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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맹씨(孟)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신창맹씨)

 

 

본관(本貫): 신창(新昌)

시조(始祖): 맹승훈(孟承訓)

유래(由來):

 

맹씨(孟氏)는 중국 평릉(平陵:협서성 관중 도)에 연원(淵源)을 두고, 춘추시대(春秋時代) ()나라 15대 임금인 환공(桓公)의 아들 경부(慶父)의 호()가 맹손(孟孫) 이라서 맹() ()를 따서 성()으로 삼았다고 하며, 아성(亞聖) 맹자(孟子)로부터 세계(世系)가 이어진다.

 

우리나라 맹씨(孟氏)는 맹자(孟子)40세손 맹승훈(孟承訓)888(신라 진성왕 2) ()나라 한림원(翰林院)의 오경박사(五經博士)로 유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경전(經典)을 가지고 동래(東來)한 것 이 시초(始初)가 된다고 하나 기록이 분명하지 않다.

 

맹씨의 본관(本貫)은 신창(新昌)을 비롯하여 온양(溫陽), 파주(坡州), 양 주(楊州), 청주(淸州), 안읍(安邑:옥천지방), 천안(天安), 전주(全州) 32()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거나 신창과 온양을 제외한 관향(貫鄕)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신창 맹씨(新昌孟氏)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예부 시랑(禮部侍郞)을 거쳐 예부 전서(禮部典書)에 오른 맹의(孟義)를 일세조(一世祖)로 계대(繼代)하고 있다. 당대에 학자로서도 유명했던 의()는 역신 조적의 난을 평정 하는데 공을 세우고 충선왕(忠宣王) 때 신창백(新昌伯)에 봉해진 연유로 본관(本貫)을 신창(新昌)으로 하게 되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맹유(孟裕)

일세조 의()의 아들 유()가 고려(高麗) 에 이부 상서(吏部尙書)와 순창 군수(淳昌郡守)를 역임했고,고려가 망하자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 등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충절(忠節)을 지켰다

 

맹희도(孟希道)

유의 아들 희도(希道)는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림어사(翰林御史), 수문전 제학(修文殿提學), 한성윤(漢城尹) 등을 지내며 길 재(吉再), 정몽주(鄭夢周)와 교유했고, 공양왕(恭讓王) 때 효행(孝行)으로 정려(旌閭)를 받았으나 어지러운 정계(政界)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온양(溫陽) 오봉산(五峯山)에서 은거 (隱居)하면서 호()를 동포(東浦)라 하였다.

 

맹사성(孟思誠)

1360(공민왕 9) 1438(세종 20).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자는 자명(自明) · 성지(誠之), 호는 동포(東浦) · 고불(古佛). 아버지는 고려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 희도(希道)이며, 최영 ( 崔瑩 )의 손서(孫 淚 )이다. 온양 출신.

1386(우왕 12)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이 되었다. 이어 전의시승(典儀寺丞) · 기거랑 ( 起居郎 ) · 사인 ( 舍人 ) · 우헌납 ( 右獻納 ) 등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수원판관이 되었다가 다시 내직으로 내사사인 ( 內史舍人 )이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태조 때 예조의랑(禮曹議郎)이 된 이래, 정종 때 간의우산기상시(諫議右散騎常侍) · 간의좌산기상시가 되었다. 태종 초에 좌사간의대부(左司諫議大夫) · 동부대언(同副代言) · 이조참의를 두루 역임하였다. 1407(태종 7)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이 되어, 진표사(進表使)로 명나라에 가는 세자를 시종관(侍從官)으로서 수행하여 다녀왔다.

1408년 사헌부대사헌이 되어 지평 ( 持平 ) 박안신(朴安信)과 함께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 太宗의 딸 慶貞公主夫君)을 왕에게 보고하지 않고 잡아다가 고문하였다. 이 일로 태종의 큰 노여움을 사 처형될 뻔했으나 영의정 성석린 ( 成石璘 )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1411년 다시 기용되어 판충주목사로 임명되었다. 그러자 예조에서 관습도감제조(慣習都監提調)인 그가 음률(音律)에 정통하므로 선왕(先王)의 음악을 복구하기 위하여 서울에 머물게 하여 바른 음악을 가르치도록 건의하였다. 그 이듬해에도 그가 풍해도도관찰사( 淵 海道都觀察使)에 임명되자, 영의정 하륜 ( 河崙 )이 음악에 밝은 그를 서울에 머물게 하여 악공 ( 樂工 )을 가르치도록 아뢰었다.

1416년 이조참판에 이어 예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생원시에 시관 ( 試官 )이 되어 권채 ( 權採 ) 100인을 뽑았으며, 왕이 친림한 문과 복시에 독권관 ( 讀卷官 )이 되었다. 그 해 노부(老父)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을 원했으나 윤허되지 않고, 역마 ( 驛馬 )와 약을 하사받았다.

이어 호조판서가 되어서도 고향의 노부를 위해 다시 사직을 원했다. 그러나 왕은 그를 충청도도관찰사로 삼아 노부를 봉양하게 하였다. 1418년 공조판서가 되어 또다시 노부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하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419(세종 1) 이조판서와 예문관대제학이 되고, 이듬해에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1421년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역임하고 1427년에 우의정이 되었다. 그는 우의정 재임시에 태종실록 太宗實錄 편찬 감관사 ( 監館事 )로서 감수하였다.

태종실록 의 편찬이 완료되자 세종이 한번 보고자 하였다. 그러자 그가 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를 본받게 되어 사관 ( 史官 )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 이라 하고 반대하니 세종이 이에 따랐다.

1432년 좌의정에 오르고 1435년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나라에 중요한 정사(政事)가 있으면 반드시 그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사람됨이 소탈하고 조용하며 엄하지 않았다.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반드시 공복 ( 公服 )을 갖추고 대문 밖에 나아가 맞아들여 윗자리에 앉히고, 돌아갈 때에도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들어왔다.

효성이 지극하고 청백하여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祿米 봉급으로 받은 쌀)로 하였다. 출입할 때에는 소 타기를 좋아하여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영의정 성석린은 선배로서 그의 집 가까이에 살았는데, 매 번 그의 집을 오고 갈 때는 그 집 앞에서 말을 내려 지나갔다.

그는 음악에 조예가 있어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겼다. 품성이 어질고 부드러웠으나, 조정의 중요한 정사를 논의할 때에는 과단성이 있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맹귀미(孟歸美), 맹득미(孟得美)

사성(思誠)의 아들 귀미(歸美)와 득미(得美)도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과 부사(府使)를 지냈다.

 

맹석흠(孟碩欽)

사성의 증손(曾孫) 석흠(碩欽)이 세조(世祖)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平定)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으로 신창군(新昌君)에 봉해졌다.

 

맹세형(孟世衡)

세형(世衡)은 김장생(金長生)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배워 1623(인조 1) 문과에 급제하고 호조 정랑(戶曹正郞), 선산(善山), 장흥(長興)의 부사(府使)를 거쳐 6차례나 시정(侍正)을 지냈다.

 

맹주서(孟胄瑞)

세형의 아들 주서(胄瑞)가 황해(黃海)와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지내고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맹만택(孟萬澤)

주서의 아들 만택(萬澤)은 관찰사와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했고 지리(地理)에 글씨에 능했다.

 

맹영재(孟英在)

고종(高宗) 때 의병(義兵)을 모아 동학난(東學亂)으로 혼란해진 치안(治安)을 유지하고, 민비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군(日本軍)과 항전하다가 순절한 영재(英在)가 유명했다.

 

 

孟思誠(맹사성) 선생이 일화.

1)

공당문답
조선 세종임금 때 좌의정을 지낸 맹사성 대감이 어느 날 고향인 온양에서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가다가 경기도 용인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비가 내려서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어 맹사성 대감은 길가에 있는 허름한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때마침 한 젊은이가 나귀를 타고 하인을 거느리고 오다가 그 주막에 들게 되었다. 그 젊은이는 경상도 땅에 사는 부잣집 아들로서 한양에 녹사 취재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 요즘 같으면 書記(서기) 채용 시험이다.
주막에는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 젊은이는 맹사성과 한  방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별로 할 일도 없고 심심해진 젊은이는 어수룩한 노인처럼 보이는 맹사성을 보고  말했다.
「노인장, 우리 바둑이나 한 수 두십시다.」
 「나는 바둑을 둘 줄을 모른다오.」
 「그럼 장기나 한 판 두시겠소?」
 「장기도 둘 줄 모르는데 ....」

그러자 젊은이는 무시하는 듯 한 표정을 지으며,
「그럼 노인장께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오?」 하고 물었다.
 「시를 짓는 일이라면 조금쯤 할 수 있소.」
젊은이는 깜짝 놀란 듯이 다시 물었다.

 「아니, 시를 지을 줄 아시오?」
 「한시 말고 우리말 시를 조금쯤 지을 수 있소.」
 「좋습니다. 그럼 시 짓기 내기를 하십시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내가 끝에다가 “공”자를 붙일 테니까  젊은이는 끝에다가 “당”을 넣어서 지어 보시오.」
  「좋습니다. 그럼 영감님이 먼저 지으시지요.」

맹사성과 젊은이는 '공' 자와 '당' 자를 넣어서 시 짓기를 하였다. 
먼저 맹사성이 말했다. 
「그럼  내가 먼저 시작하겠소. 젊은이는 어디로 가는공?」
「한양 간당.」「무엇 하러 가는공?」
「녹사 취재하러 간당」
「내가 합격시켜 줄공?」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당.」

그날 밤 시 짓기를 끝낸 두 사람은 한 방에서 자고 이튿날 헤어졌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서였다. 맹사성은 여러 대신들과 정사(나라일)를 논의하고 있었다. 이 때 새로 뽑힌 녹사들이 인사를 드리러 왔다. 녹사들은 감히 얼굴을 들고 대신들을 바라볼 수 없어서 고개를 숙이고 큰 절을 올렸다.

맹사성이 가만히 살펴보니 그 속에는 용인 주막에서 만난 젊은이도 있었다. 맹사성은 젊은이를 보고 말했다.
 「그사이 어떻게 지냈는공?」

그 젊은이는 깜짝 놀라서 얼굴을 들고 보니, 맨 윗자리에 앉은 정승이 낯이 익었다. 그러자 문득 젊은이는 그 정승이 바로 용인 주막에서 자기가 함부로 대했던 노인인 줄을 알게 됐다.
새파랗게 질려서 머리를 조아리며,
 「죽어지이당. 죽어지이당」  하고 말했다.

맹사성은 크게 웃고 다른 대신들에게도 용인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었다.
그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허리를 잡고 웃었다. 맹사성은 그 젊은이가 의외로 재치가 있다고 생각되어 자기 밑에 있게 했다. 그 후 젊은이는 자기의 경솔함을 뉘우치고 언제나 말조심을 하며 맡은 일을 열심히 했고, 맹사성은 젊은이를 도와서 크게 출세시켰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공당문답'이라고 해서 세종 임금 때부터 지금까지 전해 온다.
맹사성은 청렴결백하고 젊은이들을 사랑했으며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했기에 그에겐 유난히 재미있는 일화가 많다고 한다.

 

 

2)

   開目寺(개목사)와 눈병

이조 초기에 맹사성이 안동부사로 제수되었다.
그런데 그때 안동지방에는 이상하게도 눈병환자가 많아 고통을 받았고 잔님이 많이 생겼다.

그는 풍수지리에 능통한 사람이라 그 원인을 알고자 지형을 살펴보니 안동의 地形(지형)이 눈병을 앓는 환자가 많을 地勢(지세)이었다. 이에 영험이 많은 興國寺(흥국사) 절이름을 開目寺(개목사)라고 개칭하였더니 그 후 눈병환자가 차츰차츰 없어졌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開目寺(개목사)는 安東(안동) 서북쪽 학가산 중턱에 있는데 내력은 다음과 간다.
천등산 천등굴에서 수도를 닦고 훌륭한 고승이 된 의상조사는 그곳에서 동쪽으로 200m 쯤 되는 지점에 興國寺(흥국사)를 지었다.
이 절은 의상조사의 신묘한 능력으로 하루에 한 간씩 지어 99일 만에 아흔 아홉 간의 거대한 절이 완성되었다. 그 후 이 절은 부처님의 영험이 많이 나타나 佛徒(불도)들의 도장으로 널리 알려져서 소원 성취하는 자들이 많았다. 고려 말에는 포은 정몽주 선생이 어렸을 때 이 절에서 10년간 공부하였으며 선생의 詩文(시문)이 현판에 새겨져 지금도 보전되고 있다

 

 

3)

        비가 새는 집

맹사성은 효성이 지극하고 시와 문장에 뛰어났으며, 음악을 좋아하고 마음이 어질고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오직 나라에서 주는 녹미(요즘의 월급)만으로 생활을 하는 청백리다 보니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했다. 그러나 맑고 깨끗한 그의 생활에는 한 점의 티도 없었다.
어느 비 오는 날 한 대감이 그의 집을 찾았다. 그 대감은 맹사성의 집을 보고 속으로 놀랐다.
“ 세상에! 한 나라의 정승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초라하게 살다니……. ”
안으로 들어가서 孟(맹)정승을 만난 대감은 더욱 놀랐다. 여기저기서 빗물 새는 소리가 요란하고, 孟(맹)정승 부부는 빗물이 떨어지는 곳에 그릇 갖다 놓기 바빴다.

찾아간 대감은 그만 눈물이 핑 돌아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 대감께서 어찌 이처럼 비가 새는 초라한 집에서……. ”
“ 허허, 그런 말 마오. 이런 집조차 갖지 못한 백성이 얼마나 많은지 아오 ?그런 사람들 생각을 하면 나라의 벼슬아치로서 부끄럽소. 나야 그에 비하면 호강 아니오?”
하며 껄껄 웃었다고 한다.

 

4)

심인연전설 沈印淵傳說

세종 때 청렴한 재상으로 유명한 맹사성(孟思誠)이 온양의 어머니를 뵈러 가는 중 이천을 지날 때 진위현감과 양성현감이 장호원까지 마중 나왔다.
그런데 맹사성의 차림이 너무도 남루하여 차마 정성인줄 알아보지 못하고 맹사성에게 , 귀한 분이 오시기로 되어 있는데 길을 비키라고 마구 하대하며 박대를 하였는데, 알보 보니 그분이 바로 맹사성이 었다.
그러에 알고 보니 그 허룸한 노인이 맹사성이라는 것을 알고 너무나 당황하여 연못에 현감의 관인을 빠뜨렸다고 하는 설화가 전해 온다.

 

5)

소를 타는 정승

≪ 태종실록 ≫ 의 편찬이 완료되자 세종이 한번 보고자 하였다.
그러자 맹사성은
“ 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것이 예가 되어 임금마다  본받게 되어 사관(史官) 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라 하고 반대하니 세종이 이에 따랐다.

맹정승은  사람됨이 소탈하고 조용하며 엄하지 않았다.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반드시 공복(公服)을 갖추고 대문 밖에 나아가 맞아들여 윗자리에 앉히고, 돌아갈 때에도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들어왔다.
효성이 지극하고 청백하여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祿米 : 봉급으로 받은 쌀)로 하였다.

출입할 때에는 소 〔 牛 〕 타기를 좋아하여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영의정 성석린은 선배로서 그의 집 가까이에 살았는데, 매 번 그의 집을 오고 갈 때는 그 집 앞에서 말을 내려서 지나갔다.
그는 음악에 조예가 있어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겼다한다. 품성이 어질고 부드러웠으나, 조정의 중요한 정사를 논의할 때에는 과단성이 있었고 감히 누구도범접을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6)

보리밥 한술도 못먹는 원님

맹사성이 조정에 오래 봉사하다가 휴가를 내어 고향에 다녀오기 위하여 시중을 들어줄 동자하나만 대리고 도보로 길을 떠났다. 맹정승은 어찌나 청렴하던지 귀향을 하면서도 도시락을 가지고 가는데 한낮이 되어 점심을 먹기 위해 어떤 주막의 방을 하나 얻었다. 그리고 동자에게는
「내가 맹 정승이라는 말을 절대 아무에게도 말 하지 말라.」하고 신신 당부를 해놓아 주막집 방에서도 할아버지와 손자가 이야기하는 줄로 알지 맹정성인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그 여막이 원(관아)이 있는 고을에 자리하고 있는 꽤 큰 주막이었던지 집이 크고 깨끗한 여막이라 마침 이 고을의 원님이 찾아와서 공교롭게도  맹 정승과 같은 방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제 겨우 이십을 겨우 넘긴 듯 한 젊은 원님은 자신이 이 고을의 최고 높은 사란이라는 자부심으로 방에 노인이 계신다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아랫목을 차지하고 앉아 대동하고 온 부하들과 희희낙락거리며 점심을 먹는 것이 었다.

노인(맹 정승)은 떠밀려서 윗목구석에서 싸 온 보리밥도시락을 물에 말아먹는데, 원님은 왠 늙은이가 시커먼 보리밥을 먹는 것이 신기하여
「거 노인양반! 무슨 꽁보리밥을 그리 드시오. 나도 한번 먹어 봅시다.」하고는 숟가락으로 노인 밥그릇에서 밥 한 술 떠서 입에 넣는 것이었다.
생전 보리밥을 먹어 보지 않고 자랐었는지 원님은 두어 번 오물거리다가 캑캑 거리며 장바닥에 내 뱉어 버리고 말았다.

노인은 보기에 보기가 민망하여
「원님께서 통(도뚜지) 보리밥을 안 드셔 보았군요. 하기야 처음 드시면 먹기가 힘드실 겁니다.」 말하고는 아무 일도 없는 듯 별로 개치 않고 나머지 밥을 다 먹고 총총히 남은 길을 떠났었다.
                                                                                                   <출전: 광주의 설화>

 

7)

햅쌀밥을 먹지 않는 정승

맹 정승이 어렸을 때 살던 초가삼간의 자기 집에 도착하였는데 어릴 때부터 아주 친하게 지나던 친구가 찾아왔다.
맹 정승은 관리라 극가에서 주는 녹으로 살아가는데 그 때는 돈 대신 쌀로 봉록을 받았다. 그리고 그 쌀을 햅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리 된 쌀을 먼저 나누어주기 때문에 쌀에서 묵은내가 났다.

맹 정승의 아내는 모처럼 온신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데 쌀에서 냄새가 나는 밥을 지어 드리기 황송해서, 묵은 살 한 바가지를 갖고 이웃집에 가서 햅쌀과 바꾸어 와서 밥을 지어 손님 접대를 하였다.

맹 정승이 밥을 먹어 보니 평소에 먹던 밥이 아니었다.
그러자 정승은 수저를 내려놓고
「나는 평소 먹던 밥을 먹지 이런 밥은 먹을 수 없으니 상을 무리라.」하였다고 한다.
                                                                                               <출전: 광주의 설화>

 

8)

젊은이를 업어서 물을 건너 준 정승

어느 날 맹 정승이 휴가를 얻어 자기 집 텃밭을 가꾸기 위해 옷을 벗어 재치고 호미를 들고 밭을 매는데, 젊은 선비가 지나가다가 옆에 흐르는 개울을 신발 벗고 건너기가 싫어서, 자신을 업어 건네주기를 청했다.
노인은 힘이 부친 데도 불구하고 아무 말 없이 젊은이를 업어서 강을 건너 주었다.

휴가를 마치고 맹 정승은 다시 의관을 정제하고 한양 길을 가는데 마침 업어서 강을 건너 준 젊은이와 만나게 되었다.
그때야 그 노인이 시골 무지레기가 아니라 일국의 정승이라는 것을 알고 몹시 당황하였다. 그리하여 젊은이는 무례를 저지른 자신의 잘못을 백배 사죄하였다.

맹 정승은
아무리 지체가 낮더라도 어른은 어른이니 앞으로는 진실 된 마음으로 어른을 공대하고 사시오. 늦게라도 자신의 허물을 깨달으니 다행이오.」하며 오히려 격려해주었다고 한다.
                                                                                                         <출전: 광주의 설화>

 

 

 

孟思誠(맹사성)의 일화.

 

고불이 온양에 들러 어버이를 뵙고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도중에 비를 만나 용인의 어주막에 들렀다. 옷차림이 매우 요란스러운 과객이 누 위에 앉아 붐시 거드름을 피웠다.

그는 이누 아래에 앉았다.

거드름을 피우고 있는 지는 영남에서 의정부의 녹시(하급 관리) 자리에 응시하러 가는 중이었다. 그가 맹사성에게 누 위로 올라오라 고했다. 둘은 세상 돌이가는 얘기를 나누며 장기를 두었다. 마침내 그 들은 갑자기 친해져 농담을 주고받기에 이르렀다.

 

우리 공 · 당 놀이 한 할가요?’ 영님의 나그네가 제안했다. “그것이 무슨 놀이오?’

내가 말끝에 공 하고 물으면 노인께서 당 하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거 몹시 재미있겠소. 내가 연장자이니 먼저 묻겠소.”

그러시지요.”

고불이 먼저 물었다.

무엇하러 서울에 올리가는 공?’

벼슬을 구하러 올라간 당.”

무슨 벼슬인 공?’

녹사자리란 당.”

고불은 한참 시간를 두었다가 또다시 말했다.

내가시켜 주겠 공.”

에이, 그러지 못할 거 당.”

그렇지 않을걸 공.”

농담이지나치 당.”

알아서 하라 공

그리할게 당.”

두사람은 그곳에서 비를 피하며 재미있게 지내고 헤어졌다.

며칠 맹사성이 의정부에 앉아 있는데 영님의 그 사내가 들어 왔다. 고불은 슬그머니 장난기가 발동하여 사내에게 물었다.

어떠한 공?’

사내가 깜짝 놀라 고불을 쳐다보고 그의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 엉겁곁에 말을 받았다.

축었지 당.”

핫핫핫 되었지 공.”

대감, 소인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염려놓으시 공.”

 

그 자리에 있던 시람들이 이상스러워서 두 시림을 쳐다보았다. 고불이 그 까닭을 얘기했다.

그러자 의정부가 웃음바다가 되었다.

고붙은 그 사람을 녹사로 뽑았다. 그 사람은 고불의 추천을 받아 여러 치례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고불이 아니면 감히 흉내 내지 못할 해학이었다. 뒷날 사람들은 두 사람의 희한한 문답을 공당 문답이라했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孟思誠(맹사성)의 일화.

 

맹사성의 고향은 온양이었다. 어버이를 뵈러 한양에서 온양까지 소를 타고 다녔다.

한번은 양성과 진위 두 고을 수령이 고불이 온양에 내려온다는 소문을 듣고 장호원에서 기다렸다. 그들은 이번 기회에 재상의 눈에 들어 보려는 수작이었다.

이때수령들이 앉아 있는 앞으로 한 노인이 소를 타고 지나갔다.

수령이 관졸을 시켜 꾸짖었다.

웬 늙은이냐? 재상의 행치를 기다리는데 소를 티고 지나가다니! 몹시 버릇이 없구나.”

고불이 그 말을 듣고 벙긋 웃으면서 말했다.

수령들에게 이르게. 나는 온양에 사는 맹 고불이라고 말일세.” 관졸이 전하자 두 수령은 기겁을 하곧장 달아났다.

당장 집혀 혼같아서였다. 그들은 어찌나 급히 달아났던지 언덕 밑 깊은 못에 수령의 관인이 떨어진 줄도 몰랐다. 그 뒤에 그 연못을 인침연 이라고 불렀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孟思誠(맹사성)의 일화.

 

어느 날 병조판서가 공무로 고불의 집을 찾았다.

미침 소낙비가 내려 고불의 집이 온통 물벼락을 맞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병조 판서의 의관이 다 젖었다.

고불은 새는 물방울을 피해 앉으며 투덜댔다.

 

손님이 계실 때 소낙비가 쏟아질 게 뭐람.”

병조판서는 마침 사랑채를 크게 짓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그는 당장 공사를 중단시켰다.

정승의 집이 그러한데 내 어찌 사랑채가 필요하겠는가.”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孟思誠(맹사성)의 일화.

 

고불은 항상 피리를 가지고 다니며 기분이 내키면 꺼내서 한 곡조씩 불었다.

집에 있을 때는 항상 대문을 걸어 잠근 손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어쩌다가 공무로 찾아오는 관리는 물리치지 않았고 관리가 일을 보고 가면 이내 대문을 잠갔다.

관리는 멀리 동구 밖에서 피리 소리를 들으면 고불이 집에 있다는 것을 알랐다.

그는 여름이면 소나무 그늘에 앉아서 겨울이면 포단(부들로 둥글게 틀어 만든 방석)에 앉아 피리나 퉁소를 붙었다.

그는 그토록 음률을 매우 즐기고 사랑했던 것이다. 그의 주변에는 피리 · 통소 외에 는 아무것도 없었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孟思誠(맹사성)의 일화.

 

준엄한 정승이라도 그는 해학이 넘치는 인긴 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更子(경자)생이면서 癸卯(계묘)생끼리 모인 계에 장난 사아 들어갔다. 소위 甲契(갑계) 동갑계에 것이다.

자기보다 나이가 적은 동갑계에 들어 시치미를 떼었다.

 

세종이 어느 고불에게 나이를 물었다.

경의 나이가 지금 몇이오?’

맹사성은 임금을 속일 없었다.

, 신은 更子(경자)생이 옵나이다.”

이 말을 계묘생인 신하가 들었다. 이 소문이 갑계에 금세 퍼졌다. 그는 즉시 계에서 제명되고 한때 웃음거리가 되었다.

고불이 얼마나 젊어지고 싶으면 나이를 살이나 속이고 젊은 축에 끼려고했을끼까?”

그는 그리한 말을 듣고도 태연스러웠다. 그는 오히려 능청을 떨며 받아넘겼다.

어린 사람들이 어른이 힘께 놀아 주면 고맙다고 것이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가?’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孟思誠(맹사성)의 일화.

 

조선 왕조에서 황희 못지않게 ()재상으로 이름을 떨친 이기 고불 孟思誠(맹사성)이다. 그는 黃喜(황희)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재상으로서 맹사성은 황희와 쌍벽을 이루었다.

그는 천성이 몹시 효성스럽고 청렴했다.

그가 시는 집은 겨우 비바람을 막을 정도였다. 밖에 나갈 때는 항상 소를 타고 다녀 백성들은 그가 재상인 줄을 전혀 몰랐다.

 

그는 집안 살림에는 초연했고 음률을 매우 사랑하여 퉁소와 리를 항상 끼고 살았다.

그는 조정에서 주는 녹미 외에는 먹지 않았다.

 

한번은 아내가 햅쌀밥을 지어 올렸다.

부인 어디에서 햅쌀을 구해왔소?’

녹미가 묵어 냄새가 나서 먹을 없습니다. 이웃집에서 꾸어 밥을 지었습니다.”

부인은 공연한 짓을 했소이다. 벼슬아치가 녹미를 먹는 것은 연한 일이오.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마시오.”

맹사성은 밥상을 물려 버렸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孟思誠(맹사성)의 일화

 

이조 중엽. 맹사성(孟思誠)이라는 정승을 지내신 분이 계셨는데, 조선시대 청백리상 빛나는 맹 정승에게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열아홉에 장원 급제하여 스무 살에 파주 군수가 된 맹사성은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느 날 그가 근처 무명 선사를 찾아 물었다. "스님 군수인 제가 삼아야 할 좌우명이 무엇입니까 하자 "그건 어렵지 않지요. 착한 일을 많이 베푸시면 됩니다."

"그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치인데 고작 그 것 뿐이오?"

맹사성은 거만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스님은 녹차나 한 잔 하고 가라며 붙잡았다. 그는 못이기는 척 자리에 앉았다. 스님은 그의 찻잔에 넘치도록 차를 따르고 있다.

 

"스님,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망치십니다."하고 맹사성이 소리쳤다 하지만 스님은 태연하게 계속 차를 따른다.

그리고는 잔뜩 화가 난 맹사성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는 것은 알고, 지식이 넘쳐 인품을 망치는 것은 어찌 모르십니까?" 스님의 이 한 마디에 맹사성은 부끄러워 황급히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간다.

 

그러다가 문틀에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그러자 스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법이 없습니다."이 말을 듣고 좌우명으로 삼아 평생 청렴하게 살았다.

 

 

 

孟思誠(맹사성)의 일화

 

맹 정승은 효성이 지극하고 시와 문장에 뛰어났으며, 음악을 좋아하고 마음이 어질고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오직 나라에서 주는 녹미(요즘의 월급)만으로 생활을 하는 청백리다 보니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했다.

 

그러나 맑고 깨끗한 그의 생활에는 한 점의 티도 없었다.

어느 비 오는 날 한 대감이 그의 집을 찾았다. 그 대감은 속으로 놀랐다.'세상에! 한 나라의 정승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초라하게 살다니...'안으로 들어가서 맹 정승을 만난 대감은 더욱 놀랐다.

여기저기서 빗물 새는 소리가 요란 하였고 맹 정승 부부는 빗물이 떨어지는 곳에 그릇 갖다 놓기 바빴다.

 

대감은 그만 눈물이 핑 돌아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대감께서 어찌 이처럼 비가 새는 초라한 집에서."

" 허허, 그런 말 마오. 이런 집조차 갖지 못한 백성이 얼마나 많은지 아오. 그런 사람들 생각을 하면 나라의 벼슬아치로서 부끄럽소. 나야 그에 비하면 호강이 아니요 ?"하며 불편한 기색 없이 지냈다.

 

 

孟思誠(맹사성)의 일화

흑기총(黑麒塚)

 

맹정승이 집 뒤 설화산 기슭을 오르던 중에 어린 아이들에게 시달림을 받고 있는 큰 짐승을 발견했다. 장난기가 발동한 아이들은 짐승의 눈을 찌르고 배 위에 올라타면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짐승은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어쩐 일인지 꼼짝도 못했다. 평소 남의 일에 참견 않는 고불이 호통을 쳤다.

 

이런 고얀 녀석들! 말 못하는 짐승을 돌보지 않고 못살게 굴어서야 되겠느냐. 썩 물러가지 못할까.”혼비백산한 아이들이 줄달음치고 난 다음 고불이 가까이 가보니 검은 소가 탈진해 있었다. 얼른 집으로 가서 소죽을 쑤어다 먹이고 극진히 간호했다.

 

기운을 차린 검은 소가 꼬리를 치며 고불을 끝까지 따라와 내보내면 다시 따라오고 내보내면 다시 따라와 집으로 데려와 정성껏 거두며 주며 주인 잃은 소를 찾아 가라고 동네방네 소문냈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 고불 맹사성은 이 소를 수족처럼 아끼며 한평생을 타고 다녔다.

세종 20(1438) 79세로 고불이 죽자 검은 소는 사흘을 먹지 않고 울부짖다가 숨을 거두며 죽었다,

사람들이 감동하여 고불 묘 아래 묻어 주고 흑기총(黑麒塚)이라 이름 하였다.

지금까지도 검은 소 무덤, 흑기총은 고불 묘를 금초할 때 빼놓지 않고 벌초하여 잘 보존되고 있다.

 

 

孟思誠(맹사성)의 일화

 

맹 정승이 이 검은 소를 타고 안동부사로 부임하는 일화로도 유명하다. 맹사성이 인동으로 부임하자 시정을 보고자 돌아다니기도 하였고 맹 정승은 지리학에도 밝았다 풍수지리에 밝아 주위사람들에게도 묘터를 봐주곤 하였는데, 맹사성이 이곳 영천을 들려 물을 마시다가 명당을 발견하고 여기 아주 좋은 묘터 가 있다, 하면서 이곳을 둘러보며 춤을 췄다하여. 이곳을 두무령이라고 전해진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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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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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인구조사 결과 남한에 총 3,926가구, 16,45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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