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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남양제갈: 서촉제갈씨(諸葛)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諸葛(남양제갈씨)

 

 

본관(本貫): 남양(南陽)

시조(始祖): 제갈규(諸葛珪): 제갈공순(諸葛公巡)

유래(由來):

 

 제갈씨(諸葛氏)는 중국(中國)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남양제갈씨세보(南陽諸葛氏世譜)」에 의하면 시조(始祖) 제갈규(諸葛珪)는 「삼국지(三國志)」에 등장하는 유명한 제갈 량(諸葛 亮 : 제갈공명)의 아버지라 한다.

우리나라 제갈씨는 신라(新羅) 흥덕왕(興德王) 때 제갈규(諸葛珪)의 20대 손으로 제갈공순(諸葛公巡)이 우리나라에 건너온 것이 시조가 된다. 고려(高麗) 고종대(高宗代)에 와서 후손(後孫) 제갈 홍(諸葛 泓)·제갈 형(諸葛 瀅) 두 형제가 복성(復姓)을 서로 한 자씩 나누어 쓰기로 하여 형 홍(泓)은 제씨(諸氏)로, 아우 형(瀅)은 갈씨(葛氏)로 분종(分宗)하였다가, 구한말(舊韓末)에 이르러 성씨 환원운동(姓氏還元運動)이 일어나자 일부가 제갈씨(諸葛氏)로 복성(復姓) 했다고 한다.

 

가문의 중요 인물

 

제갈 은(諸葛殷)

 

은이 고려에서 시랑(侍郞)을 지냈다.

 

제갈 훤(諸葛萱)

훤(萱)이 상장군 (上將軍)을 역임했다.

 

제갈 윤신(諸渴允信)

의병장(義兵將) 제갈 윤신(諸渴允信)은 한말(韓末)에 연기우(延基羽)의 부장(副將)이 되어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으며, 철원(鐵原)·평강(平康) 등지에서 일본군(日本軍)과 접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戰死)하여 가문을 빛내었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남양 제갈씨(南陽諸葛氏)는 남한(南韓)에 총 830가구, 3,47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諸葛孔明(제갈공명) 선생의 일화.

 

       죽어서도 司馬中達(사마중달)을 쫓아버리다.

사국지에 촉한(蜀漢)의 제갈량이 위(魏) 나라의 사마중달과 대진하고 싸울 때 천문(天文)을 보니 자기의 수명이 다한 것을 알고, 자기가 죽으면 중달의 습격의 강도가 강해질 것을 예측하고 부하들에게
[내가 죽으면 사마가 습격해 올 것이다. 그러니 당분간 나의 죽엄을 숨기고, 싸움이 시작되면 평소 내 모양과 꼭 닮은 목상(木像)을 만들어 두었다가 내 옷을 입혀 사륜거 위에 얹어 밀고 나가라. 그러면 사마중달은 도망 갈 것이다.]하였다.

과연 제갈량이 죽자 사마중달은 진격해 오므로, 촉한 군사들이 제갈량의 유언대로 목상(木像)을 만들어서 밀고 나가니, 중달은 제갈량의 꾀에 속아만 오던 중이라, 이번에도 제갈량이 죽었다고 헛소문을 퍼트려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계략 인줄 알고 즉시 군사를 거두어 도망을 쳤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후, 후세  [죽은 제갈량이 살아 있는 사마중달을 쫓았다.]라는 말이 생겼다.

 

2

  盡人事待天命(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의 시작

赤壁賦(적벽부)에 曹操(조조)의 대군과 맞선 諸葛孔明(제갈공명)의 군대는 비길 수도 없이 적은 병력 이었다.
온갖 재주와 계략으로 버티어 나가던 諸葛孔明(제갈공명)은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할 수 있는 모든 방책을 다 준비했다,

그러고 나서 장병들에게
[내일의 결전에 최선은 실로 중요한 싸움이다. 우리는 우리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 취했으니 이재는 오직 하늘이 주는 운명만 기다릴 수밖에 없다.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주기 바란다.]라고 하였다.

즉 盡人事待天命(진인사대천명)이라는 유명한 이 말은 그때 諸葛孔明(제갈공명)이 최초로 썼다고 한다.

 

 

 

諸葛 南鶴(제갈 학남)선생의 효행

 

 

북두칠성에 드린 기도

 

경북 달성군 구지면 응암 1동 산 26-1번지 소재, 마을 입구 도로 왼편에는 사방 10 평 남짓한 규모의 청색 기와로 말끔히 단장한 담장 안에 효행에 대한 내력을 말해 주듯, 늙은 두 그루의 측백나무 사이에 아담하게 세워진 한 채의 비각은 이 고장 주민들의 자랑인 제갈 남학(諸葛 南鶴)의 효자비각 이다.

그의 호는 필암(必庵)이요, 자는 성오(成五), 남양인 시호 문효공 화오 (花塢)선생의 8세 손으로 1847년 달성군 구지면 응암동 60번지에서 태어나, 1903720일에 별세하니, 생존시 효행이 지극하여 그 뜻을 기리기 위해 비각을 세워 추모하고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남달리 깨달은 바가 있어 언행이 바르고 매사에 성실했 다. 특허 그는 부모님을 봉양하는 데는 자신의 몸을 조금도 아끼지 않고 성 의를 다하였으므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많은 칭송을 받았다.

그가 장성한 어느 해, 부친께서 모진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이른 아침부터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며 온갖 좋다는 약을 다 구해 드렸으나 효험이 없게 되자, 걱정한 나마지 병의 치도를 알기 위해 부친의 대변을 입으로 맛을 보고, 밤마다 정화수를 떠 놓고 냉수로 몸을 깨끗이 하여 북두칠성에 기도하니, 그의 갸륵한 정성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했던 것이다.

 

병환중이라 음식을 잘 드시지 않아 몸이 몹시 쇠약해진 부친께서 하루는 잉어회를 원하시는 것이 있다. 어머니와 상의해1 보았으나 마침 때가 엄동설한인지라 잉어를 구할 길이 없었다. 생각다 못해 효자는 밤중에 근처 갯벌 (응암 2동 소재)에 나가 두껍게 얼어붙어 있는 얼음을 깨어 옷을 벗고 차가운 물속에 뛰어들어 잉어를 찾고 있자니, 홀연히 커다란 잉어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나오는지라 그 놈을 잡아 부친께 정성을 다하여 회를 장만해서 드리니, 그렇게도 심하게 앓고 계시던 부친이 며칠이 지나지 않아 일어 나는 것이었다.

 

옛날에 왕상(王祥)이란 효자가 있은 이후로 얼음 속의 잉어란 효자집의 영부(靈符)로 여겨 왔으나, 진실로 이처럼 엄동설한에 잉어를 잡게 된 것은 하늘도 그의 극진한 효심에 무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부모를 봉양함에 있어 하루도 빠짐없이 밥상을 손수 들고 가서 끝날 때까지 무릎을 꿇고 단정히 앉아 지켜보았으며, 영양이 부족하여 몸이 허 약해질까 봐, 부모님께 좋은 반찬을 해 드리기 위해 곳곳을 찾아 헤매며 갖 은 고생을 다하였다· 그리고, 그가 친구의 초대나 잔칫집에 갔을 때는 자 기가 먹은 음식은 친구에게 부탁하여 반드시 싸 가지고 와서 부모님께 드렸 으며, 만약 음식을 구하지 못할 경우에는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시켜서 자기가 먹은 음식을 그대로 만들어서 부모님께 드려 마음을 즐겁게 했다·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께 효도하다가 상을 당하자, 무덤 옆에 여막을 치고 하루도 빠짐 없이 밤낮으로 호곡하는데, 하루는 큰 범 이 나타나서 으흥소리를 지르며 위협했으나, 효자는 이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통곡을 그 치지 아니하자, 짐승도 그의 지극한 효성에 감복했던지 여막 주위를 몇 번 인가 돌고는 발길을 돌렸던 것이다· 그는자기 어버이를 극진히 모시기도 하였지만 남의 어버이 또한 자기 어버이 못지 않게 공경할 줄 알았다.

 

하루는 친척 집에 다녀오던 중 이웃 마을의 한 노인이 나뭇짐을 지고 산비탈 길을 내려오다 넘어져 몹시 다쳐 혼자 신음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노 인을 일으켜 집에까지 부축하여 모셔다 드렸다. 그때 노인의 형펀이 녁넉하 지 못함을 안 그는 노인의 몸이 완쾌될 때까지 대신 나무를 해서 도와 주니 그노인은 물론, 이웃 마을 사람들 마저도 크게 감동하였다.

 

그의 부모님께 대한 효성과 웃어른에 대한 공경심을 그를 아는 사람마다 보기 드문 효자라고 칭송하였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부모님은 나를 낳아 주셨으니, 은혜가 하늘같아 항상 마음과 뜻을 모아 정성을 다하여 섬기고, 나를 길러 주셨으니, 내 몸은 즉 부모님의 것이므로 부모님이 병이 났을 때는 내 몸에 병이 난 것과 같이 생각하여 온갖 성의를 다하여 치료하고, 또 남의 부모인인 웃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이며, 이것은 나의 분수를 내가 스스로 알기에 행한 바를 다함인데, 어찌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 받기를 바라겠는가?”

라고, 말하여 사람들은 그의 겸손한 태도에 다시 한번 감복하지 않을 수 없 었다.

 

그의 지극한 효성 에 마을 사람들은 너무도 감탄하여 효행 이야기는 마을의 자랑으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여려 가지 문헌에는 그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으나, 나라에서 내리는 특별한 혜택은 받지 못하였으니 그의 지 극한 효행에 비추어 볼 때,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아들 두근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정성을 다해 문중과 힘을 모아 193712월 마을 어구에 비각을 세워 이를 추모하니, 오늘날과 같이 인륜이 허물어져 가는 시대에 한 조각의 비석이나마 온 세상 사람들의 행실을 일깨워 주는 증표가 되었다.

 

참고 문헌 내 고장 전통 가꾸기, 孝烈行誌(효열행지)

 

 

출처 <한민족대성보>.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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