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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계변씨: 밀양변씨(卞)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卞(초계:밀양변씨)

 

 

본관(本貫): 초계(草溪): 밀양(密陽)

시조(始祖): 변정실(卞庭實)

유래(由來):

 

초계(草溪)는 경상남도(慶尙南道) 합천군(陜川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이다.

 

변씨(卞氏)는 중국(中國) 천수(天水:지금의 감숙성 위천도에 속한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여섯째 아들인 숙진탁(叔振鐸)이 조후(曹侯)에 봉해지고 식읍(食邑)으로 변읍(卞邑)을 하사(下賜) 받아 지명을 따서 성(姓)으로 삼은 것이 시초가 된다.

 

우리나라 변씨(卞氏)는 당(唐)나라 천보년간(天寶年間:742∼755)에 예부 상서(禮部尙書)을 지낸 변원(卞源)이 743년(경덕왕 2) 왕명(王命)을 받들어 8학사의 한 사람으로「효경(孝經)」을 가지고 동래(東來), 신라(新羅)에 정착(定着)하여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고 상계(上系)를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없어 고려 성종(成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팔계군(八溪君)에 봉해진 변정실(卞庭實)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초계(草溪)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온다.

그리고 시조 정실의 아들 광(光:장파)·요(耀:중파)·휘(輝:계파) 3형제를 기점으로 크게 3갈래로 갈라졌다.

 

그 후 시조의 둘째 아들인 요(耀)의 손자 고적(高迪)이 밀양(密陽)에 시거(始居)함으로써 밀양 변씨(密陽卞氏)로 분적되었고, 후대로 내려오면서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따라 초계(草溪)·밀양(密陽) 외에도 원주(原州)·팔계(八溪)·진주(晋州)·청주(淸州)·경주(慶州)·장성(長城)·남원(南原) 등 44개 파(派)로 분관(分貫)되었으나 모두가 동조동근(同祖同根)으로 종의(宗議)에 따라 합보(合譜)를 하여 계대(繼代)하고 있다.

 

시조의 맏아들 광(光)의 후손인 장파(長派)가 변씨일문의 6할을 차지하여 영남과 호남지방에 많이 살고, 둘째 아들 요(耀)의 후손 중파(仲派)는 경상도(慶尙道) 지방에, 막내 휘(輝)의 후손인 계파(季派)는 합천군(陜川郡)을 중심으로 집중 세거하며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져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변남룡(卞南龍)

시중(侍中) 광의 8세손 남룡(南龍)이 조선이 개국(開國)되자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제수되었으나 불취하고 직산(稷山)에 은거(隱居)한 후 절의(節義)를 지켰다.

 

변흔

고려 말에 문과(文科)에 급제했던 혼( )은 사복시 주부(司僕시主簿)을 역임했다.

 

변순(卞純)

변순(純)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을 거쳐 연안 부사(延安府使)를 역임했다.

 

변타

장흥 부사(長興府使)를 역임했다.

 

변굉(卞紘)

참판(參判)를 역임했다.

 

변효문(卞孝文)

1396(태조 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초계 ( 草溪 ). 초명은 계문(季文), 자는 일민(一敏). 경(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빈(贇)이고, 아버지는 판윤 ( 判尹 ) 남룡(南龍)이며, 어머니는 영문하부사 염제신 ( 廉悌臣 )의 딸이다. 1414년(태종 14) 알성문과에 을과 3등으로 급제, 내외직을 지낸 뒤 직제학을 거쳐 1428년(세종 10) 봉상시소윤(奉常寺少尹)을 지냈다.

1439년 판내섬시사(判內贍寺事)를 거쳐 그 이듬해 첨지중추원사가 되었으나, 이전에 회령대후(會寧待候)로 재직시에 귀화한 여진인들의 의복지급사건에서 죄를 지은 사실로 의금부·사헌부 등의 탄핵을 받아 1441년 파직되었다. 1443년 첨지중추원사로 복직되어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으나, 태종 때의 죄인이었던 이속(李續)의 손자인 인휴(仁畦)를 통신사 수행시 대동하였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다.

1446년 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를 거쳐 경창부윤(慶昌府尹)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 이듬해에 이전에 훈련제조(訓鍊提調) 재직 때에 아들 이흠(李欽)의 무과시험에서 감찰 ( 監察 )에게 청탁한 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직산 ( 稷山 )으로 장류(杖流 : 장형을 받고 유배당함)되었다.

1454년(단종 2) 다시 중추원부사를 거쳐 경주부윤·전주부윤을 역임하였으나, 1458년(세조 4) 전주부윤 재직중 축재한 죄로 파직되었다. 1444년 ≪오례의주 五禮儀注≫를 상정(詳定)하였고, 앞서 최치운 ( 崔致雲 )· 이세형 ( 李世衡 )·김황(金滉) 등과 함께 ≪신주무원록 新註無寃錄≫을 편찬하였다.

 

변형량(卞亨良)

∼ 1504(연산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초계 ( 草溪 ). 자는 형지(亨之). 제학 ( 提學 ) 효문(孝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균(鈞)이고, 아버지는 감( 諫 )이며, 어머니는 겸도총관(兼都摠管) 구문신 ( 具文信 )의 딸이다. 김종직 ( 金宗直 )의 문인이다.

1495년(연산군 1) 진사가 되고, 150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로 있다가, 1504년에 김종직의 제자로서 바른말을 잘 간함으로써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무장 ( 茂長 )에 유배되었다가 이어 효수 ( 梟首 )당하였다.

 

변훈남(卞勳男)

승세(承世)의 아들 훈남(勳男)은 군수(郡守)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명종(明宗)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변준(卞雋)

연안공(延安公) 순(純)의 증손 변준(雋:훈련원 부정 옥곤의 아들)은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功)을 세워 정국사등공신(靖國四等功臣)에 책록되고 지의금부사(知義禁府使)를 거쳐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올라 초계군(草溪君)에 봉해졌다.

 

변시민(卞時敏)

참봉(參奉) 유청(惟淸)의 아들 시민(時敏)은 선조(先祖) 때 경흥부사(慶興府使)과 낙안 군수(樂安郡守)을 거쳐 남원 영장(南原營將)을 역임했다.

 

변시환(卞時煥)

유명(惟明)의 아들 시환(時煥)은 수학(數學)에 정통하고 문장(文章)으로 명성을 떨쳤다.

 

변경복(卞景福)

형량(亨良)의 둘째 아들로 선조(宣祖) 때 효행(孝行)을 떨쳐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변시익(卞時益)

<변충효(卞忠孝)>로 불리웠던 시익(時益:경복의 손자)이 유명했다.

 

변원규(卞元圭)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초계 ( 草溪 ). 자는 대시(大始), 호는 길운(吉雲) · 주항(蛛舡).

개화기에 무비자강(武備自强)을 위한 청나라에의 유학생 파견을 주선하기 위하여 청자문(請咨文)을 가지고 1880년(고종 17) 별뢰자관(別賚咨官)으로 청나라에 파견되어 이홍장(李鴻章)과 4개조로 된 조선국원변래학제조조련장정(朝鮮國員辨來學製造操練章程)을 체결하여 성공적인 외교교섭으로 유학생 파견을 가능케 하였다.

1881년 영선사 ( 領選使 ) 김윤식 ( 金允植 )을 따라 별견당상(別遣堂上)으로 파견되어 군기제조 학습을 위한 유학생단을 인솔하고 청나라에 건너가 그 곳에 머물며 3차에 걸친 김윤식과 이홍장 회담에 참석하였다.

귀국 후 1882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 정각사(征 稼 司)의 참의를 거쳐 1884년 기계국방판(器械局 暾 辦)이 되고 이어 지돈녕부사 · 한성부판윤을 역임하였다. 시와 글씨에 능하였다

 

변필상(卞必祥)

조선 초에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한 맹량(孟良:옥란의 맏아들)의 아들 필상(必祥)은 좌승지(左承旨)를 지냈다.

 

변중량(卞仲良)

∼ 1398(태조 7).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호는 춘당(春堂). 신의위보승산원(神義衛保勝散員) 주(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찬성사(贈贊成事) 원(原 또는 元)이고, 아버지는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옥란(玉蘭 또는 玉鸞)이며, 어머니는 전객서부령(典客署副令) 성공필(成公弼)의 딸이다. 대제학 계량(季良)의 형이며, 태조 이성계 ( 李成桂 )의 이복형인 원계(元桂)의 사위이다. 정몽주 ( 鄭夢周 )의 문인이다.

고려 말기에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를 지냈다. 1392년(공양왕 4) 이방원 ( 李芳遠 )이 이제(李齊) 등과 함께 스승인 정몽주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미리 눈치채고 이성계에게 문병가는 것을 말렸으나 정몽주는 정세를 살피기 위하여 이성계의 집에 다녀오다가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 ( 趙英珪 ) · 고려(高呂) 등에게 살해되었다.

1395년(태조 4) 전중경(殿中卿)으로 있으면서 병조정랑 이회(李 饒 ) 등과 함께, 정권과 병권이 조준 ( 趙浚 ) · 정도전 ( 鄭道傳 ) · 남은 ( 南誾 ) 등에게 다 맡겨진 것은 옳지 못하다는 말을 했다가 순군옥 ( 巡軍獄 )에 갇히고 전중경의 관직을 박탈당하였다. 1395년 원종공신 ( 原從功臣 )에 녹훈될 때에 전중경이었다.

1398년 우부승지 · 우산기상시(右散騎常寺)에 이르렀다. 이해 제1차 왕자의 난에 정도전의 일파로 몰려 참살되었다. 시에 능하였고, 전라북도 고창의 병암서원 ( 屛巖書院 )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 춘당유고 春堂遺稿 ≫ 가 있다.

 

변계량(卞季良)

1369(공민왕 18) ∼ 1430(세종 12).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 주(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찬성사 원(元)이고, 아버지는 검교판중추원사(檢校判中樞院事) 옥란(玉鸞)이다. 어머니는 제위보부사(濟危寶副使) 조석(曺碩)의 딸이다. 이색 ( 李穡 ) · 권근 ( 權近 )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네 살에 고시의 대구(對句)를 외우고 여섯 살에 글을 지었다. 1382년(우왕 8)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는 생원시에도 합격하였다. 1385년 문과에 급제, 전교주부(典校注簿) · 비순위정용랑장(備巡衛精勇郎將) 겸 진덕박사 ( 進德博士 )가 되었다.

1392년 조선 건국과 더불어 천우위중령중랑장(千牛衛中領中郎將) 겸 전의감승(典醫監丞)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의학교수관(醫學敎授官)을 거쳐 1396년(태조 4)에는 교서감승(校書監丞)에 지제교 ( 知製敎 )를 겸하였다.

태종 초에는 성균관학정(成均館學正), 사제감소감 겸 예문관응교와 직제학을 역임하였다.

1407년(태종 7) 문과중시에 을과 제1인으로 뽑혀 당상관에 오르고 예조우참의(禮曹右參議)가 되었다. 이듬해 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이 되고, 그 뒤 예문관제학 · 춘추관동지사 겸 내섬시판사 · 경연동지사 등을 거쳐, 1415년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이 되었다.

이 때 가뭄이 심해 상왕이 크게 근심하자,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 예는 아니나 상황이 절박하니 원단(圓壇)에 빌기를 청하였다. 이에 태종이 그에게 제문을 짓게 하고 영의정 유정현 ( 柳廷顯 )을 보내 제사드리게 하니 과연 큰비가 내렸다.

그 뒤 태종 말까지 수문전제학 · 좌부빈객 · 예문관대제학 겸 성균관대사성 · 우빈객 · 예조판서 · 경연지사 · 춘추관지사 · 의정부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1419년에는 대부분의 관료들이 반대한 왜구 토벌을 강력히 주장, 이종무(李從茂)를 앞세운 기해동정(己亥東征)을 성공케 하는 데 공헌하였다.

1420년(세종 2) 집현전이 설치된 뒤 그 대제학이 되었고, 1426년에 우군도총제부판사(右軍都摠制府判事)가 되었다. 특히 문장에 뛰어나 거의 20년 간 대제학을 맡아 외교 문서를 작성하였다. 과거 시관으로 지극히 공정을 기해 고려 말의 폐단을 개혁하였다.

그러나 대제학으로서 귀신과 부처를 섬기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하여 ‘ 살기를 탐내고, 죽기를 두려워 한 사람 ’ 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고려 말 조선 초 정도전 ( 鄭道傳 ) · 권근으로 이어지는 관인문학가의 대표적 인물로서 〈 화산별곡 華山別曲 〉 · 〈 태행태상왕시책문 太行太上王諡冊文 〉 을 지어 조선 건국을 찬양하였다. 저서로 ≪ 춘정집 春亭集 ≫ 3권 5책이 전한다.

≪ 태조실록 ≫ · ≪ 국조보감 國朝寶鑑 ≫ 의 편찬과 ≪ 고려사 ≫ 개수(改修)에 참여했고, 기자묘 ( 箕子墓 )의 비문과 〈 낙천정기 樂天亭記 〉 · 〈 헌릉지문 獻陵誌文 〉 을 찬하였다.

그 외 역대 신하들의 말이나 행실로써 경계가 되고 본받을만한 것을 모아 쓴 ≪ 정부상규설 政府相規說 ≫ 이 있다. ≪ 청구영언 ≫ 에 시조 2수가 전한다. 거창의 병암서원 ( 屛巖書院 )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卞季良(변계량)선생의 전설.

1)

다른 사람과 혼인하여 남의 아내가 된 한 처녀가 변계량의 인품과 벼슬에 반해, 그 남편을 남몰래 죽이고 자기가 처녀인 것처럼 속이고 변계량과 다시 혼인하여 세 자식을 낳고 살았다.
몇년 뒤에 이 사실을 안 변계량이 가차없이 그녀와 그녀가 낳은 세 아들을 모두 죽이고 〈여자개가금지법>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2)

가뭄에 비를 내리게 하다.

선생은 17세에 이미 문장에 뛰어났으며 대제학(大提學)을 20여 년간 지내는 동안 외교문서는 대부분 선생 손으로 도맡아 지은 명 문장가이다.

인조 15년 온 나라에 한발이 극심하여 초목과 곡식이 말라죽고 식수마저 딸려 백성들이 아우성 칠 때 선생은 축문을 지어 하늘에 고하여 기우제를 지내 비를 내리게 하여달라고 기원하니, 많은 비가 내려 온 나라의 가뭄이 해소되었다.

이에 태종(太宗)은 그의 공을 치하하여 말 한 필을 하사하였다.
                                                                                                    <출전: 내고장 전통문화(청도군 1981)>

 

 

 

 

卞仲良(변중량)선생의 전설.

 

조실부모한 효자.

선생은 타고난 천품이 온화하고 침착하며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8세이 부친상을 당하고 애통하고 비탄함이 어른과 같아 향인들이 감탄하였다고 한다.
또한 어머니를 모시기 극진하여 어른도 따를 수 없었는데 12살에 또 다시 모친상을 당해 그 통곡함이 애절하였다 한다.

성생은 또한 형제간에도 우애가 아주 돈독해서 형제가 한 집안에서 살았는데, 집안을 잘 다스렸다고 한다.

수신재가로 늘 주장하니 선생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성실은 만 가지 거짓을 물리친다.
둘째, 고경한 마음을 가지면 만 가지 간사함을 대적할 수 있다.
                                                                                              <출전: 내고장 전통문화(청도군 1981)>

 

 

卞季良(변계량) 선생의 일화. 초계

 

공은 어려서부터 신기(神氣)가 여느 아이들과는 달라 4세에 고시(古詩)의 대구(對句)를 외웠고 6세에는 처음으로 글귀를 연결시켜 지었다. 홍무 15년인 임술년(壬戌年, 1382년 우왕 8)에 공의 나이 14세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이듬해인 계해년(癸亥年, 1383년 우왕 9)에는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으며, 홍무 18년인 을축년(乙丑年, 1385년 우왕 11)에 공의 나이 17세로 문과에 급제한 천재였다.

 

 

 

卞季良(변계량) 선생의 일화.

 

영락 13년인 을미년(乙未年, 1415년 태종 15) 봄에는 가정 대부(嘉靖大夫)에 올라 세자 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이 되었다.그때에 날씨가 한창 크게 가물어 벼가 말라죽으니 태종께서 가뭄을 걱정하여 기도드리지 않은 신()이 없었으나 6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그러자 공이 상언(上言)하기를, “우리나라에서 상제(上帝,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이 비록 예()는 아니나, 기왕 절박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원구단(圜丘壇)에 비를 내리도록 빌어 보기를 청하옵니다.” 하였더니, 태종께서 마음으로 옳게 여기어 즉시 공에게 제문을 지으라. 명하고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을 보내서 제를 지내게 하니 이윽고 하늘에서 큰비가 내렸다. 태종께서는 매우 기뻐하여 공에게 안구마(鞍具馬) 한 필을 내렸다.

 

 

 

卞季良(변계량) 선생의 일화.

 

공은 옥사(獄事)를 다룸에 공명하고 정당하게 하였으며, 사형을 단죄함에 있어서는 불쌍히 여겨 기뻐하지 않으면서 살릴 방도를 찾았으므로 살게 된 사람이 많았기에, 듣는 사람이 탄복하였고 임금이 더욱 중하게 여겼는데, 이로부터 수십 년 동안 항상 이 직책을 겸했다.

 

 

卞季良(변계량) 선생의 일화.

 

기해년(己亥年, 1419년 세종 원년)에 왜구(倭寇)가 우리나라 남쪽 변방을 침범하여 사람을 살해하고 물건을 약탈하며 여사(閭舍)를 분탕질하자, 태종 대왕이 전하(세종)와 함께 여러 신하들을 모아 토벌하는 것의 편당 여부에 대해 의논하였는데, 모두가 불가하다고 말했으나, 공 혼자서 토벌할 계책을 진달하자, 임금이 가납(嘉納)하고 공에게 명하여 교문(敎文)을 지어 왜노(倭奴)의 죄악을 낱낱이 세어 들추어내게 하는 한편, 장천군(長川君) 이종무(李從茂)로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가서 정벌하게 했는데, 마침 풍세(風勢)가 순조롭지 않아서 비록 대첩(大捷)의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으나 이로부터 그 이후로는 왜노가 두려워서 굴복하여 감히 변경을 침범하지 못하였으며, 또 포로들을 죽이자고 의논할 때에 공이 불가함을 굳게 주장하자 임금이 따랐다.

 

卞季良(변계량) 선생의 일화.

 

기유년(己酉年, 1429년 세종 11)에 임금이 대신들을 모아놓고 명하기를, “우리나라에서는 금과 은이 생산되지 않는데도 해마다 중국에 바치는 공물이 무려 천여 냥()이나 되어 끝내 계속하지를 못할 것이니, 이를 줄이거나 면제시킬 계책을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마땅히 사유를 갖추어 주청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즉시 공에게 명하여 표문(表文)을 지어서 실정을 아뢰도록 했는데, 천자의 윤허를 얻어 영구히 이 공물을 없애게 되었다.

卞季良(변계량) 선생의 일화.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으며 성리(性理)를 연구하는 것으로 주된 임무를 삼아, 날마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양촌(陽村, 권근(權近)) 제현의 문하에 유학하면서 사우(師友) 연원(淵源)의 바름을 얻었으므로 견문이 더욱 넓고 조예가 더욱 깊었다. 문형(文衡)을 맡은 20여 년 동안 사대 교린(事大交隣)의 외교 문서가 모두 공의 손에서 나왔는데, 조정에서는 매양 표사(表辭)가 정밀하고 절실한 것을 칭송했다.

 

 

 

卞季良(변계량) 선생의 일화.

 

공은 마음가짐이 견고 확실하여 강포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량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자잘한 일에 구애되지 않으면서 원통함을 씻어 주고 남에게 혜택을 끼치며 학문을 흥기하고 어진 이를 천거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았으므로, 한 시대의 명사가 그의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공은 학식이 높고 밝아 일을 헤아리고 이치를 분석하였으므로, 무릇 큰일을 처리하고 크게 의심스러운 것을 결단함에 있어 사람들의 뜻밖에서 나왔으므로, 동료들이 처음에는 그의 우원(迂遠)함을 의심하다가도 끝내는 그 견해의 탁이(卓異)함에 복종하였다.

공은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그 효도를 극진히 하다가 그 예를 다하였는데, 일찍이 백씨(伯氏)에게 권하여 사당을 세워 선세(先世)를 받들게 했으니, 대개 포은(圃隱)이 처음으로 그렇게 한 일을 보았던 것이다.

 

 

<한민족대성보>에서 인용,.

 

 

 

 

항렬(行列)

밀양변씨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4

鎭(진)

26

俊(준)

28

榮(영)

25

思(사)

27

洙(수)

29

煥(환)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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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 함양 박.jpg 함양박씨(朴) 청남 14-08-27 3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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