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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거제반씨(潘)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潘(거제반씨)

 

 

본관(本貫): 거제(巨濟)

시조(始祖): 반부(潘阜)

유래(由來):

 

반씨(潘氏)는 중국 형양(滎陽:지금의 하남성 개봉도에 속한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로, 주(周)나라 문왕(文王:무왕의 아버지)의 여섯 째 아들 필공(畢公) 고(高)의 아들 계손(季孫)이 반(潘) 땅에 봉해져서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 받은 땅이름을 성(姓)으로 삼았다고 한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이후로 유학자(儒學者)와 재상을 많이 배출하여 명족(名族)으로 일컬어진 반(潘)씨는 송(宋)나라 출신인 반부(潘阜)가 이종(理宗) 때 문과에 장원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내고 몽고정벌(蒙古征伐)을 간청했다.

그런데 간신(奸臣) 가사도(賈似道)가 그를 미워하여 몽고에 사신으로 보내어 은밀히 죽이게 하였으나, 원(元)의 세조(世祖:흘필렬)는 문무를 겸비한 그의 재주를 가상히 여겨 죽이지 않고 벼슬을 내려 부하로 삼으려 하였다.

그는 사양한 후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원재의 딸, 충렬왕비가 됨)를 배종(陪從)하고 동래(東來)하여 고려 원종(元宗)과 충렬왕조(忠烈王朝)에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명장(名將) 김방경(金方慶)을 따라 일본정벌에 공을 세워 시중(侍中)에 오르고 기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65세에 벼슬을 사직하고 거제(巨濟)로 내려가 정사(精舍)를 짓고 여생을 마쳤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반씨(潘氏)의 문호가 열리게 되었으며, 그의 아들 정(挺)과 유항(有抗)을 시작으로 가세(家勢)가 일어나 후손들이 전국 각지에 산거하며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따라 기성(岐城), 충주(忠州), 남평(南平), 결성(結城), 청도(淸道) 홍천(洪川), 광주(光州) 등 17본으로 갈리었으나 모두가 동원(同源)이므로

거제반씨정미대봉보(巨濟潘氏丁未大同譜)에는 거제 반씨로 합보(合譜)하였다.

 

가문의 중요 인물

 

반익순(潘益淳)

∼ 1388(우왕 14).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거제(巨濟). 아들 복해(福海)가 우왕의 신임을 얻어 수양아들이 되자 그로 인하여 1387년 문하평리 ( 門下評理 )를 거쳐 우시중 ( 右侍中 )에 제수되었다.

1388년 염흥방 ( 廉興邦 )이 그의 종 이광 ( 李光 )을 시켜 전밀직부사 조반(趙 獨 )의 토지를 빼앗은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최영 ( 崔瑩 ) · 이성계 ( 李成桂 ) 등이 당시 세력가였던 이인임 ( 李仁任 ) · 염흥방 · 임견미 ( 林堅味 ) 등을 축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복해가 임견미의 도당이므로 이에 연루되어 잡혀 죽임을 당하자, 익순도 연좌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반복해(潘福海)

∼ 1388(우왕 14). 고려 후기의 관인. 본관은 거제(巨濟). 자는 유술(有述), 호는 석암(石庵). 밀직상서(密直尙書)를 지낸 영원(永源)의 손자이며, 우시중을 지낸 익순(益淳)의 아들이다. 부인은 문하시중 임견미 ( 林堅味 )의 딸과 전의시주부(典儀寺注簿) 유분(柳芬)의 딸이다.

일찍이 밀직부사에 임명되었는데 우왕과 함께 서해도 ( 西海道 )에서 사냥을 할 때 왕을 구한 공으로 총애가 날로 깊어져 왕씨 성이 하사되고 우왕의 수양아들이 되었다. 1385년(우왕 11) 왕으로부터 말을 받았으며, 1387년 문하찬성사 ( 門下贊成事 )가 되어 추충양절익대좌명보리공신(推忠亮節翊戴佐命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듬해 조반(趙 獨 )의 옥사 이후 반목이 심해진 최영 ( 崔瑩 )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아버지 익순을 비롯하여 형 덕해(德海), 장인 임견미 등과 함께 모두 참살당하고 아들도 절멸되었으며 가산은 적몰되었다. 그리고 처와 딸은 노비가 되는 등 멸문의 화를 입었다.

이 때 그의 아들 자건(自健)은 원나라에 망명하여 생명을 보전하였는데, 조선개국공신 문하좌시중 배극렴 ( 裵克廉 )의 사위인 연유로 후에 귀국하여 개국원종공신에 책봉되고, 호조판서 · 의정부좌찬성에 이르렀다.

 

반자건(潘自建)

복해의 아들 자건(自建)은 시중(侍中) 배극렴(裵克廉)의 사위로 조선이 개국된 후 태종조(太宗朝)에서 이조 판서(吏曹判書)와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하고 영평군에 봉해졌다.

 

반충(潘忠)

복해의 손자 반충(忠)도 조선 창업에 공을 세워 개국원종좌명일등공신(開國原從佐命一等功臣)로 해양군(海陽君)에 봉해졌다가 광주백(光州伯)에 추봉되었다.

 

반유(潘儒)

세칭 절효선생(節孝先生)으로 불리웠던 반유(儒)는 판도판서(版圖判書) 덕해(德海)의 손자로서 부친상을 당하자 여막(廬幕)에서 3년동안 시묘(侍墓)하여 나라에서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반효손(潘孝孫)

이조 정랑(吏曹正郞) 호(湖)의 손자 효손(孝孫)은 세조(世祖) 때 황주 목사(黃州牧使)와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거쳐 회령 부사(會寧部事)로 나갔다.

 

반우형(潘佑亨)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거제(巨濟). 아버지는 조( 璽 )이다. 1474년(성종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486년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1490년 이래 성균관 관원이 되어 가르치는 데 명성이 있었다. 1493년에 조봉대부 ( 朝奉大夫 )에 올라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다.

그 이듬해에 전국각지의 명산대천에 기도하는 사신으로 뽑혀 양진(楊津)으로 파견되었다. 1495년(연산군 1)에 사간을 거쳐 대사성이 되고, 1504년(연산군 10)에 성균관동지사를 겸하였다. 같은 해에 동지중추부사, 한성부의 좌윤 · 우윤 등에 올랐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정국공신 4등으로 녹권되어 이성군 ( 利城君 )에 책봉되며 대사헌에 발탁되고, 글의 뜻에 밝았으므로 오로지 성균관에서의 가르침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기성군(岐城君)으로 개칭되었다. 1519년(중종 14)에 기묘사화로 유배되었으며, 명종 때에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었다.

 

반석평(潘碩枰)

청렴근엄(淸廉謹嚴)한 관리로 명성을 떨쳤던 석평(碩枰)은 1472년(성종 3) 부사과(副司果) 서린(瑞麟)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조광조(趙光祖)의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중종(中宗) 때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주요 내외직을 두루 역임한 후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반인후(潘仁後)

석평의 손자 인후(仁後)은 선조(宣祖) 때 사마시(司馬試)에 올라 학명(學名)을 떨쳤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조령(鳥嶺:문경 새재)에서 공을 세워, 한산해전(閑山海戰)에서 순절한 중인(仲仁:공조 좌랑 응기의 아들), 중경(仲慶) 형제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반일량(潘日良)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병(淸兵)과 싸우다가 강화(江華)에서 전사한 일량(日良)이 유명했다.

 

반하경(潘夏慶)

∼ 1910. 조선 말기의 순국지사. 고종 때의 내시 ( 內侍 )로서 승전색 ( 承傳色 )을 지내다가, 1905년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에 항의하여 사임하고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에 은거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통분을 누르지 못하여 남몰래 순국할 뜻을 써서 품안에 간직하고 작은아버지를 찾아가 결별을 고하고 돌아오다가 품안에 간직하였던 글을 펼쳐놓고 “ 내시와 외관 ( 外官 )이 천함과 귀함이 다르기는 하지만 나 역시 임금의 은혜를 받아 이미 수십년을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 임금이 하정(下庭)하였으니 내 어찌 감히 따뜻한 방에서 죽을 수 있겠는가. ” 반문하면서 대로에서 할복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潘希彦(반희언)   선생의 전설.

춘천(春川)의 효자문 거리: 춘천시(春川市)

효자 반희언(潘希彦)은 임진왜란 때 용감했던 장군 반처량(潘處良)의 아들로서 희언(希彦)은 1554넌 5월 18일에 춘천 동내 퇴계촌(현재 퇴계동)에서 출생(出生)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5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7살 때는 소학(小學)을 배우고 9살부터는 대학(大學)을 읽었다 그는 소학(小學)에서 맹종(孟宗)의 설상죽순(雪上竹筍)이라던가 왕상의 한빙이어(寒氷鯉魚)의 이야기를 들을 때 깊은 감명을 받았다.

희언(希彦)이 장성해서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고 희언(希彦)의 아버지 반처량(潘處良)장군이 전사했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희언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 하였다. 친지(親知)와 이웃 사람들의 도움으로 선산(先山)에 안장한 그는 그 옆에 묘막(墓幕)을 짓고 그곳에서 3년 대묘(侍墓)를 마치고 돌아오니 홀로되신 어머니의 건강(健康)이 말이 아니었다.

피골(皮骨)이 상접(相接)하여 누워 있었다. 그는 약을 구해 정성껏 다려드리며 완쾌되기를 기도하였으나 어머니의 병세는 악화(惡化)되기만 해 어머니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근심과 걱정으로 나날을 보냈다. 어머니의 병 (病)으로 근심하던 중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대룡산에 가면 시체(屍體) 3구가 있는데 그중 가운데 시체의 목을 고아서 어머니에게 공양하면 어머님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일러주어 그대로 하였더니 어머님의 병이 나았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32

烈(열)

38

培(배)

44

鎔(용)

33

載(재)

39

錦(금)

45

沅(원)

34

錫(석)

40

淳(순)

46

權(권)

35

汶(문)

41

秀(수)

47

昊(호)

36

休(휴)

42

榮(영)

48

 

37

炯(형)

43

奎(규)

49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5,149가구, 21,54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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