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ail : juntonggahun@naver.com
>> 한국의 성씨


남평문씨(文)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남평문씨)

 

 

본관(本貫): 남평(南平)

시조(始祖): 문다성(文多省)

유래(由來):

 

문씨(文氏)의 본관은 남평(南平)을 비롯하여 단성(丹城감천(甘泉:경북 안동지방정선(旌善강성(江城함평(咸平파평(坡平) 156본까지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나 감천과 정선을 제외한 관향은 모두가 남평 문씨의 세거지명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평문씨는 신라 자비왕(慈悲王) 때 사람인 문다성(文多省)을 시조(始祖)로 하고, 감천 문씨(甘泉文氏)는 경주 김씨(慶州金氏)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고려 태종 때 중국에 건너가 문명을 떨침으로써 문씨의 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정선 문씨(旌善文氏)는 본래 전씨(全氏)였으나 시조 문임간(文林幹)이 역시 중국에서 문장으로 명성을 떨쳐 문씨로 사성받고, 돌아와서 벼슬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와 태조소부(太子少傅)에 이르렀다고 한다.

 

우리나라 문씨의 대종인 남평 문씨의 시조 문다성은 신라말 남평에서 출생하였는데 그의 출생에 대한 설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서기 472(신라 자비왕 15) 전남 나주군 남평현 동쪽에 장자지(長者池)라는 큰 못이 있고 그 못가에는 큰 바위가 솟아 있었다. 하루는 군주가 그 바위 아래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에 오색구름이 감돌면서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신기하게 여긴 군주가 사다리를 가져오게 하여 바위 위에 올라가 보니 석함(石函)이 놓여 있었다.

함을 열어보니 그 속에는 피부가 옥설같이 맑고 용모가 아름다운 갓난아이가 들어 있었다. 기이하게 생각된 군주가 아이를 거두어 기르니 나이 불과 5세에 문사(文思)에 저절로 통달하고 무략(武略) 이 뛰어날 뿐 아니라 총명하여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지라 <()>을 성으로 삼게 하고 이름을 <다성(多省)>으로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후 대장군을 거쳐 삼중대광벽상공신(三重大匡壁上功臣)으로 남평백(南平伯)에 봉해져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관향을 남평으로 하게 되었으며 시조의 탄강지인 바위 위에다 <문암(文巖)>이라는 비를 세우고 못가에 장연서원을 지어 매년 음력 9월 중정일에 향사하고 있다.

 

가문의 중요 인물

 

문익(文翼)

고려 후기의 문신. 인종 때의 재상이었던 공유(公裕공인(公仁)의 아버지이며, 명종 때 명재상으로 이름난 문극겸 ( 文克謙 )의 할아버지이다.

1098(숙종 3) 좌찬선대부·급사중으로 임명되었으며, 1099년 요()나라에 가서 원자(元子)의 책명(冊命)을 받아와 직문하성(直門下省)으로 승진되었다. 1102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를 역임하였고, 1103년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지냈다.

 

문공유(文公裕)

당세에 명필로 유명했던 공유(公裕)는 익()의 막내아들로 예종과 의종조에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묘향산 보현사의 창사 비문(創寺碑文)을 남겼다.

 

문극겸(文克謙)

공유의 아들 극겸(克謙)은 문무겸직의 시초를 만든 충직(忠直)한 현상(賢相)으로 이름이 높았다.

 

문유필(文惟弼)

극겸의 아들이 고종 때 참지정사(參知政事)와 판예부사(判禮部事)를 지낸 유필(惟弼)이다.

 

문익점(文益漸)

1329(충숙왕 16) 1398(태조 7). 고려 말의 문신 · 학자.

첫 이름은 익첨(益瞻). 자는 일신 ( 日新 ), 호는 삼우당(三憂堂). 강성현(江城縣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 출생. 숙선(淑宣)의 아들이다. 1360(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과 순유박사 ( 諄諭博士 ) 등을 지냈다.

1363년 사간원 좌정언(司諫院左正言)으로 있을 때 서장관이 되어 계품사(啓 襄 使) 이공수 ( 李公遂 )를 따라 원나라에 갔다. 때마침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던 고려 사람 최유 ( 崔濡 )가 원나라에 와 있던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 ( 德興君 )을 왕으로 옹립하고 공민왕을 몰아내려 하고 있었다. 실제로 원나라는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봉하였고, 최유는 원나라의 군사 1만 명을 얻어 요동(遼東)까지 진군해 왔으나 13641월 최영 ( 崔瑩 ) 등에게 패하였다.

정치적 격동기에 원나라에 갔던 문익점은 덕흥군을 지지했다는 혐의로 귀국과 동시에 파직되었다. 원나라에서 귀국할 때 그는 종자(從者) 김룡 ( 金龍 )을 시켜 밭을 지키던 노파가 막는 것을 무릅쓰고 목화 몇 송이를 따서 그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와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나누어 주고 함께 시험 재배를 하였다.

처음에는 재배기술을 몰라 한 그루만을 겨우 살릴 수 있었으나 3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하여 전국에 목화씨가 퍼지도록 하였다. 그러나 목화씨를 어떻게 제거하고 실을 어떻게 뽑을지 모르던 중 때마침 정천익의 집에 머물던 호승(胡僧)에게 물어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 만드는 법을 배워 의복을 짜서 입도록 하였다.

이처럼 문익점은 정천익과 더불어 목화 종자의 도입, 시험재배 성공, 종자의 전국적 보급, 목화섬유를 이용한 의료제조 등 그 공로는 참으로 컸다. 조식(曺植)은 문익점의 그 공을 기려 훗날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씨와 같다(衣被生民 后稷同). ” 는 시를 지어 찬양한 바 있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그는 곧 전의주부(典儀主簿)가 되었고, 창왕 때는 좌사의(左司議)로 왕 앞에서 강론을 하기도 하였다. 이때 이준(李遵) 등이 사전 ( 私田 )을 다시 세우도록 함은 옳지 않다고 상소한 바 있는데, 문익점은 병을 핑계로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문익점은 이색 ( 李穡 ) · 이림 ( 李琳 ) · 우현보 ( 禹玄寶 ) 등과 더불어 사전 혁파를 비롯한 이성계 ( 李成桂 ) 일파의 전제개혁을 반대했던 것이다. 문익점은 이 사건으로 조준 ( 趙浚 )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사후 조선 태종 때 참지정부사(參知政府事) 강성군(江城君)에 추증(追贈)되었고, 1440(세종 22) 영의정과 부민후(富民侯)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이다. 또한 그의 고향 단성의 도천서원 ( 道川書院 )과 전라남도 장흥의 월천사우(月川祠宇)에 사당이 세워졌다.

, 문익점과 정천익이 처음 목화를 시험 재배했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는 문익점면화시배지 ( 文益漸棉花始培地 )가 사적 제108호로 지정되어 있고, 여기에 삼우당선생면화시배사적비(三憂堂先生棉花始培事蹟碑)가 세워져 있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지고 와 재배에 성공하고 이를 가공하여 의복을 짓게 된 경로를 밝힌 기록은 조식이 쓴 목면화기 木棉花記 에 있으며, 이 책은 규장각도서에 있다.

 

문래(文萊)

간의대부(諫議大夫) 중실의 맏아들 래()는 이색(李 穡)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성리학을 비롯한 천문·지리·산수·율려(律呂)에 이르기까지 정통했던 학자로 목화에서 실을 뽑는 <물레>를 발명했다.

 

문위세(文緯世)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권율(權 慄)의 휘하로 들어가 역전의 훈공을 세웠던 위세(緯世:익정의 9세손)가 용담 현감(龍潭縣監)을 지내고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문홍헌(文弘獻)

홍헌(弘獻)은 진주성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강물에 투신자살하 충절을 빛냈다.

 

문희성(文希聖)

광해군 때 광주 목사(廣州牧使)를 지냄.

 

문재도(文載道)

병자호란에 왕을 호종하고 경상도 수군절도사를 역임.

 

문기호(文基浩)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 순절한 충신.

 

문익성(文益成)

1526(중종 21) 1584(선조 1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평 ( 南平 ). 자는 숙재(叔載) · 분중(賁仲), 호는 옥동(玉洞). 합천(陜川) 출신. 장수(長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과 ( 司果 ) 유지(有智)이고, 아버지는 생원 옹( )이며, 어머니는 함안조씨(咸安趙氏)로 판결사 ( 判決事 ) ()의 딸이다.

조식(曺植) · 주세붕 ( 周世鵬 )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이황 ( 李滉 )으로부터 대학 의 요지를 배웠다. 1549(명종 4)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6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어 1566년 홍원현감으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저작을 지내고 1573(선조 6) 평양서윤으로 나갔다.

의정부에서 업무처리가 소홀하다고 상계(上啓)하여 양양부사로 체직되었다. 1580년 나주목사로 재임중 양양부사로 있을 때 환곡 ( 還穀 ) 5,700여석을 횡령하였다는 사간원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가 뒤에 다시 등용되어 사간원헌납을 지냈다. 뒤에 도승지 겸 직제학을 추증받았다. 경상남도 합천의 도연서원 ( 道淵書院 )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옥동집 이 있다.

 

文多省(문다성)선생의 일화

 

우리나라 문씨의 대종인 남평 문씨의 시조 문다성은 신라말 남평에서 출생하였는데 그의 출생에 대한 설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서기 472년(신라 자비왕 15) 전남 나주군 남평현 동쪽에 장자지(長者池)라는 큰 못이 있고 그 못가에는 큰 바위가 솟아 있었다.
하루는 군주가 그 바위 아래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에 오색구름이 감돌면서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신기하게 여긴 군주가 사다리를 가져오게 하여 바위 위에 올라가 보니 거기 석함(石函)이 하나 놓여 있었다.

함을 열어보니 그 속에는 피부가 옥설같이 맑고 용모가 아름다운 갓난아이가 들어 있었다.
기이하게 생각된 군주가 아이를 거두어 기르니 나이 불과 5세에 문사(文思)에 저절로 통달하고 무략(武略) 이 뛰어날 뿐 아니라 총명하여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지라 <문(文)>을 성으로 삼게 하고 이름을 <다성(多省)>으로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후 대장군을 거쳐 삼중대광벽상공신(三重大匡壁上功臣)으로 남평백(南平伯)에 봉해져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관향을 남평으로 하게 되었으며 시조의 탄강지인 바위 위에다 <문암(文巖)>이라는 비를 세우고 못가에 장연서원을 지어 매년 음력 9월 중정일에 향사하고 있다.

 

文益漸(문익점)선생의 일화.

 

영남루에 시한 수

선생은 한 때 청도군수로 부임한 적이 있다.
군민을 잘 다스려 맑은 다스림을 하고 모든 일을 감편하게 하였다.
틈이 나는 날에는 좋은 곳을 골라 유람을 하여 마음 내키는 대로 즐려하였는데 하루는 密陽(밀양) 嶺南樓(영남루)에 올라 시를 지었는데 그 시는 지금도 영남루에 걸려 있다고 한다.

듣건대 신선은 동천(洞天)에 살고
여섯 마리 자라는 머리에 태우고 앞으로 달린다지.
맑은 날 방초(芳草)에 좋은 바람 부는데
외로이 떨어진 오리는 노을 진 석양 빛 맞고 있네.
넓은 들에 마소 나그네 갈 길을 분별케 하고
멀리 마을인가에서 나는 연기 속에 개 닭 울음소리 들리는데
이 별천의 아름다운 광경 말로는 다 못하니
그림으로 그려서 내 님 계시는 곳에 올리라.
                                                                                       <출전: 내고장 전통문화(청도군 1981)>

 

 

 

文思天(문사천) 선생의 전설.

 

둔갑(遁甲)선생 문사천(文思天)

 

문사천은 울진읍 화성리 사람인데 호()를 해은제(海隱齊)라 하였으며 얼굴이 준수하고 재주가 탁월하여 여러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중용(中庸)을 애독하였는데 하루는 죽변 바닷가에 가서 낚시를 하다 보니 옛 책 한권이 낚시에 걸려 올라오므로 책명을 살펴보니 서산선사일필도술황권(西山禪師一弼道術黃卷)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을 깊이 연구하여 여러 가지 이적(異蹟)을 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널리 전파되어 당시 군수가 듣고 문사천을 불러 도술을 시험하니 즉석에서 종이에다

홍명수국비필함로(鴻鳴水國飛必含蘆)라 써서 주문과 함께 앞뜰에 던지니 조금 후에 기러기 두 마리가 연호정 쪽에서 갈대를 물고 날아와 관아 앞뜰을 두 번 빙빙 돌다가 날아가는 것이었다.

 

그 글의 뜻은 호수에 놀던 기러기가 갈대꽃을 물고 날아온다.는 것으로 군수와 모든 관속들이 탄복하여 많은 상을 주어 보냈다.

 

그 후 사람들은 문사천을 둔갑선생이라 불렀다.

<울진군지>

 

 

濟生(제생) 文德謙(문덕겸)선셍의 일화

 

濟生(제생)이란 향학에서 공부하는 학생을 가리키는 것으로 문덕겸은 교수 노개방 밑에서 공부 하던 학생으로 임난을 당하여 선생과 같이 순절한 사람이다.

문덕겸은 교수 노개방이 밀양으로 어머니를 뵈러 간 사이에 적이 밀려 왔으므로, 향교에 봉안했던 선현의 위패를 스스로 성중의 정원루로 옮겨 모신 뒤 그 곁을 떠나지 않다가 적이 쇄도하매 돌아온 노교수와 함께 그 앞에서 조용히 순사하였다.

 

그는 남평 문씨로서 동래에 옮겨와서 살았는데 당시의 집은 여고리(현 사직동)였던 모양인 듯 적병이 북으로 올라간 뒤에 종 검산이 몰래 덕겸의 시체를 여고리로 옮겨다 묻었다.

 

자식으로는 아들 건중(建中)이 있었으나 일찍 죽고 부인 민씨가 자부 정씨와 9살 먹은 손녀를 데리고 덕겸을 찾다가 찾지 못하고 고부가 함께 길가에서 죽었다.

종 검산이 여주인을 찾아 헤매다 성의 서문에서 찾아내었는데 9살짜리 손녀가 두 시체 밑에 깔려 거의 죽어 가고 있었다. 검산은 손녀를 금강골의 바윗굴(金岡谷 岩窟)에 숨겨두고 두 시체를 업고 가서 묻었다. 문덕겸 부부는 한 묘에 묻혔으며 손녀는 자라서 동래인 김천상(金天祥)에게 시집갔다.

 

김천상의 후손은 동래 유생 이동형에게서 비문을 받아 덕겸의 묘에 비석을 세웠다. 검산은 또 주인집 토지문서를 우물 돌 밑에 묻었다가 뒤에 찾아내니 이로 인해 문씨의 전답과 토지가 모두 김씨에게로 돌아갔다.

문덕겸은 뒤에 동래충렬사에 배향되고 영조 13년에는 호조좌랑에 증직 되었다.

 

 

비호같이 날쌘 문재도(文載道)

 

1374(공민왕 23) 펑해 군사 문재도(文載道)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효자각이 지금도 영주시 영주 3동에 우뚝 서 있다.

 

문 효자는 고려 공민왕 때 평해서 군사란 벼슬을 하며 지내왔었는데, 사람이 강직하고, 용맹할 뿐 아니라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근면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상하로부터 많은 신망과 존경을 받아 왔었다.

 

문 효자는 자기기 맡은 직무에 충실하였을 뿐 아니라 부모를 극진히 모시 는 효성 높은 젊은이로도 유명하였다.

 

바쁜 엽무 중에서도 틈틈이 여가를 얻어 부모를 봉양하였는데, 일찍이 모친을 여의고 홀로 계서는 아버지를 위해 온갖 정성을 다 바쳐 왔었다.

 

홀로 계서는 아버지가 얼마나 적적하실까? 식사는 제대로 하시는지 모르겠다.

 

문 재도는 늘 이렇게 생각하며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꿩을 사냥하여 대접 해 드리고 또 아버지가 짚고 다니시는 지팡이가 너무 무거워 힘이 드실까 봐 온 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개암나무라는 가벼운 나무를 찾아 지팡이를 만들어 드리는 등 세심한 데까지 정성을 다 쏟았다.

 

그려던 중 어느 날, 평해 연안에 왜구(일본군) 수백 명이 침입하였다는 전갈을 받았다. 충성심이 강한 문 재도는 50여 명의 군졸을 거느리고 제일 앞장서서 왜군에 대항하었다. 그러나 워낙 수가 많은 왜군에게 몰리어 50 명 군사는 혹은 전사하고, 혹은 부상하여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아버지가 위험하다.’

고 생각한 문재도는 부상한 다리를 끌고 집으로 달려가 아버지를 등에 업고 피란을 가는데, 뒤쫓아 오던 왜군이 마구 조총을 쏘아대었다. 빗발치는 화살을 요리조리 피하며, 막 달아나는데, 왜군이 쏟 화살 하나가 옆혀 가는 아버지 등에 맞았다. 문 재도는 급히 화살을 뽑고 풀을 뜯어 상처에 붙인 다음 숲 속에 아버지를 내려 두고 품속에 품었던 단도를 빼어 들고는 용감하게 뛰어 나가 왜군과 맞불었다.

 

이리 치고, 저리 베고 비호처럼 날쎈 솜씨를 보인 문 재도는 순식간에 10 여 명의 왜군을 쓰러뜨리었다. 이것을 본 나머지 왜군들은 간담이 서늘해져서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모두 배를 타고 도망쳤기 때문에 펑해 연안에는 다시 팽화가 찾아오게 되었다.

 

어디서 그런 험이 솟아났는지 문 재도 자신도 잘 모르는 얼이었다.

아마 나라를 짓밟는 왜군을 물리쳐야 한다는 굳은 충성심과 아버지의 원수를 꼭 갚겠다는 끓어오르는 효심이 문 재도로 하여금 그런 힘을 나타나게 한 것이라 생각된다.

 

문 재도는 급히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어느 새 얼어나 앉아서 다가오는 아들을 보고, ‘, 얘야, 씩씩하게 잘 싸웠구나.’

 

하며 칭찬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아들의 싸우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고 화실에 맞은 상처도 그마저 깊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상처가 빨리 나은 것은 하늘이 도와주고, 문 재도의 효성이 너무나 뛰어 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문 재도의 충성심과 효성은 여러 사람의 업에 오르내리게 꾀었고, 이 소문은 드디어 임금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혼자 힘으로 수많은 왜군을 무찌르고 아버지를 잘 모셔 낸 문 재도에게 큰 상을 내리고 효자비를 세워 후세에까지 널리 알리도록 하여라.‘’ 하는 임금님의 분부가 떨어졌다.

 

왜군이 물러가고 펑화가 다시 돌아오자 문 재도는 자기의 나이가 많음을 깨닫고 군사 벼슬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하였다.

 

아쉬워하는 진우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 온 문재도는 홀로 계서는 아버지께 더욱 효도를 다하였는데, 자기 아들이 아버지 식사하는데 가서 맛있는 것을 얻어먹고, 귀찮게 굴까 봐 아버지 식사 때는 아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 전쟁놀이, 산딸기 따기, 자치기 등을 하며 놀았고, 아버지가 펀안히 주무시는 걸 보고서야 자기도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문 재도의 효행이 지극하여 나라와 주민들이 문 재도의 고향인 양성에 효자비와 효자각을 세우니 주민들은 그 때 부터 이 마을을 효자리(孝子里)라 불렀다.

 

문 재도의 자손 들은 그 후 이곳에서 크게 번영하였는데, 문 재도 의 손자되는 두 분 이 조청에서 시중(待中)이란 벼슬 과 영의정의 벼슬을 받아 그 명성이 자자했었다.

 

이것은 오로지 문 재도가 닦아 놓은 충효의 길이 그대로 이어져서 후손들 에게까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영주 3리에 있는 문재도의 효자각과 효자비는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에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지금은 영주(榮州)에서도 가장 변화한 시가지에 둘러싸여 있고, 불과 20m 서편에 영주시외 버스 청류소가 있어 오고 가는 많은 사람의 눈길을 끌고 있다.

 

참고문헌 <榮州市誌(영주시지)>

 

 

 

.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32

(),()

()

37

(),()

()

42

(),()

()

33

(),()

()

38

(),()

()

43

(),()

()

34

(),()

()

39

(),()

()

44

(),()

()

35

(),()

()

40

(),()

()

45

 

36

(),()

()

41

(),()

()

46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88,932가구, 375,76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게시물 목록
번호 제 목 글쓴이 등록일 조회
285 포계 변.jpg 초계변씨: 밀양변씨(卞) 청남 14-08-27 6927
284 황주 변.jpg 황주변씨(邊) 청남 14-08-27 3170
283 장연 변.jpg 장연변씨(邊) 청남 14-08-27 3088
282 원주 변.jpg 원주변씨(邊) 청남 14-08-27 4469
281 안주범씨(凡) 청남 14-08-27 2033
280 금성 범.jpg 금성범씨(范) 청남 14-08-27 3372
279 수원 백.jpg 수원백씨(白) 청남 14-08-27 5605
278 흥해 배.jpg 흥해배씨(裵) 청남 14-08-27 3971
277 성산 배.jpg 성산배씨: 성주배씨(裵) 청남 14-08-27 5550
276 분성 배.jpg 분성배씨(裵) 청남 14-08-27 4551
275 달성 배.jpg 달성배씨(裵) 청남 14-08-27 4653
274 관산 배.jpg 곤산배씨:곤양배씨(裵) 청남 14-08-27 3151
273 진강방씨(邦) 청남 14-08-27 2172
272 태원 방.jpg 태원방씨(龐) 청남 14-08-27 2658
271 개성 방.jpg 개성방씨(龐) 청남 14-08-27 2859
270 남양 방.jpg 남양방씨(房) 청남 14-08-27 5082
269 온양 방.jpg 온양방씨(方) 청남 14-08-27 4878
268 개성반씨(班) 청남 14-08-27 2377
267 거제 반.jpg 거제반씨(潘) 청남 14-08-27 4868
266 함양 박.jpg 함양박씨(朴) 청남 14-08-27 3835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