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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산김씨:상주김씨(金)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상산김씨)

 

본관(本貫): 商山(상산)

시조(始祖): 김수(金需)

유래(由來):

 

상산 김씨(商山金氏)의 시조(始祖) 김 수(金 需)는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으로 고려(高麗) 떄 보윤(甫尹)을 지내고 누대(累代)에 걸쳐 상산(商山 : 상주의 옛 지명)에 살았으며, 그의 손자(孫子) ()과 증손(曾孫) 희일(希逸)은 집사성(執事省)의 으뜸 벼슬인 시중(寺中)을 지냈다. 현손(玄孫) 비궁(匪躬)은 찬성사(贊城事 : 문하부의 정2품 관직)를 역임한 후 상산부원군(商山府院君), 9세손 일()은 대호군(大護軍)을 지내고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으며, 10세손 녹()은 판사(判事)로 상성군(商城君)에 봉군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수()를 시조(始祖)로하고 상산(商山)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고려(高麗)와 조선조(朝鮮朝)에 걸쳐 훌륭한 명신(名臣)을 많이 배출시켰다.

 

가문의 중요 인물

 

金得培(김득배)

1312(충선왕 4) 1362(공민왕 11). 고려 후기의 문신. 호는 난계(蘭溪). 아버지는 판전의(判典醫) ()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에 보직되었으며, 그 뒤 전객부령(典客副令)으로서 공민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하였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우부대언 ( 右副代言 )에 제수되었으며, 1357(공민왕 6)에 서북면홍두왜적방어도지휘사(西北面紅頭倭賊防禦都指揮使)가 되었다가, 이어 추밀원직학사(樞密院直學士)에 오르고, 서북면도순문사겸서경윤상만호(西北面都巡問使兼西京尹上萬戶)가 되었다.

1359년 정월에 첨서추밀원사(詹書樞密院事)가 되었으며, 그 해 6월에 기철 ( 奇轍 )을 숙청한 공으로 2등공신에 올랐다. 같은 해 10월에 동지추밀원사가 되었다. 이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홍건적의 괴수 위평장(僞平章) · 모거경(毛居敬)4만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함락하였으며, 부사 ( 副使 ) 주영세(朱永世) 및 주민 1,000여 명을 살해하였다.

이어 정주 ( 靜州 )에서는 도지휘사 김원봉 ( 金元鳳 )을 죽이고 인주 ( 麟州 )까지 함락시켰다. 이 때 그는 도지휘사가 되어 서북면도원수 이암(李 末 ), 부원수 경복흥 ( 慶復興 )과 더불어 적에 대비하고, 안우 ( 安祐 ) · 이방실 ( 李芳實 ) 등과 함께 분전하여 서경을 탈환하고 압록강 밖으로 적을 격퇴시켰다.

13603월에 그 공으로 수충보절정원공신(輸忠保節定遠功臣)에 책봉되고, 정당문학에 제수되었다. 같은 해 10월에 지공거가 되어 진사를 뽑고, 정몽주 ( 鄭夢周 ) 33인을 급제시켰다.

1361년 다시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삭주 이성(泥城)으로 침입하자 서북면도병마사가 되어 상원수 안우, 도지휘사 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방어했으나, 안주에서 대패, 개경까지 함락당하였다.

다음해에 안우 · 이방실 · 최영 ( 崔瑩 ) · 이성계 ( 李成桂 ) 등과 함께 2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총병관(摠兵官) 정세운 ( 鄭世雲 )의 지휘로 적의 괴수 사유(沙劉) · 관선생(關先生) 등을 베고, 10여 만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리고 이들을 격퇴시켰다.

이 때, 정세운과 권력을 다투던 평장사 김용 ( 金鏞 )이 거짓으로 조서를 꾸며 안우 · 이방실 · 김득배에게 정세운을 살해할 것을 명하자, 이들은 그것을 믿고 정세운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죄를 입어 안우 · 이방실이 살해되었으며, 그도 처벌을 면할 수 없게 되어 도망하여 산양현(山陽縣)에 숨었으나 체포되어 상주에서 효수되었다.

그의 문생인 직한림(直翰林) 정몽주는 왕에게 청하여 그의 시신을 거두고 제문을 지어 그의 억울한 죽음을 개탄하였다. 1392(공양왕 4)에 그의 누명이 벗겨지고, 그 자손도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金忠(김충)

원종(元宗)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충()은 문하시중(門下寺中) 치원(致遠)의 손자로 삼별초(三別抄)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1281(충렬왕 7) 일본(日本)을 정벌(征伐)할 때 공을 세워 기성군(箕城君)에 봉해졌다.

 

김운보(金云寶), 김신보(金臣寶) 현제

운보(云寶)와 신보(臣寶) 형제는 1353(공민왕2) 왜적(倭賊)이 침입했을 때와 흥건적의 난() 때 함께 공()을 세워 판전의시사(判典義寺事)와 봉순대부(奉順大夫)에 각각 올랐다.

  특히 운보(云寶)는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서훈되고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겸 사복시(司僕寺)에 이르렀으나, 아우 신보(臣寶)는 벼슬을 버리고 전남 영광(靈光)으로 낙향하여 불사이군(不事二軍)의 충절을 지켰다.

 

김덕생(金德生)

생몰년 미상.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 아버지는 운보(云寶)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1380(우왕 6) 전옥서영(典獄署令)이 되었다. 방원(芳遠 : 뒤에 태종)의 잠저(潛邸 : 왕이 임금으로 오르기 전의 위치를 호칭하는 말) 때 송거신 ( 宋居信 )과 함께 방원을 보좌하였으며, 특히 말을 잘 타 신임이 매우 두터웠다.

1395(태조 4)에 낭장으로서 방원을 따라 사냥을 나갔다가 방원이 표범의 습격을 받자, 쏘아 죽이고 그를 구해내 태조로부터 말 한필을 하사받았다. 1400(정종 2) 2차 왕자의 난 때 방원을 도와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듬해 태종이 즉위하자 추충분의익대공신(推忠奮義翊戴功臣)에 추봉되었다. 태종의 신임이 두터웠으나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 1436(세종 18) 가정대부에 추증되고, 1445년에 다시 동지중추원사에 추증되었다

 

김사우(金師禹)

1415(태종 15)1464(세조 10). 조선 전기의 무신. 자는 근보(勤父). 경상북도 상주 출신. 무과에 급제한 뒤 야인(野人)의 침입을 막기 위해 주로 함경도 지방의 변방 방어를 맡는 무관으로 활약하였다.

1454(단종 2)에 첨지중추원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56(세조 2) 충청도수군안무처치사(忠淸道水軍按撫處置使)로 나가 흉년으로 사졸들이 굶주리자 소금을 구워 기근을 구제하였다.

1458년 행회령진병마절제사(行會寧鎭兵馬節制使)가 되었다. 이 때 야인이 대규모로 두만강을 건너 장성(長城)에 침입하자 몸소 적진을 뚫고 들어가 적 20여 명의 목을 베고 돌아왔다. 이 공으로 가정대부 ( 嘉靖大夫 )에 오르고 옷감이 하사되었다.

1460년 회령절제사·판회령부사를 거쳐 한성부윤이 되었다. 그런데 부임하기 전에 야인이 또 침입하자, 영의정 신숙주 ( 申叔舟 )가 함길도도체찰사로 천거해 이를 토벌하게 했으며, 신숙주에 의해 유임이 재청되었다.

그리하여 다시 북방 모련위(毛憐衛)의 야인을 맞아 싸워 추장 이하 수십 명을 베는 등 크게 전공을 세우고 돌아와 판한성부사가 되었다.

1461년 병조판서가 되어 직접 전라도의 여러 섬을 수색해 역()을 피해 숨어사는 자들을 잡아내기도 하였다. 이듬해 처남 이극배 ( 李克培 )가 이조판서가 되자 장령 유계번(柳季藩)은 한가족이 정권을 모두 행사한다 하여 반대했으나 세조의 묵인으로 유임되었다.

곧 평안도도절제사로 나갔다가 1463(세조 9) 병으로 돌아와 동지중추원사를 역임하였다. 성격이 깨끗하고 곧아 모든 일에 공정했으며, 당시 무장 중에서 가장 독서에 열중하는 사람으로 꼽혔다. 시호는 장절(壯節)이다.

 

김우생(金佑生)

1372(공민왕 21) 1457(세조 3). 고려 말 · 조선 초의 문신. 일명 우생(祐生). 자는 문숙(文叔), 호는 양산(陽山). 할아버지는 판장군(判將軍) ()이고, 아버지는 영중추부사 ( 領中樞府事 ) 운보(云寶)이다. 정몽주 ( 鄭夢周 )에게 수학하였고, 사서구경(四書九經)에 통달하였다.

1388(우왕 14) 당시 17세의 나이로 문하시중 ( 門下侍中 ) 최영 ( 崔瑩 )이 요동정벌을 강행하려 하자, 이성계 ( 李成桂 )에게 글을 보내어 그 불가함을 역설하였다. 1392(태조 1) 순천부사(順天府使)가 되었다. 1400(정종 2) 정안군(靖安君 : 芳遠)의 요속으로서 박포 ( 朴苞 )의 난에 공훈을 세웠다. 추충분의익대좌명공신(推忠奮義翊戴佐命功臣)에 책봉된 형 덕생(德生)이 동료들의 투기로 억울하게 처형되자 사직하였다.

성삼문 ( 成三問 ) · 박팽년 ( 朴彭年 ) 등과 교유하였다. 1454(단종 2)에 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였고, 1456(세조 2)에 사육신사건에 연루되었으나 정인지 ( 鄭麟趾 )의 도움으로 화를 면하였다. 1457년 단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결하였다. 저서로는 가례연의 家禮衍義 2권과 訓蒙要語 훈몽요어 2권이 있다.

 

김양경

세종(世宗)때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한 양경()은 공조 판서(工曹判書)와 대사헌(大司憲)에 올라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낸 광준(光準), 옥과 현감(玉果縣監) (), 군수(郡守) ()등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김귀영(金貴榮)

 1520(중종 15)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현경(顯卿), 호는 동원(東園). 숙춘(叔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목사 사원(士元)이고, 아버지는 응무(應武)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로 수관(守寬)의 딸이다.

1540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47(명종 2)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 2년 뒤 예문관대교(藝文館待敎)로서 춘추관기사관을 겸해 중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곧 홍문관으로 옮겨 정자·저작 등을 역임하고 성균관박사로 전직되었다.

이어 부수찬·정언·수찬 등을 거쳐 1555년 김홍도 ( 金弘度 유순선 ( 柳順善 ) 등과 사가독서하였다. 그 해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이조좌랑으로 도순찰사 이준경 ( 李浚慶 )의 종사관이 되어 광주(光州)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이조정랑이 되었다.

1556년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을 거쳐 사헌부집의로 재임 중, 명나라에서 사신이 오자 예관 ( 禮官 )으로 활약하였다. 1558년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에 올랐다가 곧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옮겼으며, 이 때 경연에서 경기내의 농민 생활 안정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어 우부승지를 역임하고 이듬 해 이조참의로 전직되었으나, 사간원의 탄핵으로 다시 우부승지로 체직되었다. 그 뒤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춘천부사를 지냈고, 대사간·대사헌·부제학 등을 번갈아 역임하면서 군주의 공명정대한 처신과 윤원형 첩자(尹元衡妾子)의 허통 ( 許通 ) 문제 등에 관해 활발한 언론을 하였다.

선조 즉위 후 도승지·예조판서를 역임하고, 병조판서로서 지춘추관사를 겸하였다. 1581년 우의정에 올랐고, 2년 뒤 좌의정이 되었다가 곧 물러나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1589년에 평난공신 ( 平難功臣 ) 2등에 녹훈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진 뒤 기로소 ( 耆老所 )에 들어갔으나, 조헌 ( 趙憲 )의 탄핵으로 사직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천도 논의가 있자, 이에 반대하면서 서울을 지켜 명나라의 원조를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 결국 천도가 결정되자 윤탁연 ( 尹卓然 )과 함께 임해군 ( 臨海君 )을 모시고 함경도로 피난했다가, 회령에서 국경인 ( 鞠景仁 )의 반란으로 임해군· 순화군 ( 順和君 )과 함께 왜장 가토(加藤淸正)의 포로가 되었다.

이에 임해군을 보호하지 못한 책임으로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어 다시 가토의 강요에 의해 강화를 요구하는 글을 받기 위해 풀려나 행재소 ( 行在所 )에 갔다가, 사헌부·사간원의 탄핵으로 추국 ( 推鞫 )당해 회천으로 유배가던 중 중도에서 죽었다. 숙종 때 허적 ( 許積 )의 건의로 신원되었다.

 

김홍미(金弘微)

1557(명종 12)1605(선조 3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창원(昌遠), 호는 성극당(省克堂). 예강(禮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郞) 윤검(允儉)이고, 아버지는 옥과현감(玉果縣監) ()이며,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이다.조식(曺植)과 유성룡 ( 柳成龍 )의 문인이다.

1579(선조 12) 진사가 되고, 1585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에 발탁되고, 홍문관정자· 저작 ( 著作 ), 예문관검열 등을 거쳐 부수찬을 역임하였으며, 당시 형인 홍민(弘敏)과 함께 사림으로 영예를 누렸다.

1589년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남인으로 정여립 ( 鄭汝立 )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되었다. 그 뒤 복관되어 1592년 임진왜란이 시작될 무렵에는 경상좌도도사가 되고, 이어 교리 겸 시강원문학을 거쳐 이듬해 경연관·응교·사간·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597년 승정원동부승지로 있을 때,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 ( 李舜臣 )을 탄핵하여 파면하게 하고 원균 ( 元均 )을 통제사로 삼게 하는 데 가담하였다. 그 뒤 좌부승지·훈련도감제조를 거쳐, 형조참의·대사간·이조참의·승문원부제조 등을 역임하다가 1598년 관직을 사퇴하였다.

그 이듬해 다시 청송부사(靑松府使)를 거쳐 1604년 강릉부사로 부임하였는데, 이듬해 큰 비가 내려 백성이 많은 재난을 당하였다. 이에 약한 몸을 이끌고 수재로 죽은 자의 조문과 굶주린 자의 진휼에 힘써 직무에 충실하다가 병이 악화되어 관직에서 물러났다.

 

김덕함

1562(명종 17) 1636(인조 1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경화(景和), 호는 성옹(醒翁).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좌승지 장수(長琇)이고, 아버지는 증 이조참판 홍()이다.

어릴 때 부모를 잃었으나 스스로 문예에 힘써 1587(선조 20)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다시 진사가 되었으며, 1589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여러 번 이항복 ( 李恒福 )의 후원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연안 ( 延安 )에서 초토사 이정암(李廷 目 )을 도와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하는 일을 맡았다. 이듬 해 행재소인 정주까지 왕을 호종, 그 공으로 공조좌랑이 되었다.

1594년 임시로 군공청 ( 軍功廳 )을 세워 전쟁의 공과를 실시할 때 비변사낭청을 제수받았다. 이 밖에 예조와 공조의 좌랑과 비변사낭청 · 호조정랑 · 직강 · 사예 등의 중앙관직과 선천 · 청풍 · 단천 · 성천 · 장단 · 안주의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1597년 일본의 재침으로 분조(分曹)가 세워지자 호조정랑으로서 분호조정랑(分戶曹正郞)을 겸임해 군량 조달에 힘썼다.

광해군 때 군기시정에 이르렀으나 1617(광해군 9) 인목대비(仁穆大妃)에 대한 폐모론이 일자 이항복 · 정홍익 ( 鄭弘翼 )의 의견을 좇아 반대하다가 남해 ( 南海 )에 유배되었으며, 명천 · 온성 · 사천 등지에 이배되었다.

1622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집의와 예조 · 병조 · 형조 · 공조의 참의와 승지 · 부제학 · 대사성 · 대사간 · 여주목사 · 춘천부사를 거쳐 1636년 대사헌에 올랐다. 이 때 왕에게 사치를 경계하고 김공량(金公諒)의 신원을 반대해 인조의 미움을 사기도 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호소사(號召使)로 활약했으며 청나라에 대한 척화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청백리로 뽑혔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문집으로 성옹유고 가 전한다. 사천의 구계서원 ( 龜溪書院 ), 온성의 충곡서원 ( 忠谷書院 ), 배천의 문회서원 ( 文會書院 ), 북청의 노덕서원 ( 老德書院 ), 안주의 청천사(淸川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김동필(金東弼)

1678(숙종 4)1737(영조 1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자직(子直), 호는 낙건정(樂健亭).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석(禹錫)이고, 아버지는 진사 유()이며, 어머니는 홍주국 ( 洪柱國 )의 딸이다.

1704(숙종 30) 춘당대 문과(春塘臺文科)에 을과로 급제한 뒤, 1707년부터 사서·정언·지평·문학·부수찬·필선·수찬을 역임하였다. 1721(경종 1) 보덕으로 있을 때 당시 왕세제(王世弟)였던 영조를 모해하려는 환관 박상검 ( 朴尙儉 문유도(文有道) 등을 탄핵해 처벌하게 하였다.

1722년부터 수찬·응교·수원부사·대사간·승지를 역임하면서 소론 온건파의 입장에 서서 강경파인 김일경 ( 金一鏡 )의 가혹한 신임사화 처리를 탄핵하다가 광주목사(廣州牧使)로 좌천되었다. 1723년에 승지, 다음 해에 경상감사를 지냈다.

1725년 영조 즉위 후에 노론이 집권하자 다시 좌천당할 뻔했으나, 왕의 각별한 비호를 받아 무사하였다. 1727년 도승지와 한성판윤을 역임하면서 영조의 탕평책에 협조하였다. 1728년 이인좌 ( 李麟佐 )의 난이 일어나자 남한순무 겸 동로경략사(南漢巡撫兼東路經略使)로 출전해 공을 세우고, 난이 평정된 뒤에 이조판서·공조판서를 지냈다.

1729(영조 5) 동지정사(冬至正使)로 북경에 다녀오고, 이어 병조판서·호조판서·지의금부사·동지경연사를 거쳐, 1732년부터는 다시 한성판윤·좌참찬·판돈녕부사·형조판서·판의금부사·예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지냈다.

죽은 뒤 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혜(忠惠)이다. 저서로는 인접설화 引接說話가 있다.

 

김용구(金容球)

  한말(韓末)에 와서는 용구(容球)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향방(鄕坊) 사우(士友)들과일심계(一心契)를 조직하여 항거했으며, 기삼연(奇參衍)과 함께 수백명의 의사(義士)를 이끌고 수련산(秀蓮山)에서 혈맹(血盟)한 뒤 왜병(倭兵) 수백을 참살(斬殺)하고 전국 각처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한일합방(韓日合邦)의 비보를 듣고 음독 자결하였다.

 

 

金鎰(금일)의 딸의 효행.

 

싸움터에 핀 꽃

 

효녀 상산(商山) 김씨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 일(金鎰)의 따님으로 그의 효녀각이 상주군 낙동면 내곡리에 동향으로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조선 정조 17년에 조정에서 정려(旌閭)가 내려진 이래 200여 년의 풍우 중에도 그 찬란한 효심은 더욱 빛나고 있다.

 

1592(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414일에는 부산진이 왜군에게 함락되고 5월 초에는 경상북도의 상주마저 함락되었다. 김 일 장군은 고향인 상주군 낙동에서 500여 명의 군사를 모아 빼앗긴 상주성을 되찾고자 하여 나섰다. 상주성 북천 일대의 전투에서 왜군과 일대 격전을 벌였으나 많은 적을 당할 수 없어 마침내 전사하고 말았다. 그 때 김 일 장군에게는 딸 하나가 있었다.

 

꽃다운 열일곱 살의 처녀로서 아버지가 순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와 함께 몸종을 앞세우고 아버지의 시신이나마 찾으려 나섰다. 울음을 삼키며 북천에 이르러 우리 의병과 적의 시체가 산더미같이 쌓였고, 흘러내리는 피는 냇물을 붉게 물들이는 처참한 광경에 눈앞이 아득하였다.

 

왜병들이 때때로 나타나는 위험을 무릅 쓰고 아버지의 시신을 찾으려고 그 많은 시체를 샅샅이 뒤적거리다가 시체 속에 몸을 숨기기도 하며 3 일만에 가까스로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내자 갑자기 왜병들이 뛰어들어 어머니를 위협했다. 어머니는 준엄한 말로 왜병들을 꾸짖었으나 마침내 사나운 왜병들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살아남은 사람은 그 따님과 몸종뿐이었다. 연달아 부모를 잃은 따님은 그 자리에서 죽고자 했으나 부모님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이 워낙 중하여 할 수 없이 아버지의 시신은 몸종에게 업어 모시게 하고 자기는 어머니를 업고 밤길 30 여 리를 걸어 고향인 낙동면 화산리 옥산 뒷산에 장례 지내니 여기가 곧 조선 의사 김 일의 무덤이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나라에서 이 사실을 알고 김 일에게 통훈대부 사헌부 집의라는 벼슬을 추증하고 충의단에 입향(入享)했다.

1793(정조 17) 나라에서 그 따님의 효행을 가상히 여겨 출생지에 효녀각을 짓게 했는데 1977년에 다시 보수하고 깨끗하게 단장했다. 지금은 그 자손들인 순천 김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효녀 상산 김씨는 김일 장군과 그 부인 장씨 사이에 무남독녀로 태어나서 자랄 때 부모님 곁을 떠날 줄 모르고 지성으로 봉양했다. 당시 남존 여비의 고루한 사상을 지닌 사람들도 입을 모아 효녀 김씨를 보고

효녀 심 청이 다시 태어 났다. (孝女沈淸再生)”

하며 극구 칭찬했다 한다. 그 뒤 부모님의 산소 옆에 묘막을 짓고 3 년 시묘(三年 侍墓)를 하려 했으나 여자가 시묘하는 일은 예법에 없다 하여 집안 어른들이 만류하여 못 하였다 한다. 삼년상을 지낸 뒤 감역(監役) 벼슬을 하는 김 광윤(金光潤)에게 출가했다.

 

출가 외인(出嫁外人)이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아버지의 충절은 하늘에 닿 았어도 친정집의 대를 이을 후사가 없으니 망극한 일이다.”

했다 한다.

지금도 효녀 상산 김씨의 후손들은 상주군 낙동면 화산리에 큰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다.

 

왜병들이 득실거리는 전쟁터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부모의 시신을 모셔 내 오는 그 열 일곱 살 처녀의 담대한 뜻에 다시 한 번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출전상주군 교육청 문 장학사

참고 문헌 嶺南人物考, 孝烈行誌, 尙山誌

 

 

 

 

 

 

 

항렬(行列)

김수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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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련계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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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人口(1985년 현재)] 57,836명이 있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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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언양김.jpg 언양김씨(金) 청남 14-08-25 4199
104 양주 김.jpg 양주김씨(金) [1] 청남 14-08-25 2842
103 양산김.jpg 양산김씨(金) 청남 14-08-25 2513
102 야성 김.jpg 야성김씨(金) [1] 청남 14-08-25 3863
101 안악 김.jpg 안악김씨(金) [2] 청남 14-08-25 2867
100 안성 김.jpg 안성김씨(金) 청남 14-08-25 2225
99 안산 김.jpg 안산김씨(金) 청남 14-08-25 2741
98 안로 김.jpg 안로김씨(金) 청남 14-08-25 1917
97 신안동김.jpg 안동 김씨: 신 (金) 청남 14-08-25 6112
96 구안동김1.jpg 안동 김씨:구 (金) 청남 14-08-25 6137
95 신천김.jpg 신천김씨(金) 청남 14-08-25 2249
94 시흥김.jpg 시흥김씨(金) 청남 14-08-25 2210
93 순천김.jpg 순천김씨(金) 청남 14-08-25 4576
92 수원 김.jpg 수원김씨(金) 청남 14-08-25 3328
91 수안 김.jpg 수안김씨(金) 청남 14-08-25 2897
90 설성 김.jpg 설성김씨(金) 청남 14-08-25 2679
89 일선김1.jpg 선산김씨: 일선김씨(金) 청남 14-08-25 3540
88 선산김.jpg 선산김씨:일선김씨(金) 청남 14-08-25 4715
87 서흥김.jpg 서흥김씨(金) 청남 14-08-25 3734
86 상원김.jpg 상원김씨(金) 청남 14-08-25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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