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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계정씨(鄭)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鄭(초계정씨)

 

 

본관(本貫): 초계(草溪)

시조(始祖): 정배걸(鄭倍傑)

유래(由來):

 

초계 정씨(草溪鄭氏)의 시조(始祖)는 고려초(高麗初)에 학자(學者)로 이름난 정배걸(鄭倍傑) 이다.

배걸은 초계 성산(草溪城山) 출신으로 1017년(고려 현종 8) 장원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종(文宗)때 예부 상서(禮部尙書)에 이르렀으며, 사숙(私塾)을 열고 많은 제자들을 가르쳐 「십이공도(十二公徒)」의 하나인 「홍문공도(弘文公徒)」를 이루어 유가(儒家)의 대가(大家)요, 백세(百世)의 존사(尊師)라 일컬어졌다.

홍문광학추성찬화공신(弘文廣學推誠贊化功臣)으로 개부의동삼사수태위문하시중상주국광유후(開府儀同三司守太尉門下侍中上柱國光儒侯))에 이르고 초계군(草溪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초계(草溪)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정문(鄭文)

∼1106(예종 1). 고려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초계 ( 草溪 ). 자는 의덕(懿德). 예부상서·중추원사(中樞院使) 배걸(倍傑)의 아들이다. 유복자로 태어나 문과에 급제한 뒤 문종 때 비서랑(秘書郞)이 되었고, 선종이 즉위하면서 직한림(直翰林) 겸 사문조교(四門助敎)에 발탁되었다.

이어 우습유 ( 右拾遺 )가 되자, 대간에서 그의 외조가 처인부곡(處仁部曲) 출신이므로 간관이 됨은 마땅하지 않다고 하므로 전중내급사 지제고(殿中內給使知制誥)로 고쳐 제수되었다가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를 거쳐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郎)이 되었다.

1105년(숙종 10)에 형부상서 정당문학 겸 태자빈객(刑部尙書政堂文學兼太子賓客)이 되고 검교사공 예부상서(檢校司空禮部尙書)가 더해졌다. 청렴·공정하여 형조를 10여년 맡았으나 일을 잘 처리하였고,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받은 금백(金帛)을 그의 종자에게 나누어주고 그 나머지로는 모두 서적을 사가지고 왔다 한다.

일찍이 서경에 호종하여 기자(箕子)의 사당을 세우도록 청하기도 하였다. 죽은 뒤 특진 좌복야 참지정사(特進左僕射參知政事)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정온(鄭蘊)

1569(선조 2) ∼ 1641(인조 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초계 ( 草溪 ).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 · 고고자(鼓鼓子). 별제 옥견(玉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좌승지 숙(淑)이고, 아버지는 진사 유명(惟明)이다. 어머니는 장사랑 강근우(姜謹友)의 딸이다.

1601년 (선조 39)에 진사가 되고,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시강원겸설서 · 사간원정언을 역임하였다. 임해군옥사에 대해 전은설(全恩說)을 주장했고, 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 ( 鄭沆 )에 의해서 피살되자 격렬한 상소를 올려 정항의 처벌과 당시 일어나고 있던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이에 광해군은 격분하여 이원익 ( 李元翼 )과 심희수 ( 沈喜壽 )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문할 것을 명하고 이어서 제주도에 위리안치하도록 하였다. 그 뒤 인조반정 때까지 10년 동안 유배지에 있으면서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중국 옛 성현들의 명언을 모은 ≪ 덕변록 德辨錄 ≫ 을 지어 이것으로 자신을 반성하였다.

인조반정 후 광해군 때 절의를 지킨 인물로 지목되어 사간 · 이조참의 · 대사간 · 대제학 · 이조참판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다. 특히, 언관에 있으면서 반정공신들의 비리와 병권장악을 공격하였다. 또 폐세자(廢世子 : 광해군의 아들 睡 )와 선조의 서자 인성군 공(仁城君珙)의 옥사에 대해 전은설을 주장, 공신들을 견제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행재소 ( 行在所 )로 왕을 호종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이조참판으로서 명나라와 조선과의 의리를 내세워 최명길 ( 崔鳴吉 ) 등의 화의주장을 적극 반대하였다. 강화도가 함락되고 항복이 결정되자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수치를 참을 수 없다고 하며 칼로 자결했으나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 뒤 관직을 단념하고 덕유산에 들어가 조 〔 粟 〕 를 심어 생계를 자급하다가 죽었다. 숙종 때 절의를 높이 평가하여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어려서부터 당시 경상우도에서 명성이 자자하던 정인홍 ( 鄭仁弘 )에게 사사하여 그의 강개한 기질과 학통을 전수받았다.

1607년 정인홍이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의혹을 일으키는 유영경 ( 柳永慶 ) 등 소북파를 탄핵하다가 처벌을 받자 정인홍을 위해 변호 상소를 올렸다. 광해군 때는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옥사를 두고 비록 의견이 달랐지만 정인홍에 대한 의리는 변하지 않아 인조반정 후 정인홍의 처벌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후 격화된 당쟁 속에서 그와 그의 후손들은 남인으로 처신했고, 정인홍이 역적으로 심하게 몰리면서 정구 ( 鄭逑 )를 사사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의 현실대응 자세는 조식(曺植)에서 정인홍으로 이어지는 강개한 기질을 이어받아 매사에 과격한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것은 영창대군 옥사 때의 상소나 대청관계에서의 척화론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조선 후기 숭명배청사상이 고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김상헌 ( 金尙憲 )보다 크게 추앙받지 못한 것은 색목(色目)이 노론이 아니었는데 연유한다. 허목 ( 許穆 ) · 조경 ( 趙絅 ) 등 기호남인(畿湖南人)과도 깊은 관계를 가져 이황 ( 李滉 )-정구-허목으로 이어지는 기호남인학통 수립에도 큰 구실을 하였다.

광주 ( 廣州 )의 현절사 ( 顯節祠 )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에 제향되었다. 그의 생가는 중요민속자료 제205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정윤겸(鄭允謙)

1463(세조 9)∼1536(중종 31).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초계 ( 草溪 ). 자는 익부(益夫).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온(溫)이다. 일찍부터 병법을 익혔고, 1491년(성종 22) 변경을 시끄럽게 하는 야인을 토벌할 때 원수 허종 ( 許琮 )의 막하에서 활약하였다.

이듬해 무과에 급제, 훈련원에 보직되고 이어 사헌부감찰·군자시주부·사복시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1506년의 중종반정에 참여 그 공으로 삼등공신인 병충분의정국공신(秉忠奮義靖國功臣)에 녹훈되고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에 발탁되었다.

이듬해 공신에게 특별히 품계를 주는 예에 따라 통정대부로 당상관에 오르고, 간성군수에 임명되었으며, 4년 뒤 웅천부사로 옮겨 삼포왜란 이후의 민심수습과 복구에 힘썼다. 다시 충청도수군절도사를 거쳐 함경남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자 북청에 성을 쌓아 여진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1518년(중종 13) 첨지중추부사로 전보되었다가 이듬해 가선(嘉善)으로 승진, 청계군(淸溪君)에 봉하여지고 특별히 회령부사에 제수되었다.

1522년 전라도수군절도사로 기용됨에 병선과 무기를 수리하여 유사시에 대비하다가 명나라를 약탈하고 돌아가는 왜구를 격멸, 그 공로로 품계가 더하여지고 조정으로부터는 궁시(弓矢)와 의대(衣帶)가, 그리고 명나라로부터도 백금이 하사되었다.

이어 훈련원도정이 되었다가 1525년 성절사 ( 聖節使 )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평안도병마사가 되고, 상호군을 거쳐 충청도병마사로 있을 때 무고로 인하여 횡성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곧 죄가 풀려 부총관에 서용되고,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삼척부사가 되었다.

청렴하며 장재(將材)로 손꼽혀 30여년간 남북 변경의 장수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장양(莊襄)이다.

 

정종영(鄭宗榮)

1513(중종 8)∼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초계 ( 草溪 ). 자는 인길(仁吉), 호는 항재(恒齋). 온(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겸(允謙)이고, 아버지는 현감 숙(淑)이며, 어머니는 충의위 ( 忠義衛 ) 김계훈(金季勳)의 딸이다. 김안국 ( 金安國 )의 문인이다.

1540년(중종 35) 사마양시에 모두 합격하고, 154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검열이 되고, 1547년(명종 2) 호조정랑·헌납 등을 거쳐 뒤에 부수찬·교리 등을 지냈다. 1552년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공조참판이 되었다.

강원도관찰사 때는 도민들을 안무(安撫)하고,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여서는 서북지방인이 무예를 좋아하고 문교(文敎)를 싫어하는 지방이라는 형세를 감안하여 평양에 서원과 서적포를 설립하여 학문의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뒤 팔계군(八溪君)에 습봉(襲封)되었다.

1562년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윤원형 ( 尹元衡 )에게 아부하여 부정행위를 자행하는 수령들을 응징하고, 내전의 힘을 빌려 발호하는 요승(妖僧)을 제거하였다. 1567년 한성부판윤으로 진향사 ( 進香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육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우찬성으로 사직하였다.

서예에도 뛰어났으며, 저서로는 ≪항재집≫이 있다. 원주의 칠봉서원 ( 七峰書院 )에 봉향되었다. 시호는 정헌(靖憲)이다.

 

정엽(鄭曄)

1563(명종 18) ∼ 1625(인조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초계 ( 草溪 ). 자는 시회(時晦), 호는 수몽(守夢). 희년(熙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선(璇)이고, 아버지는 진사 유성(惟誠)이다. 어머니는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증찬성 언태(彦台)의 딸이다.

3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4세 때 벌써 시를 지어 이이(李珥)와 정유길 ( 鄭惟吉 )로부터 신동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이지함(李之 旅 )의 주선으로 송익필 ( 宋翼弼 )에게서 수업하고, 성혼 ( 成渾 ) · 이이의 문하에 출입하여 당시의 명류들과 교유하였다. 1583년(선조 1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을 거쳐 홍문관의 문한직(文翰職)을 맡았다.

1587년 감찰 · 형조좌랑이 되었으며, 1593년 황주판관으로 왜군을 격퇴, 그 공으로 중화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홍문관수찬 · 장령을 거쳐 서천군수를 역임하였다. 1597년 예조정랑으로 있을 때 정유재란이 일어나 고급사(告急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고, 귀국 후 성균관사성을 거쳐 수원부사가 되었다.

삼남대로에 있는 수원은 당시 난을 치르면서 큰 피해를 입고 있었으나, 군민을 잘 다스려 서천군수 때와 마찬가지로 주민들로부터 크게 칭송을 받았다. 1598년에 응교 · 집의로서 시강원필선을 겸하고, 동부승지 · 우부승지를 거쳐 형조참의로 있을 때 동지사 ( 冬至使 )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귀국 후 나주목사를 거쳐, 병조참지 · 대사간 · 예조참의를 역임했고, 영위사(迎慰使)로서 관서 지방에 다녀왔다.

이 무렵 척속 기자헌 ( 奇自獻 )이 이조좌랑의 추천을 받았으나 끝까지 반대하였다. 1602년 정인홍 ( 鄭仁弘 )이 권력을 잡아 성혼을 배척하자, 성혼의 문인이었던 그도 종성부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학교 교육을 크게 일으키고, 때마침 오랑캐 수만 명이 침입하자 계교로 적을 물리쳤다. 이 때 피해는 피로자(被擄者) 한 명 뿐이었으나, 기자헌의 농간으로 동래에 유배되었다.

1605년에 풀려나 이듬해 성주 · 홍주의 외직을 차례로 맡았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예조참의가 되었다가 이듬해에 대사성을 거쳐, 1610년에는 충청감사가 되었다. 그 뒤 예조참의 · 승지 · 판결사 · 도승지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도승지로 있을 때 광해군이 경연을 소홀히 여기는 것을 보고 직언하다가 호조참의로 강등되었으나, 곧 참판에 오르고 1613년에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이 때 계축옥사가 일어나 사실을 밝히고자 했으나, 어머니의 만류로 상소를 포기하고 도승지를 사직하였다. 1617년에 폐모론이 제기되자 외직을 구해 양양부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폐모의 조처가 단행되자 관직을 버리고 여주에 돌아와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조정에 나와 강화도에 위리안치키로 된 광해군을 전날에 북면(北面)한 군주이므로 곡송(哭送)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 주위로부터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반정 초에 비변사의 합사(合辭)로 대사성에 동지경연(同知經筵) · 원자사부(元子師傅)를 겸하는 중책이 맡겨져, 학제를 상정하여 성균관을 다시 크게 일으키는 공적을 남겼다.

이후 곧 대사간에 제수되어 대사성을 그만두어야 했으나, 국왕의 특명으로 그대로 겸하게 되었는데, 대사성으로서 타직을 겸하는 예가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한다. 인조반정 이후 친명정책의 표방과 함께 후금에 대한 적극정책으로 적의 침입이 있으면 국왕이 삼군을 이끌고 송도에 진주한다는 친정(親政)의 계책이 공식적으로 택해졌는데, 이 안이 그로부터 나왔다. 또, 이괄 ( 李适 )의 난 때 공주파천의 안을 과감히 제기한 것도 그였다.

공주에 있을 때 자헌대부 ( 資憲大夫 )로 승진되고, 환도 후 다시 정헌대부 ( 正憲大夫 )로 대사헌에 제수되고, 또 우참찬이 되었다. 대사헌을 다섯 번 겸하고, 한꺼번에 네 가지 직임을 겸하기까지 하여 격무로 병을 얻어 63세에 죽었다. 저서로 ≪ 근사록석의 近思錄釋疑 ≫ 와 ≪ 수몽집 ≫ 이 있다.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정여직(鄭汝稷)

1713(숙종 39)∼1776(영조 52).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초계 ( 草溪 ). 자는 순필(舜弼). 할아버지는 수군통제사 홍좌(弘佐)이며, 아버지는 진사 도흥(道興)이다.

1735년(영조 11) 무과에 급제한 뒤 부령부사로 있을 때 어사 홍계희 ( 洪啓禧 )의 복명에 의하여 선치수령(善治守令)으로 뽑혀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1743년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승진한 뒤 함경도남병사·경기도수군절도사·함경도북병사 등을 거쳐 1758년 비변사의 추천으로 어영대장에 발탁되었다.

이듬해 어영청순라군이 금주령을 어긴 사실이 적발되어 일시 파직되었으나 오위의 사직으로 복직된 뒤 춘당대(春塘臺) 시사(試射)에서 탁월한 성적을 내어 가자(加資)되었다.

그 뒤 어영대장에 재기용되었으며 이어 좌포도대장 재직중 다시 금주령 위배와 관련, 경기도 남양에 유배된 일이 있었다. 1765년 이후 총융사·훈련대장·한성부우윤 등을 지냈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초계 정씨(草溪鄭氏)는 남한(南韓)에 총 20,215가구, 83,31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鄭蘊(정온) 선생의 일화.

눈을 질러도
정온은 고려 말에 벼슬이 대사헌까지 올랐으나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굳게 지킨 충신이다.
이태조는 칙사를 보내어 사봉면 사곡리에 은거하고 있던 그를 모시려 하였으나, 선생은 눈이 어둡다며 거절하였다. 이를 의심한 칙사가 솔잎으로 선생의 눈을 찔렀으나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자 하는 수 없이 그냥 돌아갔고, 이후 사람들은 그를 눈뜬 소경 정온선생이라 부르게 되었다.

1569(선조 2) ∼ 1641(인조 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 · 고고자(鼓鼓子). 별제 옥견(玉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좌승지 숙(淑)이고, 아버지는 진사 유명(惟明)이다. 어머니는 장사랑 강근우(姜謹友)의 딸이다.

 

 

 

동래부사 정현덕 선생이 일화

 

정현덕의 자는 백순(伯純), 호는 우전(雨田)으로, 본관이 동래(東來) 라는 견해와 초계(草溪)라는 견해가 있다 . 철종 1(1850)에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리로 출발하였다. 철종 13(1862)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대원군이 집권하자 그의 심복으로서 동래부사에 임명되었다. 원래 동래부사는 대일외교의 실무의 책임을 갖고 있기에 정현덕은 평소의 소신인 위정척사의 정책을 폈다.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후 조선에 대한 유신을 통고하기로 결정하고, 185812월 관인을 파견 서계를 전달하였다.

 

이후 일본은 조선과의 새로운 국교를 열기 위해 수 차례의 교섭을 펼쳤으나 단호히 거부하였다. 조선정부와 동래부의 강경한 태도에 일본에서 정한론이 대두케 하였다. 부사는 일본의 침입을 염려하여 동래읍성을 수축케하여 군의 강화를 기하였다. 이어 이조참의를 역임하였으며 대원군이 실각하자 그도 따라 파면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재집권하자 형조참판으로 기용되었으나 대원군이 실각 함으로써 파면되고 유배된 뒤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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