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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해정씨: 나주정씨(丁)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丁(압해정씨)

 

 

본관(本貫): 압해(押海)

시조(始祖): 정덕성(丁德盛)

유래(由來):

 

우리나라에 현존(現存)하는 정씨(丁氏)는 나주(羅州). 창원(昌原). 영광(靈光). 의성(義城)의 4본이 있으나 모두 도시조(都始祖)인 정덕성(丁德盛)의 후손으로 전(傳)하며, [정씨대동종안보(丁氏大同宗案譜)]에는 이들 모든 정씨(丁氏)는 압해 정씨(押海丁氏)로 통일(統一)하고 있다.

덕성(德盛)은 원래 중국(中國) 당(唐)나라 사람으로 당(唐)의 문종(文宗) 때 대승상(大丞相)을 지냈고 무종(武宗) 때 대양군(大陽君)에 봉해졌으며, 853년(당나라 선종, 대중 7. 신라 문성왕 15) 군국사(軍國事)로 직간(直諫)을 하다가 압해도(押海島)에 유배(流配)되어 온 것이 우리나라 정씨(丁氏)의 시초(始初)라고 한다. 그러므로 압해(押海)는 곧 우리나라 정씨(丁氏)의 발상지(發祥地)가 되며 앞의 4본은 모두 동원(同源)으로 그 중에서 나주 정씨(羅州丁氏)가 전체 정씨(丁氏)의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가문의 중요 인물

 

정자급(丁子伋)

자급(子伋)이 교리(校理)를 지냈다.

 

정수강(丁壽崗)

1454(단종 2)∼1527(중종 22). 조선 전·중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불붕(不崩), 호는 월헌(月軒). 안경(安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연(衍)이고, 아버지는 소격서령(昭格署令) 급(伋)이며, 어머니는 황처성(黃處盛)의 딸이다.

1474년(성종 5) 진사시에 합격하고, 1477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전교서(典校署)에 소속되었다. 이 후 정언·병조좌랑·병조정랑을 역임하였으며, 1482년에는 정조사 ( 正朝使 )의 서장관 ( 書狀官 )으로 명나라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1499년(연산군 5) 장령에 임용되어 성준 ( 成俊 )의 불법을 탄핵하기도 하였으나, 논사(論事)를 피하기 위하여 휴가를 얻어 충청도에 갔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503년 직제학으로 영등포에 파견되어 지방관의 불법행위를 조사한 공으로 부제학이 되었다.

이듬해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당하였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재등용되어 원종공신 ( 原從功臣 ) 1등에 책록되었으며, 이듬해 강원도관찰사로 외보되었다. 이 후 판결사·대사간을 거쳐 1512년 병조참지에 이르렀다. 1516년 사유가당인(師儒可當人)으로 선발되었다.

1518년 대사성·대사헌을 거쳐 병조참판·동지중추부사·전의제조(典醫提調)·빙고제조(氷庫提調)를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월헌집≫이 있다.

 

정응두(丁應斗)

1508(중종 3)∼1572(선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추경(樞卿). 자급(子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수강(壽崗)이고, 아버지는 병조판서 옥형(玉亨)이며, 어머니는 김언신(金彦辛)의 딸이다.

1521년(중종 16) 진사시에 합격하고, 1534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선공감직장(繕工監直長)에 제수되었다. 그 뒤 전적을 거쳐 세자시강원설서에 임명되었는데, 이 때 과거급제한지 10개월 만에 참직(參職)에 올랐으니 관작이 너무 외람되다는 사헌부의 공박을 받기도 하였다.

그 해 정자를 거쳐 저작·부수찬·이조좌랑·이조정랑·지평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1543년 교리가 되었다. 그 해 부응교·장령을 거쳐 세자시강원우보덕과 응교를 역임하고, 1545년(인종 1) 예관 ( 禮官 )으로 명나라 사신을 영접한 뒤 사간이 되었다.

사간으로서 활발한 언론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546년(명종 1) 예조참의에 이르렀다. 같은 해 문위사(問慰使)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였으며, 그 이듬해 대사간이 되고, 그 뒤 우부승지·좌부승지를 역임하고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으나 사직을 청하였다.

1551년 한성부우윤을 거쳐 1553년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그해 병조참판이 되어 다시 중앙으로 돌아왔다. 1557년 다시 평안감사로 나간 뒤 예조참판·한성부판윤·함경감사를 역임하고, 1561년 병조판서가 되었다. 그 해 판의금부사로 종묘 헌관 ( 獻官 )이 되었으며, 그 뒤 좌찬성·평안도관찰사 등을 거쳐 1566년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정윤희(丁胤禧)

1531(중종 26)∼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경석(景錫), 호는 고암(顧庵) 또는 순암(順庵). 수강(壽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옥형(玉亨)이고, 아버지는 좌찬성 응두(應斗)이며, 어머니는 군수 송충세(宋忠世)의 딸이다. 이황 ( 李滉 )의 문인이다.

1552년(명종 7) 생원·진사양시에 모두 수석으로 합격하고, 1556년 알성문과에 장원하여 홍문관전적이 되고, 이듬해 정언에 이어 병조좌랑·수찬·지평·부교리·이조정랑을 역임하고, 1560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문흥을 일으키기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제도)하였다.

다시 부교리·사인·필선·장령·집의를 거쳐, 1566년 문과중시에 다시 장원하여 문명을 떨쳤다. 이듬해 판결사를 거쳐, 수년간 수령으로 근무하였다. 1578년(선조 11) 남양부사로 재직시에 경기감사로부터 관아의 공역(供役)이 번중(煩重)하다는 이유로 파직이 청하여졌으나 왕의 배려로 면책에서 그쳤다.

그 뒤 장단부사를 거쳐 예조·호조의 참의를 지내고, 1588년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돌아와서 죽었다. 문장이 뛰어났고, 특히 사륙문 ( 四六文 )에 능하여 한때 홍문관과 예문관의 서책을 많이 찬술하였다. 저서로는 ≪고암집≫이 있다.

 

정윤복(丁胤福)

1544(중종 39)∼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개석(介錫). 수강(壽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병조판서 옥형(玉亨)이고, 아버지는 좌찬성 응두(應斗)이며, 어머니는 군수 송충세(宋忠世)의 딸이다.

1567년(선조 즉위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고, 이어 예조좌랑·수찬·집의·우승지·대사성·부제학·도승지·병조판서·동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1589년 정여립 ( 鄭汝立 )의 난이 일어나자 정여립과 친하였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다시 행호군으로 보직되었으나, 계속 말썽이 일어나므로 물러나 수년 동안 한거하였다. 임진왜란 때 동서로호소사(東西路號召使)로 기용되고, 이어 우통어사(右統禦使)가 되었다.

선조가 북쪽으로 피란할 때 다리가 불편하여 따라가지 못하고, 분조 ( 分朝 )인 이천(伊川)으로 가서 병조참판을 제수받고 가산군에 이르렀을 때 병이 심해져 죽었다.

 

정시윤(丁時潤)

1646(인조 24)∼1713(숙종 3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압해(押海). 자는 자우(子雨), 호는 두호(斗湖). 윤복(胤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관찰사 호선(好善)이고, 아버지는 교리 언벽(彦璧)이며, 어머니는 목취선(睦取善)의 딸이다.

1669년(현종 10)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뒤 음보(蔭補)로 현감을 지내고, 1690년(숙종 16)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그 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올랐다. 그 뒤 정언 ( 正言 )· 부수찬 ( 副修撰 )· 헌납 ( 獻納 )·수찬(修撰) 등 삼사의 청직(淸職)만을 두루 거쳤다.

1694년 홍문관부교리로 있을 때 남인과 소론간의 당쟁이 격화, 남인일파가 몰락하고 소론이 정권을 장악한 갑술옥사가 발생하자 남인으로 지목되어 삭직되었다. 1698년 세자시강원필선으로 복직한 뒤 일시 파직된 일이 있었으나 재기용, 관직이 병조참의에까지 이르렀다.

 

정언황(丁彦璜)

1597(선조 30) ∼ 1672(현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중휘(仲徽) 또는 위수(渭 馬 ), 호는 묵공옹(默拱翁). 응두(應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복(胤福)이고, 아버지는 사성 ( 司成 ) 호관(好寬)이다. 어머니는 선략장군 ( 宣略將軍 ) 이광립 ( 李光立 )의 딸이다.

1615년(광해군 7)에 진사가 되고, 1628년(인조 6)에 별시문과 병과에 급제했으나, 아버지가 광해군 때 대관 ( 臺官 )으로서 영창대군 출치(黜置)에 관여한 이유로 관로가 순조롭지 못하였다. 그러나 1634년에 신계현령을 비롯하여, 1642년 장령, 1646년 우부승지, 1647년 병조참지를 역임하고 서장관 ( 書狀官 )으로 심양(瀋陽)에 다녀왔다.

1648년에는 강빈옥사 ( 姜嬪獄事 )로 제주도에 유배된 소현세자 ( 昭顯世子 )의 세 아들을 구제하려고 상소했으나 묵살되자, 스스로 외직으로 자원하였다. 회양부사가 되어서는 협곡(峽谷)의 전세(田稅)를 면포(綿布)로 상납하게 하고, 주민들에게 호표(虎豹)를 사냥하게 하여 그 가죽을 관부에 바쳐 1년 치의 조세 ( 租稅 )를 면하게 해주었다.

인천부사 때는 백성들로 하여금 간전(墾田)하게 하고 스스로 검사하여 향리들의 농간을 끊고, 백성들은 은결 ( 隱結 )을 만들지 못하게 하였다. 또, 안동부사 때는 자칭 신라공주라고 부르며 민심을 현혹시키는 요사(妖祠)를 불태웠다.

효종 때는 제주목사 · 우부승지 ·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고 다시 승지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말년에는 원주에 내려가 은휴정(恩休亭)을 짓고 독서에 전념하면서 조용하게 지냈다.

성품은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의 신원(伸寃: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을 위해 상소를 한 바 있으며, 특히 외직에 있을 때 치적이 뛰어나 임지를 떠날 때는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웠으며, 어사 · 방백 등이 계(啓)하여 하사품을 받았다.

 

정범조(丁範祖)

1723(경종 3)∼1801(순조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법세(法世), 호는 해좌(海左). 시한(時翰)의 현손이며, 도항(道恒)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신(永愼)이고, 아버지는 유학 지령(志寧)이며, 어머니는 신필양(申弼讓)의 딸이다. 세거지는 원주로 홍이헌(洪而憲)·신성연(申聖淵)·유한우(兪漢遇) 등과 친교가 깊었다.

1759년 (영조 35)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유생이 되었다가, 마침 동궁(東宮 : 思悼世子)을 비난하는 유소(儒疏)가 바쳐지자 이에 반대하였다. 1763년 증광 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사직서직장(社稷署直長)이 되었다가 성균관전적·병조좌랑을 거쳐 지평이 되었다. 그러나 왕명을 받드는 데 지체했다는 죄로 잠시 갑산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이조좌랑에 서용되고 옥구현감을 거쳐 홍문록에 뽑히자, 그 문학의 재주를 평가한 우의정 원인손 ( 元仁孫 )의 천거로 수찬이 되었다. 이어 동부승지로 발탁되었으며, 왕명에 따라 〈건공가 建功歌〉·〈백운고시 百韻古詩〉를 지어 바쳐 시명이 조야간에 크게 드러났 한다.

그 뒤 공조참의·풍기군수를 역임하고, 정조초에 양양부사가 되어 부세를 줄이고 유풍(儒風)을 진작시키는 등 서민 교화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겸관 ( 兼官 )으로 있던 강릉에서 목상(木商)이 소나무를 잠매(潛買)한 사건으로 파직되었다가 이듬해인 1781년 동부승지로 서용되고, 대사간을 거쳐 풍천부사가 되어 사직하였다.

1788년 예조참의로 서용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792년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많음을 들어 치사(致仕 : 정년퇴임)를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예조참판·개성유수·이조참판 등에 차례로 제수되었다. 2년 후 지돈녕부사가 되어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가면서 형조판서에 승진, 지춘추관사를 겸임하였다.

그 뒤 78세가 되던 정조 말년까지 조정에 머물며 예문관·홍문관의 제학으로서 문사(文詞)의 임무를 맡았다. 1800년 정조가 죽자 정종행장찬술당상(正宗行狀撰述堂上)으로 뽑혀 만장 7율 10수를 지었으며, 이듬해 실록청찬집당상으로서 ≪정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시율과 문장에 뛰어나 사림의 모범으로 명성을 얻었고, 또 이로 인해 영조와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특히, 문체반정 ( 文體反正 )에 주력하던 정조에 의해 당대 문학의 제1인자로 평가되어 70이 넘은 고령에도 불구, 오랫동안 문사의 임무를 맡았다. 남인 집안 출신으로서 정치적 자세는 불편부당한 입장을 취하면서도 당시의 탕평책에는 비판적이었다.

즉, 탕평책이 외면적이고 형식적인 균용론(均用論)만 취하는 것이어서 사의(私意)가 횡행해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고 하였다. 대신 붕당을 없애기 위해서는 공정한 인사 관리와 신의 있는 시책, 분명한 정치적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문집으로 ≪해좌집≫ 39권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정약용(丁若鏞)

1762(영조 38) ∼ 1836(헌종 2). 조선 후기의 실학자.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 · 사암(俟菴) · 여유당(與猶堂) · 채산(菜山). 근기(近畿) 남인 가문 출신으로, 정조 ( 正祖 ) 연간에 문신으로 사환(仕宦)했으나,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 ( 西學 )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 유배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一表二書 : 經世遺表 · 牧民心書 · 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익(李瀷)의 학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각종 사회 개혁사상을 제시하여 ‘ 묵은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 ’ 노력하였다.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역사 현상의 전반에 걸쳐 전개된 그의 사상은 조선왕조의 기존 질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 혁명론 ’ 이었다기보다는 파탄에 이른 당시의 사회를 개량하여 조선왕조의 질서를 새롭게 강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에 왕조적 질서를 확립하고 유교적 사회에서 중시해 오던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념을 구현함으로써 ‘ 국태민안(國泰民安) ’ 이라는 이상적 상황을 도출해 내고자 하였다.

〔생 애〕 18세기 후반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당쟁의 과정에서 오랫동안 정치 참여로부터 소외되었던 근기(近畿) 지방의 남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기존의 통치방식에 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들이 존중하는 성리설과는 달리 선진유학에 기초한 새로운 개혁의 이론을 일찍부터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들의 학문적 경향을 ‘ 근기학파 ’ 라는 범주 안에서 이해하기도 한다.

정약용은 바로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태어났고, 소시적부터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를 접하게 되었다. 그가 태어난 양근(楊根 :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군) 땅 일대는 뒷날의 연구자들로부터 실학자로 불리게 된 일군의 학자들이 새로운 학풍을 형성해 가던 곳이었다. 그의 친인척들도 이곳의 학풍을 발전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역임했던 정재원 ( 丁載遠 )과 해남윤씨 사이에서 4남 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음사(陰仕)로 진주목사를 지냈으나, 고조 이후 삼세(三世)가 포의(布衣 : 벼슬이 없는 선비)로 세상을 떠났으니, 비록 양반이며 그 이전까지는 대대로 벼슬을 했지만, 그의 집안은 당시로서는 권세와 별로 가까운 처지가 아니었던 셈이다. 그의 생애는 대략 다음과 같이 네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단계는, 출생 이후 과거를 준비하며 지내던 22세까지를 들 수 있다. 그는 부친의 임지인 전라도 화순, 경상도 예천 및 진주 등지로 따라다니며 부친으로부터 경사(經史)를 배우면서 과거시험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16세가 되던 1776년에는 이익의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때마침 이 때 부친의 벼슬살이 덕택에 서울에서 살게 되어,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던 이가환(李家煥)과 학문의 정도가 상당하던 매부 이승훈(李承薰)이 모두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자신도 그 이익의 유서를 공부하게 되었다. 이익은 근기학파의 중심적 인물이었던 것이다.

정약용이 어린시절부터 근기학파의 개혁이론에 접했다고 하는 것은 청장년기에 그의 사상이 성숙되어 나가는 데 적지 않은 의미를 던져주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정약용 자신이 훗날 이 근기학파의 실학적 이론을 완성한 인물로 평가받게 된 단초가 바로 이 시기에 마련되고 있었다.

정약용의 생애에서 두 번째 단계는, 1783년 그가 진사시 ( 進士試 )에 합격한 이후부터 1801년에 발생한 신유교난(辛酉敎難)으로 체포되던 때까지를 들 수 있다. 그는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서울의 성균관 등에서 수학하며 자신의 학문적 깊이를 더하였다.

이 때 ≪ 대학 大學 ≫ 과 ≪ 중용 中庸 ≫ 등의 경전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그리고 1789년에는 마침내 식년문과(式年文科)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희릉직장(禧陵直長)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오른다.

이후 10년 동안 정조의 특별한 총애 속에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경기암행어사(京畿暗行御史),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동부승지 ( 同副承旨 ) · 좌부승지 ( 左副承旨 ), 곡산부사(谷山府使), 병조참지(兵曹參知), 부호군 ( 副護軍 ), 형조참의(刑曹參議) 등을 두루 역임했다. 특히, 1789년에는 한강에 배다리 〔 舟橋 〕 를 준공시키고, 1793년에는 수원성을 설계하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그는 이벽(李檗) · 이승훈 등과의 접촉을 통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그는 입교 후 그의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교회 내에서 뚜렷한 활동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입교는 자신의 정치적 진로에 커다란 장애로 작용하였다. 당시 천주교 신앙은 성리학적 가치체계에 대한 본격적인 도전으로 인식되어 집권층으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천주교 신앙 여부가 공식적으로 문제시된 것은 1791년의 일이다. 이후 그는 천주교 신앙과 관련된 혐의로 여러 차례 시달림을 당해야 했고, 이 때마다 자신이 천주교와 무관함을 변호하였다. 그러나 그는 1801년의 천주교 교난 때 유배를 당함으로써 중앙의 정계와 결별하게 되었다.

정약용의 생애에서 세 번째 단계는, 유배 이후 다시 향리로 귀환하게 되는 1818년까지의 기간이다. 그는 교난이 발발한 직후 경상도 포항 부근에 있는 장기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이어 발생한 ‘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 ’ 의 여파로 다시 문초를 받고 전라도 강진(康津)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이 강진 유배기간 동안 학문 연구에 매진했고, 이를 자신의 실학적 학문을 완성시킬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였다.

그의 강진 유배기는 관료로서는 확실히 암흑기였지만, 학자로서는 매우 알찬 수확기였다고 할 수 있다. 많은 문도를 거느리고 강학과 연구, 저술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중국 진나라 이전의 선사(先秦) 시대에 발생했던 원시 유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이를 기반으로 해서 성리학적 사상체계를 극복해 보고자 하였다.

또한, 그는 조선왕조의 사회현실을 반성하고 이에 대한 개혁안을 정리하였다. 그의 개혁안은 ≪ 경세유표 ≫ · ≪ 흠흠신서 ≫ · ≪ 목민심서 ≫ 의 일표이서를 통해 제시되고 있다. 이들 저서는 유학의 경전인 육경사서에 대한 연구와 사회개혁안을 정리한 것으로 가장 주목받고 있다. 정약용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저서는 연구서들을 비롯해 경집에 해당하는 것이 232권, 문집이 260여 권에 이른다고 한다. 그 대부분이 유배기에 쓰여졌다.

정약용의 생애에서 마지막 단계는, 1818년 57세 되던 해에 유배에서 풀려나 생을 마감하게 되는 1836년까지의 기간이다. 그는 이 시기에 향리에 은거하면서 ≪ 상서 尙書 ≫ 등을 연구했으며, 강진에서 마치지 못했던 저술작업을 계속해서 추진하였다. 매씨서평(梅氏書平)의 개정 · 증보작업이나 아언각비 ( 雅言覺非 ), 사대고례산보(事大考例刪補) 등이 이 때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회갑을 맞아 자서전적 기록인 〈 자찬묘지명 自撰墓誌銘 〉 을 저술하였다. 그 밖에도 자신과 관련된 인물들의 전기적 자료를 정리하기도 했으며, 500여 권에 이르는 자신의 저서를 정리하여 ≪ 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 ≫ 를 편찬하였다.

이상에서 살펴 보았듯 그의 생애는 결코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전 생애를 통해 위기에 처한 조선왕조의 현실을 개혁하고자 했으며, 그 현실 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선진유학을 비롯한 여러 사상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가 유배과정에서 불교와 접촉했고,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는 다시 서학에 접근했다는 기록도 이와 같은 부단한 탐구정신의 일단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인다. 그는 학문 연구와 당시 사회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던 조선 후기 사회의 대표적 지성이었다.

〔정치사상과 관제개혁론〕 정약용은 당시 조선왕조가 직면한 위기를 해소하고 왕도정치가 실현되는 이상적 사회로 재편되기를 희구하면서 각종 개혁사상을 개진하였다.

당시는 오늘날과는 달리 사회와 학문의 분야가 미분화되어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그의 개혁사상은 정치 · 경제 · 사회 그리고 문화 · 사상 등 각 방면에 걸쳐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 여유당전서 ≫ 의 분석을 통해 규명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정치사상을 검토해 보면, 그는 일표이서를 통해 군주권의 절대성과 우월성을 내용으로 하는 왕권강화론을 제시하였다. 벌열(閥閱)이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를 전횡하던 상황에서 국가 공권력의 회복을 위해 왕권의 절대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왕권은 공권력을 대표하는 권위의 상징일 뿐, 절대 왕정과는 거리가 멀었고, 영조와 정조대 탕평정책에서 추진되었던 왕권강화책과도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정약용은 국왕이나 관료가 공적인 관료기구를 통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파악하였다. 또한 그의 정치사상은 왕도정치의 이념을 구현하는 데 집중되었고, 주로 집권층의 정치관을 수정시키려는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즉, 그는 집권층에 대해 위로는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통치질서의 강화에 협조하고, 아래로는 애민(愛民) · 교민(敎民) · 양민(養民) · 휼민(恤民)하는 목민지도(牧民之道)를 확립, 선진 시대 이래 유학의 기본적 가르침이었던 민본(民本)의 의식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는 한때 국가의 최고 권력자인 천자(天子)도 인장(隣長)이나 이정(里正)과 같은 인민의 대표자들이 선출하여 추대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맹자에 의해 주장되었던 폭군 방벌론(暴君放伐論)의 입장에서 민은 폭군을 거부할 수 있다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그의 정치 개혁안들의 주류는 왕조체제를 근간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봉건적 통치구조의 파행적 운영으로 말미암은 폐단을 제반 제도의 개편을 통해 최대한으로 막아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정치 분야에서의 개혁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19세기에 이르러 정치운영의 형태가 소수의 벌열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로 바뀌면서 국가기강의 문란과 관료체제의 부패, 극심한 사회경제적 혼란이 야기되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정약용은 관료기구의 개혁안 마련에 주력하였다. 우선, 육조에 소속된 아문들을 재배치하고, 승정원 및 왕실 관련 아문들을 모두 이조에 예속시켰다. 군영아문(軍營衙門)의 경우도 병조에 소속시켜 명령전달체계를 일원화시켰다.

또한, 그는 권력이 집중된 관료기구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의정부의 기능을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방안으로서 비변사를 혁파하고 중추부를 실직화(實職化)시켜 변무(邊務)만을 담당하게 할 것을 제안하였다.

동시에 이전까지 비변사가 장악하던 군국기무 처리 기능을 의정부에 회복시키고 고위관직에 대한 인사권을 부여함으로써, 의정부가 명실공히 관료기구의 중심이 되는 행정체계를 구상하였다.

그리고 그는 왕과 관료집단 간에 사적인 연결을 방지하고 관료기구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규장각의 초계문신 ( 抄啓文臣 )을 비롯한 청요직(淸要職)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즉, 왕을 정점으로 하고 의정부를 통해 권력이 일원적으로 행사되도록 하여 행정의 본체인 육조를 중심으로 하는 관료체제를 강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왕과 관료 사이에도 일정한 거리가 유지되도록 하여 사회개혁을 위한 정책이 일관성 있게 추진될 수 있는 독자적인 관료체제를 구성하고자 하였다.

한편, 정약용은 나름대로의 새로운 관료제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이에 걸맞는 새로운 관료를 선발하기 위해 과거제 개혁론을 피력하였다. 그는 이익의 견해에 찬동하여 식년시 외에 부정기시를 모두 혁파하고, 급제자의 수도 줄임으로써 과거에 합격하고도 관직을 얻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고 함을 강조하였다. 이는 과거제 본래의 기능을 일단 회복시키자는 목적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또한 그는 과거제의 실시 절차를 정비 · 보강해 제시하였다. 공거제 ( 貢擧制 )를 과거시험의 1단계에서 도입하고, 소과 ( 小科 )와 대과 ( 大科 )를 통합했으며, 마지막으로 삼관(三館)의 관료들이 급제자와 경륜을 논하는 조고(朝考)를 첨설하였다.

고시과목도 대폭 증설, 경학과 관련된 과목들이 시험 때마다 바뀌도록 했고, 중국사는 물론 우리 역사, 관료의 실무 행정과 관련되는 잡학(雜學), 체력의 단련을 요하는 시사(試射) 등을 새로이 추가하였다.

이러한 과거제 개혁론은 관료를 선발하는 기준을 덕행, 재주 등으로 다양하게 확대하고, 학교제와 과거제의 연결을 통해 관료 양성과 선발을 구조화하고자 한 것으로, 관료로서의 기본적인 자질과 실무능력을 고양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토지제도 개혁론〕 정약용은 원초 유학에 입각한 왕도정치론의 차원에서 사회개혁론을 제기했다. 원초 유학의 왕도정치론에서는 그 구체적 실천 방안으로 민에게 항산(恒産)을 보장해 주고, 정전제의 실시를 통해 부세와 요역을 고르게 하여, 상공(商工)을 보호할 것을 제시하였다. 또한 전반적 차원에서 ‘ 보민(保民) ’ 을 주장했고, 특히 궁민(窮民)의 구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은 원초 유학의 왕도정치론을 중세 해체기의 조선사회에 적용함으로써 조선에서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이는 정전제의 정신을 살려 토지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인정(仁政)의 회복을 주장하는 새로운 왕도정치론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실학자들이 제시했던 정전제 등에 관한 주장은 단순한 경제개혁론이라기보다는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하는 통합적 이론 가운데 중요한 요소였다고 할 수 있다.

정약용도 왕도정치를 조선사회에 알맞게 재해석하여 시행하려는 현실적 목표를 가지고 토지제도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 당시 농업에 있어서 주된 생산관계는 지주-전호제가 보편적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토지개혁론은 이러한 지주제를 인정하는 위로부터의 개혁과, 지주제를 해체하고 자립적 소농이나 중소 상공인의 입장을 지지하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의 대두되어 있었다.

실학파의 토지개혁론은 후자의 길과 관련되며, 정약용도 이와 같은 입장에서 자신의 토지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개혁론을 설명하기에 앞서 기존의 정전제 · 균전제 · 한전제를 차례로 비판하였다. 우선, 중국 고대의 정전제는 한전(旱田)과 평전(平田)에서만 시행되었던 것이므로, 수전(水田)과 산전(山田)이 많은 우리 나라의 현실에는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균전제는 토지와 인구를 계산하여 이를 표준으로 삼는 방법인데, 당시 조선은 호구의 증감이 수시로 변동되고 토지의 비옥도가 일정치 않기 때문에 적합하지 못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한전제는 전지의 매입과 매각에 일정한 제한을 두고자 하는 제도이지만, 타인의 명의를 빌어 한도 이상으로 늘이거나 줄이는 것을 일일이 적발해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이들의 기본적 결함이 치전(治田)에 반하여 농사를 짓지 않는 자에게 토지를 주고 균산에 주안을 둔 데 있다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균산에 목적을 두지 않고 오직 농업생산력을 상승시킬 수 있는 치전에 목적을 둔 토지제도의 개혁을 주장함으로써,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을 분명히 하고자 하였다.

정약용의 토지 개혁론은 〈 전론 田論 〉 에 나타난 여전제(閭田制)와 ≪ 경세유표 ≫ 에 보이는 정전제의 두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정전제는 고대 정전제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한 정전론과 전제개혁안을 적용한 정전의(井田議)로 구분할 수 있다. 그의 토지개혁안 가운데 여전제적 개혁안을 담고 있는 〈 전론 〉 은 1798년에 작성되었고, 정전제적 개혁을 추구하던 ≪ 경세유표 ≫ 는 1817년에 쓰여졌다.

먼저, 그는 농업생산력의 향상에 관심을 갖고 자신의 토지개혁안인 여전제를 논하였다. 〈 전론 〉 에서 주장하는 여전제의 목적은 토지의 균분으로 토지와 재부가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는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라 농사를 짓는 자만이 농지를 얻고, 농사를 짓지 않는 자는 얻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는 정전제(정전론, 정전의)에서도 견지되는 입장이다.

여전제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전제는 30가구를 1여로 하여 여민(閭民)은 공동노동을 통해서 생산과 수확을 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여기에서 여민이 선출한 여장(閭長)은 생산작업을 분담시키며, 일역부(日役簿)를 만들어 노동량을 기록한다.

이와 같이 여전제에서는 공동생산을 추진하지만, 소비는 가족 단위로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즉, 생산물의 분배는 생산에 투하된 가족의 노동량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여전제는 토지의 봉건적 소유를 부정하면서 공동소유 · 공동경작을 창안함으로써 그 경제적 내용에 있어서 토지를 사회적 소유로 규정하고 있다. 여전제에서는 인구의 자유로운 이동을 8 ∼ 9년간 허용하면, 이익을 추구하고 해를 피하려는 농민의 합리적 행동에 의해 각 여의 노동생산성과 빈부는 균등하게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리고 10년째부터는 인구와 노동력의 이동을 노동생산성을 균등화하는 방향에서만 국가에서 계획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그는 여전제의 토지제도를 군사조직의 근간으로 삼아 여-리-방-읍(閭里坊邑)에 따른 병농일치제적 군제개혁안을 구상하였다.

정약용은 농사를 짓지 않는 사 · 공 · 상의 토지 소유를 반대하였다. 이에 따라 상인과 수공업자는 독립적으로 여전제와 사회적 분업관계를 이루도록 하였다. 사족의 경우 직업을 바꾸어 농사에 종사하거나 그 밖의 생산활동, 즉 상업 · 수공업 · 교육 등에 종사할 것을 주장하였다. 특히, 사(士)들이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위한 기술 연구에 종사하는 것을 가장 높이 평가하였다.

한편, ≪ 경세유표 ≫ 에 보이는 〈 정전의 〉 에서는 국가에서 재정을 마련하고 그 돈으로 사유 농지를 유상 매입하여 전체 농지의 9분의 1을 공전 ( 公田 )으로 만들기를 제안하였다. 그리고 이 공전을 민의 노동력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을 전세에 충당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실천하기 위한 과제로서 공전을 마련하기 위한 재원 마련, 기구 편성, 공전 편성작업, 공전 경작을 위한 노동력 할당, 토지대장 작업, 공전의 조세량 등을 검토하였다.

그가 제시한 이 정전의의 개혁론은 조세개혁적 성격이 크며, 토지개혁이나 경작권 조정이라는 측면도 있었다. 그는 정전의에서 농업전문화를 통한 상업적 농업을 추구하면서 그 경영 규모는 100무 단위의 부농에 의한 자본주의적 개별 경영을 지향하였다.

한편, ≪ 경세유표 ≫ 의 정전론은 전국의 토지를 국유화하여 정전을 편성한 뒤, 그 중 9분의 1은 공전을 만들어 조세에 충당하고 나머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공전은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의 공동노동으로 경작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정전론에서는 국가에 토지 처분권을 귀속시켜 지주전호제의 재등장을 막아 보고자 하였다.

전반적으로 정약용의 토지개혁론은 상업적 이윤과 ‘ 자본주의적 ’ 경영을 전제로 한 것으로, 농민에게 토지를 갖게 하되 양반 및 상공 계층은 제외하고 농업을 통한 상업적 이윤을 추구하게 한다는 점에서 다른 실학자들과는 차이가 있다.

한편, 정약용이 제시한 여전제와 정전론은 유사점이 많다. 즉, 그는 자신의 개혁안에서 모두 토지의 사적 소유를 부정했고,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라 농민에게만 토지를 주고자 하였다. 그리고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목표로 삼았다는 것과, 전제개혁(田制改革)을 통해 병농일치제를 관철하고 지방제도와 병제의 일체화를 시도한 점도 비슷하다.

그러나 이 두 개혁안 사이에는 차이도 있었다. 즉, 정약용은 여전론을 통해서 여의 설치와 여민의 공동생산을 분명하게 논했다. 그러나 정전론에서 제시하고 있는 정전의 경우는 그 운영에 있어서 여전과 차이가 있었고, 농업의 전문화와 부농에 의한 개별 경영을 제안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전론과 여전론이 근본적으로 다른 개혁안은 아니다. 아마도 그는 지향할 궁극적 목표 내지는 방향으로 여전제적 개혁안을 제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현실적 개혁안으로서 정전제를 말했기 때문에 이 둘 사이에는 상이점보다는 유사점이 더 많이 드러나게 되었을 것이다.

〔상업·공업 정책론〕 정약용은 상업 및 수공업 분야에 관해서도 개혁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존중하던 원초 유학의 왕도정치론에서는 인정의 지표 가운데 하나로 상인과 장인 ( 匠人 )을 보호하는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살았던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선진시대와는 달리 상공업이 상대적으로 발전해 가던 단계였다.

이처럼 그는 선진 유학에서 제시했던 공고(工賈)에 대한 보호논리와 조선 후기의 상공업계의 발전 등에 영향을 받아서, 화폐의 유통정책에 적극적이었으며, 광업의 개발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왕도정치의 구현을 시도하던 정약용이 상공업 진흥론을 개진한 것은 일견 당연한 일이기도 하였다.

우선 그는 상업을 천시하는 말업관과 상인의 관직 진출을 막는 금고법의 철폐를 주장하였다. 이는 유식(遊食) 양반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이었다. 또한, 그는 상업발전론을 제시하는 한편으로 특권상업 및 매점상업에 대해서는 반대론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에 이미 18세기 이후 발달한 특권 및 매점 상업에 의한 폐단이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 선왕의 법 ’ 을 들어서 상업 이윤을 확보하고 있던 상인들에 대해 상업세의 증수를 꾀하기도 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세과사(稅課司)나 독세사(督稅司)와 같은 세무관서의 설치가 필요하다고 보았고, 상업세의 증수를 위해 구체적인 방안을 제안했던 것이다.

정약용은 상업뿐만 아니라 수공업 분야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방직(紡織) 분야 등에서 드러난 낙후된 국내 기술을 발전시키고 생산력의 향상을 통한 국부를 증대시킬 목적으로 선진기술을 과감히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중국으로부터 선진기술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이용감(利用監)과 같은 관청을 설치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선박과 수레 제조기술을 장려하기 위해서는 전함사 ( 典艦司 )나 전궤사(典軌司)와 같은 관청을 중앙정부에 설치해서 정부 주도로 기술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피력했다.

한편, 정약용은 당시 전국적으로 화폐가 유통되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농본적인 절약론의 입장에서 화폐 유통의 구조 개선을 주장하였다. 그는 화폐가 상품 유통의 매개체로서 국가 경제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당시 화폐정책 및 화폐제도의 개혁과 전황 ( 錢荒 )을 극복하려는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은 전환서(典 珤 署)를 설치하여 화폐주조 관리체계를 일원화하고 화폐의 품질과 체제를 개선한다는 것이다. 또한 화폐제도의 개혁안으로 동전을 가장 이상적인 화폐로 생각했으나, 고액전의 통용 및 금 · 은화의 주조를 제안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사회는 광업분야에 있어서도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즉, 18세기 말에는 공장제 수공업 단계의 덕대제 ( 德大制 ) 광업경영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농민층 분화와 관련하여 광산노동자가 증가되었고, 이로 인해 농업노동력의 부족현상이 나타났다. 광업의 발달은 전답과 봉건질서를 함께 파괴시켜 갔다. 그리고 광세(鑛稅)의 징수, 금은의 국외 유출에 따른 손실 등 여러 문제가 수반되었다.

이에 정약용도 사회개혁론의 일환으로 광업개혁론을 제시하였다. 그의 광업론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초기는 국영 광업정책의 단서가 마련되는 〈 지리책 地理策 〉 · 〈 응지논농정소 應旨論農政疏 〉 가 저술된 시기이다. 이 때 정약용은 설점수세제를 기본으로 한 정부의 광업정책을 용인하면서 동점(銅店)과 철점(鐵店)에 대한 억제정책을 완화시키기를 요구했고, 광업의 민영화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광업 민영화보다는 관영화 또는 국영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방향을 견지했다.

광업개혁론에 있어서 두번째 단계는 ≪ 경세유표 ≫ · ≪ 목민심서 ≫ 의 단계이다. 여기서 그는 광업정책 및 광업경영론을 논했고, 광업제도의 운영을 개선하는 방안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즉, 중앙정부 차원의 근본적 개혁 방안으로 국영광업정책 및 국영광업론을 제시하면서 중앙에는 사광서(司 告 署)를 설치하고 지방에는 감무관(監務官)을 파견하여 광산을 관리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밖에도 이용감의 설치를 제안했고, 금광군의 생산 · 노동 조직과 광산의 경영형태 및 생산기술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하면서 생산성 향상을 전망하였다. 나아가 그는 아전의 중간 수탈과 소란의 근원을 방지하기 위해서 지방관 차원의 광업제도 운영방안으로서 광업 행정지침을 구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다산의 광업개혁론은 당시 발달한 덕대제 광업 경영의 기술수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정약용은 왕도정치의 이념에 따라 상공인을 보호하고, 당시 사회의 한 과제로 제시되고 있던 상공업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해 상공업 개혁론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통공발매정책을 지지하면서 상업세의 증수를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광업을 국부의 원천으로 파악하여 국가재정의 확보를 위해서는 광산국영이 요청된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그의 상공업 개혁론은 현실적으로 국가의 재정을 확보하고 유식자(遊食者)를 정리하여 개직(皆職)을 성취해야 한다는 사회개혁적 입장에서 제시되었다.

 

〔사회 신분제도 개혁론〕 정약용은 경제사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추구하고 있던 왕도정치의 이념과 조선사회가 직면해 있던 현실에 대한 성찰을 기반으로 하여 일련의 사회개혁론을 전개하였다.

일찍이 왕도정치의 이념을 제시한 ≪ 맹자 ≫ 는 〈 등문공 冀 文公 〉 상(上)에서 “ 백공의 일은 본래 농사를 지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百工之事 固不可耕且爲也). ” 라고 하면서 노심자(勞心者)와 노력자(勞力者)를 구별해 사회적 분업 개념의 원형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봉건사회 해체기에 있었던 조선 후기의 사회구조에서는 사회적 분업이라는 측면보다는 신분제도가 적용되는 사회적 불평등이 엄존하고 있었다.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은 이와 같은 사회 신분제도의 모순성을 지적하고, 고착적 신분제에 의해서 사회를 설명하기보다는 사회적 분업에 가까운 개념으로 조선사회를 재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약용의 사회신분제의 개혁 논의에는 미진한 점이 많다.

그는 모든 신민을 사 · 농 · 공 · 상 · 포 · 목 · 우 · 빈 · 주(士農工商圃牧虞嬪走)의 9직(九職)으로 나누어 배치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직역에 대한 종래의 신분적 파악에서 사회 분업에 따른 직능적 파악으로 나아갔음을 보여준다.

또한 사의 농 · 공 · 상에의 참여와 농 · 공의 과학기술적 기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기예 경영을 통해 우수한 농 · 공인을 행정직에 발탁하는 일종의 직업별 과거제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9직은 공동체적 필요에 의해 국가에서 배정하는 것으로 자유로운 선택의 의미가 들어있는 것은 아니었으며, 사민구직을 수평적 · 직능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이 신분제의 철저한 혁파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었다.

정약용은 또한 인간의 본질적 평등에 관해서는 인정을 했지만 신분간의 위계질서는 어느 정도 필요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 국가에서 의지하는 것은 사족인데 그들이 권리도 세력도 없어지면 위급할 때 소민의 난리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 라는 우려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는 양반 사족의 지도나 통솔이 없이는 국가가 존립할 수 없다는 신분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교육관에도 드러나 양반 자제와 서민은 교육기관이나 교육내용을 엄격히 구분하여 양반은 지도자로서 수기치인 ( 修己治人 )의 전인교육을, 일반 백성은 효제의 윤리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하였다. 양반은 통치자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배우고 평민은 피지배자로서 지켜야 할 윤리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지배계급의 선천적인 우월과 피지배계급의 선천적인 열등을 합리화시키는 운명론을 부정하고 인명을 중시하는 민본주의 사상에서 계층간 격차를 좁혀 보려 하였다. 그러나 정치의 담당자는 양반임을 내세우는 고정된 신분관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완전한 신분제의 타파로 나아가지도 못하였다.

정약용 역시 기술개발의 최종 통로를 관직의 수여에 귀착시키거나, 성공적인 독농가나 향촌지도자의 경우에도 그 최종 귀착점을 관직에 두고 있었다. 이는 당시 사회문제가 되고 있던 유식양반들에게 개직을 보장하며, 그들을 지방행정의 하급 담당자로 삼아 행정의 운용 효율을 높이고, 사회 풍속의 개선도 기대할 수 있다는 인식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정약용은 여타 실학자들과처럼 사회 신분제에 대해 인습적 관념에 매달리지 않았고 직능적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사회적 분업을 인정하는 입장에서 사회구조를 논했던 것이다. 그들은 성리학적 견지에서 제시되던 선천적 불평등성에 입각한 인간불평등성론에는 분명한 반대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만민평등의 원리를 개관적으로 이론화하거나, 신분제를 철폐하여 사회적 평등을 이루어야 함을 분명하게 주장하는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약용과 같은 실학자들은 왕도정치의 이념에 따라 자신들이 속해 있던 조선 후기 사회의 불평등성에 대해 문제의식은 가지고 있었다.

한편, 그들은 향촌제도의 개편과 연결하여 향직 ( 鄕職 )을 정식 관직화하기를 제안했고, 향리(鄕吏)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이와 같은 그들의 개혁안은 유식 양반들에게 개직을 보장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였다.

 

〔의 의〕 이상과 같이 정약용은 그의 개혁 사상이 가지고 있는 특성들은 그의 철학적 사유 내지는 역사관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는 새로운 천관(天觀)을 제시하며 천명(天命)과 인간본성이 이중구조적 단일체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여기서 그는 성리학의 입장과는 다른 인간관과 윤리관을 가질 수 있었고, 제반 사회개혁론을 제시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역사관에 있어서도 특출한 면을 드러내고 있다. 즉, 민의 일상적 생산활동을 통해 과학기술이 진보, 발전된다는 인식을 확립했던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의 객관적 이해를 위해 노력했고 그것이 도덕적 가치와는 무관하게 존재하고 있다고 파악하였다. 비로소 그는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민에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정약용의 사상은 당시 사회가 직면해 있던 봉건적 질곡을 극복할 수 있는 탁월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학계에서는 그를 실학사상의 집대성자이자 조선 후기 사회가 배출한 대표적 개혁사상가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당시 사회가 직면해 있던 각종 해체 현상을 직시하고, 사회개혁을 위한 여러 방향을 모색하였다. 그리고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가지고 그 문제점들을 찾아 나갔다.

나아가 그는 문제점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 원인에 대해 규명하고자 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그 문제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개혁안을 마련해 보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개혁안은 정조와 같은 성군(聖君)이 왕도정치의 구현을 위해서 실천해야 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 왕도정치의 실현에는 창의적이고 강직한 신하의 보필이 필요하며, 아마도 자신이 이와 같은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듯하다.

정약용은 정조의 치세기였던 자신의 젊은 시절에는 한때 관직에 있으면서 직접 개혁 정사를 실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생애의 대부분은 개혁의 현장과 유리된 상태에서 보내게 되었고, 오랜 귀양살이를 통해 당시 사회의 피폐상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이로써 그는 정약용은 이상적이며 참신한 개혁안들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그는 개혁안을 자신이 직접 추진할 수 없었고, 관직에 대한 경험 부족은 그의 개혁안에 현장성의 결여라는 문제점을 안겨주었다. 즉, 개혁의 목표와 개혁된 사회상에 대해서는 뚜렷이 제시하고 있지만, 개혁된 사회를 이루기 위한 구체적 방법이나 과정에 대해서는 별다른 대안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여기서 그의 개혁안이 가지고 있는 이상적 특성과 함께 실천에 있어서의 제한성이 드러나게 된다.

한편, 그의 개혁안은 민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민본주의에서는 민을 객체화하여 통치나 보호의 대상으로만 파악할 뿐, 민 자신을 통치의 주체로 인식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제약성은 그 개혁안의 실현가능성에 상당한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그러나 정약용은 18세기를 전후하여 우리 나라 사회에서 강력히 제시되고 있던 개혁의 의지를 집대성했고, 개혁의 당위성을 명백히 해주었던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에게는 개혁을 향한 열정과 함께, 빈곤과 착취에 시달리던 민에 대한 애정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그는 시대의 문제점을 밝혀내는 데 과감했으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고뇌하던 양심적인 지식인이었다.

그는 이상적인 왕도정치가 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스스로 좌절하지 않고 그 방대한 개혁사상을 전개해 나갈 수 있었다. 우리는 그의 개혁안이 묵살되거나 좌절되어가는 과정에서 조선왕조의 몰락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환(丁煥), 정황(丁璜)

창원파(昌原派)에서는 환(煥)과 황(璜)의 형제가 다 같이 중종(中宗) 때 조광조(趙光祖) 문하에서 글을 배워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다.

특히 황( )은 중중(中宗) 때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여 병조(兵曹) 및 형조(刑曹)의 정랑 (正郞)을 지냈다.

 

정춘(丁春)

춘(春)은 임진왜란 때 한산(閑山)·거제(巨濟)·옥포(玉浦)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명문(名門)의 대(代)를 이었다.

 

정극인(丁克仁)

영광파(靈光派)에서는 국학문학사상 최초의 가사(歌辭) 작가인 극인(克仁)이 유명했다. 세조(世祖) 때 과거에 오른 그는 태학진사(太學進士)를 거쳐 전주부 교수(全州府敎授)를 지냈고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이르렀는데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인 태인(泰仁)으로 돌아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정자위(丁子威)

의성군파(義城君派)에서는 자위(子威)가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를 역임했다.

 

정맹위(丁孟威)

맹위(孟威)는 봉승낭장(奉承郎將)을 역임하였다.

 

정숙위(丁淑威)

숙위(淑威)는 부사(府使)를 지냈다.

 

정현(丁炫)

현(炫)은 판서(判書)를 역임하여 명망 높은 가문을 빛냈다.

 

정재영(丁載榮)

순조(純祖) 때 문과에 급제한 재영(載榮)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가 뒤에 공조 참판 (工曹參判)을 역임하였으며, 고종(高宗) 때 장사랑(將仕郞)에 이르렀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압해 정씨(押海丁氏)는 남한(南韓)에 총 38,721가구,

165,38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丁台(정태) 선생의 일화.

너븐돌

너븐돌은 수비면 五基里(오기리)에 있는 10m²의 넓은 바위로 일명 廣石(광석)이라고도 한다.

너븐돌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있다.

옛날 丁台(정태)라는 사람이 기거할 곳을 찾아 여러 곳을 찾아다니던 중, 天台山(천태산)에 살고 있는 麻姑(마고) 할미가 아들을 찾아 헤매는 것을 보고 할미의 아들을 구해주겠다고 생각하고, 천년 묵은 여우와 싸와 여우를 죽이고, 바위 속에 갇혀 있는 마고할미의 아들을 구출하여, 마고할미가 있는  천태산으로 가던 중, 도중에서 큰 바위를 싸들고 오는 마고할미를 만났는데, 이 때 마고할미는 아들을 만난 기쁨으로 싸들고 가던 바위를 그만 버리고 아들과 함께 천태산으로 가버렸다.

혼자 남은 정태는 바위에 앉아서 쉬다가 그 자리가 너무 편하고 좋은지라 「너븐돌」이라고 부르고 그곳에 살았다고 한다.
                                                                                                               <출전:  영양군지>

 

 

丁若鏞(정약용) 선생의 일화.

 

다산은 평생을 따라다닌 천주학쟁이라는 붉은 꼬리표 때문에 수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는다.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가까이 모시는 비서관으로서 장래가 촉망되는 유능한 고위관료이던 다산은 천주교 문제 때문에 하루아침에 지방의 미관말직으로 좌천된다.

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서 은둔하고 있다가 역시 천주교와 관련 된 옥사에 연루되어 한번은 경상도 장기현으로, 한번은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간다. 한 개인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이건만, 다산은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책을 놓지 않으며 학문연구에 전념하는 학자로서의 모습을 잃지 않는다.

<출전: 남양주 시지>

 

 

 

丁若鏞(정약용) 선생의 일화.

 

세 번의 유배길

다산은 평생에 세 번의 유배 길을 떠난다. 하지만 한림(翰林), 즉 예문관의 검열이 되 는 과정에서 생긴 잡음으로 떠난 첫 번째 유배는 일주일이 채 못 되어 끝나기에 유배라고 할 수도 없다.

천주교를 믿는 이는 역적의 형벌로 다스리겠다는 엄명에 다산의 형 약종이 천주교 관문서와 물건 등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다 발각된 이른바 책롱사건(冊籠事件)”으로 촉발된 신유박해에 그의 표현대로 붉은 옷 죄수들이 길을 메울 정도로 죽은 사람이 많았는데도 목숨을 겨우 부지한 다산은 젊은이야 기다리면 만날 날도 있겠지만 노인네야 누가 앞일을 누가 알겠나하고 슬퍼하며 경상도 장기(지금의 경북 영일군)로 유배를 떠난다.

처음에는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과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해 힘들어 하였으나 곧 마음을 다잡고 저술 작업에 전념하게 된다. 그 결과 장기에서 다산은 상복문 제로 서인과 남인사이의 기해년의 예송을 다룬<기해방례변(己亥邦禮辨)>과 한자 발달사에 관한 <삼창훈고(三倉訓詁)>, 그리고 한자의 자전류라 할 수 있는 <이아술(爾雅 述 )> 6권을 저술하였다.

 

의금부에서 받은 모진 고문이 가져다 준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고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받으며 궁벽한 산골에서 언제 풀릴지도 모르는 유배생활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 저술들은 불행하게도 그 해 겨울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서울로 압송되어 조사받는 경황 중에 분실되어 오늘에 전하지 않고 있다.

 

북쪽바람 눈 휘몰 듯이 나를 몰아 붙여머나먼 남쪽 강진의 밥 파는 집에 던졌구료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체포되어 죽음은 겨우 면하였지만 형 약전과 함께 유배길에 올라 1801년 음력 11월 하순의 추운 겨울날, 유배지 강진읍에 도착하여 지은 객중 서회(客中書懷)”라는 시이다.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가슴 아픈 이별을 뒤로하고 천리 먼 길을 걸어온 유배객을 기다리는 것은 매서운 겨울바람과 백성들의 차가운 시선이었다. 큰 독소로 여기고 가는 곳마다 문을 부수고 담장을 무너뜨리며 상대조차 해 주 지 않았다. 강진읍 동문 밖 주막의 노파가 내준 허름한 방 하나에 거처를 정한 다산은 억울한 유배의 억눌린 심정을 잊고 이제야 학문에 전념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고 기뻐하였다.

 

이에 다산은 누추한 주막의 뒷방을 사의재라 이름하고 방대한 육경사서에 대한 저서의 시작으로 <예기(禮記)> 연구에 열중한다.

<출전: 남양주 시지>

 

 

 

 

丁若鏞(정약용) 선생의 일화.

 

유배지에서의 진정한 성인

출세가도를 달리던 명문가의 고위관료가 반대파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남녘의 궁벽한 곳에 유배오고도 그들을 원망하거나 신세를 한탄하여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생각과 용모, 언어와 행동에서 의로움에 합당하도록 하겠다는 그의 다짐에 절로 고개가 숙여 지고 어떠한 굴욕과 탄압 속에서도 마음만은 자유를 만끽하며 금욕적으로 살아가겠다는 다산의 당당한 태도에 마음으로 깊이 존경하게 된다.

산수를 벗 삼아 음풍농월(吟風弄月)하며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거나 임금에 대한 흠모의 정을 노래한 연군가를 부르며 서울로부터의 해배 소식을 학수고대하던 보통의 유배객과는 달리 핍박받는 백성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에 바탕 하여 수기(修己)”로서의 육경사서에 대한 방대한 연구와 치인(治人)”으로서 국가의 총체적 개혁서라 할 수 있는 <경세유표>와 목민관이 지켜야 할 사항을 적어놓은 <목민심서>등을 저술한다.

 

죽기 2년 전인 일흔 세살의 고령에도 유배시절 저술했던 상서(尙書 , 五經중 하나로 일명 書經)를 개정 · 보완했던 다산에게 우리는 참다운 지식인의 모습을 봇 수 있다.

 

그는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 “지식인이 세상에 전하려고 책을 펴내는 일은 단 한사람만이라도 그 책의 값어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해서다. 나머지 욕하는 사람들이야 신경 쓸 것 없다. 만약 내 책을 정말 알아주는 이가 있다 면, 너희들은 그가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면 아버지처럼 섬기고, 설령 적대시하던 사 람이라도 그와 결의형제를 맺어야 한다.”라 하였다.

<출전: 남양주 시지>

 

 

 

 

丁若鏞(정약용) 선생의 일화.

 

천주학쟁이다산

끈질기게 붙어 다닌 천주학쟁이라는 붉은 꼬리표 때문에 다산은 질곡의 삶을 살아 야 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때문에 오늘날의 다산이 있게 된 것이다. 정조 사후 중앙의 세도정치라는 혼탁한 정국 속에서 벼슬살이를 계속하였다면, 그저 그런 평범한 선비로 기억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신유사옥으로 인해 18년이라는 긴 세월을 강진 땅에서 유배생활하며 남긴 방대한 <여유당전서>는 그를 주자와 견주는, 오히려 그를 뛰어넘는 위대한 학자로 기억되게 하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연구(다산학)한국학의 보고가 되었다. 다산의 일생은 자의든 타의든 천주교와의 연관성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산은 한국천주교의 창립을 주도한 인물들 속에서 성장했다. 한국인으로서 북경에 가서 처음으로 서양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은 다산의 매형이다. 최초의 천주교리연구회장(明道會長) 으로서 순교한 정약종(丁若鍾, 1760~1801)은 다산의 셋째형이다.

진산사건으로 효수 된 윤지충(尹持忠, 1759~1791)은 다산의 외사촌 형이고 백서(帛書)사건으로 능지처참 당한 황사영(黃嗣永)은 정약현의 딸 즉, 다산의 조카딸을 아내로 맞은 인물이다. 그러니까 그의 고향 마재는 서양학문(西學)에 대한 관심이 서양의 신앙(西敎)으로 발전하면서 피어린 순교의 역사를 배태한 자궁이었다.

<출전: 남양주 시지>

 

 

 

 

丁若鏞(정약용) 선생의 일화.

 

천연두와의 한판 승부

훌륭한 목민관이 되겠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던 다산은 때마침 곡산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일명 마마라 불리는 천연두가 창고하자 이에 대한 치료법을 적은 <마과회통(麻科會通)> 12권을 지었다. 그 자신도 일찍이 천연두와는 좋지 않은 인연이 있었다. 일곱 살 때 천연두를 앓아 오른쪽 눈썹이 세 갈래로 나뉘었다하여 스스로를 삼미자(三眉子)”라 불렀고 슬하에 9남매 중 요절한 대부분이 홍역을 앓다가 그만 죽 고 말았다.

다산은 당시에는 목숨까지 잃을 정도로 무서운 전염병이었던 천연두의 치료법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가 어려서 천연두를 앓았을 때 치료해 준 이헌길(李獻吉) 에게서 책을 빌려 그 근본원인을 탐구하고 중국의 관련서적 수십 권을 참고하여 초고를 정리하고 그것을 다시 다섯 차례나 고쳐 12권의 <마과회통>을 완성하였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 인명보다 이익을 중시하는 의원들을 다음과 같이 꾸짖고 있다.

 

의원 이 의원을 직업으로 삼는 까닭은 이익을 위해서 인데 몇 십년 만에 한 번씩 발생하는 천연두 치료로는 이익이 되지 않는다. 직업으로 삼아도 기대할 이익이 없는 데다 환자를 치료하지도 못하니 부끄러운 일이다밤이나 비가 올 때면 등잔불이나 삿갓을 급히 찾다가도 아침이 되거나 비가 그치면 까마득하게 잊어버리듯이 천연두에 대한 세간의 얄팍한 연구를 비판한 다산은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와 함께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결국 역사상 처음으로 종두법을 소개하기에 이른다.

<출전: 남양주 시지>

 

 

 

 

丁若鏞(정약용) 선생의 일화.

 

다산은 18년 동안의 고독한 강진 유배생활에서 말없이 따뜻한 위로를 해주던 친구는 그윽한 차 향기, 그리고 더불어 다도를 즐기며 말동무가 되어주던 혜장과 초의 두 선 사(禪師)였다. 하지만 다산이 언제부터 차를 마셨는가에 대해서는 연구자에 따라 유배 전의 음다설과 유배후의 음다설로 나눠진다. 주의할 것은 단순히 차를 마신 것과 음미 하면서 다도를 즐기는 차를 생활화 한 것은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유배 전의 음다설(飮茶說)

차 연구가인 김명배 선생은 <다도학논고(茶道學論攷)>에서 이전의 일반설이었던 유배 후의 음다설에 대해 다산의 차에 관한 시문의 역사적 시기를 증거로 제시하며 유배전 부터 다산은 차를 마셨다고 주장한다. 관직생활을 하기 전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 생활하며 그곳에서 읊은 <등성주암(登聖住菴)>(18) <하일지정절구(夏日池亭絶 句)>(19)의 다시(茶時)와 성균관 유생시절 차가 들어있는 식당 차림표로 볼 때 유 배 전부터 다산은 차를 마셨다고 주장한다.

 

유배 후의 음다설(飮茶說)

다산은 강진에서의 귀양살이 기간 중 아암(兒菴) 혜장선사(惠藏禪師, 1772~1811)로 부터 차를 배워 즐겨 마셨다고 한다. 이는 이을호 교수를 비롯한 학계의 일반적인 주 장이다. 그는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1801)되어 오기 전에 차와의 인연을 찾아볼 수 있는 문헌은 없고 오히려 유배후 백련사의 선승 혜장선사를 만나 비로소 차와의 인연 을 맺게 되었다고 말한다.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를 와서 동문 밖 주막집에 거주한지 5년째 되는 을축(乙丑 1805)년 가을에 인근 백련사(만덕사)에 소풍을 나갔다가 다산 만나기를 갈구하던 혜장선사와 해후를 하면서 본격적인 차생활을 시작하며 그에게 명 다(茗茶)를 부탁하는 <기증혜장상인걸명(寄贈惠藏上人乞茗)>이라는 시를 보내기까지 한다. 그는 오랫동안의 유배생활과 학문연구로 인해 쇠약해지고 병든 몸을 치료하기 위한 약으로도 차를 즐겨 마셨으며, 혜장이 소개해준 다선(茶仙) 초의선사와 만남은 사제지간으로 발전한다. 귀양에서 풀려 한강변 고향집으로 온 후에도 초의나 강진 다 신계의 선비들이 보내주는 차로써 계속 차를 마셨고 경기학인들을 비롯한 막역한 벗 들과 차와 시로써 교유하였다. 그는 생애를 마감할 즈음에도 다종(多種, 찻잔)을 곁에 두고 지낸다고 할 정도로 차를 사랑하였다

<출전: 남양주 시지>

 

 

 

 

丁若鏞(정약용) 선생의 일화.

 

부인 홍씨와의 애틋한 이별

15세에 한 살 연상인 풍산 홍씨(1761~1838)와 결혼한 다산은 공교롭게도 결혼 60주 년이 되는 회혼일에 먼저 눈을 감고 홍씨는 2년 후인 1838년 남편 다산을 뒤따른다. 10대 중반의 철없던 나이에 결혼하여 힘든 과거공부와 분주한 벼슬살이로 인해 부부 간의 애틋한 정을 제대로 나누지 못한 다산은 정치적 반대파의 모함으로 인해 한창 나이인 40세에 유배를 떠나며 사랑하는 아내와 눈물의 생이별을 하게 된다.

죄인의 신분으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며 기약없는 머나먼 귀양길을 떠나는 남편을 아내는 세살박이 막내아들을 품에 안고 눈물로 전송한다. 한참 말을 배우며 재롱을 피우던 귀여운 막내가 네 살에 요절하였다는 소식에 자신의 애절한 슬픔은 뒤로 하고 제 뱃속에서 낳은 애를 흙구덩이 속에 집어넣는 에미의 애통한 심정을 헤아려 정성껏 보살피기를 머리카락 하나의 틈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두 아들과 며느리에게 부탁한다. 홍씨 부인은 시어머니(다산의 의붓어머니로 부친 정재원의 4번째 부인)를 모시며 지아비 없는 허전한 집을 지키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 다산이 장모의 죽음을 슬퍼하며 생전의 공덕을 칭송하기를 찾아오는 손님 머리 잘라 술상 차렸고 늙은 시 부모님께 방아를 찧어 즐겁게 해드렸다지했는데 친정 어머니의 그 고운 심성을 홍씨 부인이 그대로 이어 받은 것이다.

 

유배지에서 여섯폭 다홍치마의 위안

사랑하는 지아비를 강진으로 유배 보내고 자식들을 키우며 그리운 정을 삭이던 홍씨는 누에치기를 좋아하는 자신에게 시(珍詞七首贈內)를 지어줄 정도로 다정하였던 남편에 게 시집올 때 입고 왔던 여섯 폭 다홍치마를 보낸다. 10여년의 유배생활에 몸과 마 음이 지쳤을 지아비가 장롱 속 깊이 간직했던 빛바랜, 하지만 신혼시절의 추억이 스 며있는 다홍치마를 보고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을까? 이에 다산 은 그 비단치마를 재단하여 두 아들에게 교훈의 글을 써주고 외동딸에게는 매화에 새를 그린 매조도(梅鳥圖)를 선물한다. 지금 고려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 아래쪽으로 다음과 같은 4언율시와 그리게 된 사연이 적혀있다.

 

파르르 새가 날아 뜰 앞 매화에 앉네(翩翩飛鳥 息我庭梅)매화 향기 진하여 홀연히 찾아왔네(有列其芳 惠然其來)여기에 둥지 틀어 너의 집 삼으렴(爰止爰棲 樂爾家室)만발한 꽃인지라 먹을 것도 많단다(華之旣榮 有賁其實)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 한지 여러 해가 지났을 때 부인 홍씨가 헌치마 여섯 폭을 보 내왔다. 이제 세월이 오래되어 붉은 빛이 바랬기에 가위로 잘라 네첩을 만들어 두아들에게 주고 그 나머지로 족자를 만들어 딸에게 준다.(余謫居康津之越數年 洪夫人寄 敞裙六幅 歲久紅 剪之爲四帖 以遺二子 用其餘 爲小障 以遺女兒)

 

은은한 매화향기에 취해 쓸쓸한 유배생활의 위안을 삼고 있는데 어디선가 날아온 한 마리 새가 정원의 매화나무에 앉는 것을 보고 다산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꿈속에 서라도 보고 싶은 부인이 혹 새가 되어 날아온 것은 아닐까? 바다 건너 흑산도에 계 시는 약전 형님이 보고 싶은 마음을 새에게 대신 보내지는 않았을까? 찾아오는 이 없는 쓸쓸한 유배객을 위로하려 먼저가신 아버님이 보낸 귀한 친구인가? 지필묵을 꺼낸 다산은 몇 해 전 부인이 인편에 보내온 시집올 때 입었던 색바랜 다홍치마를 꺼 내 그 위에 애절한 마음을 그리고 안타까운 심정을 시로 적어 외동딸에게 선물한다.

<출전: 남양주 시지>

 

 

 

 

丁若鏞(정약용) 선생의 일화.

 

다산 부부의 시공을 초월한 사랑

고향 마재 마을을 지키며 남편을 손꼽아 기다리던 홍 씨에게 지아비의 해배소식은 맨 살을 꼬집어보아야만 믿길 정도로 거짓말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립문에 들어서는 남편의 모습에 부인은 고개 돌려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떠날 때 나이 사십의 건장한 청년의 모습은 온데 간데없고 깊이 패인 주름살에 백발이 성성한 초로의 모습으로 돌아왔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자신은 그렇다 치더라도 남편만은 덜 늙었기를 바랐을 것이다. 유배지에서 다하지 못한 저술작업을 마무리하며 조용히 여생을 보내 던 다산은 60년 전, 15살의 나이로 발그레한 볼에 꽃가마 타고 온 새색시를 맞던 그 날 숨을 거둔다. 죽기 전 다산은 얼마 남지 않은 회혼일에 맞춰 미리 시(回禮)를 하 나 짓는다.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 60년 동안 고락을 같이 한 이팔청춘 곱던 얼굴의 여인을 주름 살만 가득한 할머니로 만든 무심한 세월에 대한 투정이 가볍게 묻어 있다.

육십 평생 바람개비 세월이 눈앞을 스쳐 지나는데 무르익은 복숭아 봄빛이 마치 신혼 때 같아라.

폐족의 설움을 안고 사는 다산의 어린 자식들

어머니 품에 안겨 유배가던 아버지를 전송하던 세살짜리 막내 아들을 뒤로하고 천리 길 전라도 강진 땅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는 다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버지 는 큰아버지(약전)와 함께 유배를 떠나고 약종 백부는 대역 죄인으로 참수당하니 어 린 나이의 자식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사건이었다. 각각 19, 16살로 한참 과거 준비에 열중할 나이였던 다산의 두아들 학연과 학유에게 큰아버지의 대역죄인소식 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처럼 놀라운 일이었다. 큰아버지의 죽음도 슬픈 일인데 이제 과거까지 볼 수 없으니 얼마나 낙심하였을 것인가? 당시 대역 죄인의 집안은 과거를 볼 수 없는 것이 국가의 법률이었다. 이런 두 아들의 심정을 헤아린 다산은 유배지에 서 편지를 보낸다. 절대로 좌절하지 말고 더욱 정진하여 책 읽기에 힘써라. 출세길이 막힌 폐족이 글도 못하고 예절도 갖추지 못한다면 어찌 되겠느냐. 보통 집안사람들 보다 백배 천배 열심히 공부해야 겨우 몇 사람 노릇을 하지 않겠느냐. 내 귀양사는 고통이 매우 크긴 하지만 너희들이 독서에 정진하고 몸가짐을 올바르게 하고 있다는 소식만 들리면 근심이 없겠다. 유배 간 아버지에게 햇밤을 보낼 정도로 효심이 깊었 던 아들이었지만 여러 차례 글공부를 재촉하는 아버지의 편지에도 불구하고 학문에 부지런하지는 않았나 보다. 자질은 있지만 게을러 학문에 진척을 보이지 않는 자식들 을 걱정하다 병까지 앓으며 노심초사 하던 다산은 엄히 꾸짓는 편지를 보낸다. 너희 처지가 비록 벼슬길은 막혔다 하더라도 성인이 되는 일이야 꺼릴 것이 없지 않느냐. 문장가가 되는 일이나 넓게 알고 이치에 밝은 선비가 되는 일은 꺼릴 것이 없지 않느 냐. 평민이 배우지 않아 못난 사람이 되면 그만이지만 폐족으로서 배우지 않는다면 마침내 비천하고 더러운 신분으로 타락하고 말아 아무도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다.

<출전: 남양주 시지>

 

 

 

 

丁若鏞(정약용) 선생의 일화.

 

따뜻한 아버지 다산

학문을 게을리 하는 아들을 다산은 유배지 강진으로 불러 직접 가르친다. 유배초기 서슬 퍼렇던 관가의 감시가 시간이 흐르자 조금씩 풀렸다. 이에 다산은 1805년 겨울 유배지를 찾아온 장남 학연과 읍내 고성사의 보은산방에서 함께 묵으며 주역과 예기 를 밤낮으로 가르쳤다. 유배 중 네 번의 교정을 거쳐 완성한 <주역>과 함께 <예기> 를 꼭 읽어야 할 책으로 말하고 <독례통고(讀禮通考)>라는 책을 인편으로 보낼 정도 로 예에 연구에 각별하였던 다산인지라 아들에게 직접 예기에 대해 강론하였던 것이 다. 이때 예에 대한 학연의 질문에 답변한 것을 기록하여 모아 놓았는데 이름하여 스 님들이 묵는 암자에서 묻고 답하였다 하여 <승암문답(僧庵問答)>이라 하였다.

유배지를 다산초당으로 옮긴 1808년에는 둘째 아들 학유를 옆에 두고 오경 가운데 <주역> <춘추>를 읽도록 하였다. 큰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산은 둘 다 가까이 두 고 직접 가르치고 싶지만 가정형편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고 하며 읽어야 할 책의 순서를 꼼꼼히 적고 있다. 이 외에도 그가 집으로 보낸 편지를 보면 옆에서 직 접 가르치며 학문의 진척을 점검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지 못하는 아버지의 걱 정이 구절구절마다 깊이 배어 있다.

이렇게 공부에 대해서는 엄격하였던 아버지였지 만 모든 부모가 그러하듯 어린 자식의 죽음에는 한없이 약한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외동딸에게는 사내아이와는 또 다른 애틋한 부정을 느낀다. 아들에게 보내 는 편지에서 고향으로부터 기별이 오면 보기도 전에 마음부터 졸인다고 하였던 다 산은 1802년 겨울 네 살짜리 막내아들이 죽었다는 비보를 접하고 간장을 쥐어짜는 서러움이 복받친다고 하며 슬퍼하였다. 귀양살이 떠날 때 과천 점포 앞에서 어머니 품에 안겨 아버지와의 기약 없는 이별에 슬퍼하던 그 아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여 몇 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였으리라. 눈앞에서 네명의 사내아이와 한명의 계집아이를 잃 었을 때는 운명으로 생각하고 억지로 스스로를 위로하였으나 유배지에서 듣는 막내의 죽음은 끓어오르는 슬픔을 어떻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고통이었다.

 

절하는 연습한다 예쁜모습 보여주고

술잔을 건네주며 웃음 띤 모습 절로 보여

오 늘 같은 단오날 저녘

누구 있어 손에 쥔 구슬처럼 사랑하리하고 어렸을 적 딸아이의 재롱을 그리워하면서도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다 산은 어른으로 성장한 딸을 절친한 친구의 아들이자 제자인 윤창모에게 시집보낸다.

 

그리고 친정어머니가 입고온 다홍치마 위에 매화와 새를 그리고 애절한 심정을 시로 적어 외동딸에게 선물한다. 아마도 시집간 딸에게 아버지로서 죄인의 몸인 것이 늘 부담스러웠을 것인데 그 미안함을 매조도에 담아 보내지 않았을까?

<출전: 남양주 시지>

 

 

출처 <한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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