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鄭(풍기정씨)
본관(本貫): 풍기(豊基)
시조(始祖): 정의(鄭誼)
유래(由來):
풍기 정씨(豊基鄭氏)는 시조(始祖) 정의(鄭誼)가 고려조(高麗朝)에 영정 감무(永定監務)를 역임하였으므로 관적(貫籍)을 영정(永定)으로 하였다가, 그의 아들 기(琪)가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 공(功)을 세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녹훈(錄勳)되고 풍기군(豊基君)에 봉(封)해졌으므로 봉군(封君)된 읍호(邑號)인 풍기를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壬辰倭亂)때 15세손 형(衡)이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살다가 영남(嶺南)으로 피난 중에 보첩(譜牒)에 관한 문헌(文獻)을 분실(紛失)하여 시조(始祖)의 선계는 물론 분관(分貫)된 소목(昭穆)의 연원(淵源)을 소상히 밝히지 못하고 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정균(鄭筠)
기(琪)의 아들 균(筠)이 고려조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올랐다.
정덕승(鄭德承), 정덕상(鄭德尙)
조선조(朝鮮朝)에서 도사(都事) 수산(壽山)의 아들 덕승(德承)과 덕상(德尙)이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정태재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에 책록된 태재가 유명했다.
정익화(鄭益華)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일람(一覽) 익화(益華)가 뛰어났다.
정시영(鄭始榮)
학자(學者)로 유명했다.
정연성(鄭淵性)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을 역임한 연성(淵性)는 풍기 정씨의 가문을 빛냈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풍기 정씨(豊基鄭氏)는 남한(南韓)에 총 169가구, 69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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