활은 불우한 쪽으로 기울어져갔다.

파직으로 인해 경제적 · 정신적으로도 불안정하게 되자, 이때부터 스스로 세속 사람에게 용납되지 못할 것을 알고 자연에 묻혀 밤낮으로 술과 시로써 세월을 보냈다. 1503년에 어려운 가정을 힘겹게 꾸려나간 아내 신씨가 2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 이듬해에 다시 지제교 ( 知製敎 )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갈 뜻이 없었다.

박은은 갑자사화 때에 동래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의금부에 투옥되어 사형을 당했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3년 뒤 신원되고 도승지로 추증되었다. 박은은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의 대표적 시인이며, 절친한 친구인 이행 ( 李荇 )이 그의 시를 모아 ≪ 읍취헌유고 ≫ 를 냈다.

그의 시는 주로 파직된 23세부터 아내가 죽기 전까지의 것이다. 현실세계에서 벗어나 온갖 고뇌로부터 정신적으로 평화로울 수 있는 현실초극에의 노력과 주변인물의 죽음을 통한 인생무상을 노래하였다.

 

박공량(朴公亮)

∼ 1556(명종 11). 조선 중기의 문신 · 서예가. 자는 명보(明甫). 수찬 수림(秀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담손(聃孫)이고, 아버지는 은(誾)이며, 어머니는 좌의정 신용개 ( 申用漑 )의 딸이다. 진사로 출사(出仕)하여 1538년(중종 33)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고, 1540년 박사가 되었다. 이듬해 이준경 ( 李浚慶 ) 등과 함께 재이(災異)를 물리치려면 성의를 다하여 하늘을 감동시켜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1543년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가 되고 이듬해 우문학(右文學)이 되었다.

1547년(명종 2)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을 거쳐 교서관교리 및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을 지냈다. 1549년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가 되어 유생들의 분규를 막아야 된다고 상소하였다. 이듬해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내고 곧 암행어사가 되어 8도를 순행하면서 수령들의 부정을 감찰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다시 황해도를 암행하고 돌아와서 1553년 동부승지를 거쳐 우부승지를 지냈다. 1555년 참찬관 ( 參贊官 ) · 좌승지를 거쳐 특명으로 공조참판이 되었다가 이듬해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그는 글씨에 능하여 많은 금석문(金石文)을 남겼고 ≪ 중종실록 ≫ 과 ≪ 인종실록 ≫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박경업(朴慶業)

1568(선조 1) ∼ . 조선 중기의 문신. 초명은 승업(承業), 자는 응휴(應休), 호는 암수(巖 馬 ) · 추탄(秋灘). 은(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인량(寅亮)이고, 아버지는 무(懋)이다.

1594년(선조 2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헌부지평 · 장령 · 사간원정언 등을 지냈다. 1599년 공론에 좇지 않는다 하여 대사헌 홍여순 ( 洪汝諄 )을 탄핵, 파면시켰으나 홍여순이 다시 등용되자, 사헌부집의 김신국 ( 金藎國 ), 사간원사간 송일 ( 宋馹 ) 등과 함께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1613년(광해군 5) 강릉부사에 임명되었는데 강원도시(江原道試)에 부정이 있었다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이듬해 장령에 서임되고 다시 동래부사로 나갔는데 무고에 관련되어 계속적인 탄핵을 받았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직후 그에 의하여 탄핵을 받았던 공신들의 주장에 의하여 일시 유배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1628년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철산 가도( 假 島)에 진을 치고 우리나라에게 후금을 칠 것을 강요하자 감군접반사(監軍接伴使)에 임명되어 파견되었으며, 그 뒤 동지중추부사로 승진되었다.

 

박문수(朴文秀)

1691(숙종 17)∼1756(영조 32).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 이조판서 장원(長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세마 ( 洗馬 ) 선(銑)이고, 아버지는 영은군(靈恩君) 항한(恒漢)이며, 어머니는 공조참판 이세필 ( 李世弼 )의 딸이다.

〔활동상황〕 1723년(경종 3)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해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뽑혔다. 이듬 해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병조정랑에 올랐다가 1724년(영조 즉위년) 노론이 집권할 때 삭직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기용되자 다시 사서 ( 司書 )에 등용되었으며, 영남 암행어사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하였다.

이듬해 이인좌 ( 李麟佐 )의 난이 일어나자 사로도순문사(四路都巡問使) 오명항 ( 吳命恒 )의 종사관으로 출전, 전공을 세워 경상도관찰사에 발탁되었다. 이어 분무공신 ( 奮武功臣 ) 2등에 책록되고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같은 해 도당록(都堂錄)에 들었다.

1730년 대사성·대사간·도승지를 역임했으며, 충청도에 암행어사로 나가 기민(饑民)의 구제에 힘썼다. 1732년 선혜청당상(宣惠廳堂上)이 되었고, 1734년 예조참판으로 재직 중에 진주사 ( 陳奏使 )의 부사 ( 副使 )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호조참판을 거쳐, 1737년 도승지를 역임한 뒤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 때 병조 자체 내에 인신(印信)이 없어 군무의 신속한 입송(入送)에 불편을 주고, 간리(奸吏)가 중간에 농간을 부리는 폐단이 있었다.

이는 군기의 중요성에 비추어 많은 문제점을 야기할 수도 있어, 왕에게 주청해 병조판서와 이군색 ( 二軍色 )의 인신을 만들었다.

1738년 다시 동지사 ( 冬至使 )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나 앞서 안동서원을 철폐시킨 일로 탄핵을 받아 풍덕부사로 좌천되었다. 1739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었고, 1741년 어영대장(御營大將)을 역임하였다.

이어 함경도에 진휼사(賑恤使)로 나가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실어다 기민을 구제해 송덕비가 세워졌다. 다음 해 병조판서로 재직시 지리적 여건으로 봉군(烽軍)의 충원이 어려운 북도(北道)에 각 지방에 정배(定配)된 봉무사(烽武士)로서 변통할 것을 주청해 이를 시행하게 하였다.

1743년 경기도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이듬해 황해도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 1745년 어영대장에 재임되었고, 1749년 호조판서로 재직시 궐 안의 당우(堂宇)를 3년에 한번씩 수리할 때 책임관으로서 역대 어느 관료보다도 일을 잘 처리했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남기기도 하였다.

1750년 수어사 ( 守禦使 )를 역임한 뒤 영남균세사(嶺南均稅使)를 거쳐,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세손사부(世孫師傅) 등을 지냈고, 1751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1752년 왕세손이 죽자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로 책임을 추궁당하여 제주로 귀양갔다. 이듬해 풀려나와 우참찬에 올랐다.

〔치적〕 정치적으로 소론에 속하였다. 영조가 탕평책 ( 蕩平策 )을 실시할 때 명문 벌열(名門閥閱) 중심의 인사 정책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했으며, 4색(四色)의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의 실(實)을 강조하였다. 특히, 군정(軍政)과 세정(稅政)에 밝아 당시 국정의 개혁 논의에 중요한 몫을 다하였다.

1749년 영조에게 주청해 다른 신하들과 함께 ≪각전각궁공상정례 各殿各宮供上定例≫ 6권, ≪국혼정례 國婚定例≫ 2권, ≪각사정례 各司定例≫ 12권, ≪상방정례 尙方定例≫ 3권을 합해 ≪탁지정례 度支定例≫를 출판하였다. 글씨로는 안성의 ≪오명항토적송공비 吳命恒討賊頌功碑≫가 전한다.

한편, 설화로서 그가 암행어사로 활약했던 행적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박영보(朴永輔)

문수의 현손(玄孫) 영보(永輔)는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냈다.

 

박영원(朴永元)

고령  박씨가 낳은 유일한 상신(相臣)인 영원(永元)은 예조 참의(禮曹參議) 종순(鐘淳)의 아들로, 1816년(순조 1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헌종(憲宗)때  호조 판서(戶曺判書)를  지내고 사은사(謝恩使)로  청(淸)나라에 다녀왔으며 철종(哲宗) 때 우의정(右議政)에 이어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다.

 

박만(朴蔓)

조선조에서 임종(林宗)의 아들  만(蔓)이 태조(太祖)가 북수(北狩)할 때 원수(元帥)로 호종(扈從)하였다.

 

박처륜(朴處綸)

광우(光佑)의 증손  처륜(處綸)은 성종(成宗) 때 등과(登科)하여  춘추관(春秋館)의 기사관(記事官)으로  세조실록(世組實錄)과 예종실록(睿宗實錄) 편찬에 참여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라  청백(淸白)한 관리로 명성을 떨쳤다.

 

박이(朴理)

주부공(主簿公) 연(連)의 후손에서는 충렬왕(忠烈王)때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이(理)가 유명했다.

 

박진남(朴震男)

진남(震男)은 임진왜란때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의병(義兵) 활동을 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박정희(朴正熙)

근대에 와서 제 3,  4공화국(共和國: 1963 ∼ 1979)의  대통령(大統領)이었던 정희(正熙)가 유명했다.

 1917년 직강공(直講公) 숙동(叔童)의 후손이자  한말(韓末)에 사과(司果)를 지낸 성빈(成彬)의 아들로  태어나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군관학교(滿洲軍官學校)와 일본  육군사관학교(日本陸軍士官學校)를 수료, 국군창설(國軍創設)에 참여하여 육군사관학교 2기생으로 졸업한 뒤 군의 주요 지휘관을 거쳐 육군소장으로 혁명(革命)을 주도하여 대통령에 올라 주체적 민족사관(民族史觀)에 입각한  조국근대화를 촉성(促成)하고 새마을  정신을 고취(鼓吹)하여 국민의 정신혁명을 불러 일으켰으며, 경제성장과 산업화의 민족중흥에 이바지한 공(功)이 컸다.

 그러나 18년간이라는 장기집권으로 거센 비판과 저항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고, 끝내 부인과 자신이 총격으로 생을 마치는 불행을 맞았으나 신라 55대 경애왕(景哀王) 이후에 민족(民族)의 중흥(中興)을  주도(主導)한 대통령으로서 가문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朴文秀(박문수) 선생의 일화.

 

1)

     선조 할머니의 가르침.

삼남 어사의 밀명을 받고 영남으로 행하던 박문수 박어사는 길을 잘못 들어 그만 산속을 헤매게 되었다.
아무리 가도 人家(인가)는 없고 해는 저물어가며, 날씨도 추워서 너무나 암담하였다. 어두운 길을 더듬어 산을 엄고 고개를 넘어 사람 사는 곳을 찾아 가는데 멀리 저 쪽 산기슭에 희미한 불빛이 보인다.
박어사는 허겁지겁 그곳을 찾아 가보니, 조그마한 초가집에 깜박이는 등불이 켜져 있으며 안에 인기척이 난다.
[여보세요, 주인 계세요. 저는 길 가는 나그네인데 그만 이 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입니다. 오늘 하루 밤 재워 주시기 가절이 바랍니다.]

한참 뒤에 문이 열리더니 아리따운 젊은 새댁이 반 쭘 문을 열고, 남편이 멀리 볼일 보러가고 없으며, 자기 혼자 집을 지키고 있는데다, 방도 한 칸 뿐이기에, 남자는 재울 수가 없다고 하며 문을 닫아 버린다.
다급해 진 御使(어사)는 애걸복걸 재워주기를 어려 번 가천 하여 겨우 어려운 승낙을 얻고 방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부인은 부엌으로 가서 간소한 밥상을 차려 왔다. 배가 고팠던 어사는 맛있게 밥 한 그릇을 다 비웠다.

부인은 수집은 돌아 앉아 어사에게 위 묵에서 자고, 자기는 아래 묵에 자는데 절대 다른 마음을 먹어서는 아니 된다고 경고 하였다.
김은 산 속에 밤은 점점 더 깊어 가고, 사람이라고는 단 둘 뿐인데다, 곁눈으로 보니 세상에도 없는 아름다운 절세의 미인인지라 박어사는 그만 욕정이 동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넌지시 돌아눕는 척 하면서 여인에게 다리를 떠 걸어 보았다.
여인은 가만히 논으로 다리를 멀어서 내려놓는다.
한참 있다가 박어사는 다시 다리를 떠 걸어 보았다.
[허허! 이 손님 많이 피곤 사닌 모양이군. 잠버릇이 심한 것 보니....]
하며 다시 다리는 밀며 내려놓는다.
참을 수 없는 박어사는 한참 뒤에 다시 또 다리를 떠 걸어 보았다.
부인은 벌떡 이러나 불을 켜며 추산 같은 호령을 한다.
[노숙을 하면 짐승들의 박이 될까 동정하여, 집에 불러 드리고, 밥까지 채려준 은혜를 모르고 딴 마음을 먹는 것은 선비로서 있을 수 있는 일이니 마땅히 종리를 맞아 마땅하오. 어서 밖에 나가 회초리를 해 오시오!]
박어사는 양심의 가책을 받고 또한 부끄워 시키는 대로 회초리를 만들어 왔다.
부인은 어사의 종아리를 사정없이 치니 피가 줄줄 흘러 나왔다. 어사는 참을 수 없이 아팠으나 자기의 행동의 잘못을 뉘우치며 꿈 참았다.

매질을 멈춘 무인은 농문을 열고 명주를 한 필 꺼내 박어사의 종아리에서 흐르는 피를 말끔히 닦았다. 그리고
[이 피는 조상에게서 물어 받은 피니 함부로 벌릴 수 없소. 피 묻은 명주를 둘둘 배에 감아 배띠처럼 지니고 다니시오.]
날이 밝기 전에 박어사는 도망치듯 그곳을 떠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산 고개를 넘었다.

그 사건이 있은 지도 몇 달이 지난 뒤, 경상도 어는 곳을 지나다가 또 길을 잃어 헤매다가 겨우 외딴 집을 발견하고 하로밤 재워 주기를 간청하였다.

집안에는 이번에도 남자는 멀리 장사하러 가서 없고 여자만 있는데, 어사를 보고 반기면서 어서 집안으로 들어 오라하고, 잠시 뒤에 떡 벌어지게 밥상을 차러 오며, 반주까지도 겼드러 옆에 앉아 교태로운 눈웃음으로 술가지 따라 준다.

박어사는 문득 몇 달 전 종아리를 맛 던 생각이 떠올랐다.
밥상을 물리고 윗방에 마련한 잠자리에 들어 자려는데, 방문이 배시시 열리며 속옷만 입은 부인이 들어와 어사의 이부자리 속으로 드렁 온다.
박어사는 벌떡 일어나 추산 같은 꾸지람을 한다.
[재워주고 밥을 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나, 남녀가 유별한데 남편 있는 여자가 지조를 못 지키고 외간남자 가 자는 방에 딴 뜻을 품고 들어오는 것은 인륜 도덕을 어기는 행위 이며, 우리 동방예의지국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니라. 이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아니 어서 밖에 나가 회초리를 꺾어 오시오!] 하고 위엄 있게 꾸지람을 했다.

바로 그때 허깐에서 도끼를 든 사내가 방안으로 뛰어 들어 박어사에 엎드려 절을 하며
[나는 이년의 남편 되는 사람입니다. 소문에 이년의 품행이 나쁘다는 소문을 듣고, 오늘은 장사하러 간척 하다가 다시 돌아와 몰래 숨어서 정말로 나뿐 짓을 하면 남녀 모두 죽이고 나도 죽을 각오를 하고 숨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귀한 선비를 만나 내 처를 깨우쳐 주시니 이는 하늘이 보낸 옥황상제의 뜻으로 생각하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박어사는 등골이 오싹 하였다.
몇 달전 종아리 맞은 사건이 없었다면, 과연 오늘 저녁 여인의 유혹을 뮬리 칠 수 있었을까 의문이었다.

박어사는 임무를 마지고 돌아가는 길에 기억을 더듬어 종아리를 맞던 그 산골로 그 집을 찾아가 보았으나 집은 없고 입 터에 묵은 묘가 한 기 있었는데 그 묘는 바로 박어사의 선조 할머니의 묘였다.

박어사는 할머니 몸소 나타나 자기를 깨우쳐 준 고마움을 가슴에 안고 천천히 걸어서 한양을 향했다.

< 이 이야기는 필자가 어릴 때 호롱불 아래서 할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 이다.>

 

2)

박색을 괄시 안한 박어사

박문수가 등과하기 전에 진주 책방에 있을 때 한 기생과 사귀어 정이 깊었다.
그 무렵 관청에 박색이라 늙도록 시집을 못 간 물 긷는 종이 있었는데, 그 여자에게 남녀의 정을 알게 하는 사람은 큰 복을 받을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박문수가 측은히 여겨 계집종을 불러 동침하였다.

나중에 박문수가 서울에 가서 응과하여 암행어사가 되어 진주로 내려오니, 다른 기생은 초라한 행색을 보고 박대하였으나, 종은 지성껏 대접하였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박문수의 성공을 의해 하늘에 빌고 있었다 한다. 그 사실을 안 박문수는 몹시 감격하였다.
이튿날 사또가 베푼 잔치에 가서 행색이 초라한 박문수는 좌중의 멸시를 받았으나, 곧 이어  어사출두를 외쳐 비리에 젖은 관리들을 징계한 뒤, 박정한 기생에게는 벌을 주고 그 여종에게는 상금을 주었다 한다.

 

3)

박문수 빅어시가 나라 안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니던 중 날도 저물고 배도 고파 어는 집에 들어가 밥을 청하였는데 그 집에는 오누이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집에는 박어사에게 밥을 지어 줄 양식이 없어 아버지 제사에 쓸랴고 모아둔 쌀로 밥을 지어 대접하였다.

이에 감격한 박문수가 집안 형편을 살피고 나서 그들에게 근심이 있는 것 같아 사정을 물어 보았다.
그런데 오누이가 하는 말이, 소년이 어렸을 때 정혼한 처녀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집안이 기울자 청혼한 처녀가 내일 다른 곳으로 시집간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드른 박어사는 이튿날 아침, 지략을 내어 그 처녀의 아버지를 굴복시켜 전일의 약속을 지키게 하고, 또 그 처녀에게 장가올 신랑은 소년의 누이의 배필로 삼아, 같은 날 남매를 나란히 혼인시키고 재산도 나누어 주었다 한다.

 

4)

박문수의 도량

어느 백정이 돈을 주고 좌수 자리를 산 뒤 이사를 하고는, 그곳에서 양반 행세를 하며 박문수를 자기 조카라고 자랑하며 뻐기고 살았다.
박문수가 그 소문을 듣고 찾아갔으나, 그 백정이 보통 인물이 아니고 그만한 능력이 있어보여 박문수는 그냥 묵인해 주었다.
백정은 너무나 고마와 사례로 많은 선물을 보냈는데, 박문수 동생이 그 사실을 알고 백정을 혼내 주려고 달려갔다.

박문수가 몰래 백정에게 동생이 간다는 그 사실을 알렸고, 이에 백정이 대비하고 있다가 박문수의 동생을 미친 사람으로 몰아대고 광에 가둔 뒤, 크게 혼내 주어 백정을 아저씨로 인정한다는 약속을 받아 내고 풀어 주었다.
그리고 백정은 박문수 동생을 몇일간 자기 집에 묵에 하면서 잘 접대를 하고, 떠날 때 많은 선물을 주고 서로 친해졌다고 한다.

 

5)

        구천동 전설
초라한 차림을 한 박 어사는 깊은 밤중에 구천동에 이르러 불이 켜져 있는 외딴집에 찾아들었다. 마침 그 집 안에서는 주인인 듯한 한 노인이 젊은 사람을 향해 칼을 들이대며 찌르려 하고 있었다.
깜짝 놀란 박어사는 노인을 말리고, 주인을 불러내어 자초지종을 물어 보았다.
친절하게 손을 맞이한 주인은, 자신은 구재서라는 훈장인데 천석두라는 마을 부자의 흉계로 다음 날 오후에 부인과 며느리를 천석두 부자에게 빼앗기게 되어,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네 식구가 함께 죽으려 하는 것이라고 사정을 말하였다.

박 어사는 구재서를 안심시킨 뒤 그 길로 밤새 무주현을 향해 가서 황 · 청 · 흑 · 백의 네 가지 옷으로 차려 입힌 광대 넷을 데리고 다음 날 오후 구천동으로 되돌아왔다. 구재서의 집에 사모관대를 쓴 천석두가 나타나자 갑자기 누런 털이 달린 도끼를 치켜들고 귀신을 그린 깃발을 든 괴물이 들이닥쳐 초례상을 치며 흉측한 저승사자 넷을 불러냈다.

이어 저승사자에게 옥황상제의 명을 받들어 천석두를 잡아가라고 하며 결박을 지어 바람처럼 사라졌다.
박 어사는 양가집 아녀자를 빼스려는 죄로 천석두를 귀양 보내고 구재서에게 아들과 며느리를 돌려보냈다. 그 뒤부터 이 마을은 구씨와 천씨가 살았다고 하여 구천동이라 부른다.

 

6)

        상산사호의 도움

박문수가 어사가 되기 전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는 길이었다.
추풍령을 넘으려하니 해가 저물어 어느 마을로 들어갔다. 동구 앞 느티나무 아래에서 수염이 흰 노인들이 둑을 두고 있기에 청년 박문수는 그 노인들이 바둑이 끝나면 잠잘 곳을 알아보기 위해서 노인들 옆에 앉아 있었다.
바둑을 끝낸 노인들이 박문수를 바라보며,
「젊은 선비는 해질 녘에 어디로 가오?」
「예,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갑니다. 」
「곽거? 과거는 벌써 끝났다는데‥‥‥ 젊은이가 늦었구만 그래」
「아닐 터입니다. 분명 내일 모렙니다.」
「아냐, 젊은이가 잘못 안 것 아닐가?」
박문수는 혹시 그럴 수도 있는 것이라 싶기도 해서,
「그럼, 과거에 나온 詩題(시제)는 무엇이며 들으셨으면 좀‥‥」
「그래, 시제는 落照(낙조)이고, 장원 작품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 들려주지」하고, 시를 기억해 더듬 듯 천천히 외운다.

저녁 놀 붉게 토하고 푸른 산에 결렸는데
까마귀는 너울너울 구름 속에 날아드네.
나루터 묻는 나그네는 말채찍 급하고
절 찾아 가는 스님은 지팡이가 빠르구나.
목장에 있는 소는 길게 그림자를 끌고 섰고
다락 위에서 지아비를 기다리는 아낙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렸다.
푸른 연기 고목에 감도는 시내 남쪽 마을에‥‥‥

「예에? 어르신, <푸른 연기 고목에 감도는 시내 남쪽 마을에‥>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글쎄, 나도 기억 이 잘 안 나누는 구나.]
노인들은 거기까지 말하고 주섬주섬 자리를 챙겨 일어나 이리저리 흩어지는 것 이다.
[선비, 혹시 우리가 잘못 알았는지도 모르니 한양에 한번 가보기나 하라구.]
[예, 어르신들 감사합니다.]
박문수는 이상하기도 하나, 이쯤 왔으니까 한양 구경도 할 겸 서울로 가서 화인해 보니 과거 날짜는 분명 지나지 않았다.
서울에는 각처의 건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있었다. 이튿날 박문수는 마음을 단단히 하며 과거장에 나가서 선비들 틈 속에 시제가 걸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되어 시험관이 시제를 걸어 매다는 보니 놀라운 일, 바로 <낙조)가 커다랗게 쓰여 있다 <저녁놀)을 소재로 시를 쓰라는 것이다. 박문수는 이상한 일이라 생각하며 노인들이 불어 준 대로 시를 적어 갔다. 노인들이 될려 준 것을 한문으로 옮기는 것이다.
저녁 놀 붉게 토하고 푸른 산에 걸렸는데‥‥

落照吐紅掛碧山(낙조토홍괘벽산)
寒鴉尺盡白雲間(한아척진백운간)
問津行客鞭應急(문진행객편응급)
尋寺歸僧杖不閑(심사귀승장불한)
放牧園中牛帶影(방목원중우대영)
望夫樓上妾低鬟(망부루상첩저환)
蒼煙枯木溪南里(창연고목계남리)


박문수는 노인들의 지시대로 외어 썼으나 마지막 한 짝은 자기가 채워야
최는 것이다. 그는 붓을 날려
[머리 짤은 樵童(초동)이 젓대를 희롱하며 돌아오다.]
短髮樵童弄笛還(단발초동농적환)을 적어 넣었다.
자기가 읽어 봐도 神品(신품)과 같은 名詩(명시)였다.

박문수는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되니 사람들이 웅성웅성 하는 속에 시험관이 기폭에 커다랗게 「장원급제 박문수」를 금빛으로 써서
걸어주었다.
그리고 [장원급제 박문수 이리나오시오.] 하기에
[예, 나갑니다.]하며 앞으로 나갔다.
[당신의 글은 神品(신품)이요. 정말 당신의 글이오.]하고 물었다.
[예, 정의 글입니다. 남의 글이 아닙니다.]
[이상한데....... 당신의 글은 아무래도 인간의 작품 같지가 않단 말이오. 굳이 말한다면 .......]
[마지막 짝은 어떻던가요?]
[그건 인간의 작품이지만....]
[잘 보셨습니다. 무엇을 속이겠습니까. 사실은......]
박문수는 추풍령에서 겪은 노인들의 이야기를 모두 다 하였다. 시관들은 그 말을 듣고
[그 역시 신의 지시라면 그것은 당신의 복이고 운명이니 따르지 않을 수 없지요.]
그래서 박문수는 장원급제가 확정되고, 며칠 뒤 다시 추풍령 그 마을로 찾아가 노인들을 만나 보려 하였으나 그 마을만 있을 분 노인들은 없었고, 누구에게 물어 봐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노인들이 앉았던 자리로 가보니

四皓到此對局(사호도차대국)
朴文秀愛民奉公(박문수애민봉공)
        상산의 사호가 여기 와서 바둑을 두자.
        박문수는 백성을 사랑하고 공사를 잘 받들어라.

라고 하는 글만이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7)

시랑을 죽인 범인을 잡다.

박문수가 아직 관직에 나가지 않았을 때 길을 가다가 해가 저물었다.
자고 갈 집을 찾아 그 동네의 큰 집을 찾아가 하롯 밤 자고 가기를 청하니, 주인은 지금 집안에 큰 일이 생겨 경황이 없으니 다른 곳에 가서 자기를 청하라 하였다.
그러나 다른데 마땅한 곳이 없어 박 어사는 딱 하루만 신제를 지자고 간청하여 겨우 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박 어사는
「아까 경황이 없다고 했는데 도대채 무슨 일입니까.」하고 물었어보니 주인 영감이 착잡한 심정으로
「제가 말년에 접어들어 아들 하나를 두어 손이 늦을까바 초립동 이를 혼인시켰는데 몇 달도 채 되지 않아 그만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범인을 어떻게든 잡아내야 할 텐데 가슴이 답답합니다.」하며 하소연을 하는 것이었다.
박 어사는 심상치 않는 사건임을 순간 직감하고 억울함을 풀어주고 나쁜 범인을 잡아 응징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하고는 그 날 밤부터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범인색출을 위해 밤잠을 안자고 집을 지켰다.

그 집 사랑방에서 수잠(깊지 않게 겉으로만 자는 잠)을 자면서 기다리자 어는 날 밤 갑자기 누가 담을 훌쩍 뛰어서 넘어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엇다.
그 때 박 어사가 방에서 인기척을 내니 그 사람이 다시 담을 뛰어넘어 밖으로 나가버린다.
박 어사는 얼른 방문을 역고 나와 그 사람을 추적하는데 중 하나가 마을골목을 한참 돌더니 마을끝자락에 있는 절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 하였다.

박 사는 결정적인 단서를 잡고 원(관아)에 訴(소)를 내어 결국 그 사건의  범인을 밝혀내게 되었다.

그 중은 도를 닦는 데는 취미가 없고 재물에만 욕심을 내는 중으로 젊은 신부를 겁탈하고 비싼 재물을 약탈하러 들어갔다가 어린 신랑에게 발각되자 어린 신랑을 무참히 칼로 찌르고 도망갔던 것다.
그러고도 양이 안차서 홀로 있는 신부를 탐할려고 다시 나타났다가 박 어사의 지략에 꼬리를 잡히고 만 것이다.

 

8)

귀신의 도움

박 어사가 집을 나서 길을 가는데, 왠 머리를 빡빡 깎고 초립를 한 초립동이가 길을 막고는
「지금 과거시험을 보러 가시는 길이 아니냐.」고 묻더니 자기가 글을 한 수 이어 보겠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은 글 한수를 지어서 보이는 것이엇다.

낙조타향개벽산(落照他鄕開闢山)
현화척거백운간(懸花尺踞白雲間)
망부대상저조한(亡夫大喪低調恨)
심사노인장발한(深寺老人長髮恨)..........
어쩌고 하다가 한 글귀는 잊어버렸다며 피리를 불고 쏜살같이 달아나 버렸다.

이 아이는 박 어사가 억울한 한을 풀어준 죽은 초립동이 신랑이 깊은 은혜를 갚기 위해 박 어사의 눈에 나타난 허깨비였답고 단다.
박 어사는 별 해괴한 일도 다 보겠다며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과거 시험에 응시 하로 항양으로 갔다.

드디어 과거일이 되어 임금님 앞에서 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과거시험 문제로 걸린 것이 놀랍게도 '낙조(落照)'를 운(韻)으로 하는 글을 짓는 것이었다.
어쩌던 지난번 동자에게서 들었던 시게가 그대로 나와, 박 어사는  들었던 내온을 되살려 어렵지 않게 글을 지을 수 있었고 무사히 급제하였다.

즉 앞서 동자가 일러준 내용에다

천년고목계설리(千年枯木季雪裏)
단발초동롱조간(短髮樵童弄鳥間)이라는 글귀를 첨가하였는데, 앞의 구절은 신(神)의 글이고 뒤의 글은 사람의 글이라며 시험관이  매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박 어사는 과거에 급제한 후백성의 곁에 서서 부패한 탐관오리를 무수히 탄핵하고 백성들의 민생편의를 최대한으로 챙겨준 명관으로 명성을 크게 떨쳤다.
                                                                                                                      <출전: 광주의 전설>

 

 

9)

재치 있는 어린 아이

박 어사가 길을 가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맛난 는데 비를 피하러 어느 집에 들어갓다. 그 집에는 예닐곱살 쭘되는 어린이 하나가 집안에서 혼자 놀고 있기에 어사가 가만히 서있기도 뭐하고 해서 장난삼아
「아이야! 너 아버지는 어디 가셨나?」 하니 아이는
「도득놈 청에 가셨서요.」 어사는 이 아이의 아버지가 도적놈이나 되는 것으로 짐작하면서, 어사가는 다시
「그러면 니 어머니는 어디 가겼느냐?」하니
「여러 놈 옷을 벗기러 가셨어요.」라고 대답을 하는 것었다.

어사가 생각하니 어린 녀석이 거짓말을 할 리도 없고 아버지는 도둑놈이고 어머니는 행실 좋지 못한 여인임에 틀림없구나, 그러니 너 장래의 팔자도 훤하구나 생각하고 있을 때, 어린 녀석은 깔깔대며
「아저씨도 참 순박하십니다. 제가 웃기려고 한 소리인데. 도둑놈청에 간는 것은 시장에 가셨다는 뜻입니다. 시장에서는 장사를 하려면 서로 조금씩은 남을 속여야하고 때로는 속임을 당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여러 놈 옷빗기러 가겼다는 말은 방아를 찧어서 쌀의 껍질(왕겨)을 벗긴다는 뜻입니다.
감쪽같이 속으셨지요. 하-하- 하-.」

그때 그 아이 어머니가 이웃집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가?
「얘 돌쇠야. 빗자루 좀 가져오라.」는 소리가 나자. 그 아이는 비를 맞지 않고 심부름을 잘 하기 위해 개를 부르더니 꼬리에다 빗자루를 묶어 개를 어머니에게 보내어 비를 맞지 않고 심부름을 잘 하였다.

박 어사가 보니 어린 녀석이 그렇게 영특하고 야무질 수가 없었다.
나중에 박 어사는 이 아이를 점찍어 두었다가 과거에 급제한 이후 자신의 증지(비서관)로 삼아 보필하게 하였는데, 민첩한 행동과 빠른 두뇌회전으로 수많은 위기에서 어사를 구해내는 큰 역 할을 하였다 한다.
                                                                                                                    <출전: 광주의 전설>

 

 

朴彭年(박팽년) 선생의 일화.

단종복위를 위한 모의 사실이 밣혀지자 朴彭年(박팽년)은 세조로부터 친국을 받았다. 세조는 朴彭年(박팽년)의 재주를 아껴 은밀히 옥으로 사람을 보냈다.

전하께오서 역모를 꾸민 적이 없다고 말하면 실려 주신다고 했소. 국청에 나가 그리 말하시오.”

박팽년은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진국청에 나온 박팽년은 평화로운 얼굴로 의연했다.

네가 모의에 가담했는가?’

제가 가담했기에 여기에 나왔지요 나라

저런 처족일 놈을 봤나! 여보게. 저놈의 입을 찢어 버려라!” 세조는 화가 치밀어 박팽년의 입을 반쯤 찢어 놓았다.

네가 이미 신이라 일걷고 과인에게 녹을 먹었으니 지금 비록 나리라 해도 소용이 없다!”

나는 상왕의 신하로 충청감사가 되었고 장계에도 나리에게 한 번도 ()이라 쓰지 않았으며 녹은 한 톨도 먹지 않고 곳간에 쌓아 두었소. 어서 확인해 보시오, 나리.”

 

세조는 그가 올린 장계를 확인해 보았다 ()’ 자는 하나도 없고 모두 ()’ 자로 되어 있었다.

신이 아니라 사람이 임금에게 올린 장계였다. 녹은 성삼문처럼 하나도 먹지 않고 곳간에 보관되어 있었다.

박팽년의 자는 인수, 호는 취금헌이다. 성품이 치분히고 말수가 적었으며, 히루종일 딘정히 앉아 의관을 벗지 않아 남들이 스스로 공경히는 마음이 일었다. 문장이 매우 화려하고 맑았으며, 글씨는 왕희지를 본받았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朴彭年(박팽년) 선생의 일화.

박팽년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무렵, 이들 순의 아내 이씨가 마침 임신 중이었다. 조정에서는 이들을 넣거든 죽이라고 이미 세조 가영을 내렸었다.

때마침 박팽년의 종이 임신 중이었다. 종이 스스로 말했다.

주인이 딸을 낳으면 다행이요, 비록 나와 함께 이들을 넣더라도 내가 낳은 아들을 대신 죽게 하리라.”

마침내 주인은 사내 이이를 낳고 종은 딸을 낳았다. 즉시 바꿔치기를 하여 종이 사내아이를 자식으로 삼, 이름을 박비라 지었다.

그가 장성한 순의 동서 李克均(이극균)이 박비를 자수시켰다. 성종이 박비를 용서하고 이름을 박일신으로 고쳤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朴彭年(박팽년) 선생의 일화.

 

박팽년이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죄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대들은 나를 난신이라고 생각지 말라. 우리들의 죽음은 계유 때 사람(김종서 등)과 같지 않다.”

이때 금부도사 김병종이 몹시 안타까워 물었다.

공께서는 어찌 이런 화를 막히십니까?’

나라의 중심이 불평하니 할 수 없네.”

그는 일찍이 지조와 절개를 뜻하는 단가를 남겼다.

 

금생려수라 한들 물마다 금야 냐며

옥출곤강이라 한들 뫼마다 옥이나랴

아무리 여필종부라 한들 임마다 쫓을 소냐.

 

그의 부인 이씨는 관비가 되어 평생을 수절하며 생을 마쳤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6

履(이),羽(우)

奎(규)

31

鏞(용),培(배)

烈(열)

36

成(성),裁(재)

27

永(영),覃(담)

賢(현)

32

浩(호),遇(우)

在(재)

37

起(기),弘(홍)

28

彬(빈),大(대)

英(영)

33

九(구),胤(윤)

欽(흠)

38

慶(경),康(강)

29

熙(희),仁(인)

河(하)

34

炳(병),南(남)

39

新(신),宰(재)

30

在(재),煥(환)

仁(인)

35

河(하),來(래)

40

重(중),秉(병)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령 박씨(高靈朴氏)는 남한(南韓)에 총  8,541가구, 35,52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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