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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정씨(鄭)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鄭(하동정씨)

 

 

본관(本貫): 하동(河東)

시조(始祖): 정도정(鄭道正):정응(鄭應):정손위(鄭遜位)

유래(由來):

 

하동 정씨(河東鄭氏)는「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연원(淵源)을 알 수 없는 여섯 계통(系統)으로 분류(分類)하고 있으나, 현존(現存)하는 하동 정씨의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같이 하면서 계통(系統)을 달리하는 다음 세 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첫째 계통(系統)은 삼한(三韓)의 말기(末期)에 하동(河東)으로 이거(移居)하여 고려초에 호장(戶長)을 거쳐 평장사(平章事)에 오른 정도정(鄭道正)을 시조(始祖)로 하고, 그의 후손(後孫) 석숭(碩崇)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를 이어온 계통이다.

둘째 계통은 고려 초에 하동지방(河東地方)의 민병(民兵)을 주관(主管)하던 사족(士族)의 후손으로 고려 덕종(德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 도첨의 좌정승(都僉議左政丞) . 검교태자첨사(檢校太子詹事) 등을 지낸 정응(鄭應)을 시조(始祖)로 하는 계통이다.

셋째 계통은 고려 숙종(肅宗)과 명종조(明宗朝)에 걸쳐 다섯 왕조에 벼슬을 지냈고 정헌대부(正憲大夫) . 지예부사(知禮部事) . 문하시중(門下侍中) 등을 역임한 후 하동백(河東伯)에 봉해진 정손위(鄭遜位)를 시조(始祖)로 하는 계통이다.

 

가문의 중요 인물

 

정세유(鄭世裕)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무신. 본관은 하동(河東). 서북면병마사·형부상서 등의 벼슬을 지냈다. 1184년(명종 14) 서북면병마사로 있으면서 백성의 재물을 거두어 내부(內府)에 바쳐 왕의 환심을 샀다.

서북면에서 돌아와 아들 윤당(允當)을 전조(銓曹 : 인사행정부서)에 임명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윤당의 나이가 어리고 지식이 없었으므로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郎)을 제수하였다.

1185년 형부상서에 임명되었으나 이때 참지정사 ( 參知政事 ) 상장군 문장필 ( 文章弼 ) 등 여러 장군이 그를 탄핵하여 섬에 유배되었는데 그 죄목을 다음과 같다고 했다.

즉 그가 서북면병마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백성들로부터 명주실과 진귀한 완구(琓具) 등속의 물품을 거두어 공물 ( 貢物 )로 바치는 것이라 거짓으로 꾸며 자기의 재산으로 축재한 사실과, 형부상서로 있으면서 법률의 조문을 마음대로 해석하여 뇌물의 많고 적음으로써 사람들의 죄를 더 주기도 하고 덜 주기도 하는 등의 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 뒤 풀려났다가 1194년 반역을 도모한다는 대정 ( 隊正 ) 이금대(李金大)의 밀고에 의해서 그 아들 윤당·숙첨(叔瞻) 등과 함께 남쪽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정숙첨(鄭叔瞻)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하동(河東). 형부상서 세유(世猷)의 아들이며, 최우 ( 崔瑀 )의 장인이다. 1194년(명종 24) 아버지가 반역한다는 전대정(前隊正) 이금대(李金大)의 무고로 형 윤당(允當)과 함께 유배되었다.

그 뒤 풀려나 1204년(신종 7)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로서 승도(僧徒) 등이 최충헌 ( 崔忠獻 )을 암살하려고 하자 수창궁 ( 壽昌宮 )에 들어가 이를 구원하였다. 1206년(희종 2) 우승선으로 왕의 책명(冊命) 때 금사(金使)와 행례소(行禮所) 문제를 상의하였다.

1215년(고종 2) 형 진( 貰 )과 함께 반역을 도모한다는 예부원외랑 윤세유 ( 尹世儒 )의 모함을 받았으나 무고임이 밝혀졌다.

이듬해 거란의 금산왕자(金山王子)가 침입하자, 참지정사 ( 參知政事 )로서 행영중군원수(行營中軍元帥)가 되어 부원수 조충(趙 食 )과 함께 염주(鹽州 : 황해도 연안) · 배주(白州 : 황해도 배천)의 적을 공격하기 위하여 흥의(興義) · 금교역(金郊驛) 사이에 진을 쳤다가 군중(軍中)이 놀라 달아나자 다시 국청사 ( 國淸寺 )로 옮겼다.

1217년 최충헌 모살사건에 연루되어 원수직에서 파면되고 하동에 유배되었다. 원수가 된 뒤로 군사들로부터 뇌물을 많이 받았으며, 군중에서 최충헌이 왕실을 쇠잔하게 하고 적을 불러들였다고 비방한 까닭에 최충헌이 죽이려 하였으나 최우가 힘써 구해주었다. 뒤에 평장사에 올랐다.

 

정안(鄭晏)

∼ 1251(고종 38). 고려 후기의 무신. 본관은 하동(河東). 초명은 분(奮).자는 화경(和卿). 형부상서 세유(世裕)의 손자로, 평장사 숙첨(叔瞻)의 아들이며, 최우(崔偶)의 생질이다. 총명하여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였고, 음양 · 산술 · 의약 · 음률에도 정통하였다.

진양의 수령이 되었으나 어머니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인 하동에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집권자 최우의 추천으로 국자좨주(國子祭酒)가 되었고 1241년(고종 28)에 동지공거 ( 同知貢擧 )로 과거를 주관하였으며, 최우의 횡포가 날로 심하여지자 화가 미칠까 두려워 남해로 은퇴하였다.

불교를 독신하여 명산대찰을 순방하고 사재를 희사하여 당시 간행중이던 대장경의 일부를 펴내기도 하였다. 은퇴 후에도 권귀(權貴)에게 아첨하며 사치를 좋아하여 저택 · 기명 등이 매우 호화로웠다. 최우가 죽고 최항 ( 崔沆 )이 집권하자 1251년에 다시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가 되었으며, 뒤이어 참지정사 ( 參知政事 )에 올랐다.

어느날 문생인 낭장 임보(林 癩 ), 내시 이덕영 ( 李德英 ), 함주부사 석연분(石演芬) 등과 시사를 논할 때 최항이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것을 비판하다가 그 말이 알려져 가산은 적몰되고 백령도에 귀양갔다가 살해되었다.

 

정초(鄭招)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초(招)가 집의(執義) 희(熙)의 아들로 일찍이 당대의 명신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태종(太宗)때 문과에 급제하여 좌정언(左正言)을 거쳐 판승문원사(判承文院事)에 이르렀다. 우사간(右司諫)을 거친 다음 세종조(世宗朝)에서 공조(工曹) . 예조 참의(禮曹參議). 좌우대언(左右代言) 등을 지낸 뒤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를 역임하였고, 1430년(세종 12) 왕명으로 「농사직설(農事直說)」을 찬진(撰進)했다. 이어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되어 정인지(鄭麟趾)와 함께 역법(曆法)을 개정했고, 「회례문무악장(會禮文武樂章)「삼강행실도발(三綱行實圖跋)」을 편찬했다.

 

정인지(鄭麟趾)

1396(태조 5) ∼ 1478(성종 9).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저(伯雎), 호는 학역재(學易齋). 익(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을귀(乙貴)이고, 아버지는 석성현감(石城縣監) 증영의정부사(贈領議政府事) 흥인(興仁)이다. 어머니는 진천의(陳千義)의 딸이다.

정도전 ( 鄭道傳 ) · 권우 ( 權遇 )의 문인이다. 1411년(태종 11) 생원시에 합격했고, 1414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에 제수되었다. 1415년 예문관부교리에 개수(改授)되고, 이어 감찰 · 예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418년(세종 즉위년) 8월 병조좌랑을 거쳐 1421년(세종 3)에는 상왕(上王 : 태종)의 “ 대임을 맡길만한 인물이니 중용하라. ” 는 요청과 함께 병조정랑에 승직되었다. 이후 세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이조 · 예조의 정랑을 역임하였다. 1424년 집현전관(集賢殿官)에 뽑히면서 응교에 제수되고, 다음해 직전(直殿)에 승진되었다.

1427년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다시 직제학에 승진, 곧 세자시강원좌필선을 겸대한 뒤, 다음해 통정대부 ( 通政大夫 )에 오르면서 또다시 부제학에 승진되었다. 1430년 10월 가선대부 ( 嘉善大夫 )에 오르면서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 다음해에는 정초 ( 鄭招 )와 함께 대통력(大統曆)을 개정하고 ≪ 칠정산내편 七政算內篇 ≫ 을 저술하는 등 역법을 정비하였다.

1432년 예문관제학 겸 동지춘추관사(藝文館提學兼同知春秋館事), 1433년 2월 인수부윤(仁壽府尹), 같은 해 6월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1434년 4월 이조좌참판에 발탁되고, 같은 해 10월 다시 예문관제학을 거쳐 1435년 6월 충청도관찰사로 나갔으나 다음해 9월 부상으로 사직하였다. 1437년 세종의 문운 육성에 대한 관심과 함께 기복 ( 起復 )되어 예문관제학에 서용되었다.

1439년에는 집현전제학이 된 뒤 곧 형조참판으로 옮겼다가 1440년 5월 정연 ( 鄭淵 )의 천거를 받아 형조판서에 발탁되었다. 같은 해 11월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거쳐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42년 예문관대제학으로 ≪ 사륜요집 絲綸要集 ≫ 을 편찬하였다.

이듬해 지중추원사로 당시에 찬 · 반의 논의가 격렬하던 공법 ( 貢法 )을 극력 주장, 그 실시를 확정하는 데 공헌하였다. 이후, 전제상정소 ( 田制詳定所 )의 제조 ( 提調 ) 및 삼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로 파견되어 경상도 · 전라도 · 충청도의 전품(田品)을 분정(分定)하는 등 내 · 외의 전제사를 주관하였다.

1445년 1월 우참찬이 되고, 그 해 ≪ 치평요람 治平要覽 ≫ 을 찬진하였다. 다음 해 예조판서를 거쳐 1447년에는 이조판서 겸 지춘추관사가 되어 ≪ 태조실록 ≫ 을 증수(增修)하는 데 참여하였다.

한편으로는 전라도에 파견되어 전품을 다시 상정하였다. 1449년 공조판서를 거쳐 1450년(문종 즉위년) 좌참찬이 되고, 1451년 김종서 ( 金宗瑞 ) 등과 함께 ≪ 고려사 ≫ 를 개찬(改撰)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김종서 등과 함께 다시 ≪ 고려사절요 ≫ 를 편찬하였다.

1452년(단종 즉위년) 병조판서가 되어 병정(兵政)을 관장하면서 단종을 보필했으나, 그의 강직함을 꺼려한 황보 인(皇甫仁) · 김종서의 배척을 받아 품계는 숭정대부 ( 崇政大夫 )에 올랐으나 관직은 한직인 판중추원사로 체직되었다.

1453년 수양대군(首陽大君 : 뒤의 세조)이 주도한 계유정변의 성공과 함께 정변에 협찬한 공로와 수양대군의 신임 및 그의 인망으로 특별히 좌의정에 발탁되고, 정난공신 ( 靖難功臣 ) 2등에 책록되면서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군되었다.

1452년부터 1454년에 걸쳐 편찬된 ≪ 세종실록 ≫ 을 총감수(總監修)하였다. 1455년(세조 1) 세조의 즉위와 함께 영의정부사에 승진되었다. 그리고 세자사(世子師)를 예겸(例兼)한 뒤 세조 즉위에 끼친 공로로 다시 좌익공신 ( 佐翼功臣 ) 3등에 책록되었다.

1458년 공신연(功臣宴)을 베풀 때, 세조의 불서간행을 반대한 일로 세조의 노여움을 사서 논죄되면서 고신 ( 告身 )이 몰수되었으나, 곧 고신을 환급받고 하동부원군에 제수되었다.

1459년 취중에 직간한 일이 국왕에게 무례를 범했다고 논죄되면서 다시 고신을 몰수당하고 외방에 종편(從便)되었다. 그러나 그 해에 다시 소환되어 고신을 환급받고, 그 이듬해 하동부원군에 복직되었다.

1465년 나이 70을 이유로 치사(致仕)를 청했으나, 허락 받지 못하고 궤장( 廓 杖)을 하사받았다. 다음해 관제 개혁으로 인한 부원군호의 개칭과 함께 하동군(河東君)에 개봉(改封)되었다.

1468년(예종 즉위년) 남이 ( 南怡 )의 옥사에 끼친 공로로 다시 익대공신 ( 翊戴功臣 ) 3등에 책록되었으며, 1470년(성종 1) 부원군호의 복구와 함께 하동부원군에 개봉되고 경연영사(經筵領事)를 겸대하였다.

같은 해 1467년(세조 13)에 설치된 원상제에 따라 원상에 임명된 후 국왕의 측근에서 국정의 논의와 처결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1471년 성종 즉위에 끼친 공로로 또다시 좌리공신 ( 佐理功臣 ) 2등에 책록되었다.

1478년 성종의 호학 및 당시의 문운 융성과 함께 연덕(年德)을 구비하고 명망이 높은 유학자를 삼로오갱(三老五更 : 王師)으로 봉해 문풍을 더한층 진작시키자는 논의에 힘입어 삼로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진봉식 거행 직전에 대간의 “ 한미한 가문에서 기신했으나 식화(殖貨)에 전념하여 치부했으니 불가하다. ” 라는 반대가 있었다. 비록 한명회 ( 韓明澮 ) 등의 대신이 “ 정인지의 식화는 장리(長利)에 불과했으니 큰 흠이 될 수 없다. ” 라고 하면서 그 실시를 주장했지만, 결국은 진봉되지 못하였다. 같은 해에 하동부원군으로 죽었다.

그는 유학과 전고(典故)에 밝아 조선 초기의 대표적 유학자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었다. 비록 큰 정치력은 발휘하지 못했으나 세종 ∼ 문종대에 국왕의 신임을 받으면서 문한(文翰)을 관장하고 역사 · 천문 · 역법 · 아악을 정리하였다. 이와 아울러 한글창제에도 참여하는 등 문풍 육성과 제도 정비에 기여하였다.

단종 ∼ 성종 초에는 학덕을 구비한 원로대신으로서의 풍도를 지킴으로써 빈번한 정변과 어린 국왕의 즉위로 인한 경직되고 혼란된 정치 분위기와 민심을 진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저서로 ≪ 학역재집 ≫ 이 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정현조(鄭縣祖)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하동(河東). 을귀(乙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흥인(興仁)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인지(麟趾)이며, 어머니는 이휴(李携)의 딸이다.

1455년(세조 1) 세조의 딸 의숙공주(懿淑公主)와 혼인하여 하성위(河城尉)에 봉하여졌고, 1466년 1월 의빈부의빈(儀賓府儀賓)이 되었으며, 1467년 10월 하성군(河城君)으로 개봉되었다. 이듬해 온양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는데, 부마로서 과거에 응시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1468년(예종 즉위년) 10월 남이 ( 南怡 )의 옥사에 공헌하여 익대공신 ( 翊戴功臣 ) 2등에 책록되고 수록대부하성군에 봉하여졌으며, 1471년(성종 2) 3월 성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다시 좌리공신 ( 佐理功臣 ) 1등에 책록되고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에 진봉되었다.

전명(傳命)에 능하여 세조의 ≪ 경국대전 ≫ 찬정(撰定)에 공헌한 바 있으나, 만년에는 작첩(作妾)과 불교를 너무 숭상한 것 때문에 대간으로부터 여러 번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시호는 편정( 揶 玎)이다.

 

정숭조(鄭崇祖)

인지의 둘째 아들 숭조(崇祖)는 음보(蔭補)로 벼슬에 올라 공조(工曹) 및 이조참판(吏曹參判)을 거쳐 성종(成宗) 때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하남군(河南君)에 봉해졌다.

 

정수충(鄭守忠)

1401(태종 1)∼1460(세조 6).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경부(敬夫). 태보(台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희(熙)이고, 아버지는 감찰 제(提)이며, 어머니는 광주김씨(光州金氏)로 관찰사 약채(若采)의 딸이다.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고 재행(才行)이 있었다.

처음에는 환관 ( 宦官 )들을 교육하였고, 뒤에는 세종의 명으로 영응대군 염 (永膺大君琰)을 가르쳤다. 승의부위사정(丞義副尉司正)·경창부승(慶昌府丞) 등을 거쳐 1449년(세종 31) 수부사직으로 경창부승을 겸하였다. 1450년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승문원부교리가 되어 수양대군을 따라 집현전에 나아가서 ≪역대병요 歷代兵要≫를 찬하였고, 그 뒤 훈련원주부·서학교수(西學敎授)·성균관사예 등을 거쳤다.

1453년(단종 1) 행사용(行司勇)으로서 수양대군이 단종의 보좌세력인 황보 인(皇甫仁)· 김종서 ( 金宗瑞 ) 등 원로대신을 살해, 제거하는 데 가담하여 6품직에서 4품직으로 승진되고, 1455년(세조 1)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좌익공신 ( 佐翼功臣 ) 3등에 책록되었다.

이듬해 성균관사성이 되고, 1457년 집현전직제학으로 승진, 하원군 ( 河原君 )에 봉하여졌다. 1457년 첨지중추원사가 되고 숭정대부 ( 崇政大夫 )에 승진하였고, 봉조하 ( 奉朝賀 )가 되었다. 이해 의경세자(懿敬世子)가 죽자 세조의 명으로 주상자(主喪者)가 되었다. 청렴 검소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정여창(鄭汝昌)

1450(세종 32) ∼ 1504(연산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 학자.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 泮 ), 호는 일두(一 亘 ) · 수옹(睡翁). 판종부시사 지의(之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전농시사 복주(復周)이며, 아버지는 함길도병마우후 증한성부좌윤 육을(六乙)이다. 어머니는 목사 최효손(崔孝孫)의 딸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에 힘쓰다가 김굉필 ( 金宏弼 )과 함께 김종직 ( 金宗直 )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 논어 ≫ 에 밝았고 성리학의 근원을 탐구하여 체용(體用)의 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1480년(성종 11)에 성종이 성균관에 유서를 내려 행실을 닦고 경학에 밝은 사람을 구하자 성균관에서 그를 제일로 천거하였다.

지관사 서거정 ( 徐居正 )이 그를 경연에서 진강하게 하려 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1483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8월에는 성균관 상사(上舍)의 동렬(同列)에서 그를 이학 ( 理學 )으로 추천하였다. 1486년 어머니가 이질에 걸리자 극진히 간호했으며, 어머니가 죽자 최복(衰服)을 벗지 않고 3년 동안 시묘하였다.

그 뒤 지리산을 찾아가 진양의 악양동(岳陽洞) 부근 섬진(蟾津)나루에 집을 짓고 대와 매화를 심으며 여기에서 평생을 마치고자 하였다. 1490년 참의 윤긍 ( 尹兢 )에 의해 효행과 학식으로 추천되어 소격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자식의 직분을 들어 사양하였다.

성종은 그의 사직상소문의 끝에 “ 너의 행실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행실을 감출 수 없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이것이 너의 선행이다. ” 라고 쓰고 사임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을 거쳐 시강원설서가 되었는데 이 때 정도(正道)로써 동궁(연산군)을 보도했으나 동궁이 좋아하지 않았다.

1495년(연산군 1) 안음현감(安陰縣監)에 임명되어 백성들의 질고(疾痼)가 부렴(賦斂)에 있음을 알고 편의수십조(便宜數十條)를 지어 시행한 지 1년 만에 정치가 맑아지고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감사는 해결하기 어려운 옥사가 있으면 그를 만나서 물어본 뒤에 시행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판결에 의문나는 것이 있으면 원근에서 그를 찾아와 판결을 받았다.

민사(民事)를 돌보는 여가로 고을의 총명한 자제를 뽑아 친히 교육하였고, 춘추로 양로례(養老禮)를 행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 때 종성(鍾城)으로 유배,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중종대에 우의정에 증직되었고,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승무(陞 黛 )되었다.

나주의 경현서원 ( 景賢書院 ), 상주의 도남서원 ( 道南書院 ),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 합천의 이연서원(伊淵書院), 거창의 도산서원 ( 道山書院 ), 종성의 종산서원 ( 鍾山書院 )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 일두유집 一 亘 遺集 ≫ 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정봉수(鄭鳳壽), 정기수(鄭麒壽)

형제 무장(武將)으로 유명한 봉수(鳳壽)와 기수(麒壽)는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용골산성(龍骨山城)에서 반장(叛將) 장사준(張士俊)을 죽이고 적군을 섬멸하여 포로가 된 많은 백성들을 구출하여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정기남(鄭奇男)

∼1619(광해군 11). 조선 후기의 무신. 1592년(선조 25) 무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까지 왕을 호종(扈從)하였다. 공으로 감찰이 되었으며, 내금위장· 별군직 ( 別軍職 ) 등을 역임하였다.

1603년 함경도북병사 군관으로서 국경을 침범하는 여진족을 격퇴하고 변방을 지키는 데 공을 세웠다. 그 뒤 김해부사를 거쳐 1606년 부령부사에 이어 창성부사를 역임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명나라의 요청으로 도원수 강홍립 ( 姜弘立 )이 군사를 이끌고 요동에 출정할 때 김응하(金應河)를 따라 좌위장으로 출전하여 선봉에 나서서 싸우다가 잡혀 항복 권유를 받았으나 끝까지 항거하다가 살해되었다. 1796년(정조 20)에 선천의 의열사(義烈祠)에 추배되었으며, 충신정문(忠臣旌門)이 내려졌다

 

정경운(鄭景雲)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의병.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소성(昭聖). 아버지는 호군 학수(鶴壽)이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는 중부(仲父) 봉수(鳳壽), 계부(季父) 인수(麟壽)와 함께 의거, 용골성(龍骨城)에 들어가 여러 번 공을 세워 그 공으로 선공감주부(繕工監主簿)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김여기 ( 金礪器 )와 같이 웅골성(熊骨城)을 확보하고, 여러 번 적의 침공을 격퇴하여 훈련원판관으로 승진되었다. 동생 경문(景雯) · 경방(景 濤 )과 함께 두 차례의 호란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으므로 ‘ 삼영(三英) ’ 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정경흠(鄭慶欽), 정충엽(鄭忠燁)

경흠(慶欽)과 충엽(忠燁)은 당대에 서화가(書畵家)로 이름을 날렸다.

 

정상기(鄭尙驥)

「팔도도(八道圖)」를 제작한 실학자(實學者) 상기(尙驥)는 명문(名門)의 대(代)를 이었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하동 정씨(河東鄭氏)는 남한(南韓)에 총 33,864가구, 142,42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鄭忠信(정충신) 선생의 일화.

출생담

정충신의 아버지는 광주 향청의 좌수였는데, 어느 날 밤 무등산이 갈라지며 청룡이 뛰어나와 자기에게 달려드는 꿈을 꾸었다.
괴이하게 여기고 다시 잠이 들자, 또 꿈에 산이 갈라지고 백호가 달려 나와 품에 안겼다. 그는 놀라 일어나 뜰을 배회하다가 부엌에서 잠든 식비(食婢)를 보고 마음이 동하여 합환하였다. 식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이가 바로 정충신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리해서 임진왜란 때에 광주목사로 있던 권율의 통인 노릇을 하였는데, 너무나 민첨하고 영리해서 권 목사의 총애를 받았다.
왜란 중에 권율의 장계를 의주 행재소에 전달하였고, 그곳에서 그의 재주를 알아본 이항복(李恒福)의 추천으로 무과로 진출하여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 때 마다 여러 번 큰 공을 세웠다.  

 

 

鄭汝昌(정여창) 선생의 일화.

소학(小學)을 30년간 읽은 선비

정여창선생이 가장 좋아하던 애독서는 소학(小學)이다. 어릴 때 「소학」을 읽고
「반드시 이 책의 내응을 다 행한 연후에 다른 책으로 바꾸겠다.」고 각오를 다짐 하였다고 한다.
정여창은 『소학』을 30여 년간 읽었다고 한다.

정여창은 성품이 단아하고 정중하며, 술을 마시지 않았으며 냄새나는 채소를 먹지 않고 고기 종류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정여창이 숱을 마시지 않은 것은 아닌 듯하다.
사실 여부를 떠나 정여창이 젊었을 때 숱을 무척 좋아했다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하루는 친구들과 들놀이를 가서 술을 진탕 마시고 너무나 취해 집까지 걸어오지도 못하고 그만 들판에 쓰러져 하룻밤을 제우고 날이 샌 다음에야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밤새도록 아들을 기다리던 어머니가 꾸중하시기를,
「너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내가 의지하고 사는 것은 오직 너뿐인데 지금 네가 이처럼 행동하니 나는 누구를 의지하고 산단 말인가.」라고 하셨다.

이 말을 들은 정여창은 스스로 깊이 반성하고 다시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정여창은 참선하듯이 정신을 집중하는 자세로 공부에만 매달렸다.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도 책을 들고 벽에 기대서 잠깐 자기 누어서 자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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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小學)을 30년간 읽은 선비

정여창선생이 가장 좋아하던 애독서는 소학(小學)이다. 어릴 때 「소학」을 읽고
「반드시 이 책의 내응을 다 행한 연후에 다른 책으로 바꾸겠다.」고 각오를 다짐 하였다고 한다.
정여창은 『소학』을 30여 년간 읽었다고 한다.

정여창은 성품이 단아하고 정중하며, 술을 마시지 않았으며 냄새나는 채소를 먹지 않고 고기 종류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정여창이 숱을 마시지 않은 것은 아닌 듯하다.
사실 여부를 떠나 정여창이 젊었을 때 숱을 무척 좋아했다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하루는 친구들과 들놀이를 가서 술을 진탕 마시고 너무나 취해 집까지 걸어오지도 못하고 그만 들판에 쓰러져 하룻밤을 제우고 날이 샌 다음에야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밤새도록 아들을 기다리던 어머니가 꾸중하시기를,
「너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내가 의지하고 사는 것은 오직 너뿐인데 지금 네가 이처럼 행동하니 나는 누구를 의지하고 산단 말인가.」라고 하셨다.

이 말을 들은 정여창은 스스로 깊이 반성하고 다시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정여창은 참선하듯이 정신을 집중하는 자세로 공부에만 매달렸다.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도 책을 들고 벽에 기대서 잠깐 자기 누어서 자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鄭麟趾(정인지) 선생의 일화.

 

자기 처지를 잘 헤아린 鄭麟趾(정인지)

鄭麟趾(정인지)1414(태종 11)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섰다.

그는 23때에 병조좌랑에 오른 비교적 빠른 출세를 보였다. 태종은 ()에는 정인지가 있고 ()에는 홍사석이 있는데 모두 將相(장상)수 있는 사람이니 나라가 걱정이 없다.”라고 정인지를 칭찬했다.

세종의 총애를 받아 집현전 학사로서 한글창제에 깊이 관여했다.

정인지는 타고난 성품이 호기로웠을 뿐만 아니라 성격이 매우 활달했다.

 

한번은 술에 취해 사람들을 이렇게 평했다.

만일 공자의 제자로 있었다면 순수한 顔子(안자)나 독실한 曾子(증자) 같은 에게는 미치지 못했겠지만, 子游(자유)子夏(자하)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해 봄직도 하지 않았을까.”

顔子(안자)는 공자의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제자였다.

 

曾子(증자) 역시 공자의 제자 가운데 공자의 덕행과 학설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사람이었다. 子游(자유)子夏(자하) 역시 공자가 길러낸 많은 제자들 가운데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들이었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鄭麟趾(정인지) 선생의 일화.

 

1450명나라의 사신 예겸이 조선에 왔을 때의 일이었다, 정인지는 외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는 예겸을 극진히 접대하는 한편 몸가짐에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했다. 그러는 사이 정인지와 예겸은 서로 뜻이 맞았다.

그들은 옛일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서로 시를 주고받기도 했다. 예겸은 정인지의 학문이 넓고도 깊은 데에 탄복했다. 그래서 자신이 명나라의 사신이라는 사실도 잊고 오히려 정인지를 공경했다.

 

어느 날 밤이었다. 정인지와 예겸은 서로 마주 아서 담소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달이 어느 분야에 있소?”

거나하게 취한 예겸이 물었다. 옛날 중국 사람들은 하늘을 똑같은 크기로 28조각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모든 별자리의 별들을 그것으로 구분했다. 땅도 그와 같이 하여 각 나리를 맡아보는 분야를 정했다. 그러니까 달은 지금 하늘의 어디에 있으며 그것을 맡아보는 땅은 어느 곳이냐는 뜻으로 묻는 것이었다.

洞庭湖(동정호)에 있습니다. ” 정인지가 대답했다.

!”

예감은 탄복했다. 동정호는 중국에 있는 큰 호수로서 李太白(이태백)이 그곳에 뜬 달을 바라보며 술을 마시며 시를 읊었다는 이야기는 알려져 있다.

 

밤이 깊었는데 어떻게 가겠소?” 예감이 물었다.

이금오가 두려운가요?”

정인지가 되물었다.

당나라 때의 시인 杜甫(두보)가 이금오와 술을 마시며 지은 시에, “취하여 돌아갈 때 통행금지에 걸리지 않겠느냐하니, 이 금오가 말하기를 두렵다.” 했는데 사실 이금오는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이라서 통행금지에 걸릴 것을 염려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정인지는 그것을 비유하여 말한 것이었다.

이 세상에 짝을 맞추지 못할 글귀가 없다.”

그들은 서로 쳐다보고 웃었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鄭麟趾(정인지) 선생의 일화.

 

정인지가 대제학으로 있을 때 정초와 함께 대통력을 개정하고 칠정산내편을 지어 역법을 개정하기도 하였다.

정인지는 정흠지 · 정초 등과 함께 명나라의 칠정추보등 역법서 적을 연구하여 수시력의 원리와 방법을 이해하게 쉽게 해설한 칠정산 내편을 펀한한 것이다.

이 책은 천체 운행, 해와 달의 운행, 일식과 월식 등 천분에 관한 것을 기술한 것인데 곳에 따라 달이 붇고 주는 것과 해가 뜨고 지는 것이 다르므로 여러 나라의 책력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고, 우리나라에 맞는 시간과 날짜를 정확하게 계산해 기록 하고 있다.

해가 뜨고 지는 기준을 한성에다 두고 계산했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鄭麟趾(정인지) 선생의 일화.

 

김종서가 대역 죄인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자, 정인지는 고려사의 총재관이 되어 편찬책임을 떠맡게 된다.

그리고 용비어천가를 권제 · 안지와 함께 지었다.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왔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일등공신이 되어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아마도 정인지만큼 순탄하게 출세 가도를 달린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비난이 적은 것은 그가 자기 처지를 헤아리고 빈번 한 정치적 변란과 혼란한 정치 분위기 속에서도 민심을 진정시키고 조초기의 문물제도를 완비하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것과 학덕을 구비 한 관료학자 이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녹도만호 정운

 

정운의 자는 창원(昌原), 하동인, 영암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거산도찰방, 웅천 현감, 제주 판관을 거쳤다. 1592년 임진난이 일어날 때는 녹도만호였다. 임란 초기에 경상우수사 원균은 도망하여 곤양부근에 이르렀을 때,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 때 이순신의 휘하 장수들은 관할론과 부원론으로 대립되었다. 이때 정운은 어영담 등 여러 장수와 함께 경상도는 우리의 국토가 아닌가하고, 부원론을 주장하였다. 이에 이순신의 경상도 출병이 이루어졌다. 그는 이순신장군이 이끄는 수군의 선봉장이 되어 옥포, 적진포, 당포, 당항포, 한산도 해전에 참가 분전하였다. 824일 전라좌수영군은 경상좌수영군과 합동하여 부산포를 공격할 것을 결정하였다. 91일 이른 아침 부산포에 향하고 8시경 몰운대를 지나자 돌풍이 갑자기 일어나고 파도가 넘돌아 함대를 정비하고 화준구미(花樽龜 尾)에 이르렀다. 여기서 왜선 5척을 만나고 다대포 앞바다에 이르러서는 왜선 8, 서대포 앞바다에서는 왜선 9, 절영도에서 왜선 2척을 만나 모두 격파하였다.

 

이어 부산포내에 돌선하였다. 이때 적선 400여척이 선창 동쪽의 산기슭에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이때 정운은 우부장(右部將)이었다. 이에 우장병은 죽음을 무릅쓰고 분전하였다. 이때 100여척을 격파, 많은 적군의 군기를 노획하는 한편 많은 적군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정운은 회군할 때 적탄을 맞아 전사하였다.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충장의 시호가 내렸으며, 영암의 충절사와 이곳 동래충렬사에 봉안되어 있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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