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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양김씨(金)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언양김씨)

 

본관(本貫): 언양(彦陽)

시조(始祖): 김선(金鐥)

유래(由來):

 

언양김씨신유보(彦陽金氏辛酉譜)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 의하면 그가 고려(高麗)때 언양군(彦陽君)에 봉군되었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언양(彦陽)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가문의 대표 인물

 

김정보(金精寶)

시조(始祖) ()의 손자 정보(精寶)가 고려에서 호부 상서(戶部尙書)를 지냈다.

 

김경숙(金鏡淑)

경숙(鏡淑)은 대장군(大將軍 : 3품 무관직 벼슬)을 역임하였다.

 

 

김수(金壽)

신호위 별장(神號衛別將) ()와 함께 이름을 날렸다.

 

김언련(金彦連)

()의 아들 언련(彦連)은 신호위 중랑장(神號衛中郞將)을 지냈다.

 

김취려(金就礪)

1234(고종 21). 고려 후기의 무신. 아버지는 예부시랑을 지낸 부()이다. 음서로 정위(正衛)가 되어 동궁위(東宮衛)에 배속되었다가, 이후 장군이 되어 동북계를 지켰고, 대장군에 발탁되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는 몽고가 금나라를 정벌했고, 금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거란이 대요수국(大遼收國)을 세웠다.

그런데 거란 또한 몽고의 공격을 받아 1216(고종 3) 압록강을 건너 고려의 북방지역으로 밀려오는 상황이었다. 이때 그는 대장군으로 후군병마사가 되어 조양진(朝陽鎭)에서 거란군을 물리쳤다. , 연주 ( 延州 )에서는 거란 군사가 강성해 모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 장군 기존정 ( 奇存靖 )과 함께 앞장서 적군의 포위를 돌파하였다.

이에 힘입은 군사들이 적군을 무찔러 목베고 사로잡은 군사들이 24백명이나 되었고, 거란은 드디어 청새진(淸塞鎭)을 넘어서 퇴거하였다. 이 전투에서 맏아들이 전사하였다.

1217년 거란군 5천여 명이 다시 남으로 내려오자, 금교역(金郊驛 : 지금의 황해도 서흥)에서 5군을 재편성해 상장군 오응부(吳應夫)를 중군병마사, 상장군 최원세(崔元世)를 전군병마사, 차상장군(借上將軍) 공천원 ( 貢天源 )을 좌군병마사 등으로 삼았다. 그러나 5군이 출발을 지체하는 동안 동주(東州 : 지금의 강원도 철원)가 함락되었다.

이에 당시의 집정자 최충헌 ( 崔忠獻 )에 의해 상장군으로 전군병마사에 임명되어, 거란군을 명주(溟州 : 지금의 강원도 강릉) 방면으로 패주시켰다. 그 해 다시 거란이 여진족과 연합해 침입하자, 예주(豫州 :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에서 교전했으나 병으로 돌아왔다.

1218년 병마사가 되어 서북면원수 조충(趙沖)과 함께 거란적을 강동성(江東城)으로 쫓아냈다. 이 때 동진국(東眞國)을 쳐서 신하로 따를 것을 맹세하게 하였다. 또한 거란을 토멸하겠다는 명분으로 동북면 지방으로 들어와 공동작전을 제의한 몽고군과 그리고 동진국과 힘을 합쳐 강동성을 함락시켰다.

1219년 의주별장 한순 ( 韓恂 )과 낭장 다지 ( 多智 ) 등의 반란을 이극서(李克 姸 ) · 이적유 ( 李迪儒 )와 함께 평정해 북방을 편안하게 하였다. 1221년 추밀원사 병부상서 판삼사사(樞密院使兵部尙書判三司事)를 거쳐, 참지정사 판호부사(參知政事判戶部事)가 되었다.

1228년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守太尉中書侍郎平章事判兵部事)가 되었으며, 그 뒤 시중에 제수되었다. 사람됨이 정직 · 검약했으며, 군사통제에 엄격하고 공정해 사졸들이 조금도 범함이 없었고, 존경하였다. 많은 공을 세웠으나 스스로 내세우지 않아 칭찬의 소리가 높았다.

또한, 정승이 되어서는 안색을 바르게 하여 아랫사람을 거느려 사람들이 감히 속이지 못했으니, 진실로 충성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 고종 묘정(高宗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위열(威烈)이다.

 

김전(金佺)

1271(원종 12). 고려 후기의 문신. 아버지는 문하시중을 지낸 취려(就礪)이다. 1258(고종 45)에 좌복야 ( 左僕射 ), 1260년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1262년에 추밀원사, 이듬해 수사도 지문하성사 태자소부(守司徒知門下省事太子少傅)가 되었다.

1268년에 참지정사 ( 參知政事 )로서 판추밀원사(判樞密院使) 최영 ( 崔瑩 )과 함께 단련조병도감판사(團練造兵都監判事)에 제수되었으며, 1271년에 문하시랑평장사 ( 門下侍郎平章事 )로서 일생을 마쳤다. 시호는 익대(翊戴)이다.

 

김문연(金文衍)

1314(충숙왕 1). 고려 후기의 척신. 할아버지는 취려(就礪)이며, 아버지는 양감(良鑑)이다. 어려서 승려가 되었으나 환속하였다. 여동생 숙창원비 ( 淑昌院妃 )가 충렬왕의 총애를 받는 것을 기회로 30세에 좌우위산원(左右衛散員)이 되었고, 그 뒤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郎贊成事)에 이르렀다.

1305(충렬왕 31)에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을 때 송방영 ( 宋邦英 왕유소(王惟紹) 등이 충렬·충선 두 왕의 사이를 이간시키려고 책동하고, 충선왕비 보탑실련공주 ( 寶塔實憐公主 )를 서흥후 전(瑞興侯琠)에게 개가시키려는 것을 보고 원나라의 중서성에 그 내용을 고하였다.

또한, 왕에게 환국할 것을 종용했으나, 공주의 노여움을 사서 장형에 처해졌다. 1307년에 충선왕의 명으로 고려에 돌아와 국정쇄신에 대한 선언문을 발표하고 새로이 80여인의 관리를 임명하여 실권이 충선왕에게 돌아가게 하는 데 공이 컸다.

충렬왕이 죽고 충선왕이 재즉위한 뒤 첨의중호(僉議中護)가 되었으며, 원나라로부터 신무장군 진변만호(信武將軍鎭邊萬戶)에 언양군(彦陽君)으로 봉해졌다. 그뒤 진변만호부다루가치(鎭邊萬戶府達魯花赤)가 더해졌으며 원나라에 다녀오는 도중에 죽었다. 시호는 영신(榮信)이다.

 

김윤(金倫)

변의 아들 윤()은 충목왕(忠穆王) 초에 찬성사(贊成事)를 거쳐 좌정승(左政丞)에 이르러 언양부원군(彦陽府院君)에 봉해졌다.

 

김경직(金敬直)

경직(敬直)이 문하시중(門下侍中검교첨의찬성사(檢校僉議贊成事)를 지내고 언양백(彦陽伯)에 봉군되어 가문을 중흥시켰다.

 

김관(金瓘)

1425(세종 7)1485(성종 16). 조선 전기의 문신. 초명은 종동(終同). 자는 영중(瑩中), 호는 묵재(默齋).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약()이고, 아버지는 선천군사(宣川郡事) 숙보(叔甫)이며, 어머니는 서유 ( 徐愈 )의 딸이다.

1447(세종 29) 사마시에 합격하고, 1451(문종 1) 증광 문과에 정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처가 장사치의 무늬있는 비단을 훔친 사건에 연루되어 황해도 경천참(敬天站)으로 귀양가서 그 곳 역리 ( 驛吏 )가 되었다.

1456(세조 2) 어머니 서씨(徐氏)의 간청으로 귀양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1461년 도관좌랑(都官左郎)으로 대마도경차관 김치원(金致元)의 종사관이 되어 대마도에 다녀왔으며, 전라도경차관을 거쳐 1465년에는 예조정랑에 이르렀다.

1467년 이시애 ( 李施愛 )의 난이 일어나자 구성군 준(龜城君浚)의 종사관으로 활약한 공으로 정충출기적개공신(精忠出氣敵愾功臣) 2등에 녹훈되고 종부시정(宗簿寺正)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강원도관찰사로 있을 때, 낙산사의 조성 비용을 민간에서 지나치게 거둬들였다는 혐의를 받아 부호군 ( 副護軍 )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뒤에 낙산사의 조성 공사가 무사히 끝나자 도리어 논상(論賞)되었다. 1469(예종 1)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황해도관찰사로 전임되었으나 도적을 잡지 못해 체직되었다. 1475(성종 6) 영안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479년 동지중추부사로 천추사 ( 千秋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언양군(彦陽君)에 봉해졌다.

1481년 전주부윤을 지내고, 1483년 사은사 ( 謝恩使 )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84년 전라도관찰사에 이르렀다. 그림에도 재능이 있었는데 특히 산수화를 잘 그렸다. 시호는 공양(恭襄)이다.

 

김천일(金千鎰)

1537(중종 32) 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 · 의병장.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 나주 출신. 할아버지는 주부 윤손(潤孫)이고, 아버지는 진사 언침(彦琛)이며, 어머니는 양성 이씨(陽城李氏)로 부위 ( 副尉 ) ( )의 딸이다. 이항 ( 李恒 )의 문인으로, 김인후(金麟厚) · 유희춘(柳希春) 등과 교유하였다.

임진왜란 초기의 활약상1573(선조 6) 학행(學行)으로 발탁되어 처음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가 된 뒤 용안현감(龍安縣監)과 강원도 · 경상도의 도사를 역임하였다. 지평 ( 持平 ) 때에 소를 올려 시폐를 적극 논란하다가 좌천되어 임실현감이 되었다. 그 뒤 담양부사 · 한성부서윤 · 수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적의 대군이 북상해 서울이 함락되고 국왕이 서행(西幸)했다는 소식에 접하자 고경명 ( 高敬命 ) · 박광옥 ( 朴光玉 ) · 최경회 ( 崔慶會 ) 등에게 글을 보내 창의기병(倡義起兵)할 것을 제의하는 한편, 담양에서 고경명 등과도 협의하였다.

그 뒤 나주에서 송제민(宋濟民) · 양산숙 ( 梁山璹 ) · 박환(朴 潁 ) 등과 함께 의병의 기치를 들고 의병 300명을 모아 북쪽으로 출병하였다.

한편, 공주에서 조헌 ( 趙憲 )과 호서 지방 의병에 관해 협의하고는 곧 수원에 도착하였다. 북상할 때 수원의 연도에서 스스로 의병에 참가한 자와 또 호서 방면에서 모집한 숫자가 크게 늘어나자 군세는 사기를 떨쳤다.

수원의 독성산성(禿城山城)을 거점으로 본격적인 군사 활동을 전개, 유격전으로 개가를 올렸다. 특히, 금령전투(金嶺戰鬪)에서는 일시에 적 15명을 참살하고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8월 전라병사에 최원 ( 崔遠 )의 관군과 함께 강화도로 진을 옮겼다. 이 무렵 조정으로부터 창의사(倡義使)라는 군호 ( 軍號 )를 받고 장례원판결사(掌禮院判決事)에 임명되었다.

강화도에 진을 옮긴 뒤 강화부사 · 전라병사와 협력해 연안에 방책(防柵)을 쌓고 병선을 수리해 전투 태세를 재정비하였다. 강화도는 당시 조정의 명령을 호남 · 호서에 전달할 수 있는 전략상의 요충지였다.

9월에는 통천(通川) · 양천 ( 陽川 ) 지구의 의병까지 지휘했고 매일같이 강화 연안의 적군을 공격했으며, 양천 · 김포 등지의 왜군을 패주시켰다.

한편, 전라병사 · 경기수사 · 충청병사, 추의병장(秋義兵將) 우성전 ( 禹性傳 ) 등의 관군 및 의병과 합세해 양화도전투(楊花渡戰鬪)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또한, 일본군의 원릉(圓陵) 도굴 행위도 막아 이를 봉위하기도 하였다.

다음해인 1593년 정월 명나라 군대가 평양을 수복, 개성으로 진격할 때 이들의 작전을 도왔으며, · 일간에 강화가 제기되자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서울이 수복되어 굶주리는 자가 속출하자 배로 쌀 1,000석을 공급해 구휼하였다.

전투에서도 경기수사 · 충청수사와 함께 선유봉(仙遊峯) 및 사현전투(沙峴戰鬪)에서 다수의 적을 참살, 생포하고 2월에는 권율 ( 權慄 )의 행주산성 전투에 강화도로부터 출진해 참가하였다. 이들 의병은 강화도를 중심으로 장기간의 전투에서 400여 명의 적을 참살하는 전공을 세웠다.

진주성 싸움과 순절15934월 왜군이 서울에서 철수하자 이를 추격, 상주를 거쳐 함안에 이르렀다. 이 때 명 · 일강화가 추진 중인데도 불구하고 남하한 적군의 주력은 경상도 밀양 부근에 집결, 동래 · 김해 등지의 군사와 합세해 1차 진주싸움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한 진주성 공격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에 6143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입성하자 여기에 다시 관군과 의병이 모여들었다. 합세한 관군 · 의병의 주장인 도절제(都節制)가 되어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10만에 가까운 적의 대군이 621일부터 29일까지 대공세를 감행하자 아군은 중과부적임에도 분전했으나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 이에 아들 상건(象乾)과 함께 촉석루에서 남강 ( 南江 )에 몸을 던져 순사하였다.

1603(선조 36) 좌찬성에 추증되고, 이어 1618(광해군 10)에 영의정이 더 내려졌다. 나주의 정렬사(旌烈祠), 진주의 창렬사 ( 彰烈祠 ), 순창의 화산서원 ( 花山書院 ), 태인의 남고서원 (南皐書院 ), 임실의 학정서원 (鶴亭書院 )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송천집 松川集 · 건재집 이 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김준(金浚)

1582(선조 15)1627(인조 5).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징언(澄彦). 고려 명장 취려(就礪)14대손으로, 아버지는 증병조참판 광필(匡弼)이다. 처음에는 학문에 뜻을 두어 경사에 통달하였으나 그 뒤 무예를 더욱 연마하여 1605년 무과에 급제, 부장(部長)을 거쳐 선전관이 되고, 이어 교동현감(喬桐縣監)을 지냈다.

모친상을 마치고 다시 선전관에 임명되었으나,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에 실망하여 선향인 고부로 내려가 10년간 벼슬하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도총부도사(都總府都事)가 되고, 경력 ( 經歷 )을 거쳐 죽산부사로 나갔다.

이듬해 이괄의 난 때에는 후영장(後營將)으로 임진강 상류에 있는 영평산성(永平山城)을 지켰으며, 난이 평정된 뒤에는 의주부윤·훈련원정(訓鍊院正봉산군수(鳳山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1625년 통정대부 ( 通政大夫 )에 승진하여 안주목사 겸 방어사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 후금군에게 안주성이 함락되자 처자와 함께 분신자결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고부의 정충사 ( 旌忠祠 ), 안주의 충민사 ( 忠愍祠 )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장무(壯武)이다.

 

김중만(金重萬)

중만(重萬)은 충청도 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를 역임하였다.

 

김석중(金石重)

병조 참판(兵曹參判)

 

김도손(金道遜)

군자감정(軍資監正)

 

김덕순(金德純),김창우(金昌宇),김희채(金禧采)

중추부사(中樞府使)

 

순봉(金舜鳳)

이조 참판(吏曺參判)

 

김사호(金士豪) ,김두열(金斗烈)

공조 참의(工曹參議)

 

金千鎰(김천일) 선생의 일화.

 

의병장 金千鎰(김천일)의 아내

 

정월 대보름을 맞이하는 열 나흗날 밤의 첫닭 울음소리는 이 해의 소리 중에서 가장 기쁜 소리일 것이다. 사중(士重)은 밤새도록 김동지의 윷놀이 청에서 놀다가 첫닭 소리가 나자마자 집으로 돌아왔다.

어이 추워, 어이 추워, 여보 문 열어하고 나막신의 눈을 털자, 방문이 방긋이 열리며 새댁 양씨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내밀었다. 사중은 방안으로 들어서자 아내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다시 한 번어이 추워하고, 아랫목에 앉았으나 양씨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여보 말을 좀 하구려.하고 남편이 섭섭해 하자 비로소 양씨는 약간 웃음을 띠며,

시장하시지요. 아이 참 닭이 울었지요. 그래 나가서 밤새도록 무엇을 하셨지요.하고 말했다.

 

내가 늦게 와서 그런가? 어째 당신의 기색이 불안해 보이는 구려.

아무렇지도 않아요.

옳지, 아마 지난밤에 아버님에게 무슨 꾸중을 들었나보구려.

호호호, 내 걱정은 마시고 당신이나 꾸중을 듣지 마세요.

내가 무슨 꾸중 들을 일이 있소.

당신은 약질에다가 몸조섭은 안하시고 날마다 노름방에서 밤을 새시니 꾸중을 안 들으시겠어요. , , .

하고 그의 천성인 쾌활한 웃음을 터뜨렸다. 미웁지 않을 만큼 서글서글한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띄었다.

 

남편에게 한번 으름장을 놓는 듯도 싶었고 또는 진정 같기도 하였다.

하여간 사중은 조금도 개의 치 않는다는 기색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아내의 가슴이 설렁하게 만들어 주고픈 생각에,

내야 노름을 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그 김동지란 자가 근방 소년들을 모두 꾀어다가 노름을 벌여 놓기에 그놈의 수단을 한번 꺾어 놓자는 것이지.

그러나 당신이야말로 시집온 지 얼마 안 되는 새댁이 어찌 양반의 집 예절을 지킬 줄 모른단 말이요. 사당 참배도 잘 않고 대소가댁 문안도 다닐 줄 모르고 명절이 되어서도 집안 어른들께 세배도 안다니고그렇게 게으르니 배운데가 없다고 아버지께서 어제 여간 걱정을 하시지 않습디다.추근추근 말해가며 아내의 등 뒤로 돌아가는 남편의 수단에 양씨는 할 수 없이 속을 털어 놓았다.

 

하긴 그일 때문에 지난밤에 시부모님께 꾸중을 들었지요. 허지만 당신 때문에 더 꾸중을 들은 셈이야요. 며느리가 게으르니까 자식도 물들어서 노름방이나 다닌다고.

 

양씨는 남편의 두루마기를 벗겨서 횃대에 걸고 이부자리를 폈다. 부모님께 귀밝이술을 올리는 행사를 하기에는 아직 일렀기 때문에 따뜻한 온돌방 이부자리 속에서의 공론이 그 칠 줄을 몰랐다.

 

그럼 대단히 걱정을 하신 모양이로군, 뭐라고 대답을 했소.

처음에는 죽어라고 입을 다물고 가만있었지요. 그랬더니 더욱 어머님이 화를 내시며 도대체 무슨 이유가 있어서 너희 내외가 짜고 그런 것 같으니 곡절을 대답하라고 하시지 않아요.

그래서

나중엔 좀 대담한 말씀을 드렸지요.

뭐라고?

저는 본래 처사(處士)집 딸이라 친정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이 살림 경제얘기뿐이었고, 논 밭 구덩이의 곡식 가꾸는 것만 일로 알았으며 어디 이런 도학 양반 댁의 예문절차야 배웠습니까? 그랬지요.

 

사중은 잠자리에서 아내의 잔등을 꾹 찌르며 감히 그런 말이 나왔소.했다. 그러나 양씨의 말은 한층 더 심각했다. 그러니까 그 귀찮은 노비들도 다 속량해 주시고 내손으로 자유롭게 치산경제를 하겠으니 시집 댁 전토 마지기를 제게 맡겨 주옵소서! 그랬지요.

여기까지 말하고 난 양씨는 입을 남편의 귀에 가만히 대었다. 그리고선 솔솔 속삭이는 말은 실로 중대하였다. 그것은 한 가정의 절대적인 흥망이 걸린 말일뿐 아니라 이 나라의 역사와 민족의 흥망에 관련되는 말이었다.

 

여자의 입으로 그게 무슨 소리람하고 사중은 별안간 아내의 몸을 밀어 제쳤다. 그리고 아내에 대한 정이 멀어져버렸다. 양씨는 후하고 한숨을 가만히 내뿜었다. 사중이 아내의 말을 듣고 가슴이 덜렁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아내 양씨의 말은 이러했다.

첫째는 유학가들의 번문과 허례를 폐지하고 노비를 속량해 주고 자력으로 농업생산 노동에 종사할 것이며 셋째는 비밀에 속하는 문제이나 하여튼 10년 내외간에 이 땅에 어떠한 커다란 국난이 닥쳐 올 것입니다.하고 예언을 한 것 이다.

 

하지만 때는 이조 선조때였으니 이러한 모든 말이 얼마나 그 시대에 반역적인 언동이었나? 더구나 한낱 새파란 여인의 입으로 이러한 언동을 했다는 것은 참으로 요사스런 변고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사실 양씨는 당시의 세상이 모르는 특이한 농부(農婦)였고, 또 앞날을 짐작할 줄 아는 범상치 않은 여성이었다. 원래 농사라 하는 직업은 식량을 생산할 뿐만 아니라 인재를 생산하고 총명예지한 정신과 도덕을 생산한다고 한다.

 

하여튼 양씨는 전북 무주고을 어느 산골 처사의 딸로서 나주로 시집을 온 것이다. 그의 시아버지는 김주부라 일컬었으며 남편의 이름은 김천일이요, 자는 사중(士重)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친정아버지인 양처사는 당시의 안목으로 본다면 산중에 숨은 괴벽한 인사로서 인간의 시무가 산림경제에 있는 것이며 썩은 양반들의 헛된 행세가 무슨 소용이냐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교육을 받은 양씨의 의견이 시집에서 끝내 통과되고 말았다. 우선 노비들을 자기 앞에 불러 세우고,

자네들 생각엔 어떤가, 사시사철 이댁에서 엎드려서 시키는 일이나 하고 편히 얻어 먹는게 좋은가. 어떠한 자유의 천지에 가서 땀을 흠뻑 흘릴지라도 자기 마음대로 일해서 살고 싶은가이러한 말을 물어볼 수 있는 자유가 양씨에게 부여되었다.

 

우리 친정댁에 가서 물어 가지고 무주구천동에 들어 가보소. 병속 같은 험한 산중이지만 벌판이 탁 터지고 미간지가 수백석지기 있을 것이니 그곳을 몇 해 두고 개간해 가며 조와 보리농사만 지어도 넉넉히 살아가고 해마다 백여 섬씩의 곡식이 남을 것이요, 그 곡식을 산중의 나무를 베어서 집과 창고를 지어서 꼭꼭 저축을 해두소. 그러면서 그 늘어가는 섬수를 해마다 나에게 기별해주오. 나도 혹시 친정엘 간다면 그곳까지 가서 구경할테니, 저축하는 곡식을 어디다 쓴다든지, 수량이 얼마라든지, 그런 것은 이다음에 알 일이니 비밀로 하오.이런 부탁을 하고 몇 마리의 소와 곡식을 그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양씨부부는 열심히 농사를 지으며 부업으로 벼농사를 많이 했다. 집 근처엔 글방을 짓고 선생을 두고서 사방의 아이들을 불러다가 공부를 하게 했다. 일 년에 두세 번씩 원근 각처의 의협 객들을 청해 들여서 강론과 토론을 하며 씨름과 활쏘기를 하였다. 밭일을 하던 양씨는 일손을 멈추고 이렇게 말했다.

 

내일 회의에서 으레 바가지 얘기가 날 것 아니요. 하지만 고작 풍류적인 소리밖에 안 나올 거예요. 그러거든 이렇게 소리치세요.

그런 썩은 선비 소리 좀 그만 구고 이제는 바가지가 모자가 될 것이니 그런 연구들이나 하자고.

무엇에 쓰느냐고 하거든 호군 치다꺼리할 때 필요하다고 해두세요. 호군이라면 벌써 군사와 난리로 짐작하거든요.

그래서

그런 다음엔 간단히 한마디 부탁해 두세요. 호군 잔치 때에 격문을 돌릴 것이니 빠짐없이 달려와 달라고.

 

다음날 회의에 수백 명의 선비와 장정들은 벌판에 모여서 씨름을 한다, 팽이질을 한다, 법석이었다. 저녁나절에 이르러 쑤군거리는 말이,필연코 난리는 난리야, 사중의 부인은 이인이거든, 하여튼 일이 날수록 우리는 뭉쳐야 해.

 

다시 세월은 흘러 선조 임진년이 닥쳤다. 주경야독으로 닦은 사중의 학문은 이때에는 벌써 상당한 학자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아내의 내조와 김동지의 벼 천석의 원조로 널리 인물을 모으고 교제를 두터이 한 결과 호남 각지에 동지가 퍼지고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과연 때는 왔다. 이 해 4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김천일은 아내 양씨의 예언에 탄복을 했다. 동시에 그는 난리에 처할 자기의 행동을 생각해 보았다.

<나라와 겨레를 건지기 위해서 가만히 앉아서 저놈들에게 짓밟혀 죽느니보다 한번 나서서 싸우다가 죽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면 군사가 있나? 그것은 이미 십여년동안 사귀어 둔 선비와 동지들이 사방에 있으니 그들에게 통문을 돌리면 벌떼같이 모여들게 아닌가. 부모처자를 피난시킬 곳도 무주구천동 산협 속에 마련되어 있는 셈이다. 여기다가 양씨는 노비들을 시켜서 약간의 창이며 칼과 철모가 그리고 그 많은 바가지를 철모자와 똑같이 가공해 둔 것이다. 모든 계획이 착수되어 마침내 김천일은 나주벌판 풍진속에 오백명의 정병을 모아 호남 의병의 깃발을 높이 날리게 되었다.

 

아버님, 어머님과 어린 것들은 아예 걱정 마세요. 피난처가 예비 되어 있으니 만큼 내가 모시고 갈 것이니 염려마세요. 다만 당신의 몸이나 잘 돌보시기 바랍니다.구국의 충혼을 가슴에 안고 사생의 병화속으로 향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같이 격려하는 여장부 양씨의 눈에는 이날에야 비로소 연약한 아녀자의 눈물이 흘렸다.

                                                          <금성시지 82. 12. 15.>

 

 

金千鎰(김천일)선생의 일화. 언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적의 대군이 북상해 서울이 함락되고 국왕이 서행(西幸)했다는 소식에 접하자 고경명(高敬命박광옥(朴光玉최경회(崔慶會) 등에게 글을 보내 창의기병(倡義起兵)할 것을 제의하는 한편, 담양에서 고경명 등과도 협의하였다.

그 뒤 나주에서 송제민(宋濟民양산숙(梁山璹박환(朴潁) 등과 함께 의병의 기치를 들고 의병 300명을 모아 북쪽으로 출병하여 친입하는 일본군과 사력을 다해 싸웠다.

 

金千鎰(김천일)선생의 일화.

 

300여 명이 김천일의 뜻에 동조하여 의병이 되었으며, 병기와 식량도 차츰 갖춰져 갔다. 본래 김천일은 그의 부친인 金彦琛(금언침)이 처가에 들어오면서부터 나주에 거주하여 처음에는 재지적 기반이 상당히 미약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천일이 이렇듯 짧은 시간에 의병 활동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외가인 陽城李氏(양성리씨)의 지원이 컸다. 또 이 시기 김천일은 이미 나주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어있었다.

 

 

김천일은 나라의 위급을 구해야 할 책임이 그들에게 있고, 의병 전쟁의 목표가 왕실을 지키는데 있음을 분명이 표명했던 것이다.

김천일이 이끄는 의병은 63일에 단독으로 서울을 향해 북진하기 시작한다. 최초의 근왕의병이라 할 수 있다. 김천일이 고경명 의병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북상한 것은 선조의 서천과 서울의 함락이라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시일을 지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군의 연패와 후퇴 소식에 실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金千鎰(김천일)선생의 일화.

 

한편 선조는 김천일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掌隷院(장례원) 判決使(판결사)의 벼슬을 내리고 倡義使(창의사)란 칭호를 의병장에게 처음으로 내렸다.

이로서 김천일 의병의 활동에 더욱 힘이 실리게 되었다. 당시 지방관들이 의병들의 봉기를 반가워하면서도 한편 국가의 관할에 벗어난 무력집단이라는 관점에서 경계하던 상황에서 창의사란 직함이 관군과의 연계 활동에 있어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선조는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려 의병활동을 적극 지원한 호남의 士民(사민)을 위로한다.

 

그대는 위험에 당하여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공을 세우니, 내 어찌 상에 인색할 것인가. 지휘하고 호령하는 것은 마땅히 도원수와 더불어 가부를 정할 수 있도록 하며, 군량미와 병기는 오직 그대의 뜻대로 취하여 쓰라.하였다.

 

이후 김천일 의병의 사기는 더욱 높아져 의병활동이 적극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한다. 의병장으로서 관군까지 지휘하게 된 김천일은 강화도를 중심으로 통진양천지구의 의병까지 거느리게 되자 북쪽의 장단까지 통할하여 전투를 지휘하였다.

 

 

 

 

金千鎰(김천일)선생의 일화.

 

김천일이 공부하던 시기는 임꺽정의 난이 일어나는 등 정치사회적으로 불안이 고조되는 때였다. 특히 그가 19세 때인 1555(명종 10)에는 乙卯倭變(을묘왜변)이 일어나 전라도 연안 일대가 노략질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김천일은 당시 豪傑之士(호걸지사)로 이름이 높은 일재 一齋(일재) 李恒(리항)을 찾아가 수학하였다.

이항의 문하에서 김천일은 小學(소학)大學(대학)을 중심으로 공부하였다.

이항이 5일간 식음을 ()하라고 명하자 김천일만이 스승을 따라 5일간 식음을 폐하며 평소와 다름없이 강독했다고 하는 일화는 그가 이항의 학문자세를 충실하게 따랐다는 것을 잘 드러내준다고 할 수 있다.

 

 

 

 

항렬(行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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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口(1985년 현재) 33,473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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