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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정씨(鄭)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鄭(청주정씨)

 

 

본관(本貫): 청주(淸州)

시조(始祖): 정극경(鄭克卿)

유래(由來):

 

청주 정씨(淸州鄭氏)의 시조(始祖)는 고려(高麗) 의종조(毅宗朝)에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정극경(鄭克卿)이다. 그의 6세손 책( )이 충숙왕(忠肅王) 때 충주 목사(忠州牧使)를 역임하였고, 통헌대부(通憲大夫) . 판선공사(判繕工事)로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러 청하군(淸河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청주(淸州)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정의

극경(克卿)의 손자(孫子) 의( )가 고려 고종(高宗) 때 대장군(大將軍)을 지냈다.

 

정해

의의 손자 해( )는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도첨의 찬성사 (都僉議贊成事)에 올라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정오

∼ 1359(공민왕 8).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사겸(思謙). 호는 설헌(雪軒). 찬성사 해( 易 )의 손자로, 판도판서(版圖判書) 책( 在 )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1330년(충혜왕 즉위년) 성균승(成均丞)으로서 전주(銓注 : 인사행정)를 맡았으며, 이어 감찰장령(監察掌令)이 되었으나 이듬해 왕을 비방하였다는 나인(內人) 최안계(崔安桂)의 참소로 이문소(理問所)에 투옥되고 장형을 당하였다.

1351년(공민왕 즉위년) 동지밀직사사에 제배되고, 이듬해 지밀직사사로 승진하면서 원나라에서 왕을 수종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다.

1354년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올라 서원군(西原君)에 봉해졌으며, 뒤에 추충진의보리공신(推忠陳義輔理功臣)에 봉해졌다. 원으로부터 정동행성 ( 征東行省 ) 유학제거(儒學提擧)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극(文克)이다.

 

정탁(鄭擢)

1363(공민왕 12)∼1423(세종 5).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여괴(汝魁)·축은(築隱), 호는 춘곡(春谷). 아버지는 정당문학 ( 政堂文學 ) 공권(公權)이다.

1382년(우왕 8)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이 후 고려대를 통하여 춘추관수찬관·사헌규정(司憲糾正)·좌정언·호조좌랑·병조좌랑·광흥창사(廣興倉使) 등을 역임하였다.1392년(태조 1) 사헌부지평과 성균관사예를 거쳐 대장군이 되었고, 이성계의 추대를 제일 먼저 발의한 공로로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393년 문하부직문하(門下府直門下), 이듬해 대사성이 되었다. 1396년 중추원우승지로 있을 때 전년부터 조선과 명나라의 현안문제로 대두된 표전문제 ( 表箋問題 )의 찬표인(撰表人)으로 명나라에 압송되었고, 귀환하여 좌승지에 서용되었으며, 다음해 중추원부사에 승진하면서 청성군(淸城君)에 봉하여졌다.

1398년(정종 즉위년) 10월 방간(芳幹)의 난 평정에 대한 공로로 정사공신 ( 定社功臣 ) 2등에 책록, 곧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가 되었다. 이어 예문관·춘추관의 대학사, 정당문학을 거쳐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삼사우사(三司右使)를 지냈다.

1403년(태종 3) 판한성부사가 되었으며, 1405년 살인죄로 직첩을 몰수당하고 영해로 유배되었으나 공신이므로 곧 사면되었다.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를 거쳐, 1408년 태조가 죽자 고부청시사(告訃請諡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15년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에 진봉되었고, 1421년 진하사 ( 進賀使 )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듬해 우의정에 올랐다.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익경(翼景)이다.

 

정탁(鄭琢)

1526(중종 21)∼1605(선조3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백곡(栢谷). 예천 출신. 현감 원로(元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교(僑)이고, 아버지는 이충(以忠)이며, 어머니는 한종결(韓從傑)의 딸이다. 이황 ( 李滉 )의 문인이다.

1552년(명종 7) 성균생원시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5년 정언을 거쳐 예조정랑·헌납 등을 지냈다. 1568년 춘추관기주관을 겸직하고,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72년(선조 5) 이조좌랑이 되고, 이어 도승지^대사성^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581년 대사헌에 올랐으나, 장령 정인홍 ( 鄭仁弘 ), 지평 박광옥 ( 朴光玉 )과 의견이 맞지 않아 사간원의 계청(啓請)으로 이조참판에 전임되었다. 1582년 진하사 ( 進賀使 )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와서 다시 대사헌에 재임되었다. 그 뒤 예조·형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89년 사은사 ( 謝恩使 )로 명나라에 다시 다녀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경사(經史)는 물론 천문·지리·상수(象數)·병가(兵家) 등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다. 1594년에는 곽재우 ( 郭再祐 )· 김덕령 ( 金德齡 ) 등의 명장을 천거하여 전란 중에 공을 세우게 했으며,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72세의 노령으로 스스로 전장에 나가서 군사들의 사기를 앙양시키려고 했으나, 왕이 연로함을 들어 만류하였다. 특히, 이 해 3월에는 옥중의 이순신 ( 李舜臣 )을 극력 신구(伸救)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였으며, 수륙병진협공책(水陸倂進挾攻策)을 건의하였다.

1599년 병으로 잠시 귀향했다가 이듬해 좌의정에 승진되고 판중추부사를 거쳐, 1603년 영중추부사에 올랐다. 이듬해 호종공신 ( 扈從功臣 ) 3등에 녹훈되었으며,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예천의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약포집≫·≪용만문견록 龍灣聞見錄≫ 등이 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정곤수(鄭琨壽)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정구(鄭逑)

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된 구(逑)가 뛰어났다.

 

정사성(鄭士誠)

1545(인종 1)∼1607(선조 40).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명(子明), 호는 지헌(芝軒). 안동 출신. 아버지는 사섬시첨정 두(枓)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식(軾)의 딸이다. 7세 때 김언기 (金彦璣)에게 수학하였으며, 10세 때는 구봉령 ( 具鳳齡 )에게 옮겨서 배우다가 1561년(명종 16) 이황 ( 李滉 )의 문하에 들어갔다.

1568년(선조 1)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87년 태릉참봉(泰陵參奉)에 제수되었다. 1589년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하였다가 1591년 다시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 내자시 ( 內資寺 )의 봉사·주부를 거쳐 양구현감으로 나갔다가 낙향, 학문연구에 힘썼다.

1596년 ≪역학계몽질의 易學啓蒙質疑≫를 썼고, 이듬해 창녕의 화왕산성 ( 火旺山城 )에 가서 곽재우 ( 郭再祐 )와 같이 의병활동에 가담하였다. 1731년(영조 7) 옥계서원 ( 玉溪書院 )에 제향, 그 뒤 철향(撤享)되었다가 1779년(정조 3) 학암리사(鶴巖里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지헌문집≫·≪역학계몽질의≫ 등이 있다.

 

정사신(鄭士信)

판결사(判決事)를 역임했다.

 

정장(鄭樟)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와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역임하였다.

 

정옥(鄭玉)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했다.

 

정내성(鄭來成)

병조참판(兵曹參判),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역임한 내성(來成)은 청주 정씨(淸州鄭氏) 가문을 더욱 빛냈다.

 

 

鄭逑 逸話(정구 일화)

 

퇴계가 도산서당에서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 하루는 성주에서 삼십대의 두 젊은이가 제자로 입문하고자 퇴계를 찾아왔다.

 

한 사람은 한강 정구(寒岡 鄭逑), 다른 한 사람은 내암 정인(萊庵 鄭仁弘)이라고 하였다.

그 날은 마침 몹시 더운 날이었다. 퇴계가 그들을 만나보니, 두 젊은 선비는 스승에 대한 예의를 갖추느라고 그 더위에도 도포를 입고 행건까지 치고 있었다.

 

인사를 끝내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자, 정구라는 청년은

에이 더워... 선생님! 더워서 도포를 좀 벗겠습니다.

하고 허락을 얻은 뒤에 도포를 훨훨 벗어 벽에 걸고 갓까지 벗어 놓더니, 수건으로 땀을 씻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행동이 하나에서 열까지 소탈하고 자연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정인홍이라는 청년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도포와 갓을 벗어 붙이기는 커녕, 찌는 듯 한 더위에도 불구하고, 그린 듯이 정좌를 하고 앉은 채 눈썹 한 개도 까딱하지 않았다. 이마에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면 몸은 땀으로 멱을 감고 있을 지경이련만,

그는 덥다는 말 한 마디도 아니 하고 정좌를 하고 있어서 몸에서 찬 바람이 일어날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두 사람의 인품은 극단적으로 대조적이었다.

 

퇴계는 담화를 나누고 그들의 행동거지를 세밀히 관찰하고 나서, 그들을 농운정사(朧雲精舍)로 가서 쉬라고 일렀다.

 

두 사람을 농운정사로 보낸 뒤에, 퇴계는 동자를 불러 이렇게 명하였다.

, 농운정사에 가서 지금 찾아왔던 두 젊은이가 어떤 모양으로 쉬고 있는지, 그들의 동태를 자세하게 살펴보고 오너라.

잠시 후에 동자가 농운정사에서 돌아와 다음과 같이 아뢰는 것이었다.

제가 가 보았더니, 정 구라는 사람은 더워서 못 견디겠다고 하면서 웃통까지 벗어 붙이고 우물가에서 발을 씻고 몸을 씻고 야단법석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인이라는 사람은 옷을 조금도 흩트리지 않은 채 깎아놓은 부처님처럼 지극히 단정한 자세로 방 안에 조용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잘 알았다. 수고했다. 그만 물러가거라.

 

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은 정식으로 제자로 입문하는 예식을 갖추려고 幣帛(폐백)을 가지고 퇴계 앞에 나타났다.

옛날에는 제자로 입문하려면 소위 집지(執贄)라고 해서 필목이나 꿩이나 그 밖의 간단한 물품을 가지고 와서 스승에게 큰 절을 올리며 폐백을 드리는 것이 입문하는 의식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퇴계는 먼저 정구의 큰 절과 폐백을 받음으로써,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기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정인홍의 차례가 오자, 퇴계는 손을 들어 폐백 올리기를 막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는 아무것도 가르칠 것이 없으니, 그대는 그냥 돌아가 주기를 바라네. 그대를 가르치기에는 나는 힘이 부족한 사람이야.

이리하여 정 인홍만은 제자로 입문시키기를 거절하고 그냥 돌려보냈다.

 

다른 제자들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 정인홍이 돌아간 뒤에 퇴계에게 거절한 이유를 물었다.

두 사람이 같이 왔는데, 선생님께서는 어찌하여 정 구에게만 입문을 허락하시고, 정 인홍은 그냥 돌려 보내셨습니까?

퇴계가 조용히 대답한다.

내가 두 사람의 거동을 살펴보니, 정구는 시종이 여일하게 常情(상정)에 따라 행동했지만, 정인홍은 하나에서 열까지 상정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상정을 벗어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언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그런 사람이 국가에 무슨 쓸모가 있다고 글을 가르쳐 주겠느냐. 상정을 벗어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언제든지 남에게 해는 주어도 이익은 못주는 법이다.

 

 

 

 

 鄭彦輔(정언보)의 묘갈명.

 

 

鄭彦輔(정언보) 成宗 8(1477)~ 中宗 15庚辰(1520) 44.

字 忠卿. 淸州人 進士.

 

공의 묘는 伊上(이상) 문곡에 있다. 묘 앞에 舊碑(구비)의 자획이 마모되어 원문과 같이 조각한 新碑(신비)가 있으나, 융경 6년 임신(선조 5, 1562) 2월에 세운 舊碑(구비)도 묘 동쪽에 그대로 서 있으니 선조 초의 墓表(묘표) 양식을 연구하는데 참고가 될 것이다. 구비의 아름다운 조각과 考妣(고비)의 각자 위치를 참고하기 바란다. 409년 뒤에 현재의 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묘비의 글은 손자 士信(사신) 찬이다.

 

【進士鄭彦輔墓】

在府北文谷 午向 夫人李氏同瑩 孫男弘文修撰墓誌

公諱彦輔字忠卿 淸州人 高麗忠義傳死節正義大夫上將軍 鄭顗之後 上將孫 諱瑎顯 忠烈王朝 爲 都僉議贊成事延英殿大司學 諡章敬公 是生淸河君 㥽不事産業常有四方之志 淸河娶 侍中忠烈公金方慶子 文英公恂女安東人也 忠烈常愛公亟稱之曰 㥽奇男子也 淸河二子 長曰 金紫光祿大夫重大匡國西原伯 文克公諱䫨 號雪軒先生 次曰 大司諫諱誧 雲谷先生 具有文集于世 雪軒生 奉善大夫少府正尹諱賹 世傳 自雪軒時以外 家別業 遂家于安東 東面之佳邱村 鄭氏之居安東 自正尹始 正尹之孫 都官佐郞 諱若 是於公爲高祖 生普文 有隱德 初仕前朝爲眞殿直 李朝開國不任 生司直諱仁老 地望高一鄕 生義盈 庫直長 諱允韶 直長娶醴泉司直權良之女 以成化丁酉生公 公生有異質 淸明純厚 未冠已有老成器 度爲鄕邦所推重 及長力學 進德風儀 秀偉鬚鬢如盡 生平無疾 言遽色喜 自少嗜書筆畵 臻妙嘗靜室 看書寫字 不少輟而於擧業 仕念泊如也 以親在堂 正德戊寅試進士 初解冬 丁內艱 居喪哀毁以 庚申六月以疾卒 享年四十四 該曹依例啓下 贈進士牌覿德 聞風者 咸痛惜之

公娶眞城李哲孫之女 是爲退溪先生之再從妹 治家方嚴有法度 婢僕必早晨 梳洗 庭謁恪謹祭祀 至老不懈 生四男二女 長曰栝無後 曰槮 曰栩 皆不永年 先 李氏卒曰 枓是孫男士信之先考府君也 自 祖考進士公卒後 祖妣李氏寡居憂患家業零丁 自先考長成之後 自知力行治家 左右奉承克盡誠孝 祖妣始忘貧 舊業復振 嘉靖己酉祖妣李以疾卒 先考與栝之繼後子 希元執喪 守墓 三年 隆慶壬申立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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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 鄭彦輔(정언보)

안동부 북쪽 문곡에 있으며 부인 이씨와 동영이다. 孫男弘(손남홍)이 글을 다듬어 묘지 문을 찬 한다.

公諱彦輔字忠卿 淸州人 高麗忠義傳死節正義大夫上將軍 鄭顗之後 上將孫 諱瑎顯 忠烈王朝 爲 都僉議贊成事延英殿大司學 諡章敬公 是生淸河君 㥽不事産業常有四方之志 淸河娶 侍中忠烈公金方慶子 文英公恂女安東人也 忠烈常愛公亟稱之曰 㥽奇男子也 淸河二子 長曰 金紫光祿大夫重大匡國西原伯 文克公諱䫨 號雪軒先生 次曰 大司諫諱誧 雲谷先生 具有文集于世 雪軒生 奉善大夫少府正尹諱賹 世傳 自雪軒時以外 家別業 遂家于安東 東面之佳邱村 鄭氏之居安東 自正尹始 正尹之孫 都官佐郞 諱若 是於公爲高祖 生普文 有隱德 初仕前朝爲眞殿直 李朝開國不任 生司直諱仁老 地望高一鄕 生義盈 庫直長 諱允韶 直長娶醴泉司直權良之女 以成化丁酉生公 公生有異質 淸明純厚 未冠已有老成器 度爲鄕邦所推重 及長力學 進德風儀 秀偉鬚鬢如盡 生平無疾 言遽色喜 自少嗜書筆畵 臻妙嘗靜室 看書寫字 不少輟而於擧業 仕念泊如也 以親在堂 正德戊寅試進士 初解冬 丁內艱 居喪哀毁以 庚申六月以疾卒 享年四十四 該曹依例啓下 贈進士牌覿德 聞風者 咸痛惜之

公娶眞城李哲孫之女 是爲退溪先生之再從妹 治家方嚴有法度 婢僕必早晨 梳洗 庭謁恪謹祭祀 至老不懈 生四男二女 長曰栝無後 曰槮 曰栩 皆不永年 先 李氏卒曰 枓是孫男士信之先考府君也 自 祖考進士公卒後 祖妣李氏寡居憂患家業零丁 自先考長成之後 自知力行治家 左右奉承克盡誠孝 祖妣始忘貧 舊業復振 嘉靖己酉祖妣李以疾卒 先考與栝之繼後子 希元執喪 守墓 三年 隆慶壬申立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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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 鄭彦輔(정언보)

안동부 북쪽 문곡에 있으며 부인 이씨와 동영이다. 孫男弘(손남홍)이 글을 다듬어 묘지 문을 찬 한다.

공의 휘는 彦輔(언보)요 자는 忠卿(충경)이며, 淸州人(청주인)이다. 고려 충의전사절정의대부상장군 鄭顗(정의)의 후손이며, 上將君(상장군)의 손자 휘 瑎顯(해현)은 충렬왕조에서 도첨의찬성사연영전대사학를 역임한 시호 章敬公(장경공)인대, 그가 淸河君(청하군)을 낳았는데, 청하군은 가사는 돌보지 아니하고 항상 사방 세상일에 뜻을 두고 있었다.

淸河(청하)는 시중 충렬공 金方慶(김방경)의 아들인 문영공 ()의 딸과 결혼을 하였는데 안동 사람이다.

충렬공은 항상 공을 사랑하시며 칭찬하며 말하기를 [뛰어나고 귀한 남자이다.]라 하였다. 淸河(청하)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은 金紫光祿大夫重大匡國西原伯(금자광록대부중대광국서원백) 文克公(문극공) ()이며 호는 雪軒先生(설헌선생)이다. 차남은 大司諫(대사간) ()이며 雲谷先生(운곡선생)이다. 두 분 모두 문집을 세상에 남겼다.

雪軒(설헌)께서는 奉善大夫少府正尹(봉선대부소부정윤) ()를 낳았다.

雪軒(설헌) , 이후로는 집에 별 가업이 없어 결국 집을 안동 동면 가구마을로 옮겼는데, 鄭氏(정씨)가 안동에 살게 된 것은 正尹(정윤) 때부터이다.

正尹(정윤)의 손자인 都官佐郞(도관좌랑) ()이 바로 ()의 고조부 生普(생보)가 된다. 글도 능하고 덕망도 두터웠다. 前朝(전조)인 고려조에서 眞殿直(진전직)이었지만 李朝(이조)가 개국한 뒤에는 벼슬을 사양했다. 司直(사직)을 낳았는데 휘는 仁老(인로)이다. 지위와 명성이 자못 높았으며, 義盈(의영)를 낳았는데 庫直長(고직장)이었다.

直長(직장)醴泉司直(예천사직) 權良之(권량지)의 딸에게 장가들어 성화 정유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나면서부터 재질이 남달랐고 맑고 밝고 순수하였으며 未冠(미관)일 때도 이미 기량이 노숙해서 鄕邦(향방)에서 높이 천거 되었고, 자라서 힘써 공부하여, 덕이 두터웠으며 수염이 그림같이 아름다웠으며, 평생 병을 몰랐고, 대화 할 때는 기쁜 듯이 말을 하였다.

어릴 때부터 글과 그림을 좋아 하여, 조용히 묘함을 감상하고, 책을 보며 글을 쓰기를 그치지 아니하며, 생업에는 마음을 두지 아니했다.

부모가 살아 있을 때인 정덕 무인 진사시험에 처음으로 합격하고, 해동 하자 모친상을 당해, 애통하면서 장사를 지냈다.

경신 유월에 벼으로 ()하니 향년 44세였다. 該曹(해조)에서 관례에 따라 進士牌覿德(진사패적덕)를 증직했는데 소문을 듣는 자는 모두 애석해하고 아까와 했다.

공은 진성 李哲孫(이철손)의 딸에게 장가 들었는데 그가 바로 退溪(퇴계)성생의 재종매였으며, 집안을 다스리는데 엄하고 법도가 있어 노비들은 이른 새벽에 일어나 머리 감고 낯을 씻고 뜰에서 삼가 명을 받았다. 제사를 받드는 것은 늙어서도 개을리 하지 아니했으며, 4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인데 후대가 없다. (), (), 모두 오래 살지 못하고 먼저 갔다.

조부 진사공이 졸한 뒤부터, 조모는 홀로 살면서 병고에 시달리고 가업은 영락했다. 그러나 先考(선고)가 장성한 뒤에 집안을 다스리는데 힘을 다하고 좌우를 받들어 효도를 극진히 하니, 조모는 비로소 가난을 잊었고, 옛날의 가업은 복구 되었다.

가정 기유 조비 이씨가 병으로 졸하게 되니, 선고는 繼後子(계후자) 希元(희원)과 함께 상을 치르고 3년간 묘를 지켰다.

융경 임신년에 묘비를 세우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4

昌(창)

27

燮(섭),烈(열)

30

潤(윤),淵(연)

25

洛(락)

28

載(재),在(재)

31

寅(인),震(진)

26

柱(주)

29

鎭(진),鎬(호)

32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청주 정씨(淸州鄭氏)는 남한(南韓)에 총 8,802가구,

36,30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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