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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백씨(白)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白(수원백씨)

 

 

본관(本貫): 수원(水原)

시조(始祖): 백우경(白宇經)

유래(由來):

 

백씨(白氏)는 고대 황제 헌원(軒轅)의 후예로 중국 풍익(馮翊)에서 계출(系出)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백씨의 연원(淵源)은 '백씨대동보(白氏大同譜)'에 황제의 16세손 백을병(白乙丙:진나라 때 부를 지냄)의 후손 백우경(白宇經)이 소주(蘇州)에서 출생하여 당(唐)나라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으나 간신(奸臣)들의 모함을 받자 780년(신라 선덕왕 원년) 신라에 건너와 자옥산(紫玉山:지금의 월성군 안강읍 옥산동) 밑에 정착한 것이 시초가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후 우경(宇經)이 그 곳에다 영월당(迎月堂)과 만세암(萬歲庵)을 짓고 학문보급에 진력하였고, 만세암을 찾아온 선덕왕(宣德王)은 정혜사(淨惠寺)로 명(改名)하고 영월당 현판에 어필(御筆)로 '경춘(景春)'이라 쓰고 아울러 사운시(四韻詩)를 지어 함께 하사(下賜)했다고 한다.

그러나 상계(上系)가 불분명하여 경덕왕(景德王:신라제54대왕,재위기간:917∼924)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내고 상장군(上將軍)에 증직된 창직(昌稷)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어 기일세(起一世)하며, 창직의증손 휘(揮)가 고려 목종(穆宗) 때 대사마 대장군(大司馬大將軍)로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졌고 9세손 천장(天藏:임평부원군 원정의 아들)은 원(元)나라에서 이부 상서를 거쳐 우승상(右丞相)을 지내고 귀국하여 충선왕(忠宣王) 때 수성백(城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수원(水原)을 관향(貫鄕)으로 게 되었다고 한다.

 

백씨(白氏)의 본관(本貫)은 수원(水原)을 비롯하여 180여 본이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가 수원 백씨의 동원분파(同源分派)임이 분명하여, 갑자대동보(甲子大同譜) 발간 당시 각 파의 대표들이 회합하여 관향(貫鄕)을 수원(水原)으로 단일화 하기로 합의를 했다고 한다.

 

백(白)씨는 중시조 창직(昌稷)의 후대로 내려오면서 선정공파(禪亭公派), 인주공파(仁州公派), 오산군파(鰲山君派) 등 29개파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며, 창직의 증손 휘(揮:광평시랑 길의 손자)의 아들 3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가문의 중요 인물

 

백간미(白簡美)

육조(六朝)에 걸쳐 주요관직을 지내며 나라의 모든 문장(文章)을 지어낸 간미(簡美)는 만년에 영해(寧海)로 낙향(落鄕)한 후 수차에 걸친 문종(文宗)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다.

 

백행미(白行美)

간미의 아우 행미(行美)는 형부 시랑(刑部侍郞)을 역임했다.

 

백가미(白可美)

가미(可美)는 판삼사(判三司)를 거쳐 태자 사부(太子師傅)에 올랐다.

 

백후재(白厚載)

대장군(大將軍) 간미(簡美)의 아들 5형제 중 세째 무신(武臣:선무 장군)의 아들 후재(厚載)가 소용장군(昭勇將軍)으로 도통사(都統使)를 지내다.

 

백유정(白有貞)

후재의 아들 유정(有貞)은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했다.

 

백대민(白大旻)

후재의 손자 대민(大旻)은 문하성사(文下省事)를 역임했다.

 

백이정

1247(고종 34) ∼ 1323(충숙왕 10). 고려 후기의 유학자. 본관은 남포 ( 藍浦 ). 자는 약헌(若軒). 호는 이재( 紛 齋).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아버지는 문절(文節), 어머니는 성주 이씨(星州李氏) 참봉세주(世柱)의 딸이며, 안향 ( 安珦 )의 문인이다.

1275년(충렬왕 1) 문과에 급제, 충선왕 때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를 겸했고, 뒤에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다.

1298년 원(元)이 사신을 보내어 세자를 왕으로 삼고, 8월에 왕을 불러가자 충선왕을 따라 원의 연경(燕京)에서 10년 간 머물러 있었다. 그 동안 주로 성리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연구했고, 귀국할 때 정주(程朱)의 성리서적과 주자의 ≪ 가례 家禮 ≫ 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 뒤 후진 양성에 힘써서, 이제현 ( 李齊賢 ) · 박충좌 ( 朴忠佐 ) · 이곡 ( 李穀 ) · 이인복 ( 李仁復 ) · 백문보 ( 白文寶 ) 등 많은 문인을 배출했으며, 도학과 예학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들여온 사람은 안향이지만,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그 체계를 파악해 크게 일가를 이룬 이는 백이정이라 할 수 있다.

안향과 백이정의 학통은 이제현에게 전승되었고, 이제현은 이색 ( 李穡 )에게, 이색은 권근 ( 權近 )과 변계량 ( 卞季良 )으로 이어졌다.

선조 때 김제남 ( 金悌男 ) · 최기남 ( 崔起南 ) 등이 송경(宋京)에 서원을 세워 안향 · 권보 ( 權溥 )와 함께 배향하기로 경기사림(京畿士林)과 논의하다가 임진왜란으로 인해 이루지 못했지만, 남포의 신안원(新安院), 충주의 도통사(道統祠), 진주의 도통사(道通祠), 남해의 난곡사(蘭谷祠)에서 향사하고 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묘소는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면 평리 양각산(羊角山)에 있으며, 신도비 등이 남아 있다.

유고로는 〈 연거시 燕居詩 〉 · 〈 영당요 詠唐堯 〉 · 〈 한벽루 寒碧樓 〉 · 〈 여홍애집구 與洪厓集句 〉 등의 시구가 전해지고 있다.

 

백장(白莊)

충신(忠臣)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대제학(大提學)에 올랐던 백장(莊:문하시중 경신의 7세손)은 공민왕(恭愍王) 때 정국이 어지러워지자 처자를 거느리고 원주 치악산(雉岳山)으로 들어가 은거 하여 태종(太宗)이 이조 판서와 대제학의 벼슬을 제수하며 불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백문보(白文寶)

1303(충렬왕 29)∼1374(공민왕 23). 고려 후기의 문신. 자는 화부(和夫), 호는 담암(淡庵). 부사 견(堅)의 아들이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 춘추검열(春秋檢閱)을 거쳐 우상시(右常侍)에 이르렀다. 공민왕 초에 전리판서(典理判書)로 있으면서 과거에 10과를 둘 것을 주청하였다.

뒤에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었고, 1363년(공민왕 12) 앞서 일어났던 홍건적의 난으로 사국(史局)의 사초 ( 史草 )와 실록이 대부분 없어져, 청주에 머물러 있던 공민왕이 공봉 ( 供奉 ) 곽추(郭樞)를 시켜 남은 책을 해인사에 옮기도록 명하자, 개경에 있던 그는 김희조 ( 金希祖 )와 더불어 난리가 겨우 수습된 마당에 국사 ( 國史 )를 옮기면 민심이 동요될 것이라 하여 곽추를 만류하고 뒤의 명령을 기다리게 하였다.

뒤에 신라시대의 숭불(崇佛)이 나라에 미친 폐단을 시정할 것을 상소하였다. 공민왕의 환도(還都) 후 환안도감(還安都監)이 설치되어 김경직 ( 金敬直 )과 함께 그 일을 주관하게 되자 해인사의 ≪삼례도 三禮圖≫와 ≪두우통전 杜佑通典≫을 가져오게 하여 ≪두우통전≫을 본뜨고 또 박충(朴忠)의 말을 추려서 의제(儀制)를 만들었다.

1373년 우왕이 대군이 되어 취학하자 전녹생 ( 田祿生 )· 정추 ( 鄭樞 )와 함께 그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정당문학 ( 政堂文學 )에 이르러 직산군(稷山君)에 봉해졌다. 이제현 ( 李齊賢 )· 이달충 ( 李達衷 )과 함께 고려의 국사를 찬할 때, 그는 예종과 인종의 양조(兩朝)를 초(草)하였다. 성품이 청렴결백하고 정직하며 이단에 의혹되지 않고 문장에 뛰어났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백인걸(白仁傑)

1497(연산군 3) ∼ 1579(선조 12). 조선 중기의 학자 · 문신.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사위(士偉), 호는 휴암(休菴). 서울에 거주하였다.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효삼(效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교(參校) 사수(思粹)이고, 아버지는 왕자사부 ( 王子師傅 ) 익견(益堅)이다. 어머니는 사직 ( 司直 ) 우종은(禹從殷)의 딸이다.

조광조 ( 趙光祖 )의 문인으로 김안국 ( 金安國 )에게서도 학문을 배웠다. 송인수 ( 宋麟壽 ) · 유희춘 ( 柳希春 ) · 이이(李珥) · 성혼 ( 成渾 ) 등 당대 사림계 인물들과 널리 교유하였다. 김식 ( 金湜 )이 대사성이 되어 새로운 학풍이 일어나게 되자 구도(求道)의 뜻을 세워 학문에 전심하였다. 특히 조광조를 존경해 그의 집 옆에 집을 짓고 사사하였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비분강개해 금강산에 들어갔다가 돌아와 1531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3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기묘사림의 일원으로 지목되어 오랫동안 성균관에 머물다가 이듬해에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이 때 예문관 관리가 이조 ( 吏曹 )의 인사 행정의 잘잘못을 기록하던 옛 관습을 복구해 실행하였다.

예조좌랑을 거쳐 남평현감(南平縣監)이 되었는데 이 때 학당(學堂)을 세우고 학장 ( 學長 )을 두어 자제들의 교육에 힘쓴 공로로 품계가 높아졌다. 1541년에는 홍문록(弘文錄 : 홍문관의 수찬 · 교리 등을 선발하기 위한 제1차 추천 기록)에 올랐다. 1545년(인종 1) 지평을 거쳐 호조정랑이 되었으며,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하였다.

같은 해 명종 즉위 뒤 윤원형 ( 尹元衡 ) 등이 대비인 문정왕후 ( 文定王后 )를 등에 업고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 ( 尹任 ) · 유관 ( 柳灌 ) 등을 제거할 때,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으로 있으면서 극력 반대하다가 파직되고 옥에 갇혔으나 정순붕 ( 鄭順朋 ) · 최보한 ( 崔輔漢 ) 등의 도움을 받고 풀려났다.

그 뒤 1547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이기(李 咬 ) 등의 농권을 비난하는 양재(良才)의 벽서를 기화로 소윤 ( 小尹 ) 세력이 대윤(大尹)의 잔존 세력과 사림계 인물들을 재차 축출할 때 연루, 안변(安邊)에 유배당하였다. 1551년 사면되어 고향에 돌아간 뒤, ≪ 태극도설 太極圖說 ≫ 과 정주학 ( 程朱學 )의 서적들을 깊이 연구하였다.

1565년(명종 20) 윤원형이 몰락하자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로 등용, 이듬해 사도시첨정(司 歸 寺僉正) ·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을 지냈다. 1567년 양주목사가 되었을 때 공납의 폐단을 개혁하는 치적 등을 쌓아 고을 사람들이 기념비를 세웠다. 선조가 즉위한 뒤 1568년(선조 1) 기대승 ( 奇大升 )의 건의로 특별히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공조참의 · 대사헌을 역임하고 뒤에 병조참판이 되었다. 이 밖에 공조참판 등을 지냈다. 그리고 1568년에는 인순왕후 ( 仁順王后 )의 수렴청정에 반대하는 소를 올려 오래지 않아 철렴(撤廉 : 수렴청정을 그만둠)하도록 하였다.

또한, 사망할 때까지 조광조를 문묘에 배향할 것을 여러 번 요청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아버지 덕흥군 ( 德興君 )을 추존하는 작업을 추진할 때 일반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와는 달리 임금의 처지를 두둔해 사림의 탄핵을 받고 지방으로 내려갔다.

조정에 분당의 조짐이 나타나자 이준경 ( 李浚慶 )의 의견을 좇아 당론을 잠재우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선비들을 해하려 한다는 사림의 의심을 받아 1571년 파주로 퇴거하였다. 그 뒤 우참찬으로 징소되었으나 치도(治道)를 논하는 소를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1579년에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있으면서 이이(李珥)와 함께 다시 동서분당의 폐단을 논하고 진정시킬 것을 주장했으나 서인 ( 西人 )을 편든다는 공격을 받았다. 그 밖에도 국경의 상황을 논하고 군비를 닦을 것을 주장하는 등 국정에 대해 많은 의견을 제시하였다. 동지춘추관사 ( 同知春秋館事 )로 ≪ 명종실록 ≫ 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선조 초에는 많은 정치적 문제에 연관되었고 매우 연만해 많은 시간을 파주에 퇴거해 있었다. 이에 선조는 대사헌 · 우참찬 등의 관직을 내려 부르거나 식량을 내리기도 하고, 1569년의 경우와 같이 직접 편지를 보내 부르는 파격적인 대우를 베풀기도 하였다.

나이가 든 뒤에도 성리학에 대한 탐구를 열심히 했으며 이이 · 성혼(成渾) 등과 더불어 학문을 익히고 토론하였다. 기묘사화 뒤 명종대까지 계속되는 훈구세력의 발호에 맞서 사림파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특히 1545년 을사사화 때 일신을 돌보지 않고 윤원형의 음모에 대항한 것은 후대에 길이 칭송되었다.

선조 때 기로소 ( 耆老所 )에 들어갔으며 청백리에 뽑혔다.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과 남평(南平)의 봉산서원 ( 蓬山書院 )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 휴암집 休菴集 ≫ 이 전한다. 인조 때 충숙(忠肅)의 시호를 받았으나, 뒤에 문경(文敬)으로 고쳐졌다.

 

백인호(白仁豪)

인걸의 형 인호(仁豪)도 성품이 순후하고 지조가 굳었으며 국화를 좋아하고 탈속적 취미가 있었다고 한다.

 

백유양(白惟讓)

인호의 아들은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모함을 받아 화를 당한 유양(惟讓)이다.

 

백유함(白惟咸)

1546(명종 1)∼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중열(仲說). 참교(參校) 사수(思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왕자사부 ( 王子師傅 ) 익견(益堅)이고, 아버지는 인걸(仁傑)이다. 어머니는 안찬(安璨)의 딸이다.

1570년(선조 3)에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고, 1576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해에 승문원주서(承文院注書)에 등용되고, 이어서 홍문관의 정자 ( 正字 )·박사· 부수찬 ( 副修撰 )· 지제교 ( 知製敎 )를 거쳐, 병조정랑이 되었다. 1583년에 이조좌랑이 되었다가 이듬해인 1584년에 이조정랑이 되었다.

당쟁을 중재하던 이이(李珥)가 죽자 당쟁을 피해 벼슬을 버리고 용안(龍安 : 龍仁)의 농장에 내려가, 그 곳에 있는 백운암 ( 白雲庵 )에서 교학(敎學)에 힘쓰기도 하였다. 1589년에 정여립 ( 鄭汝立 ) 모반 사건이 평정되자 다시 예조정랑으로 복직되었다.

헌납이 된 후, 역적 정여립 등과 사귄 사헌부·사간원의 요직 인물들을 갈아치우도록 소를 올려 시행되었다. 다시 이조정랑을 거쳐 의정부의 검상 ( 檢詳 )· 사인 ( 舍人 )이 되었다. 1591년 왕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 ( 西人 )인 정철 ( 鄭澈 )의 주장에 동조했는데, 이후 정철이 물러나자 그도 경성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경흥으로 옮겨졌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배가 풀려 의주로 왕을 호종(扈從)했으며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으로 복직되었다. 명나라 군사들의 군량을 조달하라는 특수 임무를 부여받고 동분서주하면서 윤승훈 ( 尹承勳 )과 함께 군량미 2만석을 조달했고, 이어서 정주에서도 많은 군량미를 모았다.

그 해 10월에 성균관사성이 되어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겸직하였다. 1593년 함경도에서 왕자를 왜군에게 잡히게 한 황정욱 ( 黃廷彧 )을 탄핵하였다. 1594년에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황주목사로 나가 도탄에 빠진 백성을 잘 어루만져 치적을 남겼다. 1596년에 우리 나라의 실정을 설명하기 위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호군 ( 護軍 )이 되어 명나라 사신인 정응태(丁應泰)를 접반하였다. 그런데 정응태는 접대가 소홀함을 난문하면서 조선이 한낱 왕국에 불과한데,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묘호 ( 廟號 )를 사용하는 것은 황제를 능멸하는 행위가 아니냐고 트집을 잡았다. 이에 대해 그는 조선왕의 묘호는 국초부터 당당히 사용해온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 후 광해군 초에 이이첨 ( 李爾瞻 )의 탄핵으로 부안에 유배되었다가 1617년(광해군 9)에 양주로 방환(放還)되었다.

 

 

백민수(白民秀)

정국공신(靖國功臣)로 정해군(貞海君)에 봉해졌던 수장(壽長)의 현손 민수(民秀)는 경(經書)와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은 학자였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문위세(文緯世)와 함께 의병(義兵)을 모아 장수(長水) 지역에서 적을 대파시켰으며, 정유재란 때도 문위세와 합세하여 용담(龍潭) 등지에서 적을 크게 무찌른 명장(名將)으로 유명했다.

 

백광홍(白光弘)

1522(중종 17)∼1556(명종 11). 조선 중기의 문인. 본관은 해미 ( 海美 ). 자는 대유(大裕), 호는 기봉(岐峯). 전라남도 장흥 출생. 아버지는 세인(世仁)이며 어머니는 광산김씨로 첨정 ( 僉正 ) 광통(廣通)의 딸이다. 아우 광안(光顔)과 광훈(光勳) 및 종제 광성 등 한 집안 4형제가 모두 문장으로 칭송을 받았다.

1549년(명종 4) 28세로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155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홍문관정자로 임명되고, 1553년 호당 ( 湖堂 )에 뽑혔다. 그뒤 1555년 봄에 평안도평사가 되어 〈관서별곡〉을 지어 그곳의 생활상과 자연풍물을 읊었다.

이듬해 1556년 가을에 병이 들어 벼슬을 내놓고, 귀성하는 도중 음력 8월 전라북도 부안에서 객사하였다. 그는 천생자질이 뛰어나고, 뜻이 높아 효성과 우애가 극진하며 행실이 올바른 성품이었다. 자라면서 이항 ( 李恒 )에게서 학업을 배웠다.

김인후(金麟厚)· 이이 ( 李珥 )· 신잠 ( 申潛 )· 기대승 ( 奇大升 )·임억령(林億齡)· 정철 ( 鄭澈 ) 등과 같은 당시의 대문장가들과 도의로써 사귀었다. 특히, 〈관서별곡〉은 정철이 지은 가사 〈관동별곡〉보다 25년이나 앞서 지은 작품으로 기행가사의 효시가 되어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808년(순조 8) 기양사(岐陽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기봉집≫이 있다.

 

백광훈(白光勳)

1537(중종 32) ∼ 1582(선조 15). 조선 중기의 시인. 자는 창경(彰卿), 호는 옥봉(玉峯). 아버지는 세인(世仁)이며, 어머니는 광산신씨 첨청 광통(廣通)의 딸이다. 광홍(光弘)은 그의 형이다. 백광훈은 박순 ( 朴淳 )의 문인으로 13세에 상경하여 양응정 ( 梁應鼎 ) · 노수신 ( 盧守愼 ) 등에게서 수학하였다.

1564년(명종 19)에 진사가 되었으나 현실에 나설 뜻을 버리고 강호(江湖)에서 시와 서도(書道)로 자오(自娛)하였다. 1572년(선조 5)에 명나라 사신이 오자 노수신을 따라 백의 ( 白衣 )로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시재(詩才)와 서필(書筆)로써 사신을 감탄하게 하여 백광선생(白光先生)의 칭호를 얻었다.

백광훈은 1577년에 처음으로 선릉참봉(宣陵參奉)으로 관직에 나서고, 이어 정릉 ( 靖陵 ) · 예빈시 ( 禮賓寺 ) · 소격서 ( 昭格署 )의 참봉을 지냈다. 그는 최경창 ( 崔慶昌 ) · 이달 ( 李達 )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불리었다. 송시(宋詩)의 풍조를 버리고 당시(唐詩)를 따르며 시풍을 혁신하였다고 해서 그렇게 일컬었다.

송시냐 당시냐 하는 시비는 아주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삼당시인들은 송시가 자연스런 감동에서 멀어지고 인정이나 세태의 절실한 경험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것을 지적하고, 방향전환을 위해서 당시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백광훈의 시는 당풍(唐風)을 쓰려고 노력하였고, 풍류성색(風流聲色)을 중시하여 자못 낭만적이고 염일(艶逸)한 시풍(詩風)을 지녔던 것이다. 이정구 ( 李廷龜 )는 그의 문집 서(序)에서 백광훈은 손꼽히는 호남시인으로 특히 절구 ( 絶句 )를 잘하여 당나라의 천재시인 이하(李賀)에 비견된다고 하였다.

또한 그의 시는 천기(天機)로 이루어진 것이라 평하였다. 백광훈은 이산해 ( 李山海 ) · 최립(崔 凌 ) 등과 더불어 팔문장(八文章)의 칭호를 들었다.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어서 영화체(永和體)에 빼어났다. 별세한 뒤 1590년 강진(康津)의 서봉서원(瑞峰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 옥봉집 ≫ 이 있다.

 

백광언(白光彦)

북청 판관(北靑判官)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조방장(助防將)으로 선봉이 되어 분전하다가 순절하였다.

 

백광조(白光祖)

초선장사(秒選壯士)로 심양(瀋陽)에 가서 포로로 잡혀있던 수천명의 동포를 구한 광조(光祖)가 뛰어났다.

 

백진남(白振南)

광훈의 아들 진남(振南)은 시부(詩賦)와 글씨로 명성을 떨쳤다.

 

백원의(白元義)

∼1627(인조 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수원(水原).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청나라 주력부대 3만여명이 의주를 공격해오자 옥강만호(玉江萬戶)로서 의주 남성(南城)의 장수가 되어 포대(砲隊) 300여인으로 수많은 적을 살상하여 당시 적으로부터 비장군(飛將軍)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화살이 떨어져서 백병전으로 싸우다가 마침내 전사하였다. 또한, 그의 아들 대연 ( 大衍 ), 조카 대남(大男)도 담대하게 칼을 빼들고 돌진하여 적과 용감히 싸우다가 함께 전사하였다. 훈련원정(訓鍊院正)에 추증되었으며, 의주의 구암사(龜巖祠)에 제향되었다.

 

백낙관(白樂寬)

한말에 일본세력 침투에 반대했다.

 

백홍인(白弘寅)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의거(義擧)를 결의했던다.

 

백성기(白性基)

1860(철종 11) ∼ 1929. 조선 말기의 무신.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효천(孝天), 호는 소송(小松). 한성부판윤 겸 경연특진관 남익(南益)의 아들이다.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고종 19) 남행선전관(南行宣傳官)으로 관로에 올랐다.

같은 해 무과에 급제한 뒤 승진을 거듭해 승선 ( 承宣 ) · 철산부사(鐵山府使) · 내금위장(內禁衛將) ·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 · 경상좌도병마절도사 · 한성부우윤 등을 역임하였다. 1895년에는 갑오개혁 때 제정된 육군계급제도에 따라 참장(參將)에 임명된 뒤 군부협판 · 갑산관찰사(甲山觀察使) · 평리원검사(平理院檢事) · 평리원재판장 및 군법기초위원을 지냈다.

독립협회 활동시에는 간사부에 소속되어 활약한 개화파 무관의 한 사람이었으며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신식 군제 설치 이후 여러 차례에 걸친 개편으로 인해 군정의 문란함이 극도에 달하자 1900년에는 군정교구(軍政矯 鼓 )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를 받아들여 고종이 원수부 ( 元帥府 )에 실시토록 하여 일련의 군제 정비가 이루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육군법률 317조가 1900년 9월 제정되면서 육군법원이 설치되는 등 군사법제도가 완비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중심 역할을 한 이후 육군법원장 · 원수부군무국총장 · 기록국총장 · 검사국총장 · 평안북도관찰사 · 교육부참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04년 말에는 경무사 ( 警務使 )를 겸하고 있던 중 일제침략에 저항하는 상민배(商民輩)를 탄압하지 않았다고 하여 해임당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강제 체결 때에는 민영환 ( 閔泳煥 )과 함께 극간(極諫)하였으나 대세의 흐름이 돌이키기 어려운 것을 깨닫고 수원(水原)으로 은퇴해 여생을 보냈다.

 

백남규(白南圭)

1884(고종 21)∼1970. 조선 말기의 의병. 본관은 수원(水原). 호는 운암(雲庵). 충청북도 중원 출신. 일찍이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안동진위대 부위를 지냈다. 1907년 한국군이 강제해산당하자 경상북도 순흥에서 의병을 일으켜 부하 800명을 거느리고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때 강원도 횡성의 봉복사(鳳復寺)에서 의병장 이강년(李康秊)을 만난 뒤 그의 인품에 감복하여 이강년 의진의 우선봉이 되었다. 그 해 7월 제천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려 도선봉장(都先鋒將)이 되었고, 8월에는 모두령(毛頭嶺)·유수산, 문경의 갈평 등지에서 크게 승전하였다.

9월에는 영월 사리치(寺里峙)에서 선유원(宣諭員) 홍우석(洪祐錫)의 100여명의 수비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1908년 6월 이강년이 적에게 붙잡히자 군사지휘권을 장악한 김상태(金尙台)로부터 의병 1지대를 분급받아 서벽·내성·아산 등지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1909년 12월 죽산에서 적과 접전하다가 잡혀 공주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받고 8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출옥하였다. 1918년 상해(上海)로 망명하려다가 잡혀 15년간 옥고를 치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백낙귀(白洛龜)

낙귀(洛龜)는 광양(光陽)과 하동(河東)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순천(順天)을 점령했다.

 

백운각(白雲閣)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소대장으로 활약했던 운각(雲閣)은 3·1운동 때 고향인 정주(定州)에서 만세시위를 선창하며 민중을 지휘했다.

 

백일규(白一圭)

1879(고종 16)∼ 독립운동가·언론인. 호는 약산. 일명 일규(一圭), 일규(日奎). 평안남도 증산 출신. 1905년 5월 하와이로 이민, 그 다음해 8월 미국본토로 가서 공부하였다.

1907년 3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동보국회 ( 大同保國會 )를 창립할 때 장경(張景) 등 20여 명과 발기인이 되어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섰다. 1908년 3월 친일미국인 스티븐스(Stevens, D. W.) 사살의거가 발생한 뒤 장인환 ( 張仁煥 )· 전명운 ( 田明雲 ) 두 의사의 후원회 회장으로 선임되어 재판과 사식차입 등 물심양면으로의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1909년 7월 네브래스카에서 박용만 ( 朴容萬 )과 함께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 운영하면서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8년 6월 캘리포니아대학 경제과를 졸업하고 문학사가 된 이래 그해 8월 8일 북미대한인국민회의 ≪신한민보≫ 주필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뎠다.

이후 16년 동안 신문편집에 종사하였다. 1919년 4월에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당시 중국 상해(上海)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군자금 30만 달러를 조달하여 활기를 불어넣었다. 1926년 2월에 북미대한인국민회 총회장에 선임된 이래 8년 동안을 봉직하였다.

1946년 8월 하와이대한인국민회의 ≪국민보≫ 주필로 임명되어 편집에 진력하였다. 그 뒤 하와이에서 다시 미국으로 온 이후 북미대한인국민회 중앙감찰위원으로 봉직하였다. 저서로 ≪한국경제사≫(1920)가 있다. 199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백종렬(白鍾烈)

종렬(鍾烈)이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소대장으로 청산리(靑山里) 전투에서 무공을 세웠다.

 

백삼규(白三圭)

∼1920. 독립운동가. 자는 현복(賢復), 호는 온당(溫堂). 평안북도 태천 출신.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가 일제에 의해 시해당하자 의병장 유인석 ( 柳麟錫 )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였다.

1910년 국권이 침탈되자 남만주로 망명하여 봉천성(奉天省)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조병준 ( 趙秉準 ) 등과 함께 관전현(寬甸縣)과 환인현(桓仁縣)을 근거로 농무계 ( 農務契 )와 향약계 ( 鄕約契 )를 조직하여 애국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는 한편, 항일의식을 심어주었다.

3·1운동 후 조맹선 ( 趙孟善 ) 등과 대한독립단 ( 大韓獨立團 )을 조직하여 부총재로서 만주 각 현에 독립지단을 조직, 강화하였다.

또한, 일제의 주구기관인 보민회 ( 保民會 )·일민단(日民團)·강립단(强立團) 등을 숙청하는 등의 항일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박장호(朴長浩)· 전덕원 ( 全德元 )·이웅해(李熊海)·김평식(金平植) 등과 기원독립단 ( 紀元獨立團 )을 이끌었다.

1920년 일본군이 관전현 향로구(香爐溝)에 있는 우리 청년단을 습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청산구(靑山溝)에 갔다가 일본군에게 잡혀 환인현에서 총살당하여 순국하였다. 그 뒤 장남 인해(仁海), 차남 인제(仁濟)도 순국하였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白克齊(백극제) 선생의 일화.

 

환생전(還生殿)과 백극제(白克齊)

 

울진 현령 백극제는 양주 사람으로서 이태조 5년에 울진 현령으로 취임하였으며, 취임한지 불과 3일만에 울릉도를 본거지로 한 왜구 간길량(干吉郞)일당이 쳐들어와 현()의 소재지인 고읍성(古邑城 : 현재 울진국민학교의 터)을 불태우고 성안에 살던 많은 주민들을 죽였다.

 

조정에서 이 소식을 듣고 한성판윤 장순열(張巡列)을 파견하여 조사 한 후 지방민의 요청에 의해 고성 1리 산성동으로 성을 옮겼으니 이 성이 고산성(古山城)이다.

 

백극제는 산성위에 있는 능허사를 관살로 하고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들여 살게 하는 동시 왜구 침입에 대한 방비를 철저히 하였다.

그런데 다음해 가을 현령이 병이 들어 신음하다가 죽었으므로 그 부인이 시체 옆에서 밤새도록 울다가 쓰러져 잠이 들었는데 꿈에 수염이 흰 중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시체는 고이 모셔 불영사로 옮겨 백일기도를 드리면 환생하리라.고 하였다.

 

이상히 생각한 부인은 꿈의 계시대로 시체를 불영사로 옮겨 백일기도를 드렸더니 죽은 현령이 백 일 만에 환생하였다.

 

다시 살아난 현령 백극제는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법당을 새로 짓고 환생전이라 하였다.

지금의 대웅전 동편에 있는 황화실이 그것이다.

 

또한 현령 부인의 꿈에 나타난 중은 응진전에 모셔놓은 소운대사의 화상과 흡사하였다고 한다.

그 후 백극제는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는데 단종(端宗) 때 영의정 황보인(黃甫仁)과 함께 세조에게 피살되었다.

<울진군지>

 

 

 

白衡遠(백형원)의 효행.

 

애일당의 교훈

 

때는 1805(순조 5) 523일 자시(子時), 산수가 수려하고 고요한 산 속의 마을 기성면 심수동에 만고에 드문 효자가 탄생하였으니, 그의 성은 백()이요, 이름은 형원(衡遠)이다. 그는 고려조의 명신 충간공 백 문보(白文寶) 선생의 11세손으로, 일찌기 아버님과 형님을 잃고 오직 자애로운 어머님인 장씨 부인 밑에서 외로이 자랐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뛰어나 어머님을 섬기는 그 지극한 정성은 온 동민의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나날의 삶에 촌각을 아끼어 어머님 봉양을 위해 바치려는 지극한 정성에서 당호를 애일(愛日)이라 하였으며, 애일이 단순한 당호에 그침이 아니고 이를 힘써 실천하여 당시 이조 판서(吏曹判書) 신 헌구(申獻求)로 하여금 근천지효(根天之孝), 발류지효(拔類之孝)니 하고 극찬하리만큼 실로 어머님을 섬기기에 내 몸 돌볼 겨를이 없었다.

 

차츰 나이가 들면서 어머님에 대한 효성이 뛰어나 마을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그의 생활 모두가 효의 실천으로 일관되었으니, 그는 해마다 엄동설한이 되면 어머님 방에 들어가 방안이 따뜻한가를 하루에도 여러 번 확인하였다. 추운 겨울에 어머님의 건강을 위해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잡아다가 고깃국으로 입맛을 돋우는 한편, 자신은 냉방에서 밤을 밝힐지언정 어머님의 침실은 항상 따뜻하게 해드렸고 조석 문안은 물론이요, 일생을 두고 어느날 단 하룻밤인들 자다가 한두 번씩 어머님의 침실을 돌보지 않은 날이 없었다.

 

자신은 초근목피로 끼니를 이을지언정 어머님에게는 쌀밥 공양을 한 끼라 도 거를세라 평햇길 험한 40 리를 쌀 구하러 다녔다 하니 과히 보기 드문 효자라 하겠다.

그런데, 어느 해 겨울 어머님께서 뜻하지 않은 병이 들어서 날이 갈수록

병세가 더욱 심해졌다.

 

여러 방면으로 약을 구하여 병구완하기에 다섯 달 동안이나 정성을 다하였으나 효과가 없게 되자, 그는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차라리 이 몸이 죽고 어머님의 병을 낫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올리느라고 날이 밝아오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그토록 악화되기만 하던 어머님 병세는 하늘의 도우심인지 차차 좋아져서 소생하게 되니 이는 그의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 감복하였던 것이리라.

 

어머님께서는 천수를 다 누리시고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애통해함은 동민 의 심금을 울렸으니, 무덤 옆에 초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3 년 동안 하여 애 곡소리 끊어지지 않으니, 그의 지극한 효심은 온 마을 사람을 감동시켰다고 한다.

왕대밭에 왕대 난다는 속담과 같이 백 형원(白衡遠)3세손이며 회 진 (晦鎭)의 아들로 1896년에 태어난 백 순목(白淳穆) 씨도 아버지 회진 공이 40에 중풍이 들어 전신 불수의 몸이 되었을 때 이들 부부 역시 극진히 아버님을 30 년이나 대소변을 받아내며 모셨다 하니 정말 백씨 가문에는 대를 이은 효자가 탄생하였다. 이것은 바로 살아생전의 애일(愛日), 실천으로 보인 가정 교육이 되어 후세에 본받을 점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효성이 생전은 물론 돌아가신 후에도 더욱 널리 알려져 1894(고종 31)에 현령의 추천으로 임금님이 아시게 되어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이라는 벼슬을 받게 되니 향중에서 19011223일 효자각을 세워 후세에 영원히 기념되게 하였다.

 

출전울진군 다천초등학교 김 교감

참고 문헌 蔚珍郡誌 , 孝烈行誌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수원파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5

鎭(진)

32

鐘(종),寅(인)

39

壽(수),重(중)

26

洙(수)

33

烈(열),夏(하)

40

商(상),庚(경)

27

樂(락)

34

圭(규),在(재)

41

潤(윤),海(해)

28

南(남)

35

善(선),鎔(용)

42

榮(영),柱(주)

29

均(균),基(기)

36

淳(순),泰(태)

43

然(연),熙(희)

30

鉉(현),鎬(호)

欽(흠)

37

植(식),根(근)

44

 

31

承(승),雲(운)

38

煥(환),燮(섭)

45

 

 

장흥파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2

熙(희)

28

善(선),敎(교)

34

鎬(호),銓(전)

23

基(기)

29

鐘(종),鎔(용)

35

洪(홍),汶(문)

24

欽(흠)

30

淳(순),浚(준)

36

秀(수),根(근)

25

永(영)

31

桂(계),柄(병)

37

燦(찬),烋(휴)

26

寅(인)

32

烈(열),炅(경)

38

均(균),垶(성)

27

亨(형),南(남)

33

在(재),圭(규)

39

 

 

대흥파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5

玉(옥)

29

鎭(진)

33

土(토)

26

居(거)

30

淳(순)

34

 

27

運(운)

31

雲(운)

35

 

28

重(중)

32

董(동)

36

 

 

부여파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19

淡(담)

24

寬(관)

29

杰(걸)

20

有(유)

25

聖(성)

30

炯(형)

21

思(사)

26

正(정)

31

基(기)

22

東(동)

27

鎭(진)

32

 

23

殷(은)

28

永(영)

33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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