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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정씨: 진양정씨(鄭)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鄭(진주:진양정씨)

 

 

본관(本貫): 진주(晉州): 진양(晉陽)

시조(始祖): 정예(鄭藝): (鄭子友): 정장(鄭莊): 정 헌(鄭櫶): 정중공(鄭仲恭)

유래(由來):

 

예로부터 <진주8정(晋州八鄭)>으로 불리워졌던 진주 정씨(晋州鄭氏)는 동성동본(同性同本)이면서도 세계(世系)를 달리하는 여러 계통(系統)으로 갈라져서 계대를 이어왔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를 비롯한 제문헌(諸文獻)에 진주 정씨는 12파(派)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정확한 소목(昭穆)은 밝힐 수 없고 현존하는 계파 중에서 비교적 널리 알려진 다음 4파로 대별(大別)해서 상고(詳考)한다.

 

첫째 고려통합삼한벽상공신(高麗統合三韓壁上功臣)으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낸 영절공(英節公) 정예(鄭藝)의 계통은, 그 후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문익공(文翼公) 정시양(鄭時陽)을 일세조(一世祖)로 받들고 있으며, 시양의 7세손 수(需)가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판도좌랑(版圖佐郞)과 좌사간(左司諫)을 역임하고 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에 봉해져서 가세(家勢)를 일으켰고, 그의 후손 을 보(乙輔)는 1338년(충숙왕 7) 국자시(國子試)에 장원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과 도감제조(都監提調)를 지내고 청천군(靑川君)에 봉해졌으며, 공민왕(恭愍王) 때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한편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했던 신중(臣重 : 부사 천덕의 아들)의 아들 이오(以吾)는 조선 태종(太宗) 때의 명신(名臣)으로 찬성(贊成)과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 4형제 중 장남분( )은 세종(世宗)과 문종조(文宗朝)에 걸쳐 조정의 중신(重臣)으로 많은 치적 (治績)을 남겼고, 문종이 죽을 대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과 함께 어린 단종(端宗)의 보호를 유탁받았으며, 이어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올랐으나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수양대군(首陽大君)의 반대파로 몰려 사사(賜死)되었다.

[일월록(日月錄)]에 의하면 그는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음모가 무르익을 때 체찰사(體察使)로서 영남을 순회하고 충주(忠州)에 이르자 김종서와 황보인이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을 잡아죽이려 관원을 보낼 것이라고 믿고 용안역(用安驛)을 지나가는데 관원이 달려오며 전지(傳旨)가 있다고 외쳤다.

분은 말에서 내려 재배하며 말하기를 "노상에서 형을 받는 것은 상스럽지 못하니 역관(驛館)으로 갈 수 없느냐"고 하자, 관원이 말하기를 "나는 다만 명을 받아서, 공을 적소(謫所) 압송하는 것이요"하였다.

십여 일이 걸려 유배지인 낙안(樂安)에 내려가, 항상 조상의 신주를 받들어 제사 지냈는데 하루 저녁은 자다가 일어나서 함께 있던 중 탄선(坦禪)에게 "네가

밥 한 그릇을 정하게 지어라. 내가 우리 조상에게 제사지내겠다"하고 제사를 지낸 뒤에 신주를 모두 불에 태웠는데 조금 후에 관원이 와서 사사(賜死) 하였다고 한다. [장빈호찬(長貧胡撰)] 에는 다음과 같이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관원이 형을 집행하려고 왔을 때 분은 목욕을 하고 관대를 갖추어 조상의 신주에 재배하고

신주를 태운 후 관대를 벗고 우장 옷을 입고 수건을 쓰고 그이 아내에게 영결(永訣)하니 아내가 붙들고 통곡을 하자, 그는 달래며 "조정의 명령이니 항거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죽은 뒤에 일은 그대가 다스리라."하고는 죽음에 임하여 감형관(監刑官)이 형을 집행하려고 목을 얽을 때 "죽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명분(名分)이 다르다. 내가 만일 두 마음이 있다면 죽은 뒤에 맑은 하늘이 그대로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이상이 있을 것이다"하고 형을 받아 죽으니, 홀연히 구름이 모여 들고 비가 쏟아져서 감형관이 우산을 받고 성안에 들어왔다고 한다.

중종(中宗) 때 15세로 향시(鄕試)에 올랐던 사현(思顯)은 판관(判官)을 지낸 기(璣)의 아들로서 명종(明宗) 때 형. 병조(刑兵曹)의 좌랑(佐郞)을 거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과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을 역임했으며, 충의공(忠毅公) 분( )의 6세손 천경(天卿)은 임진왜란때 아우 원경(元卿)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임천군수(林川郡守)와 전의 현감(全義縣監)을 지낸 후 병조 참판으로 선무원종2등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에 책록되었다.

 

둘째, 고려조(高麗朝)호장(戶長)을 지낸 정자우(鄭子友)의 후손에서는 그의 6세손 신열(臣烈)이 고려 현종(顯宗) 때 유일로 천거되어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친 후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올라 거란의 침입을 격퇴시킨 공(功)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에 올라 진양부원군 (晋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선주지사(善州知事) 임덕(任德)의 아들 유(愈 : 은열공 신열의 현손)는 아우 손(孫)과 함께 효행(孝行)으로 이름을 떨쳤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판부사(判府事)가 되었던 천익(千益 : 효자 유의 아들)은 당시의 난정을 개탄하여 벼슬에서 물러나서 향리로 돌다가 퇴헌정(退軒亭)을 짓고 자적하다가 사위인 문익점(文益漸)이 원(元)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왔으므로 이를 시배(始培)하여 <물레>와 <씨아>를 창안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외 조선 명종(明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안악 군수(安岳郡守)를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던 밀(密 : 천익의 8세손)과 이연경(李延慶)의 문인(門人)으로 임진왜란에 창의(倡義)하여 곤양(昆陽)에서 전공을 세웠던 대수(大壽)가 유명 했으며, 1645년(인조 23) 별시문과에 장원(壯元)했던 필달(必達 :천익의 11세손)은 현종(顯宗) 때 형조 정랑(刑曹正郞)을 거쳐 단양 군수(丹陽郡守)와 울진 현령을 역임하여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순절한 용(庸)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셋째,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추증되었던 정장(鄭莊)을 파조로 하는 계통에서는 세종조(世宗朝)의 명신(名臣)인 척(陟)이 뛰어났다. 1414년 (태종 14) 식년문과에 급제했던 척(陟)은 교서관 정자(校書正字)를 거쳐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와 감찰(監察)을 지내고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에 이르렀으며, 1463년(세조 9) 양성지(梁誠之)와 함께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찬진했다. 특히 그는 청렴하고 효성이 뛰어나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세조가 그를 불러 "부왕(父王)께서 일찍기 청직(淸直) 이란 두 글자를 경에게 허(許) 하시던 말슴이 나의 귀에 남아 있다"고 하며 세조도 계속 우러러 모셨다고 한다. 1474년 (성종 5) 식년문과에 급제했던 척의 아들 성근은 천성이 굳세고 곧아서 흔들림이 없었다고 한다.

[소문쇄록( 聞蔘錄)]에 의하면 그가 성종(成宗) 때 대마도(對馬島)에 사신으로 갔을 때 일이다. 도주(島主)의 집앞에 이르면 도주가 문밖에 나와서 조선의 왕명을 받게끔 되어 있었는데도 도주가 문밖에 나오기를 꺼려하였다. 이에 성근은 밖에서 호상(胡床)에 걸터 앉아 통역을 시켜 두 번 세 번 독촉하여 왕명을 의식대로 공경히 받게 하였다고 한다. 연산군의 난정에 살면서 개결(介潔)하고 강개(慷慨)하여 나라를 사랑하는 뜻을 아래와 같은 시(詩)로 표시했다.

<내가 님 생각하는 마음으로 보아 님은 내 마음 같지 않도다. 님의 마음이 진실로 같을진대 세상에 어찌 이럴 수 있을리요. 비록 생각은 아니하나 미워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만이다.>

효성이 지극했던 성근은 연산군의 단상법(短喪法)을 어기고 친상에 3년상을 치렀고 또 성종 (成宗)이 승리하였을 때에도 3년상을 행하니 연산군의 비위에 거슬려 갑사사화 때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다. 그의 아들로 승문원박사(承文院博士)로 있던 주신(舟臣)이 아버지의 죽음을 슬피하여 음식을 입에 대지 않다가 굶어 죽었으며, 주신의 아우 매신(梅臣)과 매신의 아들 원린(元麟). 원기(元麒)와 원린의 아들 효성(孝成)이 모두 효행(孝行)이 ㄸ어나 4대 (四代) 6명(六名)의 정문( 門)이 세워졌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晋州城)이 함락되자 80노모(老母)를 등에 업고 전남 광양군 골약면 마동리로 피난했다가 중동리(中洞里)에 정착(定着)했던 대유(大有 : 공대공 척의 8세손)는 효성이 지극하여 도관찰사(都觀察使)로부터 표창을 받았으며, 그의 아들 5형제의 후손들이 현재 광양(光陽)지방에 집중세거하면서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시켜 가문의 중흥을 이루었다.

 

넷째,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로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해졌던 정 헌(鄭櫶)의 계통에서는 그의 손자 온(溫)이 청맹(靑盲)으로 유명했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지자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했던 온(溫)은 눈뜬 장님을 가장하고 지리산 청학동(智異山靑鶴洞)에 숨어 살았는데, 조선(朝鮮)이 개국된 후 태조(太祖)가 수차례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끝까지 거절하고 매서운 절개를 지켰다. 태종(太宗)이 사람을 보내서 칼로 눈을 찌르는 흉내를 내어 보았으나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고 한다. 온의 아우로 고려 말에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지낸 택(澤)의 10세손 경세(經世 : 여관의 아들)는 서애(西崖) 류성룡(柳成龍)의 문인(門人)으로 퇴계(退溪) 이 황(李 滉)의 학통을 계승하여 주자학의 거두(巨頭)로서 이조 판서(吏曹判書)와 대제학(大提學)을 지내며 성리학자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우리나라 예학(禮學)의 금자탑을 세웠다.

 

다섯째, 고려 때 첨정(僉正)을 지낸 정중공(鄭仲恭)을 파조로 하는 계통에서는 그의 15세손 기룡(起龍)이 1586년(선조 19)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초명(初名)인 무수(茂壽)를 선조(宣祖)의 명(命)을 받아 기룡(起龍)으로 개명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별장(別將)에 올랐던 기룡은 거창(居昌)과 금산(錦山) 싸움에서 무공을 세웠고, 곤양수성장(昆陽守城將)이 되어 왜군의 호남 진출을 방어했으며 상주 판관(尙州判官)으로 상주성(尙州城)을 탈환한 후 이어 성주(星州)·합천(陜川)·초계(草溪)·의령(宜寧)·고령(高靈) 등지의 여러 성(城)을 탈환하는데 무명(武名)을 떨쳤으나 경상우도 수군절도사(慶尙右道水軍節度使)로 통영(統營) 진중(陳中)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밖의 인물로는 한말(韓末)에 와서 희면(熙冕)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김용구(金容球)와 함께 국권회복(國權回復)을 위하여 의병(義兵)을 모아 영광(靈光)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옥고(獄苦)를 치루었고, 현대(現代)에 와서도 훌륭한 인물들이 각계에 진출하여 조국의 번영을 위하여 신명(身命)을 바침으로써 진주 정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진양·진주 정씨(晋陽·晋州鄭氏)는 남한(南韓)에 총 55,464가구, 231,28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鄭經世(정경세) 선생의 일화.

 

        왕을 간한 참다운 용기

광해군은 즉위 직후 신료들의 천거를 물리치고 왕비의 외숙인 정창연을 이조판서에 임명했다.
조정에서는 의견이 분분했지만 외척의 권세가 막강해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대구부사로 있던 정경세가 상소를 올렸다.
“임금이 어떤 사람을 미리 마음에 담아두고, 형식적으로 천거 하라 하시며, 천거한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추천하라 이르시며, 결국 전하께서 개입하여 마음대로 올리고 낮추고 하는 것이 어찌 이다지도 심하단 말입니까?..”

그리하여 조정의 바른 인사정책이 실시 되도록 왕의 편파적인 인사 원칙을 고쳤다고 한다.

 

 

鄭道傳(정도전) 선생의 일화.

한양천도

한양 정도를 놓고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싸움을 벌인 것은 단순한 개인의 싸움이 아니라 유교와 불교의 힘겨루기였다. 무학은 한양천도 문제를 놓고 정도전에게 졌으나 의미심장한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한다.
『이제 두고 보시오. 2백년 뒤에 큰 난리가 날 것이고 5백년 뒤에는 흉년이 들어 온 백성이 굶어 죽을 것입니다』
정도전이 이 소리를 듣고 뜨끔했으나 겉으로는 태연하게
『대사! 걱정하지 마시요. 남한에 보리가 있지 않소. 보리 먹고 살면 배고프지 않을 겁니다』 했다.

무학의 예언은 적중했다. 2백년 뒤 임진왜란이 터져 왜군이 한양을 유린했고 한말에는 백성들이 굶거나 배고파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나라까지 망했다. 무학의 눈은 정확했다.

 

 

鄭莊資(정장자)쥐를 보고 재난을 면함.

 

고려시대 금산 지방에 鄭莊資(정장자)라는 사람이 금산군 다금리 약바위 밑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여름날 우연히 자기 집 쥐가 떼를 지어 산으로 도망가는 광경을 보고, 필연코 어떤 재난이 있을 징조라 여기고 서둘러 신대리 구셋들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하였다.

며칠 뒤 여름 장마비가 내려 그가 살던 옛 집이 홍수에 밀려 흔적도 없이 내로 바뀌었지만, 鄭莊資(정장자)는 쥐 덕분에 일찍 피신해 화를 면했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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