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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주씨(周)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周(상주주씨)

 

 

본관(本貫): 상주(尙州)

시조(始祖): 주유(周瑜)

유래(由來):

 

상주 주씨(尙州周氏) 시조는 고려의 절신인 주유(周瑜)이다. 유는  고려 말에 진사(進士)를 지내다가 1392년(태조 1)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의 충절로 길  재·김자수 등과 함께  벼슬을 마다하고 초계현에 은거하여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켰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선조가 세거해 온 상주(尙州)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면서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시켰다.

 

가문의 중요 인물

 

주윤창(周允昌)

김종직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영천 군수(永川郡守)를 지낸 윤창(允昌)이 뛰어났다.

 

주세붕(周世鵬)

1495(연산군 1) ∼ 1554(명종 9). 조선 중기의 문신 · 학자.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경유(景游), 호는 신재(愼齋) · 남고(南皐) · 무릉도인(武陵道人) · 손옹(巽翁). 고려 말에 고조가 경상도 합천에 우거했으나, 아버지대에 칠원 ( 漆原 )으로 옮겨살아 칠원에서 출생(일설에는 합천에서 출생했다고 함.)하였다.

증사복시정 상빈(尙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손(長孫)이고, 아버지는 문보(文 喇 )이다. 어머니는 별호군 황근중 ( 黃謹中 )의 딸이다. 선대에는 모두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주세붕의 현달로 증직되었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1522년(중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그 뒤 승문원정자로 사가독서에 뽑히고, 홍문관의 정자 · 수찬을 역임하였다. 공조좌랑 · 병조좌랑 · 강원도도사를 거쳐 사간원헌납을 지냈다.

1537년 김안로 ( 金安老 )의 전권을 피하고 어머니의 봉양을 이유로 외직을 청하여 곤양군수(昆陽郡守)로 나갔다. 이듬해 검시관 ( 檢屍官 )으로 남형을 한 상관을 비호했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어머니의 사망으로 여묘 3년, 상제(喪祭)의 예는 모두 ≪ 가례 家禮 ≫ 에 따랐다. 승문원교리 · 예빈시정(禮賓寺正)을 거쳐 1541년 풍기 군수가 되었다.

풍기 지방의 교화를 위하여 향교를 이전하고, 사림 및 그들의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1543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 紹修書院)을 건립했는데 중국의 서원과 같이 사묘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을 지닌 우리 나라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사성에 임명되고, 홍문관의 응교 · 전한 · 직제학 · 도승지를 역임했으며, 1548년 호조참판이 되었다. 1549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백운동서원의 예와 같이 해주에 수양서원(首陽書院)을 건립하였다.

이후 대사성 ·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다 병으로 사직을 요청, 동지성균관사에 체임되었다. 죽은 뒤 소원에 따라 고향인 칠원 선영에 안장되었다. 후사가 없어 형의 아들인 박(博)을 양자로 삼았다.

관력에서 보듯이 내직은 대체로 홍문관 · 성균관 등 학문기관에서 관직을 맡았고,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교학 진흥을 통한 교화에 힘썼다.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을 때, 대간에서 학문이 높고 성균관의 사표로 삼을만한 인물이라 하여 내직을 요청할 정도로 그의 학문은 당시 조정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었다.

도학에 힘쓸 것을 주장하고 불교의 폐단을 지적했으며, 기묘사화 이후 폐지되었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다시 시행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풍기에서 유교 윤리에 입각한 교화에 힘쓰고 당시 피폐되어 향촌민의 교육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던 향교를 관아 근처로 이건, 복구하였다.

그리고 양반들에게 교육기관으로서 외면당하던 향교 대신 풍기의 사림 및 그들의 자제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중국의 주자가 세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하여 고려 말 성리학을 도입했던 순흥 출신의 안향 ( 安珦 )을 배향한 백운동서원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서원의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서적을 구입하고 서원전 ( 書院田 )을 마련하였다. 서원을 통해 사림을 교육하고, 또한 사림의 중심기구로 삼아 향촌의 풍속을 교화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일부 사림과 안향의 후손들을 제외하고 풍기 사림의 호응을 받지 못하였는데 1546년 경상도관찰사로 도임한 안향의 11대 손인 안현 ( 安玹 )의 노력으로 백운동서원은 확고한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1550년에 풍기군수였던 이황 ( 李滉 )의 청원으로 소수(紹修)라는 사액을 받아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에 따라 백운동서원은 점차 풍기 사림의 중심 기구로 변모해나갔다. 이후 이를 모방한 서원들이 각지에서 건립되었다.

청백리에 뽑히었고, 〈 도동곡 道東曲 〉 · 〈 육현가 六賢歌 〉 · 〈 엄연곡 儼然曲 〉 · 〈 태평곡 太平曲 〉 등 장가 ( 長歌 )와 〈 군자가 君子歌 〉 등 단가 ( 短歌 ) 8수가 전한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칠원의 덕연서원 ( 德淵書院 )에 주향되었고, 백운동서원에도 배향되었다.

저서로 ≪ 죽계지 竹溪誌 ≫ · ≪ 해동명신언행록 海東名臣言行錄 ≫ · ≪ 진헌심도 進獻心圖 ≫ 가 있다. 문집으로 아들 박이 편집했다가 전란으로 없어져 1859년(철종 10) 후손들이 다시 편집한 ≪ 무릉잡고 武陵雜稿 ≫ 가 있다.

 

주박(周博)

1524(중종 19)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약지(約之). 호는 구봉(龜峰). 할아버지는 문보(文 喇 )이고, 아버지는 세곤(世 譴 )이고,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작은 아버지 세붕(世鵬)에게 입양되었다. 이황 ( 李滉 )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 13)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뒤 1568년(선조 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벼슬은 검열 · 교리 · 사예 등을 지냈으며, 문장이 뛰어나 선조 초 형조좌랑에 있으면서 춘추관기사관으로 ≪ 명종실록 ≫ 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가 선조대에 교리로 있을 때 상번으로 경연 ( 經筵 )에서 강을 하다가 나이가 많아 구독하기 힘들어 대신 하번에게 구독을 시켰으나, 갑자기 준비하지 않은 하번이 띄어 읽지도 못하여 웃음거리가 된 일례를 남기기도 하였다. 칠원 ( 漆原 )의 덕연서원 ( 德淵書院 ) 별사(別祠)에 제향되었다

 

주명신(周命新)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 숙종 때의 의학자. 호는 기하(岐下). 경상북도 상주 출신. 허준 ( 許浚 )의 제자로 ≪동의보감≫을 참조하여 1724년(경종 4) 임상치료학의 명저인 ≪의문보감 醫門寶鑑≫(8권)을 저술하였다.

 

주재성(周宰成)

 1681(숙종 7) ∼ 1743(영조 19). 조선 후기의 학자 · 의병장.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성재(聖哉). 호는 국담(菊潭). 세붕(世鵬)의 후손으로, 각(珏)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 근사록 ≫ 과 ≪ 주자대전 ≫ 을 탐독하고 〈 위학입교도 爲學立敎圖 〉 와 〈 오륜론 五倫論 〉 을 지어 실천에 힘썼다.

1728년(영조 4) 이인좌 ( 李麟佐 ) · 정희량 ( 鄭希亮 )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낙동강에 진출, 관찰사 황선 ( 黃璿 )으로부터 김해진군(金海鎭軍) 3,000명을 지원받아 영호(嶺湖)의 요새인 분치령(分峙嶺)을 방어하였다.

또한, 그 때 군량을 보급하기 위하여 가산을 팔아 쌀 300섬을 내어놓았다. 난이 평정된 뒤 고향에 돌아와 학문연구와 훈고(訓 鈐 )에 전심하였으며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관찰사 황선과 암행어사 박문수 ( 朴文秀 )가 조정에 그를 천거하였으나 등용되지 않았다.

죽은 지 3년 뒤인 1745년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되었으며, 1783년(정조 7) 영남유생의 상소로 정려 ( 旌閭 )되고 이어 1788년 기양서원(沂陽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 중용 ≫ 과 ≪ 대학 ≫ 을 주석한 ≪ 용학강의 庸學講義 ≫ , ≪ 논어 ≫ · ≪ 맹자 ≫ · ≪ 주역 ≫ 등을 추연한 ≪ 경의집록 經義輯錄 ≫ ,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예설을 집약한 ≪ 거가요범 居家要範 ≫ 등이 있다.

 

 

출처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17

時(시)

22

載(재),圭(규)

27

中(중),埰(채)

在(재)

18

會(회)

23

鎬(호),鐘(종)

鉉(현)

28

鈺(옥),錫(석)

鎭(진)

19

永(영),海(해)

24

洙(수),浩(호)

洛(락)

29

河(하),澤(택)

源(원)

20

植(식),根(근)

25

穆(목),柄(병)

東(동)

30

來(래),桓(환)

模(모)

21

煥(환),炫(현)

26

燮(섭),熙(희)

炳(병)

31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상주(尙州) 주씨는 남한에  총 5,164가구, 21.71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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