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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김씨:일선김씨(金)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선산:일선김씨)

 

본관(本貫): 선산(善山):일선(一善)

시조(始祖): 김추(金錘)

유래(由來):

 

선산(善山)은 경상북도 중서부에 위치한 고장으로 신라  눌지왕(訥祗王) 때 일선(一善)으로 부르다가 경덕왕(景德王 : 35대 왕, 재위기간 : 742 765) 때 숭선(崇善) 또는 병정현(竝井縣)이라 하였으며, 서기 995(고려 성종 14)에 선주(善州)로 고쳤고, 조선  태종(太宗 : 3대 왕, 재위기간 : 1400 1418) 때 와서  지금의 선산(善山)으로 개칭되었다.  

 

선산 김씨(善山金氏)는 신라 왕실의 후손으로 경순왕(敬順王)의 여덟 째 아들이자 고려 왕건( )의 외손인 김추(金錘)가 고려 때 일선군(一善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선산(善山)으로 삼게 되었다.  한편 김선궁(金宣弓)을 시조로 하는 또 하나의  선산 김씨(善山金氏)가 있어 이 계통은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일선 김씨(一善金氏)로 칭해왔으나, 최근에 와서 다시 선산 김씨(善山金氏)로 환원되었으므로 서로 본관(本貫)을 구분하기가 힘들게 되었다.   

 

김씨(善山金氏)는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 영남의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일컬어졌으며, 후대로 내려오면서 삼척(三陟원주(原州희천(熙川진주(晋州진위(振威

(南原) 등으로 분적(分籍)되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김천(金遷)

시조의 2세손 천()이 고려조에서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일선백(一善伯)에 봉록(封祿)되었다.

 

김선공(金善公)

시조의 8세손 선공(善公)은 병부상서(兵部尙書)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지제고(知制誥) 겸 금오위  대장군(金吾衛大將軍)으로 일선부원군(一善府院君)애 봉해졌다.  

 

 

김회(金會)

 

한편 집현전 태학사(集賢殿太學士)를 역임하고 숭선군(崇善君)에진 인선(印善 : 시조의 11세손) 아들 회()가 문하시중(門下侍中삼중대광(三重大匡판삼사사(判三司事)로 숭선부원군(崇善府院君)에 봉록되어 가문을 명문의 반열(班列)에 올려놓았다.  

 

 

김문(金文)

특히 고려말에 검교중랑장(檢校中郞將) 겸 금오위 별장(金吾衛別將)을 역임한 문()은 개성(開城) 봉향리(奉香里)에 세거(世居)하며 슬하에  아들 4형제를 두어 선산 김씨(善山金氏)4대 산맥을 이루었다.  

 

김성원(金成元)

고려조에서 서운관정(書雲觀正)을 지내고 중서령(中書令)에 추증된 맏아들 성원(成元)은 중서령공파(中書令公派)의 파조(派祖) 되었다.

 

김기(金起)

성원(成元)의 아들 기()가 정순대부(正順大夫)로 광주 목사(廣州牧使)를 지내고 나라에  공울 세워 화의군(和義君)에 봉해졌으나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선산(善山)으로 내려가  불사이군의 충절을 기렸다.  

 

김성부(金成富)

()의 둘째 아들인 성부(成富)는 조선개국원종공신(朝鮮開國原從功臣)으로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올랐으나 이성계(李成桂)가 아들에게  왕위(王位)를 물려주고 함흥(咸興)으로 갈 때 호종하였다가 함경도에 정착하게 되어 판서공파(判書公派)의 파조(派祖)가 되었다.

 

김성룡(金成龍

산원동정(散員同正)으로 형인 성부(成富)와 함께  개국원종공신에 올랐던  성룡(成龍)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로 좌의정(左議政)을 지내고, 화의부원군(和義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한성부(漢城府) 동교상좌리(洞橋上左里)에 거주하며 좌의정공파(左議政公派)의 파조가 되었다.

 

김성려(金成呂)

()의 막내아들인 성려(成呂)는 별장동정(別將同正)으로 평안도에 정착하여 후손들이 별장공파(別將公派)의 파조(派祖)로 삼게 되었다.  

 

김취성(金就成)

일찍이 박영(朴英)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한 취성(就成)은 김안국(金安國이언적(李彦迪)의 천거로 네 차례나 벼슬에  등용되었으나 모두 사퇴했고, 의약(醫藥)에 능통하여 명성을 날렸다.  

 

김취문(金就文)

광좌의 다섯째 아들인 취문(就文)1537(중종 3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후 여러 외직(外職)을 거쳐 사성(司成)이 되었으며, 선조(宣祖)가 즉위하자 강원도 관찰사(江原都觀察使)를 역임하고 대사간(大司諫 : 사간원의 정 3 품 으뜸 벼슬)에 올랐다. 특히 그는 관직에 있는 동안 청렴강직하기로 유명했으며, 명종(明宗)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어 더욱 가문을 빛냈다.  

 

김종무(金宗武)

취문의 아들 종무(宗武)는 임진왜란 때 사근(沙斤 : 지금의  함안) 찰방(察訪)의 말직(末職)으로 이  (  ( ) 등과 함께 왜군과 싸워 전공을 세우고,  

(尙州)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명문의 전통을 이었다.   

 

김경남(金慶南)

판관(判官)

 

김천영(金天英)

광해군(光海君) 때 전적(典籍)을 지냄.

 

김양선(金揚善)

감찰(監察)을 거쳐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를 역임한 양선(揚善)이 유명했다.

 

김탁(金濯)

통진 현감(通津縣監)

 

김하량(金廈樑)

판결사(判決事)

 

김원섭(金元燮)

현종(顯宗) 때의 대사간(大司諫)

 

김이달(金履達)

영암 현감(靈岩縣監)

 

김몽화(金夢華)

1754(영조 30) 문과에 급제한 몽화(夢華)는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올랐다.

 

김성진(金聲振)

성진(聲振)은 순조(純祖) 때 등과(登科)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과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를 지냈다.

 

김희태(金希台)

희태(希台)는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역임하였다.

 

김수승(金秀升)

예안현감(禮安縣監)

 

김택화(金宅和)

명천 도호부사(明川都護府使)

 

김증(金增)

남해 현령(南海縣令).

 

김숙원(金璹遠)

보성 군수(寶城郡守)

 

김병옥(金秉沃)

횡성 현감(橫城縣監)

 

김우식(金佑植)

울산 군수(蔚山郡守)

 

金宗直(김종직) 선생의 전설

 

김종직이 태어나자 그 마을 앞을 흐르는  시냇물의 맛이 사흘 동안 매우 달아서 내 이름을 甘川(감천)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김종직은 어릴 때 짐승의 말소리를 알아들었다고 한다.

한편 죽을 때 유언으로 자기 관의 길이를 보통 관보다 한 자 더 길게 만들라고 후손에게 당부하여, 자손들이 유언대로 관을 만들어 장사를 지냈다.

 

그 뒤 무오사화로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게 되었는데, 그의 관을 파내서 톱으로 끊으니 관을 길게 만들었기 때문에 관만 끊기고 시체는 손상을 입지 않았다.

이장을 할 때 보니 비록 시체지만 머리카락 · 손톱 · 발톱 등이 자라서 자신의 무죄를 무언으로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金善兼(김선겸) 선생의 전설

 

부자가 충성한 충효의 가문.

김익중(金益重)의 아들 김선겸(金善兼)은 을사(乙巳)년에 소론 일파의 마지막 저항인 나주괘서(羅州掛書) 사건을 일으켰는데, 일직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소탕되었으나 일 부 잔당들이 제주(濟州)로 도망가서 준동하고 있었다.

 

이때 임금께서 별장(別將)인 김선겸(金善兼)을 불러 네가 탐라에 가서 적을 잡아 오면 나라에는 충신이오, 너의 아버지에게는 효자가 되리 네가 가라.하니 그는 백배 사은하고 제주로 달려 가서 치열한 싸움 끝에 그 적도들을 사로잡아 나라에 바쳤다.

임금께서는 친히 남문에 나가 적도들의 목을 베게하시고, 노고를 치하한 다음 공신으로 녹훈하는 동시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특진을 시켰다.

 

金益重(김익중) 선생의 전설

 

단기(單騎)로 적장을 잡은 金益重(김익중)의 충성.

金益重(김익중)의 자는 尙三(상삼)이요, 호는 龍岩(용암)으로 善山人(선산인)이다.

그는 이인좌(李麟佐) 일파가 역모를 도모 반란을 일으켜 층주를 하락키고 진천, 죽산, 안성, 진위등 고을을 위태롭게 하였다.

반란군 들은 경종(景宗)을 추모 한다는 뜻에 모두 흰옷을 입고 설치니 그 여세가 매우 날카로웠다. 이 때 김익중은 의금부가도사로서 밀지를 받아 진위(振威)의 적을 무찌르고자 단기(單騎)로 뛰어 갔다.

진위(振威)의 적군 괴수 이문저(李文著)도 그 위세가 강하고 거침없는 것이 마치 부엉이가 날개를 활짝 편 것과 같으니 흰 옷을 입고 있는 적도 가운데 홀로 붉은 관복을 입고 가는 것은 우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장이적이 붉은 관복을 보면 반드시 미리 해칠 것이니 흰 옷으로 바꾸어 입고 가는 것이 어떠할 런지요.하니 그는 성내며 하는 말이나라의 관복을 감이 어떤 놈이 감히 손을 댄단 말인가.하고 적굴에 뛰어 들어 적의 괴수 이문저(李文著)를 포박하여 궐하에 바치니 임금께서 그의 노고를 치하 하시고 이문저를 죽이지 아니하고 사로잡은 것은 실로 김도사(金都事)의 용맹이다.하고 양무원종공신일등에 녹훈하시니 그 자손 3대까지 음덕을 입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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