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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해배씨(裵)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裵(흥해배씨)

 

 

본관(本貫): 흥해(興海)

시조(始祖): 배경분(裵景分)

유래(由來):

 

흥해 배씨(興海裵氏)는 고려조에서 검교장군(檢校將軍)에 오른 경분(景分)을 일세조(一世祖)로 계대(系代)하며, 그의 6세손 전(詮:전리판서 영지의 아들)이 혜왕(忠惠王) 때 호군(護軍)을 거쳐 군부판서(軍簿判書)로 조 적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일등좌명공신(一等佐命功臣)에 책록되고 흥해군(海君)에 봉해졌으므로 흥해를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1764년(영조40)에 편찬된 '갑신합보(甲申合譜)'에는 배씨의 중시조(中始祖)인 현경(玄慶:고려 개국공신)의 6세손 오룡(五龍:시중 사우의 아들)을 파조(派祖)로 기록하고 있는데, 계대 소목(昭穆)이 자세하지 않고 각파의 이론(異論)이 있어 '곡강세첩(曲江世牒)에 밝혀진 바에 따라 경분(景分)을 파조로 상고(箱考)한다.

 

가문의 중요 인물

 

배상도(裵尙度)

일찍이 목은(牧隱) 이 색(李 穡)의 문하에서 학문 연마한 상도(尙度)는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냈다.

 

배둔(裵屯)

상도의 아들 배둔(屯)이 조선 태조(太祖) 때 등과(登科)하여 형조 참의(刑曹參議)와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을 역임했고 슬하게 아들 처눌(處訥:맹산 현감을 역임)과 지눌(止訥)을 두어 대를 이어 가문을 중흥시켰다.

 

배상지(裵尙志)

상도와 함께 목은(牧隱)에게서 글을 배웠던 상지(尙志)는 고려 말에 벼슬이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에 이르렀으나 고려의 국운(國運)이 기울어지자 벼슬을 단념하고 두문동(杜門洞) 두류산(頭流山)에 둔거하다가 안동 금계촌(金溪村)으로 내려가 은거하면서 잣나무(栢)와 대나무(竹)를 심고 호(號)를 백죽당(栢竹堂)이라 하였다.

그 후 조선조에서 수차례에 걸쳐 벼슬을 내리고 그를 불렀으나 끝까지 절의(節義)를 지켰다.

 

배권(裵權)

상지의 아들 배권(權)은 사헌부(司憲府)의 감찰(監察)과 지평(持平)을 지내고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거쳐 봉화(奉化), 횡성(橫城) 등지의 현감을 역임한 후 형조 좌랑(刑曹佐郞)에 올랐다.

 

배환(裵桓)

세종 때 진주목사(晋州牧使)로 치사(致仕).

 

배효숭(裵孝崇)

여흥 부사(驪興部事)를 지내고 원종공신에 올랐다.

 

배효건(裵孝騫)

옥과 현감(玉果縣監)을 지냄.

 

배효사(裵孝思)

세조 때 언양 현감(彦陽縣監)을 역임.

 

배삼익(裵三益)

1534(중종 29)∼1588(선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흥해 ( 興海 ). 자는 여우(汝友), 호는 임연재(臨淵齋). 좌통례 ( 左通禮 ) 이순(以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헌(獻)이고, 아버지는 충좌위부사과(忠佐衛副司果) 천석(天錫)이다. 어머니는 연일 정씨(延日鄭氏)로 세호(世豪)의 딸이다.

안동에서 세거했으며, 이황 ( 李滉 )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 13) 생원이 되고, 156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의 학유 ( 學諭 )·학록(學錄)· 학정 ( 學正 )·박사를 거쳐 호조좌랑이 되었다. 1575년(선조 8)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형조정랑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 외직인 풍기군수와 양양부사를 지내고, 1583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를 지냈다. 뒤에 여러 번 자리를 옮겨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헌납 겸 춘추관기주관(司憲府獻納兼春秋館記注官) 등을 역임하였다.

1585년 겨울, 승정원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이래 상호군 ( 上護軍 )이 되었다. 1587년 진사사(陳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다음 해 황해도에 흉년이 들자, 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황해도관찰사로 구황에 힘쓰다 병이 깊어 사직하고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대성 ( 臺省 )에 있으면서 같은 성씨끼리의 혼인을 금할 것을 주청해 조정에서 한때 찬반론이 격렬해지기도 하였다. 황해도관찰사 시절에는 병든 몸을 위해 올리는 쇠고기를 금육(禁肉)이라 하여 끝내 사양하는 강직함을 보이기도 하였다.

외직에 있으면서 특히 석채(釋菜 : 문묘에서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 석전제) 등의 제사를 지내는 일에 정성을 기울였는데, 그가 지내는 기우제에 곧잘 효험이 나타났었다. 장서가로 후세까지 이름을 남겼으며, 필법이 힘찼다. 저서로 시문집인 ≪임연재선생문집 臨淵齋先生文集≫ 6권이 있다.

 

배삼근(裵三近)

이퇴계(李退溪)의 고제(高弟)로 학문이 숙성했다.

 

배용길(裵龍吉)

1556(명종 11) ∼ 1609(광해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흥해 ( 興海 ). 자는 명서(明瑞), 호는 금역당(琴易堂) 또는 장육당(藏六堂). 생원 헌( 姸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병조참판 천석(天錫)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삼익(三益)이며, 어머니는 영양남씨(英陽南氏)로 신신(藎臣)의 딸이다.

1575년(선조 8)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85년(선조 18)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김해 ( 金垓 )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그의 부장으로 활약하였다. 1594년 세마 ( 洗馬 )의 직을 받고 이어 시직(侍直) · 부솔(副率)을 지내고, 1597년 정유재란 때는 화의에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다.

1602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예문관의 검열과 대교 ( 待敎 ), 1606년 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한 뒤 1608년 충청도도사를 지냈다. 김성일 ( 金誠一 )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이어 유성룡 ( 柳成龍 ) · 조목 ( 趙穆 ) · 남치리(南致利) 등을 사사하였다. 천문 · 지리 · 율력(律曆) · 병전(兵典) · 의약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역리(易理)에 밝았다고 한다. 저서에 ≪ 금역당집 ≫ 이 있다.

 

배경(裵經)

효성으로 이름난 배경(經)은 임진왜란 때 연로한 어머니를 업고 산중으로 피난가다가 돌연 적병을 만나자 어머니를 껴안고 구명(求命)을 애걸하니 그의 효성에 감동한 적의 무리가 안전한 길을 알려주어 모자가 생명을 보전하였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배인길(裵寅吉)

인길(寅吉)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끌고 용궁(龍宮)으로 가던 도중 적의 대부대를 맞아 격전 끝에 공수 백인으로 분전하다가 순절하였는데, 부인 월성 이씨(月城李氏)도 남편을 따라 자결하여 순조(純祖) 때 쌍절각(雙節閣)이 세워졌다.

 

배상현(裵象鉉)

헌종(憲宗) 때 문과에 급제한 상현(象鉉)은 전적(典籍)과 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역임하여 가문의 전통을 지켰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흥해 배씨(興海裵氏)는 남한에 총 4,891가구, 19,82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裵桓(배환)선생의 전설.

도깨비가 정해준 정자터

옛날 안동군 풍산 고을 개평리에 글 읽기를 좋아하고 놀기를 좋아하는 마음씨 좋은 裵桓(배환)이라는 감사 한 분이 살았다.하루는 친구 집에서 여러 선비들과 어울려 시를 읽으며 술을 마시고 놀다가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갈 때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침 강 건너 서쪽 단호리의 기암절벽은 지는 석양을 받아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강둑을 거닐며 풍월을 좋아하는 배감사는 이 좋은 풍경을 배경삼아 시 한 수를 읊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침 술도 거나하게 취한 터라 배감사는 해지는 줄도 모르고 집에 가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밤은 깊어만 가는데 마침 불어오는 시원한 강바람에 깨끗한 백사장을 베개 삼아 배감사는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어느 때인가 시원한 강바람에 산책을 나왔던 도깨비들이 잠이 든 배감사를 보았다. 도깨비들은 배감사가 죽은 줄로만 알고 불쌍하게도 배감사가 죽었다 하며 장사를 지내주기로 하였다.

도깨비들은 배감사를 메고 강물을 건너 가파른 절벽을 오르느라고 정신이 없었다.절벽을 오르던 도깨비들은 힘이 들어 잠시 쉬어가기로 하였다. 그중에 한 도깨비가
[여기가 좋은 묘터가 되겠는걸. 우리 여기서 장사 지내는 게 어때?]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제야 잠에서 깬 배감사는 도깨비들의 이야기를 듣고 너무너무 무서워 어쩔 줄을 몰랐다.그런데 다른 한 도깨비가
[아니야, 여기는 좋은 정자터지, 묘터가 아니야.]하는 것이었다.
그 때까지 죽은 체 듣고만 있던 배감사는 죽을 힘을 다해
[네 이놈들, 뭣 하는 짓들이야? 내가 죽긴 왜 죽어.]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자, 놀란 도깨비들은 정신없이 절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는 소동에 절벽 위에서 집채 같은 커다란 바위가 굴러 떨어져 정자를 짓기에 알맞은 터를 닦아 놓았다.도깨비들에게 좋은 정자 터를 얻은 배감사는 여기에 정자를 짓고 풍월을 읊으며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지금도 안동군 남후면 단호리, 굽이치는 낙동강 가 깎아지른 듯한 단애 아래 낙암정이 자리하고 있다. 바위가 떨어진 자리에 지은 정자라 하여 落巖亭(낙암정)이라 부른다고 한다.

 

裵三益(배삼익)  선생의 전설.

    흘러 쓴 이름 석자.

임연재 배삼익(裵三益)은 퇴계의 제자로 학문이 매우 높은 분이다. 이분에게는 이런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배삼익 선생이 과거에 응시를 했는데 시험을 달 치렀는데도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 외로 낙방하여 실망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기가 과거에 떨어졌다는 것이 믿어지질 않았다.
스승인 퇴계 선생을 뵈올 낯이 없어 문을 닫아걸고 두문불출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한양에서 손님이 찾아왔다.

<여봐라! 이리 오너라.> 꽤나 점잖은 분의 목소리다
.<예이, 누구시옵니까?> 하인이 대문을 열어주었다.
< 안에 너의 주인이 계시느냐?>
< 예, 그러하옵니다만…….>하인은 누가 어디서 왔느냐? 라고 묻는 시늉을 했다.
< 냉큼 주인 방으로 안내 하렸다.> 조금 큰소리다.
< 네, 네, 네, 알겠습니다요.> 하인은 그제야 보통 분은 아닌 줄 알아 차렸다.

밖에서 이러쿵저러쿵 소란을 떠는 바람에 주인 배선생이 사랑방 문을 열고 내다보니 한양에서 온 관원(官員)이었다. 정중히 방으로 모시고 수인사를 마쳤다.
< 선생께서는 과거에 합격 하셨습니다.>
< 무슨 말씀입니까! 지난번 과거에 분명히 떨어졌는데……?>
배삼익 선생은 농담하지 말라고 하였다.
< 그런 것이 아니 오라 선생의 이름을 착각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 그 무슨 말씀을…….> 삼익 선생은 고개를 갸우뚱 했다.
사연인 즉 裵三益 선생이 시험 답안지를 제출할 때 자기의 이름을 너무 흘려 썼기 때문에 착오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배(裵)자를 쇠(衰)자로 보았고 삼(三)자를 지(之)자로, 익(益)자를 개(蓋)자로 잘못 알고 쇠지개(衰之蓋)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 이제 알겠소이까?>
< 참 그러네요. 어쩐지 그날[시험 발표] 쇠지개, 쇠지개 하는 소리가 났던겄 갔구먼요.>
< 에이! 선생도 자기 성명 석자만은 바른 글로 써야죠.><미안 하외다.> 그리고는 서로가 마주 보면서 하하하 하하하……박장대소(拍掌大笑)를 했다.

이렇게 하여 뒤늦게나마 등과(登科) 사실이 밝혀져 배삼익은 관직에 나가게 되었고 조정(朝廷)의 요직을 두루 두루 거치다가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하던 중에 병을 얻어 객지에서 그만 별세하였다고 한다.

 

 

 

裵尙志(배상지) 선생 일화.

 

裵尙志(배상지) 栢竹堂(백죽당)은 지조 높은 선비면서도 덕망을 갖춘 교육자였다. 자제들을 교육함에 있어서 그 교과 과정이 엄중하면서도 대하는 태도는 너그러웠다.

어느 날 2, 3, 4째 아들을 죽림사(竹林寺)라는 절에 글공부하라고 보냈다. 얼마간 아무 기별이 없자 백죽당은 궁금한 나머지 절을 찾았다. 이 때 세 자제들은 여가를 보아 기생까지 불러서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얼른 기생을 이불에 감싸 방구석에 밀쳐두고 부친을 맞았다. 이 때 백죽당은 아무 말씀을 하지 않고 잠시 앉았다가 시 한 수를 벽에 남기고 자리를 떴다.

 

一裵一裵復一裵(일배일배복일배)

三裵會處春風廻(삼배회처춘풍회)

名是竹林非但竹(명시죽림비단죽)

竹林深處桃花開(죽림심처도화개)

 

배가 하나 배가 하나 또 배가 하나.

배가 셋이 모인 곳에 봄바람이 감도니

이름만 竹林(죽림)이니 대나무만 있지 않고

대나무 깊은 곳에 복사꽃도 피어 있네.

 

첫 구절은 세 아들을 마치 한잔 먹고 또 한잔 먹세(一杯一杯復一杯)’에서 따온 느낌이다.

두 번째는 세 사람의 배씨 선비들이 모여 공부하는 곳에 춘풍, 즉 술기운이 만연하다는 말이다.

선비들이 있는 곳이라면 서권기(書卷氣)’ 즉 책들이 가득하며, 그래서 문자향(文字香)이 있어야 했다. 더구나 세 아들은 기생까지 불러들여 술판까지 벌이고 있었다.

매우 실망스러운 장면이었을 것이다. 셋째와 넷째 구절은 이 시의 압권이라 할만하다. 공부하고 있는 절 이름이 죽림사다.

대나무()의 이미지는 곧다. 그래서 선비가 즐겨 이와 벗했다. 부친인 자신 역시 이 대나무에서 따 아호를 백죽당이라 했다.

마지막 구절의 대나무 숲 깊은 곳에 복숭아꽃이 피었네(竹林深處桃花開)’는 갑작스럽게 수습해 방구석으로 밀쳐둔 기생을 풍자한 것이다. 이 일화를 보면서 교육이란 강함과 유함을 조화롭게 써야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후일 이 세 아들은 모두 문과에 급제했다. 그래서 이로부터 안동 지방에서는 배문남무(裵文南武, 배씨들은 문과, 남씨들은 무과가 많이 났다)’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裵尙志(배상지)선생의 鏡光書院(경광서원)

 

 

鏡光書院(경광서원) 沿革(연혁)

 

安東市(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행지 위에 있다.

1569년 기미년에 서당이 세워졌고 1662壬寅년에 精舍(정사)로 개명하고 佰竹堂(백죽당) 裵尙志(배상지) 慵齋(용재) 李宗準(이종준)선생의 위패를 봉안했다.

 

다시 1649년에 春坡里社(춘파리사)를 창건하여 佰竹堂(백죽당) 裵尙志(배상지) 慵齋(용재) 李宗準(이종준)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었다.

 

1686년 병인 서원으로 승격되어 敬堂(경당) 장성생의 위패를 옮겨서 佰竹堂(백죽당) 裵尙志(배상지)慵齋(용재) 李宗準(이종준)선생과 함께 제향하게 되었다가 대원군 당시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78년 무오년에 復設(복설)하게 되어 1년에 한 번 9월중 丁日(정일)에 향사를 올리고 있다.

 

 

裵三益(배삼익) 선생의 일화

 

자는 여우(汝友), 호는 임연재(臨淵齋)지금부터 400여 년 전 안동군 월곡면 도목동은 무릉도원경 같이 산수가 수려하고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이곳에 李滉(이황)의 제자로 학문이 높은 裵三益(배삼익)이 살고 있었다.

배삼익은 학문에 깊은 조예가 있었고 꾸준히 정진하며 과거 시험에 응시했다. 분명 자신만만하게 응시를 했는데 그만 낙방하고 말았다. 배삼익은 고향으로 돌아와 낙심천만하여 두문불출 일체의 방문객을 끊고 시름에 잠 긴 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마을에 한양 손님이 찾아 내려왔다. 방문객은 裵之蓋(배지개) 裵之蓋(배지개) 하며 누구를 찾는 듯했다.

 

裵三益(배삼익)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 사람을 청해들이니 그는 "이 고을에 사는 裵之蓋(배지개) 라는 사람이 진사 시험에 登科(등과)를 했는데 도무지 사람이 나타나질 않아 직접 찾아 나섰습니다" 하였다.

 

 이 고을에서 과거를 본 사람은 자신뿐인 것을 아는 배삼익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그러면 혹 그 글을 가지고 오셨습니가? 하니 손님은 "물론이지요 하도 흐려 써서 사실은 저 같은 사람은 잘 읽지도 못하겠습니다마는..."

손님이 내미는 글을 보니 바로 과거 시험에 자신이 냈던 글이 아닌가, 이름을 너무 흘려 써서 三益(삼익)이 꼭 之蓋(지개)로 보이는 것이었다.

이렇게 등과를 하게 된 배삼익은 선조 21년에 황해도 관찰사와 병마수군 절도사로 임명되어 황해도에 부임하여 나라를 위해 많은 공훈을 남겼다.

 

 

鏡光書院(경광서원) 沿革(연혁)

 

安東市(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행지 위에 있다.

1569년 기미년에 서당이 세워졌고 1662壬寅년에 精舍(정사)로 개명하고 佰竹堂(백죽당) 裵尙志(배상지) 慵齋(용재) 李宗準(이종준)선생의 위패를 봉안했다.

 

다시 1649년에 春坡里社(춘파리사)를 창건하여 佰竹堂(백죽당) 裵尙志(배상지) 慵齋(용재) 李宗準(이종준)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었다.

 

1686년 병인 서원으로 승격되어 敬堂(경당) 장성생의 위패를 옮겨서 佰竹堂(백죽당) 裵尙志(배상지)慵齋(용재) 李宗準(이종준)선생과 함께 제향하게 되었다가 대원군 당시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78년 무오년에 復設(복설)하게 되어 1년에 한 번 9월중 丁日(정일)에 향사를 올리고 있다.

 

 

 

 

裵尙志(배상지)선생의 묘비명

 

 

興海人 字 不傳 號 栢竹堂

 

공의 묘소는 안동시 가수천 위에 있다. 묘 앞에 短碣이 있는데 판독 가능한 부분은 유명 영락 12년 갑오 정월 22일 정유 통훈대부 판가복시사 흥해 배공 尙志(상지)지 묘, 일남 ()은 이천감무, 이남 ()은 벙조좌랑, 삼남 ()은 성균학론, 여식은 이천감무 ()의 처이다.로 즉 태종 14(1414)에 건립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부인 안동 권씨 묘도 공의 묘 앞에 연분으로 있으며, 묘 앞에 역시 동일한 양식의 단갈이 있는데 「☐4년 기미 1116일 경신 공지 상처 영인 안동 권형조참의의 이조종랑 ().으로 판독되는 정통 4(세종 21, 1439)의 비석이 있다.

공의 내외 묘는 상방하원의 고려 말의 형식이며 시석 또한 圭首碑(규수비)로 상단의 모서리만 접은 간결한 형태인 것이 특색이다. 그러나 순정 갑오 후 임오(숙종 28, 1702)에 공의 사적을 상고하여 대사헌 權瑎(권해)가 찬한 비를 다시 세우고 그 비석이 오래되어 자획이 마모되자 다시 세운 새 비가 묘 앞에 있다.

공은 고려 말에 벼슬이 판사시복시사에 이르렀는데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안동 금계 촌으로 은거하여 주위에 栢竹(백죽)을 심어서 스스로 호를 삼고 고려가 망하자 두문불출 불사이군의 절개를 지켰다 한다.

영가지 총담조에 공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은 사헌부 지평, (), (), ()은 문과에 급제하여 ()은 관찰사, ()은 사헌부 감찰, ()은 이조정랑을 역임하였다. 동생 尙恭(상공)도 문과에 급제하여 전서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도 급제하여 이조정랑에 임관하니 문중이 빛났다.

, , 강이 어려서 죽림사에서 독서를 할 때 하루는 셋이 기녀를 데리고 노는데, 공이 불의에 방문을 하니 세 아들은 몹시 당황하며 몸 둘 바를 몰랐다. 공은 세 아들을 훈계하는 시를 벽에 써 붙였는데,

배 하나 배 하나 또 배 하나

세 배씨 모인 곳에 봄바람 이네

이름은 죽림이지만 비단 대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고

죽림 깊은 곳에 도화가 피었네.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후세의 시인들도

분명관직에서 물러나 선현 앞에 나아가

천수나 되는 시편 어느 세월에 전하나.

죽백은 이미 마르고 구름도 멀어졌다.

풍류는 높이 보여 오히려 삼엄하네.

라 하여 공의 기상에 감복 하여다 한다.

 

 

墓前碑

前面大字高麗判司僕寺事柏竹堂裵先生之墓

碑 文

昔麗之亡能抗節不仕者蓋不惟吉冶隱徐掌令數君子而已或其人自韜晦遂泯無傳余於栢竹堂裵先生窃有感焉先生諱尙志字不傳仕麗季官至判司僕寺事見麗政亂退而隱居于永嘉之金溪村扁其堂曰栢竹以見志逮我 鮮興遂閉門而終若先生者其節何遽在吉徐諸君子下哉裵氏系出曲江檢校將軍景分之後 丞同正光祐衛尉丞若卿保勝別將裕孫典理判書榮至僉議評理詮實其六世也評理娶判三司孫洪亮之女生先生先生之配曰安東權氏父希正 贈領議政男曰權持平桓觀察使楠監察杠吏曹正郞世世趾美繩繩至七代孫三益觀察使觀察使之子龍吉藝文檢閱門戶益大今其後甚繁衍府北嘉水里有先生墓墓有碑只書先生官位姓名其生卒年月日歷官行事畧不槩見何哉或曰先生以國亡不能死爲恨不欲自見於後其志亦可悲也先生沒旣二百餘年人慕先生之風不衰卽金溪之曲建祠以俎豆之今 上十六年以多士之請 贈爵兵曹判書以表章之先生嘗有詩集散逸無傳其唱酬若于篇附在冶隱集中西厓柳文忠公嘗稱先生曰霜淸玉潔高蹈時危此足以發明先生於百代之下矣銘曰

白山峨峨洛水洋洋有崇四尺寔惟高麗栢竹先生之藏

 

崇禎甲申後壬午十月 日立

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兼同知義禁府事藝文館提學權瑎撰

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兼春秋館記注官金夏世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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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판사복시사 백죽당 배 선생 지묘

예전 고려가 망함에 절의로 항거하며 벼슬을 버린 이가 오직 길야은서장영수군자(吉冶隱徐掌令數君子)뿐이 아니나 혹은 그 사람이 스스로 숨기고 감추어 드디어 민몰해서 전하지 아니한 이가 있으니 나는 저 백죽당 배 선생에게 간절한 감회가 있나니.

선생의 휘는 상지요 자는 전하지 아니하고 고려 말에 벼슬이 판사복시사이면서 고려의 정계가 어지러움을 보고 물러나서 영가의 금계촌에 숨어서 그 당호를 백죽당이라고 지어 그의 뜻을 나타내고 이씨 왕조가 일어남에 드디어 문을 닫고 여생을 마쳤으니 선생 같은 분은 그 절행이 어찌 길야은서장령제군자의 아래가 될까.

배씨는 가계가 곡강에서 나왔으며 검교장군 휘 경분의 후로 승동정 벼슬인 휘가 광우 위위승 벼슬인 휘 약경과 보승별장인 휘 유손과 전리판서인 휘 영지와 첨의평리 휘 전은 실상 그의 6세이다. 평리가 판삼사 손홍량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선생을 낳았고, 선생의 배위는 안동 권희정 증 영의정의 따님이다. 4남을 두니 권은 사헌부지평이요, 환은 황해충정전라도관찰사요, 남은 사헌부감찰이요, 강은 이조정랑이니 대대로 아름다운 명예가 이어와서 7대 손 삼익에 이르러 관찰사를 지냈으며 관찰사의 자 용길은 예문관검열로서 문호가 더욱 대단해서 지금 그 후손들이 심히 번성하게 퍼졌다.

부북 가수리에 선생의 묘소가 있었는데 묘비에 다만 선생의 관위와 성명과 그 생졸년월일만 새겨져 있고 벼슬살이 하시던 사략은 대개 볼 수 없으니 어인 일인고, 혹은 말하기를 선생이 나라가 망함에 따라 죽지 못함을 한으로 여겨 후세에 나타내고 싶지 아니 함이라 하니 그 뜻이 또한 슬프구나.

선생이 몰한지 이미 이백 여년에 사람들이 선생의 풍범을 생각함이 쇠하지 아니하여 지금 금계의 마을에 사당을 세우고 향례를 올리며 금상 16(1691)에 많은 선비의 청으로 증작 병조판서하여 포상을 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시집이 있었는데 흩어져 잃어버려서 전하지 아니하고 그 창수한 약간편이 야은집 중에 부쳐서 있는 것뿐이다. 서애 류문충공이 일찍이 선생을 칭하기를 서리발 같이 맑고 옥같이 깨끗하다 하고 위태로운 시기에 고상한 발자취라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족히 백대의 하에서 선생을 발명한 것이라 하겠다. 명 왈

 

소백산은 늠름하고

낙동강 물은 광대하게 흐르도다

우뚝한 사척봉분이 있으니

진실로 고려 백죽선생을 감춘 곳이로세

 

 

숭정 갑신 후 임오 십월 일 립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겸 동지의금부사 예문관제학 권해 찬

통훈대부 통예원좌통예 겸 춘추관 기주관 김하세 서

 

 

碣文小識

先生易簀後三百餘年碣文成而攷據未的官職踐歷生卒年月並闕焉後數世得先生庚午戶籍及貞夫人分衿文書與忌日案參互攷之先生生至正十一年辛卯卒永樂十九年癸巳七月二十七日近攷華海師全跋文先生與圃牧諸君子編輯申文貞事蹟更攷松京言志錄先生見麗氏運訖與罔僕諸賢掛朝天冠着蔽陽笠登不朝峴各言其志言訖望松嶽皆流涕曰可去矣先生遂歸田排祿抗不二之節又攷雉岳山壇祀日記先生與同節諸公源源往來與立壇祀此皆碣文所不載也舊碣歲久苔泐往年庚寅又被兵禍所傷方某改竪碣文一從舊本而更摭諸家所錄書于下方以補碣文之闕極知僭妄寔出於闡先徵後之微誠也是役也擔夯出力者後孫永悳燦慶爲多故並錄之

先生卒後五百四十二年 甲午 九月 日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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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문소지

선생이 돌아가신 후 삼백여년에 갈문이 이루어졌으나 참고함이 적실하지 못하고 관직과 실천의 이력과 생졸 년 월이 모두 빠졌으며 후수세(後數世)가 되어 선생 경오 호적과 정부인분금문서와 더불어 기일 안을 서로 참고하니 선생이 지정 11년 신묘에 생하여 영락 19년 계사 727일에 졸하셨다.

근래 화해사전발문(華海師全跋文)을 참고하니 선생이 포은 목은 제군자와 더불어 신문정공 사적을 편집했으며, 다시 송경 언지록을 참고하니 선생이 고려의 운이 다함을 보고 망복제현(罔僕諸賢)으로 더불어 조천관(朝天冠)을 괘관현의 나무에 벗어 걸고 폐양립(蔽陽笠)을 갈아 쓰고 부조현(不朝峴)에 올라가서 각각 그 뜻을 말하고 마침에 송악을 바라보며 모두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가히 가야한다고 하며 선생이 드디어 배록동으로 돌아와서 불이의 절개에 항거했다.

또 치악산 단사일기에 선생이 동정제공으로 더불어 원원이 왕래했으며 더불어 단사를 세웠으나 이는 모두 갈문에 실리지 아니한지라 구갈이 해가 오래되어 이끼가 끼고 이지러졌으며 지난 경인년에 또 병화로 많이 상했는지라 바야흐로 갈문에 빠진 것을 보궐하오니 참망함을 알고 있으나 진실로 선조를 천양하고 후일을 징계하는 작은 성심이 될 것이다.

이 일을 하는데 담항(擔夯)을 해서 힘을 쓴 후손 영덕과 찬경이였는 고로 함께 기록하노라.

선생이 돌아가신 후 542년 갑오 9월 일에 세웠다.

 

 

 

裵尙恭(배상공)의 묘갈명.

 

 

裵尙恭(배상공) 生卒未詳 興海人 詮의 아들. 官 工曹典書

 

공의 묘소는 豊山邑(풍산읍) 하리동 시우실에 있다. 묘아래 성화 31228(세조 12, 467)에 세운 短碣(단갈)이 있으나 풍우로 자획이 마모되어 판독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영가지 총묘조에 묘갈명병서가 기록되어 있으니 조선조 초기 墓制(묘제)를 연구하는데 참고가 될 것이다. 墓文(묘문)을 상고하면, 출처를 밝힌 선대의 가계와 子孫錄(자손록)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끝에 명을 써 두었다. 공의 아들 이조정랑 (: 우의정 권지의 사위), 손자 繼宗(계종) 때 와서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니, 正郞(정랑) ()의 사위 평창군사 權雍(권옹), 군사의 사위 호군 柳沼(류소: 서애의 고조)外外孫(외외손)으로 이어져서 풍산 류씨가 香火(향화)를 이어 오고 있다.

공의 묘 뒤에 공의 아들 이조정랑 ()의 묘가 있고 또 그 옆에 자부 권씨 묘가 있는데, 묘 앞에 세워진 短碣(단갈)石人(석인)은 조선조 초기 비석의 형식과 刻石(각석)의 형태를 고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권씨 묘비에는 영가 의인 권씨묘라 각자되어 있으니 당시의 호칭에 안동을 영가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공은 풍산 류씨 공조전서 從惠公(종혜공)과 함께 하회에 정착하였으나, 3대에서 아들이 없어 묘소의 수호와 奉祭(봉제)는 외손 또는 외외손이 맡아 하는데, 조선초기의 제례제도를 아는데 참고가 될 것이다.

 

裵尙恭(배상공)~ 생몰년 미상. 본관 興海(흥해). 尙志(상지)(). 문과 급제. 고려조에 典書(전서)를 지낸 후 고려가 망하자 그 형 尙志(상지)와 함께 安東(안동)落鄕(락향). 옛 동료인 柳從惠(유종혜)와 교분이 두터워 柳典書(유전서)가 그의 田土(전토)를 절반이나 ()에게 떼 주어 豐山縣(풍산현) 河回(하회)마을에 살게 되어 사람들이 河回二典書(하회이전서)라 일컬었다고 함. -安東誌-

 

墓碣銘

典書裵尙恭墓

在豊山縣鐬谷村後山 墓碣裵氏興海郡人 門譜甚昌大爲世右族 諱詮奉翊大夫密直司事平壤尹 諱理所相副官誠勤宣力翊戴佐命功臣三重大匡 賜奉興海君 妣沱陽郡 夫人孫氏福原府院君諡靖平公諱洪亮之女令胤 諱相恭娶副正金諱成玉之女 亦永嘉世族也 公克紹厥家官至嘉善大夫工曹典書 推重於世中年卒于 第禮于豊山鐬谷洞原艮穴 夫人金氏克稱其配用偕期遂 配葬於公墳之上冑嗣 諱素卓然早成風度浩脫有文行中 文科累遷琳官世稱鶚 立朝堂以 通善郞吏曹正郞 不幸早世 從葬皇考墓側 令近侍幽堂厥 配永嘉宐人權氏右議政諡文景公諱軫之女也 文景公有大名 垂于後權氏 天資仁恕能善守家政敎率裔 擧有儀則早賦栢舟 承祀孔時年八旬以疾 告終亦用坤從歸葬 郎君封墓之右穴 生四男一女 長女適折衝中樞院經歷權雍 次適行首洪益敷 次適三軍鎭南南陸 次適司憲府監察安從生 皆世家也 男曰繼宗娶縣監洪君思悌之女監察大夫諱由道之後也 繼宗承陰歷仕 司憲監察謇然有直名累任外官頗以廉謹稱 經歷生二男二女 長男曰裕奉直郞 次曰綽進士 女適生員申肅文 次適護軍柳沼 鎭撫生四女 長歸右議政仁山君洪允成 仁山君文昭武略爲國柱石當代名勳無能出其右 次歸大護軍金耆 次歸忠贊衛鄭世規 次歸幼學洪邑治 縣監生三男 長曰彭耉從仕郞 次曰彭命皆幼 奉直娶署令朴簡之女 生二男二女 長男曰邇 次男曰達女皆幼 進士娶縣監吳詮之女 生一女幼 生員生一女歸署令李元仁 護軍生二男一女 曰炯曰煥女皆幼 仁山君生一女適奉事沈淡 大護軍生一男幼 忠贊衛令生二男幼 裵氏後裔甚表表 顯名于世其銘曰

箕裘門葉傳于 舊史媲德聚賢 顯顯厥嗣有墓 于原四列其次 咸有義聲宐留萬載鑽石垂辭 以永其邁

 

묘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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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서 裵尙恭(배상공)공 묘

묘는 풍산현 회곡촌 뒷산에 있으며, 비석에 배씨 흥해군 사람이라 적혔는데, 그 문벌이 매우 성대해서 당대의 명문가였다.

()봉익대부밀직사사평양윤이였고, ()소상부관성근선력익대좌명공신삼중대광으로 흥해군에 봉해진 분이며, ()沱陽郡(타양군) 분이다.

부인 손씨는 복원부원군시정평공 휘 洪亮之(홍량지)의 따님이시다. 相恭(상공)은 부정 金成玉(김성옥)의 딸을 취하였는데 역시 영가의 세도가 였다.

공은 가문을 이어받아 일으켰고, 관직은 가선대부공조전서에 이르러 세상에서 높이 존경받았으나 중년에 졸하여 버렸다.

풍산 회곡동 艮穴(간혈)에 장사 지냈다. 부인 김씨는 좋은 배필로 함께 잘 사시다가 생을 마치셨는데 공의 분묘 위에 장사 지냈다.

대를 이은 휘 ()는 뛰어 났으며 일찍부터 풍채와 태도가 빼어나고 호탕하였으며, 문장이 좋은 가운데,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므로 세상에서 물수리()”라고 하였다.

벼슬길에 올라 통선랑이조정랑을 역임하였으나 불행이도 일찍 세상을 떠나니, 선친 묘 옆에 가까이 묘 터를 잡아 안장하였다.

 

()영가의인권씨우의정이신 문경공 휘 ()의 딸이다. 문경공은 이름이 크게 난분이며, 권씨 가문에 영향을 많이 끼친 분으로 타고난 천성이 어질고 너그러워 능히 가문을 잘 다스리고 후손을 교육시켰으며, 그 딸인 부군의 배위도 예절이 바른고 남편을 잘 시봉하며, 열심히 조사의 제사를 받들다가 팔순이 되어 질명으로 졸하니, 남군 묘 오른 쪽 에 자사 지냈다.

41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절충중력추원 權雍(권옹)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행수 洪益敷(익부)의 처이고, 다음은 삼군진남 南陸(남육), 다음은 사헌부감찰 安從生(안종생)의 처가 되어는데 모두 세도가 집안이다.

아들 繼宗(계종)의 처는 현감 洪君思(홍군사)의 딸로 감찰대부 휘 ( )의 후손이다. 繼宗(계종)은 사헌감찰을 지냈는데외직에 거듭 임명받았으며 청렴하고 매사에 조심성이 있다고 이름을 날렸다

經歷(경력)22녀를 낳았는데 , 장남은 ()라하고 봉직랑, 차남은 ()인데 진사이며, 사위는 생원 申肅文(신숙문), 다음 사위는 호군 柳沼(류소)이다.

鎭撫(진무)4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우의정 인산군 洪允成(홍윤성)의 처가 되었는데, 인산군은 문장에 밝고 무략이 뛰어 나서 나라의 기둥이라고 당대에 이름이 높아서, 나타나지 않은 데가 없었다. 다음은 대호군 金耆(김기)에게, 다음은 충찬위 鄭世規(정세규), 다음은 유학 洪邑治(홍읍치)에게 출가했다.

縣監(현감)3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彭耉(팽구)리며 종사랑, 차남은 彭命(팽명)인데 모두 어리다.

奉直(봉직)은 서령 朴簡之(박간지)의 딸에게 장가가서 22녀을 낳았는데, 장남은 (), 차남은 (), 딸은 모두 어리다.

進士(진사)는 현감 吳詮(오전)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生員(생원)1녀를 낳았고, 서령 李元仁(이원인)에게 시집갔다.

護軍(호군)21녀을 낳았는데 (), () 이라하고 딸은 모두 어리다.

仁山君(인산군)1녀를 두었데 봉사 沈淡(심담)의 처가 되었고, 大護軍(대호군)1남을 두었지만 어리다.

충찬위령은 2남은 낳았는데 어리다. 배씨의 후예는 매우 두드러져 세상에 그 이름을 들어내니 명에 이르기를,

 

箕裘(기구)을 문중에 전한 고사와 같은

옛 역사 들어낸 덕 있는 어진이 모여

그것을 들어내고 이어 온 묘가 있으니

들에 사방으로 자리 잡고 있네.

그 의로운 소리 모두 남아 있으니

만세토록 남도록 잊지 않게 돌에 새겨

영원히 남게 하려 하네.

 

 

 

 

출전 <한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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