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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조씨(趙)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趙(횡성조씨)

 

 

본관(本貫): 횡성(橫城)

시조(始祖): 조익(趙翌)

유래(由來):

 

횡성 조씨(橫城趙氏)의 시조(始祖) 조익(趙翌)은 고려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첨(瞻)의 아들로 958년(고려 광종 9)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횡성군(橫城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횡성(橫城)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조승린(趙承藺)

익(翌)의 아들 승린(承藺)이 문과에 급제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조윤익(趙潤益)

익의 손자(孫子) 윤익(潤益)은 집현전 대학사(集賢殿大學士)를 역임했다.

 

조주조(趙周祚)

익의 증손(曾孫) 주조(周祚)는 중서승(中書丞)에 이르렀다.

 

조영인(趙永仁)

1133(인종 11) ∼ 1202(신종 5).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횡성(橫城). 상서 시언(時彦)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비범해 재상의 기량이 있었고, 박학해 글을 잘하였다. 의종 때 과거에 급제, 전주서기(全州書記)가 되어 정사에 명성이 있었다.

명종이 즉위하자 태자 ( 太子 )의 보도(輔導)를 맡았고, 1174년(명종 4)에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郎)으로 하정사 ( 賀正使 )가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다.

뒤에 승선으로서 잘못을 바로잡은 일이 많아 주위의 칭찬을 받았다. 1185년에 우승선으로 국자감시 ( 國子監試 )의 시원(試員)이 되어 시 · 부(詩賦)로 최문목(崔文牧) 등, 십운시(拾韻詩)로 정광우(丁光祐) 등과 명경(明經) 5인을 뽑았다.

1190년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었고, 이듬해 참지정사 ( 參知政事 ) · 정당문학 ( 政堂文學 ) · 한림학사승지가 되었다. 1192년에 동지공거 ( 同知貢擧 )가 되어 진사를 뽑아 손희작(孫希綽) 등 29인을 급제시켰다.

1194년에 수태위상주국(守太尉上柱國), 1196년에 권판이부사(權判吏部事)가 되었다. 이듬해 판이부사(判吏部事)가 되었고, 이어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문하시랑평장사 감수국사(開府儀同三司守太師門下侍郎平章事監修國史)가 되었다.

1198년(신종 1)에 금나라 사신이 와서 전왕(前王 : 명종)이 양위한 사유를 묻고 직접 만나보려 하였다. 이에 “ 전왕은 남주(南州)에서 요양 중이나 노정이 30일 걸리는 거리로 만나보려면 2 ∼ 3개월이나 머물러야 된다. ” 라고 하여 금나라 사신을 되돌려보내 최충헌 ( 崔忠獻 )의 왕의 폐립으로 야기된 금나라와의 외교문제를 무난히 해결하였다.

1204년 문하시중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횡성의 세덕사(世德祠)에 향사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조충(趙沖)

영인의 아들 충(沖)은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명종(明宗) 때 문과에 급제, 대사성(大司成)·한림학사(翰林學士)로 동지공거(同志貢擧)를 겸임하고 서북면원수(西北面元帥)가 되어 수차에 걸친 거란군(渠丹軍)의 침입을 물리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조변

충렬왕(忠烈王) 때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오른 변은 충(沖)의 손자이며, 평장사(平章事) 계순(季珣)의 아들로 동생 해(咳)와 함께 가문을 빛냈다.

 

조무(趙茂)

조선조(朝鮮朝)에 와서 지근(支瑾)의 아들 무(茂)가 벼슬을 지내고 공(功)이 있어 횡성군(橫城君)에 봉해졌다.

 

조인(趙隣)

후손 인(隣)은 부호군을 지냈다.

 

조목(趙穆)

1524(중종 19)∼1606(선조39).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횡성(橫城). 자는 사경(士敬), 호는 월천(月川). 아버지는 참판 대춘(大春)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수익(受益)의 딸이다.

3세에 글을 읽기 시작하였으며, 12세에 사서삼경을 다 읽었다. 15세 때 이황 ( 李滉 )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학업에 더욱 정진하였다. 23세에 어머니 상을 당했는데, 효심이 지극해 이황은 대성할 그릇이 약관으로 몸을 상하지나 않을까 염려할 정도였다.

1552년(명종 7)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대과 ( 大科 )는 포기하고 독선일신(獨善一身)에만 매진하였다. 1566년 공릉참봉에 봉직되었으나 학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이황을 가까이 모시면서 경전 연구에 주력하였다.

그 뒤 성균관수천(成均館首薦)에 피선되고,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에 제수되었으며, 1572년(선조 5) 이후 동몽교관·종부시주부·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공조좌랑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76년 봉화현감에 제수되자 사직소를 냈으나 허락되지 않아 봉직하면서 향교를 중수하였다. 1580년 이후 전라도도사·경상도도사·충청도도사·형조좌랑·신녕현감·영덕현령·전생서주부·공조정랑·상서원판관 및 금산·단양·합천 등의 군수, 장원서장원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94년 군자감주부로 잠시 있으면서 일본과의 강화를 극력 반대하였다. 그 뒤 장악원정·사재감정·예빈시정·공조참의·공조참판 등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재덕과 노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내고 사퇴하였다.

그는 이황과 동향인 예안에서 출생, 성장하면서 일찍 이황의 문하생이 된 후 일생 동안 가장 가까이에서 스승을 모신 팔고제(八高弟)의 한 사람이다.

이황이 죽은 뒤 문집의 편간, 사원(祠院)의 건립 및 봉안 등에 있어서 항상 성의를 다했고, 마침내 도산서원 상덕사(尙德祠)에 유일한 배향자가 되었다.

그는 신민 ( 新民 )보다 명덕(明德)을 중시해 벼슬은 사양하고 현사사(玄沙寺)· 광흥사 ( 廣興寺 )에 들어가 독서를 즐겼다. 이황을 수행하며 명산대천을 주유하면서 심신을 수양했고, 경학을 연찬하되 이기설보다는 훈고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심학 ( 心學 )에 심취해 ≪심경 心經≫에 관한 논설이 많다.

또, 외직에 부임하면 향교를 중수하고 서당을 신설하는 등 고을의 교육 진흥에 이바지하였다. 귀향할 때마다 역동서원 ( 易東書院 )·도산서원을 참배, 현인의 넋을 기리고 자신의 몸가짐을 더욱 돈독히 닦아 나갔다.

그의 일생의 주된 업적은 이황에 대한 연구와 소개 그리고 스승으로 받들어 모심에 있다 하겠다. 그의 문집에 이황에 관계된 글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평생을 청빈하게 지내면서 온후, 겸양, 독실한 실천을 지향하였다. 제자로는 김중청 ( 金中淸 )· 이광윤 ( 李光胤 )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월천집≫과 ≪곤지잡록 困知雜錄≫이 있다.

 

조성립(趙誠立)

1568(선조 1) ∼ 1627(인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횡성(橫城). 자는 여명(汝明), 호는 졸옹(拙翁). 평양부서윤 준(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제용감부정 응세(應世)이고, 아버지는 장악원첨정 인( 虜 )이며, 어머니는 김세휘(金世輝)의 딸이다.

1599년(선조 32)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박사 · 예조좌랑 · 대사간 등을 역임했다. 1609년(선조 37)에 제주도에 흉년이 들자 구황어사로 제수되어 현지의 실상을 자세히 살펴본 후 방물 ( 方物 )의 경감을 요청하는 장계를 올리고, 이어 국둔마(國屯馬)의 점열과 군관의 폐단에 관해 보고했다.

왕이 윤허하여 점마(點馬)의 담당은 명망이 있는 문신(文臣)으로 가려서 보내되 겸하여 민폐와 수령이 잘하는 지의 여부를 염탐하도록 하였다.

그는 사람됨이 강직하여 광해군 때에 초야에 물러가 살면서 끼니를 잇지 못하였으나 지조를 더욱 굳게 가졌다고 한다. 집안에서는 효도와 우애가 있었고, 자기 자신을 단속함에는 청고(淸苦)하였다고 하며, 그가 죽자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조식(趙湜)

1648(인조 26) ∼ 1714(숙종 4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횡성(橫城). 자는 지정(持正). 공립(恭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흠( 槐 )이고, 아버지는 이곤(以坤)이며, 어머니는 남두화(南斗華)의 딸이다.

1686년(숙종 12) 춘당대문과에 장원하여 바로 정6품인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으나, 고묘론(告廟論)에 대한 상소 주도로 대사간 정재희 ( 鄭載禧 )의 탄핵을 받아 사판(仕版 : 벼슬아치의 명단)에서 삭제당하였다. 그 뒤 1689년 지평 ( 持平 )에 제수되었다.

기사환국 ( 己巳換局 )이 일어나자 이광한 ( 李光漢 ) · 김익훈 ( 金益勳 ) 등 노론계의 훈적(勳籍 : 공훈의 내용을 기록한 명단) 삭제를 주창했고, 이어 정언 ( 正言 )에 제수되어 노론의 영수 송시열 ( 宋時烈 )을 탄핵하였으며, 남구만 ( 南九萬 )을 중도부처(中道付處)시키는 데 앞장섰다.

이어 차사(箚辭)가 과격하여 귀양가게 된 이상진 ( 李尙眞 )을 구하기 위한 소(疏)로 체직(遞職)된 뒤 복직되었다가 지평으로 제수되었고, 1690년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어 부교리 ( 副校理 )에 제수된 뒤 다시 사헌부지평으로 옮겼고, 이듬해에는 부교리로 재직 중 전라도를 비밀리에 염찰(廉察)하고 돌아와 부수찬 ( 副修撰 )에 제수되었다. 1692년 공조참의를 거쳐 승지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 황해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

1694년 수원부사(水原府使) 재직 중 갑술옥사 ( 甲戌獄事 )가 있자 장령 ( 掌令 ) 유집일 ( 兪集一 ) 등의 탄핵을 받았고, 이어 대관 ( 臺官 )으로 재직시 노론 대신 송시열(宋時烈) · 민정중 ( 閔鼎重 )의 안률(按律 : 죄안을 고찰함)을 먼저 발의한 것이 문제가 되어 귀양갔다가 1697년 석방되었다. 1702년 65세의 노구로 종성부사(鍾城府使)를 그만둔 뒤 67세의 일기로 죽었다.

 

조석동(趙錫東)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한 석동(錫東)은 가문을 빛냈다.

 

 

 

 

趙穆(조목) 墓碣銘(묘갈명)

 

趙穆(조목) 中宗 19年 甲申(1524)~ 宣祖 39年 丙午(1606) 83.

字 士敬. 號 月川. 橫城人

 

선대 때 예천 급곡에 살다가 아버지 大春(대춘)이 예안거주 권수겸의 사위가 되어 지금의 도산면 월애에 정착하게 되었다. 선생은 태어나면서 부터 자질이 뛰어 났다.

15세에 퇴계 문인에 입문하고 29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공조참팡에 이르렀으나 관직에 나가기를 좋아하지 안하였고, 나갔다 해도 곧 사임하고 오래 머물지 않았다. 퇴계선생이 돌아가시니 3년 동안 상례를 받들었고 선생의 언행록을 짓고 연보를 기초하였다. 83세에 돌아가시니 월애동 후록 부용산 아래 선고 묘하에 안장하였다. 선생의 묘 앞에는 短碑(단비)桐溪(동계) 鄭蘊(정온) 찬 퇴계 선생 집자로 세웠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작은 글자는 알아 볼 수가 없어 정묘년(1987)에 새 비로 다시 세웠다. 앞면의 큰 글자는 嘉善大夫 工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 月川趙穆先生之墓(가선대부 공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월천조목선생지묘)라 새겨져 있다.

월천 선생은 퇴계선생의 많은 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도산서원에 배향되었으며 관직보다 학문에 더 뜻을 두었으며 因知雜錄(인지잡록) 등 저서가 있다.

 

神道碑銘

嘉善大夫工曹參判月川趙先生神道碑銘幷序

退溪李先生以道學唱東南一時魁人碩士之來摳衣者甚衆而先生其領袖矣先生諱穆字士敬姓趙氏其先橫城人有諱翌仕高麗光宗朝官至翰林學士自是名公巨卿史不絶書至先生蓋二十餘世曾祖諱胤孫司醴署直長贈通訓大夫, 通禮院左通禮祖諱瓊贈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考諱大春贈嘉善大夫, 吏曹參判同知義禁府事三世追恩以先生貴也趙氏初移于聞慶縣中移于醴泉郡參判公娶同知權受益女又移于禮安縣以嘉靖甲申三月二十三日生先生于月川里第先生生有異質年五歲在參判公懷中口受大學十二盡學經書十五始就退溪門下受學自是縱學無不觀律身動以禮退溪李先生深器重之丙午丁內艱壬子中生員試癸丑遊泮宮以家貧親老黽勉爲擧子業不得則曰吾道在此何必科爲遂廢擧專意師門不懈益勤爲世大儒丙寅吏曹薦爲恭陵參奉不赴戊辰以館薦除集慶殿參奉赴任未幾辭還庚午李先生易簣先生朞行素三年不入內不與宴壬申除童蒙敎官不起癸酉丁參判公憂廬于墓朞而啜粥鹽而不醬骨立幾不能支其後政府與吏曹同議以學行著聞者五人薦聞先生其首也乙亥超授宗簿寺主簿, 造紙署司紙, 工曹佐郞丙子又除司紙皆不就十月除奉化縣監陳辭疏不允先生始就任未久以災傷罷歸庚辰除工曹佐郞, 全羅, 慶尙都事, 宜寧縣監辛巳除高靈縣監皆不應四月除忠淸都事八月棄歸壬午除刑曹佐郞俄授工曹癸未除新寧縣監皆不就甲申拜盈德縣令在道陳疏首陳難仕之意繼以豪强積滯之獄元惡濫抄之寃剴切陳奏又以朝廷方議北征爲非計深以固本爲得又曰三司從官以言獲罪投諸有北者三人與殺之無異云言甚讜直乙酉拜工曹佐郞兼校正廳郞廳肅恩後陳疏乞免不允遷工曹正郞呈狀南歸除典牲主簿者再以校正廳郞廳有旨趣召者四皆病辭十一月又除工曹正郞兼郞廳如前始趣召丙戌二月拜章乞退未蒙允三月辭還除尙瑞判官, 錦山郡守丁亥除丹陽郡守, 掌苑署掌苑兩除工曹正郞皆不謝除陜川郡守始赴任時朝廷與日本講和先生答李宣慰德馨之書曰李汝受居相位亦作此等事耶汝受山海之字而宣慰其壻也庚寅辭歸行李蕭然書冊三四擔而已壬辰除濟用僉正不赴夏四月倭寇捽至所向無前逼迫京都兩宮西幸國事無可爲者先生與同執登高望北慟哭而下越明年聞車駕還自龍灣先生方圖起程仰覩輦轂之光而以病不果行甲午除歙谷縣令先生欲遂前日計强起作行旣入城以過限遞除軍資監主簿陳章辭遞首陳身伏嶺外未得赴難車駕還都未克迎候之意又曰講和之說尤不勝痛憤豈有率百萬之師屠戮我生靈蕩覆我宗社隳毁我陵寢彌漫竟上不去而謂之講和哉古人有以一旅一成中興者今我國家雖已殘破視彼一旅一成豈不百倍乎伏願殿下修德以格天施仁以撫民以爲攘夷之本上優答使留仕先生卽南歸上嘉歎之十月特除奉正大夫掌樂院正有旨曰目今筵中進講周易義理精微知者蓋寡聞爾間居林下白首窮經從事易學用工最多云特除掌樂正俾參講席詞旨勤懇而先生病不能赴乙未春又召陳疏辭免五月除襄陽府使不赴令本道賜食物又除掌樂, 司贍正己亥除濟用正辛丑除司宰正又以經書校正廳郞廳有旨趣召壬寅除尙衣禮賓正又以特旨陞堂上拜折衝將軍義興衛副護軍俄遷工曹參議以校正廳堂上被召者四皆以病不行甲辰秋特陞嘉善拜龍驤衛上護軍遷工曹參判皆不克赴謝時先生遘疾已二朔丙午冬十月二十九日考終于寢享年八十有三訃聞上震悼遣禮官致弔奠蓋殊典也泮中多士會哭用素嶺南校院皆行奠賻明年正月某日葬于芙蓉山南乾坐巽向之原從先兆也先生性謹嚴深厚踐履端實任眞天然不事矯飾蓋其得於天者如是而早歲又得依歸耳濡目染皆在典禮之內發言行事莫不惟師之視則先生之於爲人可謂不勞而成矣奉養參判公定省惟謹色養無方家甚貧雖甘旨不繼而未嘗以非義干人平居未明而起整冠襟詣祠堂行再拜禮退坐書室對案看書至忘寢食常謂學者曰小學乃諸經之機括苟能通透是書作聖根基在此矣又曰大學只是知行二字爾以格致屬之知誠正修屬之行齊治平爲推行之理如有一字一句有疑處必就李先生面稟或條列以問必貫通後已嘗就李先生所抄錄朱子書節要中又抄其尤切於後學者爲一冊以備觀省焉尤愛心經口誦而心體之及見皇明通記見篁墩賣題之事道一編之說而始疑其爲人爲學乃錄稟於李先生先生於是作心經後論師生之間互相補益如此常覽薛文淸讀書錄手圈其要語置諸几案又取劉元城自不妄語始之語常自櫽括而又置小冊子書前賢切已語名曰困知雜錄其於心身上未嘗不提撕省察恐其或墮於昏茫放倒之域者多此類於書無不讀無不購夜必明燭炷香讀近思錄, 朱子大全, 性理諸書或誦淵明擊瀼集, 濂洛風雅等詩聲音和壯了了可聽至於亂離奔避之際猶不忘敎誨曰陸秀夫在舟中猶講學朝聞道夕死可矣講讀不輟其於仕宦本無意務欲晦藏而名益彰年除月遷至於四十餘官而就職者無幾或就之而又不久留每擧胡文定寒溫飢飽自知斟酌之語以自戒故其難進易退之迹光明正大無可疑者其在山林未嘗談當世之事人或來言則曰在山林當作山林語時事何與焉眞所謂其默足以容者也然國有大事則亦未嘗不深憂而痛斥之與西厓柳相國成龍有同門之義聞西厓在領台主和議乃抵書曰相國平生讀聖賢書所得只此講和誤國四字耶詞甚峻截先生之志業於此可見矣先生娶安東權氏參奉蓋世之女太師幸之後也生一子三女曰龜朋未成而夭女長適金裕吉次適權昞次適金光纉副室有二子一女長曰壽朋進士次曰錫朋登文科爲主簿女適卞綬裕吉有四子一女之善, 就善, 從善, 樂善女適權益昌昞三子一女子曰尙健, 尙義, 尙寯女曰權瑮光纉有二子一女, 確生員女適參奉鄭時亨壽朋四子一女, , , 女適黃中敬蘊年在弱冠嘗一拜於床下矣觀其厚德端儀已不勝其歆服而何能窺闖其閫奧哉今也先生之表孫金確金䂴誤以其隧道之銘託於蘊蘊年老且無文何能發幽光之萬一然金君之請義有所不可辭者謹依狀文撮其梗槪而爲之說曰先生之美質得退溪而有成退溪之道學得先生而有光非先生何以受退溪之磨琢非溪何以保先生之發明也是以余於先生之言行事業多略而不詳者欲使後之觀先生者先觀退溪而得之也系之以銘曰

卓彼文純我東考亭見而知之惟我先生先生之道繩墨於師先生之學淵源在玆程庭之楊朱門之張有傳有受不顯其光陶山之下月川濊濊山如不朽川亦不渴嘉義大夫吏曹參判兼同知經筵, 春秋館事, 義禁府事八溪鄭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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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명

가선대부공조참판 월천조선생신도비명 병서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이 도학(道學)으로 동남 지역에서 창도할 때에 당시의 괴인(魁人)과 석사(碩士) 중에 추종하는 자가 매우 많았는데, 선생이 그중에서 영수(領袖)였다. 선생의 휘는 목(), 자는 사경(士敬), ()은 조씨(趙氏)인데, 그의 선조는 횡성인(橫城人)이다. 휘 익()은 고려 광종조(光宗朝)에 벼슬하여 관직이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다. 그 뒤부터 명공(名公)과 거경(巨卿)이 역사서(歷史書)에 끊이지 않고 등장하여 선생에 이르기까지 대개 20여 세()나 된다. 증조(曾祖) 휘 윤손(胤孫)은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에 증직되었고, () 휘 경()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경연참찬관(兼經筵參贊官)에 증직되었고, () 휘 대춘(大椿)은 가선대부 이조 참판 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는데, 3세를 추은(推恩)한 것은 선생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조씨가 처음에는 문경현(聞慶縣)으로 옮겼다가 나중에는 예천군(醴泉郡)으로 옮겼다. 참판공이 동지(同知)인 권수익(權受益)의 딸에게 장가들어 다시 예안현(禮安縣)으로 옮겼는데, 가정(嘉靖) 갑신년(1524, 중종19) 323일에 월천리(月川里) 집에서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 5세의 나이로 참판공의 품안에서 구술(口述)대학(大學)을 전수받았다. 12세에는 경학(經學)을 모두 배웠고 15세에 비로소 퇴계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이때부터 닥치는 대로 공부하여 보지 않은 책이 없었다. 몸가짐을 언제나 예를 바탕으로 하니, 퇴계 선생이 크게 될 인물로 여겼다.

병오년(1546, 명종1)에 모친의 상()을 당하고 임자년(1552)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계축년에 성균관에 들어갔다.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었다는 이유로 마지못해 과거 공부를 하였지만 제대로 되지를 않자, “우리 도가 여기에 있는데 하필 과거를 보랴.” 하고서 드디어 과거 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문(師門)에 전념하여 게을리하지 않고 더욱 부지런히 하여 세상에서 인정하는 큰 선비가 되었다. 병인년(1566)에 이조(吏曹)가 천거하여 공릉 참봉(恭陵參奉)으로 삼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무진년(1568)에 관천(館薦)으로 집현전 참봉을 제수하니 부임했다가 얼마 후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경오년(1570, 선조3)에 이 선생이 세상을 뜨자, 선생이 기년(朞年) 동안 소복(素服)을 입고 3년 동안 안방에 들어가지 않았으며, 잔치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임신년(1572)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계유년에 참판공의 상을 당하여 묘소 곁에다 여막을 짓고 기년 동안 죽을 먹으면서 소금은 먹어도 장은 먹지 않으니, 뼈만 남을 정도로 야위어 몸을 지탱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 뒤에 정부(政府)가 이조와 함께 의논하여 학행(學行)으로 알려진 자를 다섯 사람 천거하였는데, 선생이 가장 먼저였다. 을해년(1575)에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 공조 좌랑(工曹佐郞)을 초수(招授)하고, 병자년(1576)에 또다시 사지(司紙)를 제수하였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0월에 봉화 현감(奉化縣監)을 제수하니,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자, 선생이 비로소 부임하였다가 오래지 않아 그만두고 돌아왔다. 경진년(1580)에 공조 좌랑, 전라 도사(全羅都事), 경상 도사(慶尙都事), 의령 현감(宜寧縣監)에 제수되고, 신사년(1581)에 고령 현감(高靈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4월에 충청 도사(忠淸都事)에 제수되었으나 8월에 버리고 돌아왔다.

임오년(1582)에 신녕 현감(新寧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또한 나가지 않았다. 갑신년(1584)에 영덕 현령(盈德縣令)을 제수하였으나 도중에서 상소를 올려 첫머리에 부임하기 어렵다는 뜻을 진달하고, 이어서 권세가에 대한 적체된 옥사(獄事)와 원악(元惡)을 함부로 초출한 데 대한 심경 등을 간절하게 주달하였다. 또 조정이 바야흐로 북벌(北伐)을 논의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잘못된 계획으로 간주하고 근본을 견고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아뢰기를, “삼사(三司)의 관원이 말로 인하여 죄를 얻어 북쪽으로 귀양 간 자가 세 사람이나 되는데, 이것은 그들을 죽이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여, 말이 매우 강직하였다.

을유년(1585)에 공조좌랑 겸 교정청낭청(校正廳郞廳)에 제수되니 사은숙배한 뒤에 상소하여 면직되기를 빌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공조 정랑으로 옮긴 뒤에 정장(呈狀)하고 남쪽으로 돌아왔다.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에 두 차례 제수되고, 교정청 낭청에 전지(傳旨)를 내려 명소(命召)한 것이 네 차례였는데, 모두 병으로 사양하였다. 11월에 또다시 공조정랑 겸 낭청을 그전처럼 제수하니, 그제야 비로소 소명에 나아갔다. 병술년(1586) 2월에 소장을 올려 물러가기를 빌었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3월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상서원 판관(尙瑞院判官)과 금산 군수(錦山郡守)를 제수하고, 정해년(1587)에 단양 군수(丹陽郡守)와 장원서 장원(掌苑署掌苑)을 제수하고, 공조 정랑을 두 차례나 제수하였으나 모두 사은숙배를 하지 않았고, 겨울에 합천 군수(陜川郡守)를 제수하니, 비로소 부임하였다가 경인년(1590)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그때의 짐보따리가 간단하여 서책(書冊)4, 5짐 뿐이었다.

임진년(1592)에 제용감 첨정(濟用監僉正)을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여름 4월에 왜구(倭寇)가 갑자기 쳐들어와 닥치는 대로 진격하여 서울을 핍박하니, 양궁(兩宮)은 서쪽으로 가고 국사를 책임질 자가 없었다. 선생이 동료들과 함께 높은 언덕에 올라가 북쪽을 향하여 통곡을 하고 내려왔다. 당시에 조정이 일본(日本)과 강화(講和)를 하자, 선생이 선위사(宣慰使) 이덕형(李德馨)에게 보낸 답서에, “이여수(李汝受)가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같은 짓을 하였는가.” 하였는데, 여수는 이산해(李山海)의 자이고, 선위사는 그의 사위이다. 선생이 화의(和議)에 대하여 끝내 옳지 않게 여겼다. 그 이듬해에 거가(車駕)가 의주(義州)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이 바야흐로 길을 나서 임금님의 모습을 직접 우러러보려 하였으나 병 때문에 가지를 못하였다.

갑오년(1594)에 흡곡현(歙谷縣)에 제수하니, 선생이 전일의 계획을 이루기 위하여 억지로 길을 나섰는데 도성에 도착하자, 기한이 지났다는 이유로 체직되었다. 군자감 주부에 제수되었으나 소장을 올려 사직하였는데, 맨 첫머리에 자신이 영외(嶺外)에 있기 때문에 난리에 달려갈 수 없다는 것과 거가(車駕)가 서울로 돌아왔는데도 맞이하지 못하였다는 뜻을 진달하였다. 또 이르기를, “또 강화(講和)를 체결한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통분함을 가누지 못하였습니다. 왜적이 백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우리 백성들을 도륙시키고 우리 종묘사직을 망치고 우리의 능침(陵寢)을 훼손시키면서 우리나라 안에 떠나지 않고 가득 차 있는데 어찌 강화를 한다는 말입니까. 예전 사람은 일려(一旅)를 가지고도 중흥(中興)을 이룬 자가 있는데, 지금 우리나라가 비록 잔파(殘破)되었다고는 하나 저 일려로 중흥을 이룬 자에 비추어 보면 어찌 백 배나 되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컨대, 전하께서는 덕을 닦아 하늘을 감동시키고 인정(仁政)을 실시하여 백성을 위무하는 것으로써 오랑캐를 물리칠 수 있는 바탕으로 삼으소서.” 하였다. 상이 칭찬하는 비답을 내리고 머물면서 벼슬을 하도록 하였는데, 선생이 즉시 남쪽으로 돌아가니, 상이 가상하게 여기고 탄식하면서 승직시켜 주게 하였다.

10월에 특별히 봉정대부(奉正大夫) 장례원 정(掌隷院正)을 제수하였다. 전지(傳旨)에 이르기를, “지금 경연에서 주역(周易)을 진강(進講)하는데 의리가 정미(精微)하여 아는 자가 적다. 들으니, 그대는 임하(林下)에서 한가롭게 생활하면서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경문(經文)을 연구하였고 역학(易學)에 종사하여 공부한 것이 가장 많다고 하니 특별히 장악원 정에 제수하여 강석(講席)에 참여토록 하라.” 하였는데, 병으로 사양하였다. 을미년(1595) 봄에 또 재촉하여 부르는 전지가 있었으나 선생이 상소하여 면직되었다. 5월에 양양 부사(襄陽府使)를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으니 본도(本道)로 하여금 음식물을 지급하게 하였다. 또 장악원 정과 사섬시 정을 제수하였다.

기해년(1599)에 제용감 정(濟用監正)을 제수하였고, 신축년(1601)에는 사재감 정(司宰監正)을 제수하였다. 또 경서교정청 낭청(經書校正廳郞廳)으로 전지를 내려 불렀다. 임인년(1602)에 상의원 정과 예빈시 정을 제수하였다. 또 특지로 당상(堂上)에 승직되어 절충장군(折衝將軍) 의흥위 부호군(義興衛副護軍)에 제수되었다가 공조 참의로 옮겼다. 교정청 당상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 네 차례였으나, 모두 병을 이유로 나아가지 않았다. 갑진년(1604) 가을에 특별히 가선(嘉善)에 승품되고 용양위 상호군(龍驤尉上護軍)에 제수되었다가 이윽고 공조 참판으로 옮겼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으니, 당시에 선생이 병을 앓은 지가 이미 2개월이나 되었다.

병오년(1606, 선조39) 겨울 1029일 갑자에 정침(正寢)에서 별세하니, 향년 83세였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상이 매우 슬퍼하면서 예관을 보내 조전(弔奠)을 올리게 하였으니, 이는 특별한 은전(恩典)이었다. 반궁(泮宮)의 많은 선비들이 모여서 곡()을 할 때에 소복(素服)을 착용하였다. 영남 지역의 향교와 서원에서도 모두 전부(奠賻)를 실시하였다. 이듬해 1월 아무날에 부용산(芙蓉山) 남쪽 건좌손향(乾坐巽向)의 언덕에 장사를 하니, 선영을 따른 것이었다.

선생은 성품이 근엄하고 심후한 데다 실천력이 있고 자연스러워 꾸밈을 일삼지 않았으니, 대개 타고난 천품(天品)이 그러하였다. 게다가 어린 나이에 믿고 따를 스승이 있어서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이 모두 전례(典禮)에 맞았으며, 말을 하고 일을 행하는 것이 모두 스승을 따르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이는 선생의 사람됨에 있어서 그다지 수고하지 않고도 이루었다 하겠다. 참판공을 봉양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보살펴 드리는 것을 부지런히 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부모님의 뜻에 거슬리는 일이 없도록 섬겼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비록 맛있는 음식을 계속 올리지는 못하였지만 일찍이 의()가 아닌 것으로 남에게 요구한 적이 없었다. 평소에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서 의관(衣冠)을 정제한 다음 사당(祠堂)에 나아가서 재배례(再拜禮)를 행하고 서실로 돌아와서 책상을 마주하고 책을 보면서 침식을 잊는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하였다.

일찍이 글을 배우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소학(小學)은 모든 경서(經書)의 근본이 된다. 이 글을 확실하게 터득한다면, 성인(聖人)이 되기 위한 바탕이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대학(大學)의 요체는 단지 지()와 행()이라는 두 글자에 있다. 격물(格物), 치지(致知)는 지에 속하고,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은 행에 속하며,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는 그 행을 미루어 확대해 가는 것이다.” 하였다. 만일 자구(字句)에 의문나는 곳이 있으면 반드시 이 선생에게 찾아가 직접 여쭙고 혹은 조목별로 질문을 하여 반드시 확실하게 터득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일찍이 이 선생이 초록(抄錄)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중에서 후학들에게 더욱 절실한 것을 또다시 뽑아 한 책을 만들어서 보고 성찰할 수 있게 하였으며, 특히 심경(心經)을 좋아하여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체득하였다. 황명통기(皇明通記)를 읽다가 황돈(篁墩)이 시제(試題)를 팔아 넘긴 사건과 도일편(道一編)의 주장을 보고 비로소 그 사람 됨됨이와 학문을 의심하여 그것을 적어서 이 선생에게 여쭈었더니, 선생이 이를 계기로 심경 후론(心經後論)을 지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서로 도움을 준 것이 이와 같았다.

일찍이 설 문청공(薛文淸公)독서록(讀書錄)을 열람하고 중요한 어구(語句)에 권점을 찍어서 책상에다 두고 보았으며, 또 유원성(劉元城)이 언급한, “망녕스런 말을 하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라는 말을 지침으로 삼았다. 항상 작은 책자를 두고 전현(前賢)들이 언급한 몸에 절실하고 교훈성이 짙은 말을 기록하여 곤지잡록(困知雜錄)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언제나 자신을 진작시키고 성찰하여 혹시라도 혼망(昏茫)하거나 방도(放倒)한 지경에 떨어질까 염려한 것이 대부분 이러하였다.

책이라면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또 구입하지 않은 책이 없었다. 밤이면 반드시 촛불을 밝히고 향불을 피운 다음 근사록(近思錄),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여러 성리서(性理書)들을 읽었고 간혹 도연명집(陶淵明集), 격양집(擊壤集), 염락풍아(溓洛風雅)등의 시()를 외우곤 하였는데, 음성이 온화하고 장중하면서도 또렷하였다. 난리가 나서 피난 갈 즈음에도 오히려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을 잊지 않고 이르기를, “육수부(陸秀夫)는 배 안에서도 오히려 강학(講學)하였으니, 아침에 도리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고 하면서 강독을 그만두지 않았다.

사환(仕宦)에는 본래 뜻이 없었으므로 해마다 제수하고 달마다 옮긴 것이 40여 관직이었지만, 나아가서 직무를 수행한 것은 몇 번 되지 않았다. 혹 나아갔더라도 역시 오랫동안 머물지 않았다. 매번 호 문정공(胡文定公)이 언급한, “춥고 따뜻한 것과 굶주리고 배부른 것은 자신이 짐작할 줄 알아야 한다.”라는 말을 가지고 자신을 경계하였다. 그러므로 나아가는 문제는 어렵게 여기고 물러오는 것은 쉽게 여긴 자취가 광명정대(光明正大)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선생이 산림에 있을 때는 당시의 세상일을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혹시 와서 말을 하면, “산림(山林)에 묻혀 살면 마땅히 산림에 관한 말이나 해야지 시사(時事)에 무엇 하러 참여한다는 말인가.” 하였으니, 참으로 그 침묵이 충분히 몸을 용납할 수 있는 분이라 하겠다. 그러나 국가에 큰일이 발생하면 일찍이 깊이 걱정하고 심하게 지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서애(西崖) 유 상국(柳相國)과는 동문(同門)의 의의가 있었는데 서애가 영상(領相)으로 있으면서 강화(講和)에 관한 논의를 주장한다는 소문을 듣고 서신을 보내 이르기를, “상국이 평소에 성현(聖賢)의 글을 읽고서 기껏해야 얻은 것이 단지 강화오국(講和誤國)’이란 네 글자인가?” 하여 말이 매우 준절하였으니, 선생의 지업(志業)을 여기에서 볼 수 있겠다.

선생은 안동 권씨 참봉 개세(盖世)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권씨는 태사(太師) ()의 후손이다. 13녀를 낳았는데, 귀명(龜明)은 성인(成人)이 되기 전에 일찍 죽었다. 장녀는 김유길(金裕吉)에게 시집가고, 2녀는 권병(權昞)에게 시집가고, 3녀는 김광찬(金光纘)에게 시집갔다. 부실(副室)에서 21녀를 낳았는데, 장남 수명(壽明)은 진사이며, 2남 석명(錫明)은 문과에 급제하여 주부(主簿)를 지냈다. 김유길은 41녀를 낳았는데 지선(之善), 취선(就善), 종선(從善), 낙선(樂善)이며, 딸은 권익창(權益昌)에게 시집갔다. 권병은 31녀를 낳았는데 상건(尙健), 상의(尙義), 상준(尙寯)이며, 딸은 권표()에게 시집갔다. 김광찬은 2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확()과 언()으로 확은 생원이며, 딸은 참봉 정시형(鄭時亨)에게 시집갔다. 수명은 4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균(), (), (), ()이며, 딸은 황중경(黃中敬)에게 시집갔다.

내가 약관의 나이에 선생을 찾아가서 뵈온 적이 있었다. 그 후덕하고 단정한 모습을 보고 흠모하고 감복하는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지만 어찌 선생의 심오한 경지를 엿볼 수야 있었겠는가. 이번에 선생의 표손(表孫)인 김확과 김언이 나에게 찾아와서 묘소에 세울 비명(碑銘)을 부탁하였다. 나이도 많고 글솜씨도 없는데 어찌 만 분의 일이나마 유광(幽光)을 발양시킬 수 있겠는가. 그러나 김군의 청을 의리상 사양만 할 수 없는 바가 있어 삼가 장문(狀文)에 의거하여 개괄적인 것을 가려 뽑고 이어서 말하기를, “선생의 아름다운 자질은 퇴계(退溪)를 만나서 이루었고, 퇴계의 도학(道學)은 선생을 만나서 빛이 났다. 선생이 아니었더라면 어찌 퇴계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겠으며, 퇴계가 아니었더라면 어찌 선생의 발명(發明)을 보장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선생의 언행(言行)과 사업(事業)에 대하여 대부분 생략하고 자세히 기록하지 않은 것은, 뒷날 선생을 알려고 하는 자는 먼저 퇴계를 보고서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명()을 붙였다.

 

우뚝한 저 문순공이 卓彼文純

우리 동방의 주자임을 我東考亭

보고서 알았던 분은 見而知之

오직 우리 선생이셨네 惟我先生

선생의 도를 先生之道

스승에게 질정을 받았으니 繩墨於師

선생의 학문은 先生之學

그 연원이 여기에 있도다 淵源在玆

정자 문인에 양귀산이요 程庭之楊

주자 문하에 장요부라 朱門之張

전함도 있고 받음도 있는데 有傳有受

그 빛이 드러나지 않으랴 不顯其光

도산의 아래에 陶山之下

월천이 굽이쳐 흐르니 月川濊濊

산이 만일 썩지 않는다면 山如不朽

냇물도 마르지 않으리라 川亦不渴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횡성 조씨(橫城趙氏)는 남한(南韓)에 총 1,106가구, 4,46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처 <한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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