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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성배씨(裵)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裵(분성배씨)

 

 

본관(本貫): 분성(盆城): 김해(金海)

시조(始祖): 배원룡(裵元龍)

유래(由來):

 

분성(盆城)은 경상남도 남동부 낙동강(洛東江)의 서안에 위치한 김해(金海)의 고려 때 지명이다.

 

분성 배씨(盆城裵氏)는 고려 창업의 일등원훈(一等元勳) 배현경(裵玄慶:중시조)의 6세손인 원룡(元龍)을 일세조(一世祖)로 받들고 있다.

분성배씨대동보(盆城裵氏大同譜)에 의하면 그는 고려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진 사혁(斯革)의 아들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나 공민왕(恭愍王)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 겸 도원수(都元帥)를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분성군(盆城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그를 일세조로 하고 분성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가문의 중요 인물

 

배서(裵署)

원룡(元龍)의 아들 중 장남 배서(署)가 고려조에서 감무어사(監務禦使)와 전객령(典客令)을 지냈다.

 

배단(裵端)

원룡의 손자 배단(端)은 평장사를 역임하여 세도가문(勢道家門)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배극수(裵克壽)

생원(生員) 윤온(允溫)의 아들 극수(克壽)는 일찍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강진 대곡 평덕리(康津大谷平德里)에 송정정사(松亭精舍)를 세우고 후진양성에 진력하며 거문고와 독서로 여생을 보냈다.

 

배극부(裵克富)

윤검(允儉)의 아들 극부(克富)은 야은(冶隱)길 재(吉 再)와 도의상교(道義相交)하며 학문으로 명성을 떨쳐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의 가통을 세웠다.

 

배문보(裵文甫)

교수(敎授) 상금(尙錦)의 장남인 문보(文甫)는 중종(中宗) 때 고성 군수(高城郡守)를 지내고 청백리(淸白吏)로 명성을 떨쳐 그가 죽자 왕이 제문(祭文)을 내려 공적(功績)을 치하했다.

 

배진

직장(直長) 유 흥(有興)의 아들 진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문장과 필법이 탁월하여 아들 맹후(孟厚)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배맹후(裵孟厚)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재지(載之). 아버지는 진(縉)이다. 1462년(세조 8)에 15세로 생원과에 장원하였으며, 그해 별시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들어갔다. 1464년 대책 ( 對策 )에서 3등으로 뽑혔으며, 1469년(예종 1)에 좌랑 ( 佐郎 )에서 이조정랑(吏曹正郎)이 되었다.

1470년(성종 1) 재행(才行)을 겸비한 자를 뽑아 예문관에 겸관 ( 兼官 )시킬 때 발탁되었으며, 이듬해 경상도경차관(慶尙道敬差官)에 임명되었다. 1472년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명으로 죄를 면하였으며 1474년에 낭청 ( 郎廳 )으로서 국장 ( 國葬 )에 힘쓴 공으로 녹피(鹿皮) 한장을 하사받았다.

이듬해 일본국왕사신선위사(日本國王使臣宣慰使)·일본국통신사(日本國通信使)·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으로 왕으로부터 명주와 사슴가죽으로 만든 신발을 하사받았다. 1479년 호조참의(戶曹參議)가 되었다. 직도(直道)로써 조정에 봉사하였고, 불교를 배척하였다.

 

배중후(裵仲厚)

맹후의 아우 중후(仲厚)는 문장과 도학(道學)으로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다.

 

배숙후(裵叔厚)

숙후(叔厚)는 연산군(燕山君) 때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냈고다.

 

배계후(裵季厚)

계후(季厚)는 경주 판관(慶州判官)과 칠원 현감(漆原縣監)을 거쳐 선산 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배학(裵鶴)

온후한 성품과 지극한 효성으로 영릉 참봉(英陵參奉)에 천거되었던 배학(鶴:용양위 부호군 세즙의 아들)은 벼슬의 뜻을 버리고 노천(老泉) 김 식(金 湜)에게 글을 배웠으며 도천(道泉)에다 별서계구당(別墅戒懼堂)을 세워 성리학(性理學)에 전심하면서 스스로 호(號)을 임천(林泉)이라 하였다.

 

배철중(裵鐵重)

문벌의 가문에 무맥(武脈)을 형성한 철중(鐵重)은 선조(宣祖) 때 무과에 급제하여 아산 현감(牙山縣監)을 거쳐 홍주 영장(洪州營將)을 지내고 손가락을 잘라 모친의 병환에 수혈하여 사림(士林)의 주청으로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배담(裵湛)

병마단련사(兵馬團鍊使)를 지낸 배담(湛)은 청백리(淸白吏)로 명성을 떨쳤다.

 

배영(裵渶)

학행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던 배영(渶)은 가문을 빛냈다.

 

배원우(裵元祐)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의사(義士) 박경전(朴慶傳)과 함께 운문협에서 회맹(會盟)했던 원우(元祐)는 전쟁에 나가 무훈(武勳)을 세워 선 무이등공신(宣武二等功臣)에 책록되었다.

 

배명원(裵明遠)

석학(碩學) 조 식(曹 植)의 고제(高第)인 명원(明遠)은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로 성(城)을 지키다가 순절하여 충의(忠義)의 가맥을 이었자.

 

배형원(裵亨遠)

원종이등공신(原從二等功臣)에 책록됨.

 

배대유(裵大維)

광해군(光海郡) 때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대북(大北)에 가담하여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삭직 당했던 대유(大維)는 문장과 글씨로 명망이 높았다.

 

배응남(裵應男)

군신부자(君臣父子)의 윤리와 오위진결(五衛陳訣)을 공부했던 응남(應男)은 임진왜란에 공을 세워 충의를 자랑했다.

 

배양옥(裵良玉)

사오당(四吾堂) 양옥(良玉)이 문장과 행의(行誼)로 추앙을 받았다.

 

배홍우(裵弘祐)

홍우(弘祐)는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장현광(張顯光)의 휘하에서 의병(義兵)을 모집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절하였다.

 

배동도(裵東度)

죽림(竹林)에 정사(精舍)를 세워 후진 양성에 진력했다.

 

배여경(裵汝慶)

숙종(肅宗) 때 효행으로 동몽교관(童夢敎官)에 임명되었다.

 

배일장(裵一長)

심경보사(心經補辭)를 저술.

 

배동석(裵東奭)

항일투사(抗日鬪士).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분성, 김해 배씨(盆城, 金海裵氏)는 남한에 총 13,202가구, 53,56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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