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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양조씨(趙)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趙(풍양조씨)

 

 

본관(本貫): 풍양(豊壤)

시조(始祖): 조맹(趙孟)

유래(由來):

 

풍양조씨(豊壤趙氏)의 시조(始祖)는 한양부(漢陽府) 풍양현(豊陽懸) 사람인 조맹(趙孟)이다.

그는 본래 초명이 바위(巖)였는데 만년(晩年)에 고려 태조(太祖) 왕 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통합삼한벽상개국공신(統合三韓壁上開國功臣)에 책록되고 상주국삼광문하시중평장사(上柱國三匡門下侍中平章事)에 이르렀으며 맹(孟)이란 이름을 하사(下賜)받았다.

그 후 후손(後孫)들이 시조(始祖)의 세거지명(世居地名)인 풍양(豊壤)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界)를 이어왔으나 시조 이하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일세조를 각기 다르게 하는 두 계통(系統)으로 계대(繼代)하고 있다.

6세까지 실전(失傳)한 전직공파(殿直公派)는 고려 때 전직(殿直)을 지낸 조지린(趙之藺)을 일세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으며, 몇 대까지 실전했는지 상고할 수 없는 평장사파는 조신혁(趙臣赫)을 일세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두 파(派)는 동원(同源)이면서도 계대(系代)를 알지 못해 대동보(大同譜)에서도 구분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전직공파(殿直公派)는 다시 호군공파(護軍公派 : 사충)·회양공파(淮陽公派 : 신)·금주공파(錦州公派 : 임) 등 3파(三派)로 나누어지며, 평장공파(平章公派)는 남원공파(南原公派)로 하여 크게 4파(四派)로 분파(分派)되었다.

회양공파(淮陽公派)의 후손에서 다시 한평군파(漢平君派)와 청교파(靑橋派)로 크게 갈리는데 이들 두 파가 조선에서 크게 명성을 떨쳤고, 후손도 가장 번창해서 현존(現存)하는 풍양조씨의 과반수를 차지한다.

 

가문의 중요 인물

 

조운흘

1332(충숙왕 복위 1)∼1404(태종 4).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풍양 ( 豊壤 ). 호는 석간(石磵) 또는 서하옹(棲霞翁). 평장사 맹(孟)의 31대손이다. 이인복 ( 李仁復 )의 문인이다. 조운흘은 1357년(공민왕 6) 문과에 급제하여 안동서기(安東書記)가 되었다.

합문사인(閤門舍人 ; 고려 시대에, 조회의 의례를 맡아보던 관아의 관리)을 거쳐서 1361년 형부원외랑에 올랐다. 홍건적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남쪽으로 피난하던 왕을 호종(보호하며 따라감.)하여 1363년에 2등공신이 되었다. 이듬해에 국자감직강이 되었다. 이어서 전라·서해(西海)·양광(楊廣)의 삼도안렴사(三道按廉使)를 지냈다.

조운흘은 1374년에 전법총랑(典法摠郎)으로서 사직하고 상주 노음산(露陰山) 기슭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석간서하옹(石磵棲霞翁)이라고 하였다. 외출할 때는 반드시 소를 타고 다녔다. 이때 〈기우도찬 騎牛圖贊〉·〈석간가 石磵歌〉 등의 시를 지었다. 1377년(우왕 3)에 다시 등용되어서 좌간의대부 ( 左諫議大夫 )가 되었다.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 있다가 1380년에 사임하고, 광주 ( 廣州 ) 고원강촌(古垣江村)으로 퇴거하였다. 그곳에서 판교원(板橋院)·사평원(沙平院)을 중수할 때에 스스로 원주(院主)라고 일컬으면서 떨어진 옷과 짚신으로 역부들과 함께 일하였다.

조운흘은 1388년에 다시 전리판서(典理判書)로 기용되었다. 밀직제학(密直提學)에서 서해도관찰사로 내려가서 왜구를 토벌하여 치적을 올렸다. 이듬해에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올랐다. 1390년(공양왕 2)에는 계림부윤(鷄林府尹)이 되었다. 그러다가 1392년 조선개국 후에 강릉부사로 제수되었다.

이듬해에 칭병으로 사직하고 광주로 내려갔다가 다시 검교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이 되었다. 그 뒤로 관직에서 떠나 여생을 보내다가 스스로 묘지를 짓고 73세에 별세하였다. 조운흘이 남긴 저서로 ≪석간집 石磵集≫이 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편서로는 ≪삼한시귀감 三韓詩龜鑑≫이 전한다. 이것은 최해 ( 崔瀣 )의 ≪동인지문 東人之文≫ 중에서 〈오칠 五七〉을 본떠 만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최해의 비점(批點)이 그대로 실려 있다. 그밖에 현전하는 조운흘의 작품으로는 5수의 칠언절구가 ≪동문선≫에 보인다.

〈제구월산소암 題九月山小庵〉·〈송춘일별인 送春日別人〉 등의 시편을 살펴보면, 현실참여와 은둔 사이에서 고민하며 이를 자연을 매개로 해결하고자 하는 흔적이 나타난다. 현실 비판의식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조운흘의 생애가 말해주듯이 고려 말의 전환기에 선 지식인의 형상이 잘 그려져 있는 작품들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는 저작이 거의 인멸되었기 때문에 고려 말 조선 초의 대표적인 문인으로서 그의 존재가 선명히 부각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조익정(趙益貞)

1436(세종 18) ∼ 1499(연산군 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 淵 壤). 자는 이원(而元). 회양부사(淮陽府使) 신(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조좌랑 안평(安平)이고, 아버지는 한산군(漢山君) 온지(溫之)이며, 어머니는 예빈시판사 오축(吳軸)의 딸이다.

1453년(단종 1) 진사시에 합격하고, 1465년(세조 11)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1466년 ≪ 동국통감 ≫ 의 편찬에 수찬낭관으로서 참여하였다. 1467년 예문관봉교 · 승정원주서를 지냈고, 1468년(예종 즉위년) 10월 남이 ( 南怡 )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 ( 翊戴功臣 ) 3등에 책록되었다.

1469년 사헌부지평 · 행세자시강원문학을 거쳐 춘추관수찬관으로 ≪ 세조실록 ≫ 편수에 참여하였고, 1470년(성종 1) 형조참의가 되었다. 1481년에 한성부좌윤으로 한평군(漢平君)에 봉하여지고, 이듬해 이조참판이 되었다. 1489년 호조참판으로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헌 ·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이어 다시 대사헌 · 예조참판 · 경상우도병마절도사 등을 지냈다. 1494년 12월 사은사에 배명(拜命)되었으나 성종의 죽음으로 중지하였다.

1495년(연산군 1) 한성부좌윤, 같은해 8월 공조참판, 1498년 오위도총부부총관을 겸임하고, 1499년 춘추관동지관사(春秋館同知館事)로 ≪ 성종실록 ≫ 의 편수에 참여하였다가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문장이 뛰어나 성종 대의 문예에 공헌하였다.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조현범(趙賢範)

∼1538(중종 33).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풍양 ( 豊壤 ). 아버지는 장사랑 지진(之鎭)이다. 1501년(연산군 7)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주부 및 판관과 도총부도사, 훈련원부정·정을 역임하고, 1506년(중종 1) 의주판관, 1512년 평안도우후(平安道虞候)를 지냈다.

1520년 부평부사를 거쳐, 1528년 온성부사로 재직하던 중 야인들에게 패한 죄로 파직당하였다. 1535년 복관되어 회령부사가 되고, 그 뒤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537년 성절사 ( 聖節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김안로 ( 金安老 )의 부탁으로 금·은·화피(樺皮) 등을 가지고 가서 밀무역을 하였다는 혐의로 파직당하였다.

 

조종경(趙宗敬)

1495(연산군 1)∼1535(중종 3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 ( 豊壤 ). 자는 자신(子愼), 호는 독암(獨庵). 온지(溫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익정(益貞)이고, 아버지는 팽(彭)이며, 어머니는 이사손(李嗣孫)의 딸이다.

1516년(중종 11) 사마시를 거쳐, 152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주서·부수찬·정언·수찬 등을 차례로 지냈다. 1524년 이조정랑에 천거되었으나 당대의 권신 김안로 ( 金安老 )의 반대로 좌절되었다가, 1526년 지평을 거쳐 비로소 취임하게 되었다.

그 뒤 장령·사간·전한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1531년 사섬시정(司贍寺正)으로 재직하던 중 심정 ( 沈貞 )의 당여(黨與)라는 김안로의 탄핵으로 파직되어 과천에 물러나 있게 되었다.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신원되고, 죽은 뒤 과천의 호계서원 ( 虎溪書院 )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독암유고 獨庵遺稿≫가 있다.

 

조안국(趙安國)

1501(연산군 7)∼1573(선조 6).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풍양 ( 豊壤 ). 자는 국경(國卿). 아버지는 수군절도사 현범(賢範)이며, 어머니는 파성군(坡城君) 윤찬(尹贊)의 딸이다.

1524년(중종 19) 무과에 급제, 이듬해 선전관이 되고, 여러 차례 시사대회(試射大會) 또는 격구대회(擊毬大會)에서 우승하는 등 무인으로 명성이 높았다. 1535년 문관직으로 발탁되어 동부승지를 지내고, 1548년(명종 3) 광주목사(光州牧使)·종성부사 등으로 외보되었다.

1551년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재직 중 사사(賜死)된 중종 때의 권신 김안로 ( 金安老 )에게 아부하였다는 탄핵으로 장단부사로 좌천되었으나, 1553년 관내의 도적을 일소한 공으로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전임되었다.

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전라병사 겸 방어사로 순변사 남치근(南致勤)과 함께 나주일대에 침구한 왜적들을 소탕하였다. 뒤에 제2차 작전에서 적에게 허(虛)를 찔려 작전에 실패하자, 이로 인하여 관직을 박탈당한 채 녹도 ( 鹿島 )에 장류되었으나 1557년 장단부사에 다시 서용되고, 1561년 함경남도병마절도사, 1567년(선조 즉위년) 경기도수군절도사를 거쳐 포도대장·오위장·부총관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절륜한 무예로 28세에 통정대부 ( 通政大夫 )에 올랐고, 종성부사가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 현범은 회령부사로 재직하여 육진 ( 六鎭 )을 부자가 지킨다는 명성이 한때 높았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조경(趙儆)

1541(중종 36) ∼ 1609(광해군 1).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풍양( 淵 壤). 자는 사척(士 洙 ). 아버지는 병마절도사 안국(安國)이며, 어머니는 생원 권세임(權世任)의 딸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 제주목사를 거쳐, 1591년 강계부사로 있을 때 그곳에 유배되어 온 정철 ( 鄭澈 )을 우대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방어사가 되어 황간 · 추풍 등지에서 싸웠으나 패배, 이어 김산 ( 金山 )에서 왜적을 물리치다 부상을 입었다. 이 해 겨울 수원부사로 적에게 포위된 독산성(禿山城)의 권율 ( 權慄 )을 응원, 이듬해 도원수 권율과 함께 행주산성에서 대첩을 거둬 가선대부 ( 嘉善大夫 )에 가자되었다.

행주산성에서의 승리로 한양을 탈환할 수 있었고, 도성서도포도대장(都城西都捕盜大將)으로 임명되었다. 1593년 ≪ 기효신서 紀效新書 ≫ 의 신진법(新陣法)을 명나라 장수 낙상지(駱尙志)의 소청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새로 편제된 훈련도감당상을 겸하고, 이듬해 훈련대장이 되었다.

그 뒤 동지중추부사 · 함경북도병사 · 훈련원도정 · 한성부판윤을 거쳐 1599년 충청병사 · 회령부사를 지냈으며, 1604년 선무공신 ( 宣武功臣 ) 3등에 책봉되고 풍양군(豊壤君)에 봉하여졌다.

그는 무신으로 사서(史書)를 두루 통하여 고사(古事)에 밝았고 늦게 급제하였으나 명망이 높아 사람들이 모두 대장의 재목으로 기대하였다. 시호는 장의(莊毅)이다.

 

조문명(趙文命)

1680(숙종 6) ∼ 1732(영조 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 淵 壤). 자는 숙장(叔章), 호는 학암(鶴巖). 형(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상정(相鼎)이고, 아버지는 도사 ( 都事 ) 인수(仁壽)이다. 어머니는 김만균(金萬均)의 딸이다.

1705년(숙종 31) 생원시에 합격하고 171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이 되었다. 1721년(경종 1) 수찬을 거쳐 부교리가 되어 붕당의 폐해를 통열히 논했고, 문학 ( 文學 )으로 옮겨 마침 왕세제로 책봉된 연잉군(延 艀 君 : 뒤의 영조)의 보호에 힘쓰면서 김일경 ( 金一鏡 ) 중심의 소론 과격파(峻少)에 대립하였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지평으로 발탁되어 겸동학교수(兼東學敎授) · 세자시강원겸보덕(世子侍講院兼輔德)을 지냈다. 다음 해 서장관 ( 書狀官 )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동부승지에 승진되어 파붕당(破朋黨)의 설을 제창하다가 민진원 ( 閔鎭遠 )의 배척을 받았다.

이어 1727년(영조 3)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재진출하면서 이조참의에 특별히 임명되었다. 그 해 딸이 왕세자(영조의 제1자, 사후에 孝章世子라 불림)의 빈(嬪)이 되자 호조참판과 도승지에 올라 수어사 · 어영대장을 겸했으며, 이듬해 이인좌 ( 李麟佐 )의 난 진압에 공이 있다 하여 수충갈성결기효력분무공신(輸忠竭誠決機效力奮武功臣) 2등에 녹훈, 풍릉군( 淵 陵君)에 책봉되고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에 이조참판 송인명 ( 宋寅明 )과 함께 탕평론을 재천명했고, 이후 대제학^이조판서를 거쳐 1730년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이 후 ≪ 경종실록 ≫ 총재관(總裁官)으로서 이를 완성, 좌의정에까지 이르렀다. 본래 소론가문 출신이었지만 당쟁의 폐를 걱정하여 붕당의 타파와 공평무사한 탕평의 실현을 정치 목표로 하였다. 또, 억강부약(抑强扶弱)과 시비절충(是非折衷) · 쌍거호대(雙擧互對)를 그 실천 방안으로 제시하였다.

온건론자 중심의 노 · 소 연립정권을 구축하는 데 주력, 노 · 소론의 준론자(峻論者)들로부터 세상사람을 속이고 우롱한다는 배척까지 받았지만, 영조 초의 소론계의 반란 〔 李麟佐의 亂 〕 과 계속되는 역모 적발로 불안했던 왕권의 안정과 확립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또, 노비종부법 ( 奴婢從父法 )의 폐지, 조운수로(漕運水路)의 편의를 위한 안흥목 〔 安興項 〕 의 개척, 주전(鑄錢)의 필요성 역설 등과 같이 민생 문제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소론이면서도 외가(光山金氏 萬均)와 처가(安東金氏 昌業)가 노론 집안이어서 노론계 명사와 널리 교유하였다. 특히 송인명^ 김재로 ( 金在魯 ) 등과 매우 친밀하였다. 후일 영조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글씨에 능하여 청주 삼충사사적비(三忠祠事蹟碑) · 북백곽재우묘표(北伯郭再祐墓表) 등이 전하고, ≪ 학암집 ≫ 4책이 남아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조상우(趙相愚)

1640(인조 18) ∼ 1718(숙종 4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 淵 壤). 자는 자직(子直), 호는 동강(東岡). 기(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희보(希輔)이고, 아버지는 예조판서 형(珩)이다. 어머니는 목장흠(睦長欽)의 딸이다. 이경석 ( 李景奭 )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657년(효종 8) 사마시에 합격한 뒤 송준길 ( 宋浚吉 )의 문인이 되었다.

1672년(현종 13) 익위사세마에 임명되었으며, 숙종이 즉위한 뒤 사축서별제(司畜署別提)가 되었다가 연천현감으로 나갔다. 그러나 1675년(숙종 1) 송준길이 추삭될 때 동문 홍득우 ( 洪得禹 ) 등과 반대하는 소를 올려 남평 ( 南平 )에 유배당하였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호조좌랑을 거쳐 태인현감으로 나갔다.

1682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1684년 지평이 되었으나, 집의 이굉 ( 李宏 )을 논죄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체직되었다. 그 뒤 훈국도감종사관 · 서학교수 · 병조정랑이 되고, 호남에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홍문관부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이 되어서는 궁방에 대한 절수(折受)를 취소하고 호서의 첩가미(帖價米)를 탕감할 것을 건의하여 받아들여졌다.

의정부사인을 거쳐 부응교가 되어서는 외척을 견제하다 처벌받은 홍치중 ( 洪致中 )을 두호하고 경연을 자주 열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평안감사 윤계(尹 拒 )와 황해감사 임규 ( 任奎 )의 잘못을 공격했으나, 태인현감 때의 잘못을 지적당하여 양주 쌍수역(雙樹驛)에 유배되었다가 대신들의 두둔으로 풀려났다.

1689년 이후 사도시정 · 홍주목사 · 사성 · 종부시정 · 좌통례 · 서산군수 등을 역임하고, 1694년 강계부사가 되었다. 그 해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한 뒤 남구만 ( 南九萬 )의 천거를 받아 특명으로 내직에 들어와 예조참의 · 대사간 · 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당시 유배자들을 석방하는 작업에 참여했고, 옥사의 심리를 빨리하고 군포로 인한 침학 행위를 없앨 것을 주장하였다.

이어 대사성 · 부제학 겸 비변사부제조를 거쳐 개성유수에 발탁되었으나 가마에 대한 금령을 어겨 추삭되었다가, 대사간이 되어 양전을 바로 하고 군역을 균등히 할 것을 건의하였다.

도승지 ·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를 거쳐 부제학이 되어서는 궁궐 생활의 절검을 강조하고 의관을 보내 민간의 환자를 치료할 것 등을 건의하였다. 그리고 단종의 부묘에 왕이 친림하는 것에 반대하다가 파직당했으나 홍문관의 건의로 용서받았다.

경기감사에 임명되어 민폐와 변통책을 올렸으며, 1700년 이조참판이 되어서는 서북 지방의 인재등용책을 건의하였다. 형조와 예조의 참판을 거쳐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후궁 장씨(張氏)를 사사할 때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

우참찬 · 대사헌 · 지중추부사 겸 도총관이 되어 중국에 사신으로 가던 중 예조판서 · 좌부빈객이 되었고, 좌참찬으로 옮겼다.

한때 오도일 ( 吳道一 )을 두둔한다는 이유로 영의정 신완 ( 申琓 ) 등으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우빈객 · 한성부판윤 · 비변사당상을 거쳐 1706년 판의금부사 ·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후 1708년까지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1709년 기로소에 들어갔다. 이듬해 내의원제조를 맡고 있을 때 최석정 ( 崔錫鼎 ) · 서종태(徐宗泰)의 분란에 휩쓸려 파직당하였다.

이어 유득일 ( 兪得一 ) · 정호 ( 鄭澔 )의 공격을 받아 삭탈관직당했다가 풀려나 판돈녕부사가 되었다. 1711년 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어 호포법이 논의될 때 명분을 유지함으로써 사회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뜻에서 사대부에 대한 군포 징수를 반대하였다.

정승으로 있을 때 당론의 폐단을 없애려고 노력했으며, 1717년 세자 대리청정의 명령이 내렸을 때에는 판중추부사로 있으면서 반대하는 소를 올리는 등 남구만 · 최석정 등과 함께 온건한 소론으로서 정치 활동을 하였다. 또한, 오랜 기간 관직에 있으면서 부세제도 · 형사제도 · 예론을 비롯한 국정 전반에 대한 건의를 많이 하였다.

글씨를 잘 써서 장렬왕후 ( 莊烈王后 )의 옥책문을 쓰는 데 선발되었고, 충현서원 ( 忠賢書院 )의 사적비 등을 남겼다. 남평의 용강사(龍岡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조현명(趙顯命)

1690(숙종 16) ∼ 1752(영조 2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 ( 豊壤 ). 자는 치회(稚晦), 호는 귀록(歸鹿) · 녹옹(鹿翁). 형(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상정(相鼎)이고, 아버지는 도사 ( 都事 ) 인수(仁壽)이다. 어머니는 김만균(金萬均)의 딸이다.

1713년 (숙종 39) 진사가 되고 171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1721년(경종 1) 연잉군(延 艀 君 : 뒤의 영조)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겸설서 ( 兼說書 )로서 세제보호론을 주창, 소론의 핍박으로 곤경에 처해 있던 왕세제 보호에 힘썼다.

영조 즉위 후 용강현령, 지평 · 교리를 역임하고 1728년(영조 4) 이인좌 ( 李麟佐 )의 난이 발생하자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 오명항 ( 吳命恒 )의 종사관으로 종군하였다.

난이 진압된 뒤 그 공으로 분무공신 ( 奮武功臣 ) 3등에 녹훈, 풍원군(豊原君)에 책봉되었다. 이후 대사헌 · 도승지를 거쳐 1730년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영남의 남인을 무마하고 기민(饑民)의 구제에 진력하였다.

이어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뒤 1734년 공조참판이 되면서부터 어영대장 · 부제학, 이조 · 병조 · 호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740년 경신처분 직후 왕의 특별 배려로 우의정에 발탁되고 뒤이어 좌의정에 승진하였다. 이 때 문란한 양역행정의 체계화를 위한 기초 작업으로서 군액(軍額) 및 군역부담자 실제수의 파악에 착수, 이를 1748년 ≪ 양역실총 良役實總 ≫ 으로 간행하게 하였다.

1750년 영의정에 올라 균역법의 제정을 총괄하고 감필에 따른 대책 마련에 부심했으나, 대사간 민백상(閔百祥)의 탄핵을 받아 영돈녕부사로 물러났다. 조문명 · 송인명 ( 宋寅明 )과 함께 영조조 전반기의 완론세력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노소탕평을 주도했던 정치가라 할 수 있다.

아울러 민폐의 근본이 양역에 있다 하여 군문 · 군액의 감축, 양역재정의 통일, 어염세의 국고 환수, 결포제 실시 등을 그 개선책으로 제시한 경세가이기도 하였다.

당색을 초월하여 진신(縉紳) 사이에 교유가 넓었는데 김재로 ( 金在魯 ) · 송인영 · 박문수 ( 朴文秀 ) 등과 특히 친밀하였다. 저서로 ≪ 귀록집 ≫ 이 있고, ≪ 해동가요 ≫ 에 시조 1수가 전하고 있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조재호(趙載浩)

1702(숙종 28)∼1762(영조 3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 ( 豊壤 ). 자는 경대(景大), 호는 손재(損齋). 아버지는 좌의정 풍릉부원군(豊陵府院君) 문명(文命)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로 교관 창업(昌業)의 딸이다. 영의정 현명(顯命)의 조카이며, 효순왕후 ( 孝純王后 )의 오빠이다.

1739년(영조 15) 우의정 송인명 ( 宋寅明 )의 천거로 세자시강원에 등용되었다. 그 뒤 홍산현감(鴻山縣監)으로 있으면서 춘당대시 ( 春塘臺試 )에 병과로 급제, 승정원승지로 특진되었고, 이어 경상도관찰사·이조판서 등을 거쳐 1752년 우의정이 되어 ≪천의소감 闡義昭鑑≫의 편찬을 주장(主掌)하기도 하였다.

1759년 돈녕부영사로 있으면서 계비(繼妃)의 책립을 반대한 죄로 임천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나 춘천에 은거하였다. 1762년 장헌세자(莊獻世子)가 화를 입게 되자 그를 구하려고 서울로 올라왔으나, 오히려 역모로 몰려 종성으로 유배, 사사되었다가 1775년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었다. 저서로 ≪손재집≫ 15권이 있다.

 

조원명(趙遠命),

1675(숙종 1) ∼ 1749(영조 2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 ( 豊壤 ). 자는 치경(致卿). 형(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상변(相 逗 )이고, 아버지는 직장 기수(祺壽)이다. 어머니는 종실(宗室) 인평대군 ( 麟坪大君 ) 요( 民 )의 딸이다.

1702년(숙종 28) 사마시를 거쳐 1710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설서 · 용강현령(龍岡縣令)을 거쳐 정언에 올라 그 해 일어난 과옥 ( 科獄 )의 재심(再審)을 강력하게 청하다 삭탈관직되었다. 그러나 곧 간관에 복직되었으며, 이어 홍문록(弘文錄 : 홍문관의 제학이나 교리를 선발하기 위한 제1차 인사 기록)에 선발되었으나 격식에 어긋났다 하여 삭제되었다.

1720년 경종 즉위 후, 지평 · 부수찬 · 헌납 · 교리 · 사인 · 부응교 · 집의 · 사간 등에 제수되었으나 거의 나가지 않았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한 뒤 부응교를 지내고 다음해 동부승지 · 이조참의가 되었으나 노론의 집권으로 파직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다시 집권하자 이조참의 · 부제학 · 승지 · 대사성을 역임하고, 1728년 개성유수 때 왕씨 능침(陵寢)의 수호를 명받았다.

이후 대흥산성 ( 大興山城 ) 수비의 소를 올려 시행하게 했다. 기근이 들자 녹봉을 기민 진구(賑救)에 내놓아 송덕비 ( 頌德碑 )가 세워졌다. 이어 공조참의가 되어서는 양역법(良役法)의 개정과 균역법 ( 均役法 )의 실시에 힘썼다. 그 뒤 대사헌 · 부제학 등을 두루 지낸 뒤 1733년 함경도관찰사로 전임되자 전삼(田蔘)의 폐해를 고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이어 승지 · 이조참판 · 예조참판을 지내고 평안도관찰사가 되어서는 이도확립(吏道確立)과 재정의 충실을 기하였다. 또 함흥의 10리나 되는 만세교 ( 萬歲橋 )의 보수를 위해 기본자산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1740년 이후 공조참판 · 부총관 · 동지경연사의 벼슬을 거쳐 병으로 사임하였다.

1744년 나이 70에 자헌대부에 가자되고 기로소 ( 耆老所 )에 들어갔다. 한성부판윤 · 동지성균관사 · 지중추부사 · 공조판서를 역임하고, 1749년 정헌대부로 의정부좌참찬을 지냈다. 평생 50년을 조정에 봉직했으나 사사로움이 없었다. 평양감사를 지냈으면서도 돌아오는 행장은 타고 나선 말 한 필 뿐이었다고 한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조정진(趙鼎鎭)

1732(영조 8)∼1792(정조 1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 ( 豊壤 ). 자는 사수(士受). 기수(祺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원명(遠命)이고, 아버지는 교리 재덕(載德)이며, 어머니는 송성명 ( 宋成明 )의 딸이다.

1753년(영조 29) 사마시에 합격하여 1761년 명릉참봉(明陵參奉)이 된 뒤, 호조정랑으로 재임중 1777년(정조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조정랑이 되었으며, ≪영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779년 홍문록 ( 弘文錄 )·도당록(都堂錄)에 올랐으며, 이듬해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의 서장관에 임명된 한광근 ( 韓光近 )이 중병에 걸려 대신 청나라에 다녀와 견문사(見聞事)를 왕에게 바쳤다.

1781년 검토관 ( 檢討官 )·동부승지를 역임하고, 이듬해 대사간·이조참의에 이어 대사성이 된 뒤, 1786년 강화유수로 나갈 때까지 5년 동안 대사성·대사간·이조참의를 번갈아 역임하였다. 1787년 이조참판·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1791년 호조판서·선혜청당상(宣惠廳堂上)을 역임하였다.

 

조홍진(趙弘鎭)

1743(영조 19)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 ( 豊壤 ). 자는 관보(寬甫). 대수(大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석명(錫命)이고, 아버지는 재검(載儉)이다. 어머니는 한배주 ( 韓配周 )의 딸이다. 재운(載運)에게 입양되었다.

1763년(영조 39)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1783년(정조 7) 전 현감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 해 원춘도(原春道:강원도의 이칭)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염찰 활동을 하고 돌아왔다. 이듬해 홍문록(弘文錄: 홍문관의 修撰·校理를 선발하기 위한 홍문관의 제1차 인사기록)에 올랐다.

이 해 이조좌랑이 되었는데, 왕의 소명을 어긴 죄로 산청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785년 지제교 ( 知製敎 )에 발탁되고, 이듬해 홍문관교리가 되어 수령들의 명예를 구하는 폐단을 금지해야 한다는 소를 올려 이를 바로 잡았다.

이어 교리로 대각(臺閣:사헌부·사간원)의 정고(呈告:소송장을 올림)의 시정을 촉구하였다. 또 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가 되어 삼사의 합계(合啓)로 김우진(金宇鎭)을 탄핵했으며, 곧 이어 사간원사간이 되었다.

1788년 오익환 ( 吳翼煥 )의 옥사(獄事)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를 당하기도 하였다. 1793년에는 조정에서의 경사스런 일로 죄가 풀려 시종(侍從)으로 다시 기용되었다.

그 뒤 행부사직(行副司直) 이병정 ( 李秉鼎 )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이듬해 교리가 되고, 이어 수찬이 되어서는 자신의 상소를 왕에게 전달하지 않은 대간을 탄핵하다가 오히려 자신이 파직되었다.

그 뒤 1799년에 승지로 왕을 보필했고, 이듬해 서유문 ( 徐有聞 )과 연명으로 상소하여 죄인들의 사면에 대한 부당성을 주장, 이를 바로 잡았다.

이 해 영동 지방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임무를 다한 뒤 승지로서 역할을 다시 했는데, 이 때 어부들의 폐단을 없애는 데 앞장서 왕의 신임을 돈독히 받았다. 이후 승지로서 왕을 훌륭히 보필하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조상진(趙尙鎭)

1740(영조 16) ∼ 1820(순조 2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 淵 壤). 자는 이진(爾珍). 대수(大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철명(哲命)이고, 아버지는 재우(載遇)이며, 어머니는 정석로(鄭錫老)의 딸이다.

1773년(영조 4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사간 · 부응교를 거쳐 1780년(정조 4) 예조참의와 대사간을 역임하고, 이 해 6월에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

1782년 대사성 · 부제학에 오른 뒤 대사성 · 부제학 · 대사간 등을 번갈아 지냈으며, 1797년 일시 함경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한성부판윤 · 공조판서 · 형조판서 · 예조판서 · 판의금부사 등을 지냈다.

1799년 8월 진하 겸 사은정사(進賀兼謝恩正使)로 청나라의 연경(燕京)에 갔다가 11월에 돌아와 청나라에서 보고 들은 정치현실을 상세히 보고하였다.

순조가 즉위한 뒤 형조판서 · 한성부판윤 · 판의금부사 · 좌우참찬 · 지중추부사 · 판돈녕부사 등을 차례로 지냈고, 1813년(순조 13)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로 나갔다가 1816년에 사직하였다. 시호는 익정(翼貞)이다.

 

조병필(趙秉弼)

1835(헌종 1) ∼ 1908.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 淵 壤). 자는 성필(聖必), 호는 간산(幹山). 구영(龜永)의 아들이다. 1871년(고종 8) 수릉참봉(綏陵參奉)으로 황감제문과(黃柑製文科)의 병과에 급제, 성균관전적 · 지평 · 정언 등을 거쳐 다음해에 청송부사가 되었다.

1874년 병조정랑이 되고 3월에는 황해도 암행어사의 임무도 맡았다. 1876년 동부승지로서 강화도조약 체결을 전후하여 왕의 근신으로 국정을 보필하였으며 이듬해 병조참의가 되었다. 1883년 김옥균 ( 金玉均 ) · 복원규(卜元圭) 등과 함께 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가 되어 임오군란의 사후처리에 진력하였다.

이해 대사성을 잠시 겸하였으나 5월 동래부민란이 발생하자 동래부사에 임명되어 난의 진정에 힘썼다. 그뒤 이조참의 · 대사간 · 좌승지 · 홍문관부제학 등을 거쳐 1892년까지 병조 · 이조 · 형조 · 공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1895년 8월 궁내부특진관으로 진주관찰사로 임명받았다.

그러나, 단발령의 시행으로 을미의병이 봉기하자 도주하였다. 이듬해 강원도관찰사가 되었고 비서원승( 煉 書院丞) · 장례원경(掌禮院卿) · 궁내부특진관 · 태의원경(太醫院卿) · 중추원의관 · 시종원경 (侍從院卿)을 거쳐 1902년에는 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가 되었다.

1904년에 기로소당상(耆老所堂上)이 되었고, 1905년 예식원장례경(禮式院掌禮卿) · 중추원찬의(中樞院贊議) · 학부대신서리(學部大臣署理)로 임명되었다가 1907년 판돈녕사사(判敦寧司事)가 되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조병창(趙秉昌)

∼1883(고종 20). 조선 말기의 문신. 1865년(고종 2) 지경연(知經筵), 1868년 행상호군으로 판의금부사·이조판서, 1870년 예조판서, 1871년부터 다음해까지 판의금부사, 1872년 이조판서, 1873년 판의금부사, 1875년 청사(淸使)의 원접사 ( 遠接使 )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876년 1월 조일수호조약이 체결될 때 이에 반대하여 조정을 비난하였다고 탄핵되어 전라도 영광군 추자도(楸子島)에 유배되었고, 아들 채하(采夏)도 그의 아버지를 음조하였다 하여 평안도 위원군에 유배되었다. 3년 뒤인 1879년 2월 향리로 방축되었고, 12월 탕척서용(蕩滌敍用)의 하명이 있었으나 등용되지 않았다.

임오군변 직후 재등용되어 6월 의정부좌참찬, 7월 예문관제학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다음해인 1883년 4월 대원군의 당여로 군변에 가담하였다고 탄핵되어 임응준 ( 任應準 )· 조우희 ( 趙宇熙 )· 이회정 ( 李會正 ) 등과 함께 원악도(遠惡島)로 위리안치(圍籬安置)하도록 결정되었고, 뒤이어 곧 사사(賜死)되었다. 채하도 역시 사사되었다. 1894년 칙령 제25호에 의거하여 복관되었다.

 

조익(趙翼)

1579(선조 12) ∼ 1655(효종 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 淵 壤). 자는 비경(飛卿), 호는 포저(浦渚) · 존재(存齋). 오위도총부부총관 안국(安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령 간(侃)이고, 아버지는 중추부첨지사 영중(瑩中)이다. 어머니는 찬성 윤근수 ( 尹根壽 )의 딸이다. 장현광 ( 張顯光 ) · 윤근수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중 음보로 정포만호(井浦萬戶)가 되어 1598년(선조 31) 군량미 23만 석을 운반하는 공을 세웠다. 왜란이 끝난 뒤 다시 수학하여 1602 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임명되어 본격적인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이후 삼사의 관직을 두루 지내던 중, 1611년(광해군 3) 김굉필 ( 金宏弼 ) · 조광조 ( 趙光祖 ) · 이언적 ( 李彦迪 ) · 정여창 ( 鄭汝昌 ) 등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주장하다가 고산도찰방으로 좌천되고, 이어 웅천현감을 역임하였다. 뒤이어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유폐되는 사태가 빚어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광주 ( 廣州 )로 은거했다가 충청도 신창으로 옮겨 살았다.

1623년 인조가 즉위하자 이조좌랑에 임용되어 신창 도고산 (道高山) 아래 모옥(茅屋)을 떠나 다시 조정에 들어갔다. 이듬해 이괄 ( 李适 )의 난을 겪은 뒤 의정부 검상 · 사인 ( 舍人 )에 임명되고, 이어 응교 · 직제학 등을 거쳐 동부승지에 올랐다.

1631년 어머니가 죽자 잠시 벼슬을 떠났으나, 3년 상을 마친 뒤 곧 관직에 복귀하였다. 한성부우윤 · 개성부유수 · 대사간 · 이조참판 · 대사성 · 예조판서 · 대사헌 · 공조판서 · 한성부판윤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이원익 ( 李元翼 )을 도와 대동법 ( 大同法 )을 확대하고 관리하는 일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636년 예조판서로 있을 때 병자호란을 당하자 종묘를 강화도로 옮기고 뒤이어 인조를 호종하려다가, 아들 진양(進陽)에게 강화로 모시게 했던 80세의 아버지가 도중에 실종되어 아버지를 찾느라고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호란이 끝난 뒤 그 죄가 거론되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었지만, 그 까닭이 효성을 다하고자 한 데 있었고, 또 아버지를 무사히 강화로 도피시킨 뒤 윤계 ( 尹棨 ) · 심지원 ( 沈之源 ) 등과 함께 경기 지역의 패잔병들을 모아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는 적을 공격하며 입성하고자 노력한 사실이 참작되어 그 해 12월에 석방되었다.

그리고 3년 뒤에는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으로 조정에 들라는 하명을 받았으나, 늙은 아버지를 봉양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뒤이어 예조판서 · 이조판서 · 대사헌의 직이 내려졌지만, 모두 사양하다가 아버지가 죽고 상복을 벗게 되자 1648년 좌참찬이 되어 다시 조정에 나갔다.

이후 1655년 3월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죽기까지 우의정 · 좌의정과 중추부 판사 · 영사의 자리를 거듭 역임하였다. 윤방 ( 尹昉 )의 시장 ( 諡狀 ) 사건에 관련되어 몇 개월 동안 삭직되고 문외출송(門外黜送)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으나, 대체로 무난하게 벼슬 생활을 하면서 김육 ( 金堉 )과 함께 대동법을 확장, 시행하는 데 기여하였다. 또 각종 폐막(弊 壟 )을 개혁하는 데에도 전념하였다.

한편으로 학문에도 정진, ≪ 곤지록 困知錄 ≫ · ≪ 중용주해 中庸註解 ≫ · ≪ 대학주해 大學註解 ≫ · ≪ 서경천설 書經淺說 ≫ 등을 지어 효종에게 바쳤다. 이 저술들은 주자(朱子)의 장구(章句)를 크게 고친 것이었지만, 사람들은 감히 이를 헐뜯지 못했다고 한다.

고향 광주에서 77세로 죽으니 효종은 시호를 내리고, 6월에 대흥 ( 大興 ) 동화산(東華山) 아래에 장례하기까지 관원을 보내어 치조(致弔)하였다. 뒷날 광주(廣州)의 명고서원(明皐書院), 개성의 숭양서원 ( 崧陽書院 ), 신창의 도산서원 ( 道山書院 )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위의 논술 외에 문집으로 ≪ 포저집 ≫ 35권 18책이 전하고, ≪ 역상개략 易象槪略 ≫ 은 이름만 전한다.

성리학의 대가로서 예학에 밝았으며, 경학 · 병법 · 복술에도 뛰어났다. 어려서부터 변함없이 우정을 지켜온 장유 ( 張維 ) · 최명길 ( 崔鳴吉 ) · 이시백 ( 李時白 )과 함께 ‘ 사우(四友) ’ 라 불려졌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조복양(趙復陽)

1609(광해군 1) ∼ 1671(현종 1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 淵 壤). 자는 중초(仲初), 호는 송곡(松谷). 의빈부도사 간(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영중(瑩中)이고, 아버지는 좌의정 익(翼)이다. 어머니는 성주 현씨(星州玄氏)로 덕량(德良)의 딸이다. 김상헌 ( 金尙憲 )의 문인이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하고, 1638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검열을 거쳐 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641년 정언으로 있을 때, 인조의 아우인 능원대군 ( 綾原大君 ) 집 객청(客廳)에 국고의 음식을 공급하는 데 반대하다가 체직되었으나 조석윤 ( 趙錫胤 )의 구원으로 다시 정언에 임명되었다. 이후 헌납 · 교리를 지냈다.

1649년(효종 즉위년) 지평을 거쳐 부교리가 되었는데, 붕당의 폐를 주장하다가 오히려 원두표 ( 元斗杓 )의 당으로 지목되어 왕의 미움을 샀으나 조석윤 등의 신구로 무사하였다. 1651년(효종 2) 그의 아버지 익이 쓴 윤방 ( 尹昉 )의 시장 ( 諡狀 ) 문제로 의금부에 감금되었다가 곧 풀려났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못하였다.

1653년 헌납으로 복직된 뒤, 부교리 · 이조정랑을 역임하고 집의가 되었다. 그러나 사적인 감정으로 사천(史薦)을 마음대로 막았다고 하여 파직되었다가 또다시 조석윤의 파직 환수 주장에 의해 종성부사로 밀려났다. 그 뒤 서원리 ( 徐元履 ) 등의 적극적인 주장으로 다시 겸보덕으로 돌아와 집의 · 겸필선 · 사간 · 응교를 역임하였다.

1657년 시강관 ( 侍講官 )으로 궁중음악의 타락을 지적, 고악(古樂)을 본받아 이를 시정할 것을 주장하고, 악장옥책교문(樂章玉冊敎文)을 지었다. 이듬해 응교로서 서필원 ( 徐必遠 )의 많은 기생을 둔 것을 비방하다가 효종의 미움을 샀으나 송준길 ( 宋浚吉 )의 구원으로 다시 부응교가 된 뒤 1659년 이조참의가 되었다.

현종이 즉위하면서 적극적인 진휼정책의 이행을 주장하였다. 1660년(현종 1)에 대사성, 이듬해에는 대사간으로 별도로 설치된 진휼청당상(賑恤廳堂上)이 되어 흉년으로 기아에 있는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에 힘썼다. 그 뒤 부제학 · 예조참판 · 병조참판 · 동지성균관사 · 강화유수를 역임하고 여러 차례 대사성을 지낸 뒤 원자(元子)의 보양관 ( 輔養官 )이 되었다.

1668년에는 예조판서로 대제학을 겸하여 정시(庭試)를 총괄했으나, 과거의 시제(試題)가 같은 것을 두 번 출제한 실수로 이듬해에 파직되었다가 곧 형조판서로 돌아왔다. 그 뒤 우참찬 · 대제학 · 이조판서 ·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광주 ( 廣州 )의 명고서원(明皐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 ≪ 송곡집 ≫ 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조지겸(趙持謙)

1639(인조 17)∼1685(숙종 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 ( 豊壤 ). 자는 광보(光甫), 호는 오재(汚齋). 광주 ( 廣州 ) 출신. 영중(瑩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의정 익(翼)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복양(復陽)이다. 어머니는 이경용(李景容)의 딸이다.

1663년(현종 4) 진사가 되고, 167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대교·설서·이조좌랑·사간·응교·승지·대사성·부제학·형조참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외직으로 1681년(숙종 7) 고성군수, 1685년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명가에서 태어나 문재가 있었고 처신에 청약(淸約)하여 인망이 두터웠다.

오시수 ( 吳始壽 )의 옥사 때 김수항 ( 金壽恒 )에게 오시수를 변호하다가 힐책을 당한 뒤, 김익훈 ( 金益勳 )의 남인모반사건 조작을 계기로 민정중 ( 閔鼎重 )· 김석주 ( 金錫胄 )와 불화하여 더욱 입장이 난처하였다. 승지로 있을 때 왕의 명으로 송시열 ( 宋時烈 )을 찾아가 김익훈이 남인 허새 ( 許璽 )·허영(許瑛)을 이용, 반역을 꾀하게 한 사실을 알리고 일단 송시열의 동의를 구하였으나, 송시열이 그 뒤 김석주 등의 말을 듣고 김익훈을 비호하게 되자 송시열까지 의심을 하게 되었다.

이 일로 한태동 ( 韓泰東 )· 유득일 ( 兪得一 )· 박태유 ( 朴泰維 ) 등과 더욱 정론(政論)이 가까워지게 되었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올린 여러 소에서 박세채 ( 朴世采 )·박태손(朴泰孫) 등을 비호하여 자신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아버지 복양이 어려서부터 윤순거 ( 尹舜擧 ) 형제와 교우했고, 특히 윤선거 ( 尹宣擧 )와는 친분이 두터워 윤선거의 상에 복(服)을 입었던 사이여서 윤선거의 아들 증(拯)과 우의가 두터웠다.

이러한 연유로 소론의 거두 중 일인이 되었다. 당시 송시열을 지지했던 김수흥(金壽興)·김수항·민정중· 민유중 ( 閔維重 )·김석주·김익훈 등이 노론이 되었고, 박세채·윤증을 지지하던 한태동· 박태보 ( 朴泰輔 )· 오도일 ( 吳道一 )· 최석정 ( 崔錫鼎 )·박태손 등이 소론이 되었다. 그의 문집인 ≪오재집≫에는 〈선부군언행총략 先府君言行總略〉과 〈백씨행장 伯氏行狀〉이 실려 있어 조복양과 조지형(趙持衡)의 인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한편 같은 문집에는 고산찰방으로 있을 때 올린 글 〈고산찰방시공사 高山察訪時供辭〉가 있어 당시 마정(馬政)의 문제점 및 그 내용과 역승제도(驛乘制度)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교우로는 윤지선 ( 尹趾善 )·최석정 등이 있으며, 문하생으로 권구 ( 權絿 ) 등이 있다.

그 밖에 오도일·한태동· 남구만 ( 南九萬 ) 등과도 교유했는데,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 광주(廣州)의 명고서원(明皐書院), 고성(高城)의 향사 ( 鄕祠 )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오재집≫이 있고, 편서로 ≪송곡연보 松谷年譜≫가 있다.

 

조만원(趙萬元)

1762(영조 38) ∼ 1822(순조 2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 淵 壤). 자는 태시(泰始). 소론의 영수 지겸(持謙)의 6세손이며, 한보(漢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우(廷禹)이고, 아버지는 부사 상존(象存)이며, 어머니는 윤근(尹勤)의 딸이다.

1790년(정조 14) 향시에서 수석을 하였으나, 호적이 누락되어 있어 제적되자 정조의 특명으로 부내에 집을 지었다. 2년 뒤 정조가 화성에 거둥하면서 친히 베푼 시험에 뽑혀 진사가 되었다.

1794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기주관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면서 한림회권(翰林會圈 : 예문관검열을 뽑기 위해 예문관 전임 관원들이 피선자에게 낙점을 찍음)에 뽑히고 규장각 초계문신에 선발되는 등 정조의 특별한 배려를 받았다.

이 후 부교리 · 정언 · 지평 및 이조 · 병조 낭관을 거쳤고, 초계시(抄啓試)에서 세번 수석을 하여 4품에 오른 뒤 부안현령이 되었다. 1802년(순조 2) 승정원승지 · 대사간 · 이조참의 · 형조참의 · 자산부사가 되었고, 1809년 이후 이조 · 호조 · 예조 · 병조 · 형조의 참판을 거쳤으며, 1818년에 부사로서 연경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다음해 대사성을 거쳐 강화유수가 되어서는 세금감면 · 향약실시에 노력하였고, 1821년에 형조판서 겸 예문관제학이 되었으며, 동지정사(冬至正使)로서 다시 연경에 다녀왔다.

다음해 한성판윤 겸 지경연사(漢城判尹兼知經筵事)로 재직중 사망하였다. 성격이 밝으면서 부드럽고 깊이가 있다는 평을 받았다. 독서에 전념하였고 안분순명(安分順命)을 규범으로 삼아 생활하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조도보(趙道輔)

한평군파는 도정(都正)을 지낸 도보(道輔)의 아들 상경(尙絅)·상강(尙綱)·상기(尙紀) 3형제와 8명의 손자(孫子)가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벼슬에 올라 영조(英祖)와 정조조(正祖朝)에 걸쳐 확고한 세도의 기반을 닦았다.

 

조엄(趙嚴)

1719(숙종 45) ∼ 1777(정조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 ( 豊壤 ). 자는 명서(明瑞), 호는 영호(永湖). 중운(仲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보(道輔)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상경(商絅)이다. 어머니는 이정태(李廷泰)의 딸이다.

1738년(영조 14) 생원시에 합격, 음보로 내시교관 ( 內侍敎官 ) · 세자익위사시직(世子翊衛司侍直)을 지내고, 1752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정언이 되었다. 이어 지평 · 수찬 · 교리 등을 역임하고 동래부사 · 충청도암행어사를 거쳤다.

1758년에 이례적인 승진으로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는데 도내(道內) 시노비(寺奴婢) 1만 여명의 노비공 ( 奴婢貢 )을 견감( 鋼 減)시켜 그 불만을 가라앉히고 한전(旱田)에 대한 감세(減稅)비율을 적용, 전세 부담을 줄이는 한편, 조창 ( 漕倉 )을 설치하는 치적을 쌓았다. 중앙으로 진출한 뒤 대사헌 · 부제학 · 승지 · 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1763년 통신정사(通信正使)로서 일본에 다녀온 뒤, 대사간 · 한성부우윤, 예조 · 공조의 참판 및 공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770년 이조판서로 있을 때 영의정 김치인 ( 金致仁 )의 천거로 특별히 평안도관찰사로 파견되어 감영의 오래된 공채 ( 公債 ) 30여 만냥을 일시에 징수하는 등 적폐(積弊)를 해소하는 수완을 보였다. 그러나 토호세력들의 반발로 탐학했다는 모함을 받아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후 다시 이조판서로 서용되었지만,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벽파 ( 僻派 )인 홍인한 ( 洪麟漢 ) · 정후겸 ( 鄭厚謙 ) 등과 결탁했다는 홍국영 ( 洪國榮 )의 무고를 받아 파직되었다.

이어 일단 벗겨졌던 평안도관찰사 재임시의 부정 혐의가 새삼 문제가 되어 탐재학민(貪財虐民)한 부패관리(贓吏)의 대표적 인물로 지목, 평안도 위원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아들 진관(鎭寬)의 호소로 죽음을 면하고 김해로 귀양이 옮겨졌으나 실의와 불만 끝에 이듬해 병사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경사(經史)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경륜(經綸)도 뛰어났다. 민생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져서 남긴 업적이 적지 않다.

특히 경상도관찰사 재임 시 창원의 마산창 ( 馬山倉 ), 밀양의 삼랑창 ( 三浪倉 ) 등 조창을 설치, 전라도에까지만 미치던 조운을 경상도 연해 지역에까지 통하게 하여 세곡 납부에 따른 종래의 민폐를 크게 줄이고 동시에 국고 수입을 증가하게 하였다.

또한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져오고 그 보장법(保藏法)과 재배법을 아울러 보급, 구황의 재료로 널리 이용되게 했던 점 〔 제주도에서는 고구마를 조저(趙藷)라고 부르며, 고구마라는 말 자체가 그가 지은 ≪ 해사일기 海 笑 日記 ≫ 에서 일본인이 이를 ‘ 고귀위마(古貴爲麻) ’ 라고 부른다고 기록한 데서 유래되었다 한다 〕 은 후세에 공덕으로 크게 기려지고 있다.

1794년(정조 18) 좌의정 김이소 ( 金履素 ) · 평안도안핵어사(平安道按 逆 御史) 이상황 ( 李相璜 )의 노력으로 신원되고, 1814년(순조 14)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통신사로서 일본을 내왕하며 견문한 바를 적은 ≪ 해사일기 ≫ 가 전하고 있다. 시호는 문익 ( 文翼 )이다.

 

조흥진(趙興鎭)

1748(영조 24)∼1814(순조 1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 ( 豊壤 ). 자는 수보(秀甫). 대수(大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석명(錫命)이고, 아버지는 증참판(贈參判) 재세(載世)이며, 어머니는 이현보 ( 李玄輔 )의 딸이다. 큰아버지 재임(載任)에게 입양되었다.

1774년(영조 50)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 ( 檢閱 )· 정자 ( 正字 )를 거쳐 1780년(정조 4) 가주서가 되었으며, 이듬해 홍문록(弘文錄 : 홍문관의 제학이나 교리(敎理)를 선발하기 위한 제1차 인사기록)에 올랐고, 그 해 개성부경력(開城府經歷)이 되었다.

이어 교리를 거쳐 1782년 부제학, 1786년 동부승지 ( 同副承旨 )에 이어 호조참의가 되었다. 그 뒤 봉산군수·곡산부사를 역임하고, 1809년(순조 9) 대사간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의주부윤이 되어 압록강상의 위화도를 비롯한 제도 ( 諸島 )가 비옥한 사실을 알고 이의 개간을 건의하였다.

1811년 홍경래 ( 洪景來 )의 난이 일어나자 관군을 모아 의주를 굳게 지키는 한편, 반군이 점령한 철산(鐵山)·용천(龍川) 등 7읍을 수복하는 데 전공을 세웠으나 논공행상에 불만, 사직하였다.

이듬해 양사(兩司)의 건의에 따라 병조참판에 기용되고, 이어서 한성부우윤·부총관을 역임하였다. 사후에 이조판서, 이어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처음 숙정(肅靜)이었으나 충헌(忠獻)으로 개시(改諡)되었다.

 

조용화(趙容和)

1793(정조 1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 ( 豊壤 ). 자는 성교(聖交), 호는 청소(晴沼). 좌의정 재호(載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관진(觀鎭)이고, 아버지는 교리 운익(雲翊)이며, 어머니는 이득일 ( 李得一 )의 딸이다.

1813년(순조 13) 사마시에 합격하고, 1822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에 등용되었다. 1832년 이조참의를 거쳐 대사간·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841년(헌종 7) 이조참판, 1844년 비변사제조(備邊司提調)·형조판서, 이듬해 대사헌·한성부판윤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의용(儀容)이 괴위(魁偉)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저절로 공경하게 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였고,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문장에도 능하여 경사제가(經史諸家)의 전주(箋註)도 간명하게 잘 써서 거유(巨儒)라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조정구(趙鼎九)

1862(철종 13) ∼ 1926.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 淵 壤). 초명은 석구(晳九). 자는 미경(米卿), 호는 월파거사(月坡居士). 판서 봉하(鳳夏)의 손자로, 동석(東奭)의 아들이며, 흥선대원군 ( 興宣大院君 )의 둘째 사위이다.

1880년(고종 17)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승지 · 부제학 · 대사성 · 이조참의 · 규장각직제학 · 예조참판 등을 거쳤다. 1896년 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된 뒤 궁내부협판 · 서리대신사무(署理大臣事務) 등 주로 궁내부의 요직을 지내며 왕실의 의례를 담당하였다.

그밖에 평식원총재(平式院總裁) · 의정부찬정 · 판돈녕부사 · 기로소비서장(耆老所秘書長) 등도 역임하였다. 한일합방 때 전 의정부찬정이라는 명의로 일본정부가 주는 은사금(恩賜金) 및 남작의 칭호를 거절하고 합방조서(合邦詔書)와 고유문(告諭文)을 찢었다. 합방에 항의하여 두 차례나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가족들이 구원하여 실패에 그쳤다.

그 뒤 양주 사릉리(思陵里)에서 미망인이라 자처하고 은둔하였다. 1917년 스스로 월파거사라 칭하며 금강산 반야암(般若菴)에 은거중 1919년 고종이 죽자 상경, 인산(因山)을 치르고 중국 허난성(河南省)으로 망명하였다. 7년 동안의 유랑 도중 둘째 아들 남익(南益)의 사망소식을 듣고 귀국, 봉선사 ( 奉先寺 )에 기거하다가 죽었다.

 

조완구(趙琬九)

1880(고종 17) ∼ 1955. 독립운동가. 호는 우천(藕泉). 서울 출신. 일찍이 대종교 ( 大倧敎 )에 입교해 1915년 5월 대종교를 포교할 목적으로 북간도 용정(龍井) 일대에 가서 수많은 동포를 상대로 약 3년간 선교활동에 종사하였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면서 약소국가들이 독립을 선포하자, 이동녕 ( 李東寧 ) · 이시영 ( 李始榮 ) · 조성환 ( 曺成煥 ) · 김동삼 ( 金東三 ) · 조영진 ( 趙英鎭 ) 등 30여 명과 같이 상해(上海)로 갔다.

1919년 3 · 1운동이 국내에서 일어나자 4월 상해에 1,000여 명의 독립동지가 모였을 때, 그도 동지들과 같이 상해로 왔다.

프랑스 조계(租界) 내 김신부로(金神父路) 22호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한 이래, 1945년 11월 중국 충칭(重慶)으로부터 귀국할 때까지 27년간 지조를 지키면서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그는 안창호 ( 安昌浩 )가 미주에서 도착하기 전에 국내와의 교통 통신을 원활하게 소통하기 위해 교통국을 설치하였다. 또 임시의정원 의원과 국무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발전, 고수하는데 노력하였다.

또한, 신규식 ( 申圭植 ) · 이동녕 · 김백련(金白連) · 백순 ( 白純 ) · 정신 ( 鄭信 ) · 박찬익 ( 朴贊翊 ) 등과 함께 상해에 대종교의 교회를 설립, 운영하였다. 국무원의 수석위원으로 구황실(舊皇室) 우대론을 펴서 20대와 30대 초반의 신식대학교육을 받은 동지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여운형 ( 呂運亨 ) · 김진우 ( 金振宇 ) · 장붕(張鵬) 등 의정원의원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노동국을 농무부, 노동국총판(勞動局總辦)을 농무총장(農務總長)으로 바꾸는 개정작업을 펴서 성사시켰다.

1919년 9월 11일 의정원회의에서 대통령 중심제로의 개헌을 주선해서 단일 통합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출범하게 하였다.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하나의 정통 정부로 통합되자 1920년 9월 내무차장, 1924년 5월에 노동국총판이 되었다. 이후 재무총장 · 국무위원 · 내무장 · 내무부장 등 국무위원으로서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20년 10월 교민단 ( 僑民團 )을 이유필 ( 李裕弼 ) · 김구 ( 金九 ) · 여운형 · 김철 ( 金澈 ) 등 20여 명과 조직, 재상해거류민의 자치와 권익 옹호에도 앞장섰다.

1921년 12월 이동녕 · 신규식 · 이시영 · 윤기섭 ( 尹琦燮 ) · 황중현(黃中顯) 등 10여 명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과 이승만(李承晩)을 옹호하기 위해 협성회(協誠會)를 조직, 임정 반대세력 정구단(正救團)과 대결하였다.

1924년 7월 이동녕 · 안창호 · 여운형 · 신익희 ( 申翼熙 ) · 김용철(金容喆) · 이유필 · 조상섭(趙尙燮) · 송병조 ( 宋秉祚 ) · 이강 ( 李剛 ) · 조덕진(趙德津) · 김붕준 ( 金朋濬 ) · 이규홍 ( 李圭弘 ) · 윤자영 ( 尹滋英 ) 등 20여 명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 일명 韓國獨立時事策進會 : 포석로 안창호 자택)를 조직하였다.

1931년 11월 중순경 상해에서 한국측 인사 김구 · 김철 · 조소앙 ( 趙素昻 ) · 이유필 · 안경근 ( 安敬根 ) 등과 중국측 인사 우쳉칸(伍澄干) · 주쿵모(周公謨) 등과 같이 중한항일대동맹(中韓抗日大同盟, 일명 中韓民族抗日大同盟)을 조직, 항일투쟁을 중국과 연합해 전개하였다.

유근 ( 柳瑾 )의 추도회를 이동녕 · 최창식 ( 崔昌植 ) · 김인전 ( 金仁全 ) 등 10여 명과 같이 상해 한국동포 거류민단 사무소에서 개최하였다. 그는 이승만 지지파로서 한국독립당을 조직했고 재건한 바 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 尹奉吉 ) 의거 때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장으로서 이동녕 · 김구 · 조소앙 · 김철 등과 함께 극비리에 훙커우(虹口)공원 투탄의거를 수행하였다.

이에 앞서 이봉창 ( 李奉昌 )의 의거에도 가담해 활동하였다. 윤봉길 의거로 인해 이동녕 · 이시영 · 김구 등과 함께 박찬익 · 민석린(閔石麟)의 도움으로 자싱(嘉興) · 항저우(杭州) 등지로 피신하였다.

그 뒤 전장(鎭江) · 창사(長沙) · 광저우(廣州) · 류저우(柳州) · 치장( 鮫 江)을 거쳐 충칭에 정착, 1940년 9월 17일 김구 등과 같이 한국광복군을 결성하였다.

광선조직(光線組織)에 기여한 그는 이동녕 · 김구 등과 같이 1935년 한국국민당 ( 韓國國民黨 )을 전장에서 결성, 뒷날 한국독립당으로 합류하였다.

1943년 김원봉 ( 金元鳳 )의 조선민족혁명당 ( 朝鮮民族革命黨 )의 황민(黃民) 등 10여 명의 청년들이 김구의 경호대원 박수복(朴守福)을 매수, 김구와 조완구 등 5명의 국무위원의 암살기도를 사전에 정보를 입수, 적발해 전원을 체포하였다.

1945년 11월 김구 등과 같이 귀국해 건국에 종사하다가 6 · 25동란 때 납북되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조동석(趙東奭)

동석(東奭)은 경북 상주(慶北尙州)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순절했다.

 

 

고구마 전래자 趙嚴(조엄)

 

조엄의 호는 영호(永湖), 풍양조씨로 영조 14(1738) 20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음보(陰補)로 내시교관 세자익위사시직을 지내다가 영조 28(1752)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간원 정언에 올랐다. 이어 사서, 홍문관 수찬(修撰),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 등 을 역임하였다. 영조 33(1757) 7월 외직인 동래부사로 부임하였다가, 영조 35(1759) 정월 퇴임해 갈 때까지 많은 치적을 쌓았다.

특히, 동래부사 재임시 임진왜란 때 다대첨사로 순절한 윤흥신이 충렬사에 배향돼 있지 못함을 보고 유성룡의 징비록과 신경의 재 조번방지를 참조, 윤공의 사적을 찾고자 노력했다. 이어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1759년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했다. 부임하자 곧 윤흥신공의 사적을 채방하여 그를 표창할 것을 장청(狀請), 윤공을 증직키 위해 노력하였다.

경상도관찰사 당시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임기를 마치고 내직으로 돌아와서는 대사헌부 제학 예조참의를 지내 영조 39(1763) 7월 통신사로 일본에 건너갔다. 통신사의 여정에 따라 대마도에 들렀을 때 고구마를 보고 그 종자를 얻어 바로 수행원을 통해 부산진으로 보내고 그 보관, 저장재배법을 알렸다. 이듬해인 17647월에 돌아올 때 재배저장법을 익히고 그 종자를 갖고 와서 동래와 제주도지방에 시험삼아 심게 한 것이 우리나라 고구마의 기원이다. 그 재배법을 알리기 위한 저서인 감저보또한 당시 동래부사였던 강필리에 의해 완성되었다.

 

귀국 후 공조판서, 동지성균관사, 지의 금부사, 이조판서, 홍문관 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영조 43(1766)에는 팔곡 구사맹의 조망록에서 윤흥신공의 사적을 더 욱 자세히 조사, 다대첨사 윤공(尹公) 전망사적서(戰亡思蹟敍)를 지어 윤흥신공의 충절이 인멸되지 않게 하였다. 저서로는 해차록』 『해행총재가 있으며, 시호는 문익공이다.

 

 

출처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35

聖(성)

40

珣(순)

45

垣(원)

36

鐸(탁)

41

鐘(종)

46

鎰(일)

37

昶(창)

42

源(원)

47

海(해)

38

稙(직)

43

秉(병)

48

植(식)

39

愚(우)

44

憲(헌)

49

悳(덕)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풍양조씨(豊壤趙氏)는 남한(南韓)에 총 25,894가구, 109,43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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