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ail : juntonggahun@naver.com
>> 한국의 성씨


서흥김씨(金)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서흥김씨)

 

본관(本貫): 서흥(瑞興)

시조(始祖): 김보(金寶)

유래(由來):

 

신라  왕실(新羅王室)의 후예인 서흥 김씨(瑞興金氏)는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 6세손으로 고려 중엽에 금오위 중랑장(金吾衛中郞將)을 지낸 김보(金寶)를 시조(始祖)로 한다.  

 

()의 손자 천록(天祿)은 고려 때의 이름난 무장으로 1270(원종 11) 삼별초(三別抄)가 진도(珍島)에서 난을 일으키자 김방경(金方慶)의 부장(部將)으로  이를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1274(원종 15) ·원연합군(·元聯合軍)이 일본(日本) 대마도(對馬島) 정벌(征伐)할 때도 참전하여 대공을 세워 1280(충렬왕 6) 도첨의시랑 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상장군(上將軍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로 서흥군(瑞興郡)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천록(天祿)이 봉군(封君)받은 지명인 서흥(瑞興)을 관향(貫鄕)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면서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시켜 명문의 기틀을 다졌다.  

 

가문의 중요 인물

 

김세구(金世丘)

천록(天祿)의 아들 세구(世丘)가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으며, 손자 봉환(鳳還)1353(공민왕 2)  문과에 급제하여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를 거쳐 대사성(大司成)에 올라, 아들 선보(善保 : 봉순대부·판서운관사를 역임)와 함께 고려조에서 가문을 빛냈다.  

 

김중건(金中乾), 김중곤(金中坤), 김중인(金中寅) 3형제

조선조에 와서는 선보(善保)의 아들 3형제중 맏아들 중건(中乾)이 세종(世宗) 때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냈고, 둘째 중곤(中坤)은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역임했으며, 막내인 중인(中寅)1422(세종 4)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박사(博士)를 역임하여 이름을 날렸다.  

 

김효인(金孝仁)

판서(判書) 중건(中乾)의 손자 효인(孝仁)은 성종(成宗)  등과(登科)하여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정의 현감(旌義縣監)을 지내고 1489(성종 20) 좌리이등공신(佐理二等功臣) 올랐으다.

 

김유(金紐)

()는 세조(世祖) 때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르렀다.  

 

김굉필(金宏弼)

1454(단종 2) 1504(연산군 10). 조선 전기의 문신 · 학자. 자는 대유 ( 大猷 ), 호는 사옹( 侶 翁) · 한훤당(寒暄堂). 예조참의 중곤(中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의영고사(義盈庫使) 소형(小亨)이고, 아버지는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 ()이며, 어머니는 청주 한씨(淸州韓氏)로 중추부사(中樞副使) 승순(承舜)의 딸이다. 김종직 (金宗直)의 문인이다. 소학 에 심취해 소학동자(小學童子) ’ 로 불리었다.

선조는 서흥의 토성 ( 土姓 )으로서 고려 후기에 사족(士族)으로 성장했는데, 증조부인 사곤(士坤)이 수령과 청환(淸宦)을 역임하다가 아내의 고향인 경상도 현풍현에 이주하면서 그곳을 주근거지로 삼게 되었다.

할아버지인 의영고사 소형이 개국공신 조반(趙 獨 )의 사위가 되면서 한양에도 연고를 가지게 되어, 그는 할아버지 이래 살아오던 한성부 정릉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호방하고 거리낌이 없어, 저자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매로 치는 일이 많아 그를 보면 모두 피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분발해 점차 학문에 힘쓰게 되었다.

근기 지방의 성남(城南) · 미원(迷原) 등지에도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나, 주로 영남 지방의 현풍 및 합천의 야로(冶爐 : 처가), 성주의 가천(伽川 : 처외가) 등지를 내왕하면서 사류(士類)들과 사귀고 학문을 닦았다.

이 때 김종직( 金宗直 )의 문하에 들어가 소학 을 배웠다. 이를 계기로 소학 에 심취해 스스로를 소학동자 라 일컬었고, 이에서 받은 감명을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를 알지 못했더니, 소학 속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네.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해 자식 구실을 하려 하노니, 어찌 구구히 가볍고 따스한 가죽 옷과 살찐 말을 부러워하리오. ” 라고 술회했다고 한다.

이후 평생토록 소학 을 독신(篤信)하고 모든 처신을 그것에 따라 행해 소학 의 화신이라는 평을 들었으며, 나이 삼십에 이르러서야 다른 책을 접했고 육경(六經)을 섭렵하였다.

1480(성종 11)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이 때에 장문의 상소를 올려 원각사 ( 圓覺寺 ) 승려의 불법을 다스릴 것을 포함한 척불과 유학의 진흥에 관한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였다.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 ( 李克均 )이 이학 ( 理學 )에 밝고 지조가 굳다는 명목의 유일지사(遺逸之士)로 천거해 남부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어서 전생서참봉 · 북부주부 등을 거쳐, 1496년 군자감주부에 제수되었으며, 곧 사헌부감찰을 거쳐 이듬 해에는 형조좌랑이 되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장() 80대와 원방부처(遠方付處)의 형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2년 뒤 순천에 이배되었다.

그는 유배지에서도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힘써, 희천에서는 조광조 ( 趙光祖 )에게 학문을 전수해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맥을 잇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 당인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졌다.

중종반정 뒤 연산군 때에 피화한 인물들의 신원이 이루어면서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자손은 관직에 등용되는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 뒤 사림파의 개혁 정치가 추진되면서 성리학의 기반 구축과 인재 양성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되어 그의 존재는 크게 부각되었다. 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제자들의 정치적 성장에 힘입은 바 컸다.

그 결과 1517(중종 12) 정광필 ( 鄭光弼 ) · 신용개 ( 申用漑 ) · 김전 ( 金詮 ) 등에 의해 학문적 업적과 무고하게 피화되었음이 역설되어 다시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도학 ( 道學 )을 강론하던 곳에 사우를 세워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그의 문인들이 피화되면서 남곤 ( 南袞 )을 비롯한 반대 세력에 의해 그에게 내려진 증직 및 각종 은전에 대한 수정론이 대두되었다. 당시의 이같은 정치적 분위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뒤 그를 받드는 성균관 유생들의 문묘종사(文廟從祀) 건의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1575년 영의정 추증, 1577(선조 10) 시호가 내렸졌으며, 1610(광해군 2) 대간과 성균관 및 각 도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에 의해 정여창 ( 鄭汝昌 ) · 조광조 · 이언적 ( 李彦迪 ) · 이황 ( 李滉 ) 등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학문적으로는 정몽주 ( 鄭夢周 ) · 길재 ( 吉再 ) · 김숙자 ( 金叔滋 ) ·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우리 나라 유학사의 정통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김종직을 사사(師事)한 기간이 짧아 스승의 후광보다는 자신의 학문적 성과와 교육적 공적이 더 크게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사우(師友)들 가운데에는 사장 ( 詞章 )에 치중한 인물이 많았으나, 정여창과 함께 경학(經學)에 치중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성향으로 인해 치인(治人) ’ 보다는 수기(修己) ’ 에의 편향성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현실에 대응하는 의식에서도 그러한 성격이 잘 나타나, 현실상황에 적극적, 능동적으로 대응하려는 자세는 엿보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20여 인에 달하는 문인들은 두 차례 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크게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 나아가 유배지 교육 활동을 통해 더욱 보강되어 후일 개혁 정치를 주도한 기호계(畿湖系) 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하게 되었다.

소학 에 입각한 그의 처신(處身), 복상(服喪) · 솔가(率家) 자세는 당시 사대부들의 귀감이 되었으며, ‘ 한훤당의 가범 ( 家範 ) ’ 으로 숭상되었다. 후학으로는 조광조(趙光祖) · 이장곤(李長坤) · 김정국(金正國) · 이장길(李長吉) · 이적(李勣) · 최충성(崔忠誠) · 박한공(朴漢恭) · 윤신(尹信) 등이 있다.

아산의 인산서원 ( 仁山書院 ), 서흥의 화곡서원 ( 花谷書院 ), 희천의 상현서원 ( 象賢書院 ), 순천의 옥천서원 ( 玉川書院 ), 현풍의 도동서원 ( 道東書院 )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경현록 · 한훤당집 · 가범 家範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수열(金壽說)

중종(中宗) 때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지낸 수열(壽說)은 가문의 꽃이었다.

 

김건(金鍵)

예산 현감(禮山縣監) 역임.

김익(金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김선(金宣)

진도군수(珍島郡守)

 

김충수(金忠守)

임진왜란 때 죽산(竹山)에서 의병을 모아 왜군과 싸워 공을 세운 뒤 아들 함()과 함께 순절하여 숙종(肅宗) 때 정려(旌閭)가 세워지고 1740(영조 16) 장령(掌令)에 추증되었다.

 

김계조(繼祖)

효행이 뛰어나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김치곤(金致坤)

순조(純祖)  때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을 지낸 치곤(致坤)이 유명하였다.

 

김대곤(金大坤)

헌종(憲宗) 때 우부승지(右副承旨) 오름.

 

김규찬(金奎燦)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

 

김희국(金熙國)

고종(高宗) 때의 흥해 군수(興海郡守)

 

김규화(金奎華)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김화식(金華植)

현풍군수(玄風郡守)

 

김규충(金奎衝)

봉화 군수(奉化郡守)

 

김장권(金長權)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金孝誠(감효성) 의 전설.

 

김효원은 남달리 여색을 조아해서 사랑하는 여인이 많았다.

그리고 그의 부인도 또한 질투가 지나치게 심한 사람이었다. 하루는 공이 밖에서 들어오다가 문득 안방을 보니 부인의 자리 옆에 검정색으로 물을 들인 모시가 한 필 놓여 있었다.

 

이에 공이 물었다. [저 검정 모시는 장차 어디에 쓰려는 것이기에 부인의 자리 곁에 놓아두었소?] 그러자 부인은 정색을 하며 대답하였다.

 

[당신이 뭇 첩들에게 혹하여 본처를 원수처럼 대하시기에, 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결연히 중이 될 각오를 하고 모시에 물을 들여 놓았던 것이오.]하니 공은 웃으며 말했다.

[나는 본래 여자를 좋아해서 妓女(기녀女醫(여의)로부터  良人(양인賤人(천인)·  絃首(현수)·  針線婢(침선비)에 이르기까지 자색만 반반하면 반드시 모두 정을 통하였소. 그런데 여승의 경우에는 아직 한 번도 가까이한 적이 없었소. 그대가 여승이 될 수만 있다면 그러한 내 소원을 풀어주는 것이니 그것은 정말 내가 바라는 바요.]

 

 그 말을 들은 부인은 끝내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검정 모시를 접어 땅바닥에 내동댕이칠 뿐이었다.                                       

 

金宏弼(김굉필) 의 전설.

 

小學(소학)을 읽고 달라진 사람.

김굉필은 어려서는 호방하고 거리낌이 없어 , 저자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이유없이 사람들을 마구 매로 치는 일이 많아 그를 보면 모두 피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차츰 분발해 점차 학문에 힘쓰게 되었다.

이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소학(小學)을 배웠는데 이를 계기로  소학에 심취해 스스로를 소학동자 라 일컬었고, 이에서 받은 감명으로 사람이 달라졌다.

소학을 정독하고 하는 말이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를 알지 못했더니, 소학 속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네.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해 부모에게 자식 구실을 하려 하노니, 어찌 구구히 가볍고 따스한 가죽 옷과 살찐 말을 부러워하리오.라고 술회했다고 한다.

이후 평생토록 소학(小學)을 독신(篤信)하고 모든 처신을 소학에 따라 행해  소학(小學)의 화신이라는 평을 들었으며, 나이 삼십에 이르러서야 다른 책을 접했고 육경(六經)을 다 읽었다고 한다다. .          

 

 삿갓에 되롱이 닙고 세우(細雨) 중에 호미 매고

산전(山田)을 훗매다가 녹음(綠陰)에 누었으니          

목동(牧童)이 우양(牛羊)을 몰아 잠든 나를 깨워라.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0

(),()

(),()

()

26

()()

(),()

32

(),()

21

(),()

(),()

(),()

27

(),()

(),()

()

33

(),()

22

(),()

(),()

()

28

(),()

(),()

34

 

23

(),()

()

29

(),()

沿(),()

35

 

24

(),()

(),()

()

30

(),()

()

36

 

25

(),()

()

31

(),()

()

37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서흥 김씨(瑞興金氏)는 남한에 총 6,098가구, 24,28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게시물 목록
번호 제 목 글쓴이 등록일 조회
105 언양김.jpg 언양김씨(金) 청남 14-08-25 4188
104 양주 김.jpg 양주김씨(金) [1] 청남 14-08-25 2832
103 양산김.jpg 양산김씨(金) 청남 14-08-25 2504
102 야성 김.jpg 야성김씨(金) [1] 청남 14-08-25 3852
101 안악 김.jpg 안악김씨(金) [2] 청남 14-08-25 2854
100 안성 김.jpg 안성김씨(金) 청남 14-08-25 2214
99 안산 김.jpg 안산김씨(金) 청남 14-08-25 2731
98 안로 김.jpg 안로김씨(金) 청남 14-08-25 1907
97 신안동김.jpg 안동 김씨: 신 (金) 청남 14-08-25 6090
96 구안동김1.jpg 안동 김씨:구 (金) 청남 14-08-25 6122
95 신천김.jpg 신천김씨(金) 청남 14-08-25 2239
94 시흥김.jpg 시흥김씨(金) 청남 14-08-25 2196
93 순천김.jpg 순천김씨(金) 청남 14-08-25 4561
92 수원 김.jpg 수원김씨(金) 청남 14-08-25 3316
91 수안 김.jpg 수안김씨(金) 청남 14-08-25 2883
90 설성 김.jpg 설성김씨(金) 청남 14-08-25 2665
89 일선김1.jpg 선산김씨: 일선김씨(金) 청남 14-08-25 3531
88 선산김.jpg 선산김씨:일선김씨(金) 청남 14-08-25 4702
서흥김.jpg 서흥김씨(金) 청남 14-08-25 3721
86 상원김.jpg 상원김씨(金) 청남 14-08-25 2322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