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趙(횡성조씨)
본관(本貫): 횡성(橫城)
시조(始祖): 조익(趙翌)
유래(由來):
횡성 조씨(橫城趙氏)의 시조(始祖) 조익(趙翌)은 고려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첨(瞻)의 아들로 958년(고려 광종 9)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횡성군(橫城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횡성(橫城)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조승린(趙承藺)
익(翌)의 아들 승린(承藺)이 문과에 급제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조윤익(趙潤益)
익의 손자(孫子) 윤익(潤益)은 집현전 대학사(集賢殿大學士)를 역임했다.
조주조(趙周祚)
익의 증손(曾孫) 주조(周祚)는 중서승(中書丞)에 이르렀다.
조영인(趙永仁)
1133(인종 11) ∼ 1202(신종 5).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횡성(橫城). 상서 시언(時彦)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비범해 재상의 기량이 있었고, 박학해 글을 잘하였다. 의종 때 과거에 급제, 전주서기(全州書記)가 되어 정사에 명성이 있었다.
명종이 즉위하자 태자 ( 太子 )의 보도(輔導)를 맡았고, 1174년(명종 4)에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郎)으로 하정사 ( 賀正使 )가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다.
뒤에 승선으로서 잘못을 바로잡은 일이 많아 주위의 칭찬을 받았다. 1185년에 우승선으로 국자감시 ( 國子監試 )의 시원(試員)이 되어 시 · 부(詩賦)로 최문목(崔文牧) 등, 십운시(拾韻詩)로 정광우(丁光祐) 등과 명경(明經) 5인을 뽑았다.
1190년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었고, 이듬해 참지정사 ( 參知政事 ) · 정당문학 ( 政堂文學 ) · 한림학사승지가 되었다. 1192년에 동지공거 ( 同知貢擧 )가 되어 진사를 뽑아 손희작(孫希綽) 등 29인을 급제시켰다.
1194년에 수태위상주국(守太尉上柱國), 1196년에 권판이부사(權判吏部事)가 되었다. 이듬해 판이부사(判吏部事)가 되었고, 이어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문하시랑평장사 감수국사(開府儀同三司守太師門下侍郎平章事監修國史)가 되었다.
1198년(신종 1)에 금나라 사신이 와서 전왕(前王 : 명종)이 양위한 사유를 묻고 직접 만나보려 하였다. 이에 “ 전왕은 남주(南州)에서 요양 중이나 노정이 30일 걸리는 거리로 만나보려면 2 ∼ 3개월이나 머물러야 된다. ” 라고 하여 금나라 사신을 되돌려보내 최충헌 ( 崔忠獻 )의 왕의 폐립으로 야기된 금나라와의 외교문제를 무난히 해결하였다.
1204년 문하시중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횡성의 세덕사(世德祠)에 향사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조충(趙沖)
영인의 아들 충(沖)은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명종(明宗) 때 문과에 급제, 대사성(大司成)·한림학사(翰林學士)로 동지공거(同志貢擧)를 겸임하고 서북면원수(西北面元帥)가 되어 수차에 걸친 거란군(渠丹軍)의 침입을 물리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조변
충렬왕(忠烈王) 때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오른 변은 충(沖)의 손자이며, 평장사(平章事) 계순(季珣)의 아들로 동생 해(咳)와 함께 가문을 빛냈다.
조무(趙茂)
조선조(朝鮮朝)에 와서 지근(支瑾)의 아들 무(茂)가 벼슬을 지내고 공(功)이 있어 횡성군(橫城君)에 봉해졌다.
조인(趙隣)
후손 인(隣)은 부호군을 지냈다.
조목(趙穆)
1524(중종 19)∼1606(선조39).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횡성(橫城). 자는 사경(士敬), 호는 월천(月川). 아버지는 참판 대춘(大春)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수익(受益)의 딸이다.
3세에 글을 읽기 시작하였으며, 12세에 사서삼경을 다 읽었다. 15세 때 이황 ( 李滉 )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학업에 더욱 정진하였다. 23세에 어머니 상을 당했는데, 효심이 지극해 이황은 대성할 그릇이 약관으로 몸을 상하지나 않을까 염려할 정도였다.
1552년(명종 7)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대과 ( 大科 )는 포기하고 독선일신(獨善一身)에만 매진하였다. 1566년 공릉참봉에 봉직되었으나 학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이황을 가까이 모시면서 경전 연구에 주력하였다.
그 뒤 성균관수천(成均館首薦)에 피선되고,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에 제수되었으며, 1572년(선조 5) 이후 동몽교관·종부시주부·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공조좌랑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76년 봉화현감에 제수되자 사직소를 냈으나 허락되지 않아 봉직하면서 향교를 중수하였다. 1580년 이후 전라도도사·경상도도사·충청도도사·형조좌랑·신녕현감·영덕현령·전생서주부·공조정랑·상서원판관 및 금산·단양·합천 등의 군수, 장원서장원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94년 군자감주부로 잠시 있으면서 일본과의 강화를 극력 반대하였다. 그 뒤 장악원정·사재감정·예빈시정·공조참의·공조참판 등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재덕과 노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내고 사퇴하였다.
그는 이황과 동향인 예안에서 출생, 성장하면서 일찍 이황의 문하생이 된 후 일생 동안 가장 가까이에서 스승을 모신 팔고제(八高弟)의 한 사람이다.
이황이 죽은 뒤 문집의 편간, 사원(祠院)의 건립 및 봉안 등에 있어서 항상 성의를 다했고, 마침내 도산서원 상덕사(尙德祠)에 유일한 배향자가 되었다.
그는 신민 ( 新民 )보다 명덕(明德)을 중시해 벼슬은 사양하고 현사사(玄沙寺)· 광흥사 ( 廣興寺 )에 들어가 독서를 즐겼다. 이황을 수행하며 명산대천을 주유하면서 심신을 수양했고, 경학을 연찬하되 이기설보다는 훈고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심학 ( 心學 )에 심취해 ≪심경 心經≫에 관한 논설이 많다.
또, 외직에 부임하면 향교를 중수하고 서당을 신설하는 등 고을의 교육 진흥에 이바지하였다. 귀향할 때마다 역동서원 ( 易東書院 )·도산서원을 참배, 현인의 넋을 기리고 자신의 몸가짐을 더욱 돈독히 닦아 나갔다.
그의 일생의 주된 업적은 이황에 대한 연구와 소개 그리고 스승으로 받들어 모심에 있다 하겠다. 그의 문집에 이황에 관계된 글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평생을 청빈하게 지내면서 온후, 겸양, 독실한 실천을 지향하였다. 제자로는 김중청 ( 金中淸 )· 이광윤 ( 李光胤 )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월천집≫과 ≪곤지잡록 困知雜錄≫이 있다.
조성립(趙誠立)
1568(선조 1) ∼ 1627(인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횡성(橫城). 자는 여명(汝明), 호는 졸옹(拙翁). 평양부서윤 준(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제용감부정 응세(應世)이고, 아버지는 장악원첨정 인( 虜 )이며, 어머니는 김세휘(金世輝)의 딸이다.
1599년(선조 32)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박사 · 예조좌랑 · 대사간 등을 역임했다. 1609년(선조 37)에 제주도에 흉년이 들자 구황어사로 제수되어 현지의 실상을 자세히 살펴본 후 방물 ( 方物 )의 경감을 요청하는 장계를 올리고, 이어 국둔마(國屯馬)의 점열과 군관의 폐단에 관해 보고했다.
왕이 윤허하여 점마(點馬)의 담당은 명망이 있는 문신(文臣)으로 가려서 보내되 겸하여 민폐와 수령이 잘하는 지의 여부를 염탐하도록 하였다.
그는 사람됨이 강직하여 광해군 때에 초야에 물러가 살면서 끼니를 잇지 못하였으나 지조를 더욱 굳게 가졌다고 한다. 집안에서는 효도와 우애가 있었고, 자기 자신을 단속함에는 청고(淸苦)하였다고 하며, 그가 죽자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조식(趙湜)
1648(인조 26) ∼ 1714(숙종 4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횡성(橫城). 자는 지정(持正). 공립(恭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흠( 槐 )이고, 아버지는 이곤(以坤)이며, 어머니는 남두화(南斗華)의 딸이다.
1686년(숙종 12) 춘당대문과에 장원하여 바로 정6품인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으나, 고묘론(告廟論)에 대한 상소 주도로 대사간 정재희 ( 鄭載禧 )의 탄핵을 받아 사판(仕版 : 벼슬아치의 명단)에서 삭제당하였다. 그 뒤 1689년 지평 ( 持平 )에 제수되었다.
기사환국 ( 己巳換局 )이 일어나자 이광한 ( 李光漢 ) · 김익훈 ( 金益勳 ) 등 노론계의 훈적(勳籍 : 공훈의 내용을 기록한 명단) 삭제를 주창했고, 이어 정언 ( 正言 )에 제수되어 노론의 영수 송시열 ( 宋時烈 )을 탄핵하였으며, 남구만 ( 南九萬 )을 중도부처(中道付處)시키는 데 앞장섰다.
이어 차사(箚辭)가 과격하여 귀양가게 된 이상진 ( 李尙眞 )을 구하기 위한 소(疏)로 체직(遞職)된 뒤 복직되었다가 지평으로 제수되었고, 1690년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어 부교리 ( 副校理 )에 제수된 뒤 다시 사헌부지평으로 옮겼고, 이듬해에는 부교리로 재직 중 전라도를 비밀리에 염찰(廉察)하고 돌아와 부수찬 ( 副修撰 )에 제수되었다. 1692년 공조참의를 거쳐 승지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 황해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
1694년 수원부사(水原府使) 재직 중 갑술옥사 ( 甲戌獄事 )가 있자 장령 ( 掌令 ) 유집일 ( 兪集一 ) 등의 탄핵을 받았고, 이어 대관 ( 臺官 )으로 재직시 노론 대신 송시열(宋時烈) · 민정중 ( 閔鼎重 )의 안률(按律 : 죄안을 고찰함)을 먼저 발의한 것이 문제가 되어 귀양갔다가 1697년 석방되었다. 1702년 65세의 노구로 종성부사(鍾城府使)를 그만둔 뒤 67세의 일기로 죽었다.
조석동(趙錫東)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한 석동(錫東)은 가문을 빛냈다.
趙穆(조목) 墓碣銘(묘갈명)
趙穆(조목) 中宗 19年 甲申(1524)~ 宣祖 39年 丙午(1606) 83.
字 士敬. 號 月川. 橫城人
선대 때 예천 급곡에 살다가 아버지 大春(대춘)이 예안거주 권수겸의 사위가 되어 지금의 도산면 월애에 정착하게 되었다. 선생은 태어나면서 부터 자질이 뛰어 났다.
15세에 퇴계 문인에 입문하고 29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공조참팡에 이르렀으나 관직에 나가기를 좋아하지 안하였고, 나갔다 해도 곧 사임하고 오래 머물지 않았다. 퇴계선생이 돌아가시니 3년 동안 상례를 받들었고 선생의 언행록을 짓고 연보를 기초하였다. 83세에 돌아가시니 월애동 후록 부용산 아래 선고 묘하에 안장하였다. 선생의 묘 앞에는 短碑(단비)가 桐溪(동계) 鄭蘊(정온) 찬 퇴계 선생 집자로 세웠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작은 글자는 알아 볼 수가 없어 정묘년(1987)에 새 비로 다시 세웠다. 앞면의 큰 글자는 「嘉善大夫 工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 月川趙穆先生之墓(가선대부 공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월천조목선생지묘)」라 새겨져 있다.
월천 선생은 퇴계선생의 많은 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도산서원에 배향되었으며 관직보다 학문에 더 뜻을 두었으며 因知雜錄(인지잡록) 등 저서가 있다.
【神道碑銘】
嘉善大夫工曹參判月川趙先生神道碑銘幷序
退溪李先生。以道學唱東南。一時魁人碩士之來摳衣者甚衆。而先生其領袖矣。先生諱穆。字士敬。姓趙氏。其先橫城人。有諱翌。仕高麗光宗朝。官至翰林學士。自是名公巨卿。史不絶書。至先生蓋二十餘世。曾祖諱胤孫。司醴署直長。贈通訓大夫, 通禮院左通禮。祖諱瓊。贈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考諱大春。贈嘉善大夫, 吏曹參判同知義禁府事。三世追恩。以先生貴也。趙氏初移于聞慶縣。中移于醴泉郡。參判公娶同知權受益。女又移于禮安縣。以嘉靖甲申三月二十三日。生先生于月川里第。先生生有異質。年五歲。在參判公懷中。口受大學。十二。盡學經書。十五。始就退溪門下受學。自是縱學無不觀。律身動以禮。退溪李先生深器重之。丙午。丁內艱。壬子。中生員試。癸丑。遊泮宮。以家貧親老。黽勉爲擧子業。不得則曰。吾道在此。何必科爲。遂廢擧。專意師門。不懈益勤。爲世大儒。丙寅。吏曹薦爲恭陵參奉。不赴。戊辰。以館薦除集慶殿參奉。赴任未幾。辭還。庚午。李先生易簣。先生朞行素。三年不入內。不與宴。壬申。除童蒙敎官。不起。癸酉。丁參判公憂。廬于墓。朞而啜粥。鹽而不醬。骨立幾不能支。其後政府與吏曹同議。以學行著聞者五人薦聞。先生其首也。乙亥。超授宗簿寺主簿, 造紙署司紙, 工曹佐郞。丙子。又除司紙。皆不就。十月。除奉化縣監。陳辭疏。不允。先生始就任。未久。以災傷罷歸。庚辰。除工曹佐郞, 全羅, 慶尙都事, 宜寧縣監。辛巳。除高靈縣監。皆不應。四月。除忠淸都事。八月。棄歸。壬午。除刑曹佐郞。俄授工曹。癸未。除新寧縣監。皆不就。甲申。拜盈德縣令。在道陳疏。首陳難仕之意。繼以豪强積滯之獄。元惡濫抄之寃。剴切陳奏。又以朝廷方議北征爲非計。深以固本爲得。又曰。三司從官。以言獲罪。投諸有北者三人。與殺之無異云。言甚讜直。乙酉。拜工曹佐郞兼校正廳郞廳。肅恩後陳疏乞免。不允。遷工曹正郞。呈狀南歸。除典牲主簿者再。以校正廳郞廳。有旨趣召者四。皆病辭。十一月。又除工曹正郞兼郞廳如前。始趣召。丙戌二月。拜章乞退。未蒙允。三月。辭還。除尙瑞判官, 錦山郡守。丁亥。除丹陽郡守, 掌苑署掌苑。兩除工曹正郞。皆不謝。冬。除陜川郡守。始赴任。時朝廷與日本講和。先生答李宣慰德馨之書曰。李汝受居相位。亦作此等事耶。汝受。山海之字。而宣慰其壻也。庚寅辭歸。行李蕭然。書冊三四擔而已。壬辰。除濟用僉正。不赴。夏四月。倭寇捽至。所向無前。逼迫京都。兩宮西幸。國事無可爲者。先生與同執登高望北。慟哭而下。越明年。聞車駕還自龍灣。先生方圖起程。仰覩輦轂之光。而以病不果行。甲午。除歙谷縣令。先生欲遂前日計。强起作行。旣入城。以過限遞。除軍資監主簿。陳章辭遞。首陳身伏嶺外。未得赴難車駕還都。未克迎候之意。又曰。講和之說。尤不勝痛憤。豈有率百萬之師。屠戮我生靈。蕩覆我宗社。隳毁我陵寢。彌漫竟上不去。而謂之講和哉。古人有以一旅一成中興者。今我國家雖已殘破。視彼一旅一成。豈不百倍乎。伏願殿下修德以格天。施仁以撫民。以爲攘夷之本。上優答。使留仕。先生卽南歸。上嘉歎之。十月。特除奉正大夫掌樂院正。有旨曰。目今筵中進講周易。義理精微。知者蓋寡。聞爾間居林下。白首窮經。從事易學。用工最多云。特除掌樂正。俾參講席。詞旨勤懇。而先生病不能赴。乙未春。又召。陳疏辭免。五月。除襄陽府使。不赴。令本道賜食物。又除掌樂, 司贍正。己亥。除濟用正。辛丑。除司宰正。又以經書校正廳郞廳。有旨趣召。壬寅。除尙衣禮賓正。又以特旨陞堂上。拜折衝將軍。義興衛副護軍。俄遷工曹參議。以校正廳堂上。被召者四。皆以病不行。甲辰秋。特陞嘉善。拜龍驤衛上護軍。遷工曹參判。皆不克赴謝。時先生遘疾已二朔。丙午冬十月二十九日。考終于寢。享年八十有三。訃聞。上震悼。遣禮官致弔奠。蓋殊典也。泮中多士。會哭用素。嶺南校院。皆行奠賻。明年正月某日。葬于芙蓉山南乾坐巽向之原。從先兆也。先生性謹嚴深厚。踐履端實。任眞天然。不事矯飾。蓋其得於天者如是。而早歲又得依歸。耳濡目染。皆在典禮之內。發言行事。莫不惟師之視則。先生之於爲人。可謂不勞而成矣。奉養參判公。定省惟謹。色養無方。家甚貧。雖甘旨不繼。而未嘗以非義干人。平居。未明而起。整冠襟。詣祠堂行再拜禮。退坐書室。對案看書。至忘寢食。常謂學者曰。小學。乃諸經之機括。苟能通透是書。作聖根基在此矣。又曰。大學。只是知行二字爾。以格致屬之知。誠正修屬之行。齊治平。爲推行之理。如有一字一句有疑處。必就李先生面稟。或條列以問。必貫通後已。嘗就李先生所抄錄朱子書節要中。又抄其尤切於後學者爲一冊。以備觀省焉。尤愛心經。口誦而心體之。及見皇明通記。見篁墩賣題之事道一編之說。而始疑其爲人爲學。乃錄稟於李先生。先生於是作心經後論。師生之間。互相補益如此。常覽薛文淸讀書錄。手圈其要語。置諸几案。又取劉元城自不妄語始之語。常自櫽括。而又置小冊子。書前賢切已語。名曰困知雜錄。其於心身上。未嘗不提撕省察。恐其或墮於昏茫放倒之域者多此類。於書無不讀。無不購。夜必明燭炷香。讀近思錄, 朱子大全, 性理諸書。或誦淵明擊瀼集, 濂洛風雅等詩。聲音和壯。了了可聽。至於亂離奔避之際。猶不忘敎誨曰。陸秀夫在舟中猶講學。朝聞道夕死可矣。講讀不輟。其於仕宦。本無意。務欲晦藏。而名益彰。年除月遷。至於四十餘官。而就職者無幾。或就之而又不久留。每擧胡文定寒溫飢飽自知斟酌之語以自戒。故其難進易退之迹。光明正大。無可疑者。其在山林。未嘗談當世之事。人或來言則曰。在山林。當作山林語。時事何與焉。眞所謂其默足以容者也。然國有大事。則亦未嘗不深憂而痛斥之。與西厓柳相國成龍。有同門之義。聞西厓在領台主和議。乃抵書曰。相國平生讀聖賢書。所得只此講和誤國四字耶。詞甚峻截。先生之志業。於此可見矣。先生娶安東權氏參奉蓋世之女。太師幸之後也。生一子三女。曰龜朋。未成而夭。女長適金裕吉。次適權昞。次適金光纉。副室有二子一女。長曰壽朋。進士。次曰錫朋。登文科爲主簿。女適卞綬。裕吉有四子一女。之善, 就善, 從善, 樂善。女適權益昌。昞三子一女。子曰尙健, 尙義, 尙寯。女曰權瑮。光纉有二子一女。確, 䂴。確生員。女適參奉鄭時亨。壽朋四子一女。昀, 㬈, 㬇, 晠。女適黃中敬。蘊年在弱冠。嘗一拜於床下矣。觀其厚德端儀。已不勝其歆服。而何能窺闖其閫奧哉。今也先生之表孫金確金䂴。誤以其隧道之銘。託於蘊。蘊年老且無文。何能發幽光之萬一。然金君之請。義有所不可辭者。謹依狀文。撮其梗槪而爲之說曰。先生之美質。得退溪而有成。退溪之道學。得先生而有光。非先生。何以受退溪之磨琢。非溪。何以保先生之發明也。是以余於先生之言行事業。多略而不詳者。欲使後之觀先生者。先觀退溪而得之也。系之以銘曰。
卓彼文純。我東考亭。見而知之。惟我先生。先生之道。繩墨於師。先生之學。淵源在玆。程庭之楊。朱門之張。有傳有受。不顯其光。陶山之下。月川濊濊。山如不朽。川亦不渴。嘉義大夫。吏曹參判兼同知經筵, 春秋館事, 義禁府事八溪鄭蘊
<해>
【신도비명】
가선대부공조참판 월천조선생신도비명 병서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이 도학(道學)으로 동남 지역에서 창도할 때에 당시의 괴인(魁人)과 석사(碩士) 중에 추종하는 자가 매우 많았는데, 선생이 그중에서 영수(領袖)였다. 선생의 휘는 목(穆), 자는 사경(士敬), 성(姓)은 조씨(趙氏)인데, 그의 선조는 횡성인(橫城人)이다. 휘 익(翌)은 고려 광종조(光宗朝)에 벼슬하여 관직이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다. 그 뒤부터 명공(名公)과 거경(巨卿)이 역사서(歷史書)에 끊이지 않고 등장하여 선생에 이르기까지 대개 20여 세(世)나 된다. 증조(曾祖) 휘 윤손(胤孫)은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에 증직되었고, 조(祖) 휘 경(瓊)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경연참찬관(兼經筵參贊官)에 증직되었고, 고(考) 휘 대춘(大椿)은 가선대부 이조 참판 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는데, 3세를 추은(推恩)한 것은 선생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조씨가 처음에는 문경현(聞慶縣)으로 옮겼다가 나중에는 예천군(醴泉郡)으로 옮겼다. 참판공이 동지(同知)인 권수익(權受益)의 딸에게 장가들어 다시 예안현(禮安縣)으로 옮겼는데, 가정(嘉靖) 갑신년(1524, 중종19) 3월 23일에 월천리(月川里) 집에서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 5세의 나이로 참판공의 품안에서 구술(口述)로 《대학(大學)》을 전수받았다. 12세에는 경학(經學)을 모두 배웠고 15세에 비로소 퇴계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이때부터 닥치는 대로 공부하여 보지 않은 책이 없었다. 몸가짐을 언제나 예를 바탕으로 하니, 퇴계 선생이 크게 될 인물로 여겼다.
병오년(1546, 명종1)에 모친의 상(喪)을 당하고 임자년(1552)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계축년에 성균관에 들어갔다.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었다는 이유로 마지못해 과거 공부를 하였지만 제대로 되지를 않자, “우리 도가 여기에 있는데 하필 과거를 보랴.” 하고서 드디어 과거 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문(師門)에 전념하여 게을리하지 않고 더욱 부지런히 하여 세상에서 인정하는 큰 선비가 되었다. 병인년(1566)에 이조(吏曹)가 천거하여 공릉 참봉(恭陵參奉)으로 삼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무진년(1568)에 관천(館薦)으로 집현전 참봉을 제수하니 부임했다가 얼마 후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경오년(1570, 선조3)에 이 선생이 세상을 뜨자, 선생이 기년(朞年) 동안 소복(素服)을 입고 3년 동안 안방에 들어가지 않았으며, 잔치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임신년(1572)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계유년에 참판공의 상을 당하여 묘소 곁에다 여막을 짓고 기년 동안 죽을 먹으면서 소금은 먹어도 장은 먹지 않으니, 뼈만 남을 정도로 야위어 몸을 지탱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 뒤에 정부(政府)가 이조와 함께 의논하여 학행(學行)으로 알려진 자를 다섯 사람 천거하였는데, 선생이 가장 먼저였다. 을해년(1575)에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 공조 좌랑(工曹佐郞)을 초수(招授)하고, 병자년(1576)에 또다시 사지(司紙)를 제수하였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0월에 봉화 현감(奉化縣監)을 제수하니,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자, 선생이 비로소 부임하였다가 오래지 않아 그만두고 돌아왔다. 경진년(1580)에 공조 좌랑, 전라 도사(全羅都事), 경상 도사(慶尙都事), 의령 현감(宜寧縣監)에 제수되고, 신사년(1581)에 고령 현감(高靈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4월에 충청 도사(忠淸都事)에 제수되었으나 8월에 버리고 돌아왔다.
임오년(1582)에 신녕 현감(新寧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또한 나가지 않았다. 갑신년(1584)에 영덕 현령(盈德縣令)을 제수하였으나 도중에서 상소를 올려 첫머리에 부임하기 어렵다는 뜻을 진달하고, 이어서 권세가에 대한 적체된 옥사(獄事)와 원악(元惡)을 함부로 초출한 데 대한 심경 등을 간절하게 주달하였다. 또 조정이 바야흐로 북벌(北伐)을 논의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잘못된 계획으로 간주하고 근본을 견고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아뢰기를, “삼사(三司)의 관원이 말로 인하여 죄를 얻어 북쪽으로 귀양 간 자가 세 사람이나 되는데, 이것은 그들을 죽이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여, 말이 매우 강직하였다.
을유년(1585)에 공조좌랑 겸 교정청낭청(校正廳郞廳)에 제수되니 사은숙배한 뒤에 상소하여 면직되기를 빌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공조 정랑으로 옮긴 뒤에 정장(呈狀)하고 남쪽으로 돌아왔다.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에 두 차례 제수되고, 교정청 낭청에 전지(傳旨)를 내려 명소(命召)한 것이 네 차례였는데, 모두 병으로 사양하였다. 11월에 또다시 공조정랑 겸 낭청을 그전처럼 제수하니, 그제야 비로소 소명에 나아갔다. 병술년(1586) 2월에 소장을 올려 물러가기를 빌었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3월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상서원 판관(尙瑞院判官)과 금산 군수(錦山郡守)를 제수하고, 정해년(1587)에 단양 군수(丹陽郡守)와 장원서 장원(掌苑署掌苑)을 제수하고, 공조 정랑을 두 차례나 제수하였으나 모두 사은숙배를 하지 않았고, 겨울에 합천 군수(陜川郡守)를 제수하니, 비로소 부임하였다가 경인년(1590)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그때의 짐보따리가 간단하여 서책(書冊)만 4, 5짐 뿐이었다.
임진년(1592)에 제용감 첨정(濟用監僉正)을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여름 4월에 왜구(倭寇)가 갑자기 쳐들어와 닥치는 대로 진격하여 서울을 핍박하니, 양궁(兩宮)은 서쪽으로 가고 국사를 책임질 자가 없었다. 선생이 동료들과 함께 높은 언덕에 올라가 북쪽을 향하여 통곡을 하고 내려왔다. 당시에 조정이 일본(日本)과 강화(講和)를 하자, 선생이 선위사(宣慰使) 이덕형(李德馨)에게 보낸 답서에, “이여수(李汝受)가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같은 짓을 하였는가.” 하였는데, 여수는 이산해(李山海)의 자이고, 선위사는 그의 사위이다. 선생이 화의(和議)에 대하여 끝내 옳지 않게 여겼다. 그 이듬해에 거가(車駕)가 의주(義州)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이 바야흐로 길을 나서 임금님의 모습을 직접 우러러보려 하였으나 병 때문에 가지를 못하였다.
갑오년(1594)에 흡곡현(歙谷縣)에 제수하니, 선생이 전일의 계획을 이루기 위하여 억지로 길을 나섰는데 도성에 도착하자, 기한이 지났다는 이유로 체직되었다. 군자감 주부에 제수되었으나 소장을 올려 사직하였는데, 맨 첫머리에 자신이 영외(嶺外)에 있기 때문에 난리에 달려갈 수 없다는 것과 거가(車駕)가 서울로 돌아왔는데도 맞이하지 못하였다는 뜻을 진달하였다. 또 이르기를, “또 강화(講和)를 체결한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통분함을 가누지 못하였습니다. 왜적이 백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우리 백성들을 도륙시키고 우리 종묘사직을 망치고 우리의 능침(陵寢)을 훼손시키면서 우리나라 안에 떠나지 않고 가득 차 있는데 어찌 강화를 한다는 말입니까. 예전 사람은 일려(一旅)를 가지고도 중흥(中興)을 이룬 자가 있는데, 지금 우리나라가 비록 잔파(殘破)되었다고는 하나 저 일려로 중흥을 이룬 자에 비추어 보면 어찌 백 배나 되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컨대, 전하께서는 덕을 닦아 하늘을 감동시키고 인정(仁政)을 실시하여 백성을 위무하는 것으로써 오랑캐를 물리칠 수 있는 바탕으로 삼으소서.” 하였다. 상이 칭찬하는 비답을 내리고 머물면서 벼슬을 하도록 하였는데, 선생이 즉시 남쪽으로 돌아가니, 상이 가상하게 여기고 탄식하면서 승직시켜 주게 하였다.
10월에 특별히 봉정대부(奉正大夫) 장례원 정(掌隷院正)을 제수하였다. 전지(傳旨)에 이르기를, “지금 경연에서 《주역(周易)》을 진강(進講)하는데 의리가 정미(精微)하여 아는 자가 적다. 들으니, 그대는 임하(林下)에서 한가롭게 생활하면서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경문(經文)을 연구하였고 역학(易學)에 종사하여 공부한 것이 가장 많다고 하니 특별히 장악원 정에 제수하여 강석(講席)에 참여토록 하라.” 하였는데, 병으로 사양하였다. 을미년(1595) 봄에 또 재촉하여 부르는 전지가 있었으나 선생이 상소하여 면직되었다. 5월에 양양 부사(襄陽府使)를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으니 본도(本道)로 하여금 음식물을 지급하게 하였다. 또 장악원 정과 사섬시 정을 제수하였다.
기해년(1599)에 제용감 정(濟用監正)을 제수하였고, 신축년(1601)에는 사재감 정(司宰監正)을 제수하였다. 또 경서교정청 낭청(經書校正廳郞廳)으로 전지를 내려 불렀다. 임인년(1602)에 상의원 정과 예빈시 정을 제수하였다. 또 특지로 당상(堂上)에 승직되어 절충장군(折衝將軍) 의흥위 부호군(義興衛副護軍)에 제수되었다가 공조 참의로 옮겼다. 교정청 당상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 네 차례였으나, 모두 병을 이유로 나아가지 않았다. 갑진년(1604) 가을에 특별히 가선(嘉善)에 승품되고 용양위 상호군(龍驤尉上護軍)에 제수되었다가 이윽고 공조 참판으로 옮겼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으니, 당시에 선생이 병을 앓은 지가 이미 2개월이나 되었다.
병오년(1606, 선조39) 겨울 10월 29일 갑자에 정침(正寢)에서 별세하니, 향년 83세였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상이 매우 슬퍼하면서 예관을 보내 조전(弔奠)을 올리게 하였으니, 이는 특별한 은전(恩典)이었다. 반궁(泮宮)의 많은 선비들이 모여서 곡(哭)을 할 때에 소복(素服)을 착용하였다. 영남 지역의 향교와 서원에서도 모두 전부(奠賻)를 실시하였다. 이듬해 1월 아무날에 부용산(芙蓉山) 남쪽 건좌손향(乾坐巽向)의 언덕에 장사를 하니, 선영을 따른 것이었다.
선생은 성품이 근엄하고 심후한 데다 실천력이 있고 자연스러워 꾸밈을 일삼지 않았으니, 대개 타고난 천품(天品)이 그러하였다. 게다가 어린 나이에 믿고 따를 스승이 있어서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이 모두 전례(典禮)에 맞았으며, 말을 하고 일을 행하는 것이 모두 스승을 따르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이는 선생의 사람됨에 있어서 그다지 수고하지 않고도 이루었다 하겠다. 참판공을 봉양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보살펴 드리는 것을 부지런히 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부모님의 뜻에 거슬리는 일이 없도록 섬겼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비록 맛있는 음식을 계속 올리지는 못하였지만 일찍이 의(義)가 아닌 것으로 남에게 요구한 적이 없었다. 평소에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서 의관(衣冠)을 정제한 다음 사당(祠堂)에 나아가서 재배례(再拜禮)를 행하고 서실로 돌아와서 책상을 마주하고 책을 보면서 침식을 잊는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하였다.
일찍이 글을 배우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소학(小學)》은 모든 경서(經書)의 근본이 된다. 이 글을 확실하게 터득한다면, 성인(聖人)이 되기 위한 바탕이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대학(大學)》의 요체는 단지 지(知)와 행(行)이라는 두 글자에 있다. 격물(格物), 치지(致知)는 지에 속하고,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은 행에 속하며,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는 그 행을 미루어 확대해 가는 것이다.” 하였다. 만일 자구(字句)에 의문나는 곳이 있으면 반드시 이 선생에게 찾아가 직접 여쭙고 혹은 조목별로 질문을 하여 반드시 확실하게 터득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일찍이 이 선생이 초록(抄錄)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중에서 후학들에게 더욱 절실한 것을 또다시 뽑아 한 책을 만들어서 보고 성찰할 수 있게 하였으며, 특히 《심경(心經)》을 좋아하여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체득하였다. 《황명통기(皇明通記)》를 읽다가 황돈(篁墩)이 시제(試題)를 팔아 넘긴 사건과 도일편(道一編)의 주장을 보고 비로소 그 사람 됨됨이와 학문을 의심하여 그것을 적어서 이 선생에게 여쭈었더니, 선생이 이를 계기로 심경 후론(心經後論)을 지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서로 도움을 준 것이 이와 같았다.
일찍이 설 문청공(薛文淸公)의 《독서록(讀書錄)》을 열람하고 중요한 어구(語句)에 권점을 찍어서 책상에다 두고 보았으며, 또 유원성(劉元城)이 언급한, “망녕스런 말을 하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라는 말을 지침으로 삼았다. 항상 작은 책자를 두고 전현(前賢)들이 언급한 몸에 절실하고 교훈성이 짙은 말을 기록하여 《곤지잡록(困知雜錄)》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언제나 자신을 진작시키고 성찰하여 혹시라도 혼망(昏茫)하거나 방도(放倒)한 지경에 떨어질까 염려한 것이 대부분 이러하였다.
책이라면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또 구입하지 않은 책이 없었다. 밤이면 반드시 촛불을 밝히고 향불을 피운 다음 《근사록(近思錄)》,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여러 성리서(性理書)들을 읽었고 간혹 《도연명집(陶淵明集)》, 《격양집(擊壤集)》, 《염락풍아(溓洛風雅)》 등의 시(詩)를 외우곤 하였는데, 음성이 온화하고 장중하면서도 또렷하였다. 난리가 나서 피난 갈 즈음에도 오히려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을 잊지 않고 이르기를, “육수부(陸秀夫)는 배 안에서도 오히려 강학(講學)하였으니, 아침에 도리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고 하면서 강독을 그만두지 않았다.
사환(仕宦)에는 본래 뜻이 없었으므로 해마다 제수하고 달마다 옮긴 것이 40여 관직이었지만, 나아가서 직무를 수행한 것은 몇 번 되지 않았다. 혹 나아갔더라도 역시 오랫동안 머물지 않았다. 매번 호 문정공(胡文定公)이 언급한, “춥고 따뜻한 것과 굶주리고 배부른 것은 자신이 짐작할 줄 알아야 한다.”라는 말을 가지고 자신을 경계하였다. 그러므로 나아가는 문제는 어렵게 여기고 물러오는 것은 쉽게 여긴 자취가 광명정대(光明正大)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선생이 산림에 있을 때는 당시의 세상일을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혹시 와서 말을 하면, “산림(山林)에 묻혀 살면 마땅히 산림에 관한 말이나 해야지 시사(時事)에 무엇 하러 참여한다는 말인가.” 하였으니, 참으로 그 침묵이 충분히 몸을 용납할 수 있는 분이라 하겠다. 그러나 국가에 큰일이 발생하면 일찍이 깊이 걱정하고 심하게 지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서애(西崖) 유 상국(柳相國)과는 동문(同門)의 의의가 있었는데 서애가 영상(領相)으로 있으면서 강화(講和)에 관한 논의를 주장한다는 소문을 듣고 서신을 보내 이르기를, “상국이 평소에 성현(聖賢)의 글을 읽고서 기껏해야 얻은 것이 단지 ‘강화오국(講和誤國)’이란 네 글자인가?” 하여 말이 매우 준절하였으니, 선생의 지업(志業)을 여기에서 볼 수 있겠다.
선생은 안동 권씨 참봉 개세(盖世)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권씨는 태사(太師) 행(幸)의 후손이다. 1남 3녀를 낳았는데, 귀명(龜明)은 성인(成人)이 되기 전에 일찍 죽었다. 장녀는 김유길(金裕吉)에게 시집가고, 2녀는 권병(權昞)에게 시집가고, 3녀는 김광찬(金光纘)에게 시집갔다. 부실(副室)에서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수명(壽明)은 진사이며, 2남 석명(錫明)은 문과에 급제하여 주부(主簿)를 지냈다. 김유길은 4남 1녀를 낳았는데 지선(之善), 취선(就善), 종선(從善), 낙선(樂善)이며, 딸은 권익창(權益昌)에게 시집갔다. 권병은 3남 1녀를 낳았는데 상건(尙健), 상의(尙義), 상준(尙寯)이며, 딸은 권표(權)에게 시집갔다. 김광찬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확(確)과 언(䂴)으로 확은 생원이며, 딸은 참봉 정시형(鄭時亨)에게 시집갔다. 수명은 4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균(昀), 온(㬈), 환(㬇), 성(晠)이며, 딸은 황중경(黃中敬)에게 시집갔다.
내가 약관의 나이에 선생을 찾아가서 뵈온 적이 있었다. 그 후덕하고 단정한 모습을 보고 흠모하고 감복하는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지만 어찌 선생의 심오한 경지를 엿볼 수야 있었겠는가. 이번에 선생의 표손(表孫)인 김확과 김언이 나에게 찾아와서 묘소에 세울 비명(碑銘)을 부탁하였다. 나이도 많고 글솜씨도 없는데 어찌 만 분의 일이나마 유광(幽光)을 발양시킬 수 있겠는가. 그러나 김군의 청을 의리상 사양만 할 수 없는 바가 있어 삼가 장문(狀文)에 의거하여 개괄적인 것을 가려 뽑고 이어서 말하기를, “선생의 아름다운 자질은 퇴계(退溪)를 만나서 이루었고, 퇴계의 도학(道學)은 선생을 만나서 빛이 났다. 선생이 아니었더라면 어찌 퇴계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겠으며, 퇴계가 아니었더라면 어찌 선생의 발명(發明)을 보장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선생의 언행(言行)과 사업(事業)에 대하여 대부분 생략하고 자세히 기록하지 않은 것은, 뒷날 선생을 알려고 하는 자는 먼저 퇴계를 보고서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명(銘)을 붙였다.
우뚝한 저 문순공이 卓彼文純
우리 동방의 주자임을 我東考亭
보고서 알았던 분은 見而知之
오직 우리 선생이셨네 惟我先生
선생의 도를 先生之道
스승에게 질정을 받았으니 繩墨於師
선생의 학문은 先生之學
그 연원이 여기에 있도다 淵源在玆
정자 문인에 양귀산이요 程庭之楊
주자 문하에 장요부라 朱門之張
전함도 있고 받음도 있는데 有傳有受
그 빛이 드러나지 않으랴 不顯其光
도산의 아래에 陶山之下
월천이 굽이쳐 흐르니 月川濊濊
산이 만일 썩지 않는다면 山如不朽
냇물도 마르지 않으리라 川亦不渴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횡성 조씨(橫城趙氏)는 남한(南韓)에 총 1,106가구, 4,46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처 <한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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