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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조씨(趙)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趙(평양조씨)

 

 

본관(本貫): 평양(平壤)

시조(始祖): 조춘(趙椿)

유래(由來):

 

평양 조씨(平壤趙氏)의 시조 조춘(趙椿)은 고려조에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추밀원부사(樞密院府使)에 이르렀고 중국으로 건너가 남송(南宋)을 도와 금나라를 토평한 공으로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

그의 현손 인규(仁規)는 고려조에 제교(諸校)가 되고 이어서 장군(將軍)에 오른 뒤 성절사로 원나라에 30여 차례나 사신(使臣)으로 왕래하였다.

그의 둘째 딸이 충선왕비가 되자 국구(國舅)로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금자광록대부(金紫光綠大夫)에 올라 수태위판중서문하이병부사(守太尉判中 書門下吏兵部事)·태자태사(太子太師)·상장군(上將軍)에 오르고 평양부원군(平壤部院君)에 봉해져서 충렬왕의 명으로 선대의 본관인 상원(詳原)을 평양(平壤)으로 이적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조서(趙瑞)

∼1313(충선왕 5).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평양(平壤). 역인(譯人)으로 재상이 된 인규(仁規)의 아들이다. 충렬왕초에 과거에 급제하여 직보문서(直寶文署)에 임용되었다.

그 뒤, 1297년(충렬왕 23) 우승지에 이르고, 이듬해 충선왕이 잠시 즉위한 동안 광정승지 (光政承旨)·전객경(典客卿)이 되었으나, 같은 해 아버지 인규가 조비(趙妃 : 충선왕비) 무옥사건에 연루되어 원나라에 압송되었을 때 동생들과 함께 동행하여 8년간을 수종(隨從)하였다.

인규가 방환(放還)되자 귀국하여 1306년 좌승지에 복직되고, 이듬해 밀직부사가 되어 성절사 ( 聖節使 )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1308년 동지밀직(同知密直)으로 천추사 ( 千秋使 )가 되어 원나라에 파견되었는데, 이 때 장녀를 원나라의 총상(寵相)이며 뒤에 안길왕(安吉王)에 봉해진 야아길니(也兒吉尼)와 혼인시켰다.

이듬해 귀국하면서 원나라로부터 회원대장군 고려국부원수(懷遠大將軍高麗國副元帥)의 직을 받았다. 귀국한 뒤 대사헌검교찬성사(大司憲檢校贊成事)에 제수되고 평양군(平壤君)에 봉해졌으며,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거쳐 삼사사(三司事)에 올랐다. 시호는 장민(蔣敏)이다.

 

조연(趙璉), 조연수(趙延壽)

인규의 둘째 아들 연(璉)과 셋째 아들 연수(延壽)가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조준(趙浚)

1346(충목왕 2) ∼ 1405(태종 5). 여말선초 때 문신.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명중 (明仲), 호는 우재( 兵 齋) 또는 송당(松堂). 문하시중 인규(仁規)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판도판서 덕유(德裕)이다. 아들 대림(大臨)이 태종의 둘째딸 경정공주(慶貞公主)와 혼인, 태종과는 사돈이 된다.

원래 평양 조씨는 이름없는 집안이었으나, 인규의 대에 이르러 몽고어를 잘하여 역관 ( 譯官 )으로서 출세, 충선왕의 국구(國舅)가 되면서 귀족으로 발돋움하였다. 그는 6형제 중의 5남으로 태어났는데, 형제가 아무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여 어머니가 항상 개탄했으므로 어려서부터 힘써 공부하였다.

1371년(공민왕 20) 책을 끼고 수덕궁(壽德宮) 앞을 지나가자, 왕이 보고 기특히 여겨 마배행수(馬陪行首)에 보하였다. 1374년(우왕 즉위년) 문과에 급제하고, 1376년 좌우위호군(左右衛護軍)으로서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를 겸하고, 강릉도안렴사(江陵道按廉使)로 뽑혔는데, 정치를 잘하여 이민(吏民)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이어 전법판서(典法判書)를 거쳐, 1382년 병마도통사 최영 ( 崔瑩 )의 천거로 경상도에 내려가 왜구 토벌에 소극적이던 도순문사를 징벌하고 병마사를 참하여 기강을 바로잡았다. 1383년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지낸 뒤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가 되었다.

도검찰사(都檢察使)가 된 뒤에는 강원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토평하여 선위좌명공신(宣威佐命功臣)에 올랐다. 그러나 권간(權奸)의 발호에 실망하여 우왕 말년까지 4년 동안 은둔

생활을 하면서 경사(經史)를 공부하고, 윤소종 ( 尹紹宗 ) · 허금 ( 許錦 ) · 조인옥 ( 趙仁沃 ) · 유원정 ( 柳爰廷 ) · 정지 ( 鄭地 ) · 백군녕(白君寧) 등과 교우를 맺으면서 우왕의 폐위와 왕씨 부흥을 꾀하였다.

그가 이성계 ( 李成桂 )와 인연을 맺은 것은 이 무렵이다. 이성계는 1388년 위화도에서 회군한 뒤 중망(重望)이 있는 조준을 불러 일을 논의하고는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知密直司事兼大司憲)에 발탁, 크고 작은 일을 일일이 자문하였다. 이에 그는 크게 감격하여, 아는 것을 모두 이성계에게 이야기하는 등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 해 이성계 · 정도전 ( 鄭道傳 ) 등과 전제 개혁을 협의, 그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여 찬의를 얻고, 같은 해 7월 처음으로 전제 개혁의 필요성을 상소하였다.

또 다음해 8월과 12월에 잇달아 전제개혁소를 올려 이색 ( 李穡 ) · 이림 ( 李琳 ) · 우현보 ( 禹玄寶 ) · 변안열 ( 邊安烈 ) · 권근 ( 權近 ) · 유백유 ( 柳伯濡 ) 등 전제 개혁 반대파와 대립하였다. 그는 관제 · 신분 · 국방 등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을 주장하고, 지문하부사 겸 대사헌(知門下府事兼大司憲)으로 추충여절좌명공신(推忠勵節佐命功臣)이 되었다.

이어 조민수 ( 曺敏修 ) · 이인임 ( 李仁任 ) 등 권신을 탄핵하고 창왕을 폐위,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참여하여 이성계 · 정도전 등과 더불어 중흥공신에 서훈되었다. 1389년(공양왕 1) 전제개혁을 단행하고, 평리 겸 판상서시사(評理兼判尙瑞寺事)에 올라 전선(銓選)을 주관했고, 다음해에는 찬성사로 승진하여 1391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2년 정몽주 일파의 탄핵을 받아 정도전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정몽주가 죽자 풀려나와 찬성사 ·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이 해 7월에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1등으로 평양백(平壤伯)에 피봉되고 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의 자리에 올랐다.

조선 개국 후 정치적 실권이 점차 정도전에게 집중되자, 그와 정치적 의견을 달리하게 되었다. 세자책봉에 대해 정도전은 방석(芳碩)을 지지했으나, 조준은 이를 반대하여 개국에 공이 많은 방원(芳遠)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문하좌시중 · 오도도통사(五道都統使)가 되면서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로서 병권을 장악하고, 요동공벌을 계획하던 정도전과 대립하여 공요운동(攻遼運動)을 반대하였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자연히 이방원과 가까워져서 그와 친교가 두터웠고, 평소 방원에게 ≪ 대학연의 大學衍義 ≫ 를 주고 읽기를 권장하였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戊寅靖社, 혹은 鄭道傳亂) 때 백관을 이끌고 적장(嫡長)을 후사로 정할 것을 건의한 후, 정종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도와 정사공신 ( 定社功臣 ) 1등에 피봉되었다.

1400년(정종 2)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있으면서 민무구 ( 閔無咎 ) · 민무질 ( 閔無疾 )에게 무고되어 한때 투옥되기도 했으나, 이방원에 의해 석방되어, 11월 이방원을 왕으로 옹립하고 좌정승 · 영의정부사에 승진, 평양부원군에 진봉되었다.

그는 사학 ( 史學 )을 잘하고 경학(經學)과 시문에도 능했으며, 문집으로 ≪ 송당집 ≫ 을 남겼다. 한편, 검상조례사 ( 檢詳條例司 )에게 국조의 헌장조례(憲章條例)를 모아 ≪ 경제육전 經濟六典 ≫ 을 간행하게 했으니, 이는 뒤에 ≪ 속육전 ≫ · ≪ 육전등록 ≫ 등으로 보완되어 ≪ 경국대전 ≫ 편찬의 토대가 되었다.

그의 전제개혁안은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에 목표를 둔 것이었다. 즉, 제1차 상소에서는 녹과전 ( 祿科田 ) · 구분전 ( 口分田 ) · 군전 ( 軍田 ) · 투화전 ( 投化田 ) · 외 역전 (外役田) · 위전 ( 位田 ) · 백정대전(白丁代田) · 사 사전 (寺社田) · 역전( 驛田 ) · 외록전(外祿田) · 공해전(公 力 田) 등의 설치를 통해 관리와 군인 그리고 국역담당자의 생계를 안정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제2 · 3차의 전제개혁상소에서는 세신거실(世臣居室)이 경기 이외의 외방에까지 사전( 私田 )을 두려는 움직임을 저지하고, 기내사전(畿內私田)의 원칙을 고수, 전제개혁의 지역적 안배를 설정하였다.

1391년 5월에 정해진 과전법은 그의 개혁안이 토대가 된 것이나, 구분전 · 투화전 · 백정대전에 대한 분급규정(分給規定)이 빠져 있고, 그 대신 중흥공신전의 세습에 대한 규정이 첨가되었다.

그가 여말에 올린 국정개혁안은 ≪ 주례 周禮 ≫ 에 바탕을 둔 것으로 광범위한 사회개혁안을 포괄하고 있다. 즉, 총재( 愼 宰, 재상)의 권한을 강화하고, 대간과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며, 양천신분제(良賤身分制)를 확립하여 국역체제를 강화하고, 경연과 서연제도를 실시하며, 학교(향교)제도를 강화하여 사장 ( 詞章 )을 폐하고 사서오경을 배우도록 할 것, ≪ 주자가례 朱子家禮 ≫ 를 시행할 것, 의창 ( 義倉 )과 상평창 ( 常平倉 ) · 사창 ( 社倉 )의 법을 시행할 것, 향리의 출사(出仕)를 억제할 것, 환자(宦者)의 정치 참여를 막을 것, 과거시험에 복시제(覆試制)를 시행할 것 등을 제시하였다.

그의 관제 및 사회개혁안은 정도전의 그것과 상통하는 점이 많으며, 정도전의 ≪ 조선경국전 朝鮮經國典 ≫ 및 ≪ 경제문감 經濟文鑑 ≫ 편찬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조견

1351(충정왕 3) ∼ 1425(세종 7).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평양(平壤). 초명은 윤(胤). 자는 종견(從犬), 호는 송산 ( 松山 ). 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 덕유(德裕)이다. 어머니는 오의(吳懿)의 딸이다. 영의정부사 준(浚)의 동생이다.

유년에 출가하여 여러 절의 주지를 역임하다가 30세가 넘어 환속하였다. 승직(僧職) 경력으로 인하여 좌윤 ( 左尹 )에 서용되었으며, 고려 말에는 안렴사 ( 按廉使 )를 지냈다. 1392년(태조 1) 상장군으로 이성계 ( 李成桂 ) 추대에 참여하고 개국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1394년 경상도도절제사, 1397년 지중추원사, 1400년(정종 2) 삼사우복야(三司右僕射)를 거쳐 1402년(태종 2) 도총제(都摠制) 재직 중에 사은사의 명을 받았으나, 사행이 위험하다는 소문을 듣고 병을 칭하여 이를 사퇴하였다. 이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직첩을 몰수당한 뒤 축산도(丑山島)에 유배되었다가 곧 사면되었다.

1403년 좌군도총제가 되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졌으며, 이 해 진하사 ( 進賀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7년 충청도도절제사 겸 수군도절제사를 거쳐, 이듬해 고의로 딸의 입명(入明)를 저지한 일로 개령에 부처되었다. 곧 사면되어 청성군에 봉해졌다.

1410년 봉안사(奉安使)가 되어 태조 진영 ( 眞影 )을 완산부(完山府)에 봉안하였다. 1419년(세종 1)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에 보임되고, 1421년 3월 71세로 퇴관해야 했지만, 궤장( 廓 杖)을 받고 계속 벼슬길에 있다가 같은 해 12월 평성부원군에 진봉하였다.

그런데 그의 생애와 관련하여 “ 조선이 개국되고 형 준으로 인하여 개국공신에 책록되었다. ” 는 설과 “ 준의 간곡한 출사 권유가 있었지만 고려에 절의를 지켜 은거했으며, 자손에게도 고려에의 절의를 당부하였다. ” 고 한 이설이 있기도 하나 후자의 경우는 신빙하기 어렵다. 양주의 정절사(旌節祠)와 송산사(松山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평간(平簡)이다.

 

조박(趙璞)

태종(太宗)의 동서로서 평원군(平原君)에 봉해진 박(璞)은 정사공신(定社功臣)과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녹훈(錄勳)되고, 대제학(大提學), 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했다.

 

조성(趙晟), 조욱(趙昱)

명종때의 학자 형제인 성(晟)과 욱(昱)은 호(瑚)의 아들로 지평(砥平)의 운계서원에 함께 제향되었다.

 

조대임(趙大臨)

태종의 사위였던 대임(大臨)이 뛰어났다.

 

조수(趙須)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역임하였다.

 

조심태(趙心泰)

정조(正祖)때 무신으로 서예에 뛰어났던 심태(心泰)는 명문 평양 조씨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趙浚(조준) 선생의 일화.

 

미리 예견하고 지은 기중 많은 行宮(행궁)

 

함흥에 있던 태조는 한양으로 돌아 간다.

태종은 부친이 돌아오기 전 양주에 별장을 짓도록 하고 그곳에 나가 친히 태조를 마중한다. 그런데 갑자기 태조가 칼을 뽑아 태종을 친다. 태종은 이리 저리 피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양주행궁에는 기둥이 수십 개가 있어 그사이로 피할 수 있었다. 趙浚(조준)이 양주행궁을 지을 때 이런 사태를 미리 예견하고 아름드리 기둥을 수 십개 세웠던 것이다. 태조는 흥분이 가라앉자 천운이로구나!” 하고 칼을 버렸다.

 

 

趙浚(조준) 선생의 일화.

 

河趙臺(하조대)이 유래.

李成桂(이성계)는 아들 방원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새 왕조 태조에 등극한다. 趙浚(조준)은 이성계의 뒤에서 새 왕조를 만드는데 각별한 공헌을 한사람이다.

그래서 조선조 개국공신 대열에 끼게 된다.

지금도 강원도에 하조대(河趙臺)라는 지명이 있는데 하조대는 河崙(하륜)趙浚(조준)을 줄여 만든 정자를 일컫는 말이다.

 

 

趙浚(조준) 선생의 일화.

조준이 어렸을 때였다. 어느 날 과거에 급제한사람이 벽제 소리를 지르며 조준의 앞을 지나쳤다. 이때 어머니 오씨가 그 모습을 보고 깊이탄식 했다.

나는 자식이 아무리 많아도 과거에 급제한 자가 없으니 아들을 무엇에 쓸 것인가!”

이 말을 듣고 조준이 꿇어앉아 울면서 굳거 맹세했다.

 

어머님, 소지가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겠습니다.” 그 후로 조준은 공부에 정진해 공민왕 23년에 급제했다.

조준이 벼슬길에 나가 강원감사로 도임하면서 어머니의 소원을 이룩하여 드리게 되었다.

 

 

 

趙浚(조준) 선생의 일화.

 

이성계가 조준의 소식을 듣고 그를 초청했다. 그는 특히 토지 개혁에 남다른 의지를 보였다. 이성계는 그가 매우 마음에 들어 사유 토지를 개혁하는데 힘을 보태었다. 이 토지 개혁은 친원파가 힘을 잃고 친명파, 즉 신진 세력이 득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성계와 조준의 인연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이성계가 조선의 왕으로 즉위 하던 날 , 조준을 은밀히 침실로 불러들였다.

그대는 한나라 문제가 왕으로서 황제가 되어 황궁으로 들어오, 송칭을 위장군으로 삼아 · 북군을 진무한뜻을 아는가?’ 이성계가 물었다

알고 있사옵니다. 전하.”

 

송창은 한나라 문제기 왕으로 있을 때 매우 가까웠던 사람으로, 한나라 대신들이 여씨의 난을 평정한 문제를 추대했을 때, 문제는 그날 안으로 즉시 송창을 위장군으로 삼고 병권을 거두었다.

 

이성계는 역성 혁명으로 조선을 개국했으므로 한나라 때의 일을 상기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조준을 송창에 비유하여 고사를 들먹였다.

 

그대에게 5도의 병마를 맡겨 총찰케 하노라.”

이성계는 조준에게 도총시의 인과 화각 동궁(붉은 활)을 주었다.

 

그의 조준에 대한 신임이 매우 높았다.

 

 

 

趙浚(조준) 선생의 일화.

 

조준의 성품은 원만하고 몹시 부드러웠다.

한 변은 음식이 청결하지 못하다 하여 예빈시(손님을 대접하는 일을 맡은 관청) 판사를 매질하려고 했다.

 

이때 관리가 조준에게 가볍게 항의했다.

저희 죽어 마땅하오나 어찌 재상으로서 한낱 음식 때문에 벼슬아치를 매질하려 하시옵니까?’

내 품격이 떨어진다 그 말이더냐?’

, 그러하옵니다.”

허허, 말이 맞도다.”

 

조준은 매질하라는 명령을 거두었다.

 

 

 

출처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35

聖(성)

40

珣(순)

45

垣(원)

36

鐸(탁)

41

鐘(종)

46

鎰(일)

37

昶(창)

42

源(원)

47

海(해)

38

稙(직)

43

秉(병)

48

植(식)

39

愚(우)

44

憲(헌)

49

悳(덕)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평양조씨는 남한에 총 8,451가구, 35,02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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