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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조씨(曺)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曺(창녕조씨)

 

 

본관(本貫): 창녕(昌寧)

시조(始祖): 조계룡(曺繼龍)

유래(由來):

 

 

창녕(昌寧) 조씨의 시조는 신라 진평왕(제 26대, 재위기간 579-632년)의 사위로 전하는 조계룡(曺繼龍)이다. 「조선씨족통보」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한림학사 이광옥의 딸 예향이며, 그의 출생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예향은 창녕현 고암촌(鼓岩村) 태생으로 그녀가 자라서 혼기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복중에 병이 생겨 화왕산 용지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올리니 신기하게 병이 완쾌되었고 몸에는 태기가 있었다. 어느 날 밤 꿈 속에 장부가 나타나 "이 아이의 아버지는 용의 아들 옥결(玉 )이다. 잘 기르면 자라서 경상이 될 것이며 자손만대 번영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그 후 달이 차서 아이를 낳으니 용모가 준수한 사내아이로 겨드랑이 밑에「조(曺)」자가 뚜렷하게 씌어져 있었다. 이것을 본 이 학사가 이상이 여겨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왕도 기이하게 생각하며 성(姓)을 조(曺)로 하고 이름을 계룡(繼龍)으로 하사하였다고 한다. 계룡은 자라서 진평왕의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었고 벼슬은 태사(太師)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을 창녕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문헌의 실전으로 계룡의 후손 겸(謙)을 일세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조겸(曺謙)

겸(謙)은 신라 말에 아간시중(阿干侍中)을 지낸 흠(欽)의 아들로 고려 태조의 딸 덕공 공주와 혼인하고 대악서승(大樂署丞)을 지냈다.

「창녕 조씨가첩」에 의하면 겸이 손자인 연우(延祐)로부터 10세손 자기(自奇)에 이르기까지 8대에 걸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배출하여 가문의 번성을 누린 것으로 전한다.

 

조민수(曺敏修)

∼1390(공양왕 2). 고려 말기의 무신. 본관은 창녕(昌寧). 1361년(공민왕 10) 순주부사(順州府使)로 여러 장군들과 함께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2등공신에 올랐다. 다음해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를 거쳐 전리판서(典理判書)·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등을 역임하였다.

1368년 명나라가 원나라 서울인 연경(燕京)을 포위하자 좌상시 ( 左常侍 )로서 의정주등처안무사(義靜州等處安撫使)가 되어 명나라의 위협에 대비하였으며, 충근보리공신(忠勤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우왕초에 경상도도순문사로 왜구를 물리쳤고, 지문하부사 ( 知門下府事 )·서북면도체찰사에 올랐다.

1379년(우왕 5) 문하평리 ( 門下評理 ), 1383년 문하시중 ( 門下侍中 )을 역임하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하여졌다. 다음해 밀직부사로서 전라도조전원수(全羅道助戰元帥)를 겸임, 1385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서 사은사 ( 謝恩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388년 요동정벌군의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로 출정하였다가 이성계 ( 李成桂 )와 함께 위화도에서 회군,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우는 데 중요구실을 하여 충근양절선위동덕안사공신(忠勤亮節宣威同德安社功臣)에 양광전라경상서해교주도도통사(楊廣全羅慶尙西海交州道都統使)가 되었다.

1389년(창왕 1) 이성계일파의 전제개혁을 반대하다가 조준 ( 趙浚 ) 등의 탄핵으로 창녕에 유배되었다. 이해 창왕의 생일에 특사로 풀려나왔으나, 다시 우왕의 혈통을 에워싼 논쟁으로 이성계일파에 대항하다가 서인(庶人)으로 강등, 다음해에 다시 창녕으로 유배되어 죽었다.

 

조석문(曺錫文)

1413(태종 13)∼1477(성종 8). 조선 전기의 문신. 초명은 석문(碩門).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순보(順甫). 우희(遇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수(敬修)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항(沆)이다. 어머니는 민설(閔渫)의 딸이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 정자에 이어 집현전부수찬·사간원정언 및 이조·형조·예조의 정랑을 역임하였다.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벼슬을 그만두고 장단에 물러가 있자 조정에서 그 재주를 애석히 여겨 지안산군사(知安山郡事)로 삼았다.

치적이 출중하여 홍주목사에 특진되었다. 또한 관찰사의 추천으로 그 치적이 조정에 알려지자 상호군·지형조사(知刑曹事)에 승진되고, 곧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1455년(세조 1)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수선(受禪)할 때 가담, 협력한 공으로 좌익공신 ( 佐翼功臣 ) 3등이 되고 1457년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1459년 명나라에서 우리 나라가 야인(野人)에게 관직을 수여한 일로 사신을 보내 책망하자, 이조참판으로서 주문사(奏問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뒤 호조참판에 임명, 창녕군(昌寧君)에 봉해지고, 뒤에 호조판서에 승진되었다.

1461년 호조판서로서 중외탁지사(中外度支事)를 총령(總領)하게 되고, 1466년 우찬성에 임명, 호조판서를 겸직하게 되었다. 호조판서를 겸직하게 한 것은 오랫동안 그 직책에 근무하여 회계 사무에 밝고 국가의 재정을 유족하게 하는 일에 힘썼기 때문이다.

1467년 이시애 ( 李施愛 )의 반란이 일어나자 병마부총사(兵馬副摠使)로서 출정했으나 함흥에 주둔만 하고 전진하지 않아 여러 장수들의 불평이 많았다. 돌아오자 반란을 토평한 공으로 적개공신 ( 敵愾功臣 ) 1등에 책록되고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며, 조금 뒤 영의정에 승진되었다.

이듬해 왕명으로 노사신 ( 盧思愼 )과 함께 ≪북정록 北征錄≫을 찬정하였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한 뒤 남이 ( 南怡 )· 강순 ( 康純 ) 등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써 익대공신 ( 翊戴功臣 ) 3등에 책록되었다. 또, 1471년(성종 2) 성종의 즉위를 보좌한 공으로 좌리공신 ( 佐理功臣 ) 1등에 책록되었다.

1476년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면하고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조위(曺偉)

1454(단종 2) ∼ 1503(연산군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 경수(敬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심(深)이고, 아버지는 울진현령 계문(繼門)이다. 어머니는 유문(柳汶)의 딸이다. 7세에 이미 시를 지을 정도로 재주가 뛰어나 족숙 석문(錫文)이 불러 가숙에 머물러 독서하도록 하였다.

1472년(성종 3) 생원 · 진사시에 합격하고, 147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 · 예문관검열을 역임하였다. 성종 때 실시한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일으키기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에 첫 번으로 뽑히기도 하였다.

그 뒤 홍문관의 정자 · 저작 · 박사 · 수찬, 사헌부지평 · 시강원문학 · 홍문관교리 · 응교 등을 차례로 거친 뒤, 어머니 봉양을 위해 외직을 청하여 함양군수가 되었다.

이어 의정부검상 · 사헌부장령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도승지에 이르고, 호조참판 · 충청도관찰사 ·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1498년(연산군 4)에 성절사 ( 聖節使 )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종직 ( 金宗直 )의 시고(詩稿)를 수찬한 장본인이라 하여 오랫동안 의주에 유배되었다. 이후 순천으로 옮겨진 뒤, 그곳에서 죽었다.

김종직과 친교가 두터웠으며 초기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함양군수 때는 조부(租賦)를 균등하게 하기 위해 ≪ 함양지도지 咸陽地圖志 ≫ 를 만든 것으로 전하는데, 이는 김종직이 선산부사로 있을 때 ≪ 일선지도지 一善地圖志 ≫ 를 만든 것과 같은 일이다. 또, 유향소 ( 留鄕所 )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향사례 ( 鄕射禮 ) · 향음주례 ( 鄕飮酒禮 )를 실행하자고 건의하기도 하였다.

박식하고 문장이 위려(偉麗)하여 문하에 많은 문사가 배출되었다. 유배 중에도 저술을 계속, ≪ 매계총화 ≫ 를 정리하다가 죽었다. 작품으로 〈 조계문묘비 曺繼門墓碑 〉 가 있고, 저서로 ≪ 매계집 ≫ 이 있다. 금산의 경렴사(景濂祠)에 제향되고,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조식(曺植)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석학 식(植)은 편교 언형(彦亨)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여 당대 유학계 대학자로 추앙되었으며, 뛰어난 학행으로 여러 번 벼슬에 천거되었으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만 진력하여 문하에서 김효원·김우옹·정인홍 등 저명한 학자들을 숱하게 배출했다.

 

조윤손(曺潤孫)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창녕(昌寧). 할아버지는 울진현령 안중(顔中)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숙기(淑沂)이며, 어머니는 정유의(鄭攸宜)의 딸이다.

1502년(연산군 8) 무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선전관이 되었으며, 1506년 유빈 ( 柳濱 )· 윤상로 ( 尹湯老 ) 등과 협의하여 연산군을 폐하려 하였으나 박원종 ( 朴元宗 )· 성희안 ( 成希顔 ) 등의 반정이 먼저 성공하였으므로 공신녹권 ( 功臣錄券 )만을 받았다.

1509년(중종 4) 웅천현감이 되어 남해안 일대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였으며, 1512년 갑산부사로 야인을 토벌하였다. 이듬해 함경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으며, 1523년 야인이 여연 ( 閭延 )· 무창 ( 茂昌 )에 침입하여 점차로 부락을 형성하려 하는 것을 몰아냈다.

1528년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하여 다시 야인의 침입을 격퇴하고, 1533년 한성부판윤, 1536년 병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이르렀다. 시호는 장호(莊胡)이다.

 

조계상(曺繼商)

1466(세조 12)∼1543(중종 3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종성(宗聖). 부제학 상치(尙治)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부지승문원사 섭융(燮隆)이고, 아버지는 부사 구서(九敍)이며, 어머니는 좌찬성 이영손(李永孫)의 딸이다.

1495년(연산군 1) 진사가 되고, 그 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를 지내고 승진하여 1502년 부교리 ( 副校理 )에 올랐다. 그러나 연산군의 처족인 신승복(愼承福)의 승자와 경주부사 임명에 반대하다가 의금부에 수금되고 이어 파직되었다.

1506년 박원종 ( 朴元宗 )· 성희안 ( 成希顔 ) 등이 중종반정을 도모하자, 여기에 가담하여 정국공신 ( 靖國功臣 ) 2등에 책록되고 창녕군(昌寧君)에 봉하여졌다. 그 뒤 홍문관부제학으로 있으면서, 연산군이 죽자 각방당상(各房堂上)으로서 ≪연산군일기≫ 편찬에 참여하였다.

1508년(중종 3) 대사헌이 되고, 이어 성절사 ( 聖節使 )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1510년 다시 대사헌이 되고 공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세번째로 대사헌이 되었다. 그 뒤 동지중추부사·한성부좌윤을 거쳐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512년 명나라에서 제주도 표류민을 쇄환하여 왔는데, 이 일로 진하사 ( 進賀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14년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뒤에 예조·호조의 참판을 거쳐 공조판서에 올랐으나, 김안로 ( 金安老 )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1537년 김안로가 제거된 뒤 다시 기용되어 우참찬이 되고, 1539년 우찬성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조계은(曺繼殷)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준성(遵聖). 상치(尙治)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섭융(燮隆)이고, 아버지는 구서(九敍)이며, 어머니는 이영손(李永孫)의 딸이다. 판중추부사 계상(繼商)의 형이다.

1506년(중종 1) 연산군의 폐정으로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하여 정국공신 ( 靖國功臣 ) 4등에 책록되었다. 1511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목사·종부시정에 이르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향리에 은거하였다. 창산군(昌山君)에 봉하여졌다.

 

조광원(曺光遠)

1492(성종 23)∼1573(선조 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회보(晦甫). 섭융(燮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구서(九敍)이고, 아버지는 우찬성 계상(繼商)이며, 어머니는 이의무(李宜茂)의 딸이다.

1522년(중종 17) 생원시에 합격한 뒤 152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적 등을 역임하고, 개성부도사에 재직하던 중 왕을 영접하지 않았다 하여 파직되었다. 1538년 장령으로 다시 기용되어 예조참의를 지내고, 1541년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으며, 그 뒤 판결사·병조참의·공조참의 등을 지냈다.

1545년(명종 즉위년) 함경도병사와 관찰사를 지낸 다음 1548년(명종 3) 호조참판에 오르고, 이어 대사헌·한성부좌윤·평안도관찰사·개성부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1555년 을묘왜변이 발발하자 경상도도순찰사로 활약하였으며, 좌참찬·호조판서 등을 거쳐 1558년 우찬성에 이르고, 1561년 판중추부사로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창녕군(昌寧君)에 습봉되었으며,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조문수(曺文秀)

1590(선조 23) ∼ 1647(인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 서예가.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자실(子實), 호는 설정(雪汀). 주부 ( 主簿 ) 경인(景仁)의 아들이며, 좌상 심수경 ( 沈守慶 )의 외손이다.

1609년(광해군 1) 진사가 되었고 1624년 현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동부승지가 되었으며, 특진관 ( 特進官 )을 겸하였다. 1645년(인조 23) 좌승지에 이어 호조판서로 승진하고 하령군(夏寧君)에 봉하여졌다. 1647년 강원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임지에서 죽었다.

글씨를 잘 썼는데, 증손 하망(夏望)의 〈 하령군행장 夏寧君行狀 〉 에 “ 처음에는 송설(松雪)을 좋아하였으나 외형미에 치우친 점이 싫어 왕희지의 법을 참작하니 체기(體氣)가 농수(濃粹)하였다. ” 고 전한다.

필적으로 해행(楷行)의 이군산방기(李君山房記)와 ≪ 근역서휘 槿域書彙 ≫ 에 실린 행초(行草)의 오언절구 등을 보면, 대체로 해서는 송설체를 따랐고 행초는 법을 달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금석으로 영변의 보현사편양당대사비(普賢寺鞭羊堂大師碑), 고양의 좌상유홍비(左相兪泓碑) 등을 썼다. 그림과 시도 잘하였다. 저서로는 ≪ 설정시집 ≫ 6권이 있다. ≪ 대동서법 大東書法 ≫ 등에 필적이 모각되어 있다.

 

조명교(曺命敎)

1687(숙종 13) ∼ 1753(영조 2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이보(彛甫), 호는 담운(澹雲). 한영(漢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전주(殿周)이고, 아버지는 판결사 하기(夏奇)이며, 어머니는 한여우(韓如愚)의 딸이다.

1717년(숙종 43) 사마시를 거쳐, 171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721년(경종 1) 검열에 재직 중 신임사화로 파직당하였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정언에 등용되어 9개 조항의 시정(施政)을 상소하였으며, 이듬해 어사로 임명된 바 있다.

1727년 경종의 질병을 중외(中外)에 해명하도록 소를 올리고, 소론을 논척하는 데 앞장섰다. 1728년 이후 교리 · 부수찬 · 지평 · 승지 · 광주부사(廣州府使) 등을 역임하고, 1735년 대사성을 거쳐 이듬해 대사간 · 이조참의를 지냈다.

1740년에는 소론인 조태억 ( 趙泰億 )의 손자 영근(榮謹)의 문묘 ( 文廟 ) 배알을 막아 파직되었다. 그러나 다음해 다시 등용되어 정언 · 부교리 · 개성유수 등을 지내고, 1747년 대사헌에 올랐으며, 그 해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다시 대사헌 · 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749년 대사헌에서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서용되어 호조참판 · 대사헌 · 이조참판에 이어 1753년 예문관제학에 이르렀다. 덕행과 학문으로 선비의 추앙을 받았으며, 글씨에도 뛰어나 많은 비문을 남겼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능가사사적비 ( 楞伽寺事蹟碑 ) · 영의정최규서표(領議政崔奎瑞表) · 예조판서김시환비(禮曹判書金始煥碑) · 판돈녕부사조광원비(判敦寧府事趙光遠碑) · 공조참판조문수비(工曹參判曺文秀碑) 등을 들 수 있다.

 

조윤형(曺允亨)

1725(영조 1) ∼ 1799(정조 2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치행(穉行), 호는 송하옹(松下翁). 할아버지는 판결사 하기(夏奇)이며, 아버지는 개성부유수 명교(命敎)이다.

문음 ( 門蔭 )과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1766년(영조 42) 처음 벼슬길에 나간 뒤 1781년(정조 5) 선공감주부가 되었으며, 1784년 예조정랑을 역임하였다. 이어서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을 거쳐 보덕 ( 輔德 )이 되어 책례도감상례(冊禮都監相禮)를 겸하였다.

그 뒤 안악군수 · 광주목사(廣州牧使) 등 3현 · 2군 · 1목의 수령을 역임하고 돌아와 1791년 호조참의가 되었으며, 1797년에는 지돈녕부사 ( 知敦寧府事 )가 되었다. 그림과 글씨에 능하였으며, 그림으로는 풀 · 대나무 등의 묵화를 잘 그렸다.

글씨는 초서 · 예서를 잘 써 일찍이 서사관(書寫官)을 역임하였으며, 위로는 대신들로부터 아래로 조례( 誓 隷)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그의 글을 얻으려 하였다. 작품으로는 〈 유점사풍악당대사비 楡岾寺楓嶽堂大師碑 〉 · 〈 이보혁무신기공비 李普赫戊申紀功碑 〉 · 〈 용흥잠저고정기 龍興潛邸古井記 〉 등을 썼다.

 

조호익(曺好益)

1545(인종 1)∼1609(광해군 1).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사우(士友), 호는 지산(芝山). 창원 출생. 사옹원정 치우(致虞)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조정랑 효연(孝淵)이고, 아버지는 증좌참찬 윤신(允愼)이다. 어머니는 인동 장씨(仁同張氏)로 선략장군 ( 宣略將軍 ) 중우(仲羽)의 딸이다. 이황 ( 李滉 )의 문인이다.

1575년(선조 8) 경상도도사 최황 ( 崔滉 )이 부임하여 군적 ( 軍籍 )을 정리할 때 그를 검독(檢督)에 임명, 한정(閑丁) 50명을 독납(督納)하게 하였다. 그러나 병을 핑계로 거절하자 토호 ( 土豪 )라고 상주(上奏)하여 다음해 평안도 강동현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계속 학문에 정진, 많은 후진을 양성하여 관서 지방에 학풍을 진작시켰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유성룡 ( 柳成龍 )의 청으로 풀려나와 금오랑(金吾郎)에 특별 임명되어 행재소 ( 行在所 )가 있는 중화로 달려갔다. 그 뒤 소모관 ( 召募官 )이 되어 군민(軍民)을 규합, 중화·상원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녹비(鹿皮)를 하사받았다. 이어 형조정랑· 절충장군 ( 折衝將軍 )에 승진되고, 1593년 평양싸움에 참가하는 등 전공을 세웠다.

그 뒤 대구부사·성주목사·안주목사·성천부사 등을 역임하고, 1597년 정주목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604년 선산부사, 1606년 남원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영천(永川)의 지봉서원(芝峰書院)과 도잠서원(道岑書院), 성천의 학령서원 ( 鶴翎書院 ), 강동의 청계서원 ( 淸溪書院 )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지산집≫·≪심경질의고오 心經質疑考誤≫·≪가례고증 家禮考證≫·≪주역석해 周易釋解≫·≪역상추설 易象推說≫·≪논위학지요 論爲學之要≫·≪이기유석등변 理氣儒釋等辨≫·≪대학동자문답 大學童子問答≫·≪소황이두시가구주 蘇黃李杜詩家句註≫가 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었으나, 뒤에 문간(文簡)으로 개시되었다.

 

조숙기(曺叔沂)

1434(세종 16)∼1509(중종 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문위(文偉). 군기시정 갑생(甲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서운관정 경(勍)이고, 아버지는 현령 안중(顔仲)이다. 어머니는 옥과현감(玉果縣監) 노성(盧惺)의 딸이다.

1475년(성종 6)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사어(射御)에 능하다 하여 선전관에 발탁되었다. 1478년 이조좌랑 재직 중 평안도에 파견되어 민심을 위유하였다. 환경(還京)해서는 복명하기까지에 걸쳐 견문한 산천의 험이(險夷), 도로의 원근, 방수(防守)의 허실, 변민의 휴척(休戚) 등에 관한 것을 상소하였다.

1479년 건주위(建州衛) 여진을 정벌할 때 도원수 윤필상 ( 尹弼商 )의 종사관으로 참전하였다. 이듬해는 적진 깊숙이 들어가 독전(督戰)한 공로로 3계(階)가 특진되고 홍문관부교리에 제수되었다.

1484년 순천군수 재직 중 문무겸재하여 쓸만하다는 좌의정 윤필상의 천거로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사헌부집의 등을 역임하고, 그 해 12월에 이성 ( 利城 )에 파견되어 수령·만호의 불법을 적간(摘奸)하였다.

1486년 강릉부사·의주목사, 1488년 진주에 있는 자식의 혼사에 내왕하면서 관마(官馬)를 청하여 사용했다는 탄핵을 받아 면직될 때까지 말마굿간과 울타리를 견고하게 보수하는 치적을 올렸다.

1489년 강무 ( 講武 ) 때에 위장 ( 衛將 )이 되면서 고신 ( 告身 )을 환급받았다. 1491년 충청도병마절도사가 되고 뒤에 대사헌을 역임했으며, 1498년 함경도절도사로 경성도호부사를 겸하였다.

1500년(연산군 6)에 천추사 ( 千秋使 )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01년에 다시 평안도관찰사가 되었고, 1503년 노병으로 체직되었다. 1507년(중종 2)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재직 중 앞서 경주부윤 재직시에 경주부 근처의 넓은 토지를 점유하여 농장을 이루고, 경주부민을 부려 경작한 일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비변책을 건의하고, 노년의 대부분을 병영 ( 兵營 ) 진수에 바치는 등 국방에 공헌했으며, ≪주역≫에 조예가 깊었다.

 

조우인(曺友仁)

1561(명종 16) ∼ 1625(인조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익(汝益), 호는 매호(梅湖) · 이재( 蓬 齋). 경상도 예천 출생. 우부승지 계형(繼衡)의 증손자이다.

1588년(선조 21)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0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다가 1616년(광해군 8)에는 함경도 경성판관을 지냈다.

1621년에는 제술관(製述官)으로 있으면서 고궁(古宮)이 황폐하고 폐허가 되어 있음을 보고 느낀 바를 글로 지어 광해군의 잘못을 풍자하였다가 필화(筆禍)를 입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후 인조의 등극으로 풀려나 상주(尙州)의 매호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마쳤다.

시 · 서예 · 음악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그의 가사집 ≪ 이재영언 蓬 齋詠言 ≫ 에는 〈 매호별곡 梅湖別曲 〉 · 〈 자도사 自悼詞 〉 · 〈 관동속별곡 關東續別曲 〉 · 〈 출새곡 出塞曲 〉 등 4편의 가사작품이 실려 전한다.

〈 매호별곡 〉 은 1624년경 그가 노경에 은거하던 상주군 사벌면 매호리에서 자연을 벗하며 한가롭게 살아가는 은일사(隱逸士)의 정경을 노래한 것이다.

〈 자도사 〉 는 광해군이 간신배들에게 둘러싸여 못된 정사를 하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풍자하였다가 옥고를 치른 그의 나이 61 ∼ 63세 때인 1621 ∼ 1623년에 지은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이다.

〈 관동속별곡 〉 은 만년에 정철 ( 鄭澈 )의 〈 관동별곡 〉 을 읽고 느낀 바가 있어 전날 젊었을 때에 유람하였던 관동지방 여행소감을 추억하며 정철의 〈 관동별곡 〉 과의 중복을 피하여 지은 기행가사이다. 이 가사의 서문에는 〈 속관동별곡 〉 이라고 하여 이 작품의 이름은 두 가지로 불린다.

〈 출새곡 〉 은 1616년 가을에 경성부사로 제수되어 이듬해 봄에 변방의 산천풍토와 봄놀이를 두루 즐긴 뒤, 서울의 흥인문을 떠나 임지인 경성에 다다르기까지의 노정에서 얻은 견문과 임지에서의 봄놀이, 그리고 변방 목민관의 고독감 등을 노래한 기행가사이다. 저술로는 문집 ≪ 이재집 蓬 齋集 ≫ 과 가사집 ≪ 이재영언 ≫ 이 있다.

 

조석우(曺錫雨)

1810(순조 1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치용(稚用), 호는 연암(烟巖). 서울 출생. 명준(命峻)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대(允大)이고, 아버지는 용진(龍振)이며, 어머니는 신작(申綽)의 딸이다.

1835년(헌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1852년(철종 3) 이조참판에 올랐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지방을 다스리면서, 1854년 고조부 하망(夏望)의 문집인 ≪서주집 西州集≫을 간행하였는데, 그 가운데 윤증 ( 尹拯 )에 대한 제문 속에서 송시열 ( 宋時烈 )을 비난한 글을 삭제한 것이 말썽을 빚어 유생의 줄기찬 항의로 파직당하여 중화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1857년 석방되어 공조참판에 올랐으며, 그 뒤 1867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글씨에 뛰어나 일가를 이룰 정도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조만식(曺晩植)

1882(고종 19)∼. 독립운동가·정치가.

〔초기활동〕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고당(古堂). 평안남도 강서 출신. 아버지는 경학(景學)이며, 어머니는 진강 김씨(鎭江金氏)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수학하고 15세에 평양 성내상점에서 일하며 소년시절을 보냈다.

23세에 평양 숭실중학(崇實中學)에 입학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8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를 거쳐 1910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에 입학하였다.

유학 중 백남훈 ( 白南薰 )· 김정식 ( 金貞植 )과 함께 장로교·감리교연합회 조선인교회를 설립하였고, 간디(Gandhi,M.K.)의 무저항주의에 심취하여 민족운동의 거울로 삼았다.

1913년 졸업 후 귀국하여 평안북도 정주에 동지인 이승훈 ( 李承薰 )이 설립한 오산학교(五山學校)의 교사가 되었으며, 2년 후인 1915년 교장이 되었다. 1919년 교장직을 사임하고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잡혀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오산학교 교장으로 복귀하였으나 일본관헌의 탄압으로 제대로 재직하지 못하고 평양으로 돌아가 1921년 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에 취임하는 한편, 산정현교회 ( 山亭峴敎會 )의 장로가 되었다.

이 무렵 알게 된 평생의 심우(心友) 오윤선(吳胤善)과 함께 1922년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를 조직, 그 회장이 되어 국산품애용운동을 벌였다.

1923년 송진우 ( 宋鎭禹 )·김성수(金性洙) 등과 함께 연정회 ( 硏政會 )를 발기하여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를 조직하였으나 일제탄압으로 실패하였고, 숭인중학교(崇仁中學校) 교장을 지내다가 1926년 일제에 의해 강제 사임당하였다.

이듬해 신간회 ( 新幹會 )에 참여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활동이 좌절되었다. 1930년 관서체육회 ( 關西體育會 ) 회장으로 민족지도자 육성에 이바지하였고, 1932년 조선일보사 사장에 추대되어 언론을 통하여 민족의 기개를 펴는 데 앞장섰다.

1936년 전국적인 민족정신 앙양운동의 일환으로 평양에서 을지문덕장군수보회(乙支文德將軍修保會)를 설립하였다. 이 무렵에 평양조선인사회의 유일한 공회당이었던 백선행기념관(白善行記念館)을 개설하고 인정도서관 ( 仁貞圖書館 )을 세웠다.

1943년 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협조를 간청해온 재조선군일본인사령관 이타가키(板垣征四郎)의 면담요청을 거절하여 한때 구금당하였다.

〔정치활동〕 광복 직후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그 위원장이 되었다. 소련군정당국이 그들이 만든 최고행정기관인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위원장에 취임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거절하였다.

그 해 11월 3일 조선민주당 ( 朝鮮民主黨 )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다. 이 조선민주당을 통하여 북한에서 반탁운동을 전개하다가 1946년 1월 5일 소련군에 의해 고려호텔에 연금당하였다.

그 뒤 생사가 분명하지 않은 가운데 1950년 6·25전쟁 직전 평양방송이 그와, 체포된 간첩 김삼룡 ( 金三龍 )· 이주하 ( 李舟河 )의 교환을 제의하였다. 공산군의 평양철수시 그들에 의하여 총살되었다. 평생을 기독교정신의 실천가로서 생활하였고, 일제에 대하여는 비폭력·무저항·불복종의 간디즘으로 대항하였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창녕 조씨는 남한에 총 72,203가구, 299,64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

타났다.

 

 

曺繼龍(조계룡) 선생의 일화

1

출생담

조씨(曺氏) 시조인 조계룡의 모친이 나면서부터 배앓이를 했는데, 어느날 화왕산의 못이 영험이 있다 하여 목욕재계하고 기도하자 병이 완치되고 또한 이상하게도 처녀몸에 태기가 있어 생남하게 되었다.

그 아들이 바로 조계룡(曺繼龍)으로 창녕조씨의 시조가 되었다 하는데, 지금도 화왕산에는 용지(龍池)와 창녕조씨득성비가 서있다.

 

2

용지에 목욕하고 낳은 아기

「조선씨족통보」의 기록에 의하면 조계룡의 어머니는 한림학사 이광옥의 딸 예향인데, 조계룡의 출생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예향은 창녕현 고암촌(鼓岩村) 태생으로 그녀가 자라서 혼기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배 안에 병이 생겨 아무리 약을 써도 낫지 안니하였는데 화왕산 용지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올렸더니 신기하게도 병이 완쾌되었고, 또한 이상하게도 몸에는 태기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속에 한 잘생긴 장부가 나타나
「이 아이의 아버지는 용의 아들 옥결(玉 )이다. 잘 기르면 자라서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며 자손만대 번영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그 후 달이 차서 아이를 낳으니 용모가 준수한 사내아이로 겨드랑이 밑에「조(曺)」자가 뚜렷하게 씌어져 있었다.
이것을 본 이 학사가 이상이 여겨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왕도 기이하게 생각하며 성(姓)을 조(曺)로 하고 이름을 계룡(繼龍)으로 하사하였다고 한다.
계룡은 자라서 진평왕의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었고 벼슬은 태사(太師)에 이르렀다.
                                                                                                 <출전: 내고장 전초가꾸기-영양군>

 

 

曺植(조식)  선생의 일화.

제자의 버릇 고치려 소를 한 마리 준 선생

어느 날 曺植(조식) 선생은 제자 약포(藥圃) 정탁(鄭琢)을 불러 소를 한 마리 그냥 주었다.
정탁은 조식 선생이 아끼는 제자인데, 평소 말이 빠르기로 소문이 난 사람이다. 소를 얻은 정탁은 스승이 왜 자기에게 소를 주는 것인지 그 뜻을 알 수가 없어 어리둥절했다.
그래서 정탁(鄭琢)이 궁금해 하자, 조식선생은 웃으면서
「자네는 말이 너무 빨라 내가 항상 걱정이야. 소를 보고 소처럼 느리면서 천천히 멀리 가라는 뜻일세. 이 때문에 소를 준 것일세. 소를 보고 배우게.」라고 하셨다.

또 曺植(조식)은 항상 쇠방울 「성성자」를 차고 다녔다.
조식은 때때로 이것을 흔들어 정신을 환기시키곤 하였다. 동강 김우옹이 처음 조식을 만났을 때, 조식은 차고 있던 쇠방울을 주면서 말하기를,
「이 물건이 네 옷과 띠 사이에 있으면 몸을 음직일 때 마다 울려서 경계하고 꾸짖으므로 매우 공경하고 두려워할만 하니, 너는 항상 몸을 경계하고 삼가 이 쇠방울에게 죄를 짓지 말라.」고 하였다.

이에 김우웅이.
「이는 옛사람들이 옥을 허리띠에 차고 다니던 뜻이 아닙니까?.」라고 묻자 조식이
「참으로 그렇다. 그러나 방울이 더욱 가절하여 옥을 차는 것보다 더 큰 효과가 있다.」라고 하셨다.

 

 

曺景溫(조경온) 선생의 효행

 

죽음으로 지킨 아버지의 무덤

 

아버지 저걸 보셔요.”

 

다섯 살 난 어린이가 정자나무 위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구름 한 점 없는 창공을 날카롭게 찌르고 있는 느티나무 가지에 까마귀 두 마리가 부리를 맞대고 정답게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새기 까마귀가 어미 까마귀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고 있읍니다.”

 

어린이는 또렷하게 말했다. 자세히 보니 몸집이 작은 까마귀가 큰 까마귀 입에 먹이를 넣어 주고 있었다.

 

짐승도 저런데 사람이 어찌 짐승만 못해서야 되겠읍니까?”

 

아이답지 않은 이 어린이의 의젓한 말투에 모여 있던 동네 사람들은 탄복 했다. 이 어린이가 나중에 만고의 드문 효자로 온 세상 사람들의 칭송을 받 은 임계 조 경온(林溪 曺景溫) 선생이시다.

 

선생은 1548(명종 3) 영천군 화북면 삼창동(현 지곡 초등 학교 서편)에서 태어났다. 선대 할아버지는 고려 말에 높은 벼슬을 지낸 조 신충이란 분으로 조선 왕조가 들어서자 고려의 옛 신하로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영천군 금호읍 창수리로 낙향하였다. 선생은 조 신충의 다섯 형제 중 맏아들인 조 상보의 후손으로 명분과 의리를 생명보다 중히 여기는 선비 집안의 출신이다.

 

차차 자라면서, 동네 서당에 들어가 글을 배웠다. 언제나 남보다 열심히 글을 익혔고 배운 것을 실천하려고 했으며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부모님을 정성껏 모시니, 그의 갸륵한 행동이 이웃 동네에까지 펴져 그를 효동이라 부르며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부모를 섬기는 마음은 한결같아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 저녁 문안드리는 일과, 입고 먹고 자는 일에 불편함이 없도록 보살펴 드리고, 언제나 바른 행실로 부모님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고 몸가짐에 조심했다. 선생의 나이 서른 두 살 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에 잠겼으나 장지를 구하지 못해 애태우고 있었다. 이 때, 한 기인이 찾아와 하늘이 낳은 효자를 위문하기 위해 왔다며 묘지를 정해 주었다. 지금의 화산면 귀호동 어둡이이다. 선생은 손수 삽을 잡고 땅을 팠다.

 

이웃 사랑들이 도우려 했으나,

 

아버지의 살갗이 닿는 흙인데 어찌 남에게 맡기겠소.”

 

하며 손수 채로 쳐서 깨끗하고 보드라운 흙을 골라 장례를 마쳤다. 낮에는 진종일 묘소에, 밤에는 빈소에서 아버지의 은덕을 기리며 지냈다. 얼마 안 되어 이번에는 어머니가 병환이 났다. 하루는꿩고기가 잡숫고 싶다기에 집을 나서니 어디선지 꿩 한 마리가 날아 와 나뭇단 사이에 기어드므로 잡 아서 드리니 병세가 좀 나아졌다. 이러한 얘기를 천해 들은 이 고을 원님도 선생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하여 곡식을 보내어 위로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6 년간에 걸쳐 온갖 정성을 들여 1584(선조 18), 영모재란 재사 8간을 짓고 소학책 한 질과 소학훈의란 글을 지어 자손들이 성묘한 뒤 틈틈이 읽고 익혀 집안의 교훈으로 삼아 효도하는 마음을 길러 주려고 했다.

 

그러던 중 선생의 나이 45 세가 되던 1592(선조 25) 4월에 임진왜란이 얼어났다. 잔악한 왜병들은 우리 강산을 할퀴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리의 조상 숭배 정신을 말살하려고 재사를 불태우고 무덤을 파헤쳐 보물들을 도둑질해 갔다. 선생은 묘소를 지키리라 결심했다.

 

내 어찌 적의 무리를 겁내어 부모의 산소를 그냥 두고 피난가랴? 평생에 못다한 효성을 다해야지.”

 

이 때 우리의 원수 왜적을 소탕하려는 의병이 곳곳에서 벌떼같이 있어났다. 신녕 의병장 권 응수 장군은 사돈지긴인 선생을 찾아와 함께 싸울것을 권했 으나, 묘소를 지키기 위해 함께 나가지 못함을 말하고, 맏아들 조축을 출전시켰다. 선생은 싸움터에 나가지 못한 대신 왜병을 무찌를 계략을 써서 세 번이나 권 장군에게 보냈다.

 

1952726일 낮, 마친내 왜병들이 들이닥쳤다. 선생은 조금도 놀라거나 겁내지 않고 묘소 앞에 꿇어 앉아 있었다. 둘러섰던 왜은 소리소리 지르며 창칼로 위협했다. 선생은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늠름한 모습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를 본 왜적의 무리들도 탄복하고 그냥 되돌아 갔다.

 

그 날 해질 무렴, 다른 한 떼의 왜적들이 다시 닥쳤다. 역시 장칼로 위협하기 시작했다. 선생은 낮에와 같이 조금도 굴함이 없이 기품 있는 자세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 해, 한 왜병이 창칼로 선생을 찔러 버렸다. 붉은 피는 묘소 앞을 물들였다. 이를 본 다른 왜병들은 저희들끼리도 만고에 드문 효자 를 해쳤다.”고 꾸짖고 근처에 있는 절의 중에게 간호해 줄것을 부탁하고 가 버렸다. 이리하여 묘소는 지켰으나 아, 세상에 드문 효자 조 경온 선생은 왜적의 창에 찔려 정성껏 간호한 보람도 없이 다음날 새벽,

 

가난한 선비가 왜적의 창칼에 맞아 쓰러져, 나라에 충성을 다했으나 양친의 묘소 기슭에서 죽게 되니 그래도 다행이로다.”

 

라는 말을 남기고 45 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니 이 날은 왜군에게 빼앗겼던 영천성이 의병들에 의해 탈환되던 날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의병장 권 응 수 장군은 이틀 뒤 진중에서 달려와

 

살아서는 효를, 죽어서는 절의를 다해, 우러러보나 굽어보나 조금도 부끄럼이 없는 생애를 마쳤도다.”

 

하고 슬퍼했다. 다음 해에 선생이 왜적에게 창칼을 맞으셨던 부모 묘소 앞인 화산면 귀호동 희곡에 장사를 치렀다.

 

이 일이 곧 조정에 알려져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어 충의공 권 응수 장군과 함께 귀천서원에 제향 되었다가 뒤에 회계서원으로 옮겨 모시게 되었다.

 

선생의 고결한 충효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임계청은, 지금도 화북면 삼창교 붕어듬 언덕 위에 우뚝 솟아,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출전 <문학수; 영천군 신녕서부초등학교 교감

 

 

 

출처 <한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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