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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천조씨: 배천조씨(趙)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趙(배천조씨)

 

 

본관(本貫): 배천 백청(白川)

시조(始祖): 조지린(趙之遴)

유래(由來):

 

백천조씨(白川趙氏)의 시조(始組)인 조지린(趙之遴)은 중국(中國) 송(宋)나라 태조(太組 : 조광윤)의 맏아들인 덕소(德昭)의 아들로 979년(고려 경종 4, 송나라 태평흥국 4년) 난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 은천현(銀川縣) 도태리(都台里 : 황해도 배천)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시원(始原)을 이루게 되었다.

그는 고려 현종조(顯宗朝)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좌복야·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양유(良裕)가 덕종(德宗)과 정종조(靖宗朝)에 걸쳐 판위시승(判衛寺承)을 지내고 추의찬화익조공신(推義贊化翊祚功臣)으로 문하시중(門下寺中)에 오르고 배천군(白川郡)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배천(白川)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조선정(趙先正)

양유(良裕)의 아들 선정(先正)이 1047년(고려 문종 원년)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문하시중(門下寺中)·태자태사(太子太師)에 이르렀다.

 

조문주(趙文胄)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한 옥(玉)의 아들 문주(文胄)는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고종(高宗) 때 위사공신(衛社功臣)으로 은천군(銀川君)에 봉해져서 아들 오(傲)·진(珍) 형제와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조헌(趙憲)

1544(중종 39)∼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유학자·의병장. 본관은 배천 ( 白川 ).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 경기도 김포 출생. 황(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세우(世佑)이고, 아버지는 응지(應祉)이다. 어머니는 차순달(車順達)의 딸이다. 이이(李珥)· 성혼 ( 成渾 )의 문인이다.

1555년(명종 10) 12세 때 김황(金滉)에게 시서(詩書)를 배웠는데, 집이 몹시 가난해서 추운 겨울에 옷과 신발이 다 해어졌어도 눈바람을 무릅쓰고 멀리 떨어진 글방 가는 것을 하루도 쉬지 않았으며, 밭에 나가 농사일을 도울 때나 땔감을 베어 부모의 방에 불을 땔 때에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고 한다.

1565년 성균관에 입학했으며,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8년(선조 1) 처음으로 관직에 올라 정주목·파주목·홍주목의 교수를 역임하면서 사풍(士風)을 바로잡았다.

1572년부터 교서관의 정자·저작·박사를 지내면서, 궁중의 불사봉향(佛寺封香)에 반대하는 소(疏)를 올려 국왕을 진노하게 하였다. 성절사 ( 聖節使 ) 박희립(朴希立)의 질정관 ( 質正官 )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동환봉사 東還封事〉를 지어 올렸다.

1575년부터 호조좌랑·예조좌랑·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을 거쳐, 경기도 통진현감으로 있을 때, 내노(內奴)의 횡행죄를 엄히 다스리다가 죽인 죄로 탄핵을 받아 부평으로 귀양갔다가 3년 만에 풀려났으며, 다시 공조좌랑·전라도도사·종묘서영(宗廟署令)을 역임하였다.

1582년 계모를 편히 모시기 위하여 보은현감을 자청하여 나갔는데, 그 치적이 충청좌도에서 으뜸으로 손꼽히었다. 그러나 대간의 모함에 따른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다시 공주목제독(公州牧提督)을 지냈다.

1587년 동인 정여립 ( 鄭汝立 )의 흉패함을 논박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지어 현도상소(縣道上疏)하는 등 5차에 걸쳐 상소문을 올렸으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시 일본사신을 배척하는 소와 이산해 ( 李山海 )가 나라를 그르침을 논박하는 소를 대궐문 앞에 나아가 올려 국왕의 진노를 샀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옥천군 안읍밤티(安邑栗峙)로 들어가 후율정사(後栗精舍)라는 서실을 짓고 제자 양성과 학문을 닦는 데 전념하였다. 1589년 지부상소(持斧上疏)로 시폐(時弊)를 극론하다가 길주 영동역(嶺東驛)에 유배되었으나, 이 해 정여립의 모반 사건으로 동인이 실각하자 풀려났다.

1591년 일본의 도요토미(豊臣秀吉)가 겐소(玄蘇)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명나라를 칠 길을 빌리자고 하여, 조정의 상하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옥천에서 상경, 지부상소로 대궐문 밖에서 3일간 일본사신을 목벨 것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문인 이우 ( 李瑀 )·김경백(金敬伯)·전승업(全承業) 등과 의병 1,600여 명을 모아, 8월 1일 영규 ( 靈圭 )의 승군 ( 僧軍 )과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충청도순찰사 윤국형 ( 尹國馨 )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해산당하고 불과 700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 영규의 승군과 합진해서, 전라도로 진격하려던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왜군과 8월 18일 전투를 벌인 끝에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후세에 이를 숭모하여 금산전투라 일컬었다.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록되고, 1734년(영조 10)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883년(고종 20) 문묘에 배향되고, 옥천의 표충사 ( 表忠祠 ), 배천의 문회서원 ( 文會書院 ), 김포의 우저서원 ( 牛渚書院 ),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보은의 상현서원 ( 象賢書院 ) 등에 제향되었으며, 1971년 금산의 순절지 칠백의총이 성역화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조정호(趙政虎)

1572(선조 5) ∼ 1647(인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배천 ( 白川 ). 자는 인보(仁甫), 호는 남계(南溪). 부사과 ( 副司果 ) 장손(長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응두(應斗)이고, 아버지는 부호군 충( 食 )이다. 어머니는 김덕윤(金德潤)의 딸이다. 큰아버지 응(凝)에게 입양되었다. 대제학 석윤(錫胤)의 아버지이다.

1590년(선조 23)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2년(광해군 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뒤 거산도찰방(居山道察訪)으로 나가 우정사무(郵政事務)에 큰 공적을 세웠다.

아버지의 간호를 위해 관직을 사퇴했다가 승문원저작이 되었다. 이 때 간신들이 정권을 잡고 조정을 혼탁하게 했으므로 이를 바로잡도록 상주하였다. 그 뒤 성균관전적으로 옮겼으나, 병으로 관직을 사퇴하고 전원으로 돌아가 출사할 뜻을 버렸다.

그러나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사헌부지평으로 발탁되고, 이어 성균관직강 · 홍문관교리 · 사헌부장령 등을 거쳐 사간으로 승진되었다. 이 때 원종 ( 元宗 )을 태묘(太廟)에 합제(合祭)하려고 하자, 여러 언관들과 함께 강력하게 반대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 삭출(削黜)당하고 향리에 은거하였다. 이듬해 다시 서용되어 병조참의가 되었다가 강원도관찰사에 제수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왕이 남한산성으로 동가(動駕)하자 군사를 이끌고 급히 산성으로 출동, 요새를 점거하고 포를 쏘아 원군이 온 것을 성중에 알렸다. 그가 직접 군사를 독려하고 많은 적을 사살했으므로 적병은 감히 그가 포진하고 있는 동쪽으로는 진출할 수가 없었다. 1642년 관직을 버리고 제천으로 돌아가 초야에 은거하였다.

예조판서 · 공조판서 · 첨중추부사 · 대사간 등에 제수, 여러 차례 소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말년에도 이조와 병조의 판서에 배수되었으나 역시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조석윤(趙錫胤)

1606(선조 39) ∼ 1655(효종 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배천 ( 白川 ). 자는 윤지(胤之), 호는 낙정재(樂靜齋). 응두(應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충( 食 )이고, 아버지는 대사간 정호(廷虎)이다. 어머니는 군수 심은(沈 賻 )의 딸이다. 장유 ( 張維 )^ 김상헌 ( 金尙憲 )의 문인이다.

1626년(인종 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파방(罷榜)되고, 1628년 다시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시강원사서가 되었다. 이듬해 조경 ( 趙絅 ) 등과 함께 호당 ( 湖堂 )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일으키기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한 뒤 헌납^수찬^교리 등을 지냈다.

1635년(인조 13) 감시관(監試官)이 되었으나 과장(科場) 부정사건이 일어나 한때 파직되었다가, 최명길 ( 崔鳴吉 )의 추천으로 다시 조정에 돌아왔다. 1636년 병자호란 직전에는 척화내수책(斥和內修策)을 강력히 주장하고, 그 해 겨울 영남지방의 점병관(點兵官)으로 내려갔다가 호란의 소식을 듣고 여러 영병(營兵)을 모아 싸우게 했으나 실패하였다.

난 후 이조정랑을 거쳐 집의로 있을 때 지난 날 척화인의 죄적(罪籍)에 들지 못함을 여러 차례 상소하여 끝내 파직을 자초하였다. 1638년 한때 진주 · 안변 등지의 수령을 지내고,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교리 · 장령 · 사간 · 전한 · 승지 · 이조참의 등의 청요직을 지내면서, 원손의 심양(瀋陽) 인질을 적극 반대하고 강화도 사절자(死節者)의 부모처자에 대한 구제책의 강구를 주장하였다.

또한, 여러 차례 여러 궁가(宮家)나 아문(衙門)이 차지하고 있던 염분 ( 鹽盆 ) · 어전(魚箭) 등의 혁파로 국가 재정을 충실하게 해야 된다는 등의 많은 업적도 남겼다. 1646년 대사성이 되고, 부제학을 거쳐 대사간이 되었다가 다시 이조참의가 되었다. 1649년(효종 1) 김상헌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양관 대제학이 되어 ≪ 인조실록 ≫ 편찬의 책임을 맡았다.

이어 대사간 · 대사헌을 여러 차례 지냈는데, 1650년 이경억 ( 李慶億 )이 왕에게 여색을 멀리하라고 건의하다가 미움을 사자 이를 적극 신구(伸救)하다가 파직되어 임천 ( 林川 )으로 귀양갔다.

이 후 김육 ( 金堉 ) 등의 신구로 이듬해에 풀려났다. 1651년 동지중추부사 ( 同知中樞府事 )가 된 뒤 대사간 · 동지성균관사 ( 同知成均館事 ) · 대사헌을 거쳐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판서인 정세규 ( 鄭世規 )를 비방하다가 호당(護黨)의 혐의로 영암으로 귀양갔다가 뒤에 강계로 옮겨졌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1653년 대사성이 되고, 곧 이어 대사헌과 좌부빈객 ( 左副賓客 )까지 겸하였다. 그러나 다시 서원리 ( 徐元履 )와 뜻이 맞지 않아 다투다가 종성부사로 밀려났다. 성균관 유생 및 좌의정 이시백 ( 李時白 ) 등의 간청으로 동지중추부사로 전임되어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오래도록 문형 ( 文衡 )을 장악하고 대간의 지위에 있었으며 성균관의 책임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일을 당하여 진언하기를 피하지 않아 때로 왕의 뜻에 거슬려 남북으로 귀양갔으나 소신을 굽히지 않는 이정개결(怡靜介潔 : 온화하면서 조용하고 절개가 있으면서 깨끗함)한 인물로 당시 사림들의 추앙을 받았다.

좌찬성에 추증되고 금천(金川)의 도산서원 ( 道山書院 ), 안변의 옥동서원 ( 玉洞書院 ), 종성의 종산서원 ( 鍾山書院 )에 제향되었다.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저서로 ≪ 낙정집 ≫ 이 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조석주(趙錫周)

1641(인조 19)∼1716(숙종 4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배천 ( 白川 ). 자는 유신(維新), 호는 백야(白野). 홍인(弘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暻)이고, 아버지는 통덕랑 겸행(謙行)이며, 어머니는 한영(韓潁)의 딸이다.

현종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1680년(숙종 6)에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은 장령 ( 掌令 )에 머물렀다. 만년에는 고향에 돌아가 기주(棋酒)를 즐겼고, 사람됨이 단정하고 겸손하였으며, 파당을 미워하고 청렴함을 중시하였다.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백야기문 白野記聞≫·≪백야집≫이 있다.

 

조석록(趙錫祿), 조상한(趙相漢)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趙憲(조헌) 선생의 일화.

여우고개

조선 선조 때 일이라고 한다.
조헌이 어렸을 적 이 고개를 넘어 서당까지 공부를 하러 다녔다. 그런데 매일 그 고개에서 여우가 미녀로 둔갑해 조헌을 유혹하려 하였다.
이에 조헌이 글방 선생에게 사실을 고하니, 선생은 그 미녀의 입 안에 있는 구슬을 빼앗아 삼키면 장성해 반드시 대성할 것이라고 하였다.

조헌은 선생의 말대로 미녀와 입을 맞추는 척하다가 그만 여자 입속에 있는 구슬을 빼앗아 냉큼 삼켰다.
그러자 미녀는그자리에서  여우로 변해 울며 도망갔고, 조헌은 그 뒤 과연 큰 인물이 되었다.

1544(중종 39) ∼ 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 유학자 · 의병장.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황(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세우(世佑)이고, 아버지는 응지(應祉)이다.

 

 

 

 

趙憲(조헌)선생의 일화. 배천

 

그는 12세 때 김황(金滉)에게 나아가 글을 배웠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지만,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후에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을 흠모하였다.

그는 강직한 품성을 가지어 불의에 항거하는 정신이 강했으며, 또한 학문과 교육에도 정성을 다하였다.

 

 

 

趙憲(조헌)선생의 일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1,700여 명을 모아 영규 등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다. 이어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으로 향했으나, 전공을 시기하는 관군의 방해로 의병이 대부분 해산되고, 불과 700명의 인원으로 금산전투에서 분전하였다.

적의 수는 몇 배나 되었지만 장엄하게 싸워 적을 잘 막았으나 끝에는 적이 총공세를 가하였다. 이때 주위의 사람들이 선생에게 극력 탈출하기를 청하였으나, 선생은 웃으며 말안장을 풀면서 말하기를, “내가 순절(殉節)할 곳은 여기다. 대장부는 한번 죽을 따름이니, 국난에 임하여 구차히 죽음을 면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서 마침내 북채를 두드리며 독전하니, 사졸들이 앞 다투어 죽기를 각오하고 적에게 달려들었다.

싸움이 끝나자 7백 명은 전몰했고, 호서로 넘어오려는 적 또한 기세가 꺾이어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趙憲(조헌)선생의 일화.

 

그는 옳고 그른 것을 명백히 가리어 부정한 것을 물리치는 의리정신(義理精神)을 숭상했으며, 또한 배움과 행동을 일치시켜야 한다는 학행일치(學行一致)의 태도를 투철히 견지하였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난리에 임하여 목숨을 바치어 나라를 구하는 충절의 정신으로 드러났다. 무엇보다 주의할 점은 그는 이지함의 농업과 수공업 및 수산업을 장려해야 한다는 주장을 수용하였으며, 이것을 근거로 국정을 개혁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의 개혁사상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朴齊家(박제가)는 그의 저서 북학의에서 조헌을 존숭하고 趙憲(조헌)을 계승해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본다면, 조헌은 현실과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정신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출처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5

台(태)

31

濬(준)

37

植(식),相(상)

26

金(변)

32

 

38

炳(병)

27

源(원)

33

煥(환)

39

培(배)

28

根(근)

34

在(재)

40

錫(석)

29

增(증)

35

鎭(진)

41

淵(연)

30

鐘(종)

36

浩(호)

42

模(모)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배천 조씨(白川趙氏)는 남한(南韓)에 총 14,312 가구, 58,59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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