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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원주변씨(邊)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邊(원주변씨)

 

 

본관(本貫): 원주(原州)

시조(始祖): 변안렬(邊安烈)

유래(由來):

 

원주 변씨(原州邊氏)는 황주 변씨(黃州邊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系統)으로 고려 말의 절신(節臣)인 변안렬(邊安烈)을 시조(始祖)로 한다.

'원주변씨족보(原州邊氏族譜)'에 의하면 그의 조부(祖父)인 변 순(邊 順)이 1268년(고려 원종9) 원(元)나라 사신(使臣) 탈타아(脫朶兒)를 수행하여 원나라에 가서 원세조(元世祖)를 알현(謁見)하고 심양(瀋陽)의 장수(將帥)로 있다가 천호후(千戶侯)에 봉작을 받았고, 안렬(安烈)은 조카 숙(肅:안렬의 형인 안백의 아들)과 함께 공민왕(恭愍王)과 왕비(王妃)인 노국공주(魯國公主)를 배종하고 환국하여,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紅巾賊)을 격퇴시켜 이등공신(二等功臣)으로 판소부감사(判小府監事)에 올랐으며 이듬해 경(京都)를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워추성보조일등공신(推誠輔祚一等功臣)에 책록,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었다.

1376년(우왕 2)에는 추충양절선위익찬보조공신(推忠亮節宣威翊贊輔祚功臣)의 호(號)을 받고 도지휘사(都指揮使) 겸 조전원수(助戰元帥)이 되어 나 세(羅 世), 조사민(趙思敏), 이성계(李成桂), 류 실(柳 實) 등과 함께 운봉(雲峰), 부령(扶寧) 등지에서 왜구를 크게 소탕하여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으며, 한방언(韓邦彦)과 함께 단양(丹陽)과 안동(安東)지역에 침입해 온 왜구를 격퇴시켜 원주부원군(原州府院君)으로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이르렀다.

그러나 위화도(威化島) 회군으로 왕을 폐립(廢立)한 이성계(李成桂) 일파를 제거하고 쫓겨난 우왕(禑王)을 복위(復位) 시키려다가 김 저(金 佇)와 함께 순절하였다.

특히 그는 역사의 그늘 속에 가려진 절신으로 충신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부흥을 위하여 강인한 절개를 굽힐 줄 몰랐으며 원주 원씨(原州元氏) 원 이의 딸과 혼인하여 사적지(賜籍地)인 원주(原州)에서 터를 잡아 살게 되었으므로 후손들은 원주(原州)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조선이 개국한 후 이태조(李太祖)는 안렬의 충절(忠節)을 기리고 그의 아들 3형제에게 벼슬길을 열어주어 맏아들 현(顯)은 봉상시사(奉常寺事)를, 둘째 이는 도총제(都摠制)를, 막내 예(預)는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사(訓鍊院事)를 각각 역임하였고, 손자 상복(尙服:이의 아들)은 덕천옹주(德川翁主)와 혼인하여 원주위(原州尉)에 봉해졌다.

 

가문의 중요 인물

 

변수(邊修)

예조 참판(禮曹參判) 상회(尙會)의 아들 범수(修)는 호조 및 병조, 형조, 공조의 참의(參議)를 거쳐 충청, 경상, 함경도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다.

 

변협(邊協)

면천 군수(沔川郡守) 계윤(季胤)의 아들 범협(協)은 공조 판서(工曹判書)와 포도대장(捕盜大將)에 이르렀고, 주역(周易), 천문(天文), 지리(地理), 수학(數學)에도 정통하였으며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었다.

특히 협은 어릴 때부터 성품이 호쾌하고 도량이 넓어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가 여섯살 때 샘에 빠진 일이 있었는데 우물 안에서 돌을 붙들고 밤새 버티고 있다가 새벽에 물을 길러온 아낙네들에게 큰 새끼를 빨리 가져오라고 호통쳤다고며, 1565년(명종 20)에는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귀양온 요승(妖僧) 보우(普雨)를 장살(杖殺)함으로써 백성들의 속을 후련하게 했다고 한다.

 

변광(邊廣)

연산군(燕山君) 때 난정을 개탄하여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있던 사촌 동생 희리(希李)와 함께 안동군(安東郡) 서후면(西後面) 금계리(金溪里)로 낙향했던 희예(希乂)의 아들 범광(廣)은 학행(學行)으로 이름났다.

 

변영청(邊永淸)

광의 아들 영청(永淸)은 퇴계(退溪)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고 명종(明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임금으로부터 표리(表裏:은사나 헌상하는 옷의 겉감과 안감)와 안마(鞍馬)를 하사 받았으며, 단아하면서 근엄한 성품으로 공직에 있으면서 대구 부사(大丘府使)로 재임중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는 데 성력을 다했고 부모 봉양을 잘 하는 사람에게 쌀과 고기를 지급하는 등 밝은 치적을 거두었다.

 

변양걸(邊良傑)

선조(宣祖) 때 무과에 급제한 양걸(良傑)은 임진왜란 때 강화(江華)를 방비하는데 공을 세우고 명(明)나라 낙오병(落伍兵)들의 반란을 재치로 진압하여 훈련대장(訓鍊大將)이 되었으며, 왕자(王子)가 관련된 살인사건을 가차 없이 다루다가 선조의 뜻에 거슬려 동래(東來)로 유배, 뒤에 수원 부사(水原府使)와 제주 목사(濟州牧使)를 지냈다.

 

변응정(邊應井)

공조 좌랑(工曹佐郞) 열(悅)의 아들 응정(應井)은 임진왜란 때 조 헌(趙 憲), 정 담(鄭 湛) 등과 더불어 금산(錦山) 전투에서 육박전을 벌이다가 전사하자, 적장도 그의 충의에 감복하여 무덤을 크게 만들고 <조선국충간의담(朝鮮國忠肝義膽)>이라 쓴 푯말을 세웠고, 나라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리는 정문(旌門)을 고향에 내렸다.

 

변경회(邊慶會)

만취당(晩翠堂) 영순(永淳)의 아들 경회(慶會)는 임진왜란 때 임 흘(任 訖), 금윤선(琴胤先) 등과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켜 여러 전투에서 많은 훈공을 세웠다.

 

변흡

선조조(宣祖朝)에서 무과에 급제한 흡은 이 괄(李 适)의 난을 평정(平定)하는데 공헌하여 진무이등공신(振武二等功臣)로 원흥군(原興君)에 봉군되었다.

 

변극태(邊克泰)

효행으로 명성을 떨쳤다.

 

변급

효종(孝宗) 때 나선정벌(羅禪征伐)에 출정하여 러시아군을 격파시켰다.

 

변헌(邊憲)

경종(景宗) 때 통역관(通譯官)으로 '노걸대신석(老乞大新釋)'을 편찬한 범헌(憲)이 유명했다.

 

변학기(邊鶴基)

근대에 와서 의병대장(義兵大將) 학기(鶴基)가 이강년(李康秊)의 휘하에서 눈부신 활약으로 많은 업적을 남겨 충절(忠節)의 전통가문(傳統家門)인 원주 변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원주 변씨(原州邊氏)는 남한에 총 9,698가구, 39,60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簡齋(간재) 邊中一(변중일)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진, 안동시 서후면 금계동 음지 마을의 서당에 몇 명의 학동들이 모여 천자문을 낭랑하게 읽고 있었다.

그 중 눈빛이 유난히 초롱초롱한 한 학동이 무릎으로 결어 훈장 앞으로 나간다.

 

선생님, 어느 책에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를 잘 설명해 노았습니까?”

 

두 손을 양 무릎 위에 공손히 얹고 스승을 우러르는 그 학동은 예닐곱 살 청도되어 보이나 의젓함과 단정함이 몸에 배어 있다. 훈장은 어련 녀석이 격에 맞지 않는 질문을 하는지라 저극히 놀랐으나, 효도를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기득해 하면서 孝經(효경)’이라 답해 준다.

 

그 후로부터 소년은 자기에게는 정도가 높은 것이었지만 열심히 孝經(효경)을 읽으면서 몸소 실천해 나갔다.

밖에서 강, 대추등과일이 생기면 가슴에 풍었다가 반드시 집안 부모님께 갖다드리고, 아침저녁 문안을 드리며, 외출 시는 꼭 허락을 받았고 돌아와서는 인사를 드렸다.

 

이렇게 하여 그 소년은 말 한 마다 랭동 하나하나에 어른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어른블로 하여 금 펀안한 마음을 가지지도록 하는 것이 효도의 근본이라는 것을 갚이 느끼며 자라났다.

 

이 소년이 바로 임진왜란 당시 충효의 본보기가 된 간재(簡齋) 변중일 (邊中一)이다.

 

邊中一(변중일)이 섭 오륙세 쯤 되었을 때의 일이다. 어머님이 종기가 나서 고생을 하고 계셨다. 그는 어머님의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잔심부름을 해 드리고, 말벗이 되어 위로해 드리면서 극진히 간호했다.

 

그러나, 종기는 더욱 크게 번져 갈 뿐이었다. 근심 싸여 있는 그에게 의원이 꿩을 잡아 고약으로 만들어 종기에 붙이면 나을 것이라는 처방을 내렸다. 그는 꿩 사냥에 나섰다.

때는 설을 며칠 앞 둔 한겨울이어서 온 산천이 흰 눈으로 덮여 있었으나, 모친의 종기를 낫게 해 드려야 한다는 한 가지 생각으로 꿩 사냥에 나선 것이다.

 

몇 날을 꿩을 찾아 헤맸으나 맨손으로 나선 꿩 사냥이었으니 중일에게 접힐 꿩은 없었다. 눈 앞옆에 날아다니는 꿩을 보고도 잡지 못하는 그의 마음은 찢어질 것만 같았다. 끝내 구하지 못하고 그는 자기의 효성 부족함을 탓하면서, 신음하고 계실 어머님이 걱정이 되어 돌아오고 말았다.

 

  

 

간재 종택 입구.

 

 

 

별 차도가 없는 어머님 옆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상처를 돌보고 있는데, 난데없는 꿩 한 마리가 집 안으로 날아드는 게 아닌가! 邊中一(변중일)은 기쁘고 놀라운 마음으로 그 꿩을 잡아 고약으로 만들었다. 어머니의 종기에 붙였더니 신통 하게도 씻은 듯이 낫는 게 아닌가!

 

마을 사람들은 중일의 지성어린 효성에 하늘이 감동한 것이라 입을 모았다. 중일의 나이 18세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고니시(小西行長)를 선봉으로 하는 제1군이 부산, 밀양, 대구, 성주를 거처 올라오면서 닥치는 대로 약탈, 살인, 방화를 하는 판국이었다. 마침내 왜병들이 가까운 곳에까지 다다랐다는 소문이 파다해지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피란을 떠났다.

 

그런데, 변중일은 조모와 모친이 병쇠하여 피난을 하기가 몹시 어려웠으므로 부득이 다른 식구들만 보내고 혼자 남아 두 어른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러던 중, 총포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오므로 그는 먼저 모천을 업어 뒤곁 삼밭에 모셔 두고, 조모를 업고 피하려 했으나 조모의 기운이 워낙 쇠하여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모를 그 대로 누워 계시게 하고는 조모가 드실 탕약을 달이고 있는데, 총칼을 든 적병들이 집안으로 들이닥쳤다.

무자비한 적병들은 탕약을 달이고 있는 그에게 달려들어 발길로 차고, 손으로 이리 치고 저리 쳐서 넘어지게 한 후에, 당장에라도 죽일 양으로 창을 뽑아 들었다. 그래도, 그는 조금도 겁내는 기색 없이

 

나를 죽일지언정 조모는 헤치지 말라. 내가 죽으면 조모는 자연히 돌이 가시게 되나지 탕약만이라도 드시게 한 뒤에 나를 주여라.”

 

고 말했다.

 

 

 

 

간재 변중일의 정려각..

 

 

 

그렇게도 포악스럽던 적병들은 당당하고 위엄 있는 변중일의 효성에 순간 움찔하고서 있을 뿐이었다. 점시 후 그는 차분히 탕약을 짜서 조모에게 드련 후 왜병을 향해 이제는 죽여라고 호령했다. 그러자, 적뱅들은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죽이지 않겠다. 이 사람은 하늘이 내리 준 효자다. 우리가 여러 곳을 지 나 왔지만 이런 효자는 처음 본다.”

 

고 하면서 그를 일으켜 얼굴과 옷의 먼지를 털어 주있다. 그리고 이어서

 

조모 곁에서 안심하고 시중을 들어라. 우리가 떠난 뒤에 다른 부대가 오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니, 이 신표를 그들에게 보이면 화를 면할 수 있으리라.”

 

고 하면서, 푸른 기 하나와 비수한 자루를 내어 주었다. (기는 없어졌으나 벼수는 아직 까지 진해 오고 있다.)

 

왜군들의 횡포가 점점 포악해지면서 북상하게 되니 임금이 도성을 떠나 북으로 몽진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邊中一(변중일)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만세에 불변하는 떳떳한 일일진데 사직이 허 물어지는 이 때, 비록 보잘 것 없는 촌로일지나 어찌 충성을 다하지 않으리.”

하면셔 백미 백 섬을 상주 진영의 진장 김각상에게 군랑미로 전했다.

 

그리고 맏형 희일(喜一)과 더불어 홍의장군 곽재우의 진중으로 달려가서 곽장군을 도우면서 왜병을 상대로 용감하게 싸웠다. (용사록에 실려 있음)

 

난리가 끝나자 고을 사람들이 그의 효행과 충성을 조정에 적어 올려 표천이 내리도록 청하고자 하였으나, 그가 완강히 거절하였으므로 사람들은 또 한 번 탄복하였다.

 

 

후세 사람들에게 깊은 효성과 높은 충절의 귀감이 된 邊中一(변중일) 1660(현종 1) 1020얼에 86 세를 얼기로 천수를 다하였다.

그 후 1686(숙종 12)에 그의 충효 예절을 거리기 위하여 충효각을 지으라는 어명이 내려, 안동시 서후면 금계동에 정충효각을 세워 그 유적이 오늘까지 천해지고 있다.

 

 

邊永淸(변영청) 墓碣銘(묘갈명)

 

邊永淸(변영청) 中宗 11年 丙子(1516)~ 宣祖 13年 庚辰(1580) 65.

字 開白. 號 東胡. 原州人 原州府院君 安烈后. 生員 廣

 

공은 30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어 문관에 급제하였다. 남원부사에 부임하여 선정으로 포상되었고 뒤에 대구부사 상의원정을 역임하였으며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柳龜村(류구촌)張石南(장석남)과 함께 영가삼걸로 일컬어 졌다.

공의 묘는 풍산읍 계평동 속칭 딱지골에 있다. 부친인 생원 (), 아들 생원 慶長(경장), 손자 효자 中一(중일)의 묘도 같은 곳에 있는 데 芝村(지촌) 金邦杰(김방걸) 찬의 비는 중년에 개수되어 있었다.

 

墓碣銘

公諱永淸 字開伯 號東湖 系出原州 本麗朝 原州府院君安烈之後 六世至生員廣娶 安東大姓 贈判書權哲經女 以正德丙子 生公 丙子中司馬 己酉擢文科 選補承文院 遷 騎曹郞 轉兩司 歷 四洲卒官尙衣院正 此其大略也 在帶方蔚有聲績 上賜鞍馬以褒之 乙卯生員公卒時 公奉仕湖南 訃至哭擗 徒步哀動一道 公慟事父 不卒奉慈闈榮養僃至 戊寅丁憂哀毁踰制 竟不勝喪越二年 庚辰終得年六十五 從先兆 堋于蔭谷背艮之原 配 鐵城李氏 縣監矅女 壬辰之亂避 岳山谷 遘疾 幾殆賊猝至 孫中一冒死扶護 賊不忍害後 數歲以天年終 附葬公墓 一子曰慶長生員 側室二子 慶男 慶時 二女權棨 權策 生員公沒 亦葬佳蔭 距公墓數武 鶴峯先生序其墓 世系子孫俱載 玆不記 嗚呼 公早以文雅 見推與 柳侍郞景湥 張刺史文輔 具蜚英 一時世傳 永嘉三傑是也 金鶴沙題 丙子稧帖云 邊靑松嘗爲栢府亞長名動中 其平生事業 必有不朽者 存而以家籍 逸於兵火泯泯焉 無傳於後可惜也 夫銘曰 花山三傑 公卽其一 闊步靑雲 聲譽藹蔚 周家諍臣 漢世循吏 匪我卽諛 前輩有記 佳蔭之原 有封若堂 無數毁傷 惟公之藏

通訓大夫前弘文館修撰知製敎 金邦杰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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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갈명

공의 휘는 永淸(영청), 자는 開伯(개백), 호는 東湖(동호)인데 운주에서 계출되었다. 우리 고려조에서 원주 부원군에 봉해진 安烈(안렬)의 후손이며, 6세에 이르러 생원 ()이 안동의 大姓(대성)인 증 판서 權哲經(권철경)의 딸과 혼인하여 정덕 병자 년에 공을 낳았다.

병자 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기유 년에 문과에 뽑혀 승문원에 보임 받고 곧 옮겨서 기조랑이 되었다가 다시 양사로 전임되고 사주졸관 상의원정을 역임하였는데 이것이 공의 관직경력의 대략이다.

대방으로 있을 때 공적과 명성이 높아, 상감은 상으로 말을 하사하였다.

 

을묘 년에 부친인 생원공이 졸하였을 때 공은 호남에서 봉직하고 있었는데, 부고가 도착하자 가슴을 치며 통곡하며 슬퍼 한걸음에 걸어갔다.

공이 부친 일로 슬퍼하였지만, 죽지 아니한 모친을 받들어 지위가 높아지고 명망을 얻어 부모를 영화롭게 잘 모셨다.

을묘 년에 부친인 생원공이 졸하였을 때 공은 호남에서 봉직하고 있었는데, 부고가 도착하자 가슴을 치며 통곡하며 슬퍼 한걸음에 걸어갔다.

공이 부친 일로 슬퍼하였지만, 죽지 아니한 모친을 받들어 지위가 높아지고 명망을 얻어 부모를 영화롭게 잘 모셨다.

무인 모친상을 당해 슬픔이 그지없어 목이 메고 상을 당한지 2년이 지난 경진 년 65세의 나이로 선조를 따르니 음곡 뒤 간좌 둔덕에 매장하였다.

배위는 철성 이씨 현감 ()의 딸인데, 임진란을 피해 악산곡에 갔을 때, 병이 나서 위태로운 차 감자기 적이 들어 닥치니 손자 중 일모가 죽기로 보호하니, 적은 참지 않고 해치고 가자 그 뒤 몇 년 아니 되서 천수를 마쳐서 공의 묘 옆에 부장하였다.

외아들 경장은 생원이고, 측실의 두 아들은 경남, 경시이며 두 딸은 권계, 권책의 아내가 되었다.

생원공이 졸하자 역시 가음에 장사하고 공의 묘에서 얼마 멀지 아니하다. 학봉선생이 그 묘의 서문을 짓고, 세계와 자손들을 모두 수록하였으니 여기서는 기록하지 않는다.

 

오호! 공은 일찍부터 시문을 짓고 읊는 풍류의 도가 뛰어나 시랑 류경돌, 자사 장문보와 함께 모두 뛰어나 한 때 세상에 말하던 영가삼걸이 바로 이분들이었다.

김학사가 쓴 병자계첩에서 말하기를, 청송 가에 백목을 보기 위해 부의 아장이 움직여 그 평생 사업으로 하니 반드시 쇠퇴하지 아니하고 가적에 남아있겠으나 병화로 없어져 후손에게 전하지 못하니 매우 아까운 일이다.

대저 명에 이르기를

 

화산의 삼걸

공도 곧 그중에 하나

청운의 꿈 안고 걸으며

명성은 아름답게 드날려

주나라의 간사한 가신

한나라를 감돌던 관리

모두 나의 대상은 아니네.

앞사람도 기록이 있으니

가음 골 언덕 위에

봉우리 지어 집을 만들어

무수한 상처를 안고

오직 공을 갈무리 하네

 

                                                                                       통훈대부 전 홍문관수찬지제교 김방걸 찬

 

 

 

 

 

 

 

<한민족대성보>에서 인용,.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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