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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김씨(金)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金(광산김씨)

 

본관(本貫): 광산(光山)

시조(始祖): 김흥광(金興光)

유래(由來):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명문(名門)으로 손꼽히는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신라왕실(新羅王室)의 후예인 김흥광(金興光)이 장차 국난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경주(慶州)를 떠나 광주(光州)의 서일동(西一洞)에 은거(隱居)하여 시적(始籍)하게 되었으며, 고려조

(高麗朝)에서 정2품직인 평장사(平章事)를 많이 배출하여 마을 이름을 평장동(平章洞)이라 불렀다.

 

 고려초기(高麗初期)부터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한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시조의 10세손 체의 아들 위()와 주영(珠永) 형제대()에서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져 광세(光世)와 광존(光存)의 양대 산맥으로 이어진다.

 

가문의 중요 인물

 

김경량(金鏡亮)

광세(光世) 아들 경량(鏡亮) 대장군(大將軍)에 올랐고, 손자(孫子) ()는 삼별초(三別抄)의 난 때 순절하였으며, 주정(周鼎)은 충렬왕(忠烈王) 때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역임 했다

 

김광재(金光載)

1363(공민왕 12). 고려 후기의 문신. 자는 자여(子輿), 호는 송당(松堂).태현(台鉉)의 아들이다. 충선왕 때 문과에 급제해 성균학관이 되었다.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던 공로로 사복시승(司僕寺丞)에 승진했고, 이어 도관정랑(都官正郎)이 되었다.

1339(충혜왕 복위 1) 조적(曺 使 )이 난을 일으켰다가 죽임을 당한 뒤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갈 때 호종하였다. 고려에 돌아와서 군부총랑(軍簿摠郎)이 되고, 이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올랐다. 이 해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 이군준(李君俊)과 함께 진사를 시취하였으나 강직한 성품으로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하자 우부대언(右副代言)이 되고 지신사(知申事)에 올랐다. 대신들이 아부하지 않는다고 모함해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전임되었다. 그러나 곧 밀직부사 · 제조전선(提調銓選)을 지내고, 지사사(知司事)에 승진하였다. 1349년 충정왕이 즉위하자 서연(書筵)을 설치하고 그 사부(師傅)가 될 것을 요청했으나 이를 사양하였다.

이에 다시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임명되어 인사권을 맡았으나 덕녕공주의 정사 간섭이 심해 물러났다.

 

그 뒤 덕녕공주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1350(충정왕 2) 삼사우사(三司右使)가 되었는데, 이 때 정방(政房)에서 문선(文選)과 무선(武選)을 총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건의해 이를 시정하도록 했으며, 전리판서(典理判書)를 겸직하였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한 후 12년간이나 은거하며 어머니를 봉양했고, 어머니가 죽자 여막에서 상을 마쳤다.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그가 사는 곳을 영창방 효자리(靈昌坊孝子里)라 정표(旌表)하고, 그 마을의 호() 일부에 부역과 조세를 면제해 그에게 이를 봉사하게 하였다. 그는 효제(孝悌)에 힘써 생산에 관심이 없었고, 항상 거문고와 글을 가까이 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김성원(金性源)

세종조(世宗朝)에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낸 예몽(禮蒙)의 아들 성원(性源)은 세조(世祖) [동국여지승람(東國與之勝覽)]을 편찬했고, 손자 구(絿) 중종(中宗) 때 조광조(趙光祖)의 혁신정치에 동조한 소장파로 김 (金 淨김 식(金 湜 ( ) 등과 더불어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일컬어졌으며 뛰어난 필법과 명문장으로 외교문서를 집필했고 그가 살던 인수방(仁壽坊)의 마을 이름을 붙여 인수체(仁壽體) 필체가 생겨났다.

 

김구(金絿)

1488(성종 19) 1534(중종 29). 조선 중기의 문신 · 서예가. 자는 대유(大柔), 호는 자암(自庵) 또는 삼일재(三一齋). 의몽(義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예(司藝)이고, 아버지는 대흥현감(大興縣監) 계문(季文)이며, 어머니는 이겸인(李兼仁)의 딸이다.

거주지는 서울 인수방(仁壽坊)이었고, 충청도 예산에도 근거지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해 1503(연산군 9)에 한성시(漢城試)에서 일등으로 뽑혔고, 1507(중종 2) 생원 · 진사시에서 모두 장원을 차지해 시관을 놀라게 하였다.

6년 뒤인 1513년에 별시 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한 뒤, 홍문관정자를 거쳐 전경(典經) · 사경(司經) · 부수찬 등을 지냈다.

1515년에는 기준(奇遵)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했고, 이어서 홍문관 · 수찬부교리를 거쳐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이 되었다. 신병으로 일시 사직했다가 다시 관직에 나가 이조좌랑 · 정랑 · 사간 · 홍문관직제학 · 동부승지 · 좌승지 등을 지냈다.

15195월 같은 사림파인 김식(金湜)이 성균관대사성이 되자, 그의 후임으로 홍문관부제학이 되었다. 이로 인해 사림파는 관료들을 육성하는 성균관과 문한 · 언론기관인 홍문관을 장악해 그들의 세력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151911월에 훈구 세력이 일으킨 기묘사화로 개령(開寧)에 유배되었다가 수개월 뒤에 죄목이 추가되어 남해로 이배되었다.

남해에 이배된 지 13년 만에 임피(臨陂)로 가깝게 옮겼다가, 2년 뒤에 풀려나와 고향인 예산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하지만 유배중 부모가 모두 죽고 그 때문에 그도 병을 얻어 죽었다.

그 뒤 선조 때 그가 지은 종계변에 관한 표문(表文)이 명나라로부터 호의를 얻어 그 공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광국공신(光國功臣)에 녹훈되었다.

일찍부터 성리학 연구에 전념해 학문 실력이 조광조(趙光祖) · 김식과 겨눌만했다 한다. 전고대방 典故大方 의 문인록에 의하면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음률에도 능통해 악정(樂正)에 임명된 적이 있으며, 글씨에도 뛰어나 안평대군 용(安平大君瑢) · 양사언(楊士彦) · 한호(韓濩) 등과 함께 조선시대 전기 서예계의 4대가로 손꼽힌다.

서체가 매우 독특해 그가 살았던 인수방의 이름을 따서 인수체(仁壽體) 라고 했으며, 중국 사람들까지도 그의 글씨를 사갈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시독관(侍讀官)으로도 활약해 중종으로 하여금 사림파의 개혁 정치에 적극 호응하도록 하였으며, 조정의 일에 임해서는 매우 강개하였다. , 조광조와 함께 소격서(昭格署)의 혁파에 앞장섰고, 사림파 대간(臺諫)의 현실 개혁 상소에도 적극 후원하였다.

예산의 덕잠서원(德岑書院)과 임피의 봉암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자암집 自庵集 , 유품으로는 자암필첩 自庵筆帖 · 우주영허첩 宇宙盈虛帖 과 예산 소재의 이겸묘지 李謙墓誌 등이 있다. 또 단가 3수와 화전별곡 花田別曲 이 그의 문집에 전한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김극성(金克成)

1474(성종 5)1540(중종 3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성지(成之), 호는 청라(靑蘿우정(憂亭). 남호(南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중로(仲老)이고, 아버지는 진사 맹권(孟權)이며, 어머니는 전삼달(全三達)의 딸이다.

1496(연산군 2) 생원시에 장원하고, 1498년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전적에 임명되어 종학사회(宗學司誨)를 겸하였다. 1500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얼마 뒤 헌납에 발탁되었으나 연산군에게 충심으로 간하다가 죄를 입을 뻔했고, 이어 병조정랑· 사인(舍人)등을 역임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에 가담,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어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임명되었다. 이듬 해 부모 봉양을 위해 외직을 빌려 서천군수로 부임하였다. 이어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병조참의를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의주목사로 갔다가 1518(중종 13) 삼공(三公)에 문무 겸비의 인물로 천거되어 예조참판으로 전임되었다. 다시 경상우병사·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이듬 해 공조참판으로 정조사(正朝使)에 임명되어 북경을 다녀왔다.

 

대사헌을 거쳐 1523년 예조판서·우참찬·이조판서를 지내다가 잠시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다시 찬성·병조판서 겸 지경연 세자이사로 있다가,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받아 그 일파의 모함으로 1531(중종 26) 정광필(鄭光弼)과 함께 흥덕(興德)에 유배되었다. 이듬 해 김안로가 죽자 귀양에서 풀려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비교적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서 매사에 신중하고 자세했으며, 세 번이나 예조판서를 지낼 만큼 문학에 뛰어났고 간결하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당시 사림과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하였다. 저서로 우정집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김약채(金若采)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아버지는 광성군 정(光城君鼎)이다.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성품이 강직하여 권세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왕 때 좌사의(左司議)로 조반(趙 獨 )의 옥사를 다스리는 데 참여하였는데, 염흥방(廉興邦)이 기필코 조반을 무복(誣服 : 강제를 당하여 없는 죄를 있다고 자복하고 형벌을 받음)시키려고 참혹하게 다스리자, 홀로 불가하다고 주장하여 마침내 조반을 석방하게 하였다.

염흥방은 그 뒤 죽음을 당하여 조야가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1388(우왕 14)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때, 지신사(知申事)로 이에 항거하였다 하여 외방에 유배되었다.

1400(정종 2) 문하부좌산기(門下府左散騎)로 있을 때에는 훈친(勳親)들에게 사병을 허여하는 제도를 없애고, 병권을 모두 중앙에 집중시키자고 역설하여 단행하게 하였다. 그 뒤 대사헌을 지내고, 1404년 충청도도관 .찰사었

 

김약항(金若恒)

약채(若采)의 아우 약항(若恒)은 공민왕 때 대사성(大司成)으로 사신(使臣)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표문(表文)이 공손치 못하다고 하여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양자강변에 유배(流配)되었다가 마침내 돌아오지 못하였다. 뒤에 황제의 노여움이 풀려 가족에게 시체를 찾아가라고 하여 늙은 여종이 부인이라고 핑계하고 남경까지 가서 시체를 찾아왔다

 

김처(金處)

약항(若恒)의 아들 처()는 아버지가 외국에서 죽었으므로 충격을 받아 미친병이 들어 소리 내어 울고 밤에는 싯귀(詩句)를 길게 읊으면서 잠시도 쉬지 않고 비틀거리고 다녔으며, ()는 벼슬이 부정(副正)에 이르렀고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어머니 상()을 당하자 여막(廬幕) 벽에다가 효경(孝經)의 상친장(喪親章)을 써서 붙이고 날마다 바라보며 읽고 눈물을 흘리며 목이 메도록 울기를 3년 동안 조금도 쉬지 않았으니 그 비참하게 우는 소리에 듣는 사람이 눈물을 지었다고 한다.

 

김국광(金國光)

1415(태종 15) 1480(성종 11). 조선 전기의 문신 · 공신.자는 관경(觀卿), 대사현 약채(若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검열(檢閱) ()이고, 아버지는 사헌부감찰 철산(鐵山)이며, 어머니는 김명리(金命理)의 딸이다.

1441(세종 23)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를 거쳐 박사에 이르렀다. 1445년에는 의영고부사(義盈庫副使)에 이어 황해도도사 · 성균관주부(成均館主簿) ·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을 역임하였다.

14484월에는 사은사(謝恩使) 이사임(李思任)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2(세조 1) 12월에는 교리로서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책훈되었다. 당시 할머니의 상을 입고 있었으나 이듬 해 복을 벗고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임명되었다.

14584월 최옥산(崔玉山)의 살부사건(殺父事件)이 일어나자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로서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무고임을 밝혀내는 데 공을 세워, 세조의 신임을 얻어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임명되었다. 이어 성균사예(成均司藝) ·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을 역임하였다.

1460년 사섬시윤(司贍寺尹)에 임명되고 이어서 동부승지 · 우부승지 · 좌부승지를 거치면서 새로운 형전(刑典) 편찬을 주도했으며, 그 해 10월 병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세조는 그의 박식한 재능을 높이 평가해 직접 사지제일(事知第一) 4자를 써서 하사하고, 당시 승지들이 모두 탄핵을 받자 가도승지(假都承旨)로 임명해 왕명 출납을 전담하도록 하였다.

146410월 호조판서를 거쳐 이듬 해에는 동지중추원사가 되고, 14664월에는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4674월 우참찬 겸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그 해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의정부우찬성 겸 병조판서로서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으로 책훈되고 광산군(光山君)에 훈봉되는 동시에 좌찬성 겸 세자시강원 이사(貳師) · 병조판서 · 오위도총부도총관 · 춘추관지사(春秋館知事)에 올랐다. 이어 행해진 건주위(建州衛) 정벌에도 공을 세워 군공(軍功) 3등에 책훈되었다.

1469년 세조가 사망하고 예종이 즉위하자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원상(院相)이 되어 국정을 맡았으나, 그 해 10월에 겸병조판서에서 해임되고 좌찬성으로서 국정에 참여했다. 이듬 해 5월 충청도와 전라도의 문폐사(問弊使)로 내려가 여러 가지 폐정 시정에 노력했으며, 8월에는 우의정이 되었다.

1470(성종 1) 4월 좌의정으로 옮기고 5월에는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 해 3월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에 책훈되고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8월에 그의 아우 정광(廷光)과 사위 이한(李 鼈 )의 부정 사건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다만 원상과 영경연사(領經筵事)만을 겸하였다.

 

그 뒤 사헌부 · 사간원 등 대간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치면서도 14765월 원상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원상으로서 국방 · 외교 · 법전 편찬 등의 국정 자문에 응하고 경연관으로서 국왕 보도의 직책을 수행하였다. 147710월 영중추부사를 거쳐 이듬해 6월 다시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대간의 심한 반발로 사직하였다.

일찍이 세조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어 경국대전 편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시호는 정정(丁靖)이다.

 

김겸광(金謙光)

국광(國光)의 아우 겸광(謙光)은 성종(成宗)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좌리삼등공신(佐理三等功臣)으로 광성군(光城君)에 봉해졌다.

 

김극핍

겸광(謙光)의 아들 극핍은 연산군 때 바른 말을 하다가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고산현(高山縣)으로 유배되었고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탄핵을 받아 일생을 귀양지에서 생활했었다

 

김개(金鎧)

극뉴의 손자(孫子) ()는 명종(明宗) 때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오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김계휘(金繼輝)

증손(曾孫) 계휘(繼輝)는 선조(宣祖) 때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고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에 능통하여 국사가 있을 때마다 자문에 응했다

 

 

김장생(金長生)

조선 예학(禮學)의 종주(宗主)로 가문(家門)에 명문(名門)의 뿌리를 더욱 깊이 내리게 한 사계(沙溪) 장생(長生)1548(명종 3) 대사헌(大司憲) 계휘(繼輝)의 아들로 태어나 당대에 8문장가로 이름난 송익필에게 예학을 배우고 석학(碩學) 이율곡(李栗谷)에게 성리학(性理學)을 전수받아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쌍벽을 이룬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영수가 되었다. 천성이 겸손하며 어질고 후하여 자연히 도()에 가깝고 학문하는 방법은 한결같이 종자(種子)와 주자(朱子)를 법으로 삼아 세상살이의 화려함을 싫어하였으며 당시의 예()에 관한 질문은 모두 그에게로 왔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맨 먼저 장령(掌令)에 임명하면서 안거(安車 : 늙고 병든 사람이 편안하게 탈 수 있는 수레)와 임금의 친서(親書)를 보내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병든 몸으로 여러 훈신들에게 글을 보내기를 <시종(始終) 삼가하여 임금의 덕을 잘 보도하며 묵은 폐단을 개혁하고 형벌을 신중히 하며 공도(公道)를 넓히고 사사로이 가까운 내시, 궁녀 등을 경계하며 염치를 존중하고 검약을 몸소하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의 글이 임금에게까지 알려지고, 임금이 그의 재능과 덕망을 정치에 이용하고 싶어 초조해 했다고 한다. 벼슬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그쳤으며 83세에 연산(連山)에서 생을 마치며 후손에게 다음 두 가지 유훈(遺訓)을 남겼으니, <첫째 영정(影幀)은 머리칼 하나가 틀려도 제 모습이 아니니 쓰지 말 것, 둘째 내 자손이 수십 대에 이르더라도 의()를 두터이 지낼 것> 이었다그가 남긴 [경서변의(經書辯疑)] 8, [의례문해(疑禮問解)] 8,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1, [가례집람(家禮集覽)] 3, [상례비요(喪禮備要)] 1권 등 총21권의 저서(著書)는 한국(韓國)의 예전(禮典)으로 평가된다.

 

김집(金集)

장생(長生)의 예학은 아들 집()에게 이어지고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에게 전승되어 조선 예학(禮學)의 태두로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했다. 집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남보다 특이하여 충신효제(忠信孝悌)로서 몸을 세우는 근본을 삼았으며, 이치를 탐구하고 경()를 주장하는 것으로 도학(道學)의 터전을 삼았다.

 

1646(인조 24) 산적(山賊) 류 탁(柳 濯) 등이 난을 일으켰는데 그 무리들에게 류 탁이 말하기를 "김승지(金丞旨 :  ) 집을 지나가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 경연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흉악한 무리들도 어진 사람을 두려워 하고 피할 줄은 안다"하였다.  그는 아버지(長生) 40여 년간 모셨는데 그 부자(父子)의 법도를 지켜 아들이 질문했을 때 아버지는 몸이 앓는 일이 있어도 단정히 앉아서 대답한 것이라든지, 각상(各床)과 각방(各房)에서 밥을 먹을 때 아버지의 젓가락 놓는 소리를 듣지 않고는 미리 밥상을 물리는 법이 없었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그는 부인 유씨(兪氏)의 성품이 분명하지 못하여 부부의 도리를 갖출 수가 없어 마침내 이율곡(李栗谷)의 서녀(庶女)를 얻어 첩을 삼았는데 어질고 여공(女工)을 잘하였다. ()씨 부인이 죽자 그의 아버지 사계(沙溪)는 아들이 상처하였으니 후처를 얻어 아들을 낳아서 선대를 계승할 수 있겠다고 속으로 좋아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각각 운명이 있는 법인데 운명이 좋지 않아서 먼저 사람(유씨)과 짝이 되어 평생동안 욕을 보았는데 이제 비록 다시 장가 든다고 하여도 꼭 먼저 사람보다 나을 줄 알겠습니까" 하며 대()를 잇지 못하였다.

 

김익희(金益熙)

한편 이조 참판(吏曹參判) (: 사계의 아들, 집의 아우)의 아들 익희(益熙)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척화론자(斥和論者)로서 화의를 반대했고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에 가서 독전어사(督戰御史)로 싸웠으며, 그의 아우 익겸(益兼)은 병자호란 때 어머니 서씨(徐氏)를 데리고 강화(江華)에 들어가 성()을 사수하다가 함락되기 직전에 김상용(金尙容)과 함께 남문(南門)에 올라가 자폭하여 영의정에 추증되고 광원부원군(光源府院君)에 추봉되었다.

 

김익경(金益炅)

현종(顯宗) 때의 예조 참판(禮曹參判) 익경(益炅)은 죽은 인선왕후(仁宣王后)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에 송시열 등과 함께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하다가 양성(陽城)으로 귀양 갔다.

 

김만중(金萬重)

인경왕후(仁敬王后 : 숙종의 비)의 아버지인 만기(萬基)와 효자(孝子만중(萬重)은 익겸(益兼)의 아들로서 형제가 나란히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한 명신(名臣)이다. 특히 만중(萬重)은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남을 평생의 한으로 삼고 홀어머니 윤씨(尹氏)의 곁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다고 하며 어머니를 즐겁게 해주기 위하여 밤낮으로 어머니와 얘기하며 동물 흉내와 어린이 흉내까지 내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남해(南海)의 유배지에서 쓴 한글소설 [구운몽(九雲夢)]은 부귀공명이 일장춘몽이란 내용으로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하여 썼다고 한다.

 

김인경(金仁慶)

1514(중종 9) 1583(선조 16).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경유(景裕). 아버지는 호조참의 헌윤(憲胤)이며, 어머니는 용인이씨로 동지중추부사 안세(安世)의 딸이다. 중종의 딸 혜순옹주(惠順翁主)와 결혼하여 1522(중종 17) 광천위(光川尉)에 봉해졌다.

1527년 기묘사화 때 피해자인 사림파의 김안로(金安老)가 기묘사화의 주동자였던 심정(沈貞) 등을 제거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이며 중종의 맏사위인 희()를 사주하여 이른바 작서(灼鼠)의 변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처음 누구의 처사인지 모르다가, 결국 무격을 좋아하였던 그의 장모 혜빈 박씨(惠嬪朴氏)가 용의자로 지목을 받아 아들 복성군 미(福城君嵋)와 함께 서인이 되어 쫓겨났다.

 

이때 그도 연좌되어 상주로 장배(杖配)되었고, 1533년에는 부인 혜순옹주마저 서인으로 폐출되어 경상도 상주로 유배되었다. 같은 해 앞과 똑같은 사건이 다시 일어나 경빈 박씨가 사사(賜死)된 뒤 서인으로 폐출된 부인과 함께 서천으로 이배되었다가 이듬해에 공주로 양이(量移)되었다.

그 동안 정권을 장악하고 횡포가 아주 심하였던 김안로가 중종비 문정황후(文定皇后) 의 폐위를 도모하다가 사사된 뒤 혐의가 풀려 1537년에 관작이 복구되었다. 그 뒤 원종공신에 봉해졌고, 종실과 부마들만이 모여 벌인 백일장에서 장원, 통헌대부(通憲大夫)에 가자되었다.

 

김언기(金彦璣)

1520(중종 15) 1588(선조 21).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온(仲 訪 ). 호는 유일재(惟一齋). 아버지는 성균진사 주(), 어머니는 순흥안씨(順興安氏) 처정(處貞)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67(명종 22)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그는 일찍이 구봉령(具鳳齡)과 함께 청량산(淸凉山) 에 들어가 10년을 기약하고 글을 읽다가 연고가 있어 구봉령보다 1년 앞서 돌아왔다. 산에서 내려오며 둘러보니 암애(巖崖)와 초목이 모두 읽던 책의 글자로 보였다 한다.

도산(陶山) 근처에 살면서 서사(書舍)를 지어 유일 이란 편액을 걸어놓고 후진을 교육하였다. 문하에서 남치리(南致利) · 정사성(鄭士誠) · 권위(權暐) ·· 권태일(權泰一) 등 훌륭한 인물들이 배출되어 당시 안동의 학문진흥의 창도자로 알려졌다.

이황이 죽은 뒤에는 여강서원(廬江書院)을 세우고, 백련사를 철거하여 유학을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데 노력하였다. 저서로는 유일재집 1권이 있다. 안동의 용계서원(龍溪書院)에 제향되었다.

 

김규

전적(典籍) 세우(世愚)의 아들 규는 명종(明宗) 때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벼슬이 판윤(判尹)에 이르렀다.

 

김덕령(金德齡)

임진왜란의 명장(名將) 덕령(德齡)은 충절(忠節)로 가문(家門)을 빛낸 자랑스런 인물(人物)이다.  그는 1567(명종 22) 광주 석지촌에서 붕섭(鵬燮)의 아들로 태어나 성리학(性理學)의 대가(大家)인 성 혼(成 渾)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연마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성 현감(長城縣監) 이 귀(李 貴)의 천거로 익호장군(翼虎將軍)의 호()를 받고 의병(義兵)을 정돈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어 권 율(權 慄)의 휘하에서 수차에 걸친 전쟁에 공()을 세웠다. 그는 젊어서부터 뛰어난 용맹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일찍이 이 귀(李 貴)가 그를 천거하는 글에 <지혜는 공명(孔明)과 같고 용맹은 관우(關羽)보다 낫다> 하였다

 

1596(선조 29) 이몽학(李夢鶴)이 홍산(鴻山)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토벌하려다가 이미 진압되어 도중에 회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신경행(辛景行 : 당시 충청도 순찰사 종사관)의 무고로 국문을 받다가 옥사(獄死)했다그가 임전했을 때는 항상 철퇴 두 개를 허리에 차고 다녔는데 그 무게가 백 근이나 되어 팔도에서 그를 신장(神將)이라 불렀고, 왜군들도 그의 용맹을 무척 두려워 했다고 한다. [난중잡록(亂中雜錄)]에 의하면 왜장 기요마사(加藤淸正)는 그 명성을 듣고 몰래 화공(畵工)을 보내어 그 얼굴을 그려다가 보고는 <참으로  훌륭한 장군이다>하고 항상 계엄하였고, 뒤에 덕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술을 마시고 기뻐 날뛰면서 "이제 양호(兩湖)는 걱정이 없다"고 했다고 한다

 

김만수(金萬壽천수(千壽백수(百壽구수(九壽) 4형제

한편 만수(萬壽천수(千壽백수(百壽구수(九壽) 4형제는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일으켜 유극량(劉克良)의 군대와 장단(長湍)에 합세하여 임진강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김질간(金質幹)

선조(宣祖) 때 대북(大北)의 지도자였던 질간(質幹 : 이조 참판을 역임)[동몽훈설(童蒙訓說)]을 저술한 진우(震羽), 호남(湖南) 8문장의 한 사람인 공선(公善) 등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김영남(金潁南) 김우형(金宇亨)

선조(宣祖) 때 포도시(葡萄詩)로 중국(中國)에까지 명성을 떨쳤던 영남(潁南)과 숙종(肅宗때 예서(隸書)에 능했고 [옥산유고(玉山遺稿)]를 남겼던 우형(宇亨 : 공조판서를 지내고 기로소에 들어감)이 뛰어난 인물이다.

 

김진(金搢)

1585(선조 1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기중(起仲), 훈재(訓齋) · 영재(詠齋). 한웅(漢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 , 또는 )이고, 아버지는 부사(府使) 윤국(潤國)이며, 어머니는 우성정(禹成鼎)의 딸이다. 1610(광해군 2) 생원시에 합격하고, 그 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12년 설서(說書) · 검열을 지내고, 이듬해 봉교(奉敎정언(正言)을 거쳐, 1627(인조 5) 정주목사로 있을 때 정묘호란을 당하였다. 능한산성의 수성장(守城將)과 정주절제사(定州節制使)로서 항전하다가 포로가 되었다. 1630년에 송환되어온 다음, 예안현감(禮安縣監)이 되었다.

 

그러나 적에게 항복하였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았고, 김청중사건(金淸中事件)을 계기로 관직을 박탈당하고 위원(渭原)에 충군(充軍)되었다가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에 힘썼다. 저서로는 신보휘어 新補彙語 가 있는데, 모두 5960책으로 목활자본을 비롯하여 몇 종의 판본이 전한다 9

 

김양택(金陽澤)

영조(英祖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양택(陽澤)은 부제학(副提學)과 대사성(大司成우의정(右議政)을 거쳐 1776(영조  52) 영의정(領議政) 올랐다.

 

김상복(金相福)

1714(숙종 40)1782(정조 6). 조선 후기의 문신.자는 중수(仲受), 호는 직하(稷下) 또는 자연(自然). 장생(長生)의 후손이며, 승지 만균(萬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 진옥(鎭玉)이고, 아버지는 한성판윤 원택(元澤)이며, 어머니는 심정보(沈廷輔)의 딸이다.

1740(영조 16)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고, 곧 한림(翰林 : 예문관검열의 다른 이름)에 천거되어 문장으로 이름이 났다. 1742년에는 사대부의 지기(志氣)를 강조하는 소를 올렸다.

삼사를 두루 거치고 이조·호조·예조·병조의 참의를 거쳐 1760년에는 예문관제학·이조판서에 임명되었고, 호조판서·예조판서·한성판윤·홍문관제학을 지냈다. 176311월에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1772년에 영의정까지 오르는 등 14년간 정승을 지냈다.

 

1775년 영조로부터 홍인한· 정후겸등이 왕세손의 대리청정을 막아 세손을 해치려 한다는 서명선의 소를 평가하라는 지적을 받았다. 평소 당시 권신인 홍인한을 비난하는 쪽이었으나 모호한 답변을 해 정조가 즉위하자 바로 경상도 평해로 정배되었다가 곧 공주로 이배되었다. 이듬해에 귀양이 풀리자 고향인 결성에서 은거하면서 두문불출하였다.

그는 겉으로는 평온하나 안으로 강해 큰 뜻을 가졌으면서도 시세가 계속되지 못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평소 청빈하고 검소한 생활로 유명하며 죽을 때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1800(정조 24)에 신원되어 복관(復官)되었다.

어제수덕전편 御製樹德全編을 편찬했고, 저서로 통색문답 通塞問答1, 백암당대선사비명 柏庵堂大禪師碑銘등이 전한다.

 

金德齡(김덕령)선생의 전설-1.

 

김덕령과 누이의 재주겨루기.

 

옛날에 만고 충신 김덕령은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을 정도로 힘세고 응맹스러운 장수였다.

그런데 흔히들 김덕령만 똑똑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의 누이는 훨씬 더  똑똑하고 힘도 보통이 아니고 앞날을 내다보고 상황을 판단하는 지혜가 남달랐다.

 

어디에 두 사람이 있는데. 어떤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란 때문에 조금 못한 사람은 별것 아니며. 늘 눌려서 제대로 커나갈 수 없다.

이래서 덕령의 누이는 재주로 한다면 자기가 더 비길 바 아니지만 여자는 한번 출가외인이 되면 그것으로 그만이고 남자인 자기 동생이 출세해야 집안에 영광이 찾아온다고 생각하였다.

자기 동생을 높은 사람을 만들기로 마음을 먹은 누이는 어느 날 저녁 동생을 불러 이러한 제의를 하였다.

 

덕령아 우리 재주시합 한 번 하자구나. 이건 장난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너는 말을 타고 집을 나서서 무등산을 한 바퀴 빙 돌아서 오고 나는 그사이에 도포 1벌을 지어야 한다. 이 시합에서 진 사참은 이긴 사람을 위해서 기꺼이 죽어주는 거다.

우리 오누이는 서로 재주가 엇비슷하게 뛰어나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해내기에는 둘이 있어서는 어려운 일이 많다. 그래서  니라를 위해 공을 세울 기회를 한사람에게 확실히 밀어 주기 위해서 이 시합을 하는 거지 추호도 다른 뜻은 없다.

 

누이의 무거운 목소리의 이야기가 끝나자 덕령은 얼굴빛이 어두워져 언젠가는 이날이 을 것으로 짐작 했지만 그 날이 너무도 빨리 온 것에 적잖이 당황하였다.그러나 자기는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누이를 제대로 당해낼 재주가 없었음을 이미 알고였으니까.

 

덕령은

이제 조그마한 뜻도 펴지를 못해보고 죽는구나. 누나도 야박하시지. 동생을 꼭 죽게 만들어야만 하나.하면서 착잡한 심정에 쌓였다.

 

하지만 일이 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차피 한번 죽을 목숨 최선을 다해 하는 데까지 해보기로 결심하고는 마굿간에 가서 말을 꺼내어 왔다.

「용마야! 오늘은 너의 주인인 내 목숨이 경각에 달린 날이다. 우리 둘 다 최선을 다 하자.고 단단히 일렀다.

 

그때 누이는 방안에 옷감과 바느질 도구를 준비해놓고 동생은 대문 앞에 말을 매워두고 서로 시작이라는 구두신호의 외침에 따라 피를 말리는 시합이 시작된 것이다.

 

누이는 애당초 져줄 것을 생각하고 벌인 시합이었지만 막상 여기서 지면 죽어야 한다는 생각에 착잡했다.

 

덕령은 힘껏 채찍을 내려치며 말을 달렸고 누이는 누이대로 열심히 도포를 지어갔다.

누이는 어찌나 손이 빠르든지 덕령이 집에 도착하기 전에 도포를 이미 다 지어놓았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내가 죽을 수는 없지만 우리 집 대들보인 덕령이를 살려야 우리가문이 빛이 날 거야. 마음이 흔들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동구 밖 가까이에서 말방울 소리가 울리며 동생이 도착하는 것이 아닌가.순간 누이는 눈을 지그시 감고는 도포에 달린 옷고름을 당겨서 찢어 버렸다.

 

이어 덕령은 사력을 다해 집에 도착하여 마당에 발을 세우고는 황급히 안방으로 들어가니 누이는 도생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너 참으로 고생했구나. 나는 아직 옷고름을 못 달고 있는데, 시합은 네가 이겼구나.하고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는 그 날 저녁 노끈으로 목을 매고 죽고 말았다.

 

다음날 이 사실을 알게 된 덕령은 통곡을 하면서 혹시나 하여 도포자락을 살펴보니 실밥이 묻어 있는데, 이미 옷을 다 지은 후 일부러 옷고름을 뜯었다는 것을 알고 덕령은 자신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누이의 숭고하고도 큰 사랑에 눈물을 쏟아냈고 고이 장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출전: 광주의 전설>

 

金德齡(김덕령) 선생의  전설-2.

말바우 전설.

옛날 임진왜란 때에 萬古(만고) 忠信(충신)이라고 떠받들어지는 김덕령이 아주 젊은 나이일 때 장차 큰일을 하기 위해 무술을 연마할 때의 일이다장자 김덕령이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는 천마라고 할 수 있는 용마(龍馬)를 타고 다니며 무등산일대에서 매일같이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였다.

이 말의 걸음이 얼마나 빠르든지 나는 화살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거의 버금갈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용마를 너덧 해 동안 훈련을 시켜 가지고 화살과 같은 속도로 만들고 나중에는 화살보다 더 빠르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어떤 일에 도통하려면 10년 공부라고 했는데, 5년을 훈련을 하니 거의 생각했던 수준에 올라오게 되어다.그래서 5년째 되는 봄에 드디어 시험을 해 볼 날을 잡게 되었다.김덕령은 시험을 하기 전에 미리 말을 몰고 출발할 곳과 도착할 곳을 말에게 일러주고는 이렇게 다짐을 하였다.

! 용마야 오늘 너는 나는 화살과 너의 달음질을 겨루게 되었다. 만일 네가 이기면 나의 애마(愛馬)로 인정받아 평생을 나와 함께 할 것이고 만일 그렇지 못하면 너의 목을 내려치고 말 것이다.용마는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여 자신은 있었지만 워낙 아슬아슬한 시합인데다 조그마한 돌부리에라도 발이 걸린 다면 그 순간이 끝장인 것이라, 그렇게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는데도 가혹한 시험이 다가오니 용마는 감정이 복받쳐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이었다.드디어 시험 시간이 다가오니.

 

덕령은 딸 위에서 화살을 꺼내어 활시위에 끼우고는 내가 화살을 발사하는 동시에 출발하도록 명령을 하였다.화살이 공기를 가르며나가자 용마도 쏜살같이 달려 나가기 시작 하여 발이 거의 땅에 닫지 않고 붕 나는 듯이 순식간에 도착하였는데, 말 위에서 덕령이 이리저리 두리번거려도 도무지 화살의 없는 지라. 덕령은 분명히 용마가 더 빨리 왔을 텐데, 하나에서 열까지 셀 동안에도 화살이 안 나타나면 화살이 이미 도착한 것이겠지.라고 생각하고 . 하나, 두을, ‥‥‥그렇다면 화살은 이미 숲 속에 박혔을 거야.

 

에이! 미련한 용마! 너는 이제 아무데도 쓸모가 없다고 큰소리를 내면서 장검을 하늘높이 쳐들어 눈물이 그렁그렁한 용마의 목을 힘껏 내려치니 목이 댕강 땅으로 떨어지는데,   순간 그제야 날아온 화살이 말 머리에 턱 꽂히는 것이었다.돌이 킬 수 없는 상황을 당한 덕형은 그 충직하고 날랜 용마를 잃어버린 슬픔에 땅을 치며 통곡 했다고 한다.말바위는 용마가 도착 할 때 너무나 큰 힘을 주어 바위에 용마의 발자욱이 나서 움푹 패게 된대서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출전: 광주의 설화>

 

金德齡(김덕령) 선생의 전설..

 

죽음을 택한 김장군

임진왜란이 끝난 뒤 김덕령이 勇力(용력)이 있으면서도 出戰(출전)하여 왜적을 무찌르지 않았다고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나라에서 역적으로 몰아서 죽이려고 했으나 아무리 칼로 치고 활로 쏘아도 결국 죽일 수가 없었다.

그러자 김덕령이[ 그토록 나를 죽이고 싶으면  ‘ 만고충신 효자 김덕령 이란 비를 써서 세워 달라. ” 고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간신들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자, [ 내 다리 아래의 비늘이 있는데 그것을 뜯고 그곳을 세 번 막대로 때리면 내가 죽는다.]” 고 알려 주어 스스로 죽음을 당했다.

 

죽은 뒤 비문의 글자를 지우려고 아무리 해도 글자가 더욱 또렷해지며 결코 지워지지 아니하자  가신들도 할 수 없이 그냥 두었다고 한다.

김덕령은 1567(선조 즉위년) 1596(선조 29). 조선 중기의 의병장이며,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수(景樹). 광주 출신. 아버지는 붕섭(鵬燮)이며, 어머니는 남평 반씨(南平潘氏)이다.     

 

2

율림(栗林)과 김덕령(金德齡) 장군

 

율림은 이른바 밤장이라 하는 곳인데 그 위치는 광한루 남쪽 지금의 천거동(川渠洞) 구시장 일대에 해당된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 여년 전의 일이다.

부사 유지례(柳之禮)는 광한루 남쪽 벌판이 황무지로 버려져 있으므로 이를 유효하게 개간 활용할 것을 구상하였다. 이 황무지를 개간하되 토질에 알맞고 남원 부 풍치를 아름답게 하는 유실수로 밤나무를 선택한 것이다.

 

세종(世宗)26년 이해 유부사는 이곳에 천여본의 밤나무 묘목을 심었다. 밤나무는 무럭무럭 자라 숲을 이루었으니 이름 하여 율림이라 한다.

세조때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역임한 강희맹(姜希孟)은 문학에 조예가 깊어 그의 시는 정국 방방곡곡에 널리 전하여 온다. 강판서는 자연을 사랑하여 여행을 즐긴 나머지 전국의 명산과 대찰, 또는 명승지를 두루 살폈으며 가는 곳마다 주옥같은 시를 남겨 놓았다.

 

밤나무를 심은 이는 유지례(柳之禮) 부사이지만 이곳에 유명한 설화가 전해 온다.

임진왜란 무렵에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 정기를 타고 났다는 김덕령(金德齡)장군은 용맹이 뛰어날 뿐 아니라 슬기로운 지혜 있어 이른바 지와 용을 겸비한 천하명장이라 높이 평가하였다.

 

김장군은 담양(潭陽)에서 호남 의병을 일으키어 모여든 수백 장성을 이끌고 유서 깊은 남원 부를 찾아 왔다. 신병을 훈련시키는 데는 넓은 연병장이 필요하다.

남원은 전라좌영(全羅左營)의 소재지이므로 군사도시로 이름나 있어 이곳을 찾아온 것이다. 마치 말을 낳으면 제주도(濟州道)로 보내고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야 한다는 격으로 이 무렵 남원은 군사요지인지라 신병을 훈련하는 데는 남원 자영이라야 하다는 생각에서 이곳을 찾아 온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남원성도 이름나 있거니와 읍성에서 4서북쪽에는 금성탕지를 자랑한 교룡산성(蛟龍山城)이 있어 이 두 성은 서로 이각지세를 이루었고, 동쪽은 지리산맥(智異山脈)의 험이 있으며 운봉고원을 올라가면 삼남을 내려다 볼 수 있을 만치 영남과 호남간의 목줄 구실을 하고 있다.

 

김덕령이 남원 부를 와보니 수백 명 신병을 조련시킬 장소가 마땅치 않다. 이곳저곳 적당한 위치를 살피다가 밤장(栗林)을 군사훈련 적지로 선정하였다.

 

그러나 밤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이곳을 練兵場으로 사용하려면 이 밤나무를 베어 내야 한다. 그는 차고 있던 보검을 휘날리어 밤나무를 베어 내는데 그 신출귀몰한 칼 재주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천여그루의 밤나무를 베는 데만 며칠을 걸려야 할 것인데 金將軍은 하루아침 눈 깜짝할 사이에 이 어마어마한 넓은 밤나무를 마치 풀을 베듯 보검을 휘날리어 쓰러뜨리니 수백 명 의병들은 넘어진 밤나무를 미처 치우기가 바빴다.

밤나무를 완전히 베어내니 허허벌판이다. 그는 천리준종, 애마를 채찍질하여 마음껏 넓은 벌판을 달리며 의병을 조련하기에 바빴다. 그가 사랑하는 말은 이름이 용마라 하였다. 명장에는 명마가 따르는 법. 그가 타고 다닌 용마도 김장군의 용맹에 못지않은 명마이다.

날마다 수 천보 앞에 과녁을 세워 놓고 활을 쏜다. 활은 시위소리를 내며 공중을 날아 어김없이 과녁을 맞힌다. 이때 그는 활을 당김과 동시에 용마를 채찍 하여 과녁을 향해 질풍처럼 달린다. 공중을 날아간 화살이 과녁에 하고 꼽힘과 동시에 그의 용마도 번개처럼 날아 과녁에 닿는다. 그러던 어느 날 이번에도 그는 활을 힘차게 쏘고 말을 달렸다. 이날따라 용마는 비호처럼 빨리 달려 화살보다 먼저 과녁에 닿았다. 그러나 과녁에 화살이 꼽혀 있지 않았다. 이 순간 김장군은 크게 노하여 차고 있던 보검으로 그만 말의 목을 잘라 버렸다. 사랑하는 용마의 머리가 땅에 뚝 떨어짐과 동시에 그제야 화살이 과녁에 하고 박히지 아니한가?

 

! 내가 실수했군. 활보다 느린 줄로 착각하고 애마를 죽었으니……」

그는 슬프게 후회하나 떨어진 용마의 머리는 다시 붙일 수 없다.

김장군은 용마를 고이 땅에 묻고 그 명복을 빌었다는 것.

이 곳 밤장에서 십분 조련을 마친 김장군은 전주 지방으로 나아가 왜군과 싸우는데 많은 기공을 세웠다.

 

그러나 조석으로 변하는 인심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백년 만에 하나 나올 둥 말둥 한다는 김장군이 간신배의 모함에 빠질 줄을 뉘 알았으리요.

충청병사 이시언(李時言)과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는 김장군을 가장 시기하는 무리이었다. 국가가 비상한 때 처하면 충신도 잇고 역적도 나오는 법 이 때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일어낫다. 이시언 김응서의 무리들은 이 좋은 기회를 포착, 심복부하를 농아 이몽학의 반란은 김덕령이 배추에 조종함이라 퍼뜨렸다.

 

옥에 갇힌 김장군을 구출하기 위하여 수많은 상소가 올라 왔으나 간신배들은 이에 못지 않게 모함을 꾸민지라 선조 29(서기1596) 718일 큰 기둥 옥사하니 이는 모두 이조의 고질인 당파싸움의 안타까운 희생인 것이다.

 

김덕령장군은 본래 광주 석저촌(石底村)에서 낳았으니 후세에 그를 석저장군(石底將軍)이라 함은 예서 나온 아칭이다. 그리고 그가 의병을 일으킬 때 차고 있던 보검은 고려 우왕(禑王)때의 명장 정지(鄭地)장군이 왜구를 무찌를 때 쓰던 신검이었으며 그의 사랑하는 애마는 순천(順天)에서 얻은 천하의 명마이었다. 그가 밤장 연병장에서 날아가는 화살보다 느리다하여 애마를 베었다는 것은 아마도 와전이 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때 김덕령장군 휘하에 빼놓을 수없는 용장이 있었으니 그는 남원의 유학 최담령(崔聃齡) 그 사람이니 석저장군은 매양 그의 뛰어난 무예를 높이 칭찬하고 그를 별장으로 임명, 삼백여 향군을 조련시켰으며 전주, 함양, 진주 등 여러 군데 왜군을 맞아 싸울 때마다 석저장군의 오른팔 역할을 다하여 이름을 떨쳤다. 그리하여 그들은 양령의 신장이라 일컬었으니 양령이라 함은 김덕령과 최담령의 이름에 끝자가 똑같은 영()자인데서 나온 말이다.

                                                                      <남원군지 82. 9.>

 

 

 

 

                            

金長生(김장생)  선생의 전설.

 

장생못의 연꽃.

임진왜난 때  정산현감으로 있던 김장생(金長生)이 피난을 갔다오는 길에 동헌 마당에 있는 연못에 백련을 심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백련은 아무리 정성을 드려 다른 장소로 옮겨도 곧 시들어 죽어버리고 오직 그 연못에서만 자란다고 한다.

그래서 그 연못을 백련이 사는 연못이라고 백련지(白蓮池)라 부르게 되었다는 유래담이 전한다

 

金富儀(김부의) 선생의 전설.

 

벌거벗고 대문을 들어선 김부의.

어느 봄날 분내(分川) 聾岩(농암)선생 댁에 괴이한 청년이 알몸으로 대문에 들어서서 주인을 찾았다.

어떻게 오셨소?] 농암 선생은 너무나 이상해서 찾아온 사연을 물었다.

저는 외내에 사는 김부의라고 합니다. 오늘 아침, 우연히 냇가에 나왔다가 잉어 한 마리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잉어를 잡으려고 옷을 벗고 강에 뛰어들었습니다. 계속 잉어를 쫓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그만 놓치고 말았습니다.

집으로 가려니 배도 고프거니와 알몸으로 돌아가려니 부끄러워서 분내에서 가장 큰 집을 찾게 되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의 말을 들은 농암선생은 속으로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생각하고 하인을 시켜서 사랑으로 들게 하였다.

아침을 후하게 대접하고 자기가 입던 명주옷을 한 벌 입혀서 보냈다.

그 무렵, 농암 선생에게는 출가시키지 못한 딸이 있었다.

맏딸인 그녀는 성질이 사납고 고집이 세어서 마땅한 신랑감을 찾지 못했다. 농암 선생은 이 청년이야말로 맏딸의 사윗감으로 적당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농암 선생은 매파를 보냈는데 양쪽의 뜻이 맞아 성혼을 하기에 이르렀다.

결혼 후에도 그녀의 난폭한 성질은 고쳐지지 않았다.

여전히 사납고 난폭한 행동을 하였다.

김부의는 회초리로 때려서 그 못된 버릇을 고쳤다.이 소식을 전해들은 농암 선생은 무릎을 치면서

김부의는 내가 처음 보았을 때부터 보통 사람이 아니었어. 그 청년이 아니면 누구도 내 딸의 난폭한 성질을 고치지 못해. 이제는 됐어. 김부의 내외는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될거야.] 하고 기뻐했다.

 

그 후 김부의는 부인의 내조를 얻어서 경상좌통 병마절도사(慶尙左通 兵馬節度使)가 되었다.

경상좌통 병마절도사 시절에 김부의는 부하 몇 명을 거느리고 고향인 외내에 왔다. 자기 집 뒷산으로 올라간 그는 목표도 없이 활을 세 발 쏘았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이 화살이 꽂히는 곳이 우리 내외의 幽宅이다.] 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보름 만에 세 개의 화살 중에 하나를 찾았다.

 

그 자리가 바로 와룡면 나소동 연산못 앞산에 있는 김부의 내외의 묘소이다. 묘소는 좌우로 나란히 있고 묘지 양쪽에는 장군석이 우뚝 서 있다.

장군석을 세울 때는 많은 인력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장군석을 세우던 날 밤에는 괴이한 일이 생겼다.

 

묘지에서 약 200m쯤 떨어져 있던 자연석으로 된 돌부처가 거꾸로 넘어진 채 방치되어 있는데 그 모양이 돌부처와 흡사해서 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

 

金南重(김남중) 본관: 光山(광산)

일비장 전설

 

하서 선생의 손자에 金南重(김남중)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 부인은 도학자로 유명한 기대승의 딸이다.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 정유재란을 맞아 남중은 이미 강원도로 피난을 갔고 기씨 부인은 미쳐 따르지 못하여 광주로 피난을 갔다. 왜놈들의 만행은 눈으로 볼 수 없을 만큼 지독했으며 부녀자를 강탈하여 추행을 일삼았는데 왜군이 물러갔다는 말을 듣고 기씨 부인은 광주에서 맥동으로 돌아오다 동네 어귀에서 왜놈들에게 붙잡혔다.

 

팔목을 끌어 잡고 만행을 하려 들자 몸에 지닌 칼로 붙잡힌 팔을 잘라 버렸다. 왜놈들은 정숙한 부인의 태도에 어리 벙벙 하는 듯 했다. 부인은 몸을 더럽히느니보다는 자결할 뜻을 품어 깊은 냇물 속에 뛰어 들었다.

 

왜군들이 물러간 후에 동네 사람들이 부인의 시체를 건지려 하였으나 찾지를 못하고 잘라버린 팔 하나만 고이 장사 지내 주었다.

 

비록 팔 하나로 무덤을 만들어 일비장이라고 하나 여인의 붉은 정염은 오랜 세월에도 바래지 않는 바가 아닐 수 없다. 일비장은 조상의 무덤들과 같이 맥동에 있는데 부인이 몸을 던졌던 내는 메어져 지금은 논으로 되어 흔적을 찾을 길 없다. 그의 두 아들은 왜병에 이끌려 일본에 갔는데 그 뒤 소식을 모른다.

 

다만 일제 강점기 전북 고부에 하서라는 경찰서장이 있었는데 자기의 조상은 조선 사람이라고 했다. 아마 두 아이는 이름도 모르고 그 때 유명하게 부르던 하서립이라는 말을 기억하여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본 어느 고을엔 하서라는 성을 가진 자가 많다고 한다.

                                                                                  <출전: 장성군지>

 

 

金萬重(김만중) 선생이 일화.

 

김만중은 조선조 예학(禮學)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 의 증손이요, 충렬공(忠烈公) 익겸(益謙)의 유복자로 1637년 태어났으며,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의 아우로 숙종의 초비(初妃)인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숙부이다.

 

1665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급제하여, 정언(正言), 지평(持平), 수찬(修撰), 교리(校理)를 거쳐 71년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 삼남(三南)의 진정(賑政)을 조사하였다. 이듬해 겸문학(兼文學), 헌납(獻納)을 역임하고 동부승지(同副承旨) 가 되었으나, 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작고하여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서인(西人)이 패하자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 그 후 다시 등용되어 1679년 예조참의, 83년 공조판서, 이어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나 조지겸(趙持謙) 등의 탄핵으로 전직되었다. 1685년 홍문관 대제학이 되었고, 이듬해 지경연사(知經筵事) 로 있으면서 김수항(金壽恒)의 아들 창협(昌協)의 비위(非違) 까지 도맡아 처벌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상소했다가 선천(宣川)에 유배되었으나, 88년 방환(放還)되었다. 이듬해 박진규(朴鎭圭), 이윤수(李允修) 등의 탄핵으로 다시 남해(南海)에 유배되어, 여기서 <구운몽 (九雲夢)> 을 집필하였다.

<출전: Daum. 답변>

 

 

金萬重(김만중) 선생이 일화.

 

구운몽은 金萬重(김만중)이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쓴 것이라고 하며, 전문을 한글로 집필하여 숙종 때 소설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한편, 한글로 쓴 문학이라야 진정한 국문학이라는 국문학관을 피력하고 국자의식(國字意識)을 강조하여 허균과 조선후기 실학파 문학을 잇는 역할을 하였다.

1692년 남해의 적소(謫所)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1698년 그의 관직이 복구 되었고, 1706년에는 효행에 대해 정표(旌表)가 내려지기도 하였다. 대표작으로 <구운몽(九雲夢)>,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등이 있다.

<출전: Daum. 답변>

 

 

金萬重(김만중) 선생이 일화.

국문소설 구운몽(九雲夢)’의 작가이자 조선 후기 이름 난 문신(文臣)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16371692)은 경남 남해군 이동면 양오리 백연 마을 건너 노도(櫓島)에서 56세 일기로 생을 마쳤다.

그는 서울 태생인데다 생애 대부분을 서울에서 살았다. 그런 그가 한반도의 끝 남해바다에 외롭게 떠 있는 한 작은 무인도에서 숨을 거둔 이유는 정치범이라는 죄를 덮어 쓰고 이곳으로 유배되었기 때문이다. 노도는 유배지였다. 그러나 김만중 이전, 또는 이후에 이곳으로 유배된 사람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노도는 김만중 한 사람을 유형 시키기 위해 선택된 특별감옥이었던 셈이다. 그의 죄목은 역모와 관련되었다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숙종 임금과 희빈 장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의 다툼에서 서인이 패배하게 되자 관직을 빼앗기고 죄인이 되었다. 그에게 내려진 형벌은 무거웠다. 사람이 살 수 없는 변방으로 끌려갔다가 다시 남해(南海)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즉 사방에 울타리를 둘러치고 그 안에 감금하는 형벌이었다. 이 같은 조건을 잘 갖춘 곳이 노도다. 섬의 동남쪽은 가파른 경사와 깎아지른 듯 한 절벽이어서 일부러 울타리를 칠 필요가 없다.

서쪽도 급경사지여서 탈출이 불가능하다. 북쪽으로 난 밋밋한 한 자락만이 간신히 바다에 이르는 길로 이용할 수 있는데, 이곳에서 맞은편 남해까지 사이에는 급류가 흐르고 있어 이 또한 천혜의 장애물이다.

 

감옥으로서의 모든 조건을 갖춘 노도에다 김만중을 혼자 몰아넣어 놓고 숙종은 장희빈과 쾌락의 나날을 보냈고, 남인 권력자들의 끝없는 욕망은 조선시대를 비탈로 끌어내렸다.

그리움의 정서가 자주 표출되는 그의 시편들은 그의 생애가 잘 투영된 것들이다. 또한 많은 인물 대부분이 여성으로 그려지고 있는 소설과 시들은 그의 낭만주의 정감을 엿보게 한다.

 

실제로 노도에 유배당한 김만중은 유배지로 찾아온 어머니와 아내와의 피맺힌 해후를 통하여 한글소설 구운몽을 탄생시켰다.

그가 53세 되던 1689년에 끌려와서 3년 뒤인 1692년 타계할 때까지 홀로 꿈꾸고 절규했던 적소(謫所), 노도로 가기 위해 백연 마을 포구에서 고깃배를 빌려 탔다. 불과 5분 남짓이면 노도에 닿는 거리다.

그러나 노도와 백연마을 사이를 왕래하는 정기 여객선 같은 것은 있었던 적이 없었다. 포구의 방파제는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태풍의 패악질로 곳곳이 무너진 채 파도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떨구고 있다. 작은 고깃배를 몰고 가는 초로의 남자가 전해 준 말에 따르면 백연마을이나 노도는 1985년까지도 등잔불을 켜고 살았단다. 십여 년 전부터 노도를 찾아오는 이들이 가끔 있어서 기름 값이나 받고 손님을 실어다 주기도 한다는데,

 

그 손님들 대부분이 어떻게 노도에서 혼자 3년 동안이나 지낼 수 있었는지 끔찍하다며 말을 잃곤 하더란다.

노도에는 그가 귀양살이 한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북쪽 산비탈에 울창한 동백나무와 비자나무 숲에서 산새 몇 마리가 가는 소리로 울고 있다.

 

김만중의 외로운 넋이런가 싶다. 이 섬에서 북쪽 동백나무 숲 아래의 다소 밋밋한 언덕배기가 배를 접근시킬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출전: Daum. 답변>

 

 

金萬重(김만중) 선생이 일화.죄수가 유형 생활하는 유배지에 가족이 찾아오는 것은 법으로 엄금했다. 그리하여 주변을 지키는 포졸들에게 뇌물을 주고 잠시만 만나기도 했다. 노도에 있는 김만중을 만나려면 특별하게 마련된 배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주석아범은 백방으로 손을 써봤지만 배를 구할 수 없었고, 그렇게 먼발치에서라도 소리쳐 이름 불러볼 수 있게 된 것도 여간 공들인 것이 아님을 알렸다.

 

어머니는 자식이 하도 보고 싶어 서울에서 남해까지 왔지만 자식의 적소까지는 다가설 수 없어서 애를 태웠다. 김만중은 울음을 참으면서 소리 질러 집안 안부를 물었고 어머니는 주석아범 목소리를 빌려서 부디 몸조심하라 신신당부했다.

늦은 봄날 하루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다. 마침내 어머니가 혼절했다. 주석아범은 어머니를 등에 업고, 아내는 나귀를 몰고 돌아섰다.

아내가 가다 말고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세 사람 모습이 사라진 뒤 김만중은 바닷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오래오래 울었다. 늦은 봄밤이 깊어와 파도소리도 따라 울었다.... 그날 이후 김만중은 소설 쓰기에 매달렸다. 어머니께 보내드리기 위해서였다. 그는 어머니께 지키지 못한 약속이 있었다. 지난날 그가 중국 사신으로 가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중국 소설책 몇 권을 구해와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사신의 임무가 너무 막중하고 분주하여 어머니의 부탁을 그만 잊어버렸던 것이다. 그 뒤로 다시는 중국 여행길이 마련되지 않아 늘 어머니께 송구한 마음이었다.

 

김만중은 노도에서 그렇게 어머니와 이별한 뒤로 지키지 못한 어머니와의 약속을 다시 떠올렸다. 언제 풀려나게 될지 알 수 없는 절해고도에 갇힌 몸이라서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초조함이 더했다.

<출전: Daum. 답변>

 

 

金萬重(김만중) 선생이 일화.

 

구운몽은 삶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 인생을 특정한 사상의 틀 안에 넣어서 보지 않고 모든 틀을 깨고 나와서 자유롭게 관조한다는 주제로 쓰인 소설이다. 그래서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인 금강경의 공()을 소설화했다고도 볼 수 있는 소설이다. 김만중 자신의 육신이 절해고도에 감금당하고 자신의 삶이 철저한 불행 속에 놓여진 뒤에야 깨닫게 된 정신세계의 변화였다.

세속의 상식으로 볼 때 그의 인생은 끝장난 것이다. 남은 것은 외로움에 찢겨 피흘리다 파도소리에 젖은 채 죽는 일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때 그는 역설의 묘법을 눈치 챈 것이다. 명예, 권력, 소유의 욕망을 놓아버리면 한없이 자유로운 자연이 된다는 것을 안 것이다.

 

마침내 자신의 감옥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지기 시작하면서 구운몽을 쓴 셈이다. 소설이 완성되었지만 보낼 길이 막연했다.

어머니는 그렇게 다녀가신 그 해 가을에 눈을 감았다. 소식을 갖고 온 조카에게 완성된 구운몽을 들려 보내면서 장례에도 못 가는 불효자식을 대신하여 구운몽을 어머니 영전에 올려달라며 피울음을 울었다.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위로해드리기 위해 쓴 소설이지만 정작 그 소설을 보지도 못한 채 눈 감은 어머니를 부르며 바닷가를 거닐었다. 어머니라는 등불이 꺼지고 나자 자신의 삶은 더욱 작고 초라했다. 어머니와 아내가 서 있던 언덕의 느티나무 잎이 지고 파도가 흰 갈기를 세우며 세상을 질타하는 겨울 내내 김만중은 병을 앓았다. 그리움은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 김만중은 그렇게 앓으며 파도소리에 갇힌 채 유배지 불 꺼진 방에서 홀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육신을 벗어버림으로써 더는 갇힐 것 없는 무애의 빛이 되었을까.

구운몽 책갈피가 파도소리에 젖는다. 우리말과 글을 버리고 다른 나라 말로 글을 짓는다면 이는 앵무새가 사람 말을 흉내 내는 것과 같다면서 국문가사예찬론을 폈던 서포 김만중의 목소리가 이 여름 노도를 씻어가는 파도소리로 다가온다.

<출전: Daum. 답변>

 

 

金蘇齋(김소재) 선생의 일화.

 

귀양지에서 낚은 고기

 

경은 하루라도 내 곁을 떠날 수 없다.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에 와서 변함없이 나를 도운다면 이는 충과 효를 갖추는 일이다.”

노 수신(盧守愼)이 어머님 병환으로 대사헌 벼슬을 사양했을 때 선조 임금님이 만류하신 말이다.

 

그만큼 왕의 총애를 한 몸에 지닌 분이었다.

그의 자()는 과회 (寡悔), 호는 소재 (蘇齋), 본관은 광산(光山)이니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 노 홍(盧鴻)의 아들이다. 서기 1516(중종 10)에 태어나서 중종 38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선조 6년에 우의정, 영의정에 이르기까지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서기 1589(선조 23)에 작고하여 상주 도남 서원에 향사했다.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이 기(李芑)를 탄핵하여 이 기가 파직되었다. 명종 때 윤 원형이 이 기와 더불어 을사사화를 일으켜 노 수신은 파직되었다. 가정 언각이라는 분의 벽서 사건으로 죄가 더해져서 순천에서부터 진도로 귀양살이를 옮기게 되었다. 진도에 가 보니 섬의 풍속이 본래 혼례라는 것이 없고 남의 집에 여자가 있으면 중매 없이 칼을 빼 들고 쟁탈하였다. 그가 예법으로써 깨우쳐서 비로소 혼인 예식이 있게 되었고 야만의 풍속이 없어졌다.

 

1567년에 선조가 즉위하자 을사사화에서 풀려나 복직 되었다. 1584(선 조 18)에 영의정이 되어 당쟁의 근원이 된 심 의겸, 김 효원 두 사람을 외직으로 내 보냈다.

 

아버지 상을 당하였을 때 왕이 의원을 보내 위문하니 임금님께 글을 올려 사례 하고 군덕지계(君德之戒) 여섯 가지를 올렸다.

 

첫째, 토론보다 실학을 찾고

둘째, 잘못보다 근본을 세우고

세째, 권력 잡는 것보다 인심을 화합하는 데 힘쓰고

네째, 전례보다 옛 정신을 행하는 데 힘쓰고

다섯째, 아부보다 정직과 사랑함에 힘쓰고,

여섯째, 재능보다 국량과 지식을 중하게 여기는 것 등이었다.

 

아버지의 상중에 초종범절과 거상에 거의 죽음 직전에까지 다다랐다.

애통과 거친 음식 때문이었다.

 

그는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여 인재를 뽑아 쓸 것을 주장하고 이 이, 이 지함, 김 천일, 조 묵, 민 순, 이 산해, 허 봉, 류 몽학, 최 영경 등 많은 인재를 조정에 추천하여 쓰게 하니 실로 백성을 위하고 앞 일을 내다보는 덕과 재주를 갖춘 훌륭한 정치가라 하겠다. 그의 학문은 항상 바르게 하여 품행을 닦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자신이 몸을 닦은 후에 사물에 이르는 것을 행동의 질서로 삼았다. 가정에서는 효성이 지극하였고 옷과 음식이 검소 하였으며, 몸가짐 하나하나에 법도를 지켰다.

 

1588(선조 22)에 정여립이 모반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옥사가 크게 일어났다.

내가 사람을 잘못 천거한 죄가 크다

하며 곧 대궐문 밖에 나가서 스스로 죄를 지었다고 자처했다. 또 원래 천성 이 온후하여 모난 데가 없었다. 남이 자기를 해치고자 해도 한 번도 흔들리 는 일이 없었다. 조 헌이 세 번이나 상소를 하여 그를 비롯한 여러 선비들 을 헐뜯으니 삼사(三司)에서 조 헌을 죄를 주자고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혼자서 반대하여 말하기를

조 헌이 몹쓸 사람이라 할지라도 상소한 것으로써 죄를 준다는 것은 착한 임금으로 할 바가 아니다. ”

하였다.

 

임금의 은총이 과분함을 송구하게 생각하고 관직이 오를 때마다 굳이 사양했으며 정승이 되는날 안색이 변하고 근심이 가득했었다고 한다. 귀양가 있는 곳에서는 부모님께 효도하지 못함을 큰 죄로 생각하여 수 천릿길에 인편마다 손수 낚시로 잡은 고기를 부모님께 드시도록 보냈으며 부모님 봉양을 위해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에 가고자 하니 임금님이 그의 고향과 가까운 충청 감사로 임명한 적도 있었다. 그의 나이 67 세 때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시묘막의 거친 짚자리와 거친 음식(蔬食)에 몸이 상할까 걱정하신 임금님이 원칙은 아니지만 권도(權道)로 행하라 하고 쌀과 콩을 하사해 보내시 니 그는 상소하여 임금님 은혜에 감격하기도 하였다. 또한 평생에 벼슬길에 나아가 효도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하고 돌아가실 때

"선영(先塋) 곁 시묘하던 곳에 장사지내라. ”

하니 그 곳, 지금의 상주군 화서면 원천에 장사하였다.

 

수천 수의 시, , , 교서, 서문, 작은 비갈명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글이 있었으나 전란으로 많이 불타 없어지고 남은 글은 간추려 간행한 시 아홉 권과 문 여섯 권이 있을 뿐이다, 그는 주자학에도 대가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 황은 그의 저술을 보고

동방에 공자의 도가 없어지지 않았다하며 감탄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설이 육 상산(陸象山) 왕 양명(王陽明)에 치우쳤다고 공격을 받을 만큼 되 기도 했다 한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휴정(休靜), 선수(善脩) 등 스님들과 깊이 사귀어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식(李植)은 도학자 중 선학(禪學)을 겸한 것은 노 수신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노 수신은 인종, 명종, 선조 3 대에 걸친 대정치가로서 나라의 앞날을 내다보고 인재를 적극 발굴하여 쓴 안목 있는 선비었으며, 대문장가이며 학문에서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대학자이며 또한 지극한 효자였었다.

그의 종택(宗宅)과 가묘(家廟)는 상주군 화서면 사산리에 있으며 지금도 그 후손이 상주군 중화지역 일대에 많이 살고 있다. 영정은 상주군 화서면 사산리에 있는 오현 영각과 칠현 영각에 각각 보존되어 있는데 많이 허물어져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소재 노 수신과 같 은 훌륭한 재상이 그리 흔하지 않은데도 이 분의 영각 하나 변변히 유지 보수하지 못하니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이다. 봉산 서원에 향사하고 있다.

 

출전상주군 교육청 문 장학사

참고 문헌 嶺南人物考 , 商山誌 , 孝烈行誌

 

 

 

金用石(김용석)의 묘비명

 

 

金用石(김용석) 端宗 1年 癸酉(1453)~?

字 鍊叔. 號 潭庵. 光山人 退村 閱曾孫

 

공은 구담에 살던 순천 김씨 참의 菊潭(국담) 有醞(유온)의 손서이다.

성종 3(1472) 진사과에 급제하여 佔畢齊(점필제) 金宗直(김종직)의 문하에서 수업을 하여 추강 南孝溫(남효온)과 성균관에 함께 유학하다가 연산군 4년 무오사화(1504) 때 스승 점필제가 화를 당하자, 처가 곳인 안동 구담에 와서 정착하게 되었다.

공의 묘소는 구담 뒷 동래에 부인 순천 김씨와 쌍분으로 모셔져 있다. 原碑(원비)는 전면에 成均館進士 金用石之墓(성균관진사 김용석지묘)라고 큰 글씨로 적혀있고 음기는 없다. 뒤에 1967년 정미 李家源(이가원) 찬의 新碑가 구비와 나란히 서있다.

영가지 이물조에

 

金用石 金紫光祿大夫 光存後 增 吏曹判書 洙子

性淸澗守正 人推服之 中司馬 與南秋江孝溫 交遊 冷話 師友名行錄云 與姜應貞 字公直 號中和齋 以孝行稱 同遊太學 依朱文公故事 作鄕約 月朝講論小學 其選皆一時名士 如金用石鍊叔申從濩次韶 此其尤也 云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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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用石(김용석)은 금자광록대부 光存(광존)의 후손이며 증 이조판서 ()의 아들이다.

성품이 맑고 깨끗하며 정직하여 사람들이 모두 감복하고, 중사마 추강 남효온과 교유하며 날카로운 비판도 하였다. “사우명행록에 이르기를 姜應貞(강응정) 公直(공직) 中和齋(중화재)는 효행으로 이름이 있는데 함께 太學(태학)에서 공부하며 주문공 고사에 따라 향약을 만들고, 달마다 소학을 강론하여, 거기 선발된 자들은 모두 한때의 명사가 되었는데, 金用石(용석), 鍊叔(련숙) 申從濩(신종호) 다 이런 사람이다.

 

 

金孝盧(김효로)의 묘갈명

 

 

金孝盧(김효로) 端宗 2年 甲戌(1454)~中宗 29年 甲午(1534) 81

字 舜卿. 號 聾叟 또는 春圃. 光山 金氏 禮安派 派祖.

 

성종 11년 경자(1480) 생원시에 합격하고도 不仕(불사)하였으나 아들 ()이 귀하게 됨으로 嘉善大夫(가선대부) 吏曹判書(이조판서) () 同知義禁府事(동지의굼부사)에 증직되고 숙종 때 李繼陽(이계양)과 함께 鄕賢詞(향현사)에 배향되었다.

공의 묘소는 녹전면 구송리 능동에 있는데 안동 김씨 중시조, 상락군의 묘소와 상하 연분으로 모셔져 있다. 墓碣(묘갈)을 퇴계 선생의 찬이다.

구비가 오래되어 글자가 마모되자 1965乙巳(을사)에 개수하였다,

제향일은 음력 101일이다.

 

 

墓碣誌銘

成均生員金公墓碣銘幷序 a_030_506b

公諱孝盧字舜卿光山人高麗知門下省事光存之後知省以降赫世簪纓祖諱崇之穆淸 殿直贈司僕寺正考諱淮陰城縣監贈兵曹參議公少孤鞠於外祖慶山縣令盧膺故以爲名旣而爲叔祖父孝之所養寓居于禮安縣烏川村公中庚子生員遂不事科擧居鄕介潔自守與人交不苟合亦不爲疾之已甚奉祭祀以誠敬敎子孫以孝弟家業取苟完而已不求贏餘親朋至必與之盡歡言必稱積善餘慶以誘人爲善嘗以操行卓異應鄕薦將顯而卒不果惜哉公生于景泰甲戌十一月卒于嘉靖甲午十二月享年八十一其明年九月葬于縣西知禮 村與高麗侍中金公方慶之墓同原公蓋侍中七代外孫也歲壬寅用公子緣推恩追贈公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公娶陽城李氏載寧郡守持之女寔崇政大夫判中樞府事純之孫女生二子長卽緣登己卯文科官至嘉善大夫江原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次曰綏乙酉生員二女長適龍宮縣監金雨次適訓導琴榟觀察娶昌寧曹氏生二男曰富弼富儀皆生員三女縣監金蘭宗參奉李容生員朴士訥生員娶順天金氏生三男曰富仁登 己酉武科海州判官曰富信曰富倫生員一女李憑縣監生五男曰富春壽春貴春樂春末春一女安喜賓訓導生二男曰應夾生員曰應壎二女參奉李寯曰李寘戊申四月貞夫人李氏病歿享年九十一其年十二月祔葬于公之墓左公及夫人俱享期頤之壽公之子孫旣繁且秀襲美聯芳以世其家者繩繩然繼作又如此向所謂積善餘慶之言至是益驗世之爲善者亦可以知所勸矣銘曰

士修於己不必時施維躬愷悌茀祿之基有美 林泉公隱處兮森森寶樹表遺緖兮孰云天定不在玆兮凡百有家視此詞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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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갈지명

성균생원 김공 묘갈명 병서

공의 휘는 孝盧(효로)이고, 자는 舜卿(순경)이며 光山人(광산인)이다.

고려 知門下省事(지문하성사) 光存(광존)의 후예인데, 문하성사 이후 부귀공명을 이어온 집안이다.

조부의 휘는 崇之(숭지)인데 穆淸(목청) 殿直(전직) 증 사복사정을 역임하였다.

아버지의 휘는 ()이며 음성현감 증 병조참의를 지냈다. 공은 어려서 부모를 여이고, 외조부인 경산현령 盧膺(노응)에게 양육되었는데, 그래서 오래 전부터 부친처럼 생각하고 숙조부에게 효도하고 공경했다.

예안현 오천 마을에 살면서, 공은 경자 연간에 생원이 되었으나, 과거에는 나가지 아니했다. 향리에 살면서 깨끗하게 자신을 지키며 사람을 사귀고, 구차하게 영합하지 아니하며, 또한 병이 심해도 개의치 아니했다.

정성을 대해 제사를 받들고, 자손에게 孝悌(효제) 하도록 교육 하였으며, 가업을 맡아 잘 이루어 나갔다. 贏餘(영여)를 구하지 않아 친한 벗이 오고, 남에게 줄때는 기쁨으로 주며, 착한 일을 하면 경사가 남아돈다고 말을 하며, 다른 사람들을 착하게 되게 인도 있다.

그의 태도와 행실이 남다른 것을 향리에서 칭송하며, 그를 보고오던 중 그만 죽었다고 하니 믿기 어렵네. 아아! 애석하고나.

공은 경태 갑술 11월에 태어났고, 가정 갑오년 12월에 죽었으니 81세를 누렸다.

그 다음 해 9, 예안현 서지례 마을에 장사 지냈는데, 고려 시중 金方慶(금방경)공의 모와 같은 둔덕이다.

공은 侍中公(시중공)7대 외손이다.

임인년, 공에은 자손의 인연으로 推恩(추은)되어, 공은 가선대부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로 추증되었다.

공은 양성 이씨 재령군수 持之(지지)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식숭정대부판중추부사純之(순지)의 손녀이시다.

 

아들이 둘인데 장남은 ()이고 기묘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가선대부강원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에 이르렀다. 차남은 ()인데 을유년에 생원이 되었다.

두 딸 중 장녀는 용궁현감 金雨(금우)에게 출가 했고, 차녀는 훈도 琴榟(금재)에게 출가 했다.

관찰사는 창녕 조씨를 아내로 맞아, 아들 둘을 낳았는데 富弼(부필)富儀(부의) 모두 생원이다. 셋 딸은 현감 金蘭宗(금란종)참봉 李容(이용)생원 朴士訥(박사눌)의 처가 되었다.

생원은 순천 금씨에게 장가들어 3남을 두었는데, 富仁(부인)은 등과 후 기유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해주판관이 되었다. 富信(부신)富倫(부륜)은 모두 생원이다. 딸은 李憑(이빙)의 짝이 되었다.

현감은 5남을 두었는데, 富春(부춘)壽春(수춘)貴春(귀춘)樂春(악춘)末春(말춘)이고, 딸은 安喜賓(안희빈)의 처가 되었다.

訓導(훈도)2남을 두었는데 생원 應夾(응협)應壎(응훈)이다. 두 딸은 참봉 李寯(이준), 李寘(이치)에게 각각 출가 했다.

무신 4, 정부인 이씨가 병으로 죽었는데 향년 91세였다. 그 해 12월에 공의 묘 왼편에 장사 지냈다.

아아! 공과 그 부인은 모두 함께 장수를 누리고, 공의 자손이 뛰어나고 번성하니 그 집안에 잇따라 좋은 일이 생기네. 그리고 줄줄이 이같이 이어지니 소위 積善餘慶(적선여경)이라는 말 되로 이며, 이것은 세상에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익히 경험하는 것이며, 역시 가히 잘 알려진 바이니 모두에게 권하고자 하는 바이다.

 

명에 이르기를

 

선비로서 자신을 닦아

필요 할 때만 베풀지 아니하고

항상 몸소 공경하고 너그러워

복록의 기반을 이루었네.

아름다운 임천이 공이 사는 곳.

울창한 수목과 아름다운 나무

남긴 유자를 나타내는데

누가 말하나 하늘이 정한 거라고

이제 그는 여기 없으나

무릇 모든 집에 있으니

이 가사를 잘 보아라.

 

 

金綏(김수)의 묘갈명

 

 

金綏(김수) 成宗 22年 辛亥(1492)~ 明宗 7壬子(1552) 60.

字 綏之. 光山人. 號 濯淸亭. 贈 吏曹判書 孝盧二男

 

공의 묘소는 臥龍面(와룡면) 烏川里(오천리) 水晶峯(수정봉)에 있다.

1525년 생원시험에 합격한 뒤 무예를 익혀 과거에 응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문무 두 시험을 그만두고 사람이 一世(일세)樂地(낙지)를 찾을 지니 세상에 명리만을 쫓아다니리오.라 했다.

묘갈은 퇴계 선생이 찬하였는데 비바람에 씻겨 일부분만 판독된다.

嘉善大夫(가선대부) 戶曹參判(호조참판)에 증직 되었다. 뒤편은 셋째 아들 雪月堂(설월당) 富倫(부륜)의 묘소이다. 공은 山南(산남) 富仁(부인) 養正堂(양정당) 富信(부신), 雪月堂(설월당) 富倫(부륜) 삼형제를 두었다.

 

墓碣誌銘

成均生員 濯淸亭 金公墓誌銘 幷序

公諱綏字綏之光州人高麗知門下省事諱光存其先祖也自是世襲衣冠曾祖諱崇之穆淸殿直贈司僕寺正祖諱淮陰城縣監贈兵曹 參議考諱孝盧成均生員贈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參判娶陽城李氏載寧郡守持之女以弘治辛亥二月丁未生公于禮安縣之烏川里同里故丹城縣監金公諱萬鈞之室卽公從姑氏也縣監愛公幼秀取而養訓無異己子焉縣監乃文節公淡之子廉直耿介納公於義方者有素歲乙酉中生員公尤精於射藝旁應武擧幾成者數而終不遂遂兩置之慨然嘆曰人生一世顧樂地如何耳何必逐世名哉縣監家故饒溫公因是以財雄於鄕其於所養之義所 以愼終追遠者無憾母夫人壽至九十餘公伯氏江原監司緣常爲親乞外奉以專城之養而公晨昏供侍甚得親歡性俊俠好賓客縣監構亭於愚巖臨洛水名曰枕流宅邊亦有亭公皆修而敞之客至輒爲之投轄劇飮或連夜無倦色搢紳之過縣多枉駕盡歡雖褐寬博待必款款惟見人不善則亦峻斥而不能容焉公配順天金氏成均進士贈戶曹參判粹洪之女生于弘治壬子七月甲午年十七歸于公善於內治蘋藻之奉必致誠謹賓客應須雖家務騷騷咄嗟之頃無不整辦生三男長曰富仁登己酉武科由宣傳官調海州判官次富信季富倫皆篤志儒學季中乙卯生員一女適忠順衛李憑側室有男女皆幼判官娶崇政知中樞李公諱賢輔女生四男曰壕秀才娶星州牧使黃怡女生一男二女生員娶監察朴純女生一男忠順生一男二女竝幼先是嘉靖壬寅正月十六日金氏歿壽五十一其年十月壬寅葬于修理谷在烏川南五里許至乙卯五月十九日壬子公卒于正寢享年六十五十二月十二日 壬寅葬于芳岑洞東向之原去修理谷數里而近遷金氏祔葬焉從遺命也銘曰

惟公之生賦質挺特旣習詩書亦事韜略文則小捷武未展躅虛老于鄕人所嗟惜於世雖屈於身自足勝地烏川有田有宅庖繼兼珍甕溢香醁以祠以養以燕以樂生前大歡座上嘉客天錫祚胤滿階蘭玉干城赳赳觀國燁燁慶休滋至高門有揭誰云一疾遽至不淑難勝者悲不匱者福刻石幽宮千載無缺

通政大夫 成均館大司成 知製敎 李滉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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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갈지명

成均生員(성균생원) 濯淸亭(탁청정) 金公(금공)墓誌銘(묘지명) 幷序(병서)

공의 휘는 ()이고 자는 綏之(수지)이며 光州人(광주인)이다. 高麗知門下省事(고려지문하성휘사) 光存(광존)이 그의 선조 이다. 그때 부어 衣冠(의관)을 세습해 왔다. 증조부의 휘는 崇之(숭지)이고 穆淸殿直(목청전직)을 지냈으며 司僕寺正(사복사정)으로 증직되었다.

조부의 휘는 ()陰城縣監(음성현감)이며 兵曹參議(병조참의)로 증직되었다.

부친의 휘는 孝盧(효로)인데 成均生員(성균생원)이고 吏曹參判(리조참판)同知義禁府事(동지의금부사)로 증직되었다.

참판공은 陽城李氏(양성리씨) 載寧郡守(재녕군수) 持之(지지)의 딸에게 장가들어 弘治(홍치) 辛亥(신해) 2丁未(정미)()禮安縣(례안현) 烏川里(오천리)에서 낳았다. 같은 마을에 옛날 丹城縣監(단성현감) 金萬鈞(금만균)의 부인이 즉 공의 종고모가 된다.

현감은 공을 어릴 때부터 매우 사랑해서 자기 자식과 다름없이 훈육하며 길렀다. 현감은 이에 공을 자식같이 여긴다고 文節(문절)로 쓰고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굳게 지조를 지켜 청렴하고 강직하라 하니, 공은 이를 집안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처럼 순순히 받아드렸다..

을유 년에 生員(생원)이 되고, 공은 더욱 궁술에 힘써서 무과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결국 문과 무과를 모두 그만두고 개탄하며 말하기를 인생의 한 세상에 즐겁게 사는 곳을 찾아 잘 사는 것이 어떨까? 하필 세상에 명리만을 구할 일이 있겠는가.?하였다.

현감은 집안이 넉넉하여 공은 재물로 향리에서 뛰어났고, 갖고 있는 뜻을 상사(喪事)를 당하여 예절을 정중히 하였고 지나간 옛일을 생각하여 조상을 받드는데 유감이 없도록 하였다.

모친의 나이가 90이나 되었는데, 공의 백씨 강원감사 ()이 항상 밖으로만 나도니 공이 모친을 받들고 성을 다해 봉양하는데 아침저녁으로 공손히 모시니 모친이 너무나 기뻐하셨다.

성품이 좋고 호탕하며 해서 賓客(빈객)을 좋아했다. 처음 현감은 낙동강 가 愚巖(우암)에 정자를 지어 枕流亭(침류정)이라 였는데, 집 가에 또한 정자가 있어 공은 모두 수리하고 잘 만드니 손님들이 와서 번번이 심하게 술을 마셨다. 혹 밤을 새워가며 놀아도 싫어하지 아니했다. 지위가 높고 행동이 점잖은 많은 사람들이 ()을 지나 갈 때는 모두 찾아와 서로 기쁨으로 대하며, 비록 無官者(무관자)라도 너그럽고 정성을 다해 접대 하였다. 그러나 사람이 선하지 않게 보이면 곧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아니했다.

공의 배위는 順天(순천) 金氏(김씨)成均進士(성균진사) 戶曹參判(호조참판) 粹洪(수홍)의 딸인데, 弘治(홍치) 壬子(임자) 7甲午(갑오)년에 태어나 17세에 공에게 시집을 왔다.

집안을 잘 다스리고, 蘋藻之奉(빈조지봉)으로 반드시 정성과 곤경을 다하여 賓客(빈객)을 응대하며, 비록 집안일이 부산하고 시끄럽게 바빠서, 하인을 소리 내어 꾸짖을 일이 있어도 들어내지 아니했다.

아들 셋을 낳았는데 장남 富仁(부인)己酉武科(기유무과)에 합격하여 宣傳官(선전관)을 거쳐 海州判官(해주판관)이 되었고, 차남 富信(부신)과 그 동생 富倫(부륜)은 모두 독실한 뜻을 지닌 儒學者(유학자)였는데 乙卯(을묘)년에 生員(생원)이 되었다.

딸은 忠順衛(충순위) 李憑(이빙)에게 출가 하였다. 側室(측실)에 아들딸이 있는데 모두 어리다.

判官(판관)崇政知中樞(숭정지중추) 李賢輔(리현보)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넷을 두었는데 ()()()()이다.

秀才(수재)星州牧使(성주목사) 黃怡(황이) 딸을 얻어 12녀을 낳았다. 生員(생원)監察(감찰) 朴純(박순)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다. 忠順(충순)12년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嘉靖(가정) 壬寅(임인) 正月(정월) 16일에 金氏(김씨)가 먼저 떠나가니 나이 51세였다. 그해 10壬寅(임인). 烏川(오천)에 있는 修理谷(수리곡) 남쪽 5리 쭘 되는 곳에 장사지냈다.

乙卯(을묘) 519壬子(임자)에 이르러 공은 正寢(정침)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향년 65세였다. 1212일 인임에 芳岑洞(방잠동) 동양 둔덕에 매장하였는데 修理谷(수리곡)에서 가까운 곳에 유언에 따라 金氏(김씨)를 옮겨 附葬(부장)하였다.

 

()에 이르기를

생각건대 공의 생애는

타고난 성질이 빼어나

이미 시서를 잘 익히고

사물을 잘 처리하네.

문학은 조금 이루었고

무예 역시 이루지 못하였네.

헛되이 고향에 돌아오니

사람들이 탄식했네.

세상이 비록 굽혀주지 아니해도

자신은 스스로 만족하며

명승지 오천 땅에

전답 있고 집도 있어

진수성찬 맛을 보며

넘치는 좋은 술로

제사 잘 모시고 효도하며

찬치 벌려 즐기니

生前(생전)에 큰 기쁨

좌석에는 귀한 손님

하늘이 잇따라 복을 주니

온 뜰에 훌륭한 자녀

믿음직하고 용맹스러워

나라에서도 빛이 나네

경사가 더할 나위 없이 이르러

높은 문중이 들어나고

누가 한 번 병 들었다 말 하나

감자기 맑지 못하니

슬픔 이기지 못하겠네.

함께 하지 못한 자 복이 있으라.

묘 앞 돌에 세기니

천추에 이지러지지 말지어다.

 

                                                                             통정대부 성균관대사성 지제교 이황 찬

 

 

 

 

金富仁(김부인) 墓碣銘(묘갈명)

 

 

金富仁(김부인) 中宗 7年 壬申(1512)~ 宣祖 17(1584) 73.

字 伯榮. 號 山南. 光山人 濯淸亭 綏子 李賢輔婿. 退溪門人

 

성품이 효우 하였으며 기지도 있었다. 젊어서부터 문예를 좋아하여 명망도 있었으나 문과에는 실패하고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慶尙道(경상도) 兵馬節度使(병마절도사)에 이르렀다.

공의 묘소는 와룡면 나소동 방잠에 있는데 영조 24년 무진(1748)鶴沙(학사) 金應祖(김응조) 찬갈의 비석이 세워졌다. 공은 어려서 물고기를 잡으려 외내(烏川)에서 이웃마을 분천까지 따라 가다가 고기는 놓치고 춥기는 한데 벌거숭이로 집으로 내려 갈 수도 없고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큰 집이 있기에 거기 가야 옷이라도 얻어 입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聾巖(농암) 선생 집에 쑥 들어가니 처음에는 귀신인가보다 생각하다가 자세히 보니 더벅머리 총각이라 뉘 집 아이냐?하니 외내 탁청정 댁 아이입니다.하였다. 글을 읽었느냐?하니 양반집 아이들이 글 안 일어요?이렇게 문답하는데 聾巖(농암)선생께서 공의 기지에 탄복하고 사위를 삼았다 하며 농암 따님이 여장부로 기가 세었다는데 엄히 다스려 요조숙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墓碣銘

折衝將軍守慶尙左道兵馬節度使金公墓碣銘 幷序

公諱富仁字伯榮新羅王子興光籍光山爲光山金氏有諱光存仕高麗官至門下省事高祖諱崇之穆淸殿直贈司僕寺正傳陰城縣監贈吏曹參判諱淮成均生員贈吏曹參判諱孝盧至成均生員贈戶曹參判諱綏聘贈貞夫人順天金氏以正德壬申生公少業文旣冠遊溪門學益力嘗再中鄕解旣乃旁習武藝登嘉靖己酉武科詣賓廳講左氏春秋輒通名譽遂著選爲宣傳官兼備邊司郞廳俄出爲海州江陵通判癸亥除樂安郡守丁卯入戶曹爲正郞戊辰遷昌城府使從兵使金秀文征西海坪有功陞通政轉麟山僉使辛未癸酉爲吉定二州牧使丙子拜晉州李都憲俊民惜其去啓遞遂除慶尙左道兵使時恬嬉日久公嚴飭列邑使之嚴組練繕器械親自巡視勸懲其勤怠識者多之丁丑授濟州慶源皆不赴拜衛將僉知坐無妄逮繫已而得釋爲寧海府使壬午聞藩胡陷慶源馳赴闕事定卽歸旣歸有安邊之命不赴甲申十一月病卒訃聞上命禮官致祭命本道致賻以明年二月葬于安東方存修理谷坤坐之原內相貞夫人李氏墓右嗚呼公律身淸儉居官勤謹所至垢櫛而痒疤遂入掌地部出專藩閫蔚有聲績其在樂安土民有戚抵尹元衡者怙勢多逋負公申巡使徵之不少貸在定州民有兄弟爭訟者公爲之陳說義理仍賜坐設酒樂民至感泣喜讀書尤著力自警編至老猶不掇001昌城陛辭日上引見問古將可師法者公以趙充國對上嘉悅賜酒慰遣之及其臨陣料敵出人意表有儒將風嘗夢吟一闋曰不貪功名不羨富貴居先人之廬而以風月爲侶當國家無事之時聊優游以卒歲果與公晩節符合孝於親當乙卯遭大故哀禮備至謹於奉先嚴於訓子敦宗而撫弟妹析產而無間言當官而勤修繕特其餘事也配同縣永川李氏孝節公聾巖李先生賢輔女閫儀甚備家法然也與公同年生先公七年卒生四男長壕禦侮將軍次㙉通仕郞次坦忠順衛次圻順陵參奉贈司憲府監察有學行內外雲仍繁衍別有子孫錄公之曾孫前參奉確憫公墓道無表謀諸宗黨遵先志不碑而碣之可謂長有人銘曰

文武竝用闕一不可專攻蓋難兼備尤寡公旣耽書餘事科業公旣投筆敵萬是學全才令望遂仗閫鉞高牙大纛虎符龍節緩帶輕裘燁如神人遭時太平邊塞無塵韜靲002未試匣劍空鳴軍中大將物外書生優游終老豈公素志修理之山鬱茀其氣萬古佳城一片牛眠公身托此公氣在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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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갈명

折衝將軍守慶尙左道兵馬節度使(절충장군수경상좌도병마절도사) 金公(금공) 墓碣銘(묘갈명) 幷序(병서)

공의 휘는 富仁(부인)이고 자는 伯榮(백영)인데, 신라왕자 興光(흥광)光山(광산)에 자리잡아 光山金氏(광산금씨)가 되었다. 光存(광존)이 있었는데 고려에서 사관하고 관직은 門下省事(문하성사)에 이르렀다.

고조의 휘는 崇之(숭지)이며 穆淸殿直(목청전직)으로 司僕寺正(사복사정)으로 증직 되었다.

이어 증조부는 陰城縣監(음성현감)으로 吏曹參判(이조참판)에 증직된 ()이고, 조부는 成均生員(성균생원)으로 吏曹參判(이조참판)에 증직된 孝盧(효로)이다.

成均生員(성균생원) () 戶曹參判(호조참판) ()에 이르러 () 貞夫人(정부인)順天金氏(순천금씨)를 만나 正德(정덕) 임신년에 공을 낳았다.

어려서도 글을 익혔고, 이미 장성해서는, 퇴계의 문하에서 더욱 학업에 힘써 일찍이 거듭 향리에서 깨달은바 있어, 이에 두루 무예를 익혀 嘉靖(가정) 이유년에 武科(무과)에 합격해서, 賓廳(빈청)에 이르러 左氏春秋(좌씨춘추)를 익혀서 문득 통달하니 이름이 들어났다.

宣傳官(선전관)으로 선발되어 備邊司郞廳(비변사랑청)을 겸하다가, 갑자기 海州(해주)로 출동해서 江陵通判(강릉통판)이 디었다.

계해년, 樂安郡守(낙안군수)를 사임하고, 戶曹(호조)에 들어가 正郞(정랑)이 되었고, 戊辰(무진)년에 昌城府使(창성부사)로 옮겨갔다.

兵使(병사) 金秀文(금수문)을 따라 西海(서해)를 정벌하여 화평하게 한 공으로 通政(통정)으로 승진해서 麟山僉使(인산첨사)로 전임되었다.

신미, 계유년에는 吉州(길주)定州(정주) 두 주의 牧使(목사)가 되었다.

병자년에 晉州(진주)로 배향 받으니 李都憲(이도헌)과 백성들이 그가 교체되어 가는 것을 아쉬워했다.

慶尙左道兵使(경상좌도병사)가 되었을 때 편안한 날이 오래 계속되자 공은 엄히 마을 사람들을 경계하여 기계의 조작과 수리를 익히게 해서 친히 순시하였다. 그 근태 상황을 봐서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하니 기계를 다룰 줄 아는 자가 많아졌다.

별생각없이

정축년 濟州(제주)慶源(경원)으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아니했다. 衛將僉知(위장첨지)을 재수 받았을 때, 아무 생각 없는데 채포되어 옥에 갇혔으나 곧 석방이 되어 寧海府使(영해부사)가 되었다.

임오년 慶源(경원)이 오랑캐에게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대궐로 달려갔으나 일을 이미 결정되어 버렸었다. 돌아오니 安邊(안변)으로 가라는 명이 내렸으나 부임하지 아니했다.

갑신년 11월에 병으로 졸 했다. 부고를 듣고 상감께서 명을 내려 예관을 보내어 장사 지내게 하고 本道(본도)에 명하여 賻儀(부의)를 전하도록 하였다.

다음 해 2, 안동에 있는 修理谷(수리곡) 坤坐(곤좌) 언덕에 제사지냈다. 부인 貞夫人(정부인) 李氏(리씨) 묘는 오른 쪽에 있다.

오호! 공은 자기 자신을 단속하여 맑고 검소하며, 집에서나 관가에서나 부지런하고 삼가며, 가는 곳마다 상처를 깨끗이 하였고, 들어가는 곳마다 그 곳을 편안하게하고 나가서는 전적으로 변방을 잘 지켜 그 명성이 자못 아려졌다. 편안하게 살고 있는 백성 사이에 그들을 위협하는 尹元衡(윤원형)이란 자가 있어 그는 세역을 믿고 많이 설쳤는데, 공이 일을 징계하여 조금도 용서가 없었다.

定州(정주)에 있을 때, 형제간에 서로 다투어 소송하는 자가 있어, 공이 그들에게 형제간의 義理(의리)를 잘 설명해서, 이를 용서하고 화해 시켜 술자리를 만들어 즐겁게 해 주니 백성들은 感泣(감읍)했다.

독서를 좋아하고 더욱 분발해서 自警編(자경편)을 저술하여 나이가 들어도 그치지 아니했다.

昌城(창성)으로 사령 받고 가는 날 상감이 불러서 만나보며 古將(고장)은 스승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물으니 공은 趙充國(조충국)의 일로 대답하였다. 상감은 기뻐하며 술을 내려 위로하며 보냈다.

그 진지에 가니 대적하는 적이 강한데, 나가는 사람은 예상 밖에 儒風(유풍)이 있는 장수였다.

 

일찍이 꿈꾸듯 한 곡의 음악이 끝남에 마쳐 읊으며 이르기를 공명도 탐하지 아니하고, 부귀도 부러워하지 않는다.하였다.

선친이 거처하든 움막에서 풍월을 벗 삼아 지낼 때 국가가 무사하면 느긋하게 지내며 세월을 보냈다. 과연 공의 노후에 부합되는 생활 이였다. 부모에게 효도를 다했는데 을묘 년을 맞아 큰 변을 만나니, 슬픈 중에도 예를 다 갖추어 삼가 선조를 받들었다. 자식을 훈육함에는 엄격하여 친척사이에 화목 하라 일러, 형제 자매간에 재산문재로 間言(간언)이 없었다.

관직에서는 부지런하여 낡은 허물을 고쳐 특히 많은 일을 했다.

配位(배위)는 같은 현의 永川李氏(영천리씨) 孝節公(효절공) 聾巖(농암)李先生(이선생) 賢輔(현보)의 딸이다. 집안의 법도를 잘 갖추어 家法(가법)이 엄연했다.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나, 공 보다 7년 전에 졸하였는에 4남을 낳았다.

장남은 ()禦侮將軍(어모장군), 차남은 ()으로 通仕郞(통사랑), 다음은 ()으로 忠順衛(충순위), 그 다음은 ()順陵參奉(순릉참봉)이며 司憲府(사헌부)監察(감찰)로 증직되었고 學行(학행)이 있었다. 內外(내외)로 많이 번성한 子孫錄(자손록)은 별도로 있다.

공의 증손 前參奉(전참봉) ()()墓道(묘도)表石(표석)이 없음을 근심하여 많은 宗黨(종당)과 의논하여 선인의 뜻은 아니지만 비석을 세우려 하니 오래도록 일컫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에 이르기를

 

문무를 모두 갖추어

하나만 빠져도 옮지 못하지만

모두를 갖추기란 어려운데

이를 겸비하는 이는 더욱 적네.

공은 이미 글을 많이 읽어도

과거를 그다지 중요시 않고

공은 이미 붓을 던지고

많은 적과 대적하는 것을 배워

재주 다해 명령을 받들어

도끼와 무기로서 대적하니

큰 어금니와 큼 꼬리 가진 놈을

虎符(호부)龍節(용절)

緩帶(완대)에 가벼운 차림으로

神人(신인)처럼 번득이네.

태평한 세대 만나서

변방과 요새에 먼지 일어나지 낳으면

韜靲(도금)을 시험 못해

칼집에 든 칼은 헛되이 우네.

軍中(군중)의 대장이

세상 밖에선 한 서생

한가롭게 끝내 늙어가니

어찌 공의 평소의 뜻이랴

산을 의지하고 다스려

막히고 우울한 그 기훈 푸는데

만고에 한 좋은 성에

한 조각 작은 무덤

공은 몸을 여기 의탁하니

공의 기백은 하늘에 있네.

 

 

 

金富弼(김부필) 墓碣銘(묘갈명)

 

金富弼(김부필) 中宗 11年 丙子(1516)~ 宣祖 10年 丁丑(1577) 62.

字 彦遇. 號 後彫堂. 光山人 江原監司 緣. 諱 文純.

 

공은 천성이 독실하고 강직 정직하며 형제간에 우애가 있고 친척에게는 극진하였다. 평소에 자제들에게 경계하기를 학문은 마땅히 효제충신을 근본으로 삼으라 하였으며 일찍이, 도산의 퇴계선생에게 입문하여 20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부친상을 당한 후 벼슬길에 나갈 뜻을 버리고 養德(양덕)에 힘썼으며 조정에서 여러 번 벼슬을 내렸으나 나가지 아니하였다. 사후에 인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가 하사되었다. 공의 묘소는 북후면 대현동 거인 선친 운암공 묘 아래 연분으로 모셔졌는데 묘 앞에는 有明朝鮮國徵士後彫堂先生光州金公之墓(유명조선국징사후조당선생광주김공지묘)라는 비가 서있고 계하에는 文純公後彫堂金先生墓石碑(문순공후조당김선생묘석비)가 별도로 서 있다.

 

神道碑銘

前面大字嘉善大夫江原道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 雲巖 諱緣 神道碑銘 幷序

碑 文

金後彫挹淸二公在退陶老先生門以篤行稱焉者挹淸公嘗爲其先考觀察公狀請銘於先生先生受而藏之文未出而有山頹之恨矣竊念先生戒存濫餙苟非心素景服未嘗爲人作麗牲文夫以挹淸之賢而狀先德則其嚴且密可知以先生之重一言之餙而受而藏之則公之言行之應銘法可知也已公之八世孫瑩踰大嶺入京師托濟恭以二百年巾衍之狀嗟夫此先生之所鄭重者以濟恭之顓蒙後學其可與議於斯以速僭踰之罪乎雖然法可銘而銘之先生志也况是役也於濟恭實有榮焉乃敢按其狀而撰次之曰公諱緣字子由自號雲巖金本光州人在麗奕世簪纓有曰光存知門下省事有曰稹藝文館大提學謚章榮章榮有子曰天利事 本朝爲密直副使是生務於公高祖也官濟用少監曾祖曰崇之 穆淸殿直 贈司僕正祖曰淮縣監 贈參議考曰孝盧始卜居禮安遂爲禮安人嘗以卓行擧于朝値己卯禍不果用以國子生員終 贈吏曹參判妣貞夫人陽城李氏郡守持之女判中樞純之之孫以成化丁未生公公力學蚤立庚午中生進兩試己卯登第主其試者金慕齋先生每以不擢公上第爲恨選隷槐院庚辰薦入史館爲翰林未幾遭世母喪持心制以終三年以鞠養恩也後於世父亦如之制闋由待敎陞奉敎甲申拜司諫院正言公常嫉金安老奸旣入臺閱半月伏閤抗爭安老貶乃已時大臣及東西銓交口譽凜凜朝莫晉用公顧不樂進取爲養乞外 除義興縣監丙戌因世父喪解官戊子授典籍自是遷工禮二曹正郞間拜司憲府持平庚寅出守興海郡居五年以事遞丁父憂廬墓盡哀鄕黨感服丁酉由司藝轉軍資副正陞拜司諫院司諫先是安老黨蔡無擇沈彦光倡議欲引安老入公與晦齋李先生執不可其黨憾益深至是安老復枋用日夕謀陰中公顧無以爲說會唐城尉洪礪爲安老所搆殺遂嗾典翰蘓逢以公爲唐城切親駁遞諫官付軍資判官俄出鏡城判官鏡北塞禦魅之地也居數月安老敗死卽以司諫召公還 中廟慰諭曰不知爾忤奸遠勞于外於予心有不安者時三奸旣除公聲望益鬱然尹公安仁掌銓部囑公曰盍盡鋤其餘黨公曰奸固可鋤已甚則不可尹不悅戊戌以軍資監正出星州牧使以星距鄕遠不便於養上章乞換近邑會登擢英試陞通政階換守榮川郡庚子遞還明年入承政院自右副陞至右承旨壬寅特陞嘉善拜江原道觀察使公前後治郡皆有異績在義興儒化丕煽使僻俗知喪葬弔祭禮在興海水陸節度營憚公廉簡自守噎不敢出聲至若榮川距鄕無百里益務淸約節省逋者完訟者歸及莅按察營黜陟無一私列邑咸服嚴明癸卯遞付僉中樞甲辰赴慶州府尹以九月二十三日卒于官壽五十八方疾革無他語只曰 東宮一國人心所屬邇來大小尹之說何故行於下也國家事殆不知稅駕及卒一境涕泣若襁兒失乳 中廟別加贈賻遣官祭如式 仁廟在東宮亦賻焉 公事親孝非有專城養躳釣魚以供囿弟妹以和篤宗族以恩待人務寬仁容衆至事是非論議有毅然不可奪者爲郡肥公瘠私不以一物隨平居衣布衣廉几草草見者不知其爲宦達人也嘗與晦齋先生爲道義交其宰興海屢過玉山書齋資益居多及尹東都講磨益密如也性不喜矯飾務自韜晦然善類之知公者莫不器之以公輔常慕聾巖李先生恬退瀕江縛小菴扁以雲巖又卜洛上勝地以擬終老觀其所好亦可以知其志矣有集逸於燹今藏於家只若干首惜哉配昌寧曹氏進士致唐之女尊姑李夫人每敎戒諸孫曰男以而父爲法女以而母爲則金氏其庶幾乎年七十四以丙辰十一月九日卒塟祔公卽安東居仁村坤坐原也生二男三女長富弼號後彫次富儀號挹淸皆成均生員三婿縣令金蘭宗參奉李容生員朴思訥富弼娶直長河就深女富儀娶正郞權習女生一男垓後娶李耻女垓號近始齋有學行當壬辰難以前翰林倡率義師屢立功卒死於軍金蘭宗一男洎府使李容一男復元女適柳雲龍牧使朴思訥一男惺翊贊女適郭三吉銘曰

公生鄒魯其德不孤斥邪講道晦老與俱豈曰不彰少騫多躓有子得師四科之一有孫抗義復矢之烈不有訓迪于何承式陶山其頹孰揚厥德我銘有受不顯其刻

 

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兼兵曹判書判義禁府事知 經筵春秋館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 世孫左賓客 奎章閣提學知 實錄事蔡濟恭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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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명>

가선대부강원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운암 휘연 신도비명 병서

 

후조당 김부필(金富弼)과 읍청정 김부의(金富儀) 두 분이 퇴계선생의 문하에서 행실이 독실하다는 칭송을 받았다. 김부의가 일찍이 그의 선친인 관찰사 김연공의 가장(家狀)을 지어 퇴계선생에게 묘갈명을 부탁하였다. 이 때 퇴계 선생께서는 가장을 받아서 갈무리해 놓은 채, 묘갈명을 짓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퇴계 선생께서 경계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그것은 "지나치게 꾸미면 마음속으로 크게 감복하지 않으므로 일찍이 남의 비문을 짓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김부의처럼 훌륭한 분이 선친의 가장을 지었을 때는 매우 엄격하고 치밀하게 지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퇴계 선생께서 한 마디 말을 꾸미는 것도 신중하게 여기셔서 그 가장을 받아서 갈무리 하셨다면, 이것은 운암공의 언행이 묘갈명을 쓰는 법에 합당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의 8세손 김영(金瑩)이 조령을 넘어서 서울로 들어와 나[채제공]에게 2백 년 동안 책 상자 속에 간직하였던 가장을 가지고 와서 신도비명을 부탁하였다. ! 이 일은 퇴계 선생도 신중하게 여기시던 일인데, 나같이 어리석은 후학이 어찌 이 일을 논하여 참람한 죄를 자초하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명()을 지을 만큼 모범이 되는 경우는 명()을 짓는 것이 퇴계 선생의 평소 뜻이었다. 게다가 일은 나에게 있어서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감히 그 가장을 검토해보고 다음과 같이 짓는다.

공의 이름은 연(), 자는 자유(子由), 자호는 운암이며,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고려시대에는 대대로 높은 관직을 지냈다. 김광존(金光存)은 지문하성사를 지냈고, 김진(金稹)은 예문관대제학을 지냈으며 시호는 장영(章榮)이다. 김진의 아들 김천리(金天利)는 조선에 벼슬하여 밀직부사가 되었고, 그의 아들 김무(金務)는 공에게 고조부가 되는데 제용감소감을 지냈다. 증조부 김숭지(金崇之)는 목청전직을 지내고 사복시정에 증직되었다. 조부 김회(金淮)는 현감을 지내고 참의에 증직되었다. 부친 김효로(金孝盧)는 처음으로 예안에 거주하고, 마침내 예안사람이 되었다. 그는 일찍 뛰어난 행실로 조정에 천거되었으나 기묘사화를 당하여 결국 기용되지 못하였다. 성균관 생원으로 세상을 마치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모친은 정부인 양성이씨(陽城李氏)로 군수를 지낸 이지(李持)의 따님이고, 판중추부사 이순지(李純之)의 손녀이다. 정미년(1487, 성종 18)에 공을 낳았다.

공은 힘써 배워서 일찍부터 학문이 성숙되었다. 경오년(1510, 중종 5)에 생원과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고, 기묘년(1519, 중종 1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때 시험을 주관한 모재 김안국(金安國)선생은 공을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시키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그 후 공은 괴원(槐院승문원)에 분관되었으며, 경진년(1520, 중종 15)에는 예문관에 들어가 한림(翰林검열)이 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백모(伯母)의 초상을 당하자 심상(心喪)으로 3년 상을 치렀는데, 이것은 길러주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후 백부에게도 마찬가지로 하였다. 상을 마친 후에는 대교로 있다가 봉교로 승진하였다. 갑신년(1524, 중종 19)에는 사간원정언으로 임명되었다. 공은 늘 김안로(金安老)의 간사함을 미워하였었는데, 사간원으로 들어간 지 반달이 지나자 대궐에 엎드려 김안로를 내치라고 강력히 주청하고, 김안로가 쫓겨나자 중단했다. 이 때 대신들과 병조, 이조에서는 서로 입을 모아 칭찬이 자자하므로 조만간에 크게 승진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은 출세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외직을 원하였으므로 의흥현감에 제수되었다. 병술년(1526, 중종 21)에는 백부의 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무자년(1528, 중종 23)에는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다. 이때부터 공은 공조예조의 정랑에 임명되었고, 그 사이 사헌부지평으로도 재직하였다. 경인년(1530, 중종 25)에 흥해군수로 나가 5년 동안 있다가 어떤 일로 체직되었다. 이때 친부의 초상을 당하여 시묘살이 하면서 너무나 애통해 하였기 때문에 고을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정유년(1537, 중종 32)에는 성균관사예에서 군자감부정으로 임명되었다가 사간원사간으로 승진되었다.

이에 앞서 김안로의 일당인 채무택(蔡無擇)심언광(沈彥光)이 김안로를 다시 기용하려고 하였다. 공이 회재 이언적(李彥廸) 선생과 함께 불가하다고 고집함으로 김안로 일당의 원한은 더욱 깊어졌다. 이 때 김안로가 다시 기용되어 조석으로 공을 중죄로 몰려고 하였나 생각해보아도 그럴만한 빌미가 없었다. 이 때 당성위(唐城尉) 홍려(洪礪)가 김안로의 모함으로 죽음을 당하였다. 김안로는 전한인 소봉(蘇逢)을 사주하여 공이 홍려와 절친한 사이라고 탄핵하였다. 그래서 간관직에서 체직되어 군자감판관으로 보내졌다. 얼마 후에는 다시 경성판관으로 내보내졌는데, 이곳은 북쪽 변방으로 오랑캐를 방어하는 곳이었다. 몇 달이 지나자 김안로가 실각하여 죽었다. 그러자 공을 사관으로 삼아 불러 들였다. 공이 돌아오자 중종임금은 그대가 권간의 비위를 거슬러 변방에서 고생한 것을 알지 못하였으니, 내 마음이 편안치 못하다.”고 하면서 위로하였다. 이때에 세 명의 간신이 제거되자 공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이조판서 윤안인(尹安仁)이 공에게 부탁하기를 그 잔당들도 제거해야 하지 않겠는가?”라 하였다. 공은 간사한 무리는 정말로 제거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 심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하자 윤안인이 공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무술년(1438, 중종 33)에는 군자감정에서 성주목사로 나갔다. 성주는 공정대의 고향과의 거리가 멀어 부모님 봉양하기가 불편하므로 소장(疏章)을 올려 가까운 고을로 바꾸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때마침 공은 중시(重試) 탁영과(擢英科)에 급제하고 통정대부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영천군수로 바뀌어 임명되었다. 경자년(1540, 중종 35)에 체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음 해에 다시 승정원 들어가 우부승지가 되었다가 우승지로 승진하였다. 임인년(1542, 중종 37)에는 가선대부로 특진하고 강원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

공은 전후에 걸쳐 여러 군을 다스리면서 모두 우수한 성적을 남기었다. 의흥군수로 있을 때는 유교로서 백성들을 크게 교화시켜서 벽지의 풍속이 장사지내고 조문하고 제사지내는 일을 알게 하였다. 흥해군수로 있을 때는 수사와 병사들이 공이 청렴하면서 본분을 지키는 것을 꺼려서 감히 불평하는 소리를 내지 못하였다. 영천(榮川지금의 영주)군수로 있을 때는 고향까지의 거리가 백리도 안 되지만 더욱 청렴하고 경비를 줄이는데 힘썼다. 그래서 미납된 세금은 완납되었고 소송할 사람은 모여들었다.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는 상주고 벌주는 것을 한 번도 사사롭게 처리하지 않으니 모든 고을의 백성들이 공의 엄격하고 분명함에 감복하였다.

계묘년(1543, 중종 38)에는 강원도관찰사에서 체직되어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갑진년(1544, 중종 39)에는 경주부윤으로 부임하였고, 그 해 923일 관사에서 세상을 마치니 향년 58세였다. 공은 병환이 악화되었을 때 다른 말은 하지 않고 다만 세자는 백성들의 마음이 귀속되는 곳인데, 근래에 대윤이니 소윤이니 하는 말이 무엇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 오르내리는가! 나라일이 아마도 어떻게 귀결될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온 고을 사람들이 강보에 쌓인 아이가 어미를 잃은 듯이 울부짖었다. 중종 임금은 특별히 부의를 더 내려주고, 예관을 파견하여 법도에 따라 제사지내게 하였다. 세자로 있던 인종임금도 부의를 내려 주었다.

공은 효성으로 부모님을 섬겼다. 고을 수령이 되어 부모를 봉양하지 않을 때는 직접 물고기를 낚아 봉양하였다. 아우와 누이동생에게는 화목하게 대하였으며, 종족을 대할 때도 은혜롭게 대하였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너그럽고 인자하게 대하여 여러 사람들을 포용하려고 힘썼다. 그러나 어떤 일의 시비를 따질 때는 그 태도가 의연하여 그의 뜻을 꺾을 수가 없었다. 군수로 있을 때에는 공적인 쓰임은 풍부하게 하고 개인적인 쓰임은 박하게 하여, 관청의 물건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그리고 평소에는 베옷을 입고, 주렴과 책상이 초라하였다. 그래서 이를 보는 사람들은 그가 벼슬길에서 현달한 사람임을 알지 못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회재 이언적 선생과 도의로 사귀어 흥해군수로 있을 때 여러 번 옥산서재를 방문하여 학문의 발전이 많았다. 동도윤[경주부윤]으로 있을 때에는 학문을 강론하고 인격을 연마하기를 더욱 친밀하게 하였다.

공의 성품은 겉치레를 좋아하지 않고, 스스로 자취를 숨기기에 힘썼다. 그러나 어진 사람 중에 공을 아는 사람은 공을 정승감이라고 기대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공은 항상 농암 이현보(李賢輔) 선생이 깨끗하게 강가의 고향으로 물러난 것을 사모하여 자신도 작은 암자를 지은 뒤에 운암(雲巖)’이라고 편액 하였다. 또 낙동강가의 경치 좋은 곳을 선택해서 만년을 보내려고 하였다. 공이 좋아하는 것을 보면 그가 뜻한 바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문집이 있었으나 전쟁으로 잃어버리고 지금 집안에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약간이 시문뿐이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

부인은 창녕조씨(昌寧曺氏)로 진사 조치당(曺致唐)의 딸이다. 시어머니 이씨부인은 늘 손자들을 훈계하면서 아들은 너의 아비를 모범으로 삼고, 딸들은 너의 어미를 모범으로 삼으면 김씨 집안은 크게 기대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부인은 74세 되던 병진년(1556, 명종 11) 119일 세상을 마치니, 공의 묘소에 부장하였다. 그곳이 바로 안동 거인촌 곤좌(坤坐서남쪽에서 북동쪽을 향한 자리)의 언덕이다.

공은 23녀를 두었다. 장남 부필(富弼)은 호가 후조당이며, 차남 부의(富儀)의 호는 읍청정으로 모두 성균관 생원이다. 세 사위는 현령 김난종(金蘭宗), 참봉 이용(李容), 생원 박사눌(朴思訥)이다. 그리고 부필은 직장 하취심(河就深)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다. 부의는 정랑 권습(權習)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아들 해()를 낳았고, 그 후 다시 이치(李恥)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해의 호는 근시재(近始齋)이며 학문이 깊고 행실이 훌륭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직 사관으로서 의병을 일으켜 여러 번 전공을 세우고 진중에서 세상을 마쳤다. 김난종의 아들 계()는 부사를 지냈다. 이용의 아들은 복원(復元)이며 딸은 목사를 지낸 유운룡(柳雲龍)에게 출가하였다. 박사눌의 아들 성()은 세자시강원익찬을 지냈으며, 딸은 곽삼길(郭三吉)에게 출가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추로지향에 태어났으니 公生鄒魯

그 덕이 외롭지 않네 其德不孤

불의를 배척하고 도학을 강론할 때 斥邪講道

항상 회재선생과 함께 하였네 晦老與俱

공의 행적이 어찌 드러나지 않았다고 말하랴 豈曰不彰

작은 허물만 있어도 크게 그르치는 것을 少騫多躓

아들은 퇴계같은 훌륭한 스승을 얻어 有子得師

공문사과(孔門四科)의 하나에 들었다네 四科之一

손자는 임진난 때 의병을 일으켜 有孫抗義

맹세를 실천하여 장렬히 전사하였네 復矢之烈

가정에서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면 不有訓迪

이들이 어디에서 이것을 본받았으랴 于何承式

퇴계선생 돌아가신 이후로는 陶山其頽

누가 그 덕을 천양할 수 있으랴 孰揚厥德

나의 이 명()은 근거가 있으니 我銘有受

그 새긴 내용이 드러나지 않겠는가 不顯其刻

 

보국숭록대부 행판중추부사 겸 병조판서 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세손좌빈객 규장각제학 지실록사 채제공은 짓다.

 

後彫堂 金富弼先生 墓右碑

前面大字文純公後彫堂金先生墓右碑

碑 文

公諱富弼字彥遇自號後彫堂金氏出光州新羅王子諱興光知國將亂遯于光爲民是爲鼻祖至孫諱吉佐高麗太祖爲三重大匡司空自是昌顯至十三世少監諱務當國初徙于嶺南之安東卽公五世祖也曾祖諱淮 贈參議祖諱孝盧隱居禮安之烏川有操行 贈參判退陶李先生銘其墓父諱緣監司號雲巖嘗以諫官論竄金安老爲其所中與晦齋李文元公同被斥逐卽文元所謂志契斷金獻替同襟者也母昌寧曹氏國子致唐女以正德十一年生丙子生公幼與凡兒特殊及長服襲義方無子弟過嘉靖丁酉中司馬聲名出諸生間同齋生有枉罹法當死公見大臣爲言其狀得免死甲辰雲巖公卒明年 孝陵昇遐又明年服闋遂棄擧業入則奉太母李夫人及母夫人以禮出則師事李先生甚謹不以外物經心旣以植松栢于庭扁其堂曰後彫人莫能原其意也嘉靖末朝廷聞公行義始調祠官不起隆慶戊辰又除 孝陵參奉李先生時在都貽書勉出公以詩答之曰爲向山雲寄一語何心藏壑又升空雲言卷舒雖由我亦在神龍變化中蓋寓諷也己巳又除 靖陵參奉亦不膺李先生有詩曰後彫主人堅素節 除書到門心不悅坐對梅花氷雪香目擊道存吟不輟後朝議將以六品職待公不悅者惎之不果萬曆丁丑十月考終于寢遺命勿用官啣享年六十二踰月乙未葬于安東金鶴山向東之原配晉州河氏尙瑞直長就深女也無子以弟富儀子垓爲嗣登第入翰苑壬辰倭亂以義將卒于軍 贈修撰是兵生四子曰光繼敎官以邃學特節名曰光實曰光輔進士曰光岳自是繁衍至于今八九世勝冠屢百人公平生簡於著述又不存藁至七世孫瑩始裒輯若干篇藏于家公姿性孝友剛正制行謹嚴其在雲巖公憂杖而後能起執禮一遵古儀其後喪太夫人及母夫人亦如之鄕黨莫不稱服晨起必拜廟四時必有祭祭之日必沐浴致潔至老不懈視兄弟如手足弟富儀晩患風痺公垂涕救護之女弟朴宜人歿食素至踰月朔望輒爲位哭中堂恩禮之篤人所罕及待人賢愚各盡其分善者傾與之曲者正色責之無所容貸故隣黨朋儕或有過差輒曰後彫知否敎子弟必以孝悌忠信爲先嘗曰學問當以孝悌爲本又曰眞心爲善乃眞善如有毫分修餙雖善亦僞也 仁宗在東邸令聞夙著八方延頸公早遊太學以策名淸時爲期及 龍馭猝然上賔則公摧沮痛寃不復有當世意每年六月晦日必入居仁山墳庵徹曉哭嘗有感誦屈原岳飛傳遙憶河西聽松翁之句其悽㘦慷慨之心有不可掩者矣初李先生講學于鄕長公十五歲公始朋友之旣又長少之末乃執弟子禮登門請業論者謂苟非知足以知聖人不能也而公猶以晩悟爲恨也及李先生卒公素衣素帶素食行心喪一年與弟富儀堂兄富仁堂弟富信富倫表從琴氏兄弟拜遊李先生門居又同社日夕相聚非談詩論文率辨說義理以勉德業以䂓過失以至婚葬吉凶無不相資相佽以行禮義忠信遂成其俗寒岡鄭文穆公嘗曰歎凡人一家難盡善烏川一里無非君子人者公爲學主敦本務實及登師門聞見愈精正平生著力在心經一書每瞑目端坐心究體驗有會則欣然忘食侍李先生講論有時侃侃守己見先生亦徃徃舍己從之故與公書有曰而晦庵書疑辨處考據甚的㴱荷深荷又曰向日面究條終有不快於心得示乃知之與他門人書有曰彥遇諸人共讀心經多所開發方知昔昧誤處不少其見重於師門如此 今上丙子嶺南儒生上書陳公道德節義之實請 贈爵諡事下該曹轉廟堂未果行壬午儒臣李彥淳上䟽申請大臣奏請特許於是 贈公吏曹判書兼啣如例公後孫啇儒以狀屬不佞嗚乎今去公世且三百年其邃學特行爲其子孫者尙不得以詳傳况他人乎不佞曷足以闡潛揚微雖然謚者節惠也公學問中人也其造詣之妙非人人所得以測况人人豈足以輕重公哉惟賢者之言可以垂百代而不泯若是乎節其惠而確据之有素也公之生也退陶先生贈公詩曰義同自直蓬麻植樂似相宣金石聲愧我久昏神鑑炯憑君新澡玉淵淸此退溪之所推詡也公之沒也栗谷李先生與人書曰戊午秋拜後彫於陶山累日講討義精仁熟彌密彌堅今已易簀斯道淪喪正義湮沒此栗谷之所歎傷也兩先生皆東方之大賢也其識公必有眞其擬公必有倫又誰能易之哉嗚乎其偉矣若夫公車之永廢 除書之不赴其跡如聽松公六月仁山之哭其跡如河西公夫跡者心之踐也執跡而徵心貞確不移之操同時諸公之謂之與日月爭光者非過實也謹狀如右以俟太常之裁擇

輔國崇祿大夫 領敦寧府都事 永安府院君 金祖淳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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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순공 후조당 김선생 묘우비>

()자헌대부(資憲大夫)이조판서(吏曹判書)()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찬선(贊善)증시(贈諡)문순공(文純公)()부필(富弼)시장(諡狀)

 

공의 휘는 부필(富弼), ()는 언우(彦遇), 자호는 후조당입니다. 김씨는 광주(光州)에서 나왔는데 신라 왕자 흥광(興光)이 나라에 장차 변란이 일어날 줄 알고 광주에 은둔하여 그곳 백성이 되었으니 이 분이 비조(鼻祖)입니다. 왕자의 손자 길()은 고려 태조를 도와 삼중대광 사공이 되었는데 이로부터 자손들이 번창했습니다. 13세에 이르러 소감을 지낸 무()는 조선 초에 영남의 안동으로 옮겨와 살았는데 바로 공의 5세조입니다. 증조는 회()인데 참의에 증직되었습니다. 조부는 효로(孝廬)인데 예안의 오천에서 은거하며 조행(操行)이 있었고, 참판에 증직되고 퇴도(退陶) 이선생이 묘갈명을 지었습니다. 부친은 연()인데 강원도관찰사를 지냈으며 호는 운암입니다. 일찍이 간관(諫官)으로 있으면서 김안로(金安老)의 유배를 주장하다가 모함을 받아 회재 이문원공(李文元公)과 함께 쫓겨나게 되었으니, 바로 문원공이 이른 바 같이 뜻이 맞아 우정은 쇠도 끊을 만하고, 헌체(獻替)에 같은 마음이었다.”고 말했던 사람입니다.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 진사 치당(致唐)의 따님인데 정덕 11년 병자(丙子, 1516)년에 공을 낳았습니다.

공은 어려서부터 여느 아이들에 비해 매우 특출했으며, 장성한 뒤에는 의방(義方)을 익혀 자제로서의 과실을 범하지 않았습니다. 가정 정유(丁酉, 1537)년에 사마시에 입격했고 여러 유생들 사이에 명성을 떨쳤습니다. 같은 재생(齋生)이 억울한 죄로 국법에 걸려 죽게 될 처지가 되었는데, 공이 대신(大臣)을 만나 그를 위해 정상(情狀)을 말해준 덕분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갑진(甲辰, 1544)년에는 운암공이 작고하고, 이듬해에는 인종(仁宗)께서 승하하셨습니다. 그 이듬해(1546)에 상복을 벗고서 마침에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집에 들어와서는 조모 이부인(李夫人)과 모친을 예법에 맞게 섬기고, 밖에 나가서는 퇴계 이선생(李先生, 退溪)을 매우 공손하게 스승으로 섬기며 외부의 일에 대해서는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습니다. 이미 뜰에 송백(松柏)을 심어 놓고서 후조당(後彫堂)이란 편액을 달았으니. 사람들은 그 뜻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가정 말년에 조정에서 공의 행의(行義)를 듣고 비로소 사관(祠官)으로 임명했지만 공은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융경 무진(戊辰, 1568)년에 효릉참봉을 제수했는데, 이 때 한양에 있던 이선생이 공에게 편지를 보내 출사하기를 권했지만, 공은 시()를 지어 이렀게 답하였습니다.

산에 있는 구름에게 말 한 마디 물어봄세. 골에 있다가 하늘로 올라감은 무슨 맘인가? 구름이 답하길 폈다 말았다 함은 내 자유지만, 신룡(神龍)이 부리는 변화 속의 일이라네(爲向山雲寄一語, 何心藏壑又升空., 雲言舒卷雖由我, 亦在神龍變化中).”라고 하였으니, 이는 곧 풍자하는 말이었습니다.

기사(己巳, 1569)년에 또 정릉참봉을 제수했으나 역시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선생은 시를 지어 이렇게 읊었습니다.

후조당 주인께선 본래 절개 굳세어서, 임명장이 도착해도 기뻐하는 마음이 없네. 빙설 속에 피어난 매화 향과 마주앉아, 도의 근원을 깨닫고는 읊조리길 그치지 않네(後彫主人堅素節, 除書到門心不悅, 坐對梅花氷雪香, 目擊道存吟不輟).”라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조정에서 장차 6품직을 제수하려고 했지만 달갑게 여기지 않는 사람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만력 정축(丁丑, 1577)10월에 공은 정침에서 작고하였습니다. 유명(遺命)관함(官銜)을 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향년 62세였으며, 달을 넘겨 을미일(乙未日)에 안동 금학산 동향 언덕에 장사지냈습니다.

배위는 진주하씨(晉州河氏)로 상서원 직장을 지낸 취심(就深)의 따님입니다. 아들이 없어 아우 부의(富儀)의 아들 해()를 후사로 삼았는데, 과거에 급제하여 한원(翰苑)에 들어갔고,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군중(軍中)에서 작고했으며 수찬에 증직되었습니다. 이 분은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광계(光繼)는 교관을 지냈으며 심오한 학문과 특출한 절의로 이름났습니다. 둘째는 광실(光實)이며, 셋째 광보(光輔)는 진사가 되었으며, 넷째는 광악(光岳)입니다. 이로부터 자손이 번성하여 지금까지 8~9세에 이르는 동안 관례(冠禮)를 치른 사람이 수 백인입니다.

공은 평생 동안 저술에 힘쓰지 않았고 또 원고도 남겨두지 않았는데, 7세손 영()이 비로소 약간의 글을 수집하여 집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공은 성품이 효우 강강(剛强)했으며 행실이 근엄하였습니다. 운암공의 상을 당했을 때에는 죽장을 짚은 뒤에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고, 상례를 거행함에 한결같이 고례(古禮)의 의식을 준행하였습니다. 그 뒤 조모의 상과 모친의 상을 당했을 때도 역시 그와 같이 하였으므로 칭송하고 탄복하지 않은 고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새벽이면 일어나 반드시 가묘를 참배했으며, 사시(四時)에 반드시 제사를 지냄에 제사를 모시는 날에는 반드시 목욕하여 심신을 깨끗하게 했으며 늙을 때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형제를 대할 때에도 자기 수족과 같이 여겼습니다. 아우 부의가 만년에 중풍을 앓게 되자 공은 눈물을 흘리며 간호했으며, 누이동생 박의인(朴宜人)의 상을 당해서는 한 달이 넘도록 소식(素食)을 하며 초하루와 보름에는 중당(中堂)에 영위(靈位)를 차려 곡()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공은 은정(恩情)과 예절이 독실했으니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는 어질거나 어리석거나 각각 그 분수에 맞도록 성의를 다했으며, 선한 사람은 심력을 쏟아 허여하고 행실이 나쁜 사람은 정색을 하고 꾸짖어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고을 사람이나 친구들이 혹 과실을 범하게 되면 후조(後彫)가 혹 아시지는 않을까?”하며 두려워했습니다. 자제들을 가르칠 때에는 반드시 효제와 충신을 먼저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일찍이 말하기를 학문은 당연히 효제를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하였고, 진심으로 선행을 해야 그것이 참된 선행이지 만일 조금이라도 가식적인 면이 있다면 아무리 선하더라도 거짓인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인종께서 동궁(東宮)에 계실 때 훌륭한 명성이 일찍 드러나 전국의 사람들이 공에게 기대를 하였습니다. 공은 이른 나이에 태학에서 공부하면서 잘 다스려지는 시절에 신하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인종께서 갑자기 승하하자 공은 기가 꺾이고 원통해하며 다시는 세상에 나갈 뜻을 갖지 않고서, 매년 6월 그믐날이면 반드시 거인리의 산중에 있는 재실로 들어가 새벽이 될 때까지 곡을 하였습니다.

일찍이 시를 지어 굴원과 악비의 전기를 감명 깊게 읽고, 멀리 하서[金麟厚]와 청송옹[成守琛]을 생각하네(感誦屈原岳飛傳, 遙憶河西聽松翁).”라고 읊었는데, 이는 처절하고 강개한 마음을 덮을 수 없어서였습니다.

이선생이 향리에서 도학을 강론하던 처음에, 선생이 공보다 15세가 연장이었으므로 공은 처음에는 벗으로 사귀다가 이윽고 또 장유(長幼)로 지내다가 마침내 곧 제자로서의 예를 갖추고 문하에 들어가 학업을 청했습니다. 논하는 사람들은 성인을 알아볼 만한 지혜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했지만, 공은 오히려 늦게 깨닫게 된 것을 한스러워했습니다. 이선생이 작고하자 공은 소의(素衣), 소대(素帶), 소식(素食)으로 1년 동안 심상(心喪)을 치렀습니다. 아우인 부의(富儀)와 당형(堂兄)인 부인(富仁), 당제(堂弟)인 부신(富信)과 부륜(富倫), 표종(表從)인 금씨(琴氏) 형제[琴應夾琴應壎] 등과 이선생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했으며, 또 거처하는 곳도 한 마을이었으므로 아침저녁으로 서로 모여 시문을 담론하지 않으면 대개 의리를 변설하였습니다. 덕업을 권면하고 과실을 경계하는 것에서부터 혼인이나 장례 등의 길흉사에 이르기까지 상부상조하여 예의와 충신을 행하지 않음이 없어 마침내 한 마을의 풍속을 이루었습니다. 한강(寒岡) 정문목공(鄭文穆公, )은 일찍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보통 사람이라면 한 집에서조차 다 선()하기 어렵거늘, 오천(烏川) 한 마을에는 군자가 아닌 사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공의 학문은 근본을 돈독하게 하고 실질을 힘썼으므로 스승의 문하에서 공부할 때 견문이 더욱 정밀했고 올발랐습니다. 평생 동안 심경(心經)이란 한 책에 힘을 쏟았는데 눈을 감고 단정히 앉아서 마음속으로 궁구(窮究)하고 몸으로 징험하다가 깨우친 것이 있으면 기뻐하며 밥 먹는 것도 잊었습니다. 이선생을 모시고 학문을 강론할 때면 이따금 자기 의견을 강력하게 주장했으므로 선생도 종종 자기 의견을 버리고 공의 의견을 따랐습니다. 그러므로 공에게 보낸 편지에서 회암(晦菴)의 편지 가운데 의문이 나는 부분에 대해 근거를 고찰한 것이 매우 정확하니, 매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였고, 지난날 대면하여 연구하던 조목은 끝내 내 마음에 썩 들지 않았는데, 보내준 편지를 받아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하였습니다. 다른 문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언우(彦遇金富弼)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심경(心經)을 읽으면서 개발한 바가 많아, 지난날 내가 잘못 알았던 곳이 많음을 깨달았습니다.” 하였으니, 공이 선생의 문하에서 중망을 받은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금상(今上, 현재의 主上) 병자(丙子, 1816)년에 영남 유생들이 글을 올려 공의 도덕과 절의에 관한 실상을 진술하며 증직과 시호를 내려줄 것을 청했습니다. 이 일이 해당 관청에 내려갔다가 묘당(廟堂)을 전전하다가 결국에는 행해지지 못했습니다. 임오(壬午, 1822)년에 유신(儒臣) 이언순(李彦淳)이 상소하여 거듭 청했고 대신(大臣)이 주청하여 특별한 윤허하셨습니다. 이에 전례에 의거하여 공에게 이조판서를 증직하시고 품계까지 내리셨고, 공의 후손인 상유(商儒)가 저에게 시장(諡狀)을 부탁했습니다.

오호라! 지금은 공이 살던 시대에서 3백년이나 지나 그 심오한 학문과 빼어난 행의가 그 자손들에게도 자세하게 전해지지 않거늘, 하물며 다른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저 같은 사람이 어찌 숨겨진 학덕과 희미한 사적을 드러내어 밝힐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시호는 절혜(節惠)인 것입니다. 공은 학문을 한 사람이며 그 오묘한 조예는 사람마다 헤아릴 수 있는 게 아니거늘 하물며 사람마다 어찌 공의 경중을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어진 이의 말이 백세토록 드리워져 사라지지 않는 것이 이와 같다면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여러 빼어난 행실 중에서 특별히 큰 것을 들어 확실한 증거로 삼은 것은 본래부터 있던 일입니다. 공이 살아있을 때 퇴도(退陶)선생은 공에게 시를 주어 이렇게 읊었습니다.

삼밭에 서 있는 쑥대 저절로 곧아지고, 쇠와 돌이 어울린 풍악마냥 즐거웠네. 내 밝던 정신이 오래 혼미해져 부끄럽더니, 그대가 새로 옥연처럼 맑게 씻어준데 힘입었네(義同自直蓬麻植, 樂似相宣金石聲. 愧我久昏神鑑炯, 憑君新澡玉淵淸).”라고 하였으니, 이는 선생이 공을 추대한 것입니다.

공이 작고했을 때 율곡(栗谷) 이선생이 어떤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 무오(戊午, 1558)년 가을에 도산에서 후조를 뵙고 여러 날 동안 학문을 강론했는데 의리가 정밀하고 인()에 익숙하며, 학문이 더욱 정밀하고 지조가 더욱 굳세었습니다. 지금은 이미 돌아가셨으니 사도(斯道)는 없어지고 정의가 사라졌습니다.”라고 했는데, 이는 율곡이 탄식하고 아파한 것입니다. 이 두 선생은 우리 동방의 대현입니다. 그러므로 그 공을 알아봄에 반드시 참됨이 있고, 공을 견줌에 반드시 짝이 있다고 할 것이니, 또한 누가 능히 바꿀 수 있겠습니까?

오호라! 위대한 일입니다. 과거공부를 영원히 그만두고 관직을 제수해도 나아가지 않는 것은 그 자취가 청송공과 같으며, 6월에 거인리 산중에서 곡한 것은 그 자취가 하서공과 같습니다. 무릇 자취란 마음이 실천한 흔적입니다. 자취를 가지고 마음을 징험하여 곧고도 확고하여 변하지 않는 절조에 대해 당시의 제공들이 일월(日月)과 빛을 다툴 만하다.”고 한 것은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삼가 위와 같이 시장을 올려 태상(太常太常寺)의 취택을 기다립니다.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도사 영안부원군 김조순(金祖淳) ()

 

 

 

金彦璣(김언기) 墓碣銘(묘갈명)

 

金彦璣(김언기) 中宗 15年 庚辰(1520)~ 宣祖 21年 戊子(1588) 69.

字 仲昌. 號 惟一齋. 光山人 潭庵 用石

 

공의 묘소는 와룡산 남록 산야동에 있으며 계하에 아들 葛峯(갈봉) 得硏(득연)의 묘와 연분이다. 공은 만년에 구담에서 가야로 옮겨 작은 서실을 지어 후진 양성에 힘썼는데 당시에 많은 안동의 사인이 공에게 수학하여 도학 문학 과신으로 모두 현달한 분이 많다.

사후 문인의 후손이 용계서원을 건립하여 제향 하였으나 서원철폐 후 지금은 강당만 남아 있으나 정묘년에 사림에서 報德壇(보덕단)을 만들어 공의 유적을 추모하여 제행하고 있다.

 

墓碣銘

先生諱彦璣字仲昷金氏新羅王子興光 知世將亂遯于光州之平章洞孫吉佐麗 祖官左僕射 自是 代有 平章洞之名 以是云 本 朝光城君若采生刑曹佐郞閱號退村 其曾孫 諱用石 進士號潭巖先生大父也

燕山政亂遯跡府之九潭生八子其第三諱籌進士娶竹溪安氏僉正處貞之女以正德庚辰某月日生先生先生天品淸高 器局不苟言笑事親孝與 弟友篤志講學 與具栢潭鳳齡入淸凉山期以十年讀書及出山 巖厓草木盡成所讀書字云屢貢於鄕輒屈 省闈四十八始占 司馬不復事 公車自 九潭移居伊溪晩卜佳野構書舍數架 扁以惟一敎授生徒 生徒坌集 日與講說 經旨 隨材 誘掖多少成就 與生具柏潭 權晦谷 權松巖 後彫堂 從昆中設約 於山寺 相聚講學 其洞口水石 所嘗遊息處 至今號爲九仙臺 盧江書院 始成 先生爲洞主 與同門諸賢 參正院中規約 又呈 書于 府伯草澗 權公文晦 請依 白雲洞故事 陞之爲國學書枉世稿中 嘗爲寧海府學敎 授修治講樓申明 學䂓以奬勵之以 萬曆戊子三月考終于正寢享年六十九葬卧龍山南麓丑坐之原先生容貌 魁偉 嚴正確實喜怒 不形於色平居靜默媍孺畏不敢近而至待人接物和氣薰然賢者愛敬不肖者 觀感事酬酢動合義理鄕有大事輒就先生而質焉訓誨生徒嚴立課程諄諄啓迪本之以孝悌 忠信之道反復乎 義理邪正之分至 句讀詞章卽 不數數也 有時興到 輒與諸生 杖屨逍遙於山盤水曲之間 諷詠自適翛然有出塵之想配英陽南氏主簿世容之女生一男 得硏 號葛峯 俱中生進二女 權斗山 李景鯉 後配 永川李氏參奉仁弼女 二男 得繡 得礒 三女 南太華 權混 金泳 得硏 二男 光澍 生員 光薄 出四女 李禮遵 朴大有 李振南 權揖 得繡 嗣男 光溥 四女 權中正 朴承燁 柳极 柳橒 得礒 一男 光源 進士 權斗山 二男 柱 枰 南太華二男 愿恕 縣監一女 趙媛 權混一男守一 金泳二男 繼 道繼志二女朴爕 權敏行 內外曾玄 百餘人 先生家勢 自羅逮 麗世爲名鄕 入本朝 如退村之文章 潭庵之名哲 蓋以源遠而 流長矣

先生胚胎前 光襲訓趾美 固有以 異於人者而 當陶山唱道至 日與一時 登門之賢相與 切蹉 講磨 進德 修業之 工宜有穪述而 可傳者而 屢經回椽 遺文蕩佚 無以尋逐 其萬一則 實後學不盡之 憾然 今以門人 錄觀之 如南賁趾 鄭芝軒 權玉峯 權蘆川 申梧峯 北厓金公守靜 琴公 方潭權公 諸賢 或以 道學重 或以 立揚顯 或以操行 或以文章而 又有 賢子 三昆 仲克 肖其德則 先生成已 成物之功 蓄躳裕後之 謨於是 可見而 孤山李公 所謂先生之功之德 實有關於 斯文亨泰之 運者眞知言哉 先生旣歿門人相率祭先生墓 其子孫遵行 百餘年 不替士林 爼頭于龍溪院 其餘敎之八人 湥者亦可見矣 先生之墓 尙闕顯刻 後孫成九等 請銘詩於 不侫不侫 非其人也 何足以堪是寄 第先祖 梅隱公亦 嘗登先生之門 姓諱枉門人錄中 三復敬翫烏 能無感慕之懷耶 遂不揆僭安謹就訥隱之狀 最其一二而爲之 敍係之以銘 銘曰

龍之山嶷嶷 先生之德與之 具崇龍之溪涓 涓先生之心與之 具潔匡山十年之 攻玉鱣堂 四方之育英 旣進修之勤孜 亦開繼之彬蔚此豈 侱資稟之美出 類抑可見師友之益 實多後學之向慕 罙湥畏壘尸祝 雲仍之追遠 曰篤顯刻貞珉 寔是君子之攸藏 庶勿侵於樵牧 後學聞韶 金㙆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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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갈명

선생의 휘는 彦璣(언기)이고 자는 仲昷(중온)이다. 김씨인 신라왕자 興光(흥광)이 세상이 장차 나세가 됨을 알고 미리 광주 평장동으로 피난을 갔다. 손자 ()은 고려조를 도우고 관직은 좌복사인데 이로부터 평장동이라는 이름으로 대를 이었다고 말을 한다.

본조에서 광성군 若采(약채)는 형조좌랑 ()를 낳았는데 호는 退村(퇴촌)이고 그 증손인 휘 用石(용석)進士(진사)인데 호는 潭巖(담암)으로 선생의 조부이다.

연산군이 정치를 어지럽게 하자 안동부의 구담으로 피해 와서 아들 8형제를 낳았는데 그 셋째가 휘 ()이며 진사이다. 그는 죽계 안씨 첨정 處貞(처정)의 딸에게 장가들어, 정덕 경진 모 월일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의 천품은 맑고 고아하며, 재능과 도량은 넓고 늘 웃는 얼굴로 말을 하며, 부모에게 효성스럽고 형제간에 정이 돈독했으며,

 

공부를 하로 栢潭(백담 具鳳齡(구봉령)과 함께 청량산으로 10년을 기약하고 들어가 들어갔다가 산에서 나왔는데, 언덕과 절벽과 초목이 모두 독서하는 문자였다고 말 하였다.

향리에서 가끔 천거하는 것을 잘 살펴서 48세에 처음으로 사마가 되었으나 다시는 나기지 아니하고, 공은 자신이 수레를 몰아 담으로 이사를 하였다.

이계 좋은 들판에 만년에 자리를 잡고, 작은 서당을 지어 惟一(유일)이라 편액을 걸고 생도들을 가르쳤다. 생도들이 먼저 모여 날마다 經旨(경지)를 재목에 따라 유익한 강설을 하였다.

具柏潭(구백담), 權晦谷(권회곡), 權松巖(권송암), 金後彫(김후조) 등과 더불어 형과 아우로서 따른다는 약조를 산사에 하고 서로 모여 강학을 하며, 그 동구의 수석을 바라보며 쉼터로 삼았는데 지금 말하는 구선대이고 노강서원이 비로소 이루어졌다.

선생을 동주로 삼고 동문들과 여러 선비가 함께 모여 원중의 규약을 바로 하였다.

또한 초간 권문회공이 부의 상관에게 글을 써서 보내며, 백운동의 고사를 들어 국학을 위해 승격시켜달라고 하였다.

이를 왕세고안에 쓰니 영해부에서 이를 복, 교학을 하는 학교의 좋은 학규로서 장려하였다. 만력 무자 삼월, 부친이 정침에서 향년 69 세로 돌아가시니 와룡산 남쪽 언덕 축좌에 장사지냈다.

선생의 용모는 체격이 장대하고 훤칠하며, 엄격하고 정확하며 희노의 표정을 얼굴에 나타내지 아니했다. 평소엔 조용하고 말이 없어서, 아이들과 여자들이 조심스러워 감히 가까이 가지를 못했다. 사람을 대하고 접대함에 화기가 넘쳐났으며, 어진 사람을 좋아하고 공경했으며 못나고 어리석은 사람은, 눈으로 보고 내색을 하지 않고 마음으로 짐작만 했다.

모든 일을 처리할 때, 이치에 맞게 합의를 해서 하고, 향리의 큰일들은 선배들의 의견을 물어 결정을 하였다. 생도들을 훈육 합에 엄한 규정을 세워 순순히 계도해 나갔으며 그 근본은 효제와 충신의 도를 반복 하여 강조하였다.

의리와 옳고 그름을 분별함에는, 그 구절의 시가와 문장을 수도 없이 여러 번 읽었다. 그때 흥이 나면 모든 생도들과 더불어 지팡이 집고 산책에 나서, 산 좋고 물 구비치는 곳에서, 스스로 시를 읊으며 유유자적 하며 세간의 티끌 같은 생각에서 벗어났다.

 

배위는 영양 남씨로 주부 世容(세용)의 딸이고, 아들 하나는 낳았는데 이름은 得硏(득연)이고 호는 葛峯(갈봉)이며 생원이면서 진사이다.

두 딸은 權斗山(권두산), 李景鯉(이경리)의 처가 되었고, 둘째 부인은 영천 이씨 참봉 仁弼(인필)의 딸이며, 두 아들은 得繡(득수)得礒(득의) 이고, 세 딸은 南太華(남태화), 權混(권혼), 金泳(금영)의 처가 되었다. 得硏(득연)의 두 아들은 光澍(광주)와 생원 光薄(광박)이고, 딸은 넷인데 李禮遵(이례준), 朴大有(박대유), 李振南(이진남), 權揖(권읍) 등의 처가 되었다.

光溥(광부)의 넷 딸은 權中正(권중정), 朴承燁(박승엽), 柳极(류겁), 柳橒(류운)에게 각각 시집갔고, 得礒(득의)의 일남은 光源(광원)으로 진사이다. 權斗山(권두산)의 두 아들은 ()()이고, 南太華(남태화)의 두 아들은 ()()이다. 현감의 일녀는 趙媛(조원)에게 갔고, 權混(권혼)의 일남은 守一(수일)이다. 金泳(김영)의 두 아들은 繼道(계도)繼志(계지)이고 두 딸은 朴爕(박섭) 權敏行(권민행)의 처가 되었다. 내외 증손과 현손은 모두 100여명이나 되며 선생의 가세는 스스로 미쳐 고려시대에 이름을 떨쳤으며, 본조에 들어와 退村(퇴촌)과 같은 문장가, 潭庵(담암)과 같은 명철한 자가 나온 것은 모두 그 뿌리가 먼데서부터 흘러온 것이다.

 

선생이 잉태하기 전, 빛이 발가락에 아름답게 치쳐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한다. 도산애서는 늘 솔선하여 매사를 주도하고 날마다 짧은 시간이라도 등문하는 어진재상이 되기 위해 절차탁마 학문을 연마하고 공부를 한 공적이 있어, 전하고자 하였는데 세월이 흐르는 동안 유문이 상실되어 다시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만일 남아 있었다면 후학들이 없애지는 아니하였을 것이다.

 

아아! 지금 문인록을 보면 如 南賁趾(남분지), 鄭芝軒(정지헌), 權玉峯(권옥봉), 權蘆川(권로천), 申梧峯(신오봉), 北厓金公(북애김공), 守靜琴公(수정금공), 方潭權公(방담권공) 과 같은 많은 선비와, 혹은 도학을 중시하는 분, 혹은 현달한 분, 혹은 조행이 모범이 되는 분, 혹은 문장이 뛰어난 분들과 또한 현인 三昆(삼곤), 仲克(중극)은 그 덕이 많은 사람인데, 모두 선생이 이미 길러 낸 선생의 공이다.

몸이 여유로워진 뒤 하신 일을 돌이켜 보면, 고산 이공이 말하기를, 소위 선생의 공덕은 이와 같이 커서 선생을 만난다는 것은 실로 운이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선생은 이미 돌아가셨다. 문인들은 줄지어 선생 묘제에 참가하고 그 자손들이 계속 준행하기 100여년, 사림에서도 바꾸지 아니하니 용계서원에서 받들어 모시는데, 그 외 가르친 8명도 이어 감을 또한 엿볼 수가 있다.

선생의 묘는 아직도 현각이 없어 후손인 成九(성구) 등이 銘詩(명시)를 써 달라고 부탁하는데, 내가 그런 사람이 못되고 어찌 족히 그런 글을 쓸 수 있겠는가. 선조인 梅隱公(매은공) 역시 선생 문중에 올라 있는 것이 보이고 성휘왕문인록중에도 세 번 이나 반복하여 공손하게 부탁을 하니 감모하는 정을 품게 되었다 한다. 드디어 삼가 조심스럽게 잠긴 일들의 글을 쓰니, 그 한 두 가지을 밝히며 차례를 이어 명을 쓴다.

 

명에 이르기를

 

용의 산은 높고 높은데

선생의 덕은 이와 같고

용의 강 같이 모두가 숭상하니

강은 선생의 마음에서 흘어나와

모두를 깨끗하게 바로 잡은 지 십년

강당에서 지덕을 닦으며

사방으로 영재를 기르니

이미 닦고 익혀 부지런히 힘쓰고

또한 이와 같이 많이 이어가니

타고난 바탕과 성품 아름답게 나타나

무리들이 사제의 유익함을 우러러 보고

진실로 많은 후학들이 흠모하는데

삼가 고인을 흠모하며

먼 훗날까지 덕을 생각 제사 정성 다 하며

이를 좋은 돌에 각하며 이르기를

여기는 참으로 군자가 잠든 곳이니

나무꾼들 모두 집법하지 말지어다.

 

후학 문소 金㙆(김홍) ,

 

 

 

 

 

 

 

 

 

 

 

 

여기에 사진 설명을 넣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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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5년 경제기획원 결과에 의하면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174,912가구, 750,70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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