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ail : juntonggahun@naver.com
>> 한국의 성씨


선산김씨: 일선김씨(金)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선산김씨)

 

본관(本貫): 선산(善山)

시조(始祖): 김선궁(金宣弓)

유래(由來):

 

선산 김씨(善山金氏) 시조 김선궁(金宣弓)은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 30세손이며, 문성왕(文聖王)8세손이다.  

 

[선산김씨족보(善山金氏族譜)]에 의하면 그의 초휘(初諱)는 김  (金 宣)이었는데, 고려 태조(太祖)가 후백제(後百濟)를 정벌하려  남행하던 중 숭선(崇善 : 선산의 옛 지명)에 이르러 모병(募兵)할 때 그가 함께 종군(從軍) 할 것을 희망하니  태조(太祖)가 기뻐하며 친히 활을 하사(下賜)하고 선궁(宣弓)으로 사명(賜名)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그는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도와 후삼국(後三國)을 통일 하는데 공을  세우고,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영문하시중(領門下侍中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올랐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일선(一善)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여 왔으나, 조선 태종(太宗) 때 지명(地名)이 선산(善山)으로 개칭됨에 따라 관향(貫鄕)을 선산(善山)으로 칭()하게 되었다.  그 후 선산 김씨(善山金氏)는 영남을 중심으로 한 전국에서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시켜 명문의 지위를 지켜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봉술(金奉術)

시조 선궁(宣弓) 맏아들 봉술(奉術)이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둘째  봉문(奉文)은 삼사  우윤(三司右尹 : 삼사의 종 3 품 벼슬)에 올라 크게 명성을 날리고 가문의 중흥을 일으킨  중추적인 기틀을 다졌다.

 

김흥림(金興林)

봉문(奉文)의 아들  흥림(興林)은 대호군(大護軍)을 지냈다.  

 

김혁동(金赫東)

고려 때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혁동(赫東)이 있다.

 

김임남(金任南)

상장군(上將軍)

 

김득충(金得忠)

태자태사(太子太師)

 

김창서(金昌緖)

대장군(大將軍) 창서(昌緖)

 

김신함(金愼緘)

한림학사(翰林學士)

 

김달상(金達祥)

판밀직부사(判密直府事)

 

김남보(金南寶)

판도판서(版圖判書)

 

김천부(金天富)

삼사우윤(三司右尹)

 

김제(金濟), 김주(金澍)

감찰(監察) 원로(元老)의 아들 제()와 주()는 충절로 유명했다.

 

김성룡(金成龍)

산원동정(散員同正)으로 형인 성부(成富)와 함께  개국원종공신에 올랐던  성룡(成龍)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로 좌의정(左議政)을 지내고, 화의부원군(和義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한성부(漢城府) 동교상좌리(洞橋上左里)에 거주하며 좌의정공파(左議政公派)의 파조가 되었고,  

 

김성려(金成呂)

()의 막내아들인 성려(成呂)는 별장동정(別將同正)으로 평안도에 정착하여 후손들이 별장공파(別將公派)의 파조(派祖)로 삼게 되었다.  

 

김취성(金就成)

일찍이 박영(朴英)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한 맏아들 취성(就成)은 김안국(金安國이언적(李彦迪)의 천거로 네 차례나 벼슬에  등용되었으나 모두 사퇴했고, 의약(醫藥)에 능통하여 명성을 날렸다.  

 

김취문(金就文)

광좌의 다섯째 아들인 취문(就文)1537(중종 3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후 여러 외직(外職)을 거쳐 사성(司成)이 되었으며, 선조(宣祖)가 즉위하자 강원도 관찰사(江原都觀察使)를 역임하고 대사간(大司諫 : 사간원의 정 3 품 으뜸 벼슬)에 올랐다. 특히 그는 관직에 있는 동안 청렴강직하기로 유명했으며, 명종(明宗)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어 더욱 가문을 빛냈다.  

 

김종무(金宗武)

종무(宗武)는 임진왜란 때 사근(沙斤 : 지금의  함안) 찰방(察訪)의 말직(末職)으로 이  (  ( ) 등과 함께 왜군과 싸워 전공을 세우고,  상주(尙州)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명문의 전통을 이었다.   

 

김경남(金慶南)

판관(判官)

 

김천영(金天英)

광해군(光海君) 때 전적(典籍)

 

김양선(金揚善)

감찰(監察)을 거쳐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를 역임.

 

김탁(金濯)

통진 현감(通津縣監)

 

김하량(金廈樑)

판결사(判決事)

 

김원섭(金元燮)

현종(顯宗) 때의 대사간(大司諫) 원섭(元燮)

 

김이달(金履達)

영암 현감(靈岩縣監)

 

김몽화(金夢華)

1754(영조 30) 문과에 급제한 몽화(夢華)는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올랐다.

 

김성진(金聲振)

순조(純祖) 때 등과(登科)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과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를 지냈다.

 

김희태(金希台)

희태(希台)는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역임

 

김수승(金秀升)

예안현감(禮安縣監)

 

김택화(金宅和)

명천 도호부사(明川都護府使)

 

김증(金增)

남해 현령(南海縣令)

 

김숙원(金璹遠)

보성 군수(寶城郡守)

 

김병옥(金秉沃)

횡성 현감(橫城縣監)

 

김우식(金佑植)

울산 군수(蔚山郡守) 

 

金宗直(김종직)의 전설.

 

김종직 선생이 그의 제자 김굉필의 겸손과 공부하는 자세를 어디에 가도 높이 평가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김굉필의 진가를 알게 하였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이루어진 이와 같은 돈독한 관계는 학문에 대한 방향과 열정을 다지는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김종직의 나이 50여 세에 이를 때 원근의 학자들이 그의 학적을 흠모하여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당시의 유명한 문인 정여창 등이 찾아 왔을 때 그와 함께 상읍례(相揖禮)를 마치고 나서는 경전을 강론하였는데, 김종직 선생의 강의는 반드시 정주(程朱)의 본지(本旨)에 합치하도록 힘쓰고, 어떤 강설에도 반드시 충효(忠孝)의 정신을 위주로 하였다고 한다.

 

차 재배를 한 김종직.

김종직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건 차()를 재배한 일이다.

그의 나이 42세 때였다. 국가에 올리는 차가 그곳에서는 생산되지 않으므로, 해마다 백성들에게 부과하면 백성들이 돈을 가지고 전라도에 가서 사오는데, 대략 쌀 한 말에 차 한 홉 비율이었다.

그는 함양군에 부임한 처음부터 그 폐단을 알고서 백성들에게 차()를 부과하지 않고 관에서 자체로 구해다가 나라에 바쳤다.

그런데 김종직이 한 번은 삼국사를 열람하다가, 신라 때에 차 종자를 당나라에서 얻어다가 나라에서 지귀산에 심도록 했다.는 기록을 보았다.

이 기록을 본 김종직은,, ()이 바로 이 산 아래에 있는데, 어찌 신라 때의 남은 종자가 없겠는가.하고, 나이 많은 어른들을 만날 때마다 묻고서 찾아보게 한 결과, 드디어 엄천사(嚴川寺)의 북쪽 죽림 속에서 두어 그루를 찾아냈다.

김종직은 매우 기뻐하면서 그 땅을 다원(茶園)으로 만들도록 하고. 그 근처가 모두 민전(民田)이 엇으므로 관전(官田)으로 보상해주고 그것을 사들였다.

그리고는 몇 년이 지나자 차가 자못 번성하여 원내(園內)에 두루 퍼지니 약 4,5년 뒤에는 국가에 바치는 분량을 충당하고도 남음이 있어 보였다.

 

유지광의 현판을 불태우다.

김종직이 현판을 불태운 일화는 유명하다.

유자광이 권세를 거들먹 거리며 김종직 사는 곳에서 풍류를 즐기며 시를 짓고는 군 관아에 부탁하여 그 시를 판()에 새겨서 벽 위에 걸어놓았던 것을 김종직이 발견했던 것이다.

그 따위 유자광이 감히 현판을 여기다 걸었단 말이냐.하며김종직은 즉시 명하여 헌관을 거두어서 불태워 버리게 하였다.

 

金孝元(김효원) 선생의 일화.

 

김효원(金孝元, 1542~1590)의 자는 인백(仁伯)이고 호는 성암(省菴)이며, 본관은 선산(善山)으로 경성(京城)에 거주하였다.

김효원은 천성이 孝友(효우)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삼가 예법을 준수하였다.

퇴계·남명 두 선생의 장학(獎學)으로 학문하는 방법을 알았고, 견고하게 뜻을 정하여 책 읽기를 그만두지 않았으며, 자신을 다스림이 엄정하고 일에 대처함이 굳세고 단정하였다.

고을 선비 중 준수한 사람을 선발하여 강론(講論)하고 이끌어 의리(義理)를 깨우치도록 해 주었고, 아래로는 서리(胥吏) 중 젊은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두 배움에 나아가게 해서 그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평가하여 상과 벌을 주었다.

삼척(三陟)은 영해(領海) 간에서도 가장 거칠고 궁벽한 곳인데, 풍속이 귀신을 좋아하고 백성이 질박하여 다스리기 어려웠다.

그런데 김효원이 한 번 옛 제도를 혁신하고 세금과 부역을 법대로 정하였으며, 선비의 자제들 중 가르칠 만한 사람을 뽑아 시례(詩禮)를 가르쳐서 수양하고 반성하도록 하니, 울연(鬱然)히 크게 변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문헌(文獻)의 고장으로 일컬어진다(언행록).

<인용: 南溟學文人(남명학문인)에서>

 

 

金孝元(김효원) 선생의 일화.

 

그는 어려서부터 남명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정구(鄭逑), 김우옹과 더불어 퇴계선생의 문하에도 들어갔다. 김효원은 23(1564)에 식년 진사 제3등으로 합격하였고(司馬榜目), 24(1565)에 알성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明宗實錄20320).

그는 26(1567)에 호조좌랑이 되었고, 실록의 기사에 의하면 참판 윤옥(尹玉)이 사은사로 북경에 들어갈 때 김효원이 서장관(書狀官)이 되었는데, 김효원은 곧 윤옥의 동리(同里) 소년이었다.

윤옥의 처음 생각에는 김효원이 자세히 따지지 않을 터이므로 자기의 욕심을 달성시킬 수 있을 것이라 여겼는데, 출발한 날로부터 윤옥의 남행(濫行)을 옆에서 하나도 따라 주지 않았다.

윤옥의 자제(子弟)들이 싸 보낸 많은 은냥(銀兩)은 다 윤가(尹家)의 부탁에 의하여 궁중에서 유출된 것이었는데, 김효원의 행동을 보고 그 욕심을 달성시키지 못할 줄 알고는 중도에서 되돌려 보냈다.

이 때문에 윤옥에게 원한을 산 것이 컸고 궁중에서 참소를 많이 입었다.

조정에서 김효원을 좋게 여기어 여러 차례 유망한 사람으로 주의(注擬)하였으나 일체 낙점되지 못하였으므로 時論(시론)이 의아해 하였다(明宗實錄22528). 고 한다.

 

27(1568)에는 정언이 되었다. 31(1572) 92일에 지평이 되었고, 오건이 이조전랑에 추천하였으나, 사림으로 척신 윤원형(尹元衡)의 문객이었다는 이유로 이조참의 심의겸(沈義謙)이 반대하여 거부당하였다. 33(1574) 515일에 지평이 되어 조정기(趙廷機)의 추천으로 이조전랑이 되고 83일에 이조정랑이 되었다. 선조 즉위 직후 조정에는 유성룡(柳成龍), 이이(李珥), 김성일(金誠一), 김우옹, 鄭琢(정탁), 심의겸(沈義謙) 등 퇴계선생의 문인들이 기라성처럼 울립하고 있었으나, 연령상으로 이들보다 연상인 그는 직위에도 불구하고 신진 사림의 대표적 인물로 존경을 받게 되었으며, 1년 동안의 사가독서기간(32, 1573)이 끝난 후에는 여러 동문들의 추천으로 지평을 거친 다음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천거되었다.

34(1575) 111일에 부교리가 되고 116일 헌납이 되어 29일 장령이 되었으며 1024일에 부령부사(富寧府使)가 되어 삼척부사를 역임하였다. 42(1583)에는 안악군수(安岳郡守)에 제수되었고, 44(1985)에는 황해도 암행어사 홍종록(洪宗祿)이 장계하기를 안악 군수 김효원은 성품이 본래 강명하고 또 문학(文學)이 있어 일찍이 용방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인망이 이 때부터 높았는데 대성(臺省)에 출입하면서 명성과 지위가 더욱 드러나 한 때의 사류들이 많이 허여하였다. 전랑(銓郞)으로 있을 적에 척리(戚里)를 천거하지 않았는데 척리가 이 때문에 유감을 품어 드디어 동서로 나누어졌다. 계미년에 척리의 당파가 뜻을 얻어 조정의 의논이 갈라져 사류들을 배척함이 매우 급박하게 되자 이에 효원이 힘써 외직에 보임되기를 청하였다. 관무(官務)를 봄에 있어 청렴 근실하고 처사가 강명하여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사모하여 한 고을이 진심으로 추대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관청에 갖추어야 할 것은 모두 갖추어져 있고 일이 모두 제대로 성취되었으니, 그 정치가 한 도에서 제일이 되기에 충분합니다(宣祖實錄18425). 라고 안악군수 김효원의 선정을 보고하였다.

<인용: 南溟學文人(남명학문인)에서>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게시물 목록
번호 제 목 글쓴이 등록일 조회
105 언양김.jpg 언양김씨(金) 청남 14-08-25 4188
104 양주 김.jpg 양주김씨(金) [1] 청남 14-08-25 2832
103 양산김.jpg 양산김씨(金) 청남 14-08-25 2504
102 야성 김.jpg 야성김씨(金) [1] 청남 14-08-25 3852
101 안악 김.jpg 안악김씨(金) [2] 청남 14-08-25 2854
100 안성 김.jpg 안성김씨(金) 청남 14-08-25 2214
99 안산 김.jpg 안산김씨(金) 청남 14-08-25 2731
98 안로 김.jpg 안로김씨(金) 청남 14-08-25 1907
97 신안동김.jpg 안동 김씨: 신 (金) 청남 14-08-25 6090
96 구안동김1.jpg 안동 김씨:구 (金) 청남 14-08-25 6122
95 신천김.jpg 신천김씨(金) 청남 14-08-25 2239
94 시흥김.jpg 시흥김씨(金) 청남 14-08-25 2196
93 순천김.jpg 순천김씨(金) 청남 14-08-25 4561
92 수원 김.jpg 수원김씨(金) 청남 14-08-25 3316
91 수안 김.jpg 수안김씨(金) 청남 14-08-25 2883
90 설성 김.jpg 설성김씨(金) 청남 14-08-25 2665
일선김1.jpg 선산김씨: 일선김씨(金) 청남 14-08-25 3531
88 선산김.jpg 선산김씨:일선김씨(金) 청남 14-08-25 4702
87 서흥김.jpg 서흥김씨(金) 청남 14-08-25 3720
86 상원김.jpg 상원김씨(金) 청남 14-08-25 2322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