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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박씨(朴)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朴(함양박씨)

 

 

본관(本貫): 함양(咸陽)

시조(始祖): 박언신(朴彦信)

유래(由來):

 

 함양(咸陽)은 경상남도 서부에 위치한 지명임.

 

신라  종성(宗姓)의 후예인 함양 박씨는 경명왕(景明王: 신라 제 54대 왕, 재위기간 : 917 ∼ 924)의 셋째 아들 언신(彦信)이 속함대군(速咸大郡)에 봉해졌으므로 문호(門戶)가 열리게 되었고, 속함(速咸)이 함양(咸陽)으로 개칭됨에 따라 관향(貫鄕)을 함양으로 삼게 되었다.

그 후 중시조(中始祖) 선(善: 예부 상서를 역임)의 현손(玄孫) 신유가 고려 고종(高宗) 때 김경손(金慶孫)과 더불어 나주(羅州)에서 초적(草賊) 이연년(李延年)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졌고, 슬하에 아들 6형제를 두어 검교군기소감(檢交軍器少監) 지문(之文)을 파조(派祖)로 하는 소감공파(少監公派)와  문원공파(文元公派: 지빈)·함양군파(咸陽君派: 지량)·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지수)·어사공파(御史公派:지온)·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 지영)  등으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박충좌(朴忠左)

1287(충렬왕 13) ∼ 1349(충정왕 1).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화(子華), 호는 치암(恥菴). 지빈(之彬)의 손자이며, 군부총랑(軍薄摠郎)을 지낸 장(莊)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백이정(白 蓬 正)이 원나라에서 주자학을 배우고 돌아왔을 때 이제현 ( 李齊賢 )과 함께 제일 먼저 가르침을 받았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1332년(충숙왕 복위 1)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로 나갔을 때 폐신(嬖臣) 박련(朴連)이 양민을 노예로 삼으려 하는 것을 막다가 그의 참소로 무고를 당하여 해도(海島)로 유배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감찰지평(監察持平)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빙자하여 취임하지 않았으며, 또다시 예문응교(藝文應敎)에 제수되어 경상도 염세(鹽稅)를 감독하게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내서사인 ( 內書舍人 ) · 밀직제학(密直提學) · 개성부윤 등을 거쳐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피봉되었다. 1344년(충혜왕 복위 5)에는 지공거가 되어 동지공거 이천(李 沮 )과 함께 진사를 시취하였다.

충목왕이 즉위하자 양천군(陽川君) 허백 ( 許伯 )과 함께 판전민도감사(判田民都監事)가 되었고, 이어 찬성사에 임명되었다. 이 때 왕에게 ≪ 정관정요 貞觀政要 ≫ 를 시강하여 상을 받았다.

1345년(충목왕 1) 정방 ( 政房 )을 다시 설치할 때 찬성사로 그 제조관(提調官)이 되었으며, 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라 순성보덕협찬공신(純誠輔德協贊功臣)의 호를 받았다. 성품이 온화하고 검약하며 일생 동안 글읽기를 좋아하였다. 예안의 역동서원 ( 易東書院 )에 봉향되었다. 시호는 문제(文齊)이다.

 

박세무(朴世茂)

1487(성종 18) ∼ 1564(명종 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경번(景蕃), 호는 소요당(消遙堂). 할아버지는 신동(信童)이고, 아버지는 성균생원 중검(仲儉)이며, 어머니는 부사 이관식(李寬植)의 딸이다. 1516년(중종 11)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에 들어가 헌납을 거쳐 사관 ( 史官 )이 되어 직필(直筆)로 당시의 세도가인 김안로 ( 金安老 )의 미움을 사게 되어 1539년 마전군수로 좌천되었다가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4년 전적 ( 典籍 ) · 참교 ( 參校 )로 복직되었고, 이듬해 사복시정이 되었다가 안변부사로 나갔으며 그 뒤 내자시정 · 내섬시정 · 군자감정을 역임하였다.

당시 국정을 전단하던 이기(李 咬 )가 불렀을 때 만나보지 않고 ≪ 동몽선습 童蒙先習 ≫ 을 지어 자제들을 가르치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다. 예조판서에 추증되고,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박초(朴礎)

1367(공민왕 16)∼1454(단종 2).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허(子虛), 호는 토헌(土軒). 1391년(공양왕 3) 불교배척 상소문으로 사형을 받게 되었으나 정몽주 ( 鄭夢周 )의 변호로 사면되었다.

1404년(태종 4)에 사헌부좌헌납(司憲府左獻納) 재직중, 전에 선공감승(繕工監丞)으로 있을 때 관용의 철(官鐵)을 사사로이 사용하였다는 사실로 인하여 장형(杖刑 : 태장을 맞는 신체에 대한 형벌)에 처해졌다. 1413년 수군도만호(水軍都萬戶)로 회례사(回禮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고, 그해에 전라도수군도만호 겸 해진군사(全羅道水軍萬戶兼海珍郡事)를 역임하였다.

1417년 제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관물(官物)을 축재하였다는 죄목으로 파직당하였다가 이어 의주목사에 임명되었다. 1418년(태종 8) 병조참의를 거쳐 이듬해 좌군절제사·전라도수군도절제사·경상우도수군처치사(慶尙右道水軍處置使), 1421년 도안무사(都安撫使)를 지내고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를 역임하였다.

1424년 북변에 여진의 침입이 잦으므로 조정에서 경원부(慶源府)를 남쪽으로 옮기려 하자, 이에 반대, 부령(富寧)에 존속하게 함으로써 국토가 축소되지 않게 하였다. 1431년 강계절도사로 재직중 침범해온 야인들과 싸우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직첩(職牒 : 관직 임명 사령장)을 삭탈당하였고, 전옥서유사(典獄署有司)에게 검거되지 않으려 하다 왕의 엄명으로 고신(告身 : 관직에 임명된 자에게 주던 사령장)을 추탈당하였다가 뒤에 복관되었다.

 

박안(朴安)

중추원사(中樞院事) 신(信)의 아들 박안(安)은 창왕(昌王) 때 원수(元帥)로서 대마도(對馬島)에 잡혀 있던 고려인 100여 명을 구출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조선 태종(太宗) 때 경기도 수군도체찰사에 이르렀다.

 

박실(朴實)

∼1431(세종 13).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함양(咸陽). 아버지는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 자안 ( 子安 )이다. 1402년(태종 2) 전농시정(典農寺正)이 되고, 남포진병마사(藍浦鎭兵馬使)·용기사첨절제사(龍騎司僉節制使)를 거쳐 1414년 예조참의(禮曹參議)가 되었는데, 그해 왕의 특명으로 전라도 진포 ( 鎭浦 )로부터 고만량(高巒梁)까지 수로의 험저여부와 황곡포(黃谷浦) 등지의 조운(漕運 : 조세를 운반하던 제도) 가능여부, 그리고 전라도 용안에서 충청도 내포(內浦)로 육운이 쉬운지의 여부를 면밀히 살피고 돌아왔다. 1417년 경상도수군도절제사, 이듬해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중군총제(中軍摠制)를 역임하고, 이어서 대마도정벌에 좌군도절제사로 참가하였다. 정벌에서 돌아와 판홍주목사(判洪州牧使)·우군총제를 역임하고, 1424년(세종 6) 도총제가 되어 그해 하정사 ( 賀正使 )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26년 전라도수군처치사(全羅道水軍處置使)가 되어 서해안에 출몰한 왜선을 격파하고 왜적 17급(級)을 베어, 그 공으로 어의(御衣) 한 벌을 하사받았다. 1428년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본래 그는 학술이나 무예에 뛰어나지 않았으나 참형(斬刑)을 당하게 된 아버지의 구명운동을 극진하게 전개하자 이를 가상하게 여긴 태종이 금려(禁旅 : 近衛兵)로 채용, 벼슬길에 올랐다. 그가 죽자 세종은 2일간 철시를 명하고 치제(致祭)하였다. 시호는 정효(靖孝)이다.

 

박영문(朴永文)

 중종반정(中宗反正)에 큰 공을 세워 정국일등공신(정國一等功臣)으로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봉해짐.

 

박민헌(朴民獻)

명종조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함.

 

박현령(朴玄齡)

현령(玄齡)은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 전투에서 아우 희령(希齡)과 함께  순절하여 가통을 세웠다.

 

박대립(朴大立)

1512(중종 7)∼1584(선조 1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수백(守伯), 호는 무환(無患) 혹은 무위당(無違堂). 신동(信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중검(仲儉)이고, 아버지는 돈녕부정(敦寧府正) 세영(世榮)이며, 어머니는 사정 김한우(金漢佑)의 딸이다.

이황 ( 李滉 )의 문인으로 1540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양주교수(楊州敎授)·봉상시참봉(奉常寺參奉)을 거쳐 형조좌랑에 승진하였다. 이 때 정실관계로 수십년 묵은 송사(訟事)를 판서에게 항변하여 종결지음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영의정 심연원 ( 沈連源 )의 추천으로 지평 ( 持平 )이 되었고, 1567년(선조 즉위년) 동지사 ( 冬至使 )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부제학이 되었다. 그 뒤 대사간·함경도관찰사·대사헌· 동지경연사 ( 同知經筵事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등을 역임하였다.

1579년 이조참판에서 형조판서에 특진, 이조판서·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우참찬·호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고 우찬성이 되었다. 1582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임하였고, 이어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낸 뒤 다시 우찬성을 거쳐 좌찬성이 되었다.

그는 기품이 장중하고 의지가 확고하였으며, 효도와 우애가 독실하고 가법이 엄정하였다. 또한, 검소하여 청빈하게 살았으나 남을 돕기에 힘썼다.

 

 

박내정(朴乃貞)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공을 세워 분무공신(奮武功臣)에 올랐다.

 

박득겸(朴得謙)

감찰어사(監찰御史)

 

박승운(朴承運)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

 

박종부(朴宗阜)

군수(郡守) 창(敞)의 아들 종부(宗阜)는  인조(仁祖) 때 이조 좌랑(吏曹佐郞)과 헌납(獻納) 등을 거쳐 김제 군수(金提郡守)로 나갔다.

 

박기봉(朴基鳳)

한말(韓末)에 한일합방(韓日合邦) 후 광복운동(光復運動)에 앞장 섰다가  함북 안변(咸北安邊)에서 순절하였다.

 

박기대(朴基大)

학자(學者) 의병장(義兵將)으로 유명했다.

 

박찬희(朴燦熙)

봉천감옥(奉天監獄)에서 순절한 찬희(燦熙)은 <흑도회(黑濤會)>를 조직했다.

 

박열(朴烈)

1902∼1974. 독립운동가. 본관은 함양(咸陽). 초명은 준식(準植) 또는 혁(爀). 경상북도 문경 출신. 함창보통학교(咸昌普通學校)를 졸업한 뒤 1917년 경성제2고등보통학교(京城第二高等普通學校)에 입학,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퇴학당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서 수학하였다.

이무렵 일본의 사회운동가인 오스기(大杉榮)·사카이(堺利彦) 등과 접촉하며 사회주의운동에 투신하였다. 1921년 김판국(金判國)· 김약수 ( 金若水 )· 조봉암 ( 曺奉岩 )· 서상일 ( 徐相日 ) 등 20여 명과 함께 신인연맹(新人聯盟)과 흑양회(黑洋會)를 통합하여 흑도회 ( 黑濤會 )를 창설하여 사회주의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2년 김약수 등 공산주의계열과 분리, 무정부주의자들을 규합하여 풍뢰회(風雷會, 일명 黑友會)를 결성하였으며, 이 단체의 기관지로 ≪흑도 黑濤≫·≪불령선인 不逞鮮人≫·≪현대사회≫ 등을 발간하였다. 1923년 비밀결사인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였다.

9월로 예정된 일본 황태자 결혼식을 기하여 일본 천황을 비롯한 일본 황실요인을 일거에 폭살시키려고 자기의 애인인 가네코(金子文子)와 같이 거사계획을 추진하던 중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가 발생하고 불령사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붙잡혔다. 1926년 대역죄로 일본 대심원에서 사형이 언도되었으나 곧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22년 2개월만에 석방되었다. 1946년 일본거류민단의 전신인 신조선건설동맹(新朝鮮建設同盟)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재일거류민단으로 개편되자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 직후 귀국하여 장학사업에 종사하던 중 6·25 때 납북되었다. 저서로는 ≪신조선혁명론≫이 있다.

 

 

 

朴景陽(박경양)景陽池(경양지)의 유래.

어느 해 광주에 큰 흉년이 들어서 마을사람들이 모두 굶주리게 되었으나, 인색하기 짝이 없는 효천면 김부자는 창고에 곡식을 가득 쌓아두고도 모르는 척했다.

이에 효자 朴景陽(박경양)은 홀어머니가 굶주리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김부자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으나 도리어 김부자에게 매를 맞아 죽고, 그 어머니 또한 아들이 죽은 울분을 가슴에 안고 숨을 거두었다.

그 뒤 김부자는 온갖 재앙을 당하게 되는데, 어느 날 꿈에 朴景陽(박경양)의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김부자가 저지른 온갖 나쁜 짓에 대해 지금까지 재앙을 내렸는데, 그러한 재앙에서 벗어나려면 그 고장 백성들이 가물어도 논에 물을 댈 수 있는 커다란 연못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그래서 김부자는 많은 돈을 드려서 연못을 만들었는데, 그 때 만든 연못이 바로 경양지로, 박경양의 넋을 기려 경양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朴景輔(박경보) 선생의 효행.

 

석류야 석류야 빨리 익어라

 

박 경보(朴景輔)는 조선조 명종 때 사람으로,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그의 아버지 종산(從山)은 영해 일대에 많이 살고 있는 함양 박씨의 입향 시조이다. 원래 성주 땅에 살고 있었으나 청송군 진보 땅을 거쳐 영해에 놀러 왔다가, 영해의 산과 강물이 너무 좋아 나라골(창수면 인량동)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경보는 아버지 종산이 일찍 돌아가신 후 어머니를 모시는 데 정성을 다 하 였으며 좋은 일을 행하면 반드시 어머님의 가르침이라 하고 나쁜 짓은 어머니께서 삼가라 하이더라면서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 이르기까지 어머니의 은덕을 내세웠고, 간혹 어머니가 병환이 나시면 밤잠을 아니 자고 약을 끓 여 드리니 모두가 감탄하였고, 그 효성을 가상히 여긴 당시 영해 부사가 쇠고기와 쌀을 보내면서 치하를 하였다 한다.

 

어머니께서 특히 물고기를 좋아하시므로 정성을 다해 물고기를 구하여 광 속에 넣어 두고 언제나 그것을 드시게 하였고, 얼음이 얼고 눈이 쌓인 추운 겨울날이라도 손수 개울가나 연못가에 나가서 얼음을 깨고 고기를 구하여 항상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경보가 지성으로 어머니를 모시었지만 어머니는 나이가 드시면서 기침을 하기 시작하였고, 그 기침은 좀처럼 낫지 않았으며 온갖 약을 써도 효험이 없었다. 단지 석류즙을 짜서 마시게 하니 효과가 있었으므로, 해마다 좋은 석류를 여러 상자 구하여 갈무리하여 놓고 기침이 심할 때마다 복용하게 하였으나 석류는 오래 보관해 두기가 극히 어려웠다. 생각다 못하여 경보는 석류를 보관하는 상자의 앞면에 정성을 다하여

어머님의 병환에 씀

이라쓰고 뒷면에는

아무리 추워도 얼지 말고 아무리 더워도 썩지 말 것

이라 써 놓고 오래 갈무리되기를 기원도 했던 것이다.

 

그랬더니 이상하게 도 겨울이 가고 봄이 가도 석류는 갓 따온 것처럼 싱싱하게 그 맛과 모양이 변하지 않았다. 과일도 지극한 효심에 감동한 듯하다. 그런데, 한번은 상자 에 넣어 둔 석류가 보이지 않아 그는 매우 실망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석 류를 구할 수 없어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면서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 이튿날 관아에 있는 관속이 석류를 싸 가지고 와서 하는 말이

박 효자께서는 이 걸 받으시오. ”

아니 어찌된 일이오.”

실은 사또께서 더위로 고생하시다가 석류가 좋다 하여 그를 구하지 못하 여 한탄하였더니, 마침 어떤 사람이 이것을 구해 바치므로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약에 쓰려 했더니, 사또의 꿈에 신이 나타나서 석류를 가리키면서 이것은 박 효자가 그의 어머니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준비해 둔 것이니, 다른 사람이 먹으면 안 된다. 즉시 갖다 주어라.’하시므로 이렇게 가지고 왔으니 받아 주시오.”

하면서 그 효성을 온갖 말로 칭찬하고 돌아갔다.

 

그 후 몇 년이 지난 어느 여름, 그렇게 고이 간직하고 한 알 한 알 아끼던 석류는 바닥이 나고 어머니의 기침은 더하기만 하였지만, 한여름이라 석류 꽃이 막 떨어졌으니, 어디에 가서 석류를 구한단 말인가? 생각다 못해 경보는 집앞에 있는 석류나무를 어루만지면서

석류야 석류야 빨리 익어라. 우리 어머님의 기침을 어떻게 한단 말이냐.” 하며 원통하고 억울한 사정을 울먹이면서 며칠을 이렇게 하였더니 이상한 일이 생겼다. 가을에 익어야 할 석류가 하루하루 커지더니 얼마되지 않아 발갛게 익어, 마치 어서 나를 따다가 즙을 내어 어머니의 병환에 써라.’ 는 듯하였다. 경보는 하느님 고맙습니다.”하면서 즙을 내어 약에 쓰니 그 때가 바로 6월 염천이었다. 이야말로 지극한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키고 석류나무를 울리게 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아니 가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되니 통곡을 그치지 아니하였고 하늘을 우러러 몸부림치면서 경보는 3 일간이나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 며, 석 달 동안 미음만 먹고 밥을 입에 대지 않았으니 , 그 애통한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몸이 야위어 모양은 앙상하였지마는 무덤 옆에 풀로 집을 짓고 조석으로 제전을 올리며 어버이 그리움을 호소하면서 3 년을 지냈다. 때로는 큰 비가 내려 홍수가 나기도 하고, 바람이 불어 초막이 날아가기도 하였지마는 술과 고기는 일체 먹지 않으면서 문 밖에조차 나가지 않았다.

 

3 년의 초막 생활을 마치고 마을에 돌아와서도 항상 부모의 은혜를 기렸다 한다. I

효심이 몸에 배어 있는 경보는 일상 생활에도 그대로 나타났으니 이웃에 집이 가난 하여 부모를 섬길 힘이 없는 사람이 있으면 고기와 쌀을 보내어 이를 극진히 봉양하게 하거나 몸소 찾아가 위로를 하기도 했다.

 

1568년 경보가 83 세 때 명종이 돌아가시자, 경보는 부모를 여일 때처럼 슬퍼하면서 늙은 몸을 수레에 싣고 삭망 때마다 한 번도 빠짐없이 관의 곡반에 참석하여 호곡을 하며

아버지와 임금님은 한 몸이요, 하늘과 같은데 어찌 좋은 음식과 고기를 먹을 수 있겠느냐?”

하면서 3 년 동안이나 고기 없는 소찬으로만 밥을 먹었다.

 

이렇게 충효 정신을 실천한 경보는 157186 세로 세상을 떠날 때 아들 형제를 불러 놓고

부모에게 끝까지 효를 다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

하면서 죽어 땅에 묻히어도 어버이 옆에서 부모를 받들게 해 달라고 하고 눈을 감았다.

 

미물인 잉어도, 뱀장어도, 석류도, 하늘도, 땅도 감동한 만고의 효자 박 경보의 그 훌륭한 정신을 우리는 이어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출전영덕군 영덕중학교 김 교사

참고 문헌 咸陽朴氏世孝錄, 盈寧勝覽,

 

 

 

朴矩(박구) 선생의 효행

 

한겨울에 열린 복숭아

 

 

고려 말 나라 안팎이 어수선한 가운데 경북 성주군 선남면 오도동 속칭 오도말에 함양 박씨 문중에서 박 구(朴 矩)는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언제나 자신을 낳아서 길러준 부모에게 은혜를 갚는 일이 인간에게 있어 무엇보다 기본이 되는 윤리 도덕이라는 생각으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 부모를 위하고 즐겁게 해 드리는 일이라면 어떤 고생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각오를 마음 속 깊이 새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뜻하지 않게도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늙으신 홀어머니만을 모시고 그날그날 끼니를 겨우 이으면서 살고 있었다.

가난한 생활 속에서나마 지극한 효성으로 홀어머니를 위하여 온갖 정성을 다 쏟으며 살고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어머니께서 혹시나 조그마한 불편이나 언짢은 일이라도 있을까 주변을 보살피고 돌보면서 늘 즐겁고 편안하게 지내시도록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어머니께서는 무거운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어려운 살림을 무릅쓰고 온갖 약을 구하여 드리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봉양하였으나 애쓴 보람도 없이 병세는 차도가 없이 날이 갈수록 더해가기만 하였다.

하늘도 무심 하구나. ’

그는 안타깝게만 여기었다. 오직 영약을 얻으려는 간절한 마음에 사로잡힌 채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다녔다.

 

추운 겨울 어느 날 하루는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잠시 쉬고 있을 때 지나 가던 이웃 마을 한 노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 노인에게 어머니의 딱한 사정 을 자초지종 자세히 말씀을 드리니 잉어를 잡아다가 그 피를 먹이면 낫는다고 일러 주었다.

 

이 말을 듣고 집에 돌아온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있었다.

때는 몹시 추운 겨울이라 냇물도 얼어붙고 못물도 얼어붙어 잉어를 잡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잉어를 잡을 수 있을까 하는 궁리로 밤을 꼬박 새운 그는 이 튿날 새벽에 일어나 우물에 가서 찬 물로 목욕을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어 마음을 가다듬고 마을 앞에 있는 못둑으로 갔다.

여기서 그는 천지신명에게 잉어 한 마리만 내려 주시도록 두 손 모아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이 때 못 한가운데의 얼음이 갑자기 깨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한 자가 넘는 큰 잉어 한 마리가 불쑥 얼음 위로 솟아올랐다. 이 어찌된 일이냐! 기쁜 마음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그는 얼음 위에 엎드려 천지신명에게 감사의 큰절을 드리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에게 사정 이야기와 함께 잉어 피를 잡수시게 하였더니 많이 회복 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며칠이 지나지 않아 자리에 다시 눕게 되고 이제는 전보다 더욱 심하게 앓게 되어 도저히 살아날 수 없을 만큼 위중하게 되었다. 이를 안타까이 지켜보고 있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얘야, 이제 복숭아나 한 번 먹어 보았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고 하셨다.

 

이 말을 들은 뒤부터 그는 줄곧 복숭아를 구할 생각에 몰두하다 보니 밥먹는 것도 잊고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때는 차가운 바람이 몹시 휘몰이치고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날 어느 밤 이었다. 이 추운 겨울 밤 전처럼 샘물에 가서 목욕을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복숭아 나무 밑에 앉아 정성껏 기도를 드렸다.

어느덧 동이 트고 날이 밝자 찬란한 아침 햇빛이 온통 눈에 덮힌 은빛 세 상을 비춰 주고 있었다.

 

밤을 새워 지극한 효심으로 치성을 드리니 하늘도 감동하였는지 눈으로 덮여져 있던 복숭아 나뭇가지에 분홍색 꽃송이가 피어나더니 곧 꽃잎은 한송이 두 송이 떨어지고 어느 새 보기만 하여도 먹음직스러운 빨갛게 익은 복숭아가 주렁주렁 열리지 않는가!

탐스럽게 익은 복숭아를 따서 어머니에게 드시게 하였으나 아들의 지극한 정성의 보람도 없이 어머니는 며칠 후 허무하게 돌아가셨다.

그는 슬픔을 가누지 못한 채 어머니 산소 옆에 여막을 지어 놓고 3 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 후 세상 사람들은 그 산소가 있는 골짜기를 시묘곡이라 불려 내려오고 있다. 3 년상을 다 마친 그는 열심히 글을 배우고 익혀 과거에 급제하여 가선대부로 예조 참의라는 벼슬까지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조선 중종 임금은 그의 지극한 효성에 감복하여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세상에 널리 알려 모든 사람에게 정신적 표본으 로 삼도록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효성을 높이 받들고 칭찬하여 효자문을 세우게 하고

제문과 예관을 보내어 고을에서 큰 제사를 올리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 효자문은 경북 성주군 선남면 도성동 못둑 마을 어귀에 세워져 있는데 비각은 조선 중종 임금 때에 함양 박씨 문중에서 목조 기와집으로 건립하였 으며 지금까지도 문중에서 긍지로 삼아 잘 관리하고 있다.

 

또한 그 추운 겨울날 지성으로 잉어를 잡았던 못은 논으로 바뀌어져 그 날의 그 효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기만 하나 그윽한 그 효심은 이 고장 후예들의 핏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을 것이니 그 분의 그 효심 영원하리라.

 

출전성주군 성주여자중학교 윤 교사

참고 문헌 鄕土資料誌, 孝烈行誌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52

世(세)

55

慶(경),載(재)

58

喆(철)

53

潤(윤)

56

仁(인),時(시)

59

均(균)

54

章(장)

57

柱(주)

60

商(상)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함양 박씨(咸陽朴氏)는 남한에 총 25,113가구, 103,22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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