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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김씨:구 (金)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안동:구 김씨)

 

본관(本貫): 안동(安東) 구안동(舊安東)

시조(始祖): 김숙승(金叔承)

유래(由來):

 

안동김씨는 신라김씨의 시조이신 대보공(大輔公) 휘 알지(諱 閼智)의 후손 중 한 성씨이다.

김해김씨(金海金氏)를 제외한 대부분의 김씨(金氏)는 바로 대보공의 후손인 것이다.

 안동김씨는 평장사(平章事) 휘 숙승(諱 叔承-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손자)을 시조로 모시고 있으며. 경순왕의 8대손으로 고려조의 명장이신 충열공(忠烈公) 휘 방경(諱 方慶)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충열공은 고려조에 삼별초를 평정하고 왜적을 섬멸하여 정난 정국공신이 되고, 벼슬이 도원수에 이른 뒤 상락군 개국공에 봉해진 분이시다.

 

안동김씨는 신라 왕손이며 고려왕의 외손(外孫)으로서 고려 500년간 대대로 공경장상(公卿將相)이 끊이지 않았다. 고려가 망하자 모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지켜 8도에 흩어져 은거하였고, 그 후 형성된 세거지(世居地)를 중심으로 후손들이 번성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조선조에 와서도 태종조에 좌의정을 지낸 익원공(翼元公) 휘 사형(諱 士衡)을 비롯해서 시민(時敏), 응하(應河) 두 분의 충무공(忠武公), 4분의 정승(政丞-士衡,石質,壽童,自點), 6분의 호당( 湖堂-讀書堂의 별칭으로 젊고 재주 있는 문신을 뽑아 일정기간 공부에만 전념케 하던 국비 장학생으로 대제학이 뽑았으며, 임금의 특명을 받아 쉬면서 공부하던 곳이다. 이를 일명 賜暇讀書라고도 하며 문신의 명예로 여겼다. 우리 문중에는 , 弘度, , , 壽寧, 德龍), 5분의 청백리(淸白吏-, , 斗南, 時讓, 延壽.  한 때 영수, 득신, 변광, 응해 등이 청백리에 추천되기도 함), 5분의 장신(將臣) 등이 배출되었고 수많은 고관대작(高官大爵)과 충신열사(忠臣烈士)가 끊이지 않았으며, 모름지기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서의 명분을 지켜왔다.

 

 가문의 대표적 인물

 

김선(小宣)

김방경의 장자. 밀직사부지사(密直司副知事)를 지냈다.

 

김흔(小斤)

김방경의 차자. 찬성사를 지냈다.

 

김순()

김방경의 三子. 삼사판사(三司判事)를 지냈다.

 

김윤(小侖)

김방경의 四子. 밀직사지사(密直司知事)를 지냈다.

 

김승용(承用)

1329(충숙왕 16). 고려 후기의 문신.할아버지는 방경(方慶)이며, 아버지는 부지밀직사사를 지낸 훤( )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충숙왕 때 내부령(內府令)이 되었다. 1323년 정안군 종(定安君琮)과 함께 원나라 진종(晉宗)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해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1328년 밀직사로서 성절사가 되어 원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청렴하기로 유명하였다.

 

김승택(承澤)

평장사를 지냈다.

 

김영돈(永暾)

1348(충목왕 4). 고려 후기의 무신. 할아버지는 방경(方慶)이다.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강릉부녹사(江陵府錄事)가 되었으며, 1340(충혜왕 복위 1)에는 지공거 ( 知貢擧 )가 되어 이공수 ( 李公遂 ) 등을 시취하였다.

조적(曺 使 )의 난 때 시종한 공로로 1342년에 일등공신이 되어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346(충목왕 2)에 찬성사 ( 贊成事 )로 원나라에 가서 의복 · 음식 등을 보내준 데 대해 사례하였다.

이듬해 왕후 ( 王煦 )와 함께 귀국하여 원나라에서 왕의 실덕을 묻자 소인들의 장난이라 변명하니 이를 정리하라는 원나라의 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정치도감을 설치하고 판사가 되어 폐정을 시정하던 도중, 불법행위를 하던 기삼만 ( 奇三萬 )을 순군옥 ( 巡軍獄 )에 가두어 죽게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일로 원나라로부터는 치하를 받았으나,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의 심한 반발에 부닥쳐 구금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의 지지로 곧 석방되었다.

 

김영후(永煦)

1292(충렬왕 18) 1361(공민왕 10).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균헌(筠軒). 할아버지는 방경(方慶), 아버지는 중대광 상락군 판삼사사(重大匡上洛君判三司事) ()이다.

1325(충숙왕 12) 7월 산원 ( 散員 ) 장세(張世)가 소윤 ( 少尹 ) 임준경(林俊卿)의 말을 빼앗은 일이 있었는데, 지평으로서 장령 김원식(金元軾)과 함께 총신(寵臣)의 비호를 물리치고 치죄(治罪)를 청하였다.

1339(충숙왕 복위 8) 4월 삼사우윤(三司右尹)으로 원나라에 가서 부처의 화상을 바쳤다. 또한 충혜왕이 자신을 헐뜯던 신청 ( 申靑 )을 이문소(理問所)에 가두고 죄상을 행성(行省)에서 기록해 중서성에 올릴 때도 원나라에 갔다.

1341(충혜왕 복위 2) 6월 조적(曺 使 )의 난으로 왕이 원도(元都)에 갔을 때, 간신들이 변란을 꾸몄으나, 왕을 시종한 공으로 삼사우사(三司右使)로서 일등공신에 봉해지고 전() 100결과 노비 10구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심양왕 고(瀋陽王暠)의 모반에 참가하지 않고, 원나라에서 충혜왕을 시종한 공으로 추성보절동덕익찬공신(推誠保節同德翊贊功臣)의 호를 받았다. 134311월 원나라의 자정원사(資政院使) 고용보(高龍普) 등이 충혜왕을 잡아갈 때, 시종한 백관들이 모두 도망갔으나 끝까지 남아 있다가 창에 맞기도 하였다.

1344(충목왕 즉위년) 10월 찬성사가 되었다. 1345년 정월 정방이 부활하였을 때, 찬성사로서 제조관(提調官)이 되었다. 12월 좌정승으로 원나라에 방물 ( 方物 )을 바쳤으며, 우정승에 승진되었다. 13465월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352(공민왕 1) 8월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에 봉해지고, 서연 ( 書筵 )에 입시해 변정도감(辨整都監)을 파할 것을 주장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칭탁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1356년 원나라에서 왕에게 친인보의선력봉국창혜정원(親仁保義宣力奉國彰惠靖遠)이라는 공신호를 내린 것에 사은(謝恩)하기 위해 원나라에 갔다온 뒤, 상락후(上洛侯)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김질(石質)

좌의정을 지냈다.

 

김시민(時敏)

1554(명종 9)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면오(勉吾). 목천 ( 木川 ) 출신. 방경(方慶)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지평 충갑(忠甲)이다.

1578(선조 11) 무과에 급제해 군기시 ( 軍器寺 )에 입사하였다. 1581년 부평부사가 되었으나 구황(救荒 : 자연 재해로 입은 피해를 구제함)에 전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583년 이탕개(尼湯介)의 난 때 도순찰사 정언신 ( 鄭彦信 )의 막하 장수로 출정해 공을 세웠다. 그 뒤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이 되었으나 군사에 관한 건의가 채택되지 않자 사직하였다.

1591년 진주판관이 되어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사 이경(李璥)과 함께 지리산으로 피했다가 목사가 병으로 죽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 ( 金誠一 )의 명에 따라 그 직을 대리하였다.

먼저 민심을 안정시키고 피난했던 성민을 귀향하게 하였다. 그리고 성을 지키기 위해 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는 한편, 군사의 항오(行伍)를 편성, 군사 체제를 갖추었다.

이 때 왜적은 진주의 방위가 허술함을 알고 창원·진해·고성으로부터 사천에 집결한 다음 진주로 향하려 하였다. 이에 곤양군수(昆陽郡守) 이광악 ( 李光岳 ), 의병장 이달 ( 李達 곽재우 ( 郭再祐 ) 등과 합세해 적을 격파하고, 도망하는 적을 추격해 십수교(十水橋)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어 고성·창원 등 여러 성을 회복하였다.

이어서 의병장 김면 ( 金沔 )의 원병 요청을 받고 정병 1,000여 명을 이끌고 호응, 거창의 사랑암(沙郎巖)에서 금산으로부터 서남진하는 왜적을 맞아 크게 무찔렀으며, 여러 차례의 전공으로 그 해 8월 진주목사로 승진되었다.

취임하자 곧 적군의 제조 방식을 모방해 염초(焰硝) 500여 근과 총통 ( 銃筒 ) 70여 병()을 만들고 정병을 뽑아 사용법을 연마하게 하는 등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화하였다.

9월에는 진해로 출동해 적을 물리치고 적장 평소태(平小太)를 사로잡아 행재소 ( 行在所 )로 보내자 조정에서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임명하였다.

당시 왜적은 진주가 전라도로 통하는 경상우도의 대읍(大邑)이며, 경상우도의 주력이 그곳에 있음을 알고 대군으로 공격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105일 적은 진주의 동쪽 마현(馬峴)에 출현했고, 6일에는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성안에 명령을 내려 노약자와 부녀자까지 남장을 시켜 군사의 위용을 보이게 하는 한편, 화살을 함부로 쏘아 허비하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시키는 등 적과의 싸움에 대처해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적의 2만여 대군이 성을 포위하자 불과 3,800여 명의 병력으로 7일간의 공방전을 벌여 적을 물리쳤으나 이 싸움에서 이마에 탄환을 맞았다.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국사를 근심하고 때때로 북향해 절하고 눈물을 짓다가 상처가 깊어져 며칠 뒤에 죽었다. 죽은 뒤 성에서는 적이 알까봐 비밀로 했다가 안정이 된 뒤 상을 치렀는데, 상여가 함양에 이르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발탁되었다는 조정의 명을 받았다.

1604년 선무공신 ( 宣武功臣 ) 2등과 영의정에 각각 봉해졌고, 이와 함께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진주의 충민사 ( 忠愍祠 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무 ( 忠武 )이다.

 

김수동(壽童)

1457(세조 3) 1512(중종 7).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미수(眉 馬 ), 호는 만보당(晩保堂).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사형(士衡)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종숙(宗淑)이고, 첨지중추부사 적( )이며, 어머니는 동부승지 안질(安質)의 딸이다.

1474(성종 5) 생원시에 합격했고, 1477년에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예문관주서(藝文館注書) ·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 · 사인 ( 舍人 )을 거쳐 장령 ( 掌令 )에 올랐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홍문관으로 다시 자리를 옮겨 전한 ( 典翰 ) · 직제학 ( 直提學 ) ·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497(연산군 3) 동부승지, 이듬 해 좌승지를 거쳐, 그 해 여름에 외직으로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예조참판이 되었다. 다시 이듬 해에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서 성학심법 聖學心法 4권을 구해 왔다. 그 뒤 경상도관찰사 · 이조참판 · 경기관찰사 · 형조판서 겸 지춘추관사, 제학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쳐, 150447세에 이조판서에 올랐다.

이 해 갑자사화 때 폐비 윤씨의 회릉추숭(懷陵追崇)을 주장, 시행해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정헌대부 ( 正憲大夫 )에 가자(加資)되었다. 1506년 어머니 상을 당해 사직하고 물러났으나, 왕명으로 단상(短喪)으로 마치고 3개월 만에 우의정에 부임하였다.

이 때 중종반정에 참여해 좌의정에 오르고 정국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며,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봉해졌다. 사림으로부터 연산군에게 충실했다고 비난받았으나, 1510년 영의정에 올라, 그 때 일어난 왜변의 진압을 총지휘하였다.

품성이 단정했으며, 청탁을 모두 거절하고 검약한 생활을 즐겼다. 연산군 때에는 많은 문신들의 화를 면하게 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찬()

1543(중종 38)1599(선조 32).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숙진(叔珍), 호는 눌암(訥菴). 할아버지는 여()이고, 아버지는 형조참의 언침(彦沈)이며, 어머니는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장사랑(將仕郞) 응진(應軫)의 딸이다.

1567(명종 22)에 진사가 되고, 1568(선조 즉위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들어갔다. 1570년에 검열이 되고, 이 후 대교 ( 待敎 봉교 ( 奉敎 전적 ( 典籍 형조정랑· 검상 ( 檢詳 사인 ( 舍人 이조정랑 등의 관직과 지평 ( 持平 집의 ( 執義 정언 ( 正言 헌납 ( 獻納 사간· 수찬 ( 修撰 교리 ( 校理 응교 ( 應敎 ) 등 삼사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1573년 평안 삼도사로 나가 군적 ( 軍籍 )을 정리했으며, 다음 해에는 평안도 순무어사로 활약하였다. 1584년 이후로는 전한 ( 典翰 직제학 ( 直提學 승지·좌참찬·동지중추부사·대사헌·대사간·대사성·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임금의 파천을 반대했으며, 임금 일행이 개경에 이르자 동인 ( 東人 ) 이산해 ( 李山海 )의 실책을 탄핵해 영의정에서 파직시키고, 백성들의 원성을 샀던 김공량(金公諒)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뒤에 정철 ( 鄭澈 ) 밑에서 체찰부사(體察副使)를 역임하고, 양호조도사(兩湖調度使)로 전쟁의 뒷바라지를 했으며, 접반사 ( 接伴使 )로서 명나라와의 외교를 담당하였다. , 일본과 강화 회담을 벌일 때 이덕형 ( 李德馨 )과 함께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부터 예조판서·지의금부사·대사헌·이조판서를 지냈고 지돈녕부사를 거쳐 우참찬까지 승진하였다. 대사헌 때 가족을 멀리 피난시켰다는 탄핵을 받고 체직되는 등 소소한 정치적 부침을 겪기도 했지만, 문장가로도 이름이 높았다.

경제 문제에 밝고 외교적 수완이 능숙한 명신이었다. 임진왜란 뒤 전쟁의 수습 과정에서 죽자, 선조는 조회를 정지해 추모의 뜻을 표했다. 시호는 효헌(孝獻)이다.

 

김자점(自點)

1588(선조 21) 1651(효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성지(成之), 호는 낙서(洛西). 할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 억령(億齡)이며, 아버지는 함( )이다. 성혼 ( 成渾 )에게 수학하였다.

음보로 출사해 병조좌랑에까지 이르렀으나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 논의에 반대하는 등 광해군 때에 대북 세력에 맞서다가 정계에서 축출당하였다.

처음에 최명길 ( 崔鳴吉 ) · 심기원 ( 沈器遠 )과 함께, 사돈 관계에 있는 이귀 ( 李貴 )를 중심으로 반정을 모의하던 중 1622(광해군 14) 김류(金 濫 ) · 신경진(申景 所 ) 등과 연결되었다. 1

6233월 군대를 모아 이귀 · 김류 · 이괄 ( 李适 ) 등과 함께 홍제원(弘濟院)에서 궁궐로 진격해 들어가 반정을 성공시켰다.

인조 즉위 후 박홍구 ( 朴弘耉 ) · 조정 ( 趙挺 ) 등 광해군 때의 정승들이 인사권을 행사하려는 것을 막고, 이귀가 주로 인사를 담당할 수 있게 하였다.

반정 직후 호위대장이 된 신경진 휘하의 종사관 ( 從事官 )으로 임명되었다가 호조좌랑을 거쳐 동부승지로 승진하였다. 같은 해 반정 공신인 정사공신 ( 靖社功臣 ) 1등에 녹훈되었다. 공신녹훈을 전후해 반정의 두 주역인 김류와 이귀가 서로 대립하자, 이후 김류 쪽에 가담하였다.

1624(인조 2)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옥에 있던 기자헌 ( 奇自獻 ) 40여 인의 인사들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죽이자고 주장하였다. 16271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인조를 호종했고, 순검사(巡檢事) · 임진수어사(臨津守禦使)에 임명되었다. 1630년 한성부판윤을 거쳐 1633년 도원수 ( 都元帥 )가 되었다.

1636년 청나라의 움직임에 대비할 목적으로 그는 평안도에 파견되어 수비 체계를 바꾸는 등의 작업을 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토산 ( 兎山 )에서 크게 패하였다. 이듬해 전쟁이 끝난 직후 패전에 대한 도원수로서의 책임을 지고 먼 섬으로 유배되었다.

그 이후 공신 세력의 권력 추구와 패전에 대해 심한 공격을 하는 일반 사류들에 의해 계속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반청론자(反淸論者)들에게 염증을 느낀 인조의 후원으로 1639년에 고향으로 풀려나고, 이듬해에는 강화부윤 · 호위대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김류와의 제휴를 바탕으로 1642년 병조판서, 1643년 판의금부사를 거쳐, 같은 해 우의정 및 어영청도제조에 오르고, 진하 겸 사은사로 중국에 다녀왔다.

1644년에는 경쟁 세력인 심기원 등을 역모 혐의로 도태시키고,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사은 겸 주청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대부분의 공신 세력가들이 죽거나 은퇴하고 일반 반청 사류들은 인조에 의해 거부되는 상황 속에서, 1646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최고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1645년에는 숙원 조씨(淑媛趙氏)와 결탁해 인조의 의구심을 받던 소현세자 ( 昭顯世子 )를 죽이는 데 가담한 듯하다. 이듬해에는 세자빈 강씨(姜氏)에게 인조 시해 혐의를 씌워 사사하게 한 뒤,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축출하고 강빈의 형제들을 제거하였다. 또 인조와 조씨의 소생인 효명옹주 ( 孝明翁主 )와 자신의 손자인 세룡(世龍)을 혼인시켜 궁중과 유착하였다.

한편으로 청나라 사신이나 역관 정명수 ( 鄭命壽 ) 무리들과 결탁해 청나라의 후원을 얻어 권력의 기반을 삼았다. 1646년 청나라가 포로가 되었던 임경업 ( 林慶業 )을 보내오자 고문으로 죽게 하였다.

인조 말년에는 신면 ( 申冕 ) 등을 무리로 거느려 낙당(洛黨)이라고 지목되었으며, 원두표 ( 元斗杓 )를 중심으로 한 원당(原黨)의 무리와 대립하였다.

1649년 거의 유일한 후원자인 인조가 죽자 새로 즉위한 효종은 즉시 김집 ( 金集 ) · 송시열 ( 宋時烈 ) · 권시(權 魅 ) · 이유태 ( 李惟泰 ) · 김상헌 ( 金尙憲 ) 등을 불러들였고, 이들의 공격에 의해 1650(효종 1) 홍천에 유배당하였다.

그곳에서 역관인 심복 이형장 ( 李馨長 )을 시켜 청나라에 새 왕이 옛 신하들을 몰아내고 청나라를 치려 한다고 고발하고, 그 증거로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은 장릉지문(長陵誌文)을 보냈다.

청나라가 즉시 군대와 사신을 파견해 조사했으나, 이경석 ( 李景奭 ) · 이시백 ( 李時白 ) · 원두표 등의 활약으로 그 기도는 실패하고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1651년에 손부인 효명옹주의 저주 사건이 문제되고, 아들 익( )이 수어청 군사와 수원 군대를 동원해 원두표 · 김집 · 송시열 · 송준길 ( 宋浚吉 )을 제거하고 숭선군 ( 崇善君 )을 추대하려는 역모가 폭로되어 아들과 함께 복주당하였다.

그의 무리인 김응해(金應海) · 기진흥(奇震興) · 이파 ( 李坡 ) · 심지연(沈之演) · 황헌(黃 零 ) 등도 파직당하거나 교체되었다.

문과 급제를 거치지 않은 공신으로서의 권력 추구, 궁중과의 파행적인 유착 관계, 청나라에 대한 매국 행위 등 당시 사림 사회의 명분에 어긋나는 갖가지 행동으로 인해 인조대 이후로 오랜 세월을 두고 비난을 받았다.

 

김제갑(悌甲)

1525(중종 20) 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순초(順初), 호는 의재(毅齋). 고려의 명장 방경(方慶)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언묵(彦默)이고, 아버지는 진사 석()이며, 어머니는 기형(奇逈)의 딸이다. 이황 ( 李滉 )의 문인이다.

1553(명종 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의 정자 ( 正字 ), 병조좌랑, 정언 ( 正言 )을 거쳐 1581(선조 14)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583년 우승지로 있으면서 도승지 박근원 ( 朴謹元 ) 등과 함께 이이(李珥) · 박순 ( 朴淳 )을 탄핵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1588년 평안도지역 국경방어강화책의 일환으로 특별히 창성부사로 임명되었지만, 70세에 가까운 늙은 문관을 보내는 것이 불가하다는 병조판서 정언신 ( 鄭彦信 )의 반대로 해임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원주목사로 있었는데, 왜장 모리(森吉成)가 거느린 왜군이 관동지방을 휩쓴 뒤에 원주를 침공하여오자 가족과 주민을 이끌고 경내의 요새인 영원산성( 落 原山城)으로 들어가 방어에 임하였다.

그러나 요새만을 믿고 따로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다가, 산성의 허점을 틈탄 왜군의 공격으로 결국 성이 함락되자 부인 이씨, 아들 시백(時伯)과 함께 순절하였다. 조정에서 그 충절을 기려 1592년 이조판서 겸 경연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를 추증하였다.

원주의 충렬사,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1966년에 강원도 애국유족부활위원회에 의하여 원주역 광장에 그의 충렬비가 세워졌다. 1711(숙종 37) 문숙(文肅)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김시양(時讓)

1581(선조 14) 1643(인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 초명은 시언(時言), 자는 자중(子中), 호는 하담(荷潭). 언묵(彦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석()이고, 아버지는 비안현감 인갑(仁甲)이며, 어머니는 남양 홍씨(南陽洪氏)로 서윤 ( 庶尹 ) 이곤(以坤)의 딸이다.

1605(선조 38)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1607년 주서 ( 注書 )가 되고 1609(광해군 1)에 예조좌랑으로 지제교 ( 知製敎 )를 겸했으며, 1610년 동지사의 서장관 ( 書狀官 )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가 되었는데, 향시에 출제한 시제가 왕의 실정(失政)을 비유했다 하여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1616년 영해 ( 寧海 )로 이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예조정랑 · 병조정랑 · 수찬 ( 修撰 ) · 교리 ( 校理 )를 역임, 이듬해 이괄 ( 李适 )의 난 때는 도체찰사 ( 都體察使 ) 이원익 ( 李元翼 )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1625(인조 3) 응교 ( 應敎 )가 되어 문학을 겸했고, 이듬해 인헌왕후 ( 仁獻王后 )의 산릉역(山陵役)에 공로가 많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날 징후가 보이자 평안도관찰사 겸 체찰부사에 임명되었고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의정부의 의논에 따라 도원수와 사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를 겸하였다.

그러나 왕의 뜻을 어기고 척화를 주장해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1634년 지중추부사에 서용(敍用)되었다. 그 뒤 한성판윤을 거쳐 호조판서 겸 동지춘추 ·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이 되었다가 9월에 다시 도원수에 임명되었다. 이듬 해 강화유수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였다.

1636년 청백리에 뽑혀 숭록대부 ( 崇祿大夫 )에 오르고 판중추부사 ( 判中樞府事 )가 되었으나 눈병으로 사직하고 향리인 충주로 내려갔다. 1641선조실록 을 개수할 때 대제학 이식 ( 李植 )과 총재관(總裁官) 홍서봉 ( 洪瑞鳳 ) 등의 추천으로 다시 판중추부사 겸 춘추관사를 제수받았으나 지병인 안질로 실록개수(實錄改修)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전적 ( 典籍 )과 경사(經史)에 밝았다. 회령의 향사 ( 鄕祠 )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하담파적록 荷潭破寂錄 · 하담집 · 부계기문 擥 溪記聞 등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김휘()

1607(선조 40) 1677(숙종 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돈미(敦美), 호는 사휴정(四休亭) · 만은(晩隱).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인갑(仁甲)이고, 아버지는 시양(時讓)이며, 어머니는 이대수(李大遂)의 딸이다.

1642(인조 20)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봉교로 임명되고, 같은 해 홍문록에 올랐다. 1646년 민회빈 강씨(愍懷嬪姜氏)가 사사되자 정언으로 있으면서 일반 사림의 자격으로 그 경위를 규명하라는 소를 올렸다가 파직되었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부수찬에 기용되었고, 그 뒤 이조좌랑 · 이조정랑 · 교리 · 응교 · 헌납 · 사간 · 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현종연간에는 충청도관찰사 · 도승지 · 함경도관찰사 · 경상도관찰사 · 강화유수 · 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666(현종 7) 남인의 탄핵으로 삭직되었으나, 그 뒤 복직되어 1668년 형조참판을 거쳐서 대사헌이 되었다. 숙종이 즉위한 뒤 1675년 이조판서에 올랐고, 이듬해에 예조판서 · 개경유수를 역임하였으며, 그림을 매우 잘 그렸다.

 

김득신(得臣)

1604(선조 37) 1684(숙종 10). 조선 중기의 시인. 자는 자공(子公), 호는 백곡(柏谷). 아버지는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치()이며, 어머니는 사천목씨(泗川睦氏)로 첨()의 딸이고, 부인은 경주김씨이다.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노둔한 편이었으나, 아버지의 가르침과 훈도를 받아 서서히 문명을 떨친 인물이다. 당시 한문사대가인 이식 ( 李植 )으로부터 그대의 시문이 당금의 제일 이라는 평을 들음으로써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공부할 때에 옛 선현과 문인들이 남겨놓은 글들을 많이 읽는 데 치력하였는데, 그 중 백이전 伯夷傳 은 억번이나 읽었다고 하여 자기의 서재를 억만재(億萬齋) ’ 라 이름하였다. 저술이 병자호란 때 많이 타 없어졌으나, 문집인 백곡집 에는 많은 글들이 전하고 있다.

그 중 시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문보다는 시에 능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오언 · 칠언절구를 잘 지었다. 용호 龍湖 · 구정 龜亭 · 전가 田家 등은 어촌이나 산촌과 농가의 정경을 그림같이 묘사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시를 잘 지었을 뿐만 아니라 시를 보는 안목도 높아, 종남총지 終南叢志 같은 시화도 남겼다. 이에는 어무적 ( 魚無迹 ) · 이행 ( 李荇 ) · 정사룡 ( 鄭士龍 ) · 정철 ( 鄭澈 ) · 권필(權 億 ) 같은 앞 세대 유명시인 등과 남용익 ( 南龍翼 ) · 김석주 ( 金錫胄 ) · 홍만종 ( 洪萬宗 ) 같은 당대 문사들의 시를 뽑아, 거기에 자기 나름대로의 비평을 덧붙였다.

그리고 그는 술과 부채를 의인화한 가전소설 환백장군전 歡伯將軍傳 청풍선생전 淸風先生傳 을 남기기도 했다.

 

김응하(應河)

1580(선조 13)1619(광해군 11).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경희(景羲). 철원 출신. 고려의 명장 방경(方慶)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증 승지 지사(地四)이다.

1604(선조 37) 무과에 발탁되었으나 처음에는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평소부터 그의 무장적인 재능을 아끼던 박승종(朴承宗)이 병조판서가 되자 비로소 선전관에 제수되었으나, 이듬해 여러 사람의 질시를 받아 파직당하였고, 1608(광해군 즉위년) 박승종이 전라관찰사로 나가자 다시 기용되어 비장(裨將 : 지방사신을 따라다니던 관원)이 되었다.

1610년에 재차 선전관에 임명되었으며, 영의정 이항복에 의해 경원판관으로 발탁된 뒤 삼수군수(三守郡守북우후(北虞侯)를 역임하였다. 1618(광해군 10) 명나라가 후금을 칠 때 조선에 원병을 청해오자, 부원수 김경서 ( 金景瑞 )의 휘하에 좌영장(左營將)으로 있다가 이듬해 2월 도원수 강홍립 ( 姜弘立 )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후금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명나라 군사가 대패하자, 3,000명의 휘하군사로 수만명의 후금군을 맞아 고군분투하다가 중과부적으로 패배하고 그도 전사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신종 ( 神宗 )은 그가 용전분투하다가 장렬한 죽음을 당한 데 대한 보답으로 특별히 조서를 내려 요동백(遼東伯)에 봉하였으며, 처자에게는 백금을 하사하였다. 조정에서도 그의 전사를 가상히 여겨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충무 ( 忠武 )이다.

 

김응해(應海)

1588(선조 21)1666(현종 7). 조선 후기의 무신. 자는 군서(君瑞). 고려의 명장 방경(方慶)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증 승지 지사(地四)이며, 형이 응하(應河)이다. 1616(광해군 8)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 宣傳官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희천군수(熙川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1619년 명나라의 요청으로 후금(後金) 정벌에 도원수 강홍립 ( 姜弘立 ) 등을 파견하자, 형 응하와 함께 출정하기를 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620년에 강계부사·부령부사·인동부사·정주부사 등을 지내는 동안 청렴결백하여 칭찬을 많이 들었다. 1636(인조 14) 병자호란 때 별장으로 정방산성 ( 正方山城 )을 지켰다.

그러나 적병이 곧장 서울을 공격하자 그는 3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진로를 막고 고군분투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적에게 포위되자 자결하려 하였으나 살아났다. 그 뒤 1647년 어영대장(御營大將)에 올랐다. 형제가 모두 무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김중기(重器)

1735(영조 11). 조선 후기의 무신. 자는 대기(大器). 무과에 급제, 여러 낮은 직책을 거쳐 1703(숙종 29) 함경남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706년 총융사(摠戎使)가 되어 북한산성 축조를 건의, 이를 실현하게 하였다.

그러나 작업과정에서 부정축재가 있었음이 드러나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1713년 포도대장이 되었고, 1719년 통제사 ( 統制使 )가 되었으나 역시 탐학한 관리로 탄핵을 받았다.

1720(경종 즉위년) 한성부우윤, 이어서 포도대장·병조참판·한성부좌윤·어영대장·훈련대장 등을 역임하였으나, 영조 즉위 후 소론으로 취급되어 파직되었다가 1727(영조 3) 노론이 물러난 정미환국으로 다시 총융사로 기용되었다.

1728년 이인좌 ( 李麟佐 )의 난이 일어나자 순토사(巡討使)로 출정의 명령을 받았으나 타고갈 말이 없다는 핑계로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고, 또한 반란 주동자의 한 사람이며 사돈간인 이유익(李有翼)을 숨겨주었다 하여 의금부에 구금되었다. 그 뒤 석방의 주장이 있었으나 감옥의 벽을 뚫고 내왕한 혐의를 받아 처형되었다.

 

김구()

1876(고종 13) 1949. 독립운동가 · 정치가.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창수(昌洙), 개명하여 구(, ), 법명은 원종 ( 圓宗 ), 환속 후에는 두래(斗來)로 고쳤다.

자는 연상(蓮上), 초호(初號)는 연하(蓮下), 호는 백범(白凡). 황해도 해주 백운방(白雲坊) 텃골 基洞 출신. 순영(淳永)7대 독자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인조 때 삼정승을 지낸 방조(傍祖) 김자점 ( 金自點 )이 권세 다툼에서 청병(淸兵)을 끌어들였다는 역모죄로 효종의 친국을 받고 1651년 사형당하자, 화를 피하여 선조되는 사람이 그 곳으로 옮겨갔기때문이다.

4세 때 심한 천연두를 앓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9세에 한글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아버지의 열성으로 집안에 서당을 세우기도 하였다.

14세에 통감 · 사략 과 병서를 즐겨 읽었으며, 15세에는 정문재(鄭文哉)의 서당에서 본격적인 한학수업에 정진하였고,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벼슬자리를 사고 파는 부패된 세태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 사람으로 뽑혀 제2대 교주 최시형 ( 崔時亨 )과도 만났다.

19세에 팔봉접주(八峰接主)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1895년 신천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은거하며, 당시 그의 아들 중근(重根)과도 함께 지냈다.

또한, 해서지방의 선비 고능선(高能善) 문하에서 훈도를 받았고, 솟구치는 항일의식을 참지 못하여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부대에 몸담아 일본군 토벌에 나서기도 하였다.

을미사변으로 충격을 받고 귀향을 결심, 18962월 안악 치하포( 悉 河浦)에서 왜병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21세의 의혈청년으로 국모의 원한을 푸는 첫 거사를 결행하였다.

그 해 5월 집에서 은신중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형집행 직전 고종황제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되었으나, 석방이 되지 않아 이듬해 봄에 탈옥하였다.

삼남일대를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고, 1899년 서울 새절(봉원사)을 거쳐 평양 근교 대보산(大寶山) 영천암(靈泉庵)의 주지가 되었다가 몇 달 만에 환속하였다.

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도 황해도 장연에서 봉양학교(鳳陽學校) 설립을 비롯하여, 교단 일선에서 계몽 · 교화사업을 전개하였으며, 20대 후반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Evert靑年會) 총무로 일했다.

이런 가운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상동교회 지사들의 조약반대 전국대회에 참석하였으며, 이동녕 ( 李東寧 ) · 이준 ( 李儁 ) · 전덕기 ( 全德基 ) 등과 을사조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서 읍소하였다.

한편,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여 구국대열에 앞장섰다. 1906년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 총감으로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다음해 안악에 양산학교 ( 楊山學校 )를 세웠다.

1909년 전국 강습소 순회에 나서서 애국심 고취에 열성을 다하는 한편,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이 되었다. 그때 비밀단체 신민회 ( 新民會 )의 회원으로 구국운동에도 가담하였다. 그 해 가을 안중근의 거사에 연좌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 뒤 19111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모의 혐의로 안명근 ( 安明根 )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았다.

1914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옥하였다. 자유의 몸이 되자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東山坪)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

19193 · 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헌법을 제정,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면서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8년 이동녕 · 이시영 ( 李始榮 ) 등과 한국독립당 ( 韓國獨立黨 )을 창당하였고, 1929년 재중국 거류민단 단장도 겸임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의혈청년들로 하여금 직접 왜적 수뇌의 도륙항전(屠戮抗戰)에 투신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이에 중국군 김홍일 ( 金弘壹 ) 및 상해병공창 송식마(宋式 撚 )의 무기공급과 은밀한 거사준비에 따라, 19321 · 8이봉창의거와 4 · 29윤봉길의거를 주도한 바 있는데, 윤봉길(尹奉吉)의 상해의거가 성공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1933년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 · 중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중국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사용하도록 합의를 본 것은 주목받을 성과였으며,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재임되었고, 1939년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 ( 李範奭 )을 임명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하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즈음하여 1941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면서 임전태세에 돌입하였다.

19427월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간에 광복군 지원에 대한 정식협정이 체결되어, 광복군은 중국 각 처에서 연합군과 항일공동작전에 나설 수 있었다.

그 뒤 개정된 헌법에 따라 1944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되고, 부주석에 김규식 ( 金奎植 ), 국무위원에 이시영 · 박찬역 등이 함께 취임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산시성(陜西省) 시안(西安)과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면서 미육군전략처와 제휴하여 비밀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는 등, 중국 본토와 한반도 수복의 군사훈련을 적극 추진하고 지휘하던 중 시안에서 8 · 15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일동과 함께 제1진으로 환국하였다. 그 해 1228일 모스크바3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결의가 있자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며, 오직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광복정계를 영도해 나갔다.

19462월 비상국민회의의 부총재에 취임하였고, 1947년 비상국민회의가 국민회의로 개편되자 부주석이 되었다. 그 해 630일 일본에서 운구해온 윤봉길 · 이봉창(李奉昌) · 백정기 ( 白貞基 ) 등 세 의사의 유골을 첫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손수 봉안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민주의원(民主議院) · 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李承晩) · 김규식과 함께 이끌었다. 194711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면서, 그의 논설 나의 소원 에서 밝히기를 완전자주독립노선만이 통일정부 수립을 가능하게 한다. ” 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1948년 초 북한이 국제연합의 남북한총선거감시위원단인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구는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수립방침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 해 2103천만동포에게 읍고(泣告)이라는 성명서를 통하여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하였다.

분단된 상태의 건국보다는 통일을 우선시하여 5 · 10제헌국회의원선거를 거부하기로 방침을 굳히고, 그 해 419일 남북협상차 평양으로 향하였다.

김구 · 김규식 · 김일성 · 김두봉(金枓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에 임하였으나, 민족통일정부 수립 실패의 시련을 맛보고 그 해 55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한국독립당의 정비와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일에 주력하며 구국통일의 역군 양성에 힘썼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그 해 815일과 99일에 서울과 평양에 각각 세워진 뒤에도 민족분단의 비애를 딛고 민족통일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가운데, 이듬해 626일 서울 서대문구에 있던 자택 경교장(京橋莊 지금의 삼성강북의료원 건물)에서 육군소위 안두희 ( 安斗熙 )에게 암살당하였다.

7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고,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으며, 4 · 19혁명 뒤 서울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다. 저서로는 백범일지 白凡逸志 를 남겼다.

 

金礩(김질) 선생의 일화.

 

단종 복위를 위한 거사문제가 의외의 변고로 결행할 수 없게 되자 기회를 뒤로 미루자 하니 兪應孚(유응부)가 강하게 강행하자고 주장을 하였다.

朴彭年(박팽년)成三問(성삼문)이 나서서 兪應孚(유응부)를 겨우 말렸다.

金礩(김질)은 일이 성사되지 않은 것을 보고 곧장 장인인 鄭昌孫(정창손)았다.

자네가 어인 일로 왔는가?’

장인어른, 역적모의 입니다.”

누기 역적모의를 했다는 밀인가?’

저도 그 모의에 기담 했습니다.”

자네도?’

그렇습니다. 하오나 오늘 거사가 어긋난 것을 보면 이것은 천명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먼저 배반하면 부귀를 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서 서두르게.”

鄭昌孫(정창손)이 사위 金礩(김질)을 앞세우고 대궐에 들어가 세조를 만났다.

전하, 역모이옵나이다.”

역모라고?’

신은 알지 못하오나 성삼문 등이 역모를 꾀했다고 하옵니다. 신의 사위 金礩(김질)이 상세히 알고 있사옵니다.”

金礩(김질)을 불러라!”

김질이 세조 앞으로 나아가 일의 자초지종을 모두 털어놓았다.

이런 꾀씸한 놈들! 과인이 그자들과 장래를 약속했거늘, 어찌 과인의 등 뒤에서 역적모의를 했단 말인가.”

 

이때 成三問(성삼문)은 승지로서 세조를 가까이 모시고 있었다.

세조가 편전으로 나갔다.

성삼문이 입시했다.

여봐라, 저자를 끌어내라!”

세조는 무사들에게 명령하여 성삼문을 끌어내어 金礩(김질)과 대질시 켰다.

金礩(김질)은 과인에게 한 말을 저자 앞에서 해보라!”

김질이 일의 모의 과정을 거침없이 설명했다.

이때 성삼문이 김질의 밀을 가로 막았다.

그만 해 두라. 말이 거짓이 아니다. 상왕께오서 춘추 젊으신선위했으나, 신하 자로서 다시 세우려 함은 마땅한 일이 아닌가!”

하고 태연하게 세조를 노려보았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金方慶(김방경)

 

金方慶(김방경) 康宗 1年 壬申(1212)~

忠烈王 26年 庚子(1300) 89.

 

고려사절요 충렬왕 38년 정자 8월조에 上洛公(상락공) 김방경 ()하였는데 안동 사람이며 성품이 충직하고 엄숙하며, 말이 적고 너그럽고 도량이 넓어 작은 것에 구애되지 아니한다. 많은 古典(고전)을 알고 능히 판단을 잘하며 , 감가고 검소함을 권하며,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탄식하였다. 나이 89에도 머리가 세지 않고 기골이 남다르며, 능히 추위나 더위에도 병나지 않고 살다가 조용히 떠나너 뒤에 忠烈(충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라는 글이 상락공이 서거한 다을 史官(사관))이 평한 글이 있다.

미루어 층직하고 憂國(우국)하였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의 묘소는 녹전면 구송리 능 안에 광삼김써 증 참판 孝盧公(효로공)連墳(연분)으로 있는데 오래도록 실전되어 오다가 조선조 중기에 와서 찾았다.

舊碑(구비)戶牌碑(호패비)식인 主碑(주비)었으나 자획이 마멸되어 알아볼 수가 없고 병오년(1963)에 다시 세운 新碑(신비)高麗推忠靖難定遠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고려추충정난정원공신벽상삼한삼중대광) 金方慶之墓(김방경지묘)라 전면에 큰 글씨로 각하였고 皇明(황명) 만력 31년 임인 (1602) 의 구비 陰記(음기)를 각하여 두었으며 신도비는 예안 元川(원천) 사이 국도변에 이병도 박사 찬의 현대비를 건립하여 공의 공적을 기록하여 추모하고 있다. (제향은 음력 1O9)

구 안동 김씨의 계보를 보면 ()을 파조로 하늘 忠烈公(충렬공)파가 가장 번성하였다.

역사적으로 보먼 고려말기에서 조선조 중기기에 활약한 분들이많다.

그러나 현재 안동지방에는 그 중 익원공파가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다.

 

 

 

김방경 墓碣(묘갈)

 

墓碣

高麗推忠靖難定遠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僉議中贊世子師上洛郡開國公諱忠烈 金方慶之墓

 

碑文

安東金氏 系出新羅敬順王 爲九世孫 生麗代 使高 元 忠烈朝 勳業茂著轟輵 古今 載在國史 及行狀 斑斑可考 姑撮其表 表子 言之則 忠直信厚 得於天性制行也 勤儉寡黙 立朝也 竭忠奉公 至於行師有律 戰克攻取 珍島之役 日本之征 比其大較 內外苗裔 趾美鴻赫三百年玆 豈非德厚者流光歟 墓在禮安治西知禮村 神道碑 舊有麗王所立 歲久無微 姓孫禮生 曾監此縣 竪竭爲表 今並與此竭而破折 嗚呼 後之知人 何以知公之墓乎 參奉金圻 生員金坪 以外裔 居墓下 與姓孫參奉金慶建 暨在近諸孫 謀易他石以新之 且加封植 來於余 余於公爲母十三代孫 嘗拜公之墓 爲之助其資 仍識 其梗槪云

嘉善大夫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大邱都護府使 李時發 識

宣務郞 前行濟用監參奉 曹友仁 書

明皇萬曆三十年 壬寅 二月 日 立

 

 

김방경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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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추충정난정원공신벽상삼한삼중대광첨의중찬세자사상락군개국공휘충렬 김방경지묘

 

안동김씨의 계통은 신라 경순왕으로부터 나왔으니 공은 그 19세손으로서 고려 때에 출생하여 고종, 원종, 충렬왕 등의 조정에서 벼슬을 하여 훈업이 크게 나타나서 고금을 울렸음이 국사와 행정에 실려 있음을 잘 알 수가 있으나, 우선 그 특수한 것만 뽑아서 말한다면, 충직하시고 신후하심은 천성에서 우러났으니 처세를 하는 데는 부지런하고 검소하시며 말이 적고 조정에 나가서는 충을 다헤서 봉공하시며, 군사를 통솔함에는 엄한 규율이 있어서 싸워 이기고 공격하면 쟁취하심은 진도를 평정하고 일본을 정벌하심을 봐서 크게 알 수 있다.

그 후예 내 외손들의 밟아 온 자취가 훌륭하고 빛남이 지금까지 300년을 지냈으나 어찌 이른바 후덕자의 혜택이 아니겠는가?

 

묘는 예안 지례촌에 있으며 신도비는 옛날 고려왕이 세운 것으로 세월이 올되어 실징 할 수 없으므로 성손 예생이 이 고을 현감으로 와서 비석을 세워 표시를 하였더니 이제 이 비석까지 부러져 버렸으니 아! 후세의 사람들이 어찌 공의 묘소인줄 알 수 있을까? 참봉 김기와 생원 김평은 외후손으로서 묘아래 살면서 성손인 참봉 김경건과 더불어 근방에 사는 여러 자손들이 다른 비석으로 버꾸고 또한 봉식도 더하기로 계획하여 나에게 와서 말하니 이 일을 위하여 경비도 보조하고 아울러 그 경위를 기록하노라.

가선대부경상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대구도호부사 이시발 지음식

선무랑 전행제용감참봉 조우인 글 씀

명황만력삼십년 임인 이월 일 세움

 

上洛君忠烈公(김방경) 신도비

충렬공 신도비는 1312년 왕명(충성왕)에 의해 세웠다. 고려 시대에 왕명으로 세운 신도비로서는 유일하지만 오랜 역사를 이어오면서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떻게 없어져 벼렸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충렬공이 일본을 장발 한 것 때문에 임진왜란이 발발되었을 때 왜적에 의해 소실되었을 것으로 문중에서는 추측하고 있다. 현 신도비는 후손들에 의해 19711126일에 충렬공의 묘소 입구인 구송 삼거리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1989127일에 심도비각을 지어 비를 보호하고 있다

신도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문 내용>

굳센 풀은 모진 바람에서 알 수 있고, 곧은 신하는 板蕩中(판탕중)에서 볼 수 있다.는 옛 말이 있다. 이는 아마 저 내외적으로 다사다난한 판국에 出將入相(출장입상) 盡忠竭力(진충갈력) 능히 이를 극복하여 길이 빛나는 이름을 남긴 고려조의 金忠烈公(김충렬공)과 같은 이름을 두고 말한 것이리라.

공의 휘는 方慶(방경), 자는 本然(본연), ()은 안동이며, ()는 병부상서 한림학사 휘 孝印(효인)이라. 공은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사람됨이 특이하고 숙성하여 고종 1416세에 산원겸식목록사를 제수바다 仕路(사로)에 나서다. 그 후 공은 승진하여 거듭 감찰어사에 ()하여 강직한 기풍을 보였고 고종 38(37) 서북면병마판관으로 있을 때는 몽고 병의 침입을 피하여 葦島(위도)에 주민을 피난시켜 경작하게 하다. 그 후 남경유수 서북면병마사를 역임, 간곳마다 선정을 행하고 들어와 병부상서 추밀원부사의 요직을 띠다. 이때는 고려가 이미 원(몽고)의 절제를 받고 내외적으로 복잡한 환경 속에 있었으나 공은 오직 충직과 성실로 임무를 다하니라.

원종 11(59) 삼별초란에 공은 元將(원장)과 더불어 진도에 있는 적을 쳐 이듬해 이를 소탕하고 그 공으로 수대위중서시랑평장사(제상)에 승진되다. 적의 잔당이 탐라로 들어감에 원종 13(61) 공은 또 행영중군병마원수로서 원나라 군과 합세하여 상륙작전을 감행, 이듬해 드디어 난을 평정하고 凱歌(개가)하니 원종은 공을 慰賀(위하)하고 紅鞓(홍정)을 하사하고 시중(수상)()하다.

同年(동년) 7월에 元帝(원제)의 부름을 받고 ()에 가니 ()는 공을 예우하여 金鞍綵服(금안채복)과 금은을 하사하고 총애함이 극진, 돌아와 開府儀同三司(개부의동삼사)加授(가수)하다. ()의 요청으로 공은 元將(원장)과 더불어 많은 戰船(전선)을 이끌고 대마도, 이끼도를 攻破(공파)하고 내키어 九州(구주) 북안을 치다가 태풍을 마나 돌아와 포로와 기물을 바치니 왕은 공에게 上柱國判御史臺事(상주국판어사대사)를 가하고 동년(충렬왕 원년)에 관제개혁으로 인하여 천지중찬(시중)상장군판전이감찰사사를 () 하고 또 이듬해 원제로부터 최고무공훈정인 虎頭金牌(호두금패)를 받았다.

충령왕 7년에 재차 일본정벌의 명을 받은 공은 元軍(원군)과 합세하여 하꼬다를 공격 중 또 태풍을 만나 돌아오니라. 공은 연로를 이유로 누차 사직을 원하였으나 왕은 이를 불허하고 元帝는 공에게 중선대부관령고려도원수를 제수하였으며(충렬왕 6) 동왕 9(72)에 또 致仕(치사)하고 다시 상락군개국공식읍일천호식실봉삼백호를 봉하였다.

공은 치사한 뒤에도 憂國(우국) 如家(여가) 국가에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왕으 자문을 받더니 同王(동왕) 26년 경자(1300) 816일에 향년 89세로 졸하매 조야가 모두 통탄하니라. 충성왕 즉위초(1307)王旨(왕지)를 내려 고 상락공은 사직에 유공함이 帶礪(대려)와 같다.하며 선충협모정정국공신벽상삼한대광을 追增(추증)하고 휘를 忠烈(충렬)이라하고 명하여 신도비를 세우게 하다.

오호라! 공은 실로 우국진충으로써 시종일관한 위인이었도다. 그 그릇과 도량은 弘大(홍대)하여 小事(소사)에 구애치 않았고 盛寒(성한) 極暑(극서)에도 질병을 몰랐다하니 공의 장수가 여기에 연유함을 알겠도다. 忠直信厚(충직신후) 嚴毅(엄의) 寡言(과언) 不怒(불노) 不尤(불우)의 군자적 성격 문무겸전 박식고전 처사무착의 才識(재식)과 지략 또 그 律己(율기)는 엄격하여 낮에는 누어본 일이 없었다 하니라. 이로써 공은 그 다사한 난국을 극복하여 큰 공적을 세웠으니 그 重重(중중)爵號(작호)諡號(시호)其宜(기의)를 득하였다 하겠도다.

공의 아들에는 (), (), (), ()이 있어 장남 ()은 관이 부지밀사에 이르고 그 뒤에 역시 명공거경으로 연연하여 동국 화문대족을 이룩하니라.

공의 옛 신도비가 불행이도 임진왜란에 회손 유실되어 그 후 개수치 못한 것을 유감으로 여겨 김씨대종회에서 이를 재건코자 나에게 글을 청하니 나는 일찍부터 공의 숭고한 전신과 원만한 인격을 추모하는 터이라 不文(불문)이나마 삼가 약술하였노라.

서기 197110월 일

학술원장 문학박사 李丙燾(이병도)

후세손 의학박사 金思達(김사달) 근서

 

 

 

金三近(김삼근)의 묘비

 

金三近(김삼근) ?~世祖 10乙酉(1465)

安東人 閤門奉禮 革의 아들. 號 謝隱.

 

공은 세종 1년 기해(1419)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비안현감을 역임하였다. 직곡동에 있는 공의 묘 앞의 圭碑(규비)8대손 壽增(수증: 1624~1701)이 전면 글씨를 썼는데 음기는 없다.

공은 세조 10(1465) 졸인데도 생년이 불분명한 것은 조선초기에는 어떤 씨족에서도 흔히 있는 사실이다.

족보에는 仲男(중남) 係行實紀(계행실기)에 기록 된 것이 있다 하였으며 봉화현 先生案(선생안)이나 씨족원류 등의 사적 등을 詳考(상고)하였으나 생년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조선조 후기의 세도정치 60년의 안동 김씨가 선대의 묘소관리을 옛 제도를 그대로 계승하고 여기에 더 미화 혹은 과장하여 치장하니 않았다 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이 느껴져서 숙종연간에 수립된 비나 참고자료로 기록하여 둔다.

 

 

 

金係權(김계권)의 묘비.

 

金係權(김계권) ?~世祖 3年 戊寅(1458)

安東人 比安縣監. 三近 長子. 官 漢城府 判官

 

공의 묘소는 풍산읍 소산동 서쪽 소요산 역동 건좌에 있다.

공의 장자 學祖(학조: 호 등곡 세조 때 國師)가 점지한 곳으로 蒼萍浮水(창평부수) 형국의 명산이라 한다.

공은 예천 권씨 齊平公(제평공) 孟孫(맹손)의 사위로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장자는 燈谷大師(등곡대사), 차자는 사헌부감찰 永詮(영전), 셋째는 진사 永勻(영균), 넷째 수원부사 永錘(영추), 다섯째 사헌부 장령 永銖(영수)로 이때 이후 자손이 번창 하였으며 특히 끝의 장령공파에는 많은 科臣(과신)이 배출되어 명문으로 발전하게 된다.

공의 묘 앞에는 朝散大夫漢城府判尹(조산대부한성부판윤)이라는 비가 있는데 세조 4(1459)에 세운 비가 마모되어 순조 26丙戌(1826)에 개수하였다 한다. 令人(영인) 예천 권씨부인 묘는 공의 묘 뒤에 있으며, 後麓(후록)에는 장령공 영수(대제학 成俔 찬갈) 내외, 蒼筠(창균) 箕報(기보)(공조원참 元行 찬갈) 내외, 승의랑 () 내외, 九潭(구담) () 내외분의 묘서가 있고, 왼쪽 언덕에는 사위 한서우 주부 계공랑 鄭勳老(정훈로)의 묘도 있다.

 

 

金用礪(김용려)의 묘비

 

金用礪(김용려) 生卒未詳. 字 鍊之 安東人

繕工監主簿 三友孫 孝子 時佐

 

공은 성존 17년 병오(1486) 성균관생원에 합격하였다. 묘는 풍산 상리 시묘골에 있다. 短碑(단비)의 전면에 성군생원 김용려지묘라 쓰여 있고 음기는 없다. 아들 時佐(시좌)의 효행은 영가지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골에서 모친이 돌아가시고 廬墓(여묘) 3년을 하였다 하는데 비석에는 배위 인동 장씨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시좌의 정려각 및 祠宇(사우)는 공의 묘 아래에 있다. 공의 묘비는 조선조 초기의 우리 지방의 전형적인 형식이다. 공의 묘 뒤에 합문지후 金革(김혁)공 내외뵤가 있다.

 

 

 

 

 

 

 

항렬(行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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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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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5년 경제기획원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남한에 살고있는 안동김씨()는 총 95,735가구에 398,240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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