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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천조씨(趙)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趙(임천조씨)

 

 

본관(本貫): 임천(林川)

시조(始祖): 조천혁(趙天赫)

유래(由來):

 

임천 조씨(林川趙氏)의 시조(始祖) 조천혁(趙天赫)은 송(宋)나라 태조의 손자인 유길(惟吉)의 다섯째 아들이라 전한다.

우리나라에서의 연원(淵原)은 천혁이 진사시(進士試)에 올라 서두공봉관(西頭供奉官)을 지내다가 979년 국난(國難)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와 호서지방(湖西地方 : 현 부여군 임천지방)에 정착 세거(定着世居) 하면서 부터이다. 그 후 고려 현종(顯宗) 때 강감찬(姜邯贊)과 함께 거란군(거丹軍)을 토벌한 공(功)으로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올라 가림(嘉林 : 임천의 고호)백(伯)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천혁(天赫)을 시조(始祖)로 하여 임천(林川)을 관향(貫鄕)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조지서(趙之瑞)

1454(단종 2) ∼ 1504(연산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임천 ( 林川 ). 자는 백부(百符), 호는 지족정(知足亭) 또는 충헌(忠軒). 익(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직장 ( 直長 ) 민원(敏原)이고, 아버지는 사헌부감찰 찬(瓚)이다. 어머니는 생원 정참(鄭 束 )의 딸이다.

1474년(성종 5) 생원시에서 1등으로 합격하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면서, 권지승문원정자에 제수되었다. 1478 ∼ 1479년에는 통신사 이계동 ( 李季仝 )의 군관 ( 軍官 )이 되어 일본에 내왕하였다. 1479년 승문원저작으로 다시 문과중시에 1등으로 급제하고 형조좌랑에 발탁되었다.

이 해 건주위(建州衛)정벌을 위하여 파견된 서정대장(西征大將) 어유소 ( 魚有沼 )의 종사관이 되어 서정에 참가했으나, 어유소의 파병(罷兵)과 관련된 전명(傳命)을 잘못하여 고신을 몰수당하고 외방에 유배되었다. 그 뒤 1481년 “ 문학에 뛰어난 인물이니 서용하라. ” 는 성종의 특지에 따라 서반직에 복직된 뒤 교리 · 형조정랑 · 지평 · 응교, 세자시강원필선 · 보덕을 역임했으며, 이와 함께 경연 ( 經筵 )의 시독관 ( 侍讀官 )과 시강관 ( 侍講官 )을 항상 겸대하였다.

이어 1495년(연산군 1) 창원부사로 파견되었다가 곧 사직하고, 지리산에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 세자시에 그의 풍간(諷諫)함과 집요한 진강(進講)을 혐오했던 연산군의 기휘(忌諱)로 이에 연루되어 참살되었다. 성종 때 청백리 ( 淸白吏 )에 녹선되었으며, 충효와 시문으로 명망이 높았다. ≪ 동문선 ≫ 에 〈 언심견투 彦深見投 〉 라는 제목의 시 1수가 전한다.

1506년 (중종 1) 관작이 회복되고 통정대부 승정원도승지에 추증되면서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었다. 경상남도 진양의 신당서원(新塘書院)에 제향되었다.

 

조익(趙翊)

사예(司藝)를 역임한 원경(元卿)의 아들 익(翊)은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으며 중국어(中國語)에 능통하여 여러 차례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조원(趙瑗)

1544(중종 39)∼1595(선조2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임천 ( 林川 ). 자는 백옥(伯玉), 호는 운강(雲江). 원경 ( 元卿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익(翊)이고, 아버지는 응공(應恭)이며, 어머니는 민세경(閔世卿)의 딸이다. 응관(應寬)에게 입양되었다. 판서 이준민 ( 李俊民 )의 사위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1564년(명종 19) 진사시에 장원급제하였고, 1572년(선조 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75년 정언 ( 正言 )이 되어 이 해 당쟁이 시작되자, 그에 대한 탕평의 계책을 상소하여 당파의 수뇌를 파직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이듬해 이조좌랑이 되고, 1583년 삼척부사로 나갔다가 1593년 승지에 이르렀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또 자손의 교육도 단엄(端嚴)하였다. 저서로는 ≪독서강의 讀書講疑≫가 있으며, 유고로는 ≪가림세고 嘉林世稿≫가 있다.

 

조희일(趙希逸)

1575(선조 8) ∼ 1638(인조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임천 ( 林川 ). 자는 이숙(怡叔), 호는 죽음(竹陰) 또는 팔봉(八峰). 승문원판교 익(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병조좌랑 응공(應恭)이고, 아버지는 승지 원(瑗)이다. 어머니는 병조판서 이준민 ( 李俊民 )의 딸이다. 부사 희진(希進)은 아우가 된다.

1601년(선조 34) 진사시에 장원으로 뽑혔는데 선조가 그 시권 ( 試券 )을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후일 그의 아들 석형(錫馨)도 진사시에 장원을 하여 아버지에 이어 3대가 진사 장원의 가통을 세웠다.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다시 1608년(광해군 즉위년) 문과중시에서 을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저작에 제수되고, 이어 승정원주서가 되었다.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왔을 때 예조좌랑으로 빈사( 寧 使) 유근 ( 柳根 )을 따라 영접했는데, 그의 시문을 보고 모두 감탄했다 한다. 그 뒤 시강원설서 · 사간원정언을 거쳐 광해군 즉위 후 시강원사서 · 문학이 되었고, 옥당 ( 玉堂 )에 선출되었다.

이어 이조정랑이 되었으나 간당(奸黨)에 휩쓸리지 않았다. 그러나 1613년 허균 ( 許筠 )의 옥사에 연루되어 이산(理山 : 지금의 평안북도 초산)에 안치되었다가 1619년 허균이 복주된 다음 방면되었다. 인조반정 후 홍문관교리 · 부응교에 제수되어 경연관을 겸했고,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강화로 호종하였다.

광주목사(光州牧使), 예조 · 형조의 참판, 승문원제조, 경상감사 등을 역임했으며, 접반사 ( 接伴使 )가 되어 모문룡(毛文龍)을 맞기도 하였다. 일찍이 경연에 나가 임금과 대했을 때 인조가 붕당을 타파할 뜻을 비쳤는데, 이 때 그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인조는 불끈 화를 내며 그 까닭을 물었다.

이에 그는 구양수(歐陽脩)의 고사를 들어 군자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소인의 무리가 있게 마련인데 그것을 판단하고 가릴 수 있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대답하였다.

또한, 삼사 ( 三司 )에 출입하면서 상주하는 데 소신을 다하여 거리낌이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많은 적을 만들기도 하였다. 문장과 부시 · 서화에 다같이 뛰어나 명성이 높았다. 저서로 ≪ 죽음집 ≫ · ≪ 경사질의 經史質疑 ≫ 10여 책이 있다.

 

조희진(趙希進)

1579(선조 12)∼1644(인조 2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임천 ( 林川 ). 자는 여숙(與叔). 호는 단포(丹圃). 승문원판교 익(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병조좌랑 응공(應恭)이고, 아버지는 승지 원(瑗)이며, 어머니는 좌참찬 이준민 ( 李俊民 )의 딸이고, 형은 참판 희일(希逸)이다.

1606년(선조 39)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6년(광해군 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박사·전적, 공조좌랑 등을 거쳐 서산군수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성균관직강·공조정랑, 봉상시·장악원의 첨정, 사옹원·사도시·군자감·장악원의 정을 역임하였다.

1644년 9월 청송부사로 재임 중에 66세를 일기로 관아에서 죽었다. 그는 성질이 엄중하고 소행이 확고하여 오직 일의 옳고 그름에 따라 행동하였을 뿐 권력에 흔들리거나 남의 말에 따르지 않았다. 사귈 바 못된 사람들과는 아무리 권요귀현(權要貴顯)이라 할지라도 고개를 돌려 상종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는 대간을 모독하고 조정을 농간하였다는 탄핵을 받기도 하였지만 조금도 좌절하지 않았다. 1613년(광해군 5) 형 희일이 옥사에 연좌되어 오지로 유배되자 사태가 매우 불측함을 알고 화를 모면할 궁리 끝에 대북파의 인물들과 교유하기 시작하여 7년 만에 드디어 형을 구제, 방환하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서사 ( 書史 )를 즐기고 전분제자(典墳諸子 : 삼황오제와 제자백과의 서)로부터 패사소설(稗史小說)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하였으며 경전에도 힘을 기울였다. 시문에도 뛰어나 그 저작이 매우 많았으나 난리를 겪으면서 많이 유실되었다. 저서로는 ≪단보유고≫가 있다.

 

조석형(趙錫馨)

석형(錫馨)은 광해군(光海君)의 난정을 개탄하여 과거에 오를 것을 단념했다가 인조(仁祖)때 진사시(進士試)에 일등(一等)으로 합격하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으며, 시문(詩文)에 능해 당시(唐詩)에 정통했고 글씨는 진체(晋體)를 잘 썼다.

 

조경망(趙景望)

1629(인조 7)∼1694(숙종 20).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임천 ( 林川 ). 자는 운로(雲老), 호는 기와(奇窩). 아버지는 석형(錫馨)이다. 송준길 ( 宋浚吉 )의 문인이다. 사마시에 합격한 뒤 남항(南行)으로 환로에 들어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

그러나,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고 노론 일파가 몰락하게 되자 관직을 버리고 파주에 은거하였으며, 얼마 뒤 호서(湖西)의 덕산 ( 德山 )으로 옮겨 학문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경사(經史)와 제자서(諸子書)에 정통하였고, 전서·예서·해서 등 서도의 각 서체에 두루 정묘하여 당시 서예가로도 이름이 있었다.

 

조성기(趙聖期)

1638(인조 16)∼1689(숙종 15).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임천 ( 林川 ). 자는 성경(成卿), 호는 졸수재(拙修齋). 아버지는 군수 시형(時馨)이며, 어머니는 청송심씨(靑松沈氏)로 참의에 증직된 정양(廷揚)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일찍이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여 사마시에 여러번 합격하였으나, 몸에 고질이 생겨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사람들과 접촉을 끊고 심실(深室)에 들어앉아 공부하기를 30년간이나 계속하여 천지만물과 우주의 이치에 통관하였다고 한다.

어렸을 때 이미 〈이기설 理氣說〉을 지어 이와 기에 대한 고차원적인 정의를 내려 이기는 서로 혼합되어 분리할 수 없음을 주장하였으며, 20세에는 〈퇴율양선생사단칠정인도이기설후변 退栗兩先生四端七情人道理氣說後辨〉을 지어 이황 ( 李滉 )·이이(李珥)의 학설을 논변한 바 있다.

이 글에서 사단칠정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기 위하여 본연명물(本然命物)·승기유행(乘氣流行)·혼융합일(渾融合一)·분개각주(分開各主) 등 4종의 설을 세웠다. 임영 ( 林泳 )과 학문적으로 깊이 교유하였다. 저서로는 한문소설인 ≪창선감의록 彰善感義錄≫과 문집 ≪졸수재집≫이 있다.

 

조명택(趙明澤)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다.

 

조명정(趙明鼎)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했다.

 

조경호(趙慶鎬)

1839(헌종 5)∼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임천 ( 林川 ). 자는 회경(會慶). 호는 구당(鷗堂). 기진(基晉)의 아들이며, 흥선대원군 ( 興宣大院君 )의 사위이다.

1865년(고종 2) 직장으로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규장각대교가 되었다. 1866년 승정원주서가 되었으며, 1869년 부호군으로 홍문관부제학에 임명되고, 이듬해에는 성균관대사성·이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871년 규장각직제학을 거쳐 다음해 제릉·후릉친제시(齊陵厚陵親祭時)에 예방승지로 참여, 가자(加資)되었다. 1874년 이조참판을 지내고 1880년 도총부도총관에 특별히 발탁되었다가 이어 형조판서를 지냈다.

다음해에는 의정부우참찬을 거쳐 1882년 한성부판윤·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임오군란으로 민비 ( 閔妃 )의 장례를 지낼 때 종척집사(宗戚執事)에 임명되었으며, 곧이어 광주유수(廣州留守)로 외직에 나갔다. 광주유수 재직시 흉년이 들어 민정(民情)이 불안하자 환곡을 정퇴(停退)하는 등 진휼(賑恤)에 힘썼다.

1883년 다시 한성부판윤에 기용되었다가 1889년 예조판서에 취임하였다. 1895년 판의금부사에 특별히 발탁되었고, 1897년 중추원1등의관에 임명되었으며, 칙임관 2등이 주어졌다.

1898년 대원군의 부인 여흥대부인(驪興大夫人)의 광중명정 (壙中銘旌) 서사관(書寫官)과 대원군의 명정 서사관으로 활약하였으며, 1903년에는 판돈녕원사(判敦寧院事)로 칙임관 2등이 주어졌고, 1905년에 홍문관학사를 역임하였다.

그 뒤 1907년 규장각학사 겸 시강원일강관(侍講院日講官)으로 활동하였으나, 만년에는 정계와 관계를 단절하고 은거하였다. 1910년 국권강탈 이후 일본정부에 의하여 남작이 주어졌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글씨에 뛰어났다.

 

 

출처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18

正(정)

25

植(식)

32

埈(준)

19

明(명)

26

容(용)

33

錫(석)

20

德(덕)

27

圭(규),英(영)

34

潤(윤)

21

學(학)

28

鎭(진)

35

桓(환)

22

在(재),基(기)

29

澤(택)

36

熙(희)

23

鎬(호)

30

秀(수)

37

培(배)

24

漢(한)

31

燦(찬)

38

鐘(종)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임천 조씨(林川趙氏)는 남한(南韓)에 총 2,511가구, 10,44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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