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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정씨(鄭)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鄭(해주정씨)

 

 

본관(本貫): 해주(海州)

시조(始祖): 정숙(鄭肅)

유래(由來):

 

해주정씨(海州鄭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신종(神宗) 때 전법정랑(典法正郞)을 지낸 정숙(鄭肅)이다. 그러나 숙(肅)의 선계(先系)는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정확히는 상고(詳考) 할 수 없고, 다만 그의 조상(祖上)이 해주(海州) 수양산(首陽山) 밑에서 누대(累代)에 걸쳐 세거(世居)하던 사족(士族)이었으므로 후손들이 숙(肅)을 시조로 하고 그의 후손으로 소부 소윤 (小府少尹)을 지낸 언과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한 초(初)를 각각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두 파로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정윤규(鄭允圭)

언의 맏아들 윤규(允圭)가 정용낭장(精勇郎將)을 지냈다.

 

정윤경(鄭允卿)

언의 차남 윤경(允卿)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여 당대에 뛰어났다.

 

정역(鄭易), 정충경(鄭忠敬)

조선조(朝鮮朝)에 와서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지낸 역(易)과 그의 아들 충경(忠敬)이 세종(世宗) 때 형조 참판(刑曹參判)과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정종(鄭悰)

∼1461(세조 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 ( 海州 ). 아버지는 참판 충경(忠敬)이다. 1450년(세종 32)에 문종의 딸 경혜공주(敬惠公主)와 혼인한 뒤 영양위(寧陽尉)에 봉하여지고, 단종 초기에 형조판서가 되어 단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455년(단종 3)에 금성대군 유(錦城大君瑜)의 사건에 관련되어 영월에 유배되었다. 이 해에 수양대군이 즉위하였는데, 문종의 유일한 사위라 하여 경기도 양근 ( 楊根 )에 양이(量移)되었으나, 1456년(세조 2) 사육신사건으로 죄가 가중되어 다시 수원·통진을 거쳐 광주(光州)에 안치되었다.

이 후, 1461년 승려 성탄(性坦) 등과 반역을 도모하였다 하여 능지처참되었다. 그와 함께 유배되어 관비(官婢)가 된 경혜공주가 적소에서 아들을 낳자, 세조비 정희왕후 ( 貞熹王后 )가 친히 양육하고 세조가 미수(眉壽)라 이름하였다.

영조 때 신원(伸寃: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었고, 단종묘와 공주 동학사 ( 東鶴寺 )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헌민(獻愍)이다.

그의 부인 경혜공주(敬惠公主)는 순천관비(順天官婢)가 되었는데, 부사 여자신(呂自新)이 공주(公主)에게 관비의 일을 시키려 하자 공주(公主)는 "비록 귀양은 왔지만 나는 왕의 딸이다. 수령(守令)이 어찌 내게 관비의 일을 시키려 하느냐" 하므로 끝내 부리지 못했다고 한다.

 

정미수(鄭眉壽)

1456(세조 2) ∼ 1512(중종 7). 조선 전 ·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 ( 海州 ). 자는 기수(耆 馬 ), 호는 우재(愚齋). 전라남도 광주 출생. 아버지는 형조참판 종(悰)이며, 어머니는 문종의 딸 경혜공주(敬惠公主)이다. 아버지가 사사 (賜死)되자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소환, 세조가 길렀다.

잠저 때의 성종을 시중하다가 1473년(성종 4) 돈녕부직장 · 형조정랑을 지냈다. 죄인의 자손으로 임관되었다 하여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으나 성종의 무마로 무사하였다. 1476년 중부참봉(中部參奉)을 거쳐 이듬해 선전관을 지내고, 1489년 사헌부장령 · 사섬시첨정 · 한성부서윤 · 인천부사 등을 지냈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당상관으로 올라 장례원판결사에 임명되고, 1496년(연산군 2)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1498년 동부승지 · 우승지 · 좌승지 · 도승지를 거쳐, 1502년 공조참판 · 지돈녕부사 · 한성부판윤을 지내고, 1504년 의정부참찬으로 판의금부사를 겸하였다.

1506년(중종 1) 우찬성이 되어 중종반정 때 공으로 정국공신 ( 靖國功臣 ) 3등이 되고 보국숭록대부 ( 輔國崇祿大夫 )에 올랐으며,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이듬해 박경(朴耕)의 옥사에 연루되어 경상도 울진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시호는 소평(昭平)이다.

 

정희량(鄭希良)

1469(예종 1)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 ( 海州 ). 자는 순부(淳夫), 호는 허암(虛庵). 동지중추부사 충석(忠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참의 침( 甚 )이고, 아버지는 철원부사 연경(延慶)이다. 어머니는 경간(慶侃)의 딸이다. 김종직 ( 金宗直 )의 문인이다.

1492년(성종 23)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했으나, 성종이 죽자 태학생(太學生) · 재지유생(在地儒生)과 더불어 올린 소가 문제되어 해주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1495년(연산군 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예문관검열이 되고, 승문원의 권지부정자에 임용되었다.

이듬해 김전 ( 金詮 ) · 신용개 ( 申用漑 ) · 김일손 ( 金馹孫 )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일으키기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될 정도로 문명이 있었다.

1497년 예문관대교에 보직되어 ① 임금이 마음을 바로잡아 경연 ( 經筵 )에 근면할 것, ② 간언을 받아들일 것, ③ 현사(賢邪)를 분별할 것, ④ 대신을 경대(敬待)하며, 환관을 억제할 것, ⑤ 학교를 숭상하며 이단을 물리칠 것, ⑥ 상벌을 공정히 하고 재용(財用)을 절제할 것 등의 소를 올린 바 있다.

다음해 선무랑 · 행예문관봉교로서 ≪ 성종실록 ≫ 편찬에 참여하였다. 무오사화 때는 사초문제(史草問題)로 윤필상 ( 尹弼商 ) 등에 의해 신용개 · 김전 등과 함께 탄핵을 받았는데, 난언(亂言)을 알고도 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장(杖) 100, 유(流) 3, 000리의 처벌을 받고 의주에 유배되었다가, 1500년 5월 김해로 이배되었다.

이듬해 유배에서 풀려나 직첩을 돌려 받았으나 대간^홍문관직에는 서용될 수 없게 되었다. 그 해 어머니가 죽자 고양에서 수분(守墳)하다가, 산책을 나간 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총민박학(聰敏博學)하고 문예에 조예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음양학(陰陽學)에도 밝았으며, 영달에는 마음이 없었다고 한다. 저서로 ≪ 허암집 ≫ 이 있다.

 

정언각(鄭彦慤)

1498(연산군 4) ∼ 1556(명종 1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 ( 海州 ). 자는 근부(謹夫). 침( 甚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연경(延慶)이고, 아버지는 진사 희검(希儉)이며, 어머니는 신승준(申承濬)의 딸이다.

1516년(중종 11) 생원이 되고, 1533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1537년 박사에 이어 정언 · 지평 · 장령 · 교리 · 응교 ·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546년(명종 1) 직제학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하여 ≪ 중종실록 ≫ 편찬에 참여하였다.

사옹원정 · 검상 · 사인 등을 지냈고, 1547년 부제학으로 재임시 양재역(良才驛)에서 “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李 咬 ) 등이 권세를 자행(恣行)하여 나라가 장차 망하려고 하니 이를 보고만 있을 것인가. ” 라는 익명의 벽서를 발견, 이기 · 정순붕 ( 鄭順朋 ) 등에게 알림으로써 벽서사건을 일으켰다.

이로 인하여 을사사화의 잔당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하여 봉성군(鳳城君:중종의 아들) · 송인수 ( 宋麟壽 ) · 이약빙 ( 李若氷 ) 등을 죽이고, 권벌(權 胴 ) · 이언적 ( 李彦迪 ) 등 20여명을 유배시킴으로써 윤원형 ( 尹元衡 )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게 하였으며, 그 권세를 빌려 온갖 횡포를 자행하였다.

도승지 · 판결사를 거쳐 1551년 전라도관찰사로서 이열 ( 李悅 )의 노비를 약탈하여 파직되기도 하였다. 1555년 동지중추부사로 다시 등용, 성절사 ( 聖節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경상도관찰사 · 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1556년 경기도관찰사로 있을 때 사고로 죽었다. 1570년(선조 3) 관작이 추탈되었다.

 

정문부(鄭文孚)

1565(명종 20) ∼ 1624(인조 2). 조선 중기의 문신 · 의병장. 본관은 해주 ( 海州 ). 자는 자허(子虛), 호는 농포(農圃). 서울 출신. 희검(希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각(殼)이고, 아버지는 부사 신(愼)이며, 어머니는 장사랑 김흥례(金興禮)의 딸이다.

1585년(선조 18) 생원이 되고, 1588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한성부참군이 되었다. 이듬해 홍문관수찬을 거쳐 사간원정언 겸 중학교수(中學敎授)를 역임하고 1590년 사헌부지평으로 지제교를 겸했으며, 다음해 함경북도병마평사가 되어 북변의 여러 진(鎭)을 순찰하였다.

1592년 행영(行營)에서 임진왜란을 당했는데, 회령의 반민(叛民) 국경인 ( 鞠景仁 )이 임해군 ( 臨海君 ) · 순화군 ( 順和君 ) 두 왕자와 이들을 호종한 김귀영 ( 金貴榮 ) · 황정욱 ( 黃廷彧 ) · 황혁 ( 黃赫 ) 등을 잡아 왜장 가토(加藤淸正)에게 넘기고 항복하자, 이에 격분해 최배천(崔配天) · 이붕수 ( 李鵬壽 )와 의병을 일으킬 것을 의논하였다. 이에 종성부사 정현룡(鄭見龍), 경원부사 오응태 ( 吳應台 ), 각 진의 수장(守將) · 조사(朝士)들과 합세해 의병을 조직하였다.

먼저 국경인 · 국세필(鞠世弼)을 참수(斬首)하고, 이어 명천 · 길주에 주둔한 왜적과 장덕산(長德山)에서 싸워 대승하고, 쌍포(雙浦) 전투와 이듬해 백탑교(白塔郊) 전투에서 대승해 관북지방을 완전히 수복하였다. 1594년 영흥부사에 이어 온성부사 · 길주목사 · 안변부사 · 공주목사를 거쳐 1599년 장례원판결사 · 호조참의가 되었고, 그 해 중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1600년 용양위부호군(龍 蚊 衛副護軍), 다음해 예조참판, 이어서 장단부사 · 안주목사가 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2)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다음해 남원부사가 되고 1612년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외직을 자청하였다. 1615년 부총관에 임명되고 다시 병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북인 ( 北人 )의 난정(亂政)을 통탄해 나가지 않았다.

1623년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전주부윤이 되고, 다음 해 다시 부총관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다가 이괄 ( 李适 )의 난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다 죽었다. 후에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어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경성의 창렬사 ( 彰烈祠 ), 부령의 청암사(靑巖祠)에 배향되었고, 저서로는 ≪ 농포집 ≫ 이 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정효준(鄭孝俊)

1577(선조 10)∼1665(현종 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 ( 海州 ). 자는 효우(孝于), 호는 낙만(樂晩). 아버지는 돈녕부판관 흠(欽)이다. 어려서부터 시명이 높았고, 특히 변려문 ( 騈儷文 )에 뛰어났다.

1613년(광해군 5) 이이첨 ( 李爾瞻 )· 정인홍 ( 鄭仁弘 ) 등 대북파에 의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이 대두되었을 때, 어몽렴 ( 魚夢濂 )· 정택뢰 ( 鄭澤雷 ) 등과 함께 극력 항소하여 이이첨 등의 처형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두 사람은 유배당하였으나 그는 북관에 피신하여 화를 면하였다.

과거에 여러 차례 낙방하다가 늦게서야 1618년(광해군 10)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에 서용되어 효릉참봉(孝陵參奉)·전생서봉사(典牲署奉事)·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 등을 거쳐 1652년(효종 3) 돈녕부도정에 올랐다.

1656년 80세의 나이로 해풍군(海豊君)에 습봉되고 동지돈녕부사가 되었다. 그 뒤 아들 다섯이 모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른 관계로 김수항 ( 金壽恒 )의 주청에 의하여 1663년 판돈녕부사가 되었다. 시호는 제순(齊順)이다

 

정석(鄭晳)

1619(광해군 11)∼1677(숙종 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 ( 海州 ). 자는 백야(白也), 호는 악남(岳南). 원희(元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흠(欽)이고, 아버지는 효준(孝俊)이며, 어머니는 이진경(李眞卿)의 딸이다.

1649년(인조 2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학정 ( 學正 )·정언을 거쳐 지평이 되어 1654년(효종 5)에 인조의 총희 조숙원(趙淑媛)문제를 논하다가 영산 ( 靈山 )에 유배되었다. 2년 뒤 복관되어 정언·지평·장령 등을 역임하였고, 1662년(현종 3)에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으로 문신정시(文臣庭試)에 3등으로 합격하였다.

그 뒤 수찬·교리·집의·응교를 거쳐 1669년에 동래부사가 되어 왜관 ( 倭館 )을 동래부로 옮기기도 하였으나 왜인을 잘 규리(糾理)하지 못하였다 하여 파면되었다. 그 뒤 승지·대사간을 거쳐 예조참판이 되었다.

1679년(숙종 2)에 ≪명사 明史≫ 가운데 잘못 기술된 인조반정 기사를 바로잡기 위하여 변무부사(辨誣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악남집≫ 1책이 있다.

 

 

鄭由恭(정유공)  선생의 일화.

꿈에 잡은 집터

옛날 단천교도를 지낸 유공이 林達(임달)이 살고 있는 이곳 감은면 광덕동 炭洞(탄동) 마을로 이사를 와서 임달과 이웃하여 살고 있었다.
임달은 기은이 세고 학문이 높았으며 풍수지리 또한 능통하였다. 임달이 평소 탄동의 산세가 좋아서 명당자리를 찾아 나선 어느 날이었다. 온 산을 종일토록 찾아 헤매다 지쳐서 文修峰(문수봉)에 있는 반반한 바위에 누었다가 그만 잠이 들었다.

꿈에 황룡과 흑룡 두 마리가 계곡에서 나오더니 흑룡은 서쪽 산봉우리로 들어가고, 황룡은 동쪽에 있는 寒碧亭(한벽정) 위로 숨어들었다.
임달이 꿈을 깨고 일어라 생각하니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산을 내려온 임달은 유공을 찾아가 꿈 이야기를 했다.
임달 얘기를 들은 유공은 흑룡은 임달이며, 황룡은 자신을 의미한다고 하여 각각 꿈대로 임달은 서쪽 봉우리 밑에 자리 잡고 정유공은 한벽정 아랫자리를 집터로 잡아서 사니 과연 두 집안은 번성하여 오래 오래 목록을 누리며 잘 상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31

雲(운)

36

永(영)

41

海(해)

32

模(모)

37

柱(주)

42

杓(표)

33

顯(현)

38

烈(열)

43

魯(노)

34

準(준)

39

在(재)

44

吉(길)

35

鎭(진)

40

鏞(용)

45

會(회)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해주 정씨(海州鄭氏)는 남한(南韓)에 총 8,427가구, 34,73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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