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ail : juntonggahun@naver.com
>> 한국의 성씨


함안조씨(趙)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趙(함안조씨)

 

 

본관(本貫): 함안(咸安)

시조(始祖): 조정(趙鼎)

유래(由來):

 

함안 조씨(咸安趙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초에 대장군(大將軍)을 지낸 조정(趙 鼎)이다. 정(鼎)은 당(唐)나라 출신으로 신라말(新羅末)에 두 동생 부(釜)와 당(當)을 데리고 절강(浙江) 사람인 장길(張吉)과 함께 고려에 귀화하여, 왕 건(王 建)을 도와 고창성(古昌城)에서 견훤(甄萱)을 대파(大破)하고 고려통일(高麗統一)에 공(功)을 세웠으므로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으로 대장군(大將軍)에 올랐다.

그리하고 후손들은 함안(咸安)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며 본관(本貫)을 함안(咸安)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조간(趙幹)

정(鼎)의 아들 간(幹)이 고려에서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조시우(趙時雨)

정의 증손(曾孫) 시우(時雨)는 오위 도영장(五衛都領將)를 역임했다.

 

조영준(趙英俊)

영준(英俊)은 형부 상서(刑部尙書)를 지냈다.

 

조여(趙旅)

1420(세종 2)∼1489(성종 20). 조선 전기의 문신. 단종을 위하여 수절한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주옹(主翁), 호는 어계(漁溪). 경상남도 함안 출신. 할아버지는 고려 공조전서(工曹典書) 열(悅)이고, 아버지는 증사복시정(贈司僕寺正) 안(安)이다.

1453년(단종 1) 성균관진사가 되어 당시의 사림 사이에 명망이 높았으나, 1455년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禪位)하자 성균관에 있다가 함안으로 돌아와서 서산(西山) 아래에 살았는데, 이 서산을 후세 사람들이 백이산(伯夷山)이라고 불렀다.

그는 벼슬을 하지 않고, 다만 시냇가에서 낚시질로 여생을 보냈기 때문에 스스로 어계라 칭호하였다. 1698년(숙종 24)에 노산군(魯山君)이 단종으로 추복(追復)되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1703년 경상도 유생 곽억령(郭億齡) 등이 성삼문 ( 成三問 )· 박팽년 ( 朴彭年 ) 등 사육신의 예에 따라 생육신인 조려도 사당을 세워 제향하도록 건의하였던바, 1706년에 그대로 시행되었다.

고향인 함안의 서산서원 ( 西山書院 )에는 그를 비롯하여 김시습 ( 金時習 )· 이맹전 ( 李孟專 )· 원호 ( 元昊 )· 남효온 ( 南孝溫 )· 성담수 ( 成聃壽 ) 등이 제향되어 있다. 1781년(정조 5)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어계집 漁溪集≫이 남아 있다. 시호는 정절 ( 貞節 )이다.

 

조연(趙淵)

명종(明宗) 때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낸 연(淵)은 여(旅)의 손자로 전서(篆書)·예서(隸書)·잡체(雜體)에 뛰어나 당대의 명필(名筆)로 일컬어졌으며 시문(時文)에도 능했다.

 

조종도(趙宗道)

1537(중종 32) ∼ 1597(선조 3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백유(伯由), 호는 대소헌(大笑軒). 아버지는 참봉 언(堰)이며, 어머니는 대사성 강로(姜老)의 딸이다. 정두(鄭斗)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58년(명종 13) 생원시에 합격한 뒤 천거로 안기도찰방(安奇道察訪)이 되었다. 이 때 이황 ( 李滉 )의 문하생들인 유성룡 ( 柳成龍 ) · 김성일 ( 金誠一 ) 등과 교유하였다. 그 뒤 사도시직장(司 歸 寺直長) · 상서원직장(尙瑞院直長) ·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 · 장례원사평 등을 역임하였다.

1583년(선조 16) 양지현감(陽智縣監)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가 하사되었으며, 1587년 금구현령(金溝縣令)을 역임하였다. 1589년 정여립 ( 鄭汝立 )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무고함이 밝혀져 석방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남으로 돌아와 초유사(招諭使) 김성일과 함께 창의하여 의병모집에 진력하였고, 그 해 가을 단성현감을 지냈다. 1596년에는 함양군수가 되었는데, 다음해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을 받고 안음현감 곽준(郭 說 )과 함께 의병을 규합, 황석산성 ( 黃石山城 )을 수축하고 가족까지 이끌고 들어가 성을 지키면서 가토오(加藤淸正)가 인솔한 적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경사(經史)에 밝았으며, 기개가 높고 해학을 즐겼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함안의 덕암서원 ( 德巖書院 ), 안의의 황암서원(黃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 대소헌집 ≫ 이 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조영석

영조(英祖) 때 화가(畵家)로 이름난 영석은 군수(郡守) 해(楷)의 아들로 유학자(儒學者) 이희조(李喜朝)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숙종(肅宗) 때 천거로 등용되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거쳐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지냈고, 시(詩)·글씨·그림에 뛰어나 삼절(三絶)로 불리웠다.

 

조영복(趙榮福)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역임한 해(楷)의 아들 영복(榮福)이 유명했다.

 

조춘경(趙春慶)

학자(學者)로 이름난 춘경(春慶)이 유명했다.

 

조중회(趙重晦)

1711(숙종 37) ∼ 1782(정조 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익장(益章). 생육신의 한 사람인 증참판 여(旅)의 10대 손이며, 봉원(逢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해(楷)이고, 아버지는 대사간 영복(榮福)이다. 어머니는 이만봉(李萬封)의 딸이다. 이재 ( 李縡 )의 문인이다.

1736년(영조 1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739년 설서가 되고, 예문관검열을 거쳐 1743년 정언이 되었다. 이 때 왕의 사묘(私廟)의 참례(參禮)와 사행(使行)의 폐를 통렬히 논박하다가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1748년 대신들이 경연석상에서 상주(上奏)하여 부수찬에 다시 기용되었으며, 교리 · 수찬을 거쳐 이듬해 헌납 · 겸사서 · 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1750년 탕평책을 반대하는 윤급 ( 尹汲 )을 변호하다 파직당했으나, 곧 기용되어 이듬해 겸필선이 되었다. 이어서 사은 겸 동지사(謝恩兼冬至使)의 서장관 ( 書狀官 )으로 정사 낙창군 당(洛昌君 呪 ), 부사 신사건(申思建)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1752년 필선이 되고, 이듬해 통정대부 ( 通政大夫 )에 올라 승지를 역임한 뒤 1757년 대사간이 되었다.

1759년 대사성이 되었으며, 그 뒤 승지 · 병조참의 · 영변부사 · 양주목사 등을 거쳐 다시 승지가 되었다. 이 때 장헌세자(莊獻世子)가 뒤주에 갇혀 아사하게 되자, 그 부당함을 극간하다가 무장 ( 茂長 )으로 유배되었다. 1770년 개성유수, 이듬해 우윤 · 도승지를 역임하였다. 그 뒤 1772년 이조참판, 이듬해 대사헌 · 예조판서 등을 거쳐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1775년 이조판서에 이어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으며 이듬해 영조가 죽자 빈전도감(殯殿都監)의 도제조를 겸하였다. 정조의 즉위와 함께 함경도관찰사가 되었다. 이 때 함경도 지방에 혹심한 흉년이 들자 기근의 참상을 알리고 진휼책(賑恤策)의 시급함을 건의하였다. 1779년(정조 3) 공조판서가 되었으며, 이듬해 치사(致仕)하여 기로소 ( 耆老所 )에 들었다.

1781년 세도가 홍국영 ( 洪國榮 )이 죽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봉조하 ( 奉朝賀 )가 되었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조정규(趙廷奎)

1791(정조 15) ∼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성서(聖瑞), 호는 임전(琳田). 구한말의 서화의 대가였던 석진(錫晉)의 할아버지이다. 화원이었으며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산수 · 인물과 더불어 어해(魚蟹)를 특히 잘 그려 화명( 怜 名)이 높았다. 그의 어해도들은 조선 후기 장한종(張漢宗)의 원체화적(院體 怜 的)인 기법을 토대로 하여 발전된 것으로, 물을 떠난 물고기와 게들을 그리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그의 이러한 어해도들은 손자인 석진에게 계승되어 근대의 전통화단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산수화에서도 주목할만한 화풍을 이룩하였는데, 1860년에 그린 〈 금강산도병풍 金剛山圖屛風 〉 은 김홍도 ( 金弘道 )의 필치를 따르면서도 근대적인 진경표현(眞景表現)의 선구적 양상을 띠고 있다.

특히, 태점(苔點)의 표현이나 바위에 처리된 선염법(渲染法) 등은 석진의 외손자인 변관식 ( 卞寬植 )을 통하여 근대화단에까지 이어졌다.

그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 산수도 〉 는 조선 말기의 이색적인 화풍과 관련하여 주목을 받고 있다.

이 그림에 보이는 이례적인 배치와 산들의 형태, 그리고 짙고 윤택한 먹을 구사하여 나타낸 특이한 분위기 등은 매우 높은 수준의 독창성을 보이고 있다. 이밖에 대표작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 해도 蟹圖 〉 가 있다.

 

조희룡(趙熙龍)

1789(정조 13) ∼ 1866(고종 3). 조선 후기의 화가. 자는 치운(致雲), 호는 우봉(又峰) · 석감(石 墾 ) · 철적 ( 鐵笛 ) · 호산(壺山) · 단로(丹老) 또는 매수(梅 馬 ). 서울 출생. 김정희 ( 金正喜 )의 문인이다. 헌종의 명을 받아 금강산의 명승지를 그렸으며, 1854년에는 전라도 임자도 ( 荏子島 )에 유배되었다. 시 · 글씨 · 그림에 모두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글씨는 추사체(秋史體)를 본받았고, 그림은 난초와 매화를 특히 많이 그렸다. 난초 역시 김정희의 묵란화(墨蘭 怜 )의 정신을 본받아 그렸다.

≪ 석우망년록 石友忘年錄 ≫ 이라는 자서전적인 저술과 그 당시의 미천한 계층 출신의 인물 중 학문 · 문장 · 서화 · 의술 · 점술에 뛰어난 사람들의 행적을 기록한 일종의 열전적인 저술인 ≪ 호산외사 壺山外史 ≫ 를 남겼다. 특히 여기에 수록된 일곱 명의 화가(김홍도 · 최북 · 임회지 등)들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인물 묘사와 그들 상호간의 교우 관계의 기록은 조선 후기의 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유작 중 가장 많은 수가 매화 그림인데 이와 같은 자신의 매화화벽(梅花 怜 癖)을 ≪ 석우망년록 ≫ 에 상세히 적었다. 자신이 그린 매화 병풍을 방 안에 둘러치고 매화를 읊은 시가 새겨져 있는 벼루와 매화서옥장연(梅花書屋藏烟)이라는 먹을 사용했으며, 매화시백영(梅花詩百詠)을 지어 큰 소리로 읊다가 목이 마르면 매화편차(梅花片茶)를 달여 먹었다. 그리고 자기 거처를 매화백영루(梅花百詠樓)라고 이름 짓고 자신의 호를 매수(梅 馬 )라고 하였다는 내용이다.

현재 간송미술관 소장의 〈 매화서옥도 梅花書屋圖 〉 는 이와 같은 그의 생활 주변의 모습을 표현한 듯한 재미있는 그림이다.

매화그림 중 그의 새로운 구도적 특징을 잘 나타내는 것은 길고 좁은 축화(軸 怜 : 두루마리 그림) 형식의 그림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 홍매대련 紅梅對聯 〉 을 들 수 있다. 굵은 노수간(老樹幹 : 늙은 나무의 줄기)이 힘찬 용의 꿈틀거림과 같이 두세 번 크게 굴곡지면서 화폭의 높이를 가득 채운다. 그리고 그중 몇 군데로부터 꽃을 가득히 피운 가느다란 가지들이 사방으로 힘차게 뻗어 나가 주간(主幹)과 서로 대조와 조화를 이룬다.

비백법(飛白法)을 사용한 수간에는 역시 대조되는 윤묵(潤墨)의 짙은 점을 찍어 요소요소를 강조하였으며 매화꽃은 몰골법(沒骨法 : 그림을 그릴 때 윤곽을 그리지 않는 화법)으로 그렸다.

그의 백매화(白梅花)는 율동적인 경쾌한 붓놀림으로 꽃잎 하나하나의 윤곽선을 그리고 예리한 선으로 꽃술을 장식하였다. 이들 그림에는 항상 추사체 글씨의 화제( 怜 題)를 곁들여 문인화다운 운치를 더욱 북돋았다.

그의 묵매화는 사임당 신씨(師任堂申氏) 이래의 조선 중기 묵매도의 구도에서 탈피하여 후기 묵매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김정희는 조희룡의 난초 그림이 서법에 의한 문인화답지 않게 아직도 화법만을 중시하는 태도를 면하지 못하였다고 낮게 평가하였다. 하지만 그의 묵란화들을 보면 절제 있고 힘찬 필선으로 된 우수한 작품들이 많다.

 

趙旅(조려)  선생의 일화.

호랑이가 건너 준 청령포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조려는 벼슬을 내 전지고 고향 함안으로 내려가 살고 있었는데, 단종이 승하하였다는 말을 듣고 모든 일을 다 던지고 주야로 달려 청령포에 당도하였는데 마침 한밤중이었다.
아무리 찾아도 배는 한 척도 없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대성통곡하니 강물도 따라 우는 것 같았다.

조여는 생각 다 못하여 의관을 벗어 등에 짊어지고 물속에 뛰어들어 건너려고 하는 찰라 뒤에서 등에 짊어지고 있는 옷을 무엇인가 자꾸만 끌어당기므로 이상하게 생각하고 뒤를 돌아보니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옷을 물어 당기는 것이 아닌가?

조여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천리 먼 길을 상감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조상 하로 왔는데 강물은 앞을 가로막고 배는 없으니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하니 마치 호랑이가 알아들은 듯, 등을 들어 대며 올라타라는 듯한 시늉을 한다.
조려는 호랑이 등에 업혀 청령포를 무사히 건넌 후에 단종의 빈소로 당도하니 텅 빈 빈소에는 수직하는 사람 둘 밖에 없었다.

조여는 단종의 빈소 앞에 엎드려 목 놓아 울며 네 번 절하고 일어나 단종의 시체를 연습해 놓고 눈물을 흘리면서 빈소를 물러나오니 호랑이는 밖에서 기다리다가 조여를 다시 엎고 청령포를 건너 주고 어디론가 가벼렸다.

그길로 고향 함안으로 돌아온 조려는 평생 낚시를 하면서 한스러운 세상을  살아갔다고 한다.

 

 

趙重峰(조중봉)선생의 일화.

 

율도(栗島)를 개간시킨 조중봉(趙重峰)

 

조 중봉은 김포 태생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 대장이 되어 옥천(沃川)에서 왜병을 무찌르고 금산(錦山) 싸움에서 전사한 사람이다. 문헌을 보면 조 중봉은 통진(通津) 부사로 재직 시에, 조그만 잘못이 있어 부평으로 유배된 일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

임진왜란이 아직 일어나기 전의 일이었다. 조 중봉이 볼 일이 있어 서울엘 갔다 돌아오면서, 떠꺼머리총각 하나를 데리고 왔다. 그 총각은 성이 김가라 김 총각이라 불렀다.

조 중봉은 김 총각을 자기 집에다 두고, 친자식처럼 극진히 보살펴 주었다. 글도 가르쳐주고, 바둑도 장기도 같이 두며, 수년 동안 한 집에서 같이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조 중봉은 그 마을에 사는 어느 집 딸에게 중매를 하여 이 김총각과 결혼을 시켰다. 그 처녀의 아버지는 김총각이 근본을 알 수 없는 떠돌이라 처음엔 반대했으나, 지체 높은 조 중봉의 말이라 굳이 반대하지는 않았다.

조 중봉은 김총각을 장가들인 뒤에도, 여전히 자기와 한집에서 같이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조 중봉은 김총각의 장인을 자기 집으로 불렀다. “오늘 내가 자네를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자네 사위 때문일세.”

아니 내 사위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습니까?”

아니 자네 사위가 그런 허튼 수작을 할 것 같은가? 내가 그 동안 데리고 있어 보니, 상재(商才)가 있어 장사를 시키면 대성할 것 같았네. , 우리 그 사람에게 장사 밑천을 대어 주어서 어디 한 번 장사를 시켜 보세나. 어때? 나도 댈 테니까 그런 생각 없나?”

아주 뜻밖의 일이었다.

김 총각의 장인도 거절을 하지 않았다. 조 중봉이 앞날을 내다보는 눈이 남달랐으며, 또 자기 사위를 오래도록 데리고 있어 하는 소리라 그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조 중봉과 김총각의 장인은 김 총각에게 장사 밑천을 대어 주었다. 그러자 김총각은 그것을 받아 가지고 장사를 나갔다.

그런데 며칠 뒤에 김총각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돈을 벌은 것 같지가 않았다. 의아해 하는 김총각의 장인을 보고 조 중봉은 변명을 해 주었다.

여보게 너무 실망하지 말게. 어디 첫술에 배부를 수가 있나? 우리 눈 딱 감고 삼 세 번은 군말 말고 밑천을 대어 주기로 하세.”

이리하여 조 중봉과 김총각의 장인은 세 번이나 장사 밑천을 김총각에게 대어주었다.

그런데 조 중봉이 김총각에게 장사를 시키자고 제의한 것은 한갓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벌써 머지않아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김총각을 율도(栗島)에다 보내어서 몰래 그 섬을 개간하게 했다. 이것은 조 중봉과 김총각만의 묵계(黙契)였다.

 

김총각은 조 중봉의 영을 받아 장인에게는 장사를 하러 나간다고 했지만, 실은 이 율도로 와서 개간 사업에 힘썼다. 바다를 막아 논을 일구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밭을 일구었다. 그리고 집 두 채를 지었는데, 그 벽을 모두 찹쌀을 찧어서 만들었다. 그것은 피란을 와서 양도가 궁하면, 그 찹쌀을 떼어 먹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 모두가 조 중봉이 시킨 일이었다.

 

그 뒤 얼마 아니하여 아니나 다를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조 중봉은 온 가족을 율도에다 피란을 시켜 놓고, 그는 의병 대장으로 싸움터로 나갔다. 그리고 율도의 또 한 채 집에서 김 총각과 김 총각 처가 식구가 피란을 하였다.

율도에는 지금도 조 중봉네 일족의 산소가 있는데, 그 아래 켠엔 김총각네 집안의 산소가 남아 있다고 한다.

                                                         <출전: 인천직할시지 1982년판>

 

趙希文(조희문) 선생의 일화.

 

세 마리 잉어 꿈과 석수암(石水庵)

 

대곡방(大谷坊 : 지금의 대산면) 월계리(月溪里)에 월계산이 있어 산의 남쪽 기슭에는 커다랗고 넓은 암석층이 있어 암석층 밑에는 암굴이 있다.

석굴 안을 들어서면 석간수가 고여 있는 석천이 있는데 그 물이 여름에는 시원하기 얼음과 같고 겨울에는 따스하기 온수와 같다.

 

또한 제아무리 가뭄에도 이 석천만은 마르지 않고 장마철을 당하여도 물이 넘쳐흐른 일이 없어 항상 일정한 수량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므로 사람들은 이 석천을 퍽 신기하게 여겨오는 터이다.

 

일설에 의하면 함안 조씨 조희문(趙希文)은 중종(中宗)때 인물로 아호를 월계(月溪)라 하였는데 송순(宋純)과 벗이 되어 함께 이 곳 석굴 안에서 과거 공부를 하였다.

 

두 소년들이 밖에 나갔다가 들어 올 때면 반드시 석수암 승려들의 꿈에 보인다.

하루는 추운 겨울인데 때마침 폭설이 내려 눈이 질과 같이 쌓였으니 오늘 같은 날씨에는 두 소년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데 암승 꿈에 두 소년의 몽조가 있다. 꿈을 꾼 승려는 ……오늘 두 소년이 눈길을 헤치고 오겠는 걸…….”

 

이 말을 듣고 있던 옆에 중이

"-! 그래 눈이 저토록 질로 쌓였는데 하늘을 나는 날개가 없는 바에 무슨 재주로 이 눈길을 온단 말이요?”

하고 의아해 하였다. 그러나 승려는

그러데 아니라 내 꿈에 석굴 안 돌샘에서 세 마리의 잉어가 노는 꿈을 꾸게 되면 매양 그 두 소년이 어김없이 나타나거든. 어제 밤도 이 꿈을 꾸었으니 어디 한번 두고 봅시다.”

그러자 얼마 후 과연 두 소년이 책궤를 등에 짊어지고 눈길을 제치며 올라오니 승려의 꿈이 맞는 것이라고 모두들 탄복하였다.

 

이리하여 조희문은 서기 1561(명종16) 문과를 급제하여 벼슬이 부사에 으르고 문장이 일세를 떨치니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 문묘에 배향된 거유)는 그를 호남 제일의 당대 문장이라 극찬하였고, 송순은 조희문보다 먼저 중종(中宗)때 문과에 급제, 벼슬이 대사헌을 거쳐 우참찬에 올랐고, 시조 문학가로도 이름이 높았다.

 

석수암 승려 꿈에 항상 잉어 세 마리가 석천에 노는 것은 그중 두 마리 잉어는 조() () 두 소년이 문과에 급제함으로서 그 영험을 보았거니와, 한 마리의 영험은 아직도 남아있어 누구인가 한사람 큰 인물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를 월계동 동민들은 가지고 있다.

 

세월이 흘러 어느 때인지 석수암은 없어지고 지금은 다만 마애여래(磨崖如來) 좌상(坐像)만이 남아 있는바 이 좌상은 보물 제 423호로 지정,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다.

 

 

趙連璧(조연벽) 선생의 일화.

 

옛날 김제시에 趙連璧(조연벽)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趙連璧(조연벽)이 어렸을 때 꿈을 꾸니, 흰 옷을 입은 한 노인이 찾아와 자기는 벽골대제를 수호하는 白龍(백룡)인데, 외지에 있는 黑龍(흑룡)이 습격해 자기 집을 빼앗으려 하니 구원해 달라고 하였다.

 

이튿날 조연벽은 백룡이 시키는 대로 백룡과 흑룡이 맞붙어 싸울 때 활을 쏘아 흑룡을 죽였다.

그러자 백룡은 조연벽의 후손을 대대로 흥성하게 하겠다고 약속했고, 그 보은으로 조연벽은 이름이 세상에 크게 드러났으며 그 자손도 번창했다고 한다

 

趙胤(조윤)의 망경대.

옛날 천지개벽 시 관악산 꼭대기만 빼고 이 세상이 온통 물에 잠겨 있었는데, 조물주가 여기에 배를 대고는 주변의 훌륭한 돌들을 모아 청계산 정상에 절경을 만들어 이것을 萬景臺(만경대)라고 이름 지었다.그런데 그 뒤에 고려 유신 조윤(趙胤)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고려의 서울이었던 개성을 바라보았다고 해 망경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고 전한다.

 

 

鄭西川(정서천)紅粧(홍장)

 

정서천(鄭西川) 梱帥(곤수)가 강릉관찰사로 와 있을 때 옛날 부기(府妓)였던 아름다운 紅粧(홍장)을 사모하여 조운흘의 옛일을 생각하며 혹시나 경호에 나타나지나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로 틈만 있으면 경호에 늘 배를 띄우고 지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곤수는 뜻하지 않게 선녀 홍장을 만나 경호에서 하루를 지냈다. 이것은 곤수가 하도 홍장을 사모하여 죽은 홍장이 잠깐 선녀로 변하여 인세(人世)에서 곤수와 함께 즐겼던 것이라 한다.

                                                                 <출전: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규명의 효행

 

토끼 간과 송이버섯

 

청송군 현동면 도평동에서 대구로 가는 약 600m 지점, 현동면 창양동 신창 마을 나지막한 뒷산 기슭 한길 오른쪽에 동그마니 오늘도 길손을 손짓하며 반겨 주는 효자각이 있으니 , 바로 함안 조씨 규명의 효행 사적을 세상에 널리 알려 주는 비각이다. 해는 1801(순조 원년), 이 고장에서 인심 좋기로 이름 난 성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시매 이름은 규명, 호는 일성이라 부른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데가 있어 그 총명함이 뛰어나고 예의 범절이 바르기는 물론 자기의 할 일을 성심 성의껏 해 내는 성품을 가졌으며 , 글 재주가 뛰어나 7 살때 벌써 한시를 지어 이웃 어른들을 놀라게 했고, 효행을 몸소 실행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그리고, 매일 마을 어른들을 찾아뵙는 것은 물론 마을 노인들의 물 심부름과 불 심부름 등 잔 심부름을 도맡아 할 뿐 아니라 노인들이 거처하는 방을 깨끗이 치우고 쓰레질을 하는 등 웃어른을 섬기는 마음씨가 갸륵하여 노인분네들과 마을 사람들이 선생을 좋아하였고, 아끼어 주는 재동이었다.

 

노인들은 하루라도 규명이가 나타나지 않은 날은 집으로 찾아가 규명의 소식을 묻는 귀염을 독차지하니, 자라서 큰 뜻을 펼치기 위해 더욱 공부에 전념하였으며 뛰어난 글재주는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충의 참봉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선생은 단종 때 생육신의 한 분이신 정절공(貞節公) 어 계 (漁溪) 조 여 선생의 후손인 남포공 순도 19세 손으로 금부도사 성 욱의 아들이시다.

 

선생의 이러한 글재주와 선행은 물론 지극한 효성이 아침저녁 부모님의 거처를 찾아 그 날에 일어난 일들을 소상히 말씀 올려 외로움과 소외감을 씻어드리고, 오늘의 하루 일들 중 잘잘못에 대한 부모님의 가르침을 받아 바르게 행동하여 수양과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잠시라도 부모님 곁을 떠나지 않고 부모님의 시중을 들어 불편을 없애고 부득이 출타할 때는 사연을 자세히 말씀 올리고 될 수 있는 대로 그 날 돌아오는 성의를 보였으며 못 돌아 올 때는 집안 식구들을 시켜 일일이 부탁을 하고 떠났다.

 

어느 날 선생의 부친께서 학질을 앓고 계시므로 온갖 약을 다 써보았으나 병이 쉬 나으시지 않아 걱정을 하던 차 그 때 부친께서

, 규명아, 오늘은 어찌하여 꿩고기가 먹고 싶구나. 꿩고기만 먹으면 기운이 날 것 같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느냐?”

하시기에, 사냥이라고는 구경도 못한 터라 꿩 구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데도 그 날부터 산에 들어가 산신께 부친의 병을 낫게 해 달라는 기원과 함께 꿩 한 마리 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를 수일 만에 갑자기 난데없이 꿩 한 마리가 움막으로 푸드덕 날아들어 납죽이 엎드려 꼼짝을 하지 않으므로 몇 번이고 건드려 봐도 날아가지 않으니, 하늘이 내려주신 약이라 하며 꿩을 얻어 집에 돌아와 정성껏 장만하여 잡수시게 하였더니 부 친의 병은 그 날로부터 차도가 있어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한밤중에 또 부친께서 병환이 위독하시어 한시라도 지체할 수 없어 약을 구하기 위해 숲 우거진 산길을 따라 집을 떠났는데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매어 약을 구했으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밤이라 길을 잃고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는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큰 호랑이 한 마리가 길을 가로 막더니 넙죽이 엎드려 꼬리를 흔들며 나를 따라오라는 시늉을 하였다. 호랑이의 뒤를 따라 걸음을 재촉하여 대문까지 왔을 때 호랑이는 온데 간데 없어 지고 안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반겨 맞아주니 이 또한 하늘의 도움이 아니 던가. 곧 약재를 쓰게 하니 부친의 병환은 차도가 있어 건강을 되찾았으나 연세가 많으신지라 또 병환이 나시어 백방으로 약을 찾아보았으나 약이 없었다.

 

하루는 문간방의 한 과객이 이르기를 잔디만 있는 산에 사는 산토끼의 간 과 봄에 나는 송이버섯이 특효약이라 일러 주고는 떠나가 버리고 난 뒤에 이 말을 부친께 여쭈었더니 잔디만 있는 산에는 토끼가 살지 않으며 봄에는 송이버섯이 나지 않는다는 뜻이니 이 약 구하기란 어려운 일이므로 단념하라고 말씀하셨다. 이들 두 형제는 남달리 효성이 지극한지라 만류를 뿌리치며 뜻을 굽히지 않고 약을 구하기를 결심하는 한편 정성껏 병간호하는 것 을 게을리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화수를 떠 놓고 합장 기도하기를 수일, 그 정성 그 뜻이 갸륵하고 통하는 바 있어 하루는 신령님이 꿈에 나타나 소 상히 일려주기에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날 듯 한 몸으로 이들 두형제는 신령 님이 시키는 대로 그 장소에 가 보았더니 정말 산토끼가 바위틈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송이버섯이 탐스럽게 피어 반가이 맞아 주어 이 두약을 구하여 훨훨 날 듯한 기분으로 집으로 달려와 약을 쓰니, 부친의 병이 곧 완쾌되었다.

 

두 형제를 불러 놓고 아들의 효성에 감탄 하여 극구 칭찬하였다고 한다.

이 소문을 듣고 이웃 어른들은 물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한 집에 두 효자가 났다고 부러워하였다. 이 이야기들은 이 곳 사람들로부터 지금도 희미 해져 가는 기억 속에서 더듬어 내고 있어 결국 효성이 지극하면 산짐승도 감탄하여 그를 도왔다는 이야기 이고 보면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실감나는 사례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선생은 서기 1835(헌종 원년) 함창에서 나라 걱정의 일념으로 의병을 손수 일으켜 항쟁하다가 사태가 아군에 불리함에 눈물을 머금고 후일을 기약하면서 동지들과 일단 해산하기로 하고 고향에 돌아와 일송정에 은거하시면서 늘 나라가 위태로움을 크게 탄식하시며 전쟁터에서 죽지 못하 고 살아왔음을 후회하시고 독서로 소일하시다가 71 세로 세상을 떠났다. 선생의 효성과 애국심을 후대에 전하고 이를 오래 기리기 위해 이 비를 무인년 3월에 건립하였으며,

그 후손이 4 1 녀 있었는데 지금은 증손인 조 창래 씨가 진주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면서 살고 있다.

 

출전청송군 도평초등학교 정 교감

참고 문헌 孝烈行誌, 靑松郡史 孝行篇,

 

 

 

 

출처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6

性(성)

30

來(래)

34

洙(수)

27

奎(규)

31

顯(현),熙(희)

35

東(동)

28

鏞(용)

32

在(재),埈(준)

36

煥(환)

29

濟(제)

33

欽(흠)

37

培(배)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함안 조씨((咸安趙氏)는 남한(南韓)에 총 56,433가구, 231,72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게시물 목록
번호 제 목 글쓴이 등록일 조회
685 신안 주.jpg 신안주씨(朱) 청남 14-08-30 6210
684 초계 주.jpg 초계주씨(周) 청남 14-08-30 4155
683 철원 주.jpg 철원주씨(周) 청남 14-08-30 3440
682 안의 주.jpg 안의주씨(周) 청남 14-08-30 3050
681 상주 주.jpg 상주주씨(周) 청남 14-08-30 4367
680 청주 좌1.jpg 청주좌씨(左) 청남 14-08-30 3790
679 종씨(鐘)-2 청남 14-08-30 2490
678 종씨(宗)-1 청남 14-08-30 2285
677 창녕 조.jpg 창녕조씨(曺) [1] 청남 14-08-30 4728
676 횡성 조.jpg 횡성조씨(趙) 청남 14-08-30 3967
함안 조.jpg 함안조씨(趙) [1] 청남 14-08-30 4407
674 한양 조.jpg 한양조씨(趙) 청남 14-08-30 5235
673 풍양 조.jpg 풍양조씨(趙) 청남 14-08-30 5735
672 평양 조1.jpg 평양조씨(趙) 청남 14-08-30 3972
671 평산 조.jpg 평산조씨(趙) 청남 14-08-30 3048
670 태원 조.jpg 태원조씨(趙) 청남 14-08-30 3008
669 진보 조.jpg 진보조씨(趙) 청남 14-08-30 3285
668 직산 조.jpg 직산조씨(趙) 청남 14-08-30 3409
667 임천 조.jpg 임천조씨(趙) 청남 14-08-30 6476
666 옥천 조1.jpg 옥천조씨(趙) [1] 청남 14-08-30 4512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