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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조씨(趙)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趙(한양조씨)

 

 

본관(本貫): 한양(漢陽)

시조(始祖): 조지수(趙之壽)

유래(由來):

 

한양조씨의 시조(始祖) 조지수(趙之壽)는 덕원부 용진현(德源府龍津縣)에 세거해온 사족의 후예로 고려조에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를 지냈다.

그 후 후손들은 조선이 개국하자 한성(漢城)으로 이거하여 가세가 크게 번창하였고, 많은 명신과 훈신·유현을 배출하였으므로 본관을 한양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왔다.

그러나 한양 조씨는 지수(之壽)의 후손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인재의 계통과 총관을 지낸 휘의 계통으로 대별되어, 서로 계대를 다르게 하며 보첩도 따로 만들고 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조양기(趙良琪)

휘(暉)의 아들 양기(良琪)가 1281년(충렬왕 7)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일본정벌에 참가했고 21세 때 합단의 침입을 대파한 공으로 원나라 세조로부터 금포와 옥대를 하사받았다.

 

조돈(趙暾)

양기의 아들 돈(暾)은 1356년(공민왕 5) 쌍성수복 작전 때 공을 세워 예빈경이 되고 이듬해 평양에 침입한 홍건적을 대파한 후 판사농시사(判司農寺事)·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오르고 1375년(우왕 1) 삼중대광으로 용성군(龍城君)으로 봉해졌다. 돈(暾)은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벼슬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조인벽(趙仁壁)

돈의 맏아들 인벽(仁壁)은 동북면 원수(東北面元帥)로 왜구를 토벌하였고 정화공주와 결혼하여 이성계의 매부가 되었으며 용원부원군(龍源府院君)에 봉해졌다.

 

조영무(趙英茂)

∼1414(태종 14). 고려 말 조선 초 때의 무신. 본관은 한양 ( 漢陽 ). 중국에서 귀화한 지수(之壽)의 고손으로, 할아버지는 순후(珣厚)이고, 아버지는 세진(世珍)이다. 개국공신 1등 조인옥 ( 趙仁沃 )과 개국공신 2등 조온 ( 趙溫 )이 그 당내이다. 그들의 출세에 힘입어 한양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1392년(공양왕 4) 이방원 ( 李芳遠 )의 명으로 조영규 ( 趙英珪 ) 등과 함께 정몽주 ( 鄭夢周 )를 격살한 뒤 그 해 이성계를 추대,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우고 판전중시사(判殿中寺事)에 올라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으며, 한산백(漢山伯)에 봉했졌다.

1394년(태조 3)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로서 강계등처도병마사(江界等處都兵馬使)를 겸임하고, 1397년 충청도도절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정사공신 ( 定社功臣 ) 1등에 봉해졌다.

태조는 그의 배은망덕을 크게 개탄했는데, 1402년(태종 2)에 일어난 조사의난(趙思義亂)은 조영무· 이무 ( 李茂 ) 등을 죽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방원의 극진한 총애를 받아 판중추원사·의흥삼군부중군동지절제사(義興三軍府中軍同知節制使)를 거쳐 참찬문하부사에 승진하였다.

1400년(정종 2) 도독중외제군사도진무(都督中外諸軍事都鎭撫)로 병권을 장악, 제2차 왕자의 난에도 이방원을 도와 좌명공신 ( 佐命功臣 ) 1등에 봉해졌다. 사병 혁파가 실시될 때 이를 거부하고 무기를 수납하는 군관을 구타했다가 황주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와 서북면도순문사 겸 평양부윤으로 나갔다.

그 뒤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권행의정부사(權行議政府事)·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를 거쳐 영승추부사(領承樞府事)로 병조전서(兵曹典書)를 겸임하였다.

1405년 우정승에 올랐으며, 이듬해 판이병조사(判吏兵曹事)를 겸직한 뒤 1408년 부원군 ( 府院君 )에 진봉되었다. 1409년 훈련관도제조(訓鍊觀都提調)를 지내고, 영삼군부사(領三軍府事)가 되어 병으로 사직하였다.

1412년 수군첨절제사에 임명된 박영우 ( 朴英祐 )의 위임거부로 물의가 일어나자 추천한 장본인으로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이듬해 우정승에 복직되었다. 죽은 뒤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무 ( 忠武 )이다.

 

조광조(趙光祖)

1482(성종 13) ∼ 1519(중종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 ( 漢陽 ).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菴). 한성 출생. 개국공신 온(溫)의 5대 손이며, 육(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충손(衷孫)이고, 아버지는 감찰 원강(元綱)이다. 어머니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의(誼)의 딸이다.

17세 때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로 화를 입고 희천에 유배 중이던 김굉필 ( 金宏弼 )에게 수학하였다. 학문은 ≪ 소학 ≫ · ≪ 근사록 近思錄 ≫ 등을 토대로 하여 이를 경전 연구에 응용했으며, 이 때부터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 ( 金宗直 )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 ( 士林派 )의 영수가 되었다.

이 때는 사화 직후라 사람들은 그가 공부에 독실함을 보고 ‘ 광인(狂人) ’ 이라거나 혹은 ‘ 화태(禍胎) ’ 라 하였다. 친구들과도 자주 교류가 끊겼으나, 그는 전혀 개의하지 않고 학업에만 전념하였다 한다. 한편, 평소에도 의관을 단정히 갖추고 언행도 성현의 가르침을 따라 절제가 있었다.

1510년(중종 5)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당시 시대적인 추세는 정치적 분위기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전반적인 흐름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성균관 유생들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安塘)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1515년(중종 10)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라는 관직에 초임되었다.

그 해 가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 · 감찰 · 예조좌랑을 역임하게 되었고, 이 때부터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는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 ( 至治主義 )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이와 함께 정언이 되어 언관으로서 그의 의도를 펴기 시작하였다.

이 해 장경왕후(章敬王后, 중종의 제1계비)가 죽자 조정에서는 계비 책봉문제가 거론되기에 이르렀다. 이 때 순창군수 김정 ( 金淨 ), 담양부사 박상 ( 朴祥 ) 등은 중종의 정비(正妃, 폐위된 愼氏)를 복위시킬 것과 신씨의 폐위를 주장했던 박원종 ( 朴元宗 )을 처벌할 것을 상소했는데, 이 때문에 대사간 이행 ( 李荇 )의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에 대해 조광조는 대사간으로서 상소자를 벌함은 언로를 막는 결과가 되므로 국가의 존망에 관계되는 일이라 주장, 오히려 이행 등을 파직하게 하여 그에 대한 왕의 신임을 입증받았다. 이것을 계기로 원로파(元老派), 즉 반정공신과 신진사류(新進士類)의 대립으로 발전, 이후 기묘사화의 발생 원인이 되었다.

그 뒤 수찬을 역임하고 곧이어 정랑이 되었다. 1517년에는 교리로 경연시독관 · 춘추관기주관을 겸임했으며, 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해 ≪ 여씨향약 呂氏鄕約 ≫ 을 8도에 실시하도록 하였다. 주자학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려 말이었으나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고, 조선 초기에 와서도 사장 ( 詞章 )의 학만이 높이 숭상되었기 때문에 과거에 있어서도 이것에만 치중했고 도학 ( 道學 )은 일반적으로 경시되었다.

그러나 조광조의 도학정치에 대한 주창은 대단한 것이었고, 이러한 주창을 계기로 당시의 학풍은 변화되어갔으며, 뒤에 이황 ( 李滉 ) · 이이(李珥) 같은 학자가 탄생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도학정치는 조선시대의 풍습과 사상을 유교식으로 바꾸어놓는 데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즉, 조선시대에 일반서민들까지도 주자의 ≪ 가례 家禮 ≫ 를 지키게 되어 상례 ( 喪禮 )를 다하고 젊은 과부의 재가도 허락되지 않게 되었다.

1518년 부제학이 되어서는 유학의 이상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사문(斯文)의 흥기를 자신의 임무로 자부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주(人主)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미신 타파를 내세워 소격서 ( 昭格署 )의 폐지를 강력히 주청,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이를 혁파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 그 해 11월에는 대사헌에 승진되어 부빈객을 겸하게 되었다. 그는 한편으로 천거시취제(薦擧試取制)인 현량과 ( 賢良科 )를 처음 실시하게 하여 김식 ( 金湜 ) · 안처겸 ( 安處謙 ) · 박훈 ( 朴薰 ) 등 28인이 뽑혔으며, 이어 김정(金淨) · 박상(朴尙) · 이자(李 秕 ) · 김구 ( 金絿 ) · 기준 ( 奇遵 ) · 한충 ( 韓忠 ) 등 소장학자들을 뽑아 요직에 안배하였다.

그는 이와 같이 현량과를 통해 신진사류들을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시키는 실마리로 삼았다. 이들 신진사류들과 함께 훈구세력의 타도와 구제(舊制)의 개혁 및 그에 따른 새로운 질서의 수립에 나섰다. 그리하여 이들은 1519년(중종 14)에 이르러 훈구세력인 반정공신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즉, 그들은 우선 정국공신 ( 靖國功臣 )이 너무 많음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그리고 성희안 ( 成希顔 ) 같은 인물은 반정을 하지 않았는데도 뽑혔고, 유자광 ( 柳子光 )은 그의 척족들의 권귀(權貴)를 위해 반정했는데, 이러한 유의 반정정신은 소인들이나 꾀하는 것이라며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또한, 이들은 권좌에 올라 모든 국정을 다스리는 데 이(利)를 먼저 하고 있으므로 이를 개정하지 않으면 국가를 유지하기가 곤란함을 극력 주창하였다. 이의 실천 대안으로 반정공신 2 · 3등 중 가장 심한 것은 개정해야 하고, 4등 50여 인은 모두 공이 없이 녹을 함부로 먹고 있으므로 삭제함이 좋을 것이라는 위훈삭제(僞勳削除)를 강력히 청하고 나섰다.

이러한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반정 초기에 대사헌 이계맹 ( 李繼孟 ) 등은 원종공신 ( 原從功臣 )이 많아 외람되므로 그 진위를 밝힐 것을 주장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신진사류들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미 반정공신들은 기성 귀족이 되어 있었고, 현실적으로 원로가 된 훈구세력을 소인배로 몰아 배척하려는 급격한 개혁주장은 중종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침내 2 · 3등 공신의 일부, 4등 공신 전원, 즉 전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되는 76인의 훈작이 삭탈당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은 마침내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야기시켰다.

훈구파 중 홍경주 ( 洪景舟 ) · 남곤 ( 南袞 ) · 심정 ( 沈貞 )은 경빈 박씨(敬嬪朴氏) 등 후궁을 움직여 왕에게 신진사류를 무고하도록 하였다. 또한, 대궐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 주초위왕(走肖爲王) ’ 이라는 글자를 써 벌레가 파먹게 한 다음에 궁녀로 하여금 이를 따서 왕에게 바쳐 의심을 조장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홍경주와 공조판서 김전 ( 金詮 ), 예조판서 남곤, 우찬성 이장곤 ( 李長坤 ), 호조판서 고형산(高荊山), 심정 등은 밤에 신무문(神武門)을 통해 비밀리에 왕을 만나고는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조직, 조정을 문란하게 하고 있다고 탄핵하였다. 이에 평소부터 신진사류를 비롯한 조광조의 도학정치와 과격한 언행에 염증을 느껴오던 왕은 훈구대신들의 탄핵을 받아들여 이를 시행하였다.

그 결과 조광조는 김정 · 김구 · 김식 · 윤자임 ( 尹自任 ) · 박세희(朴世熹) · 박훈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 처음 김정 · 김식 · 김구와 함께 그도 사사(賜死)의 명을 받았으나, 영의정 정광필 ( 鄭光弼 )의 간곡한 비호로 능주에 유배되었다.

그 뒤 정적인 훈구파의 김전 · 남곤 · 이유청 ( 李惟淸 )이 각각 영의정 · 좌의정 · 우의정에 임명되자 이들에 의하여 그 해 12월 바로 사사되었다. 이 때가 기묘년이었으므로 이 사건을 ‘ 기묘사화 ’ 라고 한다.

결국 신진사류들이 기성세력인 훈구파를 축출, 새로운 정치질서를 이루려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들의 실패 원인은 그들이 대부분 젊고 또 정치적 경륜도 짧은 데다가 개혁을 급진적이고 너무 과격하게 이루려다가 노련한 훈구세력의 반발을 샀기 때문이다.

이이(李珥)는 ≪ 석담일기 石潭日記 ≫ 에서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류들의 실패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옛사람들은 반드시 학문이 이루어진 뒤에나 이론을 실천했는데, 이 이론을 실천하는 요점은 왕의 그릇된 정책을 시정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 다스릴 재주를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 일선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도학을 실천하고자 왕에게 왕도의 철학을 이행하도록 간청하기는 했지만, 그를 비방하는 입이 너무 많아, 비방의 입이 한 번 열리자 결국 몸이 죽고 나라를 어지럽게 했으니 후세 사람들에게 그의 행적이 경계가 되었다. ” 고 하였다.

그 뒤 선조 초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 뒤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는 후학들에 의해 사당이 세워지고, 서원도 설립되었다. 1570년 능주에 죽수서원 ( 竹樹書院 ), 1576년 희천에 양현사(兩賢祠)가 세워져 봉안되었으며, 1605년(선조 38)에는 그의 묘소 아래에 있는 심곡서원 ( 深谷書院 )에 봉안되는 등 전국에 많은 향사가 세워졌다.

또한, 이이는 김굉필 · 정여창 ( 鄭汝昌 ) · 이언적 ( 李彦迪 ) 등과 함께 그를 동방사현(東方四賢)이라 불렀다. 저서로 ≪ 정암집 ≫ 이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은 소(疏) · 책(策) · 계(啓) 등의 상소문과 몇 가지의 제문이고, 그 밖에 몇 편의 시도 실려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조위한(趙緯韓)

1567(명종 22)∼1649(인조 2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 ( 漢陽 ). 자는 지세(持世), 호는 현곡(玄谷). 참판 방언(邦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령 옥(玉)이고, 아버지는 증판서 양정(揚庭)이며, 어머니는 한응성(韓應星)의 딸이다. 유한(維韓)의 아우이며 찬한(纘韓)의 형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김덕령 ( 金德齡 )을 따라 종군하였으며, 1601년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 주부 ( 主簿 )·감찰 등을 지냈다. 1613년 국구(國舅) 김제남 ( 金悌男 )의 무옥(誣獄)에 연좌되어 여러 조신들과 함께 구금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재등용되어 사성에 제수되었다가, 상의원정을 거쳐 장령·집의에 제수되고 호당 ( 湖堂 )에 뽑혔다. 그 뒤 양양군수가 되었다가 1624년(인조 2) 이괄 ( 李适 )이 난을 일으키자 토벌에 참여, 서울을 지켰으며, 정묘·병자호란 때에도 출전, 난이 끝난 뒤에 군사를 거두고 돌아왔다.

그 뒤 벼슬길에서 물러나 있다가 다시 등용되었으며, 여러 차례 연석(筵席)에 나가서는 권신들의 실정을 계옥(啓沃)하였다. 그 뒤 동부승지·직제학을 지내고, 벼슬이 공조참판에 이르렀으며, 80세에 자헌대부에 오르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다. 글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해학(諧謔)에도 능하였다.

 

조공근(趙公謹)

1547(명종 2) ∼ 1629(인조 7). 조선 중 ·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 ( 漢陽 ). 자는 회보(懷甫), 호는 소옹(梳翁). 아버지는 전한 덕원 ( 德源 )이며, 어머니는 현감 유이(柳 蓬 )의 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으로 묘사(廟社)의 신주 ( 神主 )를 받들고 피난하여, 그 신주를 개성 목청전 ( 穆淸殿 )에 임시로 봉안해 두었다가 영변에 봉안하게 하였다.

선조가 광해군을 세자로 삼아 대소조(大小朝)로 나누자, 이에 대한 여러가지 미비점을 상주하여 마침내 분조 ( 分朝 )의 체면을 갖추게 하였다. 1601년 옥천군수, 1605년 형조정랑에 이어 다음해 평창군수를 역임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앞서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시종한 공으로 위성공신 ( 衛聖功臣 )에 녹훈되고, 한흥군(漢興君)에 봉하여졌다. 폐모론이 일어나자 병을 핑계하여 양근 ( 楊根 )에 돌아가 치사를 청하였고,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 때의 훈작(勳爵)을 모두 삭적(削籍)함에 따라 삭훈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묘사의 신주를 모신 공로가 참작되어 1627년(인조 5)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특히,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조경(趙絅)

1586(선조 19) ∼ 1669(현종1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 ( 漢陽 ).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洲) · 주봉(柱峯). 정충장군(折衝將軍) 수곤(壽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조좌랑 현(玹)이고, 아버지는 봉사 ( 奉事 ) 익남(翼男)이다. 어머니는 증좌승지 유개(柳愷)의 딸이다. 윤근수 ( 尹根壽 )의 문인이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 ( 司馬試 )에 합격했으나 광해군의 난정(亂政)으로 대과를 단념, 거창에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고창현감 · 경상도사에 계속하여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다가 이듬해 형조좌랑 · 목천현감 등을 지냈다.

1626년(인조 4) 정시문과에 장원, 정언 · 교리 · 헌납 등 청요직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일으키기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했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강화도에 파천하고 조정에서 화전 양론이 분분할 때 지평으로 강화론을 주장하는 대신들에 대하여 강경하게 논박하였다.

이어 이조좌랑 · 이조정랑을 거쳐,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사간으로 척화를 주장하였다. 이듬해 집의로 일본에 청병하여 청나라를 공격할 것을 상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뒤 응교 ( 應敎 ) · 집의(執義) 등을 역임하고, 1643년 통신부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기행문을 저술하였다.

이어 형조참의 · 대사간 · 대제학, 이조 · 형조의 판서 등을 거쳐, 1650년 청나라가 사문사(査問使)의 척화신에 대한 처벌 요구로 영의정 이경석 ( 李景奭 )과 함께 의주 백마산성 ( 白馬山城 )에 안치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와, 1653년 회양부사를 지내고 포천에 은퇴하였다. 그 뒤 노인직 ( 老人職 )으로 행부호군에 등용, 1658년 기로소 ( 耆老所 )에 들어갔다.

1661년 판중추부사로 윤선도 ( 尹善道 )의 상소를 변호하다가 대간의 논박을 받고 파직되었다. 숙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포천의 용연서원 ( 龍淵書院 ), 흥해의 곡강서원(曲江書院), 춘천의 문암서원 ( 文巖書院 )에 각각 제향되었다. 저서로 ≪ 용주집 ≫ 23권 12책과 ≪ 동사록 東 笑 錄 ≫ 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조종저(趙宗著)

1631(인조 9) ∼ 1690(숙종 16). 조선 후기의 문신 · 학자. 본관은 한양 ( 漢陽 ). 자는 취숙(聚叔), 호는 간재(艮齋) · 남악(南岳). 아버지는 홍문관교리 중려(重呂)이며, 어머니는 지중추부사 신경진(申景珍)의 딸이다. 1660년(현종 1) 성균관에 입학, 문명을 날렸으며, 그곳 유생들을 대표하여 이이(李珥) · 성혼 ( 成渾 )을 문묘에 배향하자는 등의 상소문을 찬(撰)하였다.

1667년에는 제주도에 표착한 중국인 95명을 청나라에 압송하는 문제로 조정에서 논의가 일자 압송을 반대하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 1669년 동몽교관이 제수되었으나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귀향, 1672년 다시 복직하였다가 그해 겨울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에 들어갔다.

그 뒤 성균관전적에 승진하고, 이어 병조좌랑 · 시강원사서 등을 거쳐 문학 겸 지제교에 승진하였으며, 사간원정언 · 사헌부지평 등을 지낸 뒤, 1675년(숙종 1) 병조정랑이 되었다가 그해 복상문제 ( 服喪問題 )로 제2차 예송 ( 禮訟 )이 일어나 서인이 실각하자 면직되었다.

1677년 성균관사예에 임명되고, 이어 헌납이 되었으나 벼슬을 사직, 1680년 종부시정에 임명되었으며, 성균관사성 등을 거쳐 1686년 회양부사가 되어 때마침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백성들의 구휼(救恤)에 힘쓰는 등 치적을 쌓았다. 1689년 통정대부에 승자 ( 陞資 )되는 등 조정에서 포상이 내려졌으나, 이이 · 성혼이 문묘에서 출향(黜享)되자 병을 핑계로 등청하지 않았다. 문장에 뛰어나 장유 ( 張維 ) · 이식 ( 李植 )에 비유되었다. 또한, 역사에 밝았고, 천문 · 역수 · 의약에도 통달하였다. 저서로 ≪ 남악집 南岳集 ≫ · ≪ 간재신사 艮齋新 盧 ≫ 등이 있다

 

조뇌

충정공 인옥(仁沃)의 아들 뇌( )는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지내고 효행으로 이름을 날렸다.

 

조순생(趙順生)

∼1454(단종 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 ( 漢陽 ). 호는 파서(坡西). 할아버지는 개국공신 한산군(韓山君) 인옥(仁沃)이며, 아버지는 지돈녕부사 뇌(賚)이다.

1439년(세종 21) 평안도경차관(平安道敬差官)을 지냈으며, 1445년 7월에 사간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마정(馬政)을 관장한 공로를 인정받아 특지로 통훈대부에 제수되었다.

1447년에는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안평대군 ( 安平大君 )의 일파로 몰려 다음해에 고성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었다.

 

조중묵(趙重默)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의 화가. 본관은 한양 ( 漢陽 ). 자는 덕행(德荇), 호는 운계(雲溪) 또는 자산(蔗山). 시문이 뛰어났던 수삼(秀三)의 손자이다. 화원이었으며 감목관 ( 監牧官 )을 지냈다.

초상에 특히 뛰어나, 1846년 헌종어진도사(憲宗御眞圖寫)의 동참화사(同參 怜 師)로 참여하였으며, 1852년에는 철종어진도사, 그리고 1861년에는 철종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도사를, 1872년에는 태조어진 익선관본(翼善冠本) 모사(模寫)와 고종어진모사의 화사로 활약하는 등 이한철 ( 李漢喆 )과 더불어 당시 초상화의 쌍벽으로 지칭되었다.

또한, 1866년에는 ≪ 고종명성후가례도감의궤 高宗明成后嘉禮都監儀軌 ≫ 제작에 참여하였다. 전기 ( 田琦 ) · 김수철 ( 金秀哲 ) · 허유(許維) · 이한철 · 유숙 ( 劉淑 ) 등과 함께 김정희 ( 金正喜 )의 화평( 怜 評)을 통하여 그림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김정희는 ≪ 예림갑을록 藝林甲乙錄 ≫ 에서 그의 〈 추림독조도 秋林獨釣圖 〉 에 대하여 화경( 怜 境)이 능히 폭중(幅中)의 세(勢)를 갖추었으나 구성의 묘가 부족하다고 하였다.

그가 남긴 산수화들은 남종화풍을 충실히 따라 깔끔하고 정돈된 맛을 풍기고 있으나, 전반적으로는 형식화가 두드러져 화면의 생기가 모자라 보인다.

그의 이러한 화풍은 조선 말기 화단의 주류적 사조를 이루었던 김정희파의 경향과 상통하는 것이나 그의 화격은 다소 뒤떨어지는 편이다.

대표작으로는 〈 산외청강도 山外淸江圖 〉 와 〈 하경산수도 夏景山水圖 〉 · 〈 강남춘의도 江南春意圖 〉 (崔丙漢 소장) 등이 있다.

 

조수삼(趙秀三)

1762(영조 38) ∼ 1849(헌종 15). 조선 후기의 여항시인(閭巷詩人). 본관은 한양 ( 漢陽 ). 초명은 경유(景 賠 ). 자는 지원(芝園) · 자익(子翼), 호는 추재(秋齋) · 경원(經 飯 ). 가선대부 한성부좌윤 겸 오위도총부부총관(漢城府左尹兼五衛都摠府副摠管)에 추증된 원문 ( 元文 )의 아들이다. 여항시인 경렴(景濂)의 동생이고, 조선 말기의 화원( 怜 員)인 중묵(重默)은 그의 손자이다.

구자균 ( 具滋均 )은 ≪ 한국평민문학사 韓國平民文學史 ≫ 에서 조수삼은 신분을 서리 ( 胥吏 )일 것이라고 추정하였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대개 역과중인(譯科中人) 출신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수삼은 신분의 제한으로 1844년(헌종 10) 83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송석원시사 ( 松石園詩社 )의 핵심적인 인물로 활동하였다. 정이조(丁彛祚) · 이단전(李亶佃) · 강진(姜 自 ) · 조희룡 ( 趙熙龍 ) · 김낙서(金洛瑞) · 장혼 ( 張混 ) · 박윤묵(朴允默) 등 여항시인과 사귀었다.

김정희 ( 金正喜 ) · 김명희 ( 金命喜 ) · 조인영 ( 趙寅永 ) · 조만영 ( 趙萬永 ) · 한치원 ( 韓致元 ) · 남상교(南尙敎) · 이만용(李晩用) 등 당시의 쟁쟁한 사대부들과도 친밀히 지냈다. 특히, 조인영 · 조만영은 풍양조씨 세도정치의 중추인물이었다., 조수삼의 후원자 역할을 하였다.

관력(官歷)이 없는 조수삼의 생애는 여행으로 특징지어 진다. 1789년(정조 13) 이상원(李相源)을 따라 처음으로 중국에 간 이래로 여섯 차례나 연행(燕行)하였다.

당대 중국의 일류문사인 오숭량(吳崇梁) · 유희해(劉喜海) · 강련(江漣) · 주문한(朱文翰) 등과 사귀었다. 그리고 전국에 발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국내 각지를 빠짐없이 여행하여 많은 시들을 남겼다.

조수삼의 시는 대개 전기 · 후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전기에서는 생활주변이나 자연을 소재로 하여 대상과의 조화를 추구한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후기로 올수록 사회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이 많아진다. 장편시들도 눈에 뜨이게 양산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 김정희는 두보(杜甫)의 시풍과 근접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홍경래 ( 洪景來 )의 난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 서구도올 西寇 極 奄 〉 , 관북지방을 여행하면서 당시의 민중의 비참한 생활상을 묘파한 〈 북행백절 北行百絶 〉 등이 조수삼의 시풍을 대변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밖에도 〈 석고가 石鼓歌 〉 · 〈 억석행 憶昔行 〉 · 〈 병치행 病齒行 〉 등도 장편거작으로 인구에 회자되었던 조수삼의 작품이다.

그리고 주로 당시의 도시하층민들의 생기발랄한 모습을 산문으로 쓰고 칠언절구의 시를 덧붙인 형식으로 되어 있는 〈 추재기이 秋齋紀異 〉 , 중국 주변의 여러 나라에 대한 짧은 산문과 시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는 〈 외이죽지사 外夷竹枝詞 〉 등은 한문학사상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들이다. 저서로는 ≪ 추재집 ≫ 8권 4책이 있다.

 

조중묵(趙重默)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의 화가. 본관은 한양 ( 漢陽 ). 자는 덕행(德荇), 호는 운계(雲溪) 또는 자산(蔗山). 시문이 뛰어났던 수삼(秀三)의 손자이다. 화원이었으며 감목관 ( 監牧官 )을 지냈다.

초상에 특히 뛰어나, 1846년 헌종어진도사(憲宗御眞圖寫)의 동참화사(同參 怜 師)로 참여하였으며, 1852년에는 철종어진도사, 그리고 1861년에는 철종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도사를, 1872년에는 태조어진 익선관본(翼善冠本) 모사(模寫)와 고종어진모사의 화사로 활약하는 등 이한철 ( 李漢喆 )과 더불어 당시 초상화의 쌍벽으로 지칭되었다.

또한, 1866년에는 ≪ 고종명성후가례도감의궤 高宗明成后嘉禮都監儀軌 ≫ 제작에 참여하였다. 전기 ( 田琦 ) · 김수철 ( 金秀哲 ) · 허유(許維) · 이한철 · 유숙 ( 劉淑 ) 등과 함께 김정희 ( 金正喜 )의 화평( 怜 評)을 통하여 그림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김정희는 ≪ 예림갑을록 藝林甲乙錄 ≫ 에서 그의 〈 추림독조도 秋林獨釣圖 〉 에 대하여 화경( 怜 境)이 능히 폭중(幅中)의 세(勢)를 갖추었으나 구성의 묘가 부족하다고 하였다.

그가 남긴 산수화들은 남종화풍을 충실히 따라 깔끔하고 정돈된 맛을 풍기고 있으나, 전반적으로는 형식화가 두드러져 화면의 생기가 모자라 보인다.

그의 이러한 화풍은 조선 말기 화단의 주류적 사조를 이루었던 김정희파의 경향과 상통하는 것이나 그의 화격은 다소 뒤떨어지는 편이다.

대표작으로는 〈 산외청강도 山外淸江圖 〉 와 〈 하경산수도 夏景山水圖 〉 · 〈 강남춘의도 江南春意圖 〉 (崔丙漢 소장) 등이 있다.

 

조맹선(趙孟善)

∼1922. 독립운동가. 호는 원석(圓石). 황해도 평산 출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김동필 ( 金東弼 ) 등과 같이 대한13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의 이름으로 5적을 참형에 처할 것을 상소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동지 박정빈(朴正彬)·우병렬(禹炳烈)· 이진룡 ( 李鎭龍 )·박장호(朴長浩)· 홍범도 ( 洪範圖 ) 등과 함께 평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참모장으로 일본군과 싸웠다. 이어 경의선 계정(鷄井), 예성강 연안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의병 토벌작전으로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남만주로 망명, 홍범도· 윤세복 ( 尹世復 )· 차도선 ( 車道善 ) 등과 포수단 ( 砲手團 )을 조직해 장백(長白)·무송(撫松)·임강현(臨江縣)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만주 지역에 흩어져 있는 동포를 규합해 항일사상 고취와 계몽운동에 진력하였다. 그러면서 국내와 긴밀한 연락을 취해 군자금 모집운동을 전개하고, 애국청년들을 만주로 불러들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1916년 10월에는 이진룡과 협의해 포수단의 황봉선(黃鳳善)· 황봉운 ( 黃鳳雲 )·김원섭(金元燮)·김일(金鎰)·김효선(金孝善) 등과 함께 국내로 잠입했다. 평안북도 운산에서 미국인이 운영하는 금광회사의 송금차를 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19년 3월 차도선·신봉황(申鳳荒) 등과 함께 충의사(忠義社)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압록강을 넘어 국내로 진격할 계획으로 동지 규합과 병기 입수에 진력하였다. 4월에는 남북만주 전역에 걸쳐 흩어져 있던 독립군 진영을 통합해 대규모의 독립군단으로 확대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는 만주 지역의 각 독립운동단체 및 의병장·유림대표· 보약사 ( 保約社 )· 향약계 ( 鄕約契 )· 농무계 ( 農務契 )·포수단 등을 규합, 500여 명을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에 모았다. 3일간의 회의 끝에 종전의 단체를 모두 해체시키고 대한독립단이라는 단일 기관을 조직하기로 하였다.

총재에는 박장호를 추대하고 자신은 총단장에 취임해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만주 지역의 친일단체인 일민회(日民會)· 보민회 ( 保民會 )·강립단(强立團) 등을 타도하는 데 앞장섰다.

1920년 2월 독립군 통합운동의 일환으로 대한독립단·대한의용군사의회(大韓義勇軍事議會)· 한족회 ( 韓族會 )·대한청년단연합회 등 만주 일대의 군사기관이 통합되어 임시정부 군무부 ( 軍務部 ) 직할의 광복군 사령부로 개편되었다. 이때 광복군사령장에 임명되었고, 뒤이어 창설된 광복군 총영(總營)을 지도하였다.

1921년 4월 5일 평안남도 순천의 이병택(李炳鐸) 외 수 명이 광복군 총영에 가입하여, 조맹선으로부터 권총 7정, 탄약 420발, 경고문을 받아서 배포하다가 순천서에 검거되었다. 1922년 길림성(吉林省) 추풍(秋風)에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조병옥(趙炳玉)

1894(고종 31)∼1960. 독립운동가·정치가.

〔생 애〕 초명은 병갑(炳甲). 호는 유석(維石). 충청남도 목천(木川:지금의 천안) 출생. 인원(仁元)의 아들이다. 공주소학교를 거쳐 1909년 평양숭실중학교와 1914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뒤 1918년 미국 와이오밍대학을 졸업하고, 1925년 컬럼비아대학에서 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받은 그 해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신간회 ( 新幹會 ) 등에 깊이 관여하였다. 광주학생운동·신간회사건·수양동우회사건 등 항일운동에 연루되어 5년에 걸치는 옥중생활을 하였으며, 1931년에는 조선일보사 경영에도 한때 가담하였다. 그 뒤 광복이 되기까지 야인생활을 하였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가하였으나 미군정청 경무부장으로 혼란기의 치안을 맞게 되자 정치일선에서 한때 물러났다.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대통령특사로 우방을 순방하고 유엔총회에 참석하여 신생 대한민국의 국제적 신임을 얻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50년 남침해온 북한군에 밀려 전세가 극도로 불리할 때 내무부장관으로 등용되어 대구방위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으나, 이듬해 5월 독재화되어가는 이승만(李承晩)정권에 실망하고 대통령 이승만에게 “대한민국은 민주국가로 탄생하였으므로 반드시 민주국가로 발전, 성장해야 한다.”는 건의서를 낸 뒤 물러났다.

1953년에는 반공포로석방에 반대하는 견해를 취하다가 테러를 당하고 잠시 투옥되는 변을 당하였다.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1955년 민주당 조직에 참여하여 최고위원, 1958년 민주당 최고위원으로 추대되면서 자유당 독재정치에 항거하는 반독재투쟁을 선도하였다. 1960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선거를 1개월 앞두고 미국의 월터리드육군병원에서 수술 끝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의 정치관은 매우 폭이 넓고 거시적이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사사오입개헌으로 이승만정권의 독재화가 노골화되자 민주당을 창당하여 반독재투쟁을 전개하면서도 “빈대를 잡기 위하여 초가삼간을 태울 수는 없다.”고 하는 국가관과 정당관을 남겼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저서로 ≪민주주의와 나≫·≪나의 회고록≫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조지훈(趙芝薰)

1920 ∼ 1968. 시인. 국문학자. 본관은 한양 ( 漢陽 ). 본명은 동탁(東卓). 경상북도 영양(英陽) 출신. 아버지는 헌영(憲泳)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다. 4남매 중 둘째 아들이며, 어렸을 때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운 뒤 보통학교 3년을 수학하고 1941년 21세에 혜화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이에 앞서 20세에 안동 출신의 김난희(金蘭姬)와 혼인하였다. 1941년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강원 강사를 지냈고, 불경과 당시(唐詩)를 탐독하였다. 1942년에 조선어학회 ≪ 큰사전 ≫ 편찬위원이 되었으며, 1946년에 전국문필가협회와 청년문학가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47년부터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고, 6 · 25 때는 종군작가로 활약한 경력이 있다. 만년에는 시작(詩作)보다는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 한국문화사대계 韓國文化史大系 ≫ 를 기획, 이 사업을 추진하였다. 작품 활동은 1939년 4월 ≪ 문장 文章 ≫ 지에 시 〈 고풍의상 古風衣裳 〉 이 추천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같은 해 11월 〈 승무 僧舞 〉 , 1940년에 〈 봉황수 鳳凰愁 〉 를 발표함으로써 추천이 완료되었다. 이 추천 작품들은 한국의 역사적 연면성(連綿性)을 의식하고 고전적인 미의 세계를 찬양한 내용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 고풍의상 〉 에서는 전아한 한국의 여인상을 표현하였고, 〈 승무 〉 에서는 승무의 동작과 분위기가 융합된 고전적인 경지를 노래하였다.

그리고 〈 봉황수 〉 에서는 주권 상실의 슬픔과 민족의 역사적 연속성이 중단됨을 고지(告知)시키고 있다. 조지훈의 작품 경향은 ≪ 청록집 靑鹿集 ≫ (1946) · ≪ 풀잎단장(斷章) ≫ (1952) · ≪ 조지훈시선 趙芝薰詩選 ≫ (1956)의 작품들과 ≪ 역사앞에서 ≫ (1957)의 작품들로 대별된다.

박목월 ( 朴木月 ) · 박두진(朴斗鎭)과 더불어 공동으로 간행한 ≪ 청록집 ≫ 의 시편들에서는 주로 민족의 역사적 맥락과 고전적인 전아한 미의 세계에 대한 찬양과 아울러 ‘ 선취(禪趣) ’ 의 세계를 노래하였다. 〈 고사(古寺) 1 〉 · 〈 고사 2 〉 · 〈 낙화 落花 〉 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 시편에 담긴 불교적 인간 의식은 사상적으로 심화되지 않았으나, 유교적 도덕주의의 격조 높은 자연 인식 및 삶의 융합을 보인다는 점에서 시문학사적 의의가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또한, ≪ 풀잎단장 ≫ 과 ≪ 조지훈시선 ≫ 은 ≪ 청록집 ≫ 에서 보인 전통지향적 시세계를 심화시켰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 역사앞에서 ≫ 는 일대 시적 전환을 보이고 있는데, 종래의 ≪ 청록집 ≫ 등에서 나타난 시세계와는 달리 현실에 대응하는 시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광복 당시의 격심한 사상적 분열 현상과 국토의 양분화 현실 및 6 · 25라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의 분노를 표현한 작품으로는 〈 역사앞에서 〉 · 〈 다부원 (多富院)에서 〉 · 〈 패강무정 浿江無情 〉 들이 있다.

특히, 〈 다부원에서 〉 는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시로서 동족상잔의 비극적 국면이 절실하게 나타나 있다. 기타 저서로는 시집 ≪ 여운 餘韻 ≫ (1964)과 수상록 ≪ 창에 기대어 ≫ (1956), 시론집 ≪ 시의 원리 ≫ (1959), 수필집 ≪ 시와 인생 ≫ (1959), 번역서 ≪ 채근담 菜根譚 ≫ (1959) 등이 있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한양(漢陽) 조씨는 남한에 총 64,881가구, 273,40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광조(趙光祖) 선생의 일화

 

[일화1]

도학자로서의 조광조 "조선 성리학계 도학의 창시자"

현재 유생들 사이에 유학자로서 조광조의 위상은 확고하다.

사실상 그는 조선 성리학에서 도학의 창시자나 다름없다는 평이다. 우리 조선의 성리학적 전통은 정몽주, 길개, 김종직, 김굉필로 이어져 내려왔고, 그는 바로 김굉필 문하에서 배웠다.

 

그러나 그동안의 조선 성리학은 주로 문학 중심이었다. 성리학의 이론 및 실천분야 즉 도학은 미개척인 상태였다. 그러던 것을 바로 조광조가 나와서 도학을 성리학의 중심 학품으로 자리잡게했다는 것이다. 그의 도학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한가는 '소격서 혁파'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유교를 기본으로 하는 나라에서 흉사 때 미신에 제를 올리는 부서인 소격서를 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란게 그의 주장이었다.

 

그는 중종이 상소를 들어주지 않자 성균과 유생을 이끌고 궐문 앞에서 비를 맞아가며 연좌시의를 벌였다. 빗줄기가 굵어지고 밤이 깊어가도 그는 미동도 않은 채 버텼고 결국 국왕의 재가를 얻어냈다. 이 일화는 지금도 젊은 유생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다는 후문이다.

 

[일화2]

조광조는 이때부터 시문은 물론 성리학의 연찬에 힘을 쏟아, 스무 살을 전후해서 가장 성실하고 촉망받는 청년학자로 꼽혔으며, 점필재(김종직의 호)의 학통을 이은 한훤당의 문하에서 군계일학이 되었다.여기에 한훤당과의 유명한 일화 한 토막이 전해진다.

어느날, 한훤당이 꿩 한 마리를 얻어서 말려두었다. 모부인(母夫人)에게 보내기 위해서였다.

마침 고양이가 꿩을 훔쳐 먹었다. 이를 안 한훤당은 지나칠 정도로 종에게 꾸지람을 하였다. 이에 조광조가 "봉양하는 정성이 비록 간절할지라도 군자의 사기(辭氣)는 조심해야 할 줄로 압니다. 제가 마음속에 의혹된 바가 있어서 감히 말씀드립니다."고 말하였다.

한훤당은 어린 제자의 충고를 듣고는 몸을 일으켜 조광조의 손을 잡고 말했다.
"
네 말을 들으니 내 잘못을 깨달았도다. 부끄럽구나! 네가 내 스승이지, 내가 너의 스승이 아니다"하고 감탄했다. (정암집, 연보).

 

[일화3]

1519(중종 14) 조온의 현손 조광조(趙光祖)가 왕도정치 및 개혁정치를 펼 때 반대 세력들이 궁중의 오동나무에 , , , 이란 글자모양으로 꿀을 발라놓아(내용인즉 자와 자가 합치니 자가 되어 조광조가 왕을 속이고 왕이 되려고 한다는 뜻을 나타냄) 벌레가 꿀을 먹어 , , , 이란 글자가 선명하게 나타나자 이를 핑계로 조광조를 모함하니 조광조는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게 되었다.

 

조광조의 죽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왕을 폐하겠다는 역적의 누명을 쓰고 문중의 뿌리까지 뽑힐지경에 이르는 한편 조상의 묘를 파헤쳐 시신을 꺼내 목을 베는 부관참시(剖棺斬屍)의 지경에 이르자 옥석비의 주인인 조연(趙涓)의 묘소까지 위험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문중에서는 옥비를 마을 어귀 논가운데 묻어버리고 뿔뿔히 흩어져 살게 되었으며 그 후 당시의 상황을 까맣게 잊을 만큼 세월이 흘러 끝내는 자손들이 趙涓의 묘소 위치까지 잊게되어 문중에서는 조상을 모시지 못하는 죄를 스스로 지고 말았다. 그러던 중 문중의 누군가가 황해도 무슨 고을 군수로 행차하던중 지금의 파주 지역에서 머물다가 밤에 현몽을 꾸었다. 꿈속에 백마를 탄 신령이 나타나 서쪽 방향을 가리키며 어느 방향에 너희가 찾는 묘소가 있다고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여기며 다음날 아침 일어나보니 흰눈이 무릎까지 왔는데 새벽 길에 서쪽방향으로 말발자국이 나 있었다.

꿈속에서 신령이 말한 방향으로 나타난 발자국을 따라 십리를 가니 말발자국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앞에 묘소가 있어 파보니 그것이 곧 태조의 생질인 趙涓의 묘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후 자손들은 묘소를 정비하고 숨겨진 옥비를 찾고져 수많은 세월을 흘려 보냈다.

결국 찾지는 못하고 지금 마을어귀 한 곳에 그 옥비가 묻혀있을 것이라 믿고 들에 나가면 조상의 얼이 숨긴 그 옥비가 혹시나 삽자루밑에 걸리지나 않나 하는 기대속에서 한양조씨 일가는 오늘도 살고 있다.

 

趙水月(조수월) 선생님의 일화.

얼음을 깬 잉어

때는 조선조 중엽.
영양읍 상원리 비릿골에 한양조씨 후손인 水月(수월)과 沙月(사월) 이라는 형제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조모가 병환으로 눕게 되어 용한 의원을 찾아가 처방을 받아 수발했으나 차도가 없었다.

하루는 조모가 水月(수월)공을 불러 잉어를 먹으면 병이 나을 것 같다고 말하였다. 때는 흰 눈이 덮이고 얼음이 꽁꽁 언 엄동설한이지만, 수월공은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생각하고 잉어를 잡으러 강가로 나갔다.
얼음을 뚫고 잉어를 잡으려 했으나, 잡지 못하고 추이와 과로로 기진맥진하여 그 자리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잠시 후 정신을 회복한 그는 얼음을 깨고 다시 잉어를 잡으려 했으나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별 수 없이 울면서 강가를 헤매고 있을 때 갑자기 얼음이 갈라지더니 큰 잉어한 마리가 강위로 뛰어 올라 왔다. 이에 그 잉어를 가지고 와서 조모께 다려 드렸더니 병환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에 후세 사람들이 수월공의 효성을 본받기 위해, 그 곳을 잉어가 나른 골짜기란 뜻으로 「비릿골」이라고 하였다.
                                                                                                                           <출전:  영양군지>

 

趙亨翼(조형익) 선생의 일화.

 

명당터

 

옛날 조형익(趙亨翼)이라는 사람이 揚名(양명)할 수 있는 명당자리인 묘지를 구하려고 地官(지관)을 데리고 두로 강산을 헤매다가 한 곳에 이르렀는데, 택지사가

[이 곳은 명당 터이기는 하지만 세 명의 자손이 호랑이에게 물려간 뒤에 과거에 급제할 자손이 나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조형익은 자손에게 虎患(호환)이 오는 것이 두려워 묘를 못 썼는데, 강릉의 김씨 성을 가진 어떤 사람이 이 소문을 듣고 자기 아버지를 모시니 과연 세 사람의 자손이 호랑이게 물려 간 뒤에 과거에 급제하는 자손이 속촐 해서 가문이 크게 번성했다고 한다.

 

 

趙絅(조경) 선생의 일화

 

용주(龍洲) 조경(趙絅, 1586~1669)은 선조에서 현종 시기까지 오랜 세월을 살아가면서 정치적으로 남인의 입장을 유지한 인물이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대내적으로 붕당정치가 치열하게 전개되던 때였고, 대외적으로는 명과 후금(후의 청나라)과의 사이에서 조선의 국제적인 긴장 관계가 지속되던 시기였다.

이 시기 조경은 84세까지 장수하면서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지만, 이제까지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요인으로는 조선 중기 이후 정치사사상사 연구의 경향이 강성의 정치인이나, 학파의 수장이 되는 인물을 연구의 중심으로 삼았던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조경은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살면서 자신의 정치적 소신과 원칙을 직언(直言)으로 나타낸 학자이자 정치가였다.

출전: 인물 한국사

 

 

 

趙絅(조경) 선생의 일화

 

조경의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洲), 본관은 한양이다. 1586106일 한양의 숭교방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공조좌랑 조현(趙玹)이며, 부는 사섬시 봉사 조익남(趙翼男)이었다. 어머니는 문화 유씨(柳氏)로 유개(柳愷)의 딸이었다. 160217세 때 안동 김씨 김찬(金瓚)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13녀를 두었다. 약관에 문장을 잘하여 이항복과 차천로가 그의 재주를 인정하였으나, 과거 진출은 늦은 편이었다.

1612(광해군 4) 27세의 나이에 사마시에 선발되었으나, 다음 해 4월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여묘살이(상제가 무덤 근처에서 여막(廬幕)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키는 일)를 하였다. 이 기간은 광해군대 북인의 핵심 세력인 이이첨(李爾瞻, 1560~1623)이 정국의 중심에 서서 공안정국을 조성했던 시대였다.

 

조경은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의 폐모론(廢母論)이 전개되자 거창(居昌)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다. 출사 대신에 은거의 길을 택한 것이다. 거창에서 은거를 할 때 조경과 친분을 맺은 인물이 허목(許穆, 1595~1682)이었다. “미수 허목이 그의 아버지를 따라 거창으로 왔으므로, 그와 더불어 종유(從遊)하면서 몹시 친하게 지냈다고 연보는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때에 모계(茅溪) 문위(文緯, 1555~1632)에게 학문을 배웠다. 문위는 산림의 학자로서 명망이 아주 높았다. 훗날 남인의 영수가 되는 허목과의 친분은 조경이 남인으로 인식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출전: 인물 한국사

 

 

 

趙絅(조경) 선생의 일화

 

광해군 정권의 폭정을 피해 은거의 삶을 추구하던 조경에게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북인 정권이 무너지고 서인 정권이 수립된 것이다.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참여한 인조반정의 성공으로 대내외 정책에 있어서 많은 변화가 수반되었다.

조경은 인조반정 이후 유일(遺逸: 초야에 은거하는 선비를 대상으로 하는 인재 등용책)로 천거를 받아 오랜 은거 생활에서 벗어났다. 1624년에는 형조좌랑과 목천현감을 지냈다. 목천현감 재임 시에는 백성의 병폐를 물어보고 학교를 수리하니, 고을 사람들로부터 잘 다스린다는 평판을 받았다. 1626년 초시와 정시(庭試)에 연거푸 장원급제를 했고, 이후에는 주로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관직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627년에 건주 여진(후금)이 조선에 쳐들어와 연달아 평안도의 안주와 평양을 함락하는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정묘호란 때 인조와 소현세자는 분조(分朝)를 하여, 세자가 전주에 머물게 되었다. 조경은 세자를 따라가 전주에 머물다가 3월에 다시 강화도로 들어갔다.

1628년 조정에 돌아온 조경은 언관직을 주로 역임하면서 언론 활동을 해나갔다. 당시 조경을 가장 견제한 인물은 인조반정의 핵심이자 서인 세력의 중심인물인 이귀(李貴, 1557~1633)였다.

이귀는 서인 학문의 원류가 되는 이이와 성혼의 업적을 강조하면서, “조경은 경망스러운 신진으로 그의 재주와 학문, 덕망이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더 나은지는 모르겠으나 조정의 공적인 시비를 가지고 원훈(元勳)과 재신(宰臣)들을 모욕하고 산림의 선비들을 헐뜯었으니 그가 조정을 무시하고 사림을 멸시한 것이 극심하다면서 조경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는 조경이 이귀 등 훈신들을 강하게 비판했기 때문이었다.

 

1629년에 조경은 독서당에 선발되었고, 이후에도 수찬, 교리, 이조좌랑, 이조정랑 등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1631년 이조정랑 재임 시에는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을 왕으로 추숭하는 문제가 정국의 쟁점으로 떠올랐다.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광해군은 왕통에서 제외되고, 인조는 할아버지인 선조로부터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따라서 인조를 추대한 세력들을 중심으로 비정상적인 왕통을 바로잡을 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는 문제가 검토되었던 것이다.

당시 예론의 대가인 김장생은 정원군을 백숙부(伯淑夫)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고, 박지계는 정원군을 아버지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지계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인조가 원했던 방향이었기 때문에 왕의 측근 공신인 이귀, 최명길 등이 주로 찬성했다. 16314월 인조는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정원군 추숭의 뜻을 공식적으로 표명했다. 대신들이 이에 극력 반대하자 인조는 명나라 황제에게 주청하여 허락을 받지 못하면 그때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대 논의가 끊이질 않았고, 유생들의 반대 상소 또한 빗발쳤다.

조경 역시 원종(정원군) 추숭을 강하게 반대했다. 인조는 조경, 장유(張維)의 무리는 허명(虛名: 실속 없는 헛된 명성)을 얻고자 하여 분주히 배척한다면서 불편한 심정을 피력했지만 조경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조경은 원종 추숭을 주도한 박지계를 벌레에, 이서를 쥐에, 그리고 이귀에 대해서는 그 고기를 먹고 싶다고 표현했다1). 결국 조경은 외직인 지례현감으로 밀려났고, 1632년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거창 등지에서 보냈다. 16338월 이조정랑이 되면서 조경은 다시 중앙 관직에 복귀하였다.

출전: 인물 한국사

 

 

 

趙絅(조경) 선생의 일화

 

언관으로서 조경의 강직했던 면모는 16366월 사간으로 있으면서 구언(求言: 임금이 신하의 바른말을 구함)에 응하여 올린 봉사(封事: 상소)에서 당시 권력의 실세인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의 뇌물 수수 사건을 강하게 비판한 것에서도 나타난다. 조경이 홍서봉의 부정과 비리를 조목조목 비판하자, 인조는 오히려 조경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조경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신이 홍서봉에 대해서 분개하는 것은, 국가를 편안히 하고 사직을 이롭게 할 것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그 집을 부유하게 하기에만 힘쓰고 있으며, 음양을 다스리고 사시를 순하게 할 것은 생각하지 않은 채 오직 자신만 살찌우기에 힘써, 오욕스런 말을 달갑게 받으면서 허물을 고치고 뉘우칠 줄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면서 국왕인 인조에게도 당당하게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였다. 재상이라면 무엇보다 사익(私益)보다 공익(公益)을 추구해야 함을 지적한 것이었다.

출전: 인물 한국사

 

 

 

趙絅(조경) 선생의 일화

 

그는 선조에서 현종대까지 84년을 장수하면서 국가 원로로서 소임을 다한 정치인이었다. 대내적으로는 광해군의 즉위와 몰락, 인조반정과 서인 정권의 수립, 효종의 즉위와 북벌 정책, 예송논쟁 등 붕당정치가 치열하게 전개되고, 대외적으로는 두 차례의 호란을 겪으며 국제 관계의 긴장이 지속되었던 이때 그는 정치인으로서 소신 있는 모습을 보여왔다.

1659(효종 10) 5월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하였다. 현종의 즉위 때 조경은 73세로, 산전수전 다 겪은 국가 원로가 되어 있었다. 1660년 나라에 큰 기근이 들자 조경은 상소문을 올려 기근을 진휼하는 일을 말하고, 명나라 신하 도융이 지은 [황정고(荒政考)]를 올리면서 기근에 대처하는 방법들을 적극 모색할 것을 건의했다. 1661년에는 현종이 가뭄이 심해 구언 상소를 올리자 이에 응하였다.

이 무렵 조정에서는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가 효종의 상에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의 문제로 서인과 남인 간의 치열한 정치적 대립이 전개된 기해예송의 여파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서인 쪽에서는 송시열, 숭준길 등이 중심이 되어 1년복을 주장했고, 남인 쪽에서는 허목, 윤휴 등이 나서서 3년복을 주장하였다. 상복이 서인 측의 주장대로 1년복으로 정해지자, 남인 윤선도(尹善道, 15287~1671)는 상소를 올려 서인 송시열의 논리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6). 결국 윤선도는 함경도 삼수로 유배길에 올랐는데, 조경이 구언 상소에 응하면서 윤선도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였다. 남인이기는 했지만 당파적 입장이 그리 강하지 않았던 조경이었지만, 소신에 의해 윤선도 구원 상소를 올린 것이다.

출전: 인물 한국사

 

 

 

趙絅(조경) 선생의 일화

 

1665년 조경은 80세로 자급을 올려주고 월봉을 지급하라는 현종의 명으로 숭록대부에 올랐다. 1668년 가을에는 백운산에 들어갔다가 현종이 온천에 거둥한다는 말을 듣고 곧 돌아왔다. 1669(현종 10) 24, 조경은 8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부음이 알려지자 현종은 이틀 간 조회를 보지 않고 골목 시장을 쉬게 하였다고 한다. 16694월 선영이 있는 무덤 북쪽 10리 녹문(鹿門)의 동쪽 기슭 남향한 곳에 조경의 장지가 조성되었다.

조경을 기억해야 하는 까닭

조경이 활동한 시기는 선조대에 시작된 붕당정치가 극심했던 때였다. 당파 간의 치열한 정치적 대립이 있었고, 후금의 성장으로 말미암아 조선의 전통적인 대외 관계에 있어서도 큰 혼란이 있던 시기였다. 이 시기 조경은 84세까지 장수하면서 현종대까지 국가 원로로서 자신의 소임을 다하였다.

그가 활동한 시기는 또한 정치적으로 격변기였다. 광해군의 즉위와 몰락, 1623년의 인조반정과 서인 정권의 수립, 1627년 정묘호란, 1636년의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 효종의 즉위와 북벌 정책, 현종 대의 예송논쟁 등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던 시대였다.

조경은 당파상으로 남인에 속한다고 볼 수 있지만, 남인의 정치적 입장을 강하게 내세우기보다는 원칙과 소신에 입각하여 자신의 정치관을 피력하였다. 특히 언관직을 수행하면서는 권력의 실세에 대한 강한 비판을 멈추지 않는 강직한 정치인의 표상이 되었다. 사안에 따라서는 국왕의 처사에 대해서도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면서 권력에 굴하지 않는 면모를 보였다. 인조가 생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숭하자 이에 적극 반대하였고, 소현세자빈 강씨의 사사(賜死)나 소현세자 아들의 처벌에 대해서는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강빈(姜嬪)의 신원을 청한 김홍욱을 변호하고, 서인의 중심 송시열에 맞선 윤선도의 예론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청나라의 권력을 빙자해 조선에 오만하게 굴던 정명수의 위세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조경은 당파적 입장이 강하지 않았기에, 김육, 이경석, 정경세, 윤선도 등 서인과 남인을 막론하고 당대의 명망가들과 두루 교분을 유지하였다. 그가 교유 관계를 맺은 일차적 기준은 국익을 추구하는 능력 있는 정치인이자 학자였다. 그러나 현종대 예송논쟁으로 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대립할 때, 남인 윤선도의 입장을 옹호하면서 남인 정치인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84세까지 장수하면서 선조 이후 현종대까지 격동의 역사를 살아간 정치인 조경은 한결같이 원칙과 소신에 입각한 정치 행보를 보였다. 당리당략만을 앞세우고, 보스의 눈치만 보는 오늘날의 정치 현실 때문일까? 왕과 권력에 굴하지 않고 직언(直言)을 한 소신의 정치인조경의 모습은 지금의 시대에도 많은 울림을 주고 있다.

출전: 인물 한국사

 

 

 

 

趙險(조험)의 효행.

 

비리동의 유래

 

조 험(趙險) 선생의 자는 자순(子純)이며, 호는 수월(水月)이다. 조 광인 (趙光仁) 선생의 맏아들로서 1570(선조 3) 영양군 영양읍 하원동 원당리(元塘里)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소학을 읽으면서 옛 성현들의 어지신 언행을 마음에 깊이 새 겨 본받으려는 노력이 남다른 데가 있었으며 점차 장성하여 갈수록 인륜과 도덕을 중히 여겨 매사에 언행이 일치하였다. 선생께서는 일찍이 부모를 여 의고 할머니 밑에서 자라면서도 부모의 자애로운 사랑을 보다 많이 받지 못 했다는 불만스런 생각을 한 적이 없이 부모를 오랫동안 모시고 효도할 수 없었음을 한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선생께서 모시고 계셨던 할머님께 대한 지성이야 오죽하였겠는가?

몹시도 추웠던 어느 해 겨울이었다. 평소 몸이 불편하시어 병석에 누워 계시던 할머니께서 갑자기 잉어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셨다. 그러나, 강물이 모두 꽁꽁 얼어붙은 엄동설한에 잉어를 구하기란 불가능한 일이 었으니 눈앞이 캄캄할 따름이었다. 효성이 지극했던 선생께서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잉어를 구하여 할머니를 봉양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얼어붙은 강가를 수없이 헤매어 보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선생께서는 얼어 붙은 강바닥 빙판 위를 오르내리면서 하늘을 우러러 흐느껴 울며 호소하였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살아 계실 때 효성이 지극하셨으니 혼령이 계시거든 굽어 살피시어 할머님 병환에 약으로 쓰고자 하오니 잉어 한 마리만 부디 구할 수 있도록 하여 주옵소서. ’ 하고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추위도 잊은 채 수없이 거듭하고 있을 때 문득 그 두꺼운 얼음판이 !’ 하고 소리내며 쫙 금이 가고 깨어지더니 커다란 잉이 한 마리가 싱싱한 비늘을 번득이며 얼음 사이로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너무도 반갑고 급한 마음인 지라 허겁지겁 잉어를 붙잡아 꼭 껴안고 집으로 달려가서 있는 정성을 다하여 곰을 하여 할머님께 드렸더니 즐거운 마음으로 달게 잡수셨다고 한다.

 

그 후 할머님 병환은 차도를 보이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말끔히 나으셨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은 곧 인근 마을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듣는 이마다 선생의 지극하신 효성에 용왕이 감동하여 잉어를 보내 준 것이 분명하다는 칭송이 온 고을에 퍼졌던 것이다. 그 때부터 이 동네 이름을 비리동(飛鯉洞), 일명 비리골이라 부르며 지금도 상원 2 동에는 비리동천(飛鯉洞天 : 잉어가 하늘로 솟아 오른 곳)이란 비가 선생의 효심을 영원히 기리고 있다.

한편 선생은 글 잘하는 선비요, 우국 지사(憂國志士)였으니 임진 왜란 때는 아우沙月 趙 任 선생 와 함께 화왕산성 진중으로 달려 가 홍의 장군 곽 망우당의 휘하에서 구국 대열에 참여하였으며, 병자 호란 때는 70 노령이라 출전할 수 없어 아우의 집 뒤뜰에 세운 제단 앞에서 형제가 함께 밤마다 나 라 위해 하늘을 우러러, 빌며 우국 충청을 달랠길 없어 서북(서울이 있는 쪽) 을 향해 통곡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선생의 충효 정신을 추앙하기 위하여 후일에 자손들이 영양군 일월면 도계동에 수월헌(水月軒)이란 정자를 세웠는데 삼간 겹집으로 좌우 서실이 있고 중간은 마루로 되었으며 주위의 자연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지금도 수월헌 좌우 주변에는 선생의 후손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다.

 

출전영양군 영양여자고등학교 박 교감

참고 문헌 英陽郡誌, 孝烈行誌

 

 

 

출처 <한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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