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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주씨(朱)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朱(신안주씨)

 

 

본관(本貫): 신안(新安)

시조(始祖): 주잠(朱潛)

유래(由來):

 

신안은 중국 중앙부, 양자강 하류 및 회하 유역의 안휘성 휘주부에 위치하는 지명이다.

신안(新安) 주씨는 중국 송나라 신안현 사람인 주잠(朱潛)이 고려 고종 때 동래하여 나주(羅州)에 정착하게 되면서부터 그를 동래조로 하여 계대를 이어오고 있다.

잠은 주자(朱子 : 본명은 희, 성리학을 대성한 남송의 유학자)의 증손(曾孫)으로 송나라 사직이 위태롭게 되자 아들 여경(餘慶)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 망명해 와서 금성(錦城)에 자리 잡고 살았다고「조선씨족통보」에 기록되어 있다.

후에 원나라에서 송의 유민을 압송하려 했을 때 이름을 적덕(積德)이라 고치고 능성 고정리(考亭里)에 은거하였다가 여러 곳으로 이거하여 지명에 따라 따로 본관을 사용해 온 관계로 신안(新安)·나주(羅州)·능성(綾城) 등 45개 파로 갈리었다.

1902년(고종 39, 광무 6) 의정부 찬정 석면(錫冕)의 상소로 선조의 본향인 신안(新安)을 본관으로 복관하게 되었다.

문헌에 의하면 주씨의 본관은 신안(新 安)·나주(羅州)·능성(綾城)·웅천(熊川)·공주(公州)·전주(全州)·압해(押海) 등 무려 107본까지 전하고 있으나, 모두가 신안(新安) 주씨에서 분파된 것으로 알려졌다.

 

가문의 중요 인물

 

주여경(朱餘慶)

잠의 아들 여경(餘慶)이 고려 고종 때 은사과(恩賜科)에 올랐다.

 

주열(朱悅)

∼1287(충렬왕 13). 고려 후기의 문신. 자는 이화(而和). 은사과(恩賜科)에 등제하여 현리(縣吏)를 지낸 경여(慶餘)의 아들이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남원판관이 되고, 국학학록(國學學錄)· 감찰어사 ( 監察御史 ) 등을 거쳐 나주(羅州)· 정주 ( 靜州 )·승천부(昇天府)·장흥부(長興府) 등의 수령이 되어 정치를 잘하였다.

원종 때에는 병부낭중(兵部郎中)으로서 충청·전라·경상 3도의 안렴사(安廉使)를 역임하며 위명(威名)을 떨쳤으며 백성들도 경외하였다고 한다.

예부시랑(禮部侍郎)이 되었으나 당시의 권신 임연 ( 林衍 )에게 거슬려 1269년(원종 10)에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임연이 죽자 동경유수(東京留守)가 되었다.

예빈경(禮賓卿)· 간의대부 ( 諫議大夫 )·판소부 동궁시강학사(判少府東宮侍講學士)를 역임, 원나라가 일본정벌을 준비할 때 경상도안무사로 다녀와서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로 승진하였으며, 충렬왕이 즉위하게 되자 그의 재명을 듣고 중용하였다.

한림학사에 제수하고 삼사사(三司使)로서 경상도계점사(慶尙道計點事)로 나가 유망민을 초집하였다. 판도판서(版圖判書)·부지밀직 전법판서(副知密直典法判書)에 나아갔으며 지도첨의부사(知都僉議府事)로 치사(致仕)하였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고, 성품이 활달하였으며,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근검하였고 어느 편에도 기울지 않는 공평함이 있었다고 한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주인장(朱印臟)

열의 맏아들 인장(印臟)은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주인원(朱印遠)

열의 둘째 인원(印遠)은 경상도 안렴사(按廉使)를 역임하였다.

 

주인환(朱印還)

열의 셋째 인환(印還)은 첨의부사(僉議府使)를 지냈다.

 

주택정(朱宅正)

1651(효종 2) ∼ 1727(영조 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정이(靜而). 함흥 출신. 대건(大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식맹(式孟)이고, 아버지는 단천군수(端川郡守) 목( 坍 )이다. 어머니는 한여호(韓汝虎)의 딸이다. 20세 이전에 향시에 합격했고, 송시열 ( 宋時烈 )이 덕원에 유배되어 있을 즈음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순릉참봉으로 1679년(숙종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학유가 되었다. 이어 전적 · 직강 등을 거쳐 예조 · 병조의 좌랑, 춘추관기사관을 역임했고, 외임으로 나가 은계찰방(銀溪察訪) · 보령현감 · 이성현감 등을 두루 맡았다.

1689년에 기사환국으로 송시열이 화를 입자 그 문제(門弟)로서 삭직을 당했다가 1694년에 갑술옥사가 일어나 남인들이 실각하자 다시 직강으로 복직, 이어 병조정랑이 되었다.

학문에 뜻을 세워 스승을 정성껏 복사(服事)하였다. 관직에 있으면서도 학문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아 스승으로부터 “ 긴장해 있으면서 해이하지 않다. ” 는 말을 들었고 ‘ 학여불급(學如不及) ’ 이라는 서증(書贈)과 함께 항상 장려와 칭찬을 받았다. 몸에는 사치, 화려한 것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효성과 우애가 지극했다 한다.

성품은 화평하면서도 주견이 뚜렷했으며, 자기 인격을 깔끔하게 수양하여 벼슬살이 몇 해 동안에도 집안은 가난하였다. 언제나 산수를 즐겨 명승지를 두루 찾아 구경하였다.

민정중 ( 閔鼎重 )은 일찍이 그의 기절(氣節)을 기렸고, 이단하 ( 李端夏 )는 그의 학문적 업적을 칭찬하였다. 권상하 ( 權尙夏 ) · 정호 ( 鄭澔 ) 등은 그를 허여(許與)하였다. 특히, 정호가 북로(北路)를 안찰할 때 그를 교수로 임용하기를 청하였다.

1685년에 서북인재들에 대한 통청(通淸)이 거론되면서 그가 제일 먼저 추천되었으나 크게 등용되지 못하였다. 서북 출신에다가 역적으로 몰려 죽은 작은아버지 때문에 그도 30여 년 간 불우하게 지냈다.

 

주몽룡(朱夢龍)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운중(雲仲). 호는 용암(龍巖). 어려서부터 용력이 뛰어났으며, 일찍이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을 거쳐 금산군수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흩어지는 백성을 모아 병력을 강화하고 방어태세를 갖추니 적병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그는 다시 홍의장군 곽재우 ( 郭再祐 )와 강덕룡(姜德龍) · 정기룡 ( 鄭起龍 ) 등 경상도 지역에서 용맹을 떨치던 의병장들과 힘을 합하여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 중에서도 강덕룡 · 정기룡 의병장과 자주 영남 산간지대를 중심으로 유격전을 전개하여 적을 격파하였기 때문에 주민들로부터 ‘ 삼룡장군(三龍將軍) ’ 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1596년에 충청도 홍산에서 이몽학 ( 李夢鶴 )의 반란이 일어나 한때 임천 · 청양 · 대흥 ( 大興 ) 등지를 휩쓸고 있었다.

이 때 반군들은 성세(聲勢)를 올리기 위하여 유명한 인물을 들어 동사자(同事者)로 선전하였는데, 그의 이름이 끼어 있어 한때 연루자로 투옥되기도 하였으나 사실이 아님이 밝혀져 석방되었다. 죽은 뒤 형조판서에 추증되고 태인 충렬사 ( 忠烈祠 )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주양우(朱良佑)

중종 때 전적을 역임하였다.

 

주덕원(朱德元)

선조 때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주정

정( )은 숙종 때 개성 교수(開城敎授)를 역임했다.

 

주표(朱杓)

경원부사를 역임했다.

 

주석면(朱錫冕)

한말 고종 때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을 역임하였다.

 

주인섭(朱寅燮)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주진수(朱鎭洙)

진수(鎭洙)는 신민회 강원 대표로서 만주에 독립운동의 기지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 모집에 공헌하였다.

 

주석환(朱錫煥)

1892(고종 29)∼1955. 독립운동가. 평안남도 강동 출신.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1919년 5월 만주로 건너가 안동현(安東縣)에서 오동진 ( 吳東振 )· 김승만 ( 金承萬 )·여순근(呂淳根) 등과 같이 안동현임시의사회(安東縣臨時議事會)를 조직하고 대한청년단연합회에 가입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남만주의 여러 독립운동단체가 통합하여 임시정부 직할의 광복군참리부(光復軍參理部)와 광복군사령부로 개편, 발족됨에 따라 광복군사령부 모험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지령으로 국내에 교통국 ( 交通局 )을 설치할 임무를 띠고 입국하였다.

입국 후 평안북도·평안남도·황해도 등 3도에 교통국을 설치하기 위해 평양을 중심으로 동지 규합에 나섰다. 그런데 이해 9월 하순 행적이 수상하다는 이유로 평양경찰서에 연행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기도 하였다.

그 뒤 강동군 삼등면 주기수(朱基洙) 집에 은거하면서 각지의 재산가들로부터 모은 자금으로, 1920년초 평양에서 여러 동지들과 같이 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하고, 각처에서 모은 군자금 17만원을 임시정부로 송금하였다.

1920년 5월 동지들과 평남도청(平南道廳) 및 평양부청(平壤府廳), 각 경찰서 등을 폭파할 것과 각 주재소를 습격할 것을 결의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19일 평양시내 세 곳에 폭탄을 던져 파괴하였다.

1921년 동지들과 성천군 삼흥면 묘산주재소를 습격하는가 하면, 대동군에서는 일본경찰의 수색대와 교전하기도 하였다. 1922년에는 대동군 을미면에서 강동·평양·대동의 3개 경찰서 합동수색대와 교전하여 우에즈키(植月)순사에게 중상을 입히고 은신하였다.

그런데 며칠 뒤 강동군 만달면 대성리에서 동지 46명과 함께 일본경찰 100여 명과 교전하다가 잡혀 평양지방법원에서 1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출옥 후 1931년 7월 다시 중국에 망명하여 항일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조국광복을 맞아 환국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朱景顔(주경안)의 효행.

 

여섯 마리의 비둘기

 

조선조 선조 대왕 때에, 울진읍 고성리(현 구만동)에서, 당시 참봉을 지내던 주 세홍의 아들로 태어난 주 경안(朱景顔)공은 어릴 때부터 천품이 조용하고 용모가 단아했으며, 두뇌가 명석하여 항상 글읽기를 좋아하여 언제나 그의 손에서는 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다.

공은 부모에 대한 효성이 극진하고, 나라를 향한 우국 충절이 또한 남다르게 두드러졌다.

 

한번은 공이 아직 어렸을 적에, 그 부친이 우연히 학질에 걸려 고생하던 끝에 중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점차 병세가 악화되어 드디어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매 공은 하도 다급하여 손가락을 깨물어 그 선혈을 술 에 타서 마시게 했더니 혼미해져 가던 정신이 차츰 돌아오면서 병이 낫게

되었다 한다.

 

그 후 어느 해 겨울철에 다시 부친의 등에 커다란 종기가 생겨 오래도록 신고하는지라, 좋다는 명약은 다 구해다가 치료해 드렸고, 용하다는 의원은 아는 대로 데려다가 보였지만, 모두들 하나같이 고개를 외로 돌렸다. 형편이 이 지경에 까지 이르고 보니, 공은 식음을 전폐하고 주야로 노심초사하고 있던 중에 하루는 어떤 의원이 환자를 진맥해 보고나서 하는 말이, 지렁이 즙이 효험이 있긴 하나 마침 동절이라 어쩔 수가 없노라 며 가버렸다.

 

공은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엄동설한인데도 불구하고 한밤중에 높은 산에 올라가 분향하고 정성껏 기도를 올렸더니, 어떤 신령이 나타나 그대의 앉은 자리 밑을 파 보라 하매, 급히 파 보았더니 꽁꽁 얼어붙은 흙 속에서 산 지렁이가 기어 나오지 않겠는가? 공은 크게 기뻐하며 얼른 그 즙을 짜서 부친의 환부에 몇 차례 발랐더니 신통하게도 거짓말같이 나았다고 한다.

 

또 어느 해에 심한 흉년이 들어 한식 절사를 당하였는데도 해륙 생산이 별로 없어 제물을 마련할 수 없었으므로 말갈기로 올가미를 만들어 언덕 숲 속에 매어 두었더니, 잠시 후에 난데없는 큰 눈이 내리고 비둘기가 날아 들 어 여섯 마리나 올가미에 걸리거늘, 이를 거두어 제물로 요긴하게 쓸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나라에서는 임진왜란을 만나 온 나라 안이 초토가 되어 버리니 조야간에 당한 그 고초를 어찌 필설로 이루 다 형언할 수 있었겠는가?

그럴 즈음에 공은 매일같이 첫새벽에 일어나 목욕 제계한 후 의관을 정제 하고 하늘을 우러러 크게 빌기를

무지한 창생이 난중에 고초가 많사오나 하루속히 이 환난을 거두어 주소서.”

하고, 수년을 하루같이 계속했다 한다.

뿐만 아니라, 그 후 조정에서는 문정 왕후, 인순 왕후, 명종 왕후, 인의 왕후 , 선조 대왕 이렇게 여러분이 차례로 승하하시니, 그 때마다 3 년간씩 각각 복제하여 왔다 하니, 어찌 그 충효심을 어느 범부가 감히 흉낸들 낼 수가 있었겠는가?

 

공의 그토록 극진하고도 한결같은 효심과 충의는 모두 하늘이 주심이라, 마침내 나라에서도 그 절효 지충(絶孝至忠)을 높이 사서 삼강록에 오르게 했고, 생시에 정려를 건립토록 했다.

절효정문은 본시 사후에 건립하는 것이 예사인데, 생시에 정려를 건립토록 했음은 나라에서 공의 충효를 얼마나 높이 평가했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 후 영조조 무진년에 이르러서는 사헌지평이라는 벼슬과 함께 충효당이라는 시호를 내리기도 했다 한다. 예로부터 효자문에 충절 난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이른 말인 성싶다.

 

출전울진군 울진여자중학교 주 교사

참고 문헌 蔚珍郡誌, 孝烈行誌

 

 

 

 

 

 

출전 <한미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31

寧(녕),炯(형)

36

煥(환)

41

愼(신),性(성)

32

中(중),奎(규)

37

基(기),址(지)

42

坤(곤),均(균)

33

宰(재),鐘(종)

38

鎬(호),銓(전)

43

鉉(현),鎔(용)

34

暾(돈),河(하)

39

泳(영),洛(락)

44

承(승),泰(태)

35

東(동),尤(우)

40

植(식),華(화)

45

馨(형)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신안(新安) 주씨는 남한에 총 34,569가구, 142,59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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