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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흥민씨(閔)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여흥민씨)

 

 

본관(本貫): 여흥(驪興)

시조(始祖): 민칭도(閔稱道)

유래(由來):

 

()씨는 중국 농서현( 西縣:감숙성 난산도)에서 계출된 성씨로 성인 공자의 10제자 중 한 사람인 민손(閔 損:자는 자건, 노나라 현인)의 후손 민칭도(閔稱道:상의봉어를 역임)가 고려 중엽에 사신으로 왔다가 귀화하여 여흥에 정착한 것이 우리나라 민씨의 시원(始源)이 된다.

 

민씨의 본관은 여흥(驪興)을 비롯하여 황려(黃驪영주(榮州여주(驪州대전(大田해남 등 32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에 전해지고 있으나 모두가 동조동근(同祖同根)으로 여흥 민씨의 세거지명에 불과하다.

 

가문의 중요 인물

 

민영모(閔令謨)

시조의 증손 영모(令謨)가 고려 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 원외랑(吏部員外郞)을 지내고 명종이 즉위하자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벼슬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거쳐 태자 태사(太子太師)에 이르렀다.

 

민식(閔湜)

신종조(神宗朝)에서 형부 상서(刑部尙書)에 오름

 

민공규(閔公珪)

판병부사(判兵部事)와 태자 소보(太子小保)를 지냄.

 

민지(閔漬)

상서공(尙書公) ()의 후손에서 그의 증손 지()가 충렬왕과 충선왕조에 걸쳐 원나라와의 외교에 공을 세웠고 충숙왕 때 수정승(守政丞)으로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졌으며 문장이탁월하여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본국편년강목(本國編年綱目)을 저술했다.

 

민상정(閔祥正)

1301(충렬왕 27) 문과에 급제한 상정(祥正)은 충숙왕 때 장령(掌令)과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거쳐 찬성사(贊成事)를 지냈으며 청렴하고 강직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민안부(閔安富)

고려 말에 예의 판서(禮儀判書)를 지내고 조선 개국에 반기를 들었던 안부(安富)는 상서공(尙書公) ()6세손으로 두문동에 은거하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

 

민여익(閔汝翼)

1360(공민왕 9) 1431(세종 13).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자는 보지(輔之)이다. 대제학첨의정승(大提學僉議政丞) ()의 증손이다. 아버지는 여흥군(驪興君) ()이다. 부인은 유수 ( 留守 ) 곽윤명(郭允明)의 딸이다.

1380(우왕 6) 문과에 급제했다. 후덕부승(厚德府丞)이 되고 성균사예(成均司藝)에 올랐다. 이 때 수시중(守侍中)으로 인사권을 쥔 이성계 ( 李成桂 )의 신임을 얻어 군부(軍簿) 경력으로 발탁되었다. 이어 예조의랑 · 병조의랑 · 우간의(右諫議)를 역임하였다. 1392(태조 1) 이성계의 조선 개국을 도와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고, 전결(田結)과 노비를 받았다.

13936월 내시 이만(李萬)과 세자빈 유씨(柳氏) 사건에 대해 간하다가 태조의 노여움을 사 순군 ( 巡軍 )에 하옥되어 정희계 ( 鄭熙啓 ) · 남은 ( 南誾 ) 등의 국문을 받았다. 그 해 다시 중추원 우부승지를 거쳐 도승지를 역임하였다.

1396년 도승지로 대사성 함부림(咸傅林)과 함께 성균시원(成均試員)이 되었다. 그 해 12월 사헌부대사간으로 임명되었다.

다음 해 정월 태조의 생질인 지중추원사 조견(趙 羌 )이 왜구를 토벌하는 데 실패한 것과 그 당시 대사헌으로서 조견을 탄핵하지 못한 한성윤(漢城尹) · 신효창 ( 申孝昌 )을 탄핵하여 대사헌으로서의 기개를 보이기도 했다.

이 해 여흥군(驪興君)으로 봉해졌다. 그리고 자헌대부에 올라 전라도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가 되었다. 1402(태종 2) 10월 좌군총제(左軍摠制)가 되었다. 140810월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8년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에 제수되었다.이듬해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14122월 성절사 ( 聖節使 )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138월 도성 ( 都城 )을 수리할 때 경성수보도감(京城修補都監)의 제조 ( 提調 )가 되었다. 1415년 정월 관제를 개혁하고 난 뒤 세자좌우빈객(世子左右賓客)이 되었다. 다음해 5월에는 공조판서, 6월에는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을 지냈다.

14185월 판한성부사를, 6월 예조판서를 역임했다. 세종 초년 영접사(迎接使)로 여러 차례 평양에 파견되어 사신을 위로하였다. 1419(세종 1) 8월에 호조판서가 되었다. 14207월 원경왕후 ( 元敬王后 )가 죽자 수릉관(守陵官)이 되었다.

이어 보국숭록여천부원군(輔國崇祿驪川府院君)에 봉해졌다. 1426년 대광보국여천부원군(大匡輔國驪川府院君)에 가봉(加封)되었다. 시호는 양경(良敬) 또는 경정(景定)이다.

 

민안인(閔安仁)

1343(충혜왕 4) 1398(태조 7).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자복(子復). 고려 첨의정승(僉議政丞)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상정(祥正)이고, 아버지는 증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이다. 1365(공민왕 14) 10월 전리판서(典理判書) 한천(韓 蓚 ) 주재하의 국자감시 ( 國子監試 )에서 1등으로 급제하였다.

1374년 문과에 급제하고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에 제수, 그뒤 고려대를 통하여 14년간이나 관직(館職)을 띠고 제고 ( 制誥 )에 참여하였다. 1377(우왕 3)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 · 예의총랑(禮儀摠郎)을 거쳐 전법총랑(典法摠郎)이 되었다가 권귀(權貴)의 뜻을 거슬려 파면되고, 4년 뒤 군부총랑(軍簿摠郎)으로 복직되었다.

고려 말에는 삼사의 좌윤과 우윤을 역임하였다. 1392(태조 1) 사은사 ( 謝恩使 )인 문하시랑찬성사 우인렬(禹仁烈)의 부사가 되어 명나라를 내왕, 귀국 즉시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에 제수되었다. 곧 교서감감(校書監監)을 거쳐, 평양교수(平壤敎授)로 파견되었다.

문묘 ( 文廟 )를 수리하고, 학규(學規)를 엄히 하면서 훈회(訓誨)에 전력하는 등 유학진흥과 유교의례의 보급에 공헌하였다. 1395년 한성에 태묘(太廟 : 종묘)가 세워지면서 예악정비(禮樂整備)가 요청되자 전고(典故)에 밝다 하여 특별히 소환되어 국왕의 친관(親 痙 :親祭)을 위한 대례 ( 大禮 )의 완비에 공헌하였다.

곧 퇴직하여 후진을 교육하면서 여러 학자들의 일고(逸稿)를 수집하여 정리하다가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성품이 근면하면서도 질직돈후(質直敦厚 : 질박 정직하면서 성품이 너그러움)하였고, 고려 말에는 제고에 기여하였으며, 조선개국 초에는 유학진흥과 의례의 정비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권근 ( 權近 )과 교우가 깊었다.

 

민유의(閔由誼)

유의(由誼)는 판서(判書)를 지냈다.

 

민종유(閔宗儒)

태자 소보(太子小保) 공규(公珪)의 증손 종유(宗儒)는 충렬왕 때삼사우윤(三司右尹)을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했고 충혜왕 때 대제학과 지춘추관사(知春秋館使)를 지냈으며 전고에 밝아 명망이 높았다.

 

민사평(閔思平)

1295(충렬왕 21) 1359(공민왕 8). 고려 후기의 문신. 자는 탄부(坦夫), 호는 급암(及庵). 찬성사 적( 使 )의 아들이며, 정승 김륜 ( 金倫 )의 사위이다. 어려서부터 재능과 도량이 있었다.

학문이 일취월장하여 산원 · 별장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 예문춘추관수찬(藝文春秋館修撰)을 거쳐 예문응교(藝文應敎) · 성균대사성이 되고, 1344(충혜왕 5) 감찰대부(監察大夫)를 역임한 뒤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졌다.

충정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갔던 공으로 충정왕이 즉위한 1348년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가 되었으며, 그 뒤 수성병의협찬공신(輸誠秉義協贊功臣)의 호가 주어졌고, 찬성사상의회의도감사(贊成事商議會議都監事)에 이르렀다.

성품이 온아하며 친척들과 화목하고 교유를 잘 하였으며, 관직에 있을 때도 일을 처리하는 데 모나지 않았다. 시서를 즐기고 학문에 열중하여 당시 이제현 ( 李齊賢 ) · 정자후(鄭子厚) 등과 함께 문명(文名)이 높았다. 동문선 東文選 에 그의 시 9수가 전한다. 저서로는 급암집 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민제(閔霽)

1339(충숙왕 복위 8) 1408(태종 8).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중회(仲晦), 호는 어은(漁隱). 여흥 출신. 할아버지는 적( 使 )이고, 아버지는 변( )이다. 사위가 태종이다.

1357(공민왕 7) 문과에 급제, 국자직학(國子直學)에 보직되었고,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 · 전리정랑지제교(典理正郎知製敎) · 성균사예(成均司藝) · 전교부령(典校副令) 등을 역임하였다.

우왕 때 지춘주사(知春州事)로 나가서는 은혜로운 정사를 베풀었다. 다시 판소부시사(判小府寺事) · 예의판서(禮儀判書) 등을 역임했고, 창왕 때 개성윤(開城尹) · 상의밀직사사(商議密直司事)를 지냈다. 1389(공양왕 1)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역임했으며, 예조판서에 이어 한양부윤(漢陽府尹) 등을 지냈다.

1392(태조 1) 조선이 개국되자 정당문학 ( 政堂文學 )이 되고, 이어 예문춘추관태학사(藝文春秋館太學士)에 올랐다. 1394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유원지(柳源之)와 함께 명나라에 가서 연정(年正)을 하례(賀禮)하였다. 이듬 해 여흥백(驪興伯)에 봉해졌으며, 영예조사(領禮曹事)에 올랐다. 1399(정종 1) 지공거 ( 知貢擧 )가 되어 김반 ( 金泮 ) 33인을 선발하였다.

1400년 판삼사사(判三司事)에서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으로 임명되었으며, 곧 좌정승에 올랐다. 이듬 해 순충동덕보조찬화공신(純忠同德輔祚贊化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여흥백에서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으로 개봉되었다. 1402(태종 2) 이지직(李之直) · 전가식(田可植) 등이 순군옥 ( 巡軍獄 )에 관련되자 그 뒤로는 문생들을 만나보지 않았으며, 같은해 인사 문제로 탄핵을 받았다.

1406년 태종이 세자 지()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할 때 하륜 ( 河崙 ) · 조영무 ( 趙英茂 ) · 이숙번 ( 李叔蕃 ) 등과 함께 옳지 못함을 주장하였다. 이듬 해 명나라와 세자간의 혼사 문제로 하륜 · 조영무 등과 함께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장인이자 태종의 잠저시 사부였던 관계로 왕의 비호를 받아 무사하였다.

1407년 하륜이 좌정승, 조영무가 우정승이 되자 하륜과 아들인 무구 · 무질(無疾) 등에 대한 탄핵 상소가 잇따랐으나 태종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이어 무구 · 무질 형제가 붕당을 지어 세자를 끼고 집권을 도모한다는 탄핵이 있었으나 그의 공덕으로 두 아들이 무사하였다.

이듬 해 검교찬성사(檢校贊成事) 조호 ( 趙瑚 ), 전 총제(摠制) 김첨 ( 金瞻 ) · 허응(許應) 등과 붕당을 지어 난을 도모하고 있다는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성품이 평소 온후하고 청렴해 사치를 즐기지 않았던 관계로 태종으로부터 신임이 두터웠기 때문에 성명 ( 性命 )을 온전히 보존하였다.

그 해 병으로 눕게 되자 유배지에 가 있는 무구 · 무질 형제를 사간들의 여러 차례 반대 상소에도 불구하고 문병차 불렀으며, 자리에 누운 지 6일만에 병사하였다.

그는 태종의 잠저시에는 항상 선달 ( 先達 ) ’ 이라 일컬어졌고, 태종은 그를 사부(師傅) ’ 라 부를 정도로 가까웠다. 그가 사건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거나 자식들이 죄를 지었는데도 큰 화를 입지 않은 것은 태종으로부터의 두터운 신임과 왕의 장인이라는 위치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는 하륜 · 이무 ( 李茂 ) · 조호 등과 뜻을 같이하는 사이였으며, 문생에는 전가식 · 조서 ( 趙敍 ) · 이공의(李公義) · 옥고 ( 玉沽 ) 등이 있다. 젊어서부터 예절을 잘 알아 추부(樞府)에 올라서는 항상 예조(禮曹)를 겸했고, 국가의 전례(典禮)를 모두 자세하게 정하고 예문(禮文)을 세웠다.

또한, 복색을 정하고, 이단(異端)과 음사(淫祀)를 싫어해 강력히 배척했고, 불사(佛事)를 줄일 것을 청해 춘추장경(春秋藏經) 외는 모두 없앨 것을 주장하였다. 타고난 자질은 어질고 검소하였다. 경사(經史)에 밝았으며, 특히 사학 ( 史學 )을 잘했고, 시평(詩評)도 잘하였다.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민개(閔開)

1360(공민왕 9) 1396(태조 5).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아버지는 전리판서(典理判書) ( )이다.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여 1390(공양왕 2)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 지신사 ( 知申事 ) · 밀직부사를 거쳐, 이듬해 하정사 ( 賀正使 )의 일행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대사헌을 겸임하면서 조준 ( 趙浚 ) · 정도전 ( 鄭道傳 ) 등이 이성계 ( 李成桂 )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자 혼자 동의하지 않았다. 남은 ( 南誾 )이 조준 등에 이르기를 그를 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조준이 제지하여 살아났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대사헌으로서 왕씨(王氏)들의 외방분거(外方分居)를 주장하고, 이듬해 경상도관찰출척사로 나가 이지현(梨旨縣) 등 일부지역에 대한 행정구역의 재조정을 건의하였다.

총명하고 강개한 뜻을 지녔고, 관찰사로 있을 때는 자신의 몸에 대하여 지나칠 정도로 무관심하여 병을 얻었다. 이로 인하여 태조는 관찰사에게 하루에 사시진찬(四時進饌)하도록 하명하고 이를 항식(恒式)으로 삼도록 하였다.

 

민불탐

둘째 아들 불탐이 세종 때 등과하여 경상도 감사와 이조 참판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어 명성을 얻었다.

 

민신(閔伸)

1453(단종 1). 조선 전기의 문신. 호는 돈암(遯菴). 문종 때 병조판서를 지내고 1453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김종서 ( 金宗瑞 ) 등과 함께 어린 임금 단종을 보호하기 위하여 애쓰다가, 왕위를 엿보고 있던 수양대군 ( 首陽大君 ) 일파의 적이 되었다.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그를 부사 ( 副使 )로 지목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따라가지 않았다. 그해 10월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기 위하여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등을 죽일 때, 수양대군의 심복인 정수충 ( 鄭守忠 )에 의하여, 일찍이 남몰래 안평대군과 사귀었으므로 앞으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사람으로 혐의를 받았다.

수양대군의 명을 받은 삼군진무(三軍鎭撫) 서조(徐遭)에 의하여 현릉(顯陵 : 문종의 능) 비역(碑役)을 감독하던 중 참살되었다. 정조 때 관작이 회복, 신원되었다. 삼중신(三重臣)이라는 예칭(譽稱)으로 불린다. 공주 동학사에 있는 숙모전(肅慕殿)과 장릉 ( 莊陵 ) 충신각(忠臣閣)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민제인(閔齊仁)

1493(성종 24) 1549(명종 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희중(希仲), 호는 입암(立巖). 충원( 食 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간 수()이고, 아버지는 전적 ( 典籍 ) 구손(龜孫)이며, 어머니는 김효진(金效震)의 딸이다.

1520(중종 15)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호당 ( 湖堂 )에서 독서하다가 이듬 해 승정원주서로 탁용되었다. 그러나 이 때 척간유생도기 擲奸儒生到記 를 가필했다고 해서 탄핵을 받아 잠시 물러났다.

김안로 ( 金安老 )가 물려난 1525년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 다시 등용되어 사필(史筆)에 종사하였다. 1528년 사간원정언을 거쳐, 1531년 이조정랑에 올랐다. 이어서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했으며, 이 때 문신 제술시(文臣製述試)에서 수석을 차지하였다.

1536년 호조참의를 거쳐 홍문관부제학 · 사간원대사간을 역임하고, 1538년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었다. 이 때 국왕의 명을 받아 구언전지 求言傳旨 를 지어 올렸다. 승정원에서 3년 봉직한 뒤, 1541년 외직으로 나가 평안도관찰사가 되었고, 이어서 사헌부대사헌 · 형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중종이 죽자, 고부청시청승습사(告訃請諡請承襲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인종 때 사헌부대사헌을 다시 역임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자 호조판서가 되어 윤원형 ( 尹元衡 )에게 의부해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 ( 尹任 ) 등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그리하여 추성위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弘齊保翼功臣) 2등에 책록되고 여원군(驪原君)에 봉해졌다. 이어서 병조판서 ·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우찬성을 거쳐 1547(명종 2) 좌찬성에 올라 진휼사(賑恤使)를 겸임하며 민심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1548년 윤원형 일당은 을사사화를 은폐시키고자 당시 시정기(時政記)의 집필자인 안명세 ( 安名世 )를 죽이고 시정기를 고치려 하였다. 이에 그 불가함을 역설하다가 간당(奸堂)들에게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이어 다시 대사간 진복창 ( 陳復昌 ) 등의 탄핵으로 녹훈이 삭제되고 공주로 귀양갔다.

적소에서 을사사화에 참여해 많은 선비들에게 화를 입힌 것을 후회하고 지내다가 죽었다. 문장과 역사에 능통했으며, 저술로는 입암집 6권이 있다.

 

민기(閔箕)

1504(연산군 10) 1568(선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경열(景說), 호는 관물재(觀物齋) · 호학재(好學齋). 할아버지는 형조참의 효손(孝孫)이고, 아버지는 현령 세류(世瑠)이며, 어머니는 장령 이인석 ( 李仁錫 )의 딸이다. 김안국 ( 金安國 )의 문인이다.

1531(중종 26) 생원시에 합격하고 1539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을 거쳐 이듬해 홍문관저작이 되었다. 그리고 춘추관편수관 겸 군기시첨정으로 중종실록 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45(명종 즉위년) 부교리 · 검상 ( 檢詳 ) · 사인 ( 舍人 )이 되어 권신 이기(李 咬 ) · 정순붕 ( 鄭順朋 ) 등의 전횡을 논척하였다. 다음해 부장령 · 홍문관부교리 · 시독관 ( 侍讀官 )이 되어 나라의 인재 등용문인 과거 시험에서 시관의 채점량이 너무 많음을 지적, 올바른 인재 등용을 위해서는 시관의 수를 증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뒤 홍문관응교 · 사도시첨정(司 歸 寺僉正) · 군기시정(軍器寺正)을 역임하고, 1548년 어사가 되어 경상도 지방의 수령을 규찰하였다. 특히 상주 지방의 가혹한 군포 징수를 시정하였다. 1549년 홍문관직제학 · 동부승지 · 우부승지 · 좌부승지 · 공조참의를 지내고 대사성이 되었다.

1552년 동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공조참판 · 대사간 · 용양위대호군(龍 蚊 衛大護軍) · 대사헌 · 대사성을 역임하였다. 1561년 청홍도관찰사(淸洪道觀察使)가 되었으며, 1563년 권신 이량 ( 李樑 )의 일당을 탄핵하는 데 앞장섰다. 같은 해 예조참판 · 홍문관부제학 · 이조참판 · 한성부판윤을 거쳐 1566년 이조판서로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이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 우참찬을 거쳐, 1567(선조 즉위년) 우의정에 올라 척신인 윤원형 ( 尹元衡 ) · 이량의 여당을 다스리다가 재직중 죽었다. 당대의 문장가로서 이름이 높았다. 저서로는 석담야사 石潭野史 · 대학도 大學圖 가 있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민순(閔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역리(易理)를 공부했던 순(:대제학 유의 6대손)은 주정설(主靜說)을 생활을 철학으로 삼아 개성있는 일생을 살았다.

 

민광훈(閔光勳)

1595(선조 28)1659(효종 1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중집(仲集). 사용(思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흥고영 여건(汝健)이고, 아버지는 부윤 기()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이다. 1616(광해군 8) 진사에 합격하고 인조 초 음보(蔭補)로 별검 ( 別檢 )이 되어 출사하였다.

1628(인조 6) 알성문과에 장원한 뒤, 정언과 지평 등을 거쳐 1635년 홍문관에 등용되고, 1644년 교리, 이듬해 사간, 1649(효종 즉위년) 통정(通政)으로 승진하여 사복시정(司僕寺正)과 안변부사를 거쳐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1652년 승지에 오르고, 이듬해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재변을 보고하지 않은 죄로 삭직되었다.

1656년 다시 복직되어 병조와 공조의 참의를 지냈다. 그는 성색(聲色)을 멀리하였고 치가에는 법도가 있었으며, 관직에 나아가서는 현명한 관리라는 평을 들었다. 그가 안변부사로 있을 때, 가난한 부민을 돕기 위하여 많은 비용을 아껴서 의창 ( 義倉 )을 설치하여 부민의 생활을 도와준 사실이 있다.

병자호란 때는 청군이 몽고병과 함께 강화도에 침입하자 그는 강화도의 수비가 허술하여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종묘서영(宗廟署令)으로 송국택 ( 宋國澤 )과 함께 그곳에 피신중이던 원손(元孫)을 데리고 죽음을 각오하고 바다를 건너 교동 ( 喬桐 )을 거쳐 인근 섬으로 피신하여 무사하였다. 난이 그친 뒤 원손을 호위한 공으로 통정으로 승진하여 호조참의가 되었다.

 

민정중(閔鼎重)

거유(巨儒)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정중(鼎重)은 인조 때 장원으로 등과하여 주요 관직을 역임한 후 참찬의정부사를 지냈으나 숙종이 즉위하자 남인의 득세로 장흥부에 유배되었다가 경신대출적으로 풀려나와 좌의정에 올랐다.

 

민유중(閔維重)

1630(인조 8) 1687(숙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지숙(持叔), 호는 둔촌 ( 屯村 ). 여준(汝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기()이고, 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 광훈(光勳)이며, 어머니는 이조판서 이광정 ( 李光庭 )의 딸이다. 숙종의 비 인현왕후 ( 仁顯王后 )의 아버지이다. 대사헌 기중(蓍重)과 좌의정 정중(鼎重)의 동생이다.

1649(효종 즉위년) 진사가 되고, 1651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이어 대교 · 봉교 · 세자시강원설서 · 성균관전적을 거쳐 사헌부감찰 · 예조좌랑 · 병조좌랑을 지내다가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상을 마친 뒤 사간원정언과 세자시강원사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1656년 병조정랑이 되었다.

그 뒤 사헌부지평 · 사간원정언 등을 지내면서 대신들과 시폐(時弊)를 놓고 다툰 끝에 조정에서 물러났다가 이듬해 함경도 경성판관으로 나갔다. 이때 선정을 베풀어 7개 고을의 주민이 송덕비를 세웠다. 이듬해 중앙에 돌아와 예조정랑이 되었다가 1662(현종 3) 잠시 여주로 물러나 앉기까지 홍문관부교리 · 교리, 사간원헌납 · 경상우도염찰사 · 이조정랑 · 성균관직강 등을 지냈다.

1663년 이후 이조정랑 · 홍문관교리 · 응교 · 사간원사간 · 사헌부집의 · 제용감정(濟用監正) · 사도시정(司 歸 寺正) · 의정부사인 등을 두루 역임하다가, 1665년 전라도관찰사로 발탁되어 당상관에 올랐다. 그러나 몇 달만에 다시 중추부첨지사가 되어 내직으로 들고, 이어 장례원판결사 · 사간원대사간 · 승정원승지 · 이조참의 등을 지내다가 병조판서 김좌명 ( 金佐明 )과 다툰 끝에 벼슬을 버리고 광주에 은거하였다.

이듬해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다시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그리고 1671년부터 형조판서 · 대사헌 · 의정부우참찬 · 한성부판윤 · 호조판서 겸 총융사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숙종이 즉위하면서 남인 ( 南人 )이 집권하자, 벼슬을 내놓고 충주에 내려가 지내다가 끝내 흥해 ( 興海 )로 유배되었다.

그 뒤 1680(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다시 조정에 들어와 공조판서 · 호조판서 겸 선혜청당상 ·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며 서인 정권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3월 국구(國舅)가 되자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에 봉해지고, 이어 돈녕부영사(敦寧府領事)가 되었다. 이듬해 금위영 ( 禁衛營 )의 창설을 주도하여 병권과 재정권을 모두 관장하였다. 이 후 점차 외척으로서 정권을 오로지 한다는 비난이 일어 관직에서 물러나 두문불출하다가 죽었다.

여주 섬락리에 안장되고, 효종의 묘정과 장흥 연곡서원 ( 淵谷書院 ), 벽동 구봉서원(九峯書院)에 배향되었다. 경서에 밝았으며, 민문정유집 閔文貞遺集 1010책이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민진장(閔鎭長)

진장(鎭長)은 형조와 호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고, 효성이 지극하여 정문이 내려졌다.

 

민진원(閔鎭遠)

1664(현종 5)1736(영조 12).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巖세심(洗心).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의 광훈(光勳)이고, 아버지는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유중(維重)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좌찬성 송준길 ( 宋浚吉 )의 딸이다. 숙종비 인현왕후 ( 仁顯王后 )의 오빠이자 우참찬 진후(鎭厚)의 동생이다. 송시열 ( 宋時烈 )의 문인이다.

1691(숙종 17)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으나, 1689년의 기사환국 이후 인현왕후가 유폐되고 노론 일파가 크게 탄압을 받던 때여서 등용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694년 갑술옥사로 장희빈(張嬉嬪)이 강봉(降封)되고 인현왕후가 복위되어 노론이 집권하자 이듬 해 예문관검열로 기용되었다.

1696년 세자시강원 겸설서(世子侍講院兼說書)가 된 뒤 사서에 올랐으나 척신(戚臣)이라는 이유로 면직되었다. 이어 이듬 해 이광좌 ( 李光佐 ) 등과 함께 홍문록 ( 弘文錄 )에 뽑히고 수찬 ( 修撰 )에 재등용되었으며, 그 해 중시 ( 重試 )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98년 병조좌랑이 된 뒤 사헌부의 지평·부수찬 등을 역임하고 1701년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이어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다.

1703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을 때, 서원 남설(濫設)이 지방 재정을 한층 곤궁하게 하며 당쟁을 더욱 치열하게 하는 것을 보고, 서원 건립을 억제하고 수를 줄일 것을 상소하였다. 1705년 공조참의가 되고 장희빈사건으로 부처(付處)된 남구만 ( 南九萬 )의 감형을 상소해 이를 실현시켰다. 이듬 해 강화부유수를 지내고 이어 평안도관찰사를 지내던 중 1712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15년 대사성으로 있으면서 가례원류 家禮源流의 간행을 둘러싸고 노론·소론간에 당론이 치열해지자 노론 정호 ( 鄭澔 )를 두둔하다가 파직,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 그러나 이듬 해 노론이 득세하자 다시 등용되어 평안도의 시관 ( 試官 )이 되었고, 1718년 예조판서가 되어 양전구관당상(量田勾管堂上)을 겸하였다. 그 해 주청사 ( 奏請使 )로 다시 연경(燕京)에 다녀왔고, 이듬 해 강화구관당상(江華勾管堂上)을 역임하였다.

이조판서·호조판서에 이어 1721(경종 1) 공조판서로 있으면서 실록청총재관(實錄廳總裁管)을 겸해 숙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또한 왕세제(王世弟 : 후의 영조)의 대리청정을 건의해 실현하게 하는 등 정계의 중심적 구실을 하였다.

이듬 해 신임사화로 노론이 실각하매 성주(星州)로 유배되었다가, 1724년 영조의 즉위와 더불어 노론이 집권하자 풀려나 우의정에 올랐다. 이어서 실록청총재관으로 경종실록편찬을 주관하였다.

1725(영조 1) 영조의 탕평책에 따라 소론의 영수인 좌의정 유봉휘 ( 柳鳳輝 )를 신임사화를 일으킨 주동자로 탄핵, 유배시켰으며, 송시열의 증직 ( 贈職 )을 상소하고 그 해에 좌의정이 되었다. 이듬 해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가 되었으나, 1727년 당색이 강한 자를 제거해 탕평하려는 영조의 정책으로 정미환국이 일어나자 파직되어 순안 ( 順安 )에 안치되었다가 이듬 해 풀려났다.

1729년 중추부판사가 되어 가족제복론 加足帝腹論을 찬진(撰進)하였다. 그 뒤 당쟁을 종식시키려는 영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소론과 타협하지 않고 소론을 배격하는 노론의 선봉장으로 활약하였다. 1730년 기로소에 들고 1733년 봉조하 ( 奉朝賀 )가 되었다.

특히, 글씨를 잘 쓰고 문장에 능해 강릉의 송담서원비(松潭書院碑), 선산의 고려예의판서농암선생신도비(高麗禮儀判書籠巖先生神道碑), 여주의 여양부원군민유중신도비전액(驪陽府院君閔維重神道碑篆額) 등을 썼다.

저서로는 단암주의 丹巖奏議·연행록 燕行錄·단암만록 丹巖漫錄·민문충공주의 閔文忠公奏議등이 전한다.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민백상(閔百祥), 민응수(閔應洙)

이조 판서 진주의 아들 응수(應洙)와 좌의정 진원(鎭遠)의 손자 백상(百祥)도 우의정을 역임하여 명문의 지위를 굳혔다.

 

민치구(閔致九)

첨지중추부사 단현(端顯)의 아들 치구(致九)는 흥선대원군의 장인이 되어 고종이 즉위하자 공조 판서를거쳐 판돈령부사에 이르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민치록(閔致祿)

1799(정조 23)1858(철종 9). 조선 말기의 척신(戚臣).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 ( 明成皇后 )의 아버지이다. 자는 원덕(元德), 호는 서하(棲霞).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 ( 仁顯王后 )의 아버지 유중(維重)5대손이다.

민비는 치록의 재취인 좌찬성 이규년(李奎年)의 딸인 한산이씨(韓山李氏, 뒤에 韓昌府夫人으로 추봉)와의 사이에 태어난 13녀 가운데 한 딸이었는데 형제들이 모두 요절하여 무남독녀로 자랐다.

1826(순조 26) 문음 ( 門蔭 )으로 장릉참봉(章陵參奉)이 되었고, 그뒤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를 두루 거친 뒤 과천현감·임피현령(臨陂縣令) 등 지방수령으로 나가 활동하였다.

다시 상경하여 조지서별감(造紙署別監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을 역임하고 다시 덕천군수(德川郡守)로 지방행정을 맡았다. 1855(철종 6) 선혜청낭청(宣惠廳郎廳)을 맡았고, 1857년 영주군수의 일을 맡아보았다.

그의 딸이 고종비로 입궁한 것은 그가 사망한 지 9년 뒤인 1866(고종 3)의 일이다. 그뒤 영의정으로 추서되고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으로 봉작되었다. 승호(升鎬)가 입양되어 그의 가계를 이었다. 시호는 순간(純簡)이다.

 

민승호(閔升鎬)

치록의 아들 승호(升鎬)가 여동생 명성왕후를 도아 국정 전반에 참여하여 민씨 일족의 거두로서 세도가 등등했다.

 

민겸호

겸호는 고종 때 판돈평부사를 지내고 정치제도의 개혁 후에 선혜청 당상관에 올라 영의정에 오른 규호(奎鎬)와 함께 명성을 떨쳤다.

 

민영환(閔泳煥)

1861(철종 12) 1905.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 서울 출신. 호조 판서 겸호(謙鎬)의 아들이다. 1877(고종 14) 동몽교관 ( 童蒙敎官 )이 되었으며, 이듬해 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 정자 ( 正字 ) · 검열 · 설서 ( 說書 ) · 수찬 ( 修撰 ) · 검상 ( 檢詳 ) · 사인 ( 舍人 ) 등을 역임하였다.

1881년 동부승지, 이듬해 성균관 대사성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이해 6월 군제 개혁으로 인한 구식군대의 불만과 대원군의 재집권욕 등이 복합적으로 이뤄져 1882년 폭발한 임오군란의 발발로 아버지 겸호가 살해되자 사직하였다.

1884년 이조 참의에 임명된 뒤 도승지 · 전환국 총판(典 珤 局總辦) · 홍문관 부제학 · 이조 참판 · 내무 협판 · 개성 유수 · 해방 총관(海防總管) · 친군연해 방어사(親軍沿海防禦使) · 한성 우윤(漢城右尹) · 기기국 총판(機器局總辦) 등을 역임하였다.

1887년 상리국 총판(商理局總辦) · 친군전영사(親軍前營使) · 호조 판서가 되었다. 그리고 1888년과 1890년 두 차례 병조 판서를 역임하였고, 1893년 형조 판서 · 한성 부윤, 1894년 독판 내무부사 · 형조 판서가 되었으며, 18958월 주미 전권대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일제는 한국에서의 세력 우위를 점하고자 1894년 도발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청나라의 요동반도(遼東半島)를 점유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독일 · 프랑스와 연합하여 삼국간섭으로 뜻이 좌절되면서 조선에서 일본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에 일제는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1885년 명성황후 ( 明成皇后 )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그는 주미전권대사에 부임하지 않고 고향에 내려갔으며, 때때로 입궐하여 고종에게 간언을 올렸다.

18964월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특명 전권공사로 임명되어 윤치호 ( 尹致昊 ) · 김득련(金得鍊) · 김도일(金道一) 등을 대동하고 참석하였다. 이때 인천을 떠나 상해(上海) · 나가사키(長崎) · 동경 ( 東京 ) · 캐나다 · 뉴욕 · 런던 · 네덜란드 · 독일 · 폴란드를 지나 모스크바에 여장을 풀었고,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이해 10월 하순 귀국하였다.

그 뒤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 · 군부대신을 역임하였다. 18971월 영국 · 독일 · 러시아 · 프랑스 · 이탈리아 · 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 전권공사가 되었으며, 영국 여왕의 즉위 60년 축하식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귀국하던 중 손병균(孫炳均) · 김병옥(金秉玉) 등을 대동하고 러시아에 들러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고 각국 외교 사절을 예방하였다.

이와 같이 두 차례에 걸친 해외 여행으로 각국 특히 구미제국의 발전된 문물 제도와 근대화 모습을 직접 체험하였다. 귀국 후 독립협회의 취지에 찬동, 이를 극력 후원하게 된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독립협회의 핵심인 정교 ( 鄭喬 )는 지금 정부 요인 중 국민이 신임할 수 있는 인물은 한규설 ( 韓圭卨 )과 민영환밖에 없므으로 민영환을 군부 대신과 경무사에 임명하면 민심이 수습될 것이라고 고종에게 상주까지 하였다.

1898년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내부 대신 겸 군부 대신을 지냈으나, 어용 단체인 황국협회 ( 皇國協會 )의 지탄과 공격을 받아 한때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하였다. 그 뒤 다시 참정 대신 · 탁지부 대신에 임명되었고, 그의 건의에 의하여 설치된 원수부 ( 元帥府 )의 회계국 총장(會計局總長) · 장례원경(掌禮院卿) · 표훈원총재(表勳院總裁) · 헌병사령관을 등을 역임하였고, 훈일등태극장(勳一等太極章) · 대훈위이화장(大勳位李花章)을 받았다.

러일전쟁 후 다시 내부대신 · 군법교정총재(軍法校正總裁) · 학부대신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날로 심해지는 일본의 내정 간섭에 항거하여 친일 내각과 대립하였기 때문에 한직인 시종무관으로 좌천당하였다. 1905년 잠시 참정 대신 · 외무 대신을 역임하였으나, 다시 시종무관으로 밀려난 뒤 외교권 강탈을 우려하여 무장이었던 한규설을 총리 대신으로 추대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5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자, 원임의정대신 조병세 ( 趙秉世 )를 소두(疏頭)로 백관들과 연소(聯疏)를 올려 조약에 찬동한 5적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비답 ( 批答 )이 있기도 전에 일본 헌병에 의해 조병세는 구금되고 백관들이 해산당하자, 자신이 소두가 되어 다시 백관들을 거느리고 두 차례나 상소를 올리고 궁중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이에 일제의 협박에 의한 왕명 거역죄로 구속되어 평리원(平理院 : 재판소)에 가서 대죄한 뒤 풀려났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종로 백목전도가(白木廛都家 : 육의전)에 모여 소청(疏廳)을 설치하고 항쟁할 것을 의론하였으나 국운이 이미 기울어졌음을 깨닫고 죽음으로 항거하여 국민을 각성하게 할 것을 결심, 본가에서 자결하였다.

세통의 유서가 나왔는데, 한통은 국민에게 각성을 요망하는 내용이었고, 다른 한통은 재경 외국사절들에게 일본의 침략을 바로 보고 한국을 구해줄 것을 바라는 내용이었다. 또 다른 한통은 황제에게 올리는 글이었다.

그의 자결 소식이 전해지자, 원임대신 조병세를 비롯한 전참판 홍만식 ( 洪萬植 ), 학부 주사 이상철 ( 李相喆 ), 평양대(平壤隊) 일등병 김봉학(金奉學) 등 많은 인사들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의 인력거꾼도 목숨을 끊어 일제 침략에 항거하였다. 이러한 그의 충절을 기려 나라에서 후하게 예장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대신(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大臣)의 최고 관작이 추증되었으며, 의절의 정문도 세워졌다.

유해는 경기도 용인에 예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으며, 동상은 안국동 로터리에서 와룡동 비원 앞으로 옮겨졌다. 유고 중 대표적인 것으로 해천추범 海天秋帆 · 사구속초 使歐續草 · 천일책 千一策 등이 있고, 그밖에 많은 소() · () 등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민종익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민강

상해임시정부와의 연락을 담당했다.

 

민긍호(閔肯鎬)

의병장으로 강원·충청·경상도를 누비며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민치도(閔致道)

대동단에 가입하여 사재를 털어 임시정부 군자금을 조달.

 

민형식(閔衡植)

신민회 회원으로 민족운동에 참여.

 

민제호(閔濟鎬)

대한민국청년단 재무부장.

 

민필호(閔弼鎬)

중국정부와 협의하여 무장 경위대를 조직하고 항일 투쟁에 앞장섰다.

 

閔維重(민유중) 선생의 전설.

기른 딸

조선 숙종 때 민유중이 영광(靈光)으로 부임하는 도중에 대각교를 지나다가 잠시 쉬게 되었다.
그 때 다리를 지나가는 거지 소녀가 있었는데, 의복은 비록 남루하고 허룸하였으나, 그 나이와 용모의 귀여움은 자기의 딸과 비슷하였다. 그래서 민공이 소녀를 불러 물어보니 부모를 사별하고 아무 친척도 없어 의지할 곳 없는 가련한 처지이므로 소녀를 데려다 딸과 함께 기르며 예절과 글을 가르쳤다.

뒤에 민공의 딸이 숙종의 계비로 간택되어 입궁할 때 그녀도 함게 데리고 갔는데, 그녀가 바로 영조의 어머니인 최숙빈이다.
최숙빈은 장희빈(張禧嬪)의 모함으로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가 폐위되었을 때 남모르게 정성을 드리다가 숙종의 총애를 받게 되어 장희빈의 모함을 밝혀 인현왕후를 복위시킴으로써 전날의 은혜에 보답하였다.

 

 

閔鼎重(민정중) 선생의 일화

 

민정중의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峰), 본관은 여흥이며, 많은 명사와 교류하며 많은 사람이 따랐다. 22세에 진사에 오르고 효종 즉위년에 성균관 전적 예조좌랑 세자시강원 사서, 사간원정언, 홍문관수찬 교리를 역임하였다. 호남어사에 임명되었다. 상서하여 소현세 자의 빈의 원을 풀어줄 것을 청하였다.

 

국인이 모두 애통해마지 않았으나 감히 진언하는자 없었는데 정중히 홀로 논하니 군인 모두 놀랐다. 현종 때에는 사간원 대사간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이, 공조, 호조, 형조의 4판서에 오르고 참찬(參贊), 의정부에 오르고 숙종 즉위의 다음해 숭정대부에 가해졌다. 후에 노론, 남인과의 대립에서 여러번 화를 입고 배소에서 졸하였다. 인현왕후는 정중의 제() 유중의 딸이다.

 

정중은 효종 9(1658) 8월에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익년 321일에 예조참의로 전직기까지 약 7개월의 짧은 기간 동래부사에 취임하였으나 부사는 이때 임진왜란이 이미 60, 70년 경과하였지만 부산지역의 임진사적의 민몰(民沒)을 걱정하여 고로를 통하여 사료수집 정리하여 임진유문을 남겼다.

 

그 이전의 우리측의 기록은 단편적이 잘 알 수 없는 차에 이 기록은 사료적 가치가 높아 동래, 부산, 다대포 전쟁의 항쟁사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으며 또한 공신, 멸사, 민의 실태를 알 수 있다. 시호는 문충이라고 한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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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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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민씨는 남한에 총 33, 706가구, 141,32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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